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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6월 5 ~ 6일 교사 연수 나눔

작성자이은송|작성시간26.06.07|조회수49 목록 댓글 9

지난 금요일, 두빛 학부모님들의 배려로 1박 2일 일정의 교사 연수를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교사 연수에서는 춘천의 발도르프 어린이집 두 곳을 탐방하고 루돌프 슈타이너의 저서 "자유의 철학"에 대한 강의를 함께 들었습니다.

 

다른 곳의 발도르프 교육 환경을 탐방하고 그 곳의 선생님들과 교육적 가치관을 함께 나누며 정보를 교류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

 

루돌프 슈타이너의 "자유의 철학" 중 일부 내용을 강의 형식으로 교육받은 것을 공유해 드립니다.

저희들로서도 어려운 내용이였지만 저마다 얻어가시는 것이 있으시길 바라며 소중한 의견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자유의 철학

현대 세계관의 특징 : 자연과학적 방법에 따른 영혼적 관찰 결과

= 슈타이너의 철학적 대표 저서. 과학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설명하는 책.

 

행동을 위한 사랑 속에 살고

나의 의지

타인의 욕구를 이해 속에 살도록 함이

타인의 의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것

자유로운 인간의 근본 원칙이다.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 지각은 사물의 외면을 보여주고 사고(직관)는 사물의 내면(개념)을 가져온다. 이 둘이 우리 마음속에서 ‘표상’을 매개로 결합할 때 비로소 완전한 실재의 인식이 일어난다.

 

우리는 실재를 규명하기 위한 두 범주에 지각과 사고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주체인 우리 자신까지 포함하는 ‘완벽하고 총체적인 실재’(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실재)가 이원적으로 나타나는 원인은 우리 조직에 있다. 인식이 실재의 두 요소를 통해 작업해낸 개념을 기반으로 전체 대상을 조합해서 이원성을 극복해야 한다.

=> 이원성을 사고와 인식으로 극복해야 한다. 관찰과 지각으로 분리(실재와 표상의 분리)를 느끼고 사고와 인식으로 실재는 결국 우리와 연결되어 있다(실재와 표상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원론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볼 때 ‘사실’과 ‘가치’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과 가치가 사실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양극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사람을 두 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어둠과 빛은 두 개의 분리된 요소이지만, 그 두 개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로 통합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원론

- 슈타이너는 ‘실재’가 우리의 감각기관(인식)의 한계로 인해 이중으로 분리되어 우리에게 들어오며 이는 ‘순수사고’를 통해 다시 합일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원론은 완벽하게 상이한 두 세계(단절 되어있는)가 있고 한 세계를 해명하기 위한 원리를 다른 세계에서 찾고 있으며, 이는 이원론이 인식론적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원론자들은 ‘실재와 표상은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주체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실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이원론적 사상가

이원론적 사상가로 ‘칸트’를 꼽을 수 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흄의 ‘경험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헤겔은 칸트를 통해 근대철학을 완성시켰다.

* 이원론적 사상가의 입장

이원론적 사상가들은 우리의 인식으로는 개념 내용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불가지론, 인식의 한계, 무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이자 오류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는 현상에 ‘실재’가 있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이상은 알 수 없으며 현상과 실재는 완벽히 분리(이원화)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내면의 현상일 뿐 그 실재는 알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 칸트와 이원론

칸트 이전에는 대상(사물)이 중심이고 주체(관찰자인 우리)가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칸트는 주체(관찰자인 우리)가 중심이며 대상은 그저 우리의 직관과 사고를 통해 개념화된 표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실재보다는 주체가 중요하며, 대상은 주체와의 관계에서만 현상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 대상을 지각하기 위한 성립조건이 주체에게 있다.

 

또한 확실한 지식은 이성적 지식(데카르트)이나 경험적 지식(흄)이 아닌 과학적 지식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한 과학적 지식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며 철학의 목표가 되었다.

 

칸트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합리론과 흄의 경험론을 모두 비판하면서도 이 둘의 이론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토대를 만들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대해 ‘방안에서 이성적으로 생각만해서는 실제 현실의 경험이 없으면 알맹이 없는 공허한 관념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고, 흄의 경험론에 대해서는 ‘눈으로 보고 겪는 경험만을 중시하면 내일의 해가 뜰지 안 뜰지도 확신할 수 없다. 경험은 늘 가변적이기 때문에 확실한 지식이 될 수 없고, 결국 회의론에 빠지게 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칸트

 

칸트는 앞서 말한 ‘확실한 과학적 지식’의 성립 조건이 ‘주체’에게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종의 ‘필터’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감성(시공간)’과 ‘오성(12가지 범주와 개념)’이다.

‘감성’은 인간이 무언가를 지각할 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지각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는 곧 ‘흄’이 강조한 ‘경험’이 인간에게 들어오는 첫 번째 관문과 같다. ‘오성’은 그렇게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경험적 재료들을 ‘원인과 결과’ 및 ‘실체’와 같은 이성적인 틀로 분류하고 조립하는 역할로, 데카르트가 중시한 ‘이성적 사고유’의 능력을 칸트식으로 재해석 한 것이다.

즉, 칸트는 인간의 감성과 오성이라는 틀로 구성된 지식만이 확실한 지식(과학적 지식)이라고 본 것이다.

 

‘물자체’는 현상계의 배후로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하며 주체에게 나타나기 전의 실재이다.

‘현상’은 물자체가 우리의 인식 틀을 거쳐 우리에게 지각되고 나타난 대상 세계이다.

‘인식주체’는 우리, 즉 주체의 인식능력이며 이에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감성’과 이를 사유하는 ‘오성’이라는 선험적 형식이 있다.

이원론적 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물자체의 내용이 현상(대상)으로 인식되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인식 형식(선험적 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물자체의 내용이 주체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현상(대상)’으로 구성된다.

 

* 이원론의 전제조건

- 대상 : 주체와 별도로 객관적인 실재

- 지각 : 주관적 실재

=> 대상과 지각은 분리되어 있다. , “지각 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경험주의)”

 

이러한 이원론의 이분법적 관점(실재와 현상은 분리되어 있다)과 도구적 가치 강조(자연은 인간의 풍요를 위한 도구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불러일으키며 반사회적인 힘을 강화시킨다.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칸트

진짜 실재는 주체(인간의 의식, 사고)와 완전히 분리되어 바깥에 따로 존재한다. 관념과 경험은 인정하지만 물자체와 주체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영혼의 내용물은 세계의 관념적 재현으로만 본다.

물자체는 절대적(불면)이며, 그 자체로 존속, 분리되어 존재하고 ‘인식의 완전성’은 현상이 절대적 대상과 얼마나 닮아있느냐에 달렸다.

 

*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의 ‘인식의 완전성’에 대한 판단 근거

① 과학적 예측과 유용성의 증명(성공하면 진짜다)

우리가 만든 과학적 지식(현상)이 바깥의 진짜 세계(실재)를 제대로 재현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인간이 계산한 대로 정확히 세계의 법칙 안에서 구성될 수 있는가?

=> 기적 방지 논변 : 우리의 지식이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면, 과학이 성공하는 건 그저 ‘기적’일 뿐인데 우주에 그런 기적은 없다.

 

② 논리적 일관성과 수학(우주의 언어)

인간의 이성이 가진 ‘논리’와 ‘수학’은 인간만의 착각이 아닌 우주 자체의 설계도이다. 머릿속으로 계산한 수학적 법칙과 외부세계의 천체 움직임이 정밀하게 일치할 때 ‘인간의 이성이 외부 실재의 구조를 완벽하게 복사해 내고 있다’고 판단된다.

 

③ 신의 보증(전통적인 해결책)

완벽하고 선하신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인간에게 세상을 완전히 잘못 인식하도록 하셨을리 없다. 신이 보증하셨으니 우리가 이성으로 명석하게 인식한 것은 외부 실재와 반드시 닮아있다.

 

= 이에, 칸트는 관측할 수 없는 실재와 내 생각이 얼마나 닮았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기준을 바꾸자고 선언하였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내 생각과 실재가 닮았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는 모순이 있지만, 칸트는 내 생각과 인간이 공유하는 선험적 틀의 유사성을 확인하면 되기 때문에 이는 확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로이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

-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은 슈타이너의 ‘일원론’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사상 모두 눈에 보이는 현상(경험) 너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본질이 실재한다는 심층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생각(인식)은 실재에 다가가는 통로라고 보았으며, 바스카가 말하는 ‘메타실재’와 슈타이너의 ‘일원론’은 같은 본질을 내포하고 있다. 즉, 사람은 지적인 노력과 사고를 통해 현상 너머의 진짜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만, 비판적 실재론에서는 ‘실험’과 ‘과학적 이론’을 통해 실재에 가까워진다고 보았고 슈타이너는 ‘인간 정신의 확장과 직관’을 강조하며 ‘고도의 정신적 사고’를 통해 실재와 합일해야 한다고 보았다.

 

1. 경험적 영역 : 인간이 직접 느끼고 관찰하는 영역. 바스카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오해 때문에 분열되었다고 보았다,

2. 실제적 영역(Actual) : 인간이 보든 안 보든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 이원성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자 ‘대상을 알려고 노력하고 사고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일어나는 영역.

3. 실재적 영역(Real) : 그 사건을 일으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제’와 ‘인과적 구조’

인간이 끊임없이 실험하고 과학적인 이론을 수정해 나가며 바깥에 있는 객관적인 구조(실재)에 가까워 질 수 있다.

=> 지적인 노력과 사고를 통해 현상세계의 분열(이원성) 너머에 숨겨진 실재(메타실재)의 구조와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슈타이너의 일원론

실재는 하나이다. 실재는 우리의 유기적 조직에 의해 분리되고 이중으로 인식이 된다. 그리고 사고를 통해 통합된다. 순수사고(사고와 사랑)를 통해 이원론에서 비이원론의 세계로 끌고 갈 수 있다. 이 세상은 사랑으로 가득함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공부하는 것이다.

=> 인간의 깊은 사고를 통해 세상의 숨겨진 정신적, 본질적 개념을 완성할 수 있다.

 

* 사고를 통한 개체성의 극복

우리가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놓치는 것들이 있다. 우리 눈이 보지 못한 부분이나 왜곡된 부분을 뇌가 보완하며 우리는 세상을 인식한다. 우리의 관찰과 지각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우리의 사고가 세상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 사고가 세계 전체 내부에 적절한 위치를 각 지각에 할당하여 개체성을 극복한다.

 

* 주체와 객체의 합일

물자체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사고를 발달시키면 물자체를 더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칸트는 ‘실재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인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인식론에 집중하였지만, 이는 ‘있음’의 문제를 ‘앎’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대상을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지만,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것이다.

한 아이가 있을 때, 그 아이가 어떠한 문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 아이의 본질적인 것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 아이의 문제 행동만을 본다면 우리는 그 아이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의 지식(앎)과는 상관없이 그 아이는 그 아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자체와 현상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에 포함되어 있다. 물자체는 존재, 사고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법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대상은 법칙과 합일된 상태로 존재한다.

 

만약 종이책이 변색이 되었다면, 칸트는 그 현상만을 관찰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탐구해야 하며, 우리와 종이책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법칙성을 안다는 것은 종이책 뿐만 아니라 보편적 사고, 개념, 표상, 지각과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는 사고방식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이는 학문적인 이론 등에 주로 접목이 된다. 하지만 학문은 사실과 가치를 통합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순수사고를 통해 세상의 실재에 도달하듯, 도덕적 행동 역시 내면의 자유로운 ‘직관(가치)’과 현실의 ‘상황(사실)’을 하나로 통합할 때 진정한 자유행동이 된다. 믿음과 가치가 사실과 통합될 때 우리는 그 대상의 본질에 다가설 수 있다. 경제를 논할 때 사람들의 고통을 제외하고 논한다면 이는 학문이라고 볼 수 없다.

 

칸트는 자연속의 필연성(인과)은 실재하지 않으며 알 수 없다고 보았다.

슈타이너는 대상(실재)의 건너편에는 자아성이 있으며 지각이 묘사한 것만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자아성의 내면에는 실재의 다른 부분도 발견하는 힘이 있으며 실재를 구성하는 두 요소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정신적인 것이 응축이 되어 물질적인 것이 된다. 자연주의는 관찰, 경험, 물질적인 지각만을 중요시하였지만, 이 건너편에 사고, 자아성이 있으며 이 두 가지가 통합이 될 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식의 충족을 느낄 수 있다.

‘나’의 과제는 두 영역을 조정하여 지각과 사고가 진전하여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누군가 불행하면 나 또한 불행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학습에서도 부분에서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에서 부분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고, 개념을 통해 지각들 간의 인과율, 자연법칙을 표현할 수 있으며 우리는 지각을 통해 주체로서 개체를 마주대한다. 이 세계가 정신적인 것임을 인식하려면 ‘사고’를 해야 하며 세상은 물질과 정신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로서 연결되어 있다. 자연주의는 모든 것이 분절되어 있다. 지각은 연결, 법칙성(인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실재는 실재이며 주체에 따라 실재에 대한 지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실재는 하나이다. 우리가 지각과 사고를 더 발달시켜 나가면 실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개체는 절대적이지 않다. 특정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는 상대적이 된다. 우리의 사고가 어떤 정신적 사고를 통해 분리된 지각을 연관성으로 통합하면 ‘하나(일원론)’라는 의문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식의 한계는 없으며 사고를 통해 이를(분리) 극복해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우주를 구성하는 정신적 원리 그 자체이다. 우리는 정신적 자아가 있는 존재이며, 물자체는 인식할 수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다. 실재는 우리와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동적인 ‘사고’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대상을 깊이 사유할 때, 우주에 흐르는 객관적인 정신(개념)과 인간의 주관이 하나로 합쳐지며 실재 자체에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컵을 올바르게 사유할 때, 우리의 정신은 이미 컵을 존재하게 만든 우주의 법칙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를 분리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인간의 정신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본래 하나였던 실재(컵)가 인간의 감각기관이라는 한계 때문에 ‘감각적 현상(관찰)’과 ‘정신적 본질(개념)’으로 나뉘어져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사고’를 통해 내가 관찰 한 컵의 이미지에 ‘컵의 개념’을 결합하는 순간, 이 두 가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이 하나로 통합되는 순간, 우리는 ‘현상 너머의 진짜 실재(물자체)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이원론자들은 이에 인간이 아무리 깊게 사고를 한다고 한들, 적외선이나 초음파 등의 세계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난 ‘진짜 사물 자체의 실재’를 이성만으로 복원해 낼 수는 없다고 반박하였다. 슈타이너는 인간의 사고 능력을 과신하여 주체와 대상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물리적, 감각적 단절을 너무 쉽게 넘어가 버렸다는 것이다.

 

다만, 슈타이너는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실재’는 우리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인간은 순수사고를 통해 실재의 본질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소감

칸트는 과학적인 예측과 수학적 계산이 아무리 맞아 떨어져도 실질적으로 관측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 무엇도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실재’를 관찰할 때 ‘지각’과 ‘사고’라는 안경을 끼고 보며, 사람은 안경 너머의 진짜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식의 완전성을 위해 실재를 관측할 수 없다. 즉, 칸트는 우리의 지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물자체에 절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는 평소 칸트의 입장에서 더 가까이 생각해 왔지만, 슈타이너의 일원론을 접하면서 정말 사람은 ‘실재’에 도달할 수 없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우리가 ‘컵’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관적인 시선으로도 객관적인 시선으로도 볼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이 곧 나의 현실이 되겠지만 이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며, 칸트의 ‘인간은 인간의 인지능력 안에 있는 것 밖에 보지 못 한다’라는 말에도 동의한다. 우리가 다른 생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없듯이 다른 생물도 우리의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실재라는 것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본질에 대해 알 수 없으니 ‘실재’에 다가서려는 시도조차 무가치 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의 본질은 우리만의 것이겠지만, 그 실재가 물질적인 것만 해당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나는 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어차피 저 사람에 대해 알 수 없어.’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슈타이너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통해 그 사람의 본질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그 대상을 알려고 노력하고 사고하는 과정을 통해 본질에 가까워지는 것이 무가치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슈타이너는 말한다. 내가 내 편견을 내려놓고 깊은 관심과 사고를 통해 상대방의 내면과 행동을 이해하려고 온 마음으로 노력 할 때, 내 주관은 상대방의 본질과 연결되어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고. 이는 곧 정신적인 사랑의 행위이자 영적이고 정신적인 교감의 시작이다.

슈타이너는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으로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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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이은송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강의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안 하면 정리하는데 시간이 더 걸리겠구나 싶어서 하게 되더라고요 ㅎㅎ
    저도 바로 드러눕는 거 좋아합니다..!!
  • 작성자이서엄마 | 작성시간 26.06.08 이게 무슨일입니까 이렇게 어려운 내용을! 고등학교 윤리시간으로 돌아간듯합니다. 아~~함~ (feat.하품). 존경합니다 쌤들
  • 답댓글 작성자박소영 | 작성시간 26.06.08 들으면서도 헤롱헤롱하지만
    그래도 강의를 직접듣는게 좀 낫더라구요
  • 답댓글 작성자이람이엄마 | 작성시간 26.06.09 저도 칸트 나올 때부터 스킵 시전 🤣
  • 답댓글 작성자박소영 | 작성시간 26.06.09 이람이엄마 강의하시는 선생님이 강의를 잘하셔서. 그나마 버텼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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