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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넘어서

[스크랩] <지혜명상> - 10. 소농자의 선정 (구계선정) 2편

작성자소농자|작성시간13.02.11|조회수174 목록 댓글 0

 

<지혜명상> - 10. 소농자의 선정 (구계선정) 2편

 

 

* 중간계

 

생시상태도 아니고 수면상태도 아닌 중간상태를 중간계라 이름한다.

 

잠들기 직전인 수면직전상태, 잠든 직후의 수면직후상태, 수면 직전과 직후를 오가는 수면교차상태로 나뉜다.

 

자각몽, 악몽, 가위눌림, 쿤달리니 등 기억에 잘 남는 꿈들이 대부분 이부분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이부분을 꿈이라고 하지만 자각몽의 경우 꿈이라기 보다는 잡념에 가깝다. 즉, 일상의 잡념과 별차이가 없다. 다만 집중도에 차이가 있다. 악몽은 다른 계에서도 꾸기 때문에 설명이 복잡 난해하다. 가위눌림과 쿤달리니(천개의 연꽃잎) 등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어떤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 이부분에 대한 설명은 차후에 좀 더 자세히 거론하겠다. (‘지혜명상 – 8. 몽중일여’, ‘나만의 치료법 – 9. 악몽과의 대결’ 참고)

 

생시상태와 수면상태의 경계인 수면경계면이 있다.(차후 ‘와선’ 에서 다룰 예정)

 

무안계에서의 즐거움이 세간의 괴로움으로 치달을 때 수행자는 (중간계부터는 ‘수행자’ 라는 이름에 문제가 있지만 이야기의 일관성 등을 위해 수행자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우마왕의 마지막 속임수에 빠진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을 통해 무안계를 초월한다. 금강경을 읽는 순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보게 되고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금강경을 읽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슨 뜻인지를 모른다면 관심계를 넘어선 것이 아니다.

 

마음밖에서 마음의 실상을 보고 세상밖에서 세상의 실상을 봄으로써 모든 것이 허상(투영)이고 허망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오직 지혜(반야바라밀) 중 최고의 지혜(금강반야바라밀)만이 허망하지 않고 홀로 남는다. 모든 수행은 반야바라밀을 위한 것이고 반야바라밀은 금강반야바라밀을 위한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다리이고, 지옥을 벗어나는 문이고,  진실을 열어주는 열쇠이고, 착각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자명종이다.

 

금강를 번개, 자른다, 끊는다 등으로 해석한다면 금강이 자르는 대상은 반야바라밀이다. 번뇌는 반야바라밀이 자르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은 금강반야바라밀이 자르는 것이다. 즉, 반야바라밀을 소멸시키는 반야바라밀이 곧 금강반야바라밀이다. 그러므로 금강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 안에 숨어있다. (‘반야심경’ 참고)

 

숨겨두었던 지혜의 검을 버리고 미지의 공포속에 맨몸을 던진다. 시간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간계선정에서 나오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시계 또는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자체가 공포의 대상이다. (‘시간의 정의’ 참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선정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마지막 공포를 넘어서면 비로소 마음의 진실을 보게 된다.

 

새로운 상대 ‘아상’ 을 만난다.

 

무안계까지는 자아가 마음의 신하로 작용하기에 무색계에서 자아를 버리고 마음과의 싸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지만 중간계선정에서 아상을 발견하게 된다.

 

무안계까지는 자아이지만 마음의 실체가 드러난 중간계부터는 아상이라 부른다.

 

마음은 아상으로부터 고용된 사장 같은 것이다.

 

중간계는 선택의 기로이다. 다시 출세간으로 돌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세간에 남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선정을 오갈 것인가를 선택한다.

 

소농자의 경우 우마왕에게 속아도 너무 크게 속아 처자식까지 거느리게 되었으니 향후 10년간은 선택의 기회가 다시 오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므로 이후의 선정은 출세간이 아니라 세간에 머무는 수행자의 입장에서 설명하겠다. (영화 ‘삼사라’ 참고)

 

세간에 남게 되면 사라졌던 본인의 지옥 대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지옥들이 마음속을 가득 메운다. 답답하다. 마음이 되 살아나고 별 것도 아닌 번뇌들이 노골적으로 도전을 한다. 적당한 선정을 오가며 적정선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다.

 

보살도인지 집착인지 구분이 어렵다.

 

가르쳐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결정이 어렵다.

 

반야바라밀에서 얻어진 자유(절대자유)가 세간에 머물면 지극한 즐거움이 따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얻어진 평등(절대평등)이 세간에 머물면 지극한 고통이 따른다.

 

혼돈과 번뇌가 있으니 당연히 다시 반조를 해야 한다. 세간에 머무르니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절대자유가 절대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하심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간계의 덕목은 반조, 자비, 하심이다.

 

(‘공과 무의 차이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참고)

 

 

 

* 심안계

 

심안계부터를 수면상태라고 정한다.

 

수면상태는 일반적으로 낮은잠, 꿈, 깊은잠으로 나누지만 소농자의 선정에서는 수면상태를 중간계 다음인 낮은잠, 낮은 꿈, 깊은잠, 깊은꿈, 심연, 기저로 나눈다.

 

심안계는 수면경계면에서부터 시작되는 낮은잠, 낮은꿈, 깊은잠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수면상태이므로 육안이 작용할 수 없다. 꿈을 꾸면 안구가 움직인다고 해서 육안이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습(버릇)일 뿐이다.

 

비상비비상처보다 더 미세한 생각과 마음이 작용하므로 무안계의 혜안으로는 감지하기 어렵다. 미세한 물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듯이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심안으로 관찰한다.

 

마음을 보는 눈이므로 심안이라 한다.

 

심안으로 생각과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구간이므로 심안계라 이름한다.

 

심안계선정을 사용하여 수면상태에서도 깨어있는다. (‘지혜명상-4.와선’ 참고)

 

낮은잠과 깊은잠에서 심안으로 미세한 생각들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낮은잠은 욕계선정처럼 사념이 많고, 깊은잠은 색계선정처럼 생각이 적다.

 

사념이 집약되어 구체화 시각화 된 것이 낮은꿈이다.

 

자각몽은 꿈속에서 꿈을 꾸는 주체인 ‘나’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며 꿈을 이끌어 나가지만, 심안계선정에서는 일반적인 꿈속에서 꿈을 꾸는 주체인 ‘나’를 꿈밖에서 그 꿈 자체를 자각하는 객관자가 있다. 즉, 꿈속에서 ‘나’를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이 꿈 자체를 자각한다. (‘지혜명상-2. 산책명상’ 참고)

 

수면상태에서의 잡념을 생시상태에서도 발견한다. 그러므로 생시상태와 수면상태를 구분하지 않는다.

 

꿈이 허망한 것이라면 현실도 허망한 것이고, 현실이 진실이고 실체라면 꿈도 진실이고 실체이다.

 

 

 

* 식안계

 

심안으로는 깊은잠까지만 의식할 수 있고 깊은꿈에서는 심안도 잠이 든다. 그러므로 무심안계(심안이 작용하지 않는 계, 깊은꿈) 부터는 식안으로 보아야 한다. (무심안계는 어느쪽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독립시킬 수도 있다)

 

깊은꿈은 낮은꿈과는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낮은꿈과 깊은꿈으로 구분한다.

 

낮은꿈은 이성적인 논리가 많이 작용하고 깊은꿈은 감정이 많이 작용한다.

 

깊은꿈은 현실과 혼동할 정도로 정신작용과 감정변화가 세밀하다.

 

낮은꿈은 깨어남과 동시에 꿈을 꾸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깊은꿈은 꿈에서 깨어나도 꿈을 꾸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에 시간이 걸린다. 경우에 따라서는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을 해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꿈속에서도 꿈인지를 확인했기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 확인을 하여도 확신을 하는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이중꿈, 즉 꿈속에서 꿈을 꾼 경우에는 꿈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생긴다.

 

깊은꿈을 꾸다가 생시로 깨어나는 것이 보통이지만, 꿈속에서 꿈을 꾸는 이중꿈은 깊은꿈에서 깨어나 곧장 생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깊은꿈에서 깨어나 깊은잠을 거쳐 낮은꿈에 들어가 꿈을 이어서 꾼 다음 깨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깊은꿈에서 표출된 잠재된 욕망과 번뇌를 현실에서의 욕망과 번뇌보다 더 중대하게 다룬다.

 

깊은꿈에서부터 심연까지의 구간을 식안계라 이름한다.

 

수면명상의 경우 수면상태의 거의 대부분이(50~90% 이상) 심연구간이다. (심연구간은 너무 넓어서 혹시 다른 무엇이 있는지 탐험 중이다) 마치 바다처럼 물결이 출렁이는 표층을 중간계라고 한다면 바다속 조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상층부가 심안계이고 상층부 아래 미세한 조류의 흐름 또는 간간이 이어지는 조류의 흐름이 있는 곳에서부터 바다의 밑바닥까지(기저 직전까지) 를 심연이라 한다.

 

심연에서는 마음이 작용하지 않고 원시적인 생각만 작용한다.

 

마음도 없고 자아도 없고 객관자도 없이 뚜렷한 의식만이 원시생각(생각 이전의 생각) 을 감지한다. (‘마음도 없고 자아도 없고 객관자도 없이’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고 설명도 어렵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설명하겠다.)

 

원시생각도 없는 깊은 심연에서는 끝을 모르는 어두운 공간속 한켠의 작은등불처럼 밝은 의식만 남아 있다. 윗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간혹, 의식 가까이를 지나는 원시생각이 실지렁이처럼 헤엄치며 지나가는 모습이 의식의 빛에 의해 비추어진다.

 

의식의 빛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식안이라 이름한다.

 

심연으로 갈수록 원시생각이 줄어들고 윗쪽(깊은잠쪽) 으로 갈수록 원시생각이 많아진다.

 

원시생각들이 모여 섞이며 깊는꿈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욕계에서 식안계쪽으로 갈수록 의식이 밝고 맑고 선명하고 뚜렸해진다.

 

 

 

* 식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식되어지는 대상인 원시생각이 있어야 하고 원시생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시생각의 색이 식안에 부딪혀야 한다. (‘창조론’ 참고)

 

의식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식되어지는 대상인 원시생각이 있어야 하고 원시생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원시생각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공간창조론’ 참고)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나머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떤 존재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는 ‘공’ 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 은 관심계를 초월하여 무안계로 들어 설 때 얻어지는 것들 중 하나이다.

 

소농자가 보기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고 하셨다.

 

의식이 없으므로 ‘무의식’ 또는 ‘무의식계’ 라고 이름하여야 하지만 식계에서의 무의식은 심리학에서의 무의식과는 다른 개념이고, 무의식계 또한 반야심경에서의 무의식계는 ‘의식계가 없다’ 는 뜻이므로 식계에서의 ‘의식이 없는 계’ 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므로 기존의 개념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식계라 이름한다.

 

식계 자체는 개념조차도 존재할 수 없지만 수행자가 식계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식안계를 거쳐 생시로 돌아오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식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식계는 최소한 원시생각이 없어진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원시생각이 없어지면 셋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원시생각을 제외한 공간과 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실제로 식계에 들기 직전과 식계에서 나온 직후인 식안계 중 가장 깊은 기저 직전의 심연에서는 공간과 의식만 존제한다. 그러나 이때의 의식은 의식 자체와 의식의 빛이 존재함으로써 셋을 완성한다. 또 다른 경우는 공간과 의식만 존재하는 것을 자의식이 지켜본다. 무슨 뜻이냐 하면 공간과 의식만 존재하다가 의식이 의식의 껍질(허상)만 공간에 남겨놓고 의식 자체는 껍질 밖에서 공간속에 있는 의식의 껍질을 봄으로써 셋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공간과 의식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공간을 선택하여 이름을 ‘공간계’ 또는 ‘공계’ 등으로 정할 경우 ‘공’ 과 관련된 유사한 이름들과의 혼란이 생길 수 있으므로 식계라 이름한다.(‘창조론’, ‘정의’, ‘금강경’ 참고)

 

기저를 식계라 한다.

 

수면명상을 바다에 비유한다면 낮은잠부터 심연까지는 바닷물이지만 기저는 땅이므로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즉, 수면명상을 초월한 곳이 기저이다.

 

기저는 의식되지 않는다. 기저경계면을 넘어서기 직전, 또는 기저경계면을 근거로 논리적으로 유추할 뿐이다.

 

식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선정은 수면명상을 통해 심안계, 식안계를 거쳐야만 들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 또는 이전에 알고 있었거나 가르쳐 주는 이가 있는 경우 등에서는 무안계에서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선정으로 들어 설 수있다.

 

무안계까지는 수행자를 세간으로 끌어 당기는 힘이 강하게 작용하지만 중간계부터는 수행자를 출세간으로 잡아 당기는 힘이 강하게 작용한다.

 

무안계까지는 마구니가 수행자를 세간에 붙잡아두려고 하지만 중간계부터는 마구니가 수행자를 출세간으로 떠민다.

 

무안계까지의 삶의 고통은 수행자를 세간으로 유혹하지만 중간계부터의 삶의 고통은 수행자를 출세간으로 유혹한다.

 

보살도는 수행자의 선택사항이고, 수행자의 보살행은 배우려는 자의 선택사항이다.

 

 

(3편에서 계속)

 

 

                                        2008. 09. 09.            소농자

 

 

출처 : http://cafe.daum.net/sonong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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