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또다른 검은 손
허정화를 죽인 범인을 두고 나의 의심은 점점
희숙의 집안에 쏠렸다. 어쩐지 그 집만이 가지고 있는
듯한 음울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류층 집안의 단란한 가족 같은 모습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무엇인가 개운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분위기는 희숙 아버지대의
형제간 비극에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정화가 죽은 것은 어쩌면 그 음울한 분위기 뒤의
무슨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마저
스쳤다.
희숙이 발작하듯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가
나타나는 일도 정상적인 사람의 짓은 아니었다.
밖에서는 명사로 통하지만 집안에서는 수수께끼의
가장인 조철구 변호사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양윤임 여사는 더욱 그러했다. 상류사회의 극성
사모님처럼 보이기도 하고, 타락한 중년 부인의 표본
같기도 했다. 어떤 때는 당당한 여류 사업가로
보이다가도 약한 어머니의 일면이 나타나기도 했다.
무엇인가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조석호, 조윤호 형제는 더욱 그랬다. 특히 조윤호의
행동은 집안 사람 같지 않아 나를 의아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성적이고 차분한 젊은이로
보이다가도 갑자기 모자라는 부잣집 장남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그런 이상한 측면은 조석호가 더했다. 함부로
사람을 대하는 오만함이며 저돌적인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그러나 행동이나
말보다는 오히려 순진한 면이 엿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타입의 남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내 곁에 있을 때는 꼭 고슴도치가 무릎에 앉은
것 같은 불안함이 항상 나를 긴장시켰다.
그 조석호가 뜻밖에 내게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꼭 허정화를 죽인 범인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마침 집에 있었군요. 지금 뭘하시오? 막 샤워하고
들어와 팬티 입는 중이오?"
거침없이 저질스러운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울렸다.
"밤중에 웬일이세요? 그간 별일 없으셨어요?"
나는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요? 별일 많지요. 숙녀를 처녀 감별 해주느라
바빴어요. 근데 을자 씨는 왜 요즘 내 눈에 안
띄어요?"
"용건이 뭐예요. 간단히 말씀하세요. 나 지금
바쁘걸랑요."
"아따, 껴안아 줄 남편도 없는데 초저녁에 바쁘긴
뭐가 바빠요. 그건 그렇고 내일 우리 좀
만나야겠어요."
"예?"
그는 마치 자기 아내에게 명령하는 듯한 무식한
남편 같은 말투를 썼다.
"내일 용인 별장에 갑시다. 아침 열 시쯤 만나 슬슬
가다가 고속도로변서 점심 먹고 우리 아버지 별장에서
하루 놀다 오지 뭐. 요즘 그곳 뜰의 단풍나무도 꽤 볼
만할 꺼고......"
"내일은 좀......"
나는 거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으나 말이
미처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좀은 뭐가 좀입니까? 그럼 내일 10시 롯데월드
커피숍에서 만나요. 시간 지키고...... 을자 씨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섹시한 옷으로 입고
나오시요. 그럼 잘 자요."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딱 끊어버렸다. 언제나처럼
자신 만만한 폭군이었다. 내가 자기에게 무엇이기에
이런 무레한 전화를 한단 말인가?
나는 은근히 화가 났으나 다시 전화를 걸어 거절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허정화의 죽음에 관한
무엇인가를 캐낼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외딴 별장에 단둘이 있게 되면
그 무뢰한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그의 거친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나를
곱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민훈을 떠올렸다.
민훈으로부터 친구인 조석호와 언젠가 용인 별장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금세 민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훈 씨 내일 뭐해?"
나는 그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대뜸 질문부터 했다.
"나? 글쎄...... 근데 밤중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없으면 용인 좀 와 줘."
"용인? 거긴 왜? 우리 속담에 살아서는 서울,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엉뚱한 얘기하지 말고...... 용인 조석호 씨네
별장 알지?"
"별장? 응, 언젠가 가본 일 있어. 용인이 아니고
양지라는 데야."
"내일 그곳에 좀 가보아 줘."
"그곳은 왜?"
"그런 건 묻지 말고. 오후 2시쯤 거기로 좀 가보란
말야."
"아, 무엇 때문에 거길 가야 하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뚱딴지 같은 요구였다.
"어쨌든 그곳에 가야 돼. 이유는 묻지 말고 2시
정각이야."
"나 참!"
"갈 꺼야 안 갈 꺼야?"
나는 일부러 신경질이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알았어. 갈께......:"
이튿날 나는 약속시간보다 15분쯤 늦게 차를 몰고
갔다.
"여기야 여기!"
내가 왁자한 커피숍으로 들어서자 조석호는 여러
사람이 다 쳐다볼 정도의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의 거리낌없는 버릇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조금 창피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와 마주
앉았다.
"빨리 가요. 내 차로 가는 겁니다."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일어섰다.
"그 똥차보다는 내 차가 몇백 배 나을걸."
"듣기 싫어요."
나는 그의 큰 소리를 무시하고 내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
우리가 용인 읍내에 들어가 점심으로 냉면과 갈비를
먹고 난 뒤 양지 별장에 도착한 것은 1시 10분께였다.
가파른 산 중턱 졸졸 흐르는 개울 옆에 별장이
있었다. 붉은 벽돌과 파란 기와가 퍽 유치한 컬러의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었으나 내부는 아주
세련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육중하게 보이는 커튼을
젖혔다. 제법 도타운 가을 햇살이 거실을 비추었다.
조석호는 웃옷을 벗어서 아무 데나 집어던지고는
오디오 스위치를 넣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이
흘러나왔다. 조석호의 모습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이었다.
"저 혹시 허민정이라고 알아?"
조석호는 간이 홈바에 가서 양주와 글래스 두 개를
가져와 따르며 물었다.
"허민정이라구요?"
나는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아 고개를 흔들었다.
"거 왜 죽은 허정화 언니 말야, 시집간 언니......"
"녜, 알아요. 정화 언니 말이죠."
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그냥 언니라고만 했지
이름이 민정인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하하하, 웃겼어."
조석호는 위스키 두어 잔을 스트레이트로 삼키며
혼자 웃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그 여자 남편이 우리과 선배거든. 체육과 나와서
지금 중학교 선생 노릇 하고 있는 박팽수라는
사람이야. 이름이 특이해서 학교 후배들이 박팽년
박팽년 했지."
"그런데요?"
"허민정이 느닷없이 날 찾아왔어."
조석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자기가 그 여자보다
절대적인 우위에서 만났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왜요?"
"글쎄 나하고 술 한잔 하자나. 좋지. 아무리 선배의
이거이긴 하지만......"
그는 이번엔 새끼손가락을 펴면서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조석호는 덥지도 않은데 셔츠까지 벗어 버려 상체의
벌건 맨살이 그냥 드러났다.
나는 그의 잘 다져진 근육질 상체를 흘금
훔쳐보고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보고 있기가
민망스러웠다.
"어이 시원해. 을자 씨도 좀 벗어요.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단추 꼭꼭 잠그고 있을 것 없잖아요."
"가장 불량한 남자가 보고 있는데 보는 사람이
없다뇨. 내 걱정은 말고 얘기나 계속해 봐요."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서 창 쪽으로 걸어갔다.
시계를 보았다. 아직 1시 30분밖에 안 되었다.
"그래서 허민정 씨를 만나 주었지요. 동생 허정화도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허민정 씨야말로 정말 빼어난
미인이더군요. 미인일뿐 아니라 갑자기 정이 팍 드는
그런 모습, 뭐랄까, 고상한 말로 해서 끼가 있는
여자였어요.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레스토랑을 나온
뒤 맥주집으로 또 발걸음이 가지런히 옮겨졌어요."
"그래서요?"
조석호가 슬그머니 일어서서 내 곁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나는 도로 소파로 가서 앉으면서 물었다.
오디오의 전원 교향곡은 벌써 끝나 있었다.
"그래서 진탕 마셨지. 하지만 허민정을 데리고
호텔에 갈 필요는 없었어. 왜냐하면 그녀가 내 선배의
아내라는 것보다는 처녀가 아닌 것이 뻔하니까 감정할
필요가 없었거든. 우리는 호텔 대신 디까룸으로 갔지.
신나게 한판 붙었어. 발바닥에 불이 났지. 이렇게
말야."
그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아 끌며 말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의 거머리 같은 손을 어깨에서
떼어내 뿌리쳤다.
"그래 미인계를 쓴 그 언니의 목적이
무엇이었나요?"
나는 다시 창 쪽으로 걸었다.
"목적. 바로 그것이 있었지. 죽은 허정화의 비밀을
캐려고 한 것이었어."
"예? 정화의 비밀을 캐려고 하다뇨?"
나는 귀가 솔깃해 돌아서서 조석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울퉁불퉁한 근육질 상체는 정말 볼
만했다.
"허정화가 거래하던 은행이 어느 은행이냐,
정화한테 은행 거래에 관한 이야기 들은 것 없느냐 뭐
그런 것이었어요."
"정화가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었나 그런 것을
알려는 것이었나요?"
"글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보단
뭔가 허정화가 감추어 놓은 것을 찾아내려는 것
같았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조석호는 또 슬그머니 내 허리를 껴안았다. 나는
이제 더 피해 다닐 수도 없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얼른 자기 입술을
내 얼굴에 들이밀며 왼손으로 내 목을 껴안았다. 벗은
상체에서 역겨운 남자 냄새가 비위를 거슬렸다.
"우리 점잖게 얘기해요."
내가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이 경고했다.
"여긴 우리 둘뿐이야. 무슨 짓을 해도 비밀이
보장되거든."
그는 내 경고를 무시하고 더욱 세게 목을 죄어왔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으로 그의
어깨를 물어버렸다.
"으악!"
그는 덩지 값도 못한 채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호호호."
나는 그 모양이 우습기도 했지만 통쾌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아이고 어깨야. 피 나는 것 아닌가?"
그는 물린 어깨를 매만지며 엄살을 부렸다.
"강아지만 사람을 무는 줄 알았는데 여자도 남자를
무는군."
조석호는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왕 버린 몸 이대로 물러설 수야 없지 않겠어?
을자 씨!"
조석호는 정말 무슨 결심을 한 듯이 위스키 병을
들고 나팔을 불듯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나는 갑자기 겁이 더럭 났다. 시계를 보았다. 거의
2시가 되었다. 그러나 구세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허민정 씨 부부가 찾는 것은 무엇이었나요? 그들과
허정화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나는 조석호의 관심을 돌려 놓을 양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 건 나도 몰라! 아니 그건 이담에 생각하기로
하고 우리 멋진 시간을 만들자구."
그는 반 병 정도 남았던 위스키를 다 마신 뒤 나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눈동자가 고정된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나는 무서운 공포를 느꼈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오금이 저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오늘 분명히 장을자를 감정해 주지. 처녀인지
아닌지 말야. 준비는 되었겠지?"
그는 얼어붙은 사람처럼 서 있다 무겁게 발을
떼어놓았다.
"야만스런 짓은 싫어요!"
나는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고함을 질렀다.
전번 배갑손이 나에게 행한 횡포보다도 더 무서운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꼈다.
"오늘 일만 잘 되면 우리는 결혼할 수도 있단 말야.
너는 허정화하고는 달라. 허정화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어!"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이 남자가 정화를 죽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온몸을 엄습해 왔다.
"석호 씨, 이러지 말아요. 제발!"
나는 여차하면 꿇어 앉아 빌고 싶은 심정으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석호!"
그때였다. 예정된 기적은 일어났다. 문이 드르럭
열리며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별장 안에 울렸다.
민훈이었다. 그는 정말 때를 맞추어 나타나 주었다.
백마를 탄 기사가 나타난 것이다.
"어? 훈이 너 웬일이야? 야, 너 참 묘한 시간에
나타났군! 얼른 들어와."
조석호는 실망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금방 태도를
바꾸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금까지 한 짓이 순전히
장난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자 슬그머니 화가 났다.
어쨌든 우리 세 사람은 오후 한때를 어색하게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나는 허정화의 언니 부부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견딜 수 없었다. 혹시
그들이 허정화의 죽음에 깊숙히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정화의 주변을 다시 체크해 보았다.
정화는 자취방을 얻어 놓고 있었지만 실제로
생활하기는 희숙이네 2층방에서 했기 때문에 그의
일상 용품은 두 군데로 갈라져 있었다.
몇 권 되지 않는 책과 옷가지 그리고 트렁크,
핸드백 몇 개, 구두 몇 켤레 등 보잘것없는 살림을
남겼다.
당시 그의 모든 유품들은 경찰에서 체크를 다했고
특별히 주목할 만한 무엇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3천만
원의 거액을 배갑손으로 추측되는 인물로부터 받은
것이 뒤에 확인된 정도였다.
나는 평소에 안면이 있는 정화의 언니 허민정을
찾아갔다. 그간의 인사를 나눈 뒤 내가 머뭇머뭇하고
있는 사이에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을자는 우리 정화와 친했으니까 정화가 하던 일은
뭐든지 알고 있겠구나."
그녀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말을 걸었다.
"개인의 깊은 비밀이야 알 수 없겠지만 나한테 숨긴
건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그랬을 거야."
그녀는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며 내 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정화가 평소에 어느 은행을 거래했는지 모르니?"
그녀는 이렇게 말해 놓고는 속이 들여다보인다고
생각했던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뭐 재산을 찾아내자는 야비한 생각 때문에 묻는 건
아니야. 학생이 돈을 예금했으면 얼마나 했겠니,
다만......"
"상업은행 중부지점 통장을 갖고 있었는데요. 가끔
나하고 같이 가서 돈을 찾기도 했거든요."
나는 선뜻 가르쳐 주었다.
"응, 그 통장은 시골 어머님이 가지고 계셔. 그
은행 말고 거래한 곳은 모르니?"
"글쎄요."
"혹시 귀중한 물건이나 서류 같은 것을 어디
맡겼다든지 하는 이야기 들은 것 없니?"
"글쎄요."
"기억을 잘 더듬어 보아."
허민정은 초조해져 입술에 침을 바르면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걔가 간첩 암호문이라도
가지고 있었나요?"
나는 심술이 뒤틀려 쏘아주었다. 핏줄을 나누었다는
형제가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않고 재산 따위나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서 괘씸했기 때문이다.
"아냐. 사람 일은 알 수 없지 않아. 혹시나
해서......"
그녀는 나의 일격에 분명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 부부가 무엇인가 중대한 것을 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 나오며 여러 가지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평소 정화가 그들이 탐내는 물건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것이 정화의 유품 중에 없자 어딘가
감추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거래했던
은행을 자꾸 묻는 것일까?
그렇다. 그 비밀스런 것을 은행 금고에 맡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행에 맡긴다면 돈이 상식적인 대상물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그것은 꼭 돈이라고만
할 수 없었다.
돈 아닌 것도 은행에 예금(?)이 되는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귀중품이나 문서 따위를
은행에 맡기는 제도가 있다는 것을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김종희가
생각났다. 급하게 차를 몰고 나는 그녀를 찾아갔다.
주차하기가 힘들어 한참을 헤매다 겨우 지하 3층에
차를 세우고 은행 지하다방에 종희와 마주 앉았다.
그녀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반가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처음 만나는 셈이었다.
그녀는 곧 시집을 가게 되었다고 함박 웃음을 띠며
말했다. 방송국 PD로 일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면서 그 남자를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참동안 그녀의 너스레를 들어준 뒤 나는 궁금해
하던 것을 물었다.
"은행에는 말야, 돈 말고도 예금이 되는 거지?"
"돈 말고 예금? 음, 뭘 맡길려고 그러는 거지? 그건
예금이 아니라 예수라고 하는데......"
"예수?"
"응, 그리스도란 뜻이 아니고...... 물건이나 문서
같은 것을 돈을 받고 보관해 주기도 하지. 그것을
보호예수라고 해."
"절차가 예금하는 것과 어떻게 달라?"
"응. 돈 아닌 것을 은행에 맡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조금 전에 얘기한 보호예수 제도이고
또 하나는 대여금고라고 해서 은행 지하에 있는 개인
금고의 열쇠를 빌려주는 일이야. 왜 지하철역이나
서울역 같은 곳에 물건 넣어두는 박스가 있잖아. 그것
비슷한 것이야."
"그럼 금고를 빌렸을 때는 키를 가지고 있겠구나.
그 키를 잃어 버린다든지, 당사자가 갑자기
죽었다든지 하면 야단이겠군."
"그야 예금통장 분실했을 때와 같은 절차로 다시
찾을 수 있어. 보호예수를 했을 경우엔
보호예수증서라는 통장 같은 것이 있거든. 그것과
도장을 가지고 와서 본인이나 가족이 확인되면 찾을
수 있어."
"어떤 예금자가 갑자기 죽었을 때 어느 은행에
보호예수나 대여금고를 가지고 있는지 알려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이상한 질문도 한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냥 상식으로 알아두려고......"
"그건 은행에 가서 확인해야 할걸.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는 나의 진의를 몰라 난처한 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