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98)
"놀랍고 비밀이 많은 사람이구나……."
여전히 숫자를 세며 장마를 몰아치고 있는 백산을 보며 남궁미령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녀가 놀랐다 한들 당하는 본인만 할까.
연신 뒤로 밀리고 있는 장마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강기의 공격이라니. 수십 년 간 강호를 종횡했지
만 지금처럼 개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화려하거나, 복잡한 초식의 공격이라면 말도 안 한다. 지금까지 방
어한 사십 번의 공격은 전부가 같았다. 같은 동작, 같은 위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내상을 입었고, 목으로는 계속하여 피가
넘어오고 있다.
"커-억!"
일순 내기를 끌어올리지 못하자 가슴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머릿속
이 하얗게 변했다. 지금껏 억제하고 있던 유권의 기운이 몸 속에서 폭
발한 것이었다.
고목마공(枯木魔功)을 익혀 웬만한 무기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런
데 무기를 든 자도 아니고 맨손에 당하고 있다니.
"우엑!"
결국 참고 참았던 입이 벌어지며 한 움큼 피를 토해냈고 일순 내기
가 흐트러지고 말았다.
"사십이 초!"
쿠앙!
"크아악! 아-악!"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장마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 첫 번째
비명은 백보신권에 의한 타격 때문에 지른 비명이었고, 목 속에서 터
진 용왕유권의 기운에 의해 두 번째 비명이 흘러나왔다.
쿵쿵쿵궁! 쿵쿵쿵쿵!
두 번째 비명소리를 들으며 물러서는 장마를 향해 백산은 빠르게 내
달렸다. 결코 경공술이 아니었다.
마치 달음질치듯 장마 곁으로 다가간 백산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커
다란 고함을 내질렀다.
"횡소천군(橫掃千軍)!"
"크아악!"
번쩍 붉은 기운이 장마의 무릎을 스치고 싸움의 끝을 알리는 비명소
리가 울렸다.
"다리는 됐고. 뭐가 남았나……. 맞다, 혓바닥! 아-해라! 예쁘게 잘
라 줄 테니까."
혈월의 끝을 장마 입 근처로 가져가며 슬쩍 밀었다.
"사-살려주시오!"
해쓱한 얼굴로 장마는 애원했다. 상관인 하후야가 보고 있다는 사실
도, 단마(短魔)를 나오지 못하게 말린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다만 살고 싶은 뿐이었다.
"걱정 마! 살려 줄 거야. 다리와 혀를 자르고, 무공을 폐한 다음 풀
어줄 거라고."
"싸움은 끝난 것 같은데 그만 하는 게 어떤가!"
"무슨 소리요? 내가 당했다면 이 친구는 다리와 혀를 자르고, 무공
을 폐한 다음 발로 찼을 텐데. 하지만 난 그렇게 야박한 놈이 아니라
서 마지막 발로 차는 것 한 가지는 빼주기로 했소. 그것만큼은 약속하
지요."
"제독 합하!"
"제독?"
장마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백산은 고개를 들었다.
"아들과는 상당히 다르군요."
상대를 보며 슬쩍 미소를 물었다. 허름한 마의(麻衣)에 초탈한 늙은
이처럼 보이는 인물이 서 있었다. 그가 바로 백야교의 원 주인인 백야
하후장설이었다.
"내시도 아니고."
"내시만 동창제독이 되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저 친구는 왜 화를 낸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구려. 물건이 달
린 사람인데 물건이 없다고 해서 화를 내다니. 내가 알기론 보통 그런
경우엔 웃고 마는데."
"그건 왜 그런가?"
하후장설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독동창이란
말이 떨어지면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눈이
마주칠까 봐 조심스럽게 행동하는데.
앞에 있는 녀석은 전혀 그런 면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거야 제독이 초라한 마의(麻衣)를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
오. 옷을 벗고 있던, 마의를 입고 있던 동창제독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없이 사는 걸 숨기고 싶어 이렇게 비단옷을 입고 있
는 나 같은 놈은 누가 시비를 걸면 방방 뜨게 되는 것 아니겠소."
"그런가?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비단옷도 어색하고 관도 어색하
고 포초혜도 어색해 보이니 말이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외다. 하지만 선물 받은 거라서 입지 않을 수
없소. 주는 사람 성의도 생각해야 하니까. 참, 이 놈은 어떻게 처리했
으면 좋겠소. 데리고 가봐야 쓸 일도 없을 것 같은데."
이내 고개를 돌려 혈월 끝으로 장마를 가리켰다.
"죽이고 싶다는 말처럼 들리는구먼. 뒷감당할 자신은 있는가."
"뒷감당이라……. 그거야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거느린 식솔이
있고, 사문이 있는 그런 놈들이 걱정해야할 말 아니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소림 제자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구
먼."
"한때 제자인 적은 있었지만 마음에 안 들어서 도망치고 말았소. 소
림이 죽던 말던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거요. 그런데 이번엔 입맛 당기
는 조건을 제시해서 말이오."
"대환단(大還丹)이라도 준다고 하던가?"
"어찌 아셨소? 하나도 아니고 두 개를 준다는데 거절할 수가 있어야
지요. 조무래기 몇 놈 때려잡는 간단한 일이니. 힘들 것 같지도 않
고."
"간단한 일이라……. 재미있는 친구군. 그런데 이름이 뭔가?"
"맞다, 높은 사람 앞인데 내 소개를 안 했네. 이 놈처럼 머리가 돌
아버린 놈들을 때려잡는 거북이라 하여 귀광두(龜狂頭)라 불리고 있소
이다."
"오라! 자네가 그 유명한 귀광두였군."
두 번째 놀람. 북황련에서 듣기론 귀광두는 무공이 별 것 아니라고
하였다. 역시 그 사람을 보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하라 하였던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진각과 백보신권 그리고 용왕유권을 가지고 칠사의 일
인인 장마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대단한 자가 바로 귀광두였던 것이
다.
"참! 그 놈 처리를 물었던가. 죽이게!"
장마를 바라보던 하후장설은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 잘했소이다!"
번쩍!
일말의 여유조차 주지 않는 행동. 번쩍하고 붉은 광채가 일렁이자
장마의 목은 몸통과 분리되어 버렸다.
주인을 원망할 틈도 없이 목을 잘라버린 것이었다.
오히려 놀란 사람은 죽이라고 하였던 하후장설이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장마의 목을 잘라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던 탓
이었다.
"오늘의 만남 즐거웠네."
한참 동안 백산을 주시하던 하후장설은 이내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남궁미령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더니 하후야를 데리고 일행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즐겁기는 자식! 마음속 깊이 묻어두고 있으면서. 하여간 겉으로 웃
는 녀석들 치고 뒤끝이 깨끗한 놈은 내 한 명도 못 봤다."
"그런 걸 잘 아는 녀석이 동창제독의 염장을 질러?"
남궁미령이 백산 가까이로 다가오며 말했다.
"사과를 받아냈으면 됐지 뭘 그래요. 하여간 애새끼들은 쫓아다니면
서 보살펴야해요. 남궁창, 내가 배에서 그랬지. 네가 잘못하면 여기
누님이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그 말 대갈통 속에 꼭 심어둬라! 살수
야, 가자."
유몽의 어깨를 툭 친 백산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앞서 나갔다.
"가족도 없고, 사문도 없고, 혈혈단신인 사람만 큰소리 칠 수 있
다……."
백산의 뒷모습을 보며 남궁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거기서 한가지가 추가되어야 한다. 큰소리 칠만한 실력!"
다시금 들려오는 백산의 목소리에 남궁창은 부르르 떨었다. 처음부
터 장마가 그의 상대가 아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야 알겠느냐? 강호란 세가와는 다르다. 동창제독인 하후장설만
해도 나와 비슷한 경지였다.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강자일 수도 있
다."
"설마……."
남궁창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사황(四皇). 현 중원 제일인이라
불린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한 강자라니.
결코 자신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
"강호란 그런 곳이다. 겉으로 드러난 자들보다 드러나지 않은 강자
들이 더 많은 곳이다. 이번에 많이 배웠으면 좋겠구나. 귀광두 동생,
같이 가자!"
남궁창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던진 남궁미령은 백산을 부르며 몸을
날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반나절을 걸은 백산 일행은 해질녘이 돼서
야 숭산에 도착했다.
태실산과 소실산 사이의 20리 계곡엔 수많은 천막들과 급조된 건물
들이 두서 없이 들어차 있었다. 일반 무인들은 주로 천막을 이용했고,
무림세가의 가주 정도 되는 자들이거나 그에 준하는 지위를 가진 자들
은 새롭게 지어진 건물로 안내되었다.
많은 이들이 모일 것을 대비하여 소림사 경내가 아닌 외부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이번엔 비무에 중점을 둔 모양입니다?"
계곡 가운데, 건물들로 둘러싸인 단을 가리키며 백산은 남궁미령에
게 물었다.
"아마 그렇게 될 거다. 천붕회의 힘을 보여주는 자리로 마련했으니
까. 천붕회 소속 문파들은 다른 곳의 도전을 받을 예정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천붕회 소속 무인들끼리 승부를 가리기로 했지."
"천붕회 소속 무인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별수 있겠냐. 북황련과 남천벌에게 중립지대를 양보해야지."
"커억!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 도박이네?"
"복불복(福不福)이지. 그런데 사부가 누구야?"
조금 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말해 주거니 하고 묻지 않았는
데 녀석은 끝까지 그 점에 대해선 일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내심 궁금했다. 소림에 대해선 소상히 알지는 못하지만 귀광두 같은
무인을 길러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 년마다 천붕회를 개최했던 자신들이 아니던가.
"사부요?"
백산은 뜨악한 얼굴로 남궁미령을 쳐다보았다. 소림 제자라 했던 것
도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다. 만일 남궁미령이 없었다면 광마도 소살우
아들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동생이라 부르며 살갑게 대하는 그녀에게 이제 와서 '조카였습니
다.' 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왜 아까 하후장설과 이야기 할 때 소림사에서 도망쳤다고 했잖아."
"노인네가 귀는……. 요몽……."
"무슨 소리냐, 네가 정말 요몽 그자의 제자란 말이냐?"
느닷없이 남궁미령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터져나왔다.
"제자는 아니었고 십 년 정도 수발을 들었는데 결국 제가 도망치고
말았지요."
요정은 그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였다. 어찌 되었건 그도 만나야 할
사람중의 하나다.
"그랬더냐. 그도 불쌍한 사람이다. 아비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그렇
게 된 사람인데……. 들어가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며 남궁미령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십 년 세
월, 그 당사자들은 대부분 죽었고, 이제 남은 사람은 다섯 명.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일행은 비무대를 지나 소림사 산문 어귀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