샤먼 10 - 전동차로 정성공을 기리는 호월원을 보고는 산치우티엔 마토우 부두에!
2025년 3월 8일 샤먼에서 구량위 (鼓浪嶼 고량서) 섬 산치우티엔 마토우 (三丘田 马头)
에 내려서 전동차를 타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섬을 3분지 2쯤 돌아 숙장원에서
내려서는 언덕을 올라 일광암을 구경하고는 내려와 해수욕장을 거쳐 숙장원을 구경합니다.
대만인 림이가 만들었다는 숙장화원 (菽庄花园) 은 바닷가 언덕에 다리와 연못이 44교등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정원인데다가 피아노 박물관 (钢琴博物馆 강금박물관) 이 2개나 있으니 잘 구경하고는 나옵니다.
누구 여행기에 보니 숙장원 앞의 어느 식당에서 탕수육을 먹었는데.... 새콤하면서도
바삭바삭한게 맛이 있다고 했지만 찾지는 못하고 다시 전동차를 타고 나옵니다.
차가 달리는 도중에 엄청 큰 동상이 서 있는게 보이니 바로 사면구 장주로 3호 (思明区 漳州路3号)
에 자리한 호월원 (皓月园) 으로.... 입장료는 15위안이며 8:00부터 17:30 까지 개방합니다.
호월원 (皓月园) 은 중국의 민족 영웅 정성공 (郑成功) 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공원으로 정성공
기념비랑 (纪念碑廊) 과 황제전(皇帝殿), 그리고 정성공의 조각상등 볼거리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 전동차가 모퉁이를 돌아서 부두에 도착하는데.... 우리가 타고 온 페리가 도착한
산치우티엔 마토우 (三丘田 马头) 는 아직 멀었지 싶은데 벌써 다 왔나 의아합니다.
그래서 쳐다 보니 부두 이름이 구량위 “鼓浪屿 (고량서)” 이니.... 그럼 중국인들만 주로
이용하는 부두로 샤먼에서는 중산로 부두에서 온 배가 대는 깡친마토우
钢琴码头 (gingqin matiu) 인가? 아님 룬두마토우 ( 润杜玛头, Rùn dù mǎ tóu) 인가?
전동차에서 내린 사람은 우리 부부 뿐인 때문인지 전동차 기사가 내리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뭐라고 그러는데.... 짐작컨대 여긴 네가 타야할 부두가 아닌데, 아느냐? 라는 뜻이라....
그래서 생각해 보니 우리가 타는 배가 출항하는 산치우티엔 마토우 (三丘田 马头)
는 여기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갈수 있으니..... 주변을 돌아보고
구경한후 걸어서 가자는 생각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니 기사는 차를 출발시킵니다.
그러고는 왔던 길을 7~8분을 걸어서 모퉁이를 돌아가니 저만치 엄청 큰.... 정말 무지막지하게 큰
정성공 동상과 정자가 보이는데.... 그는 중국의 영웅으로 저기가 바로 호월원 (皓月园) 인가
본데, 고랑서(구랑위)에서 유명한 인물은 정성공과 숙장화원을 세운 림이가 (린얼지아) 라 합니다.
정성공은 명나라 말에 무역업과 해적으로 활동했던 정지룡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이 명나라의 수군 지휘자가 되면서 7세 때 푸젠성 (복건성) 으로 건너와서 난징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1645년 청나라에 의해 난징이 함락되자 부친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황손인 주율건을 가황제로
옹립했으니.... 그 공로로 명나라 황실의 성인 '주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청의 군대가
복건성으로 쳐들어오자, 부친은 명을 배신하였으나 정성공은 명의 가황제를 계속 받들었습니다.
정성공은 12년 동안 뛰어난 조직력과 전략으로 금문과 하문을 중심으로 복건성 일대의 해안에 강한 세력을
구축 하였으며 1659년 10만 대군으로 장강 유역의 해상 원정을 감행했으나 실패하고,
1661년 2만 군을 이끌고 네덜란드 요새가 있던 타이완(대만) 의 안평에 상륙하여 네덜란드군을 축출합니다.
정성공은 대만에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고 지휘하던 군인들과 복건성 주민들을 대만에 정착시켰고 이후
본토를 회복하려 했으나 1662년 6월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정경은 정성공
사후 20여년 동안 대만에서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1881년 사망했고, 대만은 1883년에 청나라에 함락됩니다.
정성공은 중국에서 처음 대만을 개척한 사람으로 신 (神) 이자 전설적인 영웅이 되었으니 청나라는 그에게 '충절'
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대만에 사당을 세우게 했는데, 20세기 들어 반청운동의 원조가 되었고, 민족주의자
들에게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며 현재 대만과 중국 공산당 정부 양쪽에게 추앙을 받고 있답니다.
그리고 여기 샤먼(하문) 시를 마주보는 바다에는 특이하게 생긴 큰 암초가 몇 개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는데.... 보아하니 이게 바로 구량위 (고량서) 섬의 이름이 유래된 바로 그 바위인가 합니다?
고랑서 (鼓浪嶼) 라는 이름은 섬의 남쪽에 있는 바로 이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북소리
같다” 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원래의 이름은 원사주 (위엔사저우, 圓沙州) 였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옛날 “영국영사관 구지” 라고 불리는 웅장하면서도 예쁜 건물의
울타리에 붙어있는 10여장이 넘는 유명한 건물들의 사진을 구경합니다.
구랑위 촬영진열관 (鼓浪屿摄影陈列馆) 은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인 구랑위 수도공사 (自来水公司) 옛 터에
위치해 사진과 영상을 통해 구랑위 역사를 효과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데 찾기가 어려워 포기합니다.
우리가 배를 탈 부두쪽으로 걷다가 만난 큰 광장에는 엄청 큰 문어 모양의 조각상이 보여 놀랍니다?
이런 큰 조각상을 어디서 보았느냐고 하면 첫 번째는 캐나다 오타와에 1880년에 개관한 오타와
미술관 앞에 설치된 거대한 거미이고, 두 번째는 스페인의 빌바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바스크족의 땅인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의 입구에는 제프 쿤스의 설치
미술 Puppy 와 루이스 부르주아 의 그 유명한 거미 MAMAN 가 있는데...
저 거미 는 오타와 미술관, 롯폰기 모리 미술관에 한남동 리움 미술관 에도 있습니다.
2009년에 캐나다와 미국을 배낭여행 하면서 뉴욕에서 로탄다와 타워빌딩으로 이루어진 달팽이 모양의 특이한
구겐하임 미술관을 본적이 있지만 그 분관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더 특이했다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구겐하임은 뉴욕의 본관외에 분관을 냈으니 베를린과 베니스에 이어 철광석 공업화 시대가 지나 사양
도시로 되어버린 빌바오에 3번째로 분관을 세웠는데, 프랑크 케리가 디자인한 미술관 건물이
전시된 미술품 보다도 더 눈에 뛰니 전 세계에서 구름같은 관광객이 찾아오는지라 도시가 살아났다는....
그러고는 계속 걸어오다가 점심 시간도 지만지라 배가 고프니 중간에 식당으로 들어가
메뉴를 보니 자작면이 있기로...... 2년전에 저장성 진화 金华(금화) 에서
먹었던 생각이 나서 그걸 시키고 마눌은 동그랗게 빚은 오뎅을 시켜서 점심을 떼웁니다.
옛날에 진화시(金华市) 에서 먹은 음식의 이름은 金牌 炸醬麵 (금패 작장면) 이었는
데.... 자작면 이라면 우리나라의 자장면 의 원조라고 할수도 있겠는데,
저장성 진화에서는 15위안 했지만 여긴 관광지라 그런지 무려 25위안이나 합니다.
우리나라 자장면과 비슷한 맛이 나는데 중국에서 자장면은 정식 요리가 아니고 사이드 메뉴
라고 알고 있었는데 진화에서는 콩나물과 땅콩에 오이등 채소들을 조금 더 넣었는지
금패 (金牌) 라는 접두어를 붙여서 정식 요리로 내던데 여기는 좀 단순한 음식인가 합니다?
일본 나가사키 중국 화교가 만든게 짬뽕이라면 한국 인천의 중국 화교들이 만든게 자장면 이니 1882년
임오군란 을 진압하러 파견된 청나라 군대의 보급을 위해 들어온 쿨리들은 산동성 에서 왔습니다.
인천항 인근에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화교 공동체 를 만들었으니 산동성의 가정식 작장면 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그후 산동의 복사라는 곳에서 수타 기술자들을 불러오니 이들이 산동의 춘장을
사용해 만든게 자장면인데 자장면이란 이름을 처음 붙인게 인천 차이나타운 식당 공화춘 이라고 합니다.
짬뽕은 나가사키의 중국 화교 천핑순 (陳平順·1873∼1939) 이 만들었으니 그는 1899년 ‘시카이로 (四海)’ 라는
식당을 개업했는데.... 시카이로 4대 사장인 진 마사쓰구 (陳優) 의 저서 ‘짬뽕과 나가사키 화교’ 에 따르면,
핑순은 19세때 중국 푸젠 (福建 복건) 성에서 나가사키로 건너와 옷감 행상으로 자금을 축적해 가게를 열었답니다.
화교와 유학생들의 식생활을 걱정해 고향의 ‘돈니시몐 (湯肉絲)’ 을 떠올리면서 싸고 영양가
높은 짬뽕 을 고안했으니..... 중화 요리의 베이스인 닭 국물에 돼지 뼈로 맛을 낸답니다.
수제면, 육해공과 사계절의 나가사키 식재료를 사용했으며 처음 ‘시나우동 (支那 지나, 중국)’
이라는 명칭이었으나...... 1910년 전후 부터 ‘짬뽕’ 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자 단번에 나가사키에서 사랑받는 대중 요리로 자리 잡았으니 즉, 짬뽕은 일본에서 중국인이 만든
식문화로 핑순이 ‘짬뽕’ 을 상표 등록하지 않은 이유는 “화교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먹어주는 것이 기쁘다” 라고 했는데, 그런 열린 마음이 나가사키 특산품 짬뽕 을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인천에서 자장면을 만든 화교들은 임오군란때 들어왔으니 조선은 중국을 상국으로 모신 때문인지 자주
국방에 힘을 쏟지 않았으니 임진왜란때도 중국에 원군을 요청하니 7년간 연 25만명이 왔는데,
정류재란시 병력은 일본군이 14만이고, 명군은 11만 7천인데 비해 조선군은 불과 3만 8천 이었습니다?
1597년 말에 양호는 5만 8천 명군을 동원해 울산 도산성을 치는데, 2만은 부산에서 올 왜군의 원군에 대비케
하고 마귀 장군의 3만 8천은 조선군 권율 장군의 1만 1천5백과 함께 가토 기요마사의 1만 6천을 공격
했는데, 저 2만(5만?) 명군이 조선군 없이 단독으로 부산 왜성을 공격했으니 명군이 전쟁을 떠 맡은 것이라?
1882년 서울에 주둔한 병사들이 12개월째 월급을 받지못해 빚더미에 올라앉으니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 조정은
13개월째에 쌀 한섬을 지급하는데 민왕비의 척족인 선혜청 당상이 이마저 절반을 착복하고 겨와 모래를
섞어 지급하니 일어난 폭동이 임오군란으로 조선은 자체적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청나라 군대에 진압요청을 합니다.
1884년 친일파들인 김옥균 둥 개화파는 반란을 일으키지만 역시 군사력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으니
사관생도 서재필에 집안의 노비까지 끌러모은게 달랑 50명이라? 해서 일본공사관 경비대
200명에 도움을 요청해 경복궁을 점령후 급하니 서울주둔 조선군 1천명을 동원해 일선 방어선을 칩니다.
일본군은 원세개의 1천 5백명이 1선의 조선군 1천명 방어선을 뚫으면서 치열한 전투로 병력이 많이 상해 기운이
빠지면 2선의 일본군이 나서겠다는 계산이었는데, 쿠데타와 관련이 없이 단순히 동원된 조선군 1천은 청군의
공격으로 몇 명이 숨지자 모두 달아나버리니.... 청군은 단 한명의 손실도 입지 않은지라 일본군은 후퇴해 버립니다.
1894년 동학 농민들이 봉기하지만 화승총 몇자루에 환도 몇 개뿐 대부분은 죽창을 든 농사꾼들인데 서양 대포와
기관포에 신식 서양 총을 가진 조선군이 2차례나 전투에 패하고 전주성이 함락돼 협약을 맺고는 이행하기는
싫으니 뒷구멍으로 몰래 중국 군대에 진압을 요청하자 불청객 일본군이 들어와서 청일전쟁으로 나라는 망합니다.
나라를 지키자면 군대가 있어야 하건만 이를 육성하자면 돈도 많이 들고 상류층이 솔선수범을 해야
하는지라 게을리 하고는..... 조선은 급하면 상국인 중국에 달려가서 울고 불면서 빌면
도와주는지라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으니 전쟁, 아니 정식 전투조차 한번 해보지 못하고 망한 것이라?
고종 황제가 말에 올라 조선군을 이끌고 일본군에 돌격하다가 전사했더라면? 하지만 말을 탈줄
몰랐으니 어쩐다? 정성공을 생각하면서 이런저런 옛일을 떠올리다가 발길을 돌려
산치우티엔 마토우 (三丘田 马头) 에 도착했는데, 배를 타고 다시 샤먼(하문) 으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