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했으나 그는 그 본질을 알았을까?
세상 어디를 가나 사랑, 사랑, 사랑타령이 없는 곳이 없다. 사랑타령은
무소부재했다. 그 중에서 왜 그런지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말하는 기독계열의
사랑타령은 신물이 나게 들어서인지 젤로 듣기 싫다.
로마서는 바울이 쓴 편지글인데, 롬13:10에서 바울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했으나, 바울 자신은 사랑과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랐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이 두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임을
밝히셨기 때문에 앵무새처럼 예수님을 흉내낸 소리에 불과하다 하겠다.
바울이 진정 사랑의 본질을 알고 율법의 본질을 알고 있었다면 무엇보다
예수님이 폐한 율법을 부활시켜서 여자들에게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라고 말하므로써 여자를 마치 태생적으로
지적 저능아요, 불결한 이등인간으로 취급하여 그것이 중세에 끔찍한
마녀사냥의 빌미를 제공하는 일로 연결되도록 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의 본질과 사랑의 본질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남자의
완악함까지 알박아 있었기 때문에 이유없이 여자를 차별하고 억압하고
학대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하여
율법의 폐해짐을 전혀 인정하지 아니했던 유대당원들은 구약시대의
율법에서 남자가 여자와 살다가 싫어지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버려도
된다는 안건을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을 때 예수님 가라사대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허락한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심으로써 오히려 완악한 남자들이 문제임을 질타하셨다.
따라서 율법을 들어 여성차별한 바울도 곧 예수님이 질타하신 유대인 중에
완악한 한 사람일 뿐이다.
바울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편지글을 남겨놓긴 했으나
그 편지글에서 다시
여자들에게는 여전히 펄펄 살아서 차별하고 억압하는 구약의 율법을
존속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흉내낸 입에 발린
헛소리였고 마음은 여전히 완악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과 여자들은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하라는 바울의 말은 앞뒤 말이 맞지 않는 이중 플레이의 가증스런
가르침이 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남녀불문하고 모두 다 바울의 입만
처다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변죽을 울려대고 있다.
예수님도 사실 너희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허락한 것이지 본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 답변도 다만 남녀 인간의 공평한 도덕적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이지 구약제단에서 하나님이
“남자가 여자와 살다가 싫어지면 이혼증서를 써주고 내버려도 된다”
라는 구약의 말씀을 풀어주신 것은 아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성경말씀을 풀어주러 오신 분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전혀 찾아올 수 없는 흑암한 죄인임을
입증시키기 위해 말씀을 비유로만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다.
말씀을 비유로 가지고 오신 분이 어찌 구약 한줄 풀어주실 수 있겠는가?
다만 답답한대로 무지한 인간들의 탐욕과 독선이 잘못되었음을
단순히 도덕적 공평심에서 지적해주신 것이 “너희의 완악함”이었다.
즉 “남자가 …하면 여자를 내버려도 된다” 에 대하여 너희의 완악함이
정답은 아니고, 그에 대한 정확한 정답은 따로 있다.
(이에 대한 정답은 말이 길어지므로 여기서는 밝히지 않겠음)
살펴본 바로 바울과 예수님이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시각과 관점은
다르다. 바울은 여자에 대해서 혹독했고 예수님은 남녀 공평하셨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하셨고,
바울도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므로써 표면적으로는 같은 꼴로
나타나고 있다 하겠다. 즉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말씀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실이든 흉내를 내었든 사랑에 대한 정의는 표면적으로는 같다.
하지만 그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천지차이가 난다. 바울의 사랑은 여성을
아무 이유없이 학대한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사랑을 최대치로 높여 고평가
한다 할지라도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말하는 보편적 인류애를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세상에서 말하고 타종교에서 말하는
보편적 인류애에서 멈추지 않고 훨씬 그 이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은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인류에 대한 박애에서
나온 사랑이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요3:17)”
참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성경지식,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본질이다.
이웃 사랑한다고 노숙자들 밥해주고, 때때로 고아원과 양노원 찾아가고
장애우를 위해 무료봉사하는 등의 여러가지 이웃 사랑은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그런 사랑으로는 절대로 영생까지 얻지는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율법의 대강령으로서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해야 하고
필히 성경지식이 요구되는 사랑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 그렇다면
율법의 강령으로서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성경지식이 요구되는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에덴동산으로 가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최초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지켜 순종하면 영생이고 불순종하면 사망이 되는 율법을 주셨다.
동산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되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다. 순종하여 동산 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으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되므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대한 정답이 된다.
에덴동산이란 말씀의 젖과 꿀이 흐르는 지상세계를 뜻하므로,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신 때를 뜻하고 있다.
저 태고 때의 에덴동산은 없다. 오늘에 대한 기록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기록케 하신 순수예언서가 에덴동산의 기록이 된다.
그러므로 동산중앙이란 예수님의 복음을 받은 복음백성이 성경을 들고
서 있는 자리가 되며, 그 중앙에 있는 금기의 선악나무열매는
바울의 엉터리 복음서신으로 옷을 입힌 기성교단의 주석집들이 된다.
그리하여 큰바벨론이 되어버린 귀신의 교리들이 된다. 오늘날 그뿐이
아니다. 선악과란 자칭 재림주들이 우후죽순으로 창궐해서 바울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시끌벅적하고 더럽고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교리들이 된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나타난다. 바울이 곧 그와 같이 하나님 및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기의 복음을 전한 에덴의 옛뱀이요, 선악과요,
오늘날은 옛뱀의 후손인 용(자칭메시야들, 적그리스도)의 역할까지 맡았다.
나는 바울의 말,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는 말과 예수님의 말씀인
두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강령>
이라는 표면적 동일한 이 글을 올리면서도 그 내용은 천양지판의 차이점을
밝히게 된다. 즉 바울은 동산중앙에 있는 금기의 “선악과”라고 피력하고,
예수님은 동산중앙에 있는 “생명나무” 라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동안 신물이 나게 바울비판을 했던 나인고로
바울의 교리와 하나님 및 예수님의 진리가 완전히 상반되고 있음이
성경에 즐비함을 찾아내는 것은 기독인의 몫으로 돌리고자 한다.
기독인들은 성경을 백독하고 천독을 한다고 자랑하니 잘도 찾아질 것이다.
동산각종나무열매는 무엇이기에 임으로 먹으라고 했는가?
하나님은 구약에서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우리주변을 살펴보라.
기독교와 성경(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와 생명나무)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동산 여기저기에 각종나무열매들인
세상의 학문과 여러 가지 사상과 여타 종교들의 가르침들도 지으셨다.
즉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동산각종나무열매도 하나님이 지으시고
그것들을 임으로 먹으라고 했음을 우리의 이성과 양심이 깨달아야 한다.
그와 같은 모든 열매들이 성경속으로 들어오면 무소부재하신 크신 하나님의
모습이 확연이 드러날 터이므로, 그리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어찌 그리
완벽하게 창조해 가시는지 그 창조의 발걸음을 우리도 따라갈 수 있을
터이므로 임으로 먹으라고 하셨던 것이니 이것이 순종하는 일이다.
이렇게 순종하여 동산각종나무열매를 먹는 일은 곧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얻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내 이웃을 원수처럼 여겨왔다. 원수처럼
타도대상으로 삼을 게 뻔하므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도 했던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렇게 어디든지 아니 계신데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인 “사랑은 율법의 강령” 이라고 하심을 올바로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웃 사랑과 원수사랑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깨닫고자 하고,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고차원적 사랑이며 “영생을 얻게 하는 사랑”이었다.
세상사람들의 도덕과 윤리적 수준에서 외치는 저차원의 사랑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에서 여자는 제외시킴으로서
이 같은 세상의 저차원의 사랑도 하지 못하는 독선자 마쵸였음이 드러났다.
바울은 여자들에 대한 마쵸만이 아니라, 로마시민권자로, 그리고 박학다식한
이방인의 사도로,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진 나르시즘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믿는자 남녀 모두에게도
이미 초림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다 받았다는 메시지를 흔들어대므로써
동산각종나무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리고
그 대신에 동산중앙의 선악과를 따먹도록 사주하는 뱀의 열심히 극했다.
선악과라는 것은 “믿는자 나는 이미 구원받은 선이고,
불신자인 너는(동산각종나무열매는) 지옥에 떨어질 악” 이라고 하는
선악구별심인데, 바울이 곧 이러한 뱀의 선악과를 지금까지 우리에게
먹여온 에덴동산의 옛뱀인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와서는 그 옛뱀이 용(자칭 메시야 적그리스도) 으로까지
승격되어 오늘의 재림 예수님(하나님)이
앉으실 보좌에 올라 앉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했으나 그는 과연 그 말의 참 뜻을
깨닫고 말한 게 아니고, 그것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위선의 말이었다.
오히려 바울은 오늘날까지 뱀과 뱀의 후손 노릇을 해왔으며 그리하여
오직 뱀의 선악과 사랑만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 임을 말한 것이 된다.
기독인들은 성경을 겉으로 읽지 말고 내면의 뜻으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