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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오백년 1, 2 , 3 대왕 ( 태조, 정종, 태종)

작성자송재동|작성시간12.06.26|조회수34,233 목록 댓글 2

 

 

 

조선왕조 519년.

    

 

 조선왕조 제 1대왕 - 태조 이 성계(등극 1392 ~ 재위기간 06년 02월)

 

 

 

 

                                                                                     

                                                                               태조대왕(이성계)의 어진

 

 

1. 태조 이성계의 등장과 그의 활약상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 지금의 간도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된뒤부터 차차 그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증손자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해서 이자춘은 둘째아들 이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훗날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년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한반도는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는 시기였으며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여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 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부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 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 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대단한 맹장이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지위가 올라갔으며 1362년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 에는 동북면 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2.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나라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그리고 이 해 4월 고려의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그리고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는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한다.

 

그러나 5월, 큰 장마로 인해 물이 급격히 불어난 상황이 발생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4 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

        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한 뒤 압록강의 위화도 에서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한다.

 

개경으로 진격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나라의 연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이후 이성계 일파는 조민수가 세운 아홉살의 창왕을 폐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세웠으며 또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왕과 창왕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전라로 방출되었으며, 이로써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이성계는 3년 뒤인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서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3. 이성계의 조선개국

 

 

최초에는 고려의 왕으로 등극했던 이성계는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추어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 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긴 그는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 정책을 병행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 아들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일곱째아들 방번을 함께 살해해 버린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 2년 뒤인 1400년, 5째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의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주(함흥)에 머물렀다. 이 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차사를 보내면 그 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 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4. 흥미로운 일화들

 

 

1, 돼지 눈에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되기 이전부터 무학 대사와 인연이 깊었다.

태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힘들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으면 무학 대사를 찾아가곤 했다.

 

어느 날 태조가 오랜만에 무학 대사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대사에게 농담을 던졌다.

“스님은 꼭 돼지같이 생겼습니다.”

 

무학 대사는 웃으면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부처님처럼 생겼습니다.”

 

이성계는 자신이 아무리 한 나라의 왕이지만 스님께 지나친 농담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말했다.

 

“저는 스님을 돼지에 비유했는데, 어찌 스님께서는 제게 부처님처럼 생겼다고 칭찬하십니까?”

 

 

무학 대사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법입니다.”

 

 

-!!!!!!!!!!!!! - 단순한 대화이지만, 매우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내용입니다...

 

 

 

2. “연대”(筵臺)가 맞아야 산다.

 

 

태조이성계는 부인이 둘 있었다.

향처라고 해서 고향에 두고온 부인 한씨와 경처라고 해서 개경에 있는 강씨다.

 

 

이성계의 슬하에는 아들이 여덟이 있었다.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은 방우,방과(芳果,후에 제2대왕 정종定宗),방이,방간,방원(芳遠.후에 제3대왕 太宗).방연 등 여섯이다.

 

 

계비 강씨의 소생은 방번,방석이였다. 누구를 왕세자로 세우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젊고 예쁜 계비강씨는 이성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자기의 소생 방번,방석중에 세자가 책봉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드디어 막내 방석을 왕세자로 삼으니 강씨와 지지자 정도전은 온세상이 다 손아귀에 들어온 것 같았다. 반면, 찬밥 신세가된 한씨소생의 장성한 아들들은 죽상이 되버렸다.

 

그중에서도 아버지를 도와 조선개국에 가장 공이 많은 방원은 불평이 젤 많았으며 하루 하루가 모래씹는 맛이였다.

 

그런던중 태조7년 (1398) 8월에 정도전이 태조이성계의 병을 빙자하여 왕자들을 경복궁에 모두 불러모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러한 정보를 먼저 입수한 방원은 당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석,방번을 차례로 죽이니 이것이 곧 1차왕자의 난이다.

이성계는 이에 매우 상심하여 정사에 뜻을 버리고 왕위를 둘째아들 방과에게 물려주니 그가 2대왕

정종이다.

 

 

정종 2년 1월에는 박포의 사주를 받은 방간의 군사와 방원의 군사 사이에 골육상쟁이 일어나니 제 2차의 왕자의 난이다.

 

방원은 군사들에게 특명을 내렸다, 절대 자기의 형 방간을 죽이지 말라고.....

2차왕자의 난은 방원의 승리로 끝났다.

 

 

2차의 왕자의 난을 경험한 정종도 몹시 불안해 하던중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려 방원에게 전위하니 이가 곧 조선의 제 3대왕 태종이다.

 

형제간에 피비린내 나는 살상을 목격한 태조는 더욱 상심하여 ,

아들 방원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양주의 소요산에 잠시 머무르다 고향 함흥으로 가버린다.

그후 태종은 여러 차례 차사를 보내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모두다 함흥차사가 되어버렸다.

 

 

어느날 무학대사가 찾아와 여러날을 묵으며 태조의 심중을 살피더니. 환궁할 것을 간청했다.

태조도 노여움도 어느 정도 가라앉고 ,마침내 무학대사의 설득으로 함흥을 떠나 한양을 향하여

의정부까지 오게되었다.

 

 

태종은 부왕의 환궁 소식을 듣고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전좌殿坐마을

까지 오게되었다.

 

부왕 이성계의 환영 영접 준비가 한창이였다.   --  구름같은 차일을 치고 ...

 

"차일의 기둥은 아름드리 나무를 써야 하옵니다"... 하륜이 아뢰었다...

"차차 아시게 되오려니와 이번만은 큰 기둥으로 하게 하옵소서".....

 

워낙 지혜의 주머니 하륜의 말인지라 태종도 따랐다.

 

 

하륜의 의견을 쫒아 큰차일을 치고 아름드리 나무로 연대(筵臺)을 세워 준비를 끝내고 부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가마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오고 있을때-

차일이 바람에 날리며 면류관을 쓴 태종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순간 태조는 노기가 충천하였다.

천하의 장수였던 그가 강궁에 화살을 메겨 힘껏 잡아당기니 살은 방원을 향하여 날아갔다.

 

"전하, 피하십시오" 대신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태종이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아름드리 연대뒤로 몸을 숨기니, 간발의 차이로 화살은 연대를 맞히고 말았다. 이때 부터 연대가 맞아야 "산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부왕이 상좌에 앉고 태종이 절하고 술을 부어 헌주하려 할때 하륜의 청에 따라 술을 부어 시관侍官을

시켜 잔을 올리도록 하니

 

태조는 옷 소매속에 감추어 두엇던 철여의(쇠로된사슬)를 내던져 버리며. 막비천운(莫非天運)이라 탄식하고 옥새를 태종에게 넘겨주었다.

 

이때 이곳에서 두왕이 서로 대좌 하였다하여 전좌(殿坐)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왕이 대신들과 그곳에서 정무를 보았다하여 의정부라는 지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합니다 .

 

천하를 호령하던 태조 이성계도 왕위 7년, 상왕으로 10년만인 74세로 승하한다.

 

 

 

 

 

                                                        

                                 태조 이성계의 묘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소재

 

 

 

 

 3. 관악산과 경복궁(왕궁)터

 

 

조선조 초기 태조의 한양 천도 시기 국가의 기틀을 잡는데 큰 기여를 했던 무학(無學)대사는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백악(白岳 : 북악. 지금 청와대 바로 뒤쪽에 있는 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아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무학대사는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고 왕궁을 지으면 그 화성(火性)에 눌려  나라에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며

그래서 무학은 평소 자기가 주장해 왔던 대로 무악재 밑이 궁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이태조의 신임을 크게 받고 있던 정도전(鄭道傳)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도성과 관악산 사이에 다행히 한강이 있어 관악산의 불기운이 물을 건너올 수 없다는 주장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었고

그후 조선의 역사는 어쨌거나 숱하게 피바람이 많았고 경복궁도 자주 화재를 만났다.

 

태조시절 1.2차 왕자의 난이 있었으며, 이후로도 세조반정(단종과 사육신의 처형),

왜인의 침략에 의한 임진왜란, 오랑캐의 남침에 의한 병자호란, 경복궁의 화재 등

관악산의 화기설(火氣說)을 뒷받침해 주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훗날 흥선 대원군은 화재로 소실된 경복궁을 재건할 때 돌로 해태를 만들어 광화문 앞 양쪽에 배치하였으며 관악산 봉우리에 우물을 파서 안에 구리로 만든 龍을 넣음으로서 火氣를 방지하였다.

 

이와같이 관악산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화덕을 가진 「불기운의 산」으로 전해진다

 

남대문의 현판인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씨를 보면, 다른 문루의 현액과는 달리 세로로 씌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예방(禮方:남쪽)에서 오는 관악산의 불길을 밤낮으로 '서서 지켜' 막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남대문 앞에 인공 연못인 남지(南池)를 파서 관악산에서 오는 화기를 없애는 상징적 방비책을 썼고,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대(戀主臺) 뒤 높은 바위에 작은 구멍을 파서 물을 가두어 불을 누르는 뜻을 담기도 했다 한다.

 

 

 

 

 

                                                                                              관악산 연주대  연주암..

 

 

 

 

 

4. 회룡사의 유례

 

 

회룡사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 우왕 10년(1384)에 무학대사가 중창을 한 뒤이며, 여기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전설이 전합니다.

 

1384년 이성계는 무학과 함께 이 절에 와서 3년 동안 청업성취를 위한 기도를 하였는데, 이때 태조는 지금의 석굴암에서 무학은 산등성이 가까이에 있는 무학굴에서 각각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 뒤 이성계가 동북면 병마사가 되어 요동으로 출전하자 무학은 홀로 남아 작은 절을 짓고 손수 만든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그의 영달을 축원하였는데, 왕위에 오른 이성계가 이곳으로 무학을 찾아와서

절 이름을 회룡사라고 개칭하였다고 하니    이는 임금이 되어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또 일설에는 태종3년(1403) 태조가 끈질긴 함층차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무학대사가 찾아가 설득하자 노여움을 풀고 귀경하였다  합니다.

 

귀경한 후 이절로 무학을 찾아왔는데 무학이  환궁(회란)하는  용가(태조가 타던 수레) 를 기뻐하여

회룡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의정부 - 사폐산 회룡사

 

 

 

 

 

 

 

5. 조선을 일깨운 시대의 사상가 - 정도전

 

조선의 시조는 이성계다. 하지만, 그는 형식적 시조에 불과했다.

태조 원년 7월 17일(1392.8.5) 조선을 세운 실질적 시조는 다름 아닌 정도전이었다.

 

건국을 향한 아이디어나 추동력은 기본적으로 정도전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도 그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었다.

건국의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예컨대, 경복궁 앞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는 도로의 구조,

경복궁이니 안국동이니 가회동이니 하는 사대문 안의 지명들도 기본적으로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건국현장에서 정도전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정도전이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툭 하면 강조한 말이 있다.

<태조실록>에 실린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그는 "유방(한나라 시조)이 장량(유방의 책사)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이성계가 정도전을 쓴 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쓴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성계가 자신의 머리를 빌린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의 군사력을 빌렸다는 의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이성계는 웃어 넘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계의 그릇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조선은 실질적으로 정도전의 나라였다.

그날까지의 6년간은 이씨 조선이 아니라 정씨 조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1398년 10월 6일 밤,이방원은 이숙번의 군대를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했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태조 7년 <태조실록>에서는 "광화문에서부터 남산까지 철기(鐵騎, 철갑을 입은 기병)가 꽉 촥다"는 표현으로 이 상황을 묘사했다.

 

그 시각,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마루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광장 동쪽에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다. 그곳이 바로 송현마루였다.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의 첩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정자에서 정도전은 남은을 비롯한 측근들과 더불어 10월 밤의 정취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집 대문 밖에는 두서너 필의 말이 있었고, 대문 근처의 노복들은 잠들어 있었다.

대문 안을 들여다 보니, 정도전과 남은 등이 등불을 밝힌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방원과 이숙번은 병력 10 여명으로 그 집을 포위했다.

이방원 측은 공격 개시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뒤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측근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했다.

옆집은 전 판서인 민부의 집이었다.

민부가 먼저 말했다.   "배가 볼록한 자가 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건국 이후, 정도전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것저것 써야 할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과체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활습관도 복부비만에 한몫 했을 것이다.

 

'배가 볼록한 자'라는 말에 이방원은 정도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수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목이 베였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 기록된 <태조실록>에 따르면, 침실에 숨어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수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이를 반박하는 자료가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 한 수가 그것이다.

 

제목은 “자조(自嘲) "  즉 나를 비웃다 란 뜻의 시다.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맘으로 공을 세워(操存省察兩加功)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不負聖賢黃卷中)

삼심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三十年來勤苦業)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松亭一醉竟成空)

 

 

이 시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에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 수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의 모습이다.

 

 

 

 

 

 

 

 

 

 

조선왕조 제2대 왕 정종 “방과”(등극 1398 ~ 왕위 02년 02월)

 

 

1. 이성계의 세자책봉 -- 화근의 시작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2. 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 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조선왕조 제 3대왕 태종 “방원”(등극 1400 ~ 왕위 17년 10개월)

 

 

 

1, 제2차 왕자의 난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 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제의 자리를 확보한다. '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방원은 병권을 장악하고 동시에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나갔다.

 

그 일환으로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도록 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 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 정을 분리시켰으며 권문세가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실시해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등극했다.

 

 

 

2. 태종의 업적

 

 

1. 중앙제도와 지방제도의 정비로 고려잔재 완전청산.

2. 군사 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의 안정.

 

3. 노비 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

4. 권근을 책임자로 하여 유학과 경학에 밝은 자를 엄선해 성균관과 오부의 학생들을 맡김.

 

5. 기술 교육을 위해 10학을 설치하고 제조를 둠.

6. 과거 제도에서 공거, 좌주문생제 등 귀족 위주의 관리 등용 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

 

7. 사찰에 예속된 노비를 공노비로 전환시켰으며 처녀로 비구니가 된 사람은 환속시켰고 연등체,

    초 파일제 등을 폐지시킴.

8. 문묘 제도를 정비하고 묘제, 혼례, 장제 조관복제 등을 정함.

 

9. 단군, 기자 등을 중사로 승격시켜 개인적인 자연 신앙을 국가 신앙으로 이끌면서 민족 신앙을

   유교 속으로 끌어들임.

10.명에 대해서는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을 하는 대신 서적, 약재 역서 등을 수입하여 실리를 취하 는

   동시에 변방을 안정시킴.

 

11.왜인 범죄논결법을 마련해 왜인들의 범죄 행위를 다스렸고 부산포와 내이포에 도박소를 두어

    왜 인의 무역을 합법화시키고 왜인들의 병비 정탐을 감시.

12.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김.

 

13.선원록을 정비하여 비 태조계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시킴.

14.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

 

 

3. 외척 척결

 

 

태종이 선위(왕위 이양)를 표명하자 왕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를 통해 이른바 협유집권, 즉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불화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태종 집권 이전에는 남편의 등극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태종이 보위에 오른 후 잉첩들만 가까이 하자 이에 심한 투기심을 드러내 태종과 불화가 잦았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서 아버지 민제와 왕비인 원경왕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 이 발생하게 된 사건이다.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하고 직첩을 수취(공신녹권을 빼앗음)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에 유배시킴 - 1413년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자진)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 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아 -> 옥사를 종결 한다.

 

 

 

 

4. 육조직계제 개편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을 정3품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다.

 

 

이에 따라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좌우 정승이 장악하고 있던 문 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시키기에 이른다.

 

또한 같은 해에 대언사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나눠 관장하도록 했다.

 

또한 육조의 각 조마다 각각 3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 사헌부, 사간원, 승정원, 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 육조에 분속시켰다.

 

 

5. 거북선 개발에 대한 기록

 

 

거북선에 관한 기록이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태종실록' 부터이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장갑선의 일종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거북선은 왜구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태종 대에 이 거북선의 조성 흔적이 있는 것은 왜구와의 수전에 대비한 것이거나 또는 대마도 정벌 같은 왜구 토벌 작전을 감행하기 위한 준비책이었을 것이다.

 

 

6. 신문고 설치

 

 

신문고는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전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 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 1401년 8월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 따 설치되었다.

 

 

 

7. 한양으로의 천도

 

 

건국 초에 조선 조정은 세 번에 걸쳐 수도를 옮겼다.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정종 원년에는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다시 왕궁을 옮겼다.

 

 

이 때 개경으로 다시 옮겨 간 이유는 우선 한양의 시설이 미비하여 개경을 그리워하는 신민들의 정이 심각하다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실의 큰 불상사인 골육상잔의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경으로 옮겨 간 이후에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세제 방원에게 왕권을 물려주었다.

 

 

태종은 등극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4년(태종5년) 9월에 경복궁이 준공되자 한양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 후로 한양은 5백년 동안 조선의 문화와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명한 일화들"

 

 

1. 이방원(하여가)와 정몽주(단심가)

 

 

외람되지만, 제가 시를 한 수 읆어도 되겠습니까?" 이방원이 먼저 말하였습니다.

"물론이지요." 정몽주가 흔쾌히 대답하였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은 천천히 시를 읆었습니다. 고려 왕조를 섬기나 새로운 왕조를 섬기나 마찬가지이니,

새 왕조를 여는 일에 서로 뜻을 같이하자는 마음을 담은 시였습니다.

 

이방원의 시를 들은 정몽주의 얼굴빛이 굳어졌습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함께 새 왕조를 세우자는 이방원의 속뜻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코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릴 수 없었습니다.

정몽주는 이미 새로운 왕조를 따르지 않기로 굳게 마음먹고 있었기 때문에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럼 제가 답시를 지어 올리지요."

정몽주의 말에 이방원은 어떠한 내용의 시가 나올지 긴장되었습니다.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는 죽더라도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는 뜻 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시를 듣자 존경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과연 충신이로다.'

 

하지만 이제 새로 왕조를 세우는 데 걸림돌이 된 정몽주를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일 결심으로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당시의 수도였던 개성의 선죽교(정몽주 사후 다리에서 대나무가 자랐다하며 그의 핏자국이 수백년 후까지지워지지 않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이방원의 측근인 조영규에게 철퇴로 참살당하게 됩니다.

 

 

 

                                                                          정몽주의 초상

 

 

 

 

2. 태종의 외척경계 (구슬옥씨와 온전전씨의 유례)

 

 

조선왕조는 전주이(李)씨 입니다~

태종(이방원)은 신덕왕후 한씨가 외척의 힘을 빌려 자신의 어린 아들을 세자로 올리는 것을 보고

세종(충녕대군)의 왕후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을 죽입니다.

 

이 사건은 박은이 부추겨서 일어난 옥사라 하여 청송심씨와 나주 박씨는 그후 원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태종(이방원)의 지나친 외척경계 입니다.

 

 

1. 태종은 너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기에 세기가 힘듭니다.(예를 들자면 충신 정몽주, 형제 방간,

    그리고 아버지가 총애한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이 있죠.. 그리고 참고로 자신

    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전에 죽었습니다)

 

 

2. 왕(王)씨들은 제주도로 보내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배에다 태운다음에 배에 구멍을 내서

    멸살시켰습니다. 그때 눈치를 챈 똑똑한 왕씨들은 산골짜기에 숨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삼족을 멸했고요,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답니다

 

    그래도 왕씨라는 걸 들킬수 있으니까 임금왕자에 점을 찍은 구슬옥(玉)씨, 임금왕자 위에

    갓머리자를 쓴 온전(全)씨, 임금왕자 옆에 작대기 두개를 그은 밭(田)씨가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태종 이방원과 원경황후의 묘소   (헌인능)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참고자료.

 

 1.조선왕조 519 년  왕조 재위기간

 

1대 태조 : 이성계(1392 -  왕위재직기간 6년.2개월) 위화도 회군 ->조선 건국. 한양천도 단행.

2대 정종 : 방과(1398 - 2.2월) 1차 왕자의난 - 실권없는 왕 등극

3대 태종 : 방원(1400 - 17.10월) 제 2차 왕자의 난으로 등극 - 외척배격 철권통치

 

4대 세종 : 도(1418 - 31.6월) 조선왕조 빛나는 유산과 업적을 남김-

5대 문종 : 향(1450 - 2.3월) 세자시절 8년기간 섭정 건강악화 단명.

6대 단종 : 홍위(1452 - 3.2월) 12세 등극 - 노산군으로 강등 사사됨.

7대 세조 : 유(1455 - 13.3월) 계유정란을 일으켜 왕위 찬탈 (사육신과 한명회)

 

8대 예종 : 황(1468 - 1.2월) 남이 역모사건 발생.

9대 성종 : 혈(1469 - 25.1월) 부인12명, 16남 12녀 둠. 폐비윤씨 사건 발생

10대 연산군 : 융(1494 - 11.9월) 19세 등극 갑자사화(폐비관련자 참살)폭정 강화유배

 

11대 중종 : 역(1544 - 38.2월) 조광조의 개혁정치, 시대를 앞서간 여류시인 황진이

12대 인종 : 호(1545 - 9개월) 31세 사망 - 문정왕후 독살설 - 자녀 없슴

13대 명종 : 환(1545 - 22년 ) 윤원영등 외척의 을사사화, 임꺽정의 난 발생

 

14대 선조 : 균(1567 - 40.7월)1592.4.13 임진왜란(20만 병력침공)7년전쟁 이순신

15대 광해군: 혼(1608 - 15.1월) 인조반정 폐위됨, 허균의홍길동전, 허준 동의보감

16대 인조 : 종(1623 - 26.2월)이괄의난, 여진족 침공(정묘호란), 청(병자 호란)발발

17대 효종 : 호(1649 - 10년) 어린시절 청 볼모로 잡혀감, 나선정벌등 북벌정책 시행.

 

18대 현종 : 연(1659 - 15.3월)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으로 당파싸움 극심.

19대 숙종 : 순(1674 - 45.10월) 폐비윤씨(인현왕후) - 희빈장씨

20대 경종 : 윤(1720 - 4.2월) 장희빈 사약시 - 자식 생산능력 상실(비운의왕)

 

21대 영조 : 금(1724 - 51.7월) 무수리 출신인 숙빈소생. 사도세자 사건, 83세 사망

22대 정조 : 산(1776 - 24.3월) 찬란한 문화 중흥기도래, 홍국영, 다산정약용(수원성)

23대 순조 : 공(1800 - 34.4월) 천주교 박해, 홍경래의 난등 역모 다수 발생

 

24대 헌종 : 환(1834 - 14.7월) 서구열강 통상개방 압력, 천민 농민층 신분상승 욕구

25대 철종 : 변(1849 - 14.6월) 60년세도 안동김씨 배려(강화도령)19세 등극, 동학

26대 고종 : 희(1863 - 43.7월) 일본과 서구열강에 조선왕조몰락, 흥선대원군 섭정,

27대 순종 : 척((1907 ~ 3.1월) 1910년 조선 멸망. 일본의 식민지 지배시대 돌입

 

 

 

 

2. 종과 조의 차이점

 

제1가설

종과 조의 차이는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종”은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다스려 나라 안팎에서 태평성대를 누렸을때 왕에게 종을 붙입니다.

“조”는 나라를 세우거나 큰 국난을 극복한 왕을 기리기 위해 봉상원에서 만든 것입니다. 그 예로

조선 1대왕 태조와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등이 있습니다

 

제 2가설

왕족의 직계 자손이 왕위에 오르거나

왕비(본부인)가 낳은 대군(大君)이 왕위에 오르면 "종" 이 붙습니다.

방계 자손이 왕위에 오르면 "조" 입니다.(영조임금)

과거에, 이러한 직계 방계에 따라 조와 종을 나누는 규칙은 있었던 듯 하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합니다.

 

 

 

 

 

 

3. 왕가의 자손들

 

 

 

 

 

 

조선시대 왕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왕은 29명의 자녀를 둔 태종 이 꼽혔다. 이어 성종(28명), 선조(25명), 정종(23명), 세종(22명) 순이었다.

 

반면 단종, 인종, 경종, 순종은 자녀가 한 명도 없었다.

 

정종은 왕비와의 사이에 한 명의 자녀도 두지 못했으나, 후궁과의 사이에 23명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후궁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은 왕은 영조(14명), 정조(4명), 헌종(1명) 순이었다.

 

 

 

 

  

 

 

1기를 마치고 다음은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던 / 세종대왕과 그아들 문종 / 편으로  넘깁니다...   

  

                                    2012. 여름.  --  29 회장  sj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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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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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임순자 | 작성시간 12.07.06 이렇게 자세한 조선왕조의 역사에 대하여 오랫만에 공부를 해 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작성자송재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0.07 고맙습니다. 공부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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