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영화제 하면 나에게는 좀 특별한 이벤트다. 아마도, 캐나다에 와서 살게 된 시발점이 바로 칸영화제 출장이 아닐까 싶은데, 나로서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첫번째 출장지가 바로 칸이었다. 말하자면 칸에서 처음으로 서구의 맛을 보았다. 이후 90년대 중반에는 문화부 기자로는 좀 드물게 해외 취재를 많이 했다.
봉준호 감독이 황금종려상을 받은 올해가 72회라고 하는데, 내가 간 때는 49회였다. 그것을 확실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내년이 50주년이라고 광고하는 포스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한국 영화는 본선에 오른 적도 없었고 '젊은 시선'인가 하는 부문에만 들어도 화제가 되었다. 칸이 첫 출장지여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나는 그곳에 가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 그만큼 많이 배우기도 했다. 평론가 최광희가 칸영화제를 깎아내렸다고 비판들을 한다. 진짜로 그랬다면 그는 정신나간 사람이다(그가 방송에서 불러일으켰다는 소란에 대해 쓴 기사를 보았다. 그는 칸을 깎아내린 게 아니라 일부의 이상한 호들갑을 비난한 것이었다. 그도 칸영화제는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칸영화제는, 잘 모르긴 해도, 영화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문화예술 축전일 것이다.
그때 나는 칸에 영화 담당 기자로 갔던 것이 아니었다. 각 신문사 영화 기자들이, 거의 대부분 칸영화제로 몰려가던 시절이었으니, 시사주간지로서는 변별력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나는 영화가 아니라 '도시 이야기'를 쓰겠다고, 그러니까 칸이라는 인구 몇만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가 영화 하나 내세워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에 초점을 맞춰 쓰겠다는 기획안을 냈었다. 영화 담당 동료한테 대단히 미안하게도 내 기획안이 채택되었다. 기대를 전혀 안 하고, 기획안 내라고 해서 냈을 뿐인데 당첨.
나는 그때까지 단편적으로 얻어들은 것을 가지고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만든 기획안이었다. 국내에는 그런 자료가 없었다. 외국 자료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어쓰기가 어려우니, 번호를 매겨 기억나는 대로 적어보면 이렇다.
1) 칸영화제 사무국에서 프레스카드를 발급하니, 내가 쓴 기사 두 건을 영어로 번역해 팩스로 보내라고 했다. 사진은 우편으로 보냈다. 현지에 프레스카드가 떡 하니 준비되어 있었다. 내 이름이 적힌 철제 통에는 영화 홍보자료들로 터져나갔다. 정말 놀라웠다. 프레스카드만 가지면 본선 영화를 상영하는 뤼미에르 극장을 비롯해 크고 작은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꽃잎>을 봤고, 박신양의 데뷔작을 봤다. 본선에 오른 영화도 여러 편 보았으나 기억나지 않는다.
2) 칸은 겉으로는 격조를 내세우고 뒤로는 철저하게 장사를 했다. 영화가 아니라 '영화로 돈버는 도시'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제를 보니, 그런 것이 눈에 막 들어왔다. 최고의 격조를 볼 수 있는 곳은 물론 뤼미에르 극장이었다. 배우들이 레드카펫을 밟는 그곳. 차에서 내려 레드카펫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도열한 사진 기자들이 셔터를 누르기 시작한다. 사진 기자들은 예외없이 검은색 턱시도 차림이다. 턱시도가 아니라도 정장에 최소한 나비넥타이는 해야 한다. 취재할 때 정장을 입을 일이 거의 없었던 한국 문화부 기자로서는 사전 정보가 없었더라면 여기에서 턱 걸린다. 프레스카드고 뭐고 간에 나비넥타이 하지 않으면 뤼미에르 극장 문 앞에서 레옹 닮은 '기도'들이 밀어냈다. 그들도 물론 턱시도 차림이다. 칸의 예술을 감상하려면 예를 갖춰라, 예외는 없다, 뭐 이런 것 같았다.
3) 그런데 말이다, "예술은 무슨 개뿔~"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원래 영화제라는 게 영화 신상품을 전세계에 푸는 영화 시장이다. 시장에 나온 상품들을 바이어들이 와서 보고 골라서 사가는 곳이 바로 영화제이다(북미 최대 토론토영화제는 아예 시상 제도가 없다). 영화사들은 칸 곳곳의 호텔을 빌려 부스를 차리고 바이어들을 맞아 딜을 한다. 그때 심형래 감독이 엄청나게 비싼 호텔에 부스를 차리고 영화를 판다고 했는데, 나는 가보지 못했다. 본심 상영극장인 칸의 심장부 뤼미에르 극장에도 '신상' 영화를 파는 부스가 지하에 있다. 호텔보다 몇배나 더 비싼 돈을 내고 부스를 차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곳을 점령한 장르는? 포르노였다. 그러니까 포르노가 칸에서 가장 고상한 영화를 상영하는 뤼미에르극장의 가장 넓은 부스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4) 그 풍경을 보고, 오~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내 취재를 시작했다. 칸 시청에 가서 도시 홍보 담당자를 찾았다. 젊은 여성이 나왔다. 잘 안 되는 영어로 인터뷰를 했다. 불문과를 나온 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버벅대는 질문에도 놀라울 정도로 친절하게 답했다. 기자들은 온통 영화관에 가 있으니, 시청에 와서 이런 걸 묻는 기자도 없고 하여, 그 공무원은 한가한 것 같았다. 그는 쉽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내게 준 자료를 보니 더 쉽고 명쾌했다. 숫자는 하나도 생각 안 나지만, 인구 몇만의 소도시가 칸영화제 하나로 잘 먹고 잘 사는 건 물론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원화로 환산한 다음, 믿기가 어려워서 동그라미를 여러 번 세었던 기억이 난다. 홍보 담당자는 그런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건물(주로 호텔)들의 모양이 비슷비슷했다. 모두 옛 건물이었다. 신기해 보였다. 어떻게 보존하고 왜 그리 하는가 물었다(좋은 질문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참 좋은 질문^^). 그렇게 해야 칸이 칸답다는 답이 돌아왔다. 건축 규제를 엄격하게 한다고 했다. 그리 하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어버리니까. 옛것을 살리고 지키려는 노력이 대단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큰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듯했다. 그런 노력은 일종의 고객 서비스이다. 그런 서비스는 바로 돈이 된다. 근데, 한국은 아직도 저 모양이다. 목포 하나만 봐도.
5) 영화제 하나로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칸의 해안선을 따라 꽉 들어찬 호텔은 연중내내 손님들로 북적인다. 칸에서 국제행사가 날이면 날마다 열리기 때문이다. 칸은 영화제로 그 작은 도시를 전세계에 광고한 다음, 유명세를 이용해 각종 컨벤션을 유치하고 있었다. 바로 그게 돈이었다. 정말로 정교한 문화산업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 같았다. 다른 축제도 열어 돈을 번다. 영화제만큼 유명한 것이 칸 광고제일 것이다. 그거 아는 사람 몇이나 될까?
6) 영화제 기간, 거리는 마치 성탄전야 명동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조금만 몸이 닿아도 "빨흐동"이라고 했다. 호텔은 물론 식당도 엄청 붐볐다. 영화제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칸영화제는 그런 돈벌이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황금종려상이니 뭐니 하며 고고하게 예술에만 집중하는 듯 보였다.
7) 한국의 문화나 경제 역량에 비하자면, 한국 영화의 칸 석권은 조금 늦은 감이 있다. 그때 칸에서 한국 영화인들을 엄청 많이 봤고(웬만한 감독은 다 만났다. 나중에 부산영화제 조직위원장을 했던 여러번김동호씨도 거기서 처음 봤다. 기자들을 뒤에서 욕하던 정 아무개씨가 인상적이었다. 실험영화제에서 상 받았다는 젊은 감독 두 명도 거기서 만났다), 한국 영화들도 그때 이미 주목되는 듯했다. 반면 지금은 세계 정상에 오른 한국 대중음악은 그즈음 아시아에서도 변방이었다.
8) 그곳에서 만난 영화인들은 "영어 한 마디 못하면서 왜 이렇게들 많이 왔어? 귀찮게시리"하면서 기자들을 욕했다. 자꾸 통역 해달라고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기자들은 "본선에 한 편도 못 올려놓으면서 왜 이렇게들 몰려왔어?" 하고 영화인들을 욕했다. 영화 담당 기자가 아니어서 들을 수 있던 말이었다. 영화인이든 영화 담당 기자든 그렇게 많이 몰려온 것을 보고, 나는 영화쪽이 부러웠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 곧 전성시대가 오겠거니 싶었다. 그 직후 한국 영화는 터졌다. 젊은 사람들은 영화와 영어 외에는 관심들이 별로 없었다.
9) 프레스카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온 어느 주간지 기자는, 나에게 한번만 빌려달라고 이틀을 졸랐다. 하도 귀찮게 따라다녀서 한번 빌려주었다가 그걸 압수당했다. 입구에서 지키는 '기도'들은 진짜 선수였다. 그걸 찾는다고 이리저리 물으며 다녔다.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다. 덕분에 뤼미에르 극장은 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빌려간 놈은 빼앗겼다는 사실만 나에게 알리고 어디로 도망가 버렸다. 프레스카드가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기네가 심사를 해서 발급한 프레스카드만 있으면 어디서고 취재 편의를 최대한 제공했다. 감동 받을 지경이었다. 내가 기자로서 가장 좋은 대접을 받은 곳이 칸이었다. 기자들을 잘 대접해야 자기네를 세상에 널리 알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대접이라고 해봐야 어디서고 복장만 갖추면 접근 제한 안 하고, 프레스카드 가지면 매체 차별 안하고, 정보를 필요로 하는 만큼 무한정 제공한다는 것뿐이었다.
10) 칸에서 마법의 열쇠와 같았던 프레스카드. 그때 받은 감동이 커서 지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래는 그 뒷면. 영화제 파트너라면서 광고를 했다. 적지 않은 돈을 받았을 것이다. 참 꼼꼼하게 돈벌이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11) 영화제에서 기자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먹을 것이 있기는 했다. 프레스센터에 있는 바에서 크로와상과 커피를 주었다. 에스프레소를 처음 먹고 충격을 받았다. 자판기 커피만 마시던 터여서 뭐 이런 게 있나 싶었다. 그때부터 좋은 커피를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커피 책까지 한 권 냈다.
12) 그때 칸 영화제를 본 이후 문화산업 기사를 많이 썼다. 이 분야에 관한 한 프랑스는 세계 최고인 듯했다. 좋은 물건 가져다가 근사하게 포장하고, 손님의 격 또한 한껏 높여주면서 그 뒤에서는 열심히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이런 문화산업이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것이다. 이후에도 보면, 유럽에서 벌어지는 어느 축제고 간에 절대 '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최고의 '예술' 페스티벌(상품)을 만들어내는 데만 집중할 뿐 돈에는 무관심한 척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돈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 그런 시스템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작동된다. 그런 면에서 칸은 세계 최고인 듯했다. 약간의 내숭이지만 내 눈에는 멋져보였다.
13) 숙소에서 맥주를 마셔가며(하이네켄 12병. 놀랄 정도로 싸고 맛있었다) 밤새 기사를 써서 팩스로 보냈다. 물론 도시 이야기, 칸이 영화제 내세워 돈을 벌어들이는 방법, 얼마나 벌어들이나에 대해 썼다. 새벽에 로비로 내려가 호텔 직원한테 기사를 팩스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친절 또한 잊을 수 없다. 칸이라는 도시가 손님들에게 친절하라고 시민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14) 하루 시간을 내어 해변에 나갔다가 문화 충격을 받았다. 그냥 상상하시라. 니스에 갔다가 샤갈미술관, 마티스미술관을 찾았다. 너무 근사해서 넋을 놓고 돌아다녔다. 파리로 와서는 유학 중인 후배들을 만났고. 첫 출장이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 영화는 언제 본선에 오르나, 이런 생각을 했더랬는데,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니~. 봉준호 만세다.
*아래부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