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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 산행사진

20221119 소백산 천동캠프,양방산 단양

작성자아름다운죄|작성시간22.11.21|조회수104 목록 댓글 0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그 첫번째 인물이 바로 鄭道傳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동시에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운 그의 일생은 한 마디로 시련과 극복,

혁명과 창업, 쿠데타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대파노라마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정도전은 1342년(충혜왕 3년) 청백리로 형부상서의 지위까지 오른 鄭云敬의 맏아들로 충청도 단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본래 경상도 영주지방에 대대로 살던 향리였으며

증조부 때부터 관직을 지냈다 하나 實職이 아닌 散職에 불과 했다

 

 

그의 집안이 명실상부한 신흥 사대부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정운경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직에 진출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경제적 기반은 빈약하여 정도전도 부친으로부터 노약한 노비 몇 명만을 상속받을 정도였다. 

 

 

소지주의 생활 기반을 가진 정도전을 괴롭혔던 것은 경제적 궁핍뿐만 아니라 모계 혈통의 신분적인 하자였다

 

 

그의 외조모가 승려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처 역시 첩의 딸이었다는 것이다

 

 

이 혈통의 문제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정도전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끊임없는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정도전은 부친이 이곡과 가까운 사이였던 관계로 그 아들인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때 정몽주 · 이숭인 · 김구용 · 박상충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학 자들도 같이 수학하였다.

 

 

이들과는 1370년(공민왕 19년) 부터 5년간 성균관 교관으로 같이 있으면서 매일 성리학에 대해 토론하며

성리학이 융성하는 데 기여하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서로 상반되는 정치적 행로를 걷게 된다. 

 

 

1363년 忠州司錄을 시작으로 비교적 순탄한 출세길을 걸어왔던 그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375년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였다

 

 

당시 권세가였던 이인임 · 경복흥 등이 친원배명정책을 취하자 이에 정도전은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전라도 나주의 居平部曲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귀양과 유랑으로 9년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3년 동안의 귀양생활에서 그를 따뜻이 대해준 사람은 과거의 친구들이 아니라 가난한 부곡민들이었다.

부곡민들의 순박한 인정과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접하면서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이 얼마나 허망 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유배에서 풀려나 각지를 유랑하며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인한 사회 불안,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한 민생의 피폐, 불교의 폐해 등을 직접 목격하면서 그의 가슴 속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과 개혁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게 된다.

 

 

정도전의 삶의 전환점이 된 것은 1383 년 역성혁명의 이상을 품고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咸州 막사로 찾아가 인연을 맺으면서였다.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당시의 상황을 '漢高祖가 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이용하였다”고 비유하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조준 등 급진개혁파와 함께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군사제도를 개편하여 군사지휘권을 장악하였으며,

권문세족의 물적 기반을 붕괴시키기 위한 田制改革을 단행하였다

 

 

정몽주가 이방원 세력에 의해 피살당하는 바람에 위기를 넘기기도 하였다.

드디어 1392년 7월 이성계가 도평의사사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품은 이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국가로 만들려고 하였다.

정치 · 경제 · 철학 · 역사 · 병법 · 의학 · 문학 · 음악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능통했던 그는

새 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새 왕조의 구체적인 틀을

세워 나가는 데 자신의 모든 지식과 경륜을 쏟았다.

 

 

국호를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을 계승하여 옛 조선의 영광을 재현하다는 뜻에서 조선'으로 정하고,

도읍을 개경에서 한반도의 중심인 한양으로 옮기면서 도성의 위치를 선정하고

각 행정구역을 획정하는 등 직접 수도 서울을 설계하였다.

궁궐의 전각, 4대문과 4소문, 행정구역의 이름도 모두 그가 붙인 것이었다.

그 이름들 속에는 도덕적이고 강력한 국가에 대한 그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조선경국전」 · 「경제문감」 · 「학자지남도」 · 「심기리편」 · 「불씨잡변」 · 「고려국사」 등등

그가 남긴 방대한 저술은 탁상공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 백성들의 소리를 담고자 하였으며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려고 했다. 

 

 

정도전은 성리학만을 고집한 경직된 선비가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 이론에 입각해 불교를 신랄히 비판하고 성리학을 조선의 國敎로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대내외적 모순이 중첩된 여말선초의 상황은 철학적인 측면, 修身的인 성격이 강한

성리학만 갖고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성리학에 구애받지 않고

주례 등 다른 사상에서도 해결방안을 찾는 융통성을 보였다. 

 

 

옛부터 “성공하면 충신이요, 실패하면 역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정도전이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혼란스러운 지금,

지도자 누구 하나 미래에 대한 희망과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정도전 같은 참선비가 간절히 그리워지는 것은 단지 필자의 마음 뿐일까? 

 

우체국 사람들 중에서.....

 

단양 양방산 

남한강이 굽이쳐서 도전리를 휘감아 돌아가는 전경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신단양은 충주다목적댐 건설로 수몰된 지금의 단성면에 군청소재지가 있었는데

현재의 상진리와 도전리 일대로 이전하여 단양읍이 되었다.

 

 

 

80년대 초반에 건설된 계획도시로서 주거, 행정, 교통등이 양호하게 건설된 신도시이기도 하다.

양방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신단양은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경북 예천의 물도리동과 같은 모습으로 다가 온다

 

 

또한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금수산과 소백산을 조망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망대에서 신단양 시가지를 양분하는 고개는 상진고개로서 소금정공원이 있는 곳이다

. 좌측의 다리는 상진대교와 상진철교로서

중앙선철도와 국도5호선이 지나가고 주로 주거와 숙박시설이 밀집된 곳이다

 

 

우측의 도전리는 행정타운과 시장 그리고 교육시설이 밀집된 곳이다.

남한강을 가로질러 아치형 철골트러스로 지어진 교량은 고수대교로서

신단양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역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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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救仁寺)는 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절은 소백산 구봉팔문(九峰八門)의 제4봉인 수리봉 밑 해발 600m의 고지

백자동(栢子洞) 계곡의 연화지(蓮花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풍수 명당이라고 한다.

 

 

구인사는 1945년 5월 창건주 상월 대조사가 칡덩굴로 얽어 만든 작은 초암(법당)에서 시작하였다.

1951년 12월 28일 구인사를 천태 교법을 포교할 근본 도량으로 정하였고,

 

 

1966년 8월 30일 애국불교·대중불교·생활불교라는 3대 지표를 세우고 경내 60여 명의 승려와

대중이 함께 모여 천태종의 부흥을 선포하였다.

 

 

1967년 천태종을 중창하였는데, ‘회삼귀일(會三歸一)’과 ‘삼제원융(三諦圓融)’의

천태교관 구현을 종지(宗旨)로 삼고 총무원과 종의회를 구성해 종헌과 종법을 제정하였다.

 

 

사찰의 건물로는 1만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대법당 설법보전(說法寶殿)과

목조 대강당인 광명당(光明堂), 관음전, 천태역대조사전, 수도시설인 판도암,

특별 강원인 설선당(說禪堂), 침식 공간인 향적당(香寂堂), 총무원 청사,

대중들의 수행공간인 인광당, 관성당, 광명당, 향적당, 도향당 등 50여 동이 있다

. 현재 구인사 전각에서는 동시에 5만 6,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1976년에 창건주인 상월 대조사의 금동 좌상을 조성하여 삼보당에 봉안하였다.

1977년에는 경내 산문 입구에 높이 23척의 상월대조사비를 세웠다.

2000년 경내 맨 위쪽에 대조사전을 짓고, 상월좌상을 봉안하였다.

대조사전 뒤쪽 산에 있는 상월 대조사의 묘소는 ‘적멸궁’이라 칭하고 있으며,

사천왕문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청동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구인사에서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연구·보존하는 ‘범음·범패연구보존회’를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영산재를 천태종의 경내 행사로 의식화했으며, 영산재의 뒤풀이인 ‘삼회향 놀이’를 복원하였다.

소백산 일원에 2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녹화사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구인사는 승려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실천을 통해 자립적으로 사원경제를 운영하고 있다

 

 

단일 사찰로는 국내 최대의 신도 수를 보유하고 있으며, 국내 최대 규모의 관음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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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보발재

굽이굽이 단풍길로 유명한 보발재는 가곡면 보발리와

영춘면 백자리를 잇는 고갯길로 해발 540m 위치한 드라이브 명소다

 

 

약 3km 도로변을 따라 아름답게 펼쳐진 단풍은 소백산과의 조화로 찾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 또한 정상에 위치한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보발재의 경치는 관광객 뿐만 아니라 많은 사진작가들도찻아온다...

 

 

저녁노을로 아름답게 물든 도담삼봉을 보고 퇴계 이황은 〈도담삼봉(嶋潭三峰)〉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도담에 떠 있는 세 봉우리, 아름다운 도담삼봉의 수려한 자태에 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도담삼봉의 절경에 심취해 이곳의 빼어난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남긴 이는 수없이 많다.

 

 

도담삼봉은 단양팔경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다.

단양시내에서 제천 방향으로 3km 정도 남한강을 따라가면 맑은 물이 굽이치는

강 한가운데에 세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바로 도담삼봉이다

 

 

기암괴석이 모두 남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중봉)가 가장

높고 각각 남과 북에 낮은 봉우리가 하나씩 자리하고 있다.

중봉은 주봉으로서 장군같이 늠름한 형상을 하고 있고,

남봉은 교태 어린 여인에 비유되어 첩봉 또는 딸봉이라 하며,

북봉은 이를 외면하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어 처봉 혹은 아들봉이라고 한다.

 

 

95 점 ...^^

 

 

0 점  T.T.

 

 

단양군에서 운영하는  천동 오토캠핑장은  가격 30.000. 에

있을것 다있고 범새 뜨거운 물이 나오는 착한 캠핑장이다.

특히 B 싸이트는 은하수와 조용한 힐링을 즐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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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양방산 조망

 

소백산 구인사 조사전

 

 

고기굽는 소리와 빗소리는 외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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