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해밤달에서 퍼 왔어요>
스물 세명의 자녀를 둔 아빠
2000.12. 월
최용덕
11월호 <낮해밤달> 쪽지를 한창 편집하고 있던 10월 12일경에 어느 익명의 독자로부터 두꺼운 책 한 권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책을 꼭 읽어달라는 것과 다른 무슨 부탁이 간절한 마음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가 편집기간이어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또 책이 너무 두꺼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려 840쪽이나 되는, 성경책보다 두꺼운 책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책표지엔 수염이 덥수룩한 저자의 사진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고, 붓글씨체의 <나 주님만 따르리라>는 큰 제목에다 <약초 캐는 목사 장진남의 자전적 고백>이라는 부제(副題)가 위쪽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목사님의 간증집이거나 자서전인 것 같았는데,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분의 자서전이라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부분만 뒤적이다가 읽는 것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두 주간쯤 후에 책을 보낸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그분이 쓰셨던 편지가 얼마나 간절하였던가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꼭 읽겠노라고 다시 약속을 하고는, 정말 굳은 결심을 하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만 하루, 제가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투자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하루동안 책을 손에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마지못해 읽어 내려간 것이 아니라 그 책 속에 그만 깊숙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며 저는 몇 번이고 목이 메였고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책을 다 읽고서도 한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평범한 자서전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탄식과 감격과 기도가 연신 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기록된 주인공의 고난과 아픔이 나의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 내렸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주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책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제 속에서 불현듯이 "이분을 내가 직접 만나 보아야겠다" 라는 마음이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11월 6일 아침, 자매님들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권근학 형제님과 함께 그 책의 저자이신 장진남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책에 나온 주소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차에는 갈릴리마을 가족들이 수확한 고구마를 한 자루 실었습니다. 낮해밤달 쪽지 편집기간이었으나 하루라도 그 주인공을 만나는 것을 지체해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가던 도중에 다시 농협 구판장에 들러 밀가루와 설탕, 냉동 만두, 라면 등을 한 보따리 사서 차에 실었습니다.
원주 귀래면 소재지에서 전화를 드리자 그 책의 주인공이신 장진남 목사님께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그곳을 찾아서 가던 도중에 나오시던 목사님과 조우하였습니다. 검은색 지프에서 멋진 구레나룻 수염이 덥수룩한 한 거구의 남자가 내려 저희가 탄 꼬마 차 티코로 성큼성큼 걸어와 환한 웃음으로 물었습니다. "최 간사님이십니까?" 아, 사진에서 뵌 바로 그 얼굴, 아니 사진보다 훨씬 멋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선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과 인자한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해병대 중의 해병대원, 그저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저돌적인 군인 장진남은 동료와 같이 당한 끔찍한 사고에서 홀로 기적과 같이 살아난 사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제대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나환자 병원과 교도소, 병원 등을 순회하며 열심히 교역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청년 장진남은 어느 날 병원에서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 버려진 처참한 몰골의 한 장애인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병원으로 급히 데리고 가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부모가 버린 아이인데다 얼마 못 살 거니까 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 중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너에게 선물로 주노니, 그는 네 아들이라."
너무나 놀라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그는 결국 그 명령에 굴복하여 그 아이를 숙소로 데리고 와 돌보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성을 따서 '장성민'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늦은 밤, 길거리에서 보자기에 싸여진 채 버려진 한 가련한 여자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파출소로 그 아이를 데려다 주고 돌아서 나오는데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여,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외치자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들을 주었으니 딸도 있어야지!"
그는 파출소로 뛰어 들어가 아이를 끌어안고는 순경에게 외칩니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제가 키우겠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 아이는 정신박약아인데다 앞도 못 보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것이 어느 덧 다섯이나 되고, 그 작은 숙소에서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된 장진남 전도사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어느 주택가 빈 공터에다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장진남은 그 아이들을 자기 호적에다 친자녀로 올립니다. 게다가 점점 식구가 불어나 장진남의 '자녀'는 12명에 이르게 되는데, 상수도 시설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그 비닐하우스 열악한 조건에서 스스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장신박약 아이 열 둘을 청년 혼자서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가며 몸이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일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그의 소문을 들은 주간지 기자들에 의해 취재가 되어 기사가 나감으로써 일시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택가에 있는 그의 <사랑의 집>은 곧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미관상 보기가 안 좋은 데다 자녀들 교육상 안 좋다는 주민들의 항의에 따라 구청에서 철거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청 직원들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풍비박산이 나고, <사랑의 집> 가족들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 앉게 됩니다.
아들의 특별한 삶을 저린 가슴으로 묵묵히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가 틈틈이 모은 돈 400만원을 헌금하게 되고, 장진남은 그 돈으로 사람 출입이 거의 없는 변두리 야산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 419번지) 의 한 흉가를 매입하여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10여년 간 흑염소를 사육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이미 그의 호적에는 무려 스물 세 명의 아들딸들이 올라있게 됩니다.
식구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집을 늘이려 측량을 하던 그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랑의 집>이 남의 땅 일부에 물려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땅주인을 찾으려 7년 간 수소문하였으나 결국 땅주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10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에는 인적이 드물었던 이 야산 인근에까지 도회지가 확장되면서 평당 3000원 하던 땅값이 평당 100만원으로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되고, 1983년 여름 어느 날, 느닷없이 스스로 땅주인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랑의 집> 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집니다. 그 땅주인들은 세무서, 철도청 공무원들이면서도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갑부들이었는데, 당장 집을 비우라고 온갖 협박을 하게 됩니다.
<나 주님만 따르리라> 라는 책의 절반 정도는 이 때부터 장진남 목사와 <사랑의 집> 이 당한 혹독한 시련들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없고 돈 없는 한 청년과 그의 가련한 장애인 자녀들이 돈과 그것에 매수된 권력자들에 의해 어떤 불법과 반인륜적인 방법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유린되고 있는가를 저자는 등장 인물들의 실명(實名)까지 거론하며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1986년 12월 어느 날 장진남 목사는 치안본부 대공(對共) 2반 특수수사대에 불려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불법 감금된 채 다섯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전기고문, 물 고문 등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초죽음이 될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수사관들에 의해 요구된 것은 남의 땅에 불법으로 무허가 집을 지었다고 진술하라는 것과 지금의 땅에서 '병신들'을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날의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인해 장진남 목사는 일평생 고통으로 신음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진통제를 삼켜야 살 수 있는 지경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진남 목사가 자신의 결백을 계속 주장하고 그 땅에서 퇴거하지 않자 온갖 폭력적인 방법들이 끊임없이 자행됩니다. 지주들에 의해 매수된 것으로 보이는 폭력배, 경찰, 검사에 의해 터무니없는 협박을 당하다가 결국 장진남 목사는 구속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투옥되게 됩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그의 결백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1심 재판에서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1990년 4월, 장진남 목사는 불구속 수사라는 어이없는 명목으로 느닷없이 석방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본 <사랑의 집> 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돌보았던 23명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국가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고, 아이들을 되찾으려 했으나 찾아가려면 그 동안 보살펴준 거액의 양육비를 내야 한다는 요구에 결국 겨우 다섯 명만을 찾아 비닐 움막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곧 구청에서 파견된 철거반에 의해 개집까지도 철저히 파괴됩니다. 경찰들도 계속 감시를 하고 괴한들에 의한 폭행과 협박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장진남 목사는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갈 곳을 찾아 유리하던 이들이 찾아든 곳은 지리산 깊은 산 속. 아무도 보지 않는 이 깊은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게 되지만, 그러나 거기서 몇 년 간 장진남 목사는 산나물과 약초와 칡과 버섯을 캐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다섯 자녀를 극진히 돌봅니다. 비록 텐트 안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는 것이 큰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노출되면서 훗날 결국 지리산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지리산 은거 생활 중, 개설해놓은 우체국 사서함을 통해 미국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출국수속을 밟던 장진남 목사는 자신이 출국정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항의를 위해 법원을 방문한 그는 법원 사무실에서 뜻밖에도 자신에게 통고도 되지 않은 2심 재판이 몰래 계획되고 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까닭 없는 출국정지는 풀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어이없는 2심 재판을 통해 또 다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게 되고, 1992년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대법원 상고에서도 진정한 사실 조사도 없이 단지 검사가 올린 서류만으로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집니다.
그 이후 장진남 목사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돈 없고 힘없는 그에게는 정의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에게 채워진 출국정지라는 족쇄도 결코 풀리지 않았습니다.
지리산에서 쫓겨난 이들은 충북 월악산과 강원도 치악산 등 전국 산 속을 전전하다가 약초와 칡을 캐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마침내 인적이 없는 강원도 원주 귀래면 산 속의 땅 얼마를 사서 거기에 움막을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지금의 <사랑의 집>이 바로 그곳입니다.
권 형제님과 저는 저들의 보금자리, 바로 그 움막 안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약초 말린 것과 칡 말린 것으로 가득 찬 거실(?)에선 네 명의 자녀들이 천사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그네들을 맞았습니다. 이미 본래의 나이는 다들 40 전후로 보이는데, 이들은 그저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일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장 목사님께서 제일 먼저 길거리에서 발견하여 데려온 맏아들 '성민'이가 이제는 33년의 세월이 지나 40대의 나이가 되어 앉아있었습니다. 장 목사님께서 "우리 성민이 몇 살?" 하고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아홉 살!"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일평생 나이는 '아홉 살'인 것입니다.
목사님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노라니 읽었던 책 속의 그 기구하면서도 감동적인 사연들이 생각나 자꾸 목이 메였습니다. 목사님을 직접 뵈옵고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한 가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번에 내신 이 책을 더욱 많은 이웃들에게 알리고 소개하리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아니, 그저 소개하리라는 바람 정도가 아니라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그 책을 통해 얻었던 그 커다란 감동과 교훈과 은총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랑의 집> 진입로가 깜짝 놀랄 만큼 말끔하게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여쭈었더니 <사랑의 집> 을 위해 원주시(市)에서 아주 최근에 그 큰 공사를 해 주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비닐 하우스로 만든 움막 바로 뒤에는 커다란 2층집 철골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연을 여쭈니, 지난 여름에 산에서 내려온 물로 <사랑의 집> 이 잠겨서 시(市)에다 청원을 넣은 결과 고맙게도 60평 건축 허가가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 조립식으로라도 2층으로 집을 짓기로 하셨답니다. 그러나 재정 문제가 있어서 우선 골조만 세워둔 상태였습니다.
책에는 스물 세 명의 자녀가 목사님 호적에 올라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지금 자녀가 넷밖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여쭈었는데 목사님의 대답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법적으로 친자(親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 한 명을 찾아오려면 아이가 수용되어 있었던 국가 기관에 지금까지의 양육비 천 몇 백만원을 내야하고, 따라서 나머지 자녀를 다 찾으려면 2억 얼마가 든답니다. 그나마 지금의 네 자녀를 찾는 데도 3천 몇 백만원이 들었답니다. 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참 해괴한 법(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자그마한 자동차라서 많이는 못 싣고 목사님의 책 세 꾸러미를 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열심히 목사님의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저 책을 팔아서 <사랑의 집> 에 물질적인 보탬이나 드리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문서 사역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좋은 글, 귀중한 책을 소개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 <나 주님만 따르리> 는 정말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이들마다 깊은 감동과 도전과 교훈을 얻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제 나는 이와 같은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자 장진남 목사는 두 가지 염원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하나는, 자신이 겪은 천인공노할 사건의 내막을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 땅에서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말아야 하리라는 확고한 신념이요, 다른 하나는, 하루빨리 진상이 밝혀져서 자신의 발에 채워진 족쇄가 풀려 1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는 84세 병든 아버지를 하늘나라 가시기 전에 미국에 건너가 꼭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소망 때문이다."
저자 장진남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계십니다.
"눈물로 50년 세월을 지샌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었건만… 아, 어버이를 언제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가 지금 내게는 없다. 내가 지은 죄가 도대체 무슨 죄이던가? 국가 내란 음모죄? 보안법 위반죄? 반역죄? 강도죄? 절도죄? 사기죄?…
"하긴 나에게도 죄가 없잖아 있기는 있다. 내 늦둥이 정박아 자식들과 산 속에서 토끼를 잡아먹은 죄, 다슬기를 삶아서 밥 말아 먹인 죄, 뱀과 개구리를 잡아서 판 죄, 약초와 산나물을 뜯어서 팔아먹은 죄…
"아무 죄 없이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당하고 유죄 판결까지 받은 전과자가 되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미국에 계시는 돌아가신 어머니 임종은커녕 10년이 넘도록 추도식 한 번 참석하지 못하고, 단 한 분 혈육인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도 출국정지라는 족쇄가 채워져 나는 오늘도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산다.
"나는 용공분자도 아니요, 학생들처럼 데모를 하는 자도 아니요, 학생들을 선동하여 데모를 유발시키는 목사도 아니요, 사상이 불순한 구석이 있다거나 설교할 때 세상 돌아가는 말 한 마디 섞은 적이 없었다. 세상 정치나 권력, 사상이나 이념 따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정박아, 지체 부자유아, 불구아들, 특히나 친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녀들을 데려와 나의 친 혈육까지 포기하고 이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살아온 삶이 내 생의 전부일 뿐이었다."
곤경에 처한 이 '이웃'을 우리 낮해밤달 가족들이 돕는 길이 있을까요?
첫째는, 이 책의 뒤에 있는 서명서에 서명을 하여 모으는 일입니다. 1만 명의 서명이 모아져서 그것을 UN인권위원회에 보낸다면, 그것을 통해 장목사님께 채워진 출국정지가 풀려서 미국에 계신 84세 아버지를 찾아가 뵐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초를 다투는, 가능한 한 속히 풀려야 할 숙제입니다. 병중의 고령의 아버지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명서에 서명하셔서 저희 갈릴리마을이나 <사랑의 집 * 우편번호 220-850 원주시 귀래면 용암 2리 7번지 ☎ 033-764-1230, Fax 033-761-5568> 로 보내주십시오. 서명서를 복사해서 주위 많은 분들에게 서명을 부탁드리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서명서가 필요하시면 갈릴리마을로 요청해 주셔도 됩니다.
두 번째로, <나 주님만 따르리라> 책을 구입해 주시는 일입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10년 넘게 다량의 진통제를 복용해온 탓에 간이 너무 나빠졌고, 그에 따라 당뇨병까지 와서 겉으로는 그처럼 건장하게 보이는 장 목사님은 순간 순간 위기를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험한 산 속을 헤매며 약초를 캐는 일은 지금껏 해 오신 그분의 생계 수단이었으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양육해 올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악화된 몸으로는 너무 과중한 일이 되었습니다. 건축 중인, 가족들을 위한 집을 위해서도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 책이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희 갈릴리마을 사람들은 하고 있습니다. 그저 헌금해 주시는 것보다는 목사님의 책을 구입하여 주시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욱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갈릴리마을이 기쁨으로 동역하겠습니다. 책이 워낙 두꺼워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권당 2만원입니다. 그러나 840쪽으로, 웬만한 서적(평균 가격 8천원)의 세 배 분량입니다. 그리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감동과 교훈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하실 수 없습니다. 갈릴리마을로 신청해 주시면 등기로 여러분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물론 책 가격 2만원에 등기우송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책 대금 전액을 <사랑의 집>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도움에 독자 여러분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 <나 주님만 따르리라> 책 구입을 원하시는 분은 책 대금 2만원을 낮해밤달 후원창구 <국민은행> 계좌로 입금하시고 전화나 우편으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댁으로 보내드립니다.
"너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하며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라. 너는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네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라. 네 마음을 살피시며 너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잠24:11-12)
"너는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고 불행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며, 입을 열어 공정한 재판을 하고,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라. (잠31:8)"
스물 세명의 자녀를 둔 아빠
2000.12. 월
최용덕
11월호 <낮해밤달> 쪽지를 한창 편집하고 있던 10월 12일경에 어느 익명의 독자로부터 두꺼운 책 한 권이 배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장문의 편지가 들어 있었는데 그 책을 꼭 읽어달라는 것과 다른 무슨 부탁이 간절한 마음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가 편집기간이어서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또 책이 너무 두꺼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려 840쪽이나 되는, 성경책보다 두꺼운 책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책표지엔 수염이 덥수룩한 저자의 사진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고, 붓글씨체의 <나 주님만 따르리라>는 큰 제목에다 <약초 캐는 목사 장진남의 자전적 고백>이라는 부제(副題)가 위쪽에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목사님의 간증집이거나 자서전인 것 같았는데, 아직도 생존해 계시는 분의 자서전이라는 것이 마음에 좀 걸렸습니다. 그래서 일부분만 뒤적이다가 읽는 것을 뒤로 미루었습니다.
두 주간쯤 후에 책을 보낸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고서야 아차 싶었습니다. 그분이 쓰셨던 편지가 얼마나 간절하였던가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꼭 읽겠노라고 다시 약속을 하고는, 정말 굳은 결심을 하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그 방대한 분량의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만 하루, 제가 그 책을 처음 손에 든 후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투자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하루동안 책을 손에서 도저히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마지못해 읽어 내려간 것이 아니라 그 책 속에 그만 깊숙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며 저는 몇 번이고 목이 메였고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책을 다 읽고서도 한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평범한 자서전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처럼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탄식과 감격과 기도가 연신 제 입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기록된 주인공의 고난과 아픔이 나의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 내렸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주님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책 마지막장을 덮었을 때 제 속에서 불현듯이 "이분을 내가 직접 만나 보아야겠다" 라는 마음이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11월 6일 아침, 자매님들이 정성껏 싸준 도시락을 들고 권근학 형제님과 함께 그 책의 저자이신 장진남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 책에 나온 주소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차에는 갈릴리마을 가족들이 수확한 고구마를 한 자루 실었습니다. 낮해밤달 쪽지 편집기간이었으나 하루라도 그 주인공을 만나는 것을 지체해선 안 되겠다는 마음이 앞섰던 것입니다. 가던 도중에 다시 농협 구판장에 들러 밀가루와 설탕, 냉동 만두, 라면 등을 한 보따리 사서 차에 실었습니다.
원주 귀래면 소재지에서 전화를 드리자 그 책의 주인공이신 장진남 목사님께서 마중을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그곳을 찾아서 가던 도중에 나오시던 목사님과 조우하였습니다. 검은색 지프에서 멋진 구레나룻 수염이 덥수룩한 한 거구의 남자가 내려 저희가 탄 꼬마 차 티코로 성큼성큼 걸어와 환한 웃음으로 물었습니다. "최 간사님이십니까?" 아, 사진에서 뵌 바로 그 얼굴, 아니 사진보다 훨씬 멋있는 얼굴이었습니다. 선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과 인자한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해병대 중의 해병대원, 그저 목표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저돌적인 군인 장진남은 동료와 같이 당한 끔찍한 사고에서 홀로 기적과 같이 살아난 사건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제대 후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나환자 병원과 교도소, 병원 등을 순회하며 열심히 교역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던 청년 장진남은 어느 날 병원에서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서 버려진 처참한 몰골의 한 장애인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그 아이를 병원으로 급히 데리고 가게 됩니다. 병원에서는 부모가 버린 아이인데다 얼마 못 살 거니까 두고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 중 이런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너에게 선물로 주노니, 그는 네 아들이라."
너무나 놀라 처음엔 완강히 거부하였으나 그는 결국 그 명령에 굴복하여 그 아이를 숙소로 데리고 와 돌보게 됩니다. 아이에게는 자신의 성을 따서 '장성민'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얼마 후 늦은 밤, 길거리에서 보자기에 싸여진 채 버려진 한 가련한 여자 어린아이를 발견하고 파출소로 그 아이를 데려다 주고 돌아서 나오는데 도무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여,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외치자 이런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들을 주었으니 딸도 있어야지!"
그는 파출소로 뛰어 들어가 아이를 끌어안고는 순경에게 외칩니다.
"이 아이는 제 딸입니다. 제가 키우겠습니다. 제가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오는데, 그 아이는 정신박약아인데다 앞도 못 보는 여자아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다 키운 것이 어느 덧 다섯이나 되고, 그 작은 숙소에서 더 이상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된 장진남 전도사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어느 주택가 빈 공터에다 비닐하우스를 치고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장진남은 그 아이들을 자기 호적에다 친자녀로 올립니다. 게다가 점점 식구가 불어나 장진남의 '자녀'는 12명에 이르게 되는데, 상수도 시설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그 비닐하우스 열악한 조건에서 스스로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장신박약 아이 열 둘을 청년 혼자서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가장으로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가며 몸이 으스러지도록 열심히 일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그의 소문을 들은 주간지 기자들에 의해 취재가 되어 기사가 나감으로써 일시적으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택가에 있는 그의 <사랑의 집>은 곧 시련을 당하게 됩니다. 미관상 보기가 안 좋은 데다 자녀들 교육상 안 좋다는 주민들의 항의에 따라 구청에서 철거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청 직원들에 의해 강제 철거를 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보금자리는 풍비박산이 나고, <사랑의 집> 가족들은 졸지에 길거리에 나 앉게 됩니다.
아들의 특별한 삶을 저린 가슴으로 묵묵히 지켜보던 그의 어머니가 틈틈이 모은 돈 400만원을 헌금하게 되고, 장진남은 그 돈으로 사람 출입이 거의 없는 변두리 야산 (서울시 강서구 내발산동 419번지) 의 한 흉가를 매입하여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10여년 간 흑염소를 사육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이미 그의 호적에는 무려 스물 세 명의 아들딸들이 올라있게 됩니다.
식구 수가 늘어남에 따라 집을 늘이려 측량을 하던 그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사랑의 집>이 남의 땅 일부에 물려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땅주인을 찾으려 7년 간 수소문하였으나 결국 땅주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10여년 세월이 흐르면서 예전에는 인적이 드물었던 이 야산 인근에까지 도회지가 확장되면서 평당 3000원 하던 땅값이 평당 100만원으로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게 되고, 1983년 여름 어느 날, 느닷없이 스스로 땅주인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랑의 집> 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집니다. 그 땅주인들은 세무서, 철도청 공무원들이면서도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갑부들이었는데, 당장 집을 비우라고 온갖 협박을 하게 됩니다.
<나 주님만 따르리라> 라는 책의 절반 정도는 이 때부터 장진남 목사와 <사랑의 집> 이 당한 혹독한 시련들이 대단히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힘없고 돈 없는 한 청년과 그의 가련한 장애인 자녀들이 돈과 그것에 매수된 권력자들에 의해 어떤 불법과 반인륜적인 방법에 의해 얼마나 철저히 유린되고 있는가를 저자는 등장 인물들의 실명(實名)까지 거론하며 생생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1986년 12월 어느 날 장진남 목사는 치안본부 대공(對共) 2반 특수수사대에 불려가게 되는데, 거기서 그는 불법 감금된 채 다섯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전기고문, 물 고문 등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초죽음이 될 때까지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됩니다. 수사관들에 의해 요구된 것은 남의 땅에 불법으로 무허가 집을 지었다고 진술하라는 것과 지금의 땅에서 '병신들'을 데리고 조용히 사라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날의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인해 장진남 목사는 일평생 고통으로 신음하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진통제를 삼켜야 살 수 있는 지경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진남 목사가 자신의 결백을 계속 주장하고 그 땅에서 퇴거하지 않자 온갖 폭력적인 방법들이 끊임없이 자행됩니다. 지주들에 의해 매수된 것으로 보이는 폭력배, 경찰, 검사에 의해 터무니없는 협박을 당하다가 결국 장진남 목사는 구속영장도 없이 체포되어 투옥되게 됩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그의 결백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1심 재판에서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습니다.
1990년 4월, 장진남 목사는 불구속 수사라는 어이없는 명목으로 느닷없이 석방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와 본 <사랑의 집> 은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돌보았던 23명의 자녀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국가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고, 아이들을 되찾으려 했으나 찾아가려면 그 동안 보살펴준 거액의 양육비를 내야 한다는 요구에 결국 겨우 다섯 명만을 찾아 비닐 움막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곧 구청에서 파견된 철거반에 의해 개집까지도 철저히 파괴됩니다. 경찰들도 계속 감시를 하고 괴한들에 의한 폭행과 협박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장진남 목사는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갈 곳을 찾아 유리하던 이들이 찾아든 곳은 지리산 깊은 산 속. 아무도 보지 않는 이 깊은 산 속에서 텐트를 치고 짐승처럼 살 수 밖에 없게 되지만, 그러나 거기서 몇 년 간 장진남 목사는 산나물과 약초와 칡과 버섯을 캐다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다섯 자녀를 극진히 돌봅니다. 비록 텐트 안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는 것이 큰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이 노출되면서 훗날 결국 지리산에서도 쫓겨나게 됩니다.
지리산 은거 생활 중, 개설해놓은 우체국 사서함을 통해 미국의 아버지께서 갑자기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출국수속을 밟던 장진남 목사는 자신이 출국정지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항의를 위해 법원을 방문한 그는 법원 사무실에서 뜻밖에도 자신에게 통고도 되지 않은 2심 재판이 몰래 계획되고 있음을 또한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까닭 없는 출국정지는 풀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어이없는 2심 재판을 통해 또 다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게 되고, 1992년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대법원 상고에서도 진정한 사실 조사도 없이 단지 검사가 올린 서류만으로 상고기각 결정이 내려집니다.
그 이후 장진남 목사가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주장하는 과정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돈 없고 힘없는 그에게는 정의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에게 채워진 출국정지라는 족쇄도 결코 풀리지 않았습니다.
지리산에서 쫓겨난 이들은 충북 월악산과 강원도 치악산 등 전국 산 속을 전전하다가 약초와 칡을 캐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마침내 인적이 없는 강원도 원주 귀래면 산 속의 땅 얼마를 사서 거기에 움막을 짓고 정착하게 되는데 지금의 <사랑의 집>이 바로 그곳입니다.
권 형제님과 저는 저들의 보금자리, 바로 그 움막 안으로 안내되었습니다. 약초 말린 것과 칡 말린 것으로 가득 찬 거실(?)에선 네 명의 자녀들이 천사와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나그네들을 맞았습니다. 이미 본래의 나이는 다들 40 전후로 보이는데, 이들은 그저 예나 지금이나 어린아이일 따름입니다. 거기에는 장 목사님께서 제일 먼저 길거리에서 발견하여 데려온 맏아들 '성민'이가 이제는 33년의 세월이 지나 40대의 나이가 되어 앉아있었습니다. 장 목사님께서 "우리 성민이 몇 살?" 하고 묻자 그는 활짝 웃으며 "아홉 살!"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일평생 나이는 '아홉 살'인 것입니다.
목사님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노라니 읽었던 책 속의 그 기구하면서도 감동적인 사연들이 생각나 자꾸 목이 메였습니다. 목사님을 직접 뵈옵고 대화를 나누면서 저는 한 가지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번에 내신 이 책을 더욱 많은 이웃들에게 알리고 소개하리라는 결심이었습니다. 아니, 그저 소개하리라는 바람 정도가 아니라 사명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그 책을 통해 얻었던 그 커다란 감동과 교훈과 은총을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랑의 집> 진입로가 깜짝 놀랄 만큼 말끔하게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기에 여쭈었더니 <사랑의 집> 을 위해 원주시(市)에서 아주 최근에 그 큰 공사를 해 주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비닐 하우스로 만든 움막 바로 뒤에는 커다란 2층집 철골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연을 여쭈니, 지난 여름에 산에서 내려온 물로 <사랑의 집> 이 잠겨서 시(市)에다 청원을 넣은 결과 고맙게도 60평 건축 허가가 떨어졌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보다 안락한 삶을 위해 조립식으로라도 2층으로 집을 짓기로 하셨답니다. 그러나 재정 문제가 있어서 우선 골조만 세워둔 상태였습니다.
책에는 스물 세 명의 자녀가 목사님 호적에 올라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지금 자녀가 넷밖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여쭈었는데 목사님의 대답을 듣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법적으로 친자(親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 한 명을 찾아오려면 아이가 수용되어 있었던 국가 기관에 지금까지의 양육비 천 몇 백만원을 내야하고, 따라서 나머지 자녀를 다 찾으려면 2억 얼마가 든답니다. 그나마 지금의 네 자녀를 찾는 데도 3천 몇 백만원이 들었답니다. 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참 해괴한 법(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자그마한 자동차라서 많이는 못 싣고 목사님의 책 세 꾸러미를 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열심히 목사님의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그저 책을 팔아서 <사랑의 집> 에 물질적인 보탬이나 드리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문서 사역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좋은 글, 귀중한 책을 소개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 <나 주님만 따르리> 는 정말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확신이 드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는 이들마다 깊은 감동과 도전과 교훈을 얻으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제 나는 이와 같은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자 장진남 목사는 두 가지 염원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하나는, 자신이 겪은 천인공노할 사건의 내막을 세상에 알려 다시는 이 땅에서 자신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지 말아야 하리라는 확고한 신념이요, 다른 하나는, 하루빨리 진상이 밝혀져서 자신의 발에 채워진 족쇄가 풀려 1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는 84세 병든 아버지를 하늘나라 가시기 전에 미국에 건너가 꼭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고 싶다는 아주 소박한 소망 때문이다."
저자 장진남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절규하고 계십니다.
"눈물로 50년 세월을 지샌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었건만… 아, 어버이를 언제라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가 지금 내게는 없다. 내가 지은 죄가 도대체 무슨 죄이던가? 국가 내란 음모죄? 보안법 위반죄? 반역죄? 강도죄? 절도죄? 사기죄?…
"하긴 나에게도 죄가 없잖아 있기는 있다. 내 늦둥이 정박아 자식들과 산 속에서 토끼를 잡아먹은 죄, 다슬기를 삶아서 밥 말아 먹인 죄, 뱀과 개구리를 잡아서 판 죄, 약초와 산나물을 뜯어서 팔아먹은 죄…
"아무 죄 없이 뼈가 부서지는 고문을 당하고 유죄 판결까지 받은 전과자가 되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미국에 계시는 돌아가신 어머니 임종은커녕 10년이 넘도록 추도식 한 번 참석하지 못하고, 단 한 분 혈육인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도 출국정지라는 족쇄가 채워져 나는 오늘도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산다.
"나는 용공분자도 아니요, 학생들처럼 데모를 하는 자도 아니요, 학생들을 선동하여 데모를 유발시키는 목사도 아니요, 사상이 불순한 구석이 있다거나 설교할 때 세상 돌아가는 말 한 마디 섞은 적이 없었다. 세상 정치나 권력, 사상이나 이념 따위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정박아, 지체 부자유아, 불구아들, 특히나 친부모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녀들을 데려와 나의 친 혈육까지 포기하고 이들과 같이 울고 웃으며 살아온 삶이 내 생의 전부일 뿐이었다."
곤경에 처한 이 '이웃'을 우리 낮해밤달 가족들이 돕는 길이 있을까요?
첫째는, 이 책의 뒤에 있는 서명서에 서명을 하여 모으는 일입니다. 1만 명의 서명이 모아져서 그것을 UN인권위원회에 보낸다면, 그것을 통해 장목사님께 채워진 출국정지가 풀려서 미국에 계신 84세 아버지를 찾아가 뵐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초를 다투는, 가능한 한 속히 풀려야 할 숙제입니다. 병중의 고령의 아버지께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서명서에 서명하셔서 저희 갈릴리마을이나 <사랑의 집 * 우편번호 220-850 원주시 귀래면 용암 2리 7번지 ☎ 033-764-1230, Fax 033-761-5568> 로 보내주십시오. 서명서를 복사해서 주위 많은 분들에게 서명을 부탁드리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서명서가 필요하시면 갈릴리마을로 요청해 주셔도 됩니다.
두 번째로, <나 주님만 따르리라> 책을 구입해 주시는 일입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오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10년 넘게 다량의 진통제를 복용해온 탓에 간이 너무 나빠졌고, 그에 따라 당뇨병까지 와서 겉으로는 그처럼 건장하게 보이는 장 목사님은 순간 순간 위기를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더욱이 험한 산 속을 헤매며 약초를 캐는 일은 지금껏 해 오신 그분의 생계 수단이었으며 또 그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자녀들'을 남부럽지 않게 양육해 올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악화된 몸으로는 너무 과중한 일이 되었습니다. 건축 중인, 가족들을 위한 집을 위해서도 물질이 필요합니다. 이 책이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저희 갈릴리마을 사람들은 하고 있습니다. 그저 헌금해 주시는 것보다는 목사님의 책을 구입하여 주시는 것이 여러 면에서 더욱 기쁨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일에 갈릴리마을이 기쁨으로 동역하겠습니다. 책이 워낙 두꺼워 가격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권당 2만원입니다. 그러나 840쪽으로, 웬만한 서적(평균 가격 8천원)의 세 배 분량입니다. 그리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감동과 교훈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이 책을 서점에서 구하실 수 없습니다. 갈릴리마을로 신청해 주시면 등기로 여러분 댁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물론 책 가격 2만원에 등기우송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는 책 대금 전액을 <사랑의 집> 가족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겠습니다.
이 두 가지 도움에 독자 여러분의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 <나 주님만 따르리라> 책 구입을 원하시는 분은 책 대금 2만원을 낮해밤달 후원창구 <국민은행> 계좌로 입금하시고 전화나 우편으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댁으로 보내드립니다.
"너는 억울하게 죽게 된 사람을 구출하며 살인자의 손에 끌려가는 사람을 구출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라. 너는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네 책임을 회피하지 말아라. 네 마음을 살피시며 너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어찌 그것을 모르겠느냐? (잠24:11-12)
"너는 자기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변해 주고 불행한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며, 입을 열어 공정한 재판을 하고,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라. (잠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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