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대 종 사 ( 絶 代 宗 師 ) 1권 全 × 券
著 者 : 劍弓人,司馬達
序 章.
第 1 章. 월광(月光), 그리고 운명(運命)의 만남.
第 2 章. 한천강(恨天江)의 조손(組孫).
第 3 章. 소년(少年)의 재치(才致).
第 4 章. 영기석부(靈氣石府).
第 5 章. 광세기연(廣世奇緣).
第 6 章. 절대종사(絶代宗師).
第 7 章. 월영검법(月影劍法).
第 8 章. 도둑의 조종(祖宗).
第 9 章. 월광(月光) 속에 사라지다.
第 10 章. 신비(神秘)의 백안문(白雁門).
第 11 章. 여난(女亂).
第 12 章. 뜻밖에 맺은 의형제(義兄弟).
第 13 章. 괴이한 비무대회(比武大會).
第 14 章. 마전(魔殿).
第 15 章. 어잠풍(御潛風).
第 16 章. 재회(再會).
第 17 章. 무당산(武當山).
第 18 章. 도(道)의 이치(理致).
第 19 章. 혈궁(血宮)의 출현(出現)
第 20 章. 혈궁이존(血宮二尊)과의 결전(決戰).
第 21 章. 이상한 거래(去來).
第 22 章. 피의 월영검(月影劍).
第 23 章. 불붙는 정애(情愛).
第 24 章. 폭풍(暴風)의 무림(武林).
第 25 章. 조호이산지계(調虎離山之計).
第 26 章. 일대영웅(一代英雄).
第 27 章. 타인(他人)의 인생(人生) 속에서 빛나다.
第 28 章. 불타는 여심(女心).
第 29 章. 가공할 무위(武威).
第 30 章. 마중지마(魔中之魔)의 죽음.
第 31 章. 절대종사(絶代宗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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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一 券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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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序 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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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무림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에서부터 공포스러운 이야기, 또는 끔찍하고 엄
청난 혈록(血錄)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이야기만큼 무림인들의 심금을 울리
는 이야기는 드물 것이다.
일생을 피로 점철된 생애(生涯)를 살아온 한 대마두(大魔頭)와 천
진무구한 어린 소년(少年)의 만남은 정녕 북두칠성이 일렬로 늘어
서는 것보다 더 어려운 만남이었다.
대마두와 한 소년의 만남,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인간애과 갈등, 그리고 복수(復讐) 아닌 복수의 피무지개!
이야기는 저 북쪽의 한천강(恨天江)을 기점으로 전개된다.
---혈해마존(血海魔尊) 염천월(閻天月).
십칠 세에 무림에 투신하여 백여 년(百餘年)이 흐르는 동안 그의
손에 피를 뿌린 자 몇 천 몇 만이던가?
그가 걷는 길은 이름 그대로 혈로(血路), 피의 길이었다.
그의 이름만 들으면 무림인들은 항상 피를 떠올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는 전 무림의 표적이 되어 버렸다.
정사흑백(正邪黑白)을 막론하고 모든 무림인들은 그를 죽이기 위
해서 혈안(血眼)이 되었다.
이때부터 혈해마존 염천월은 정착할 곳을 잃었다.
어쩌면 그는 숙명적인 유랑객(流浪客)일런지도 몰랐다.
염천월(閻天月), 고아(孤兒)로 태어나 너무나도 외롭게 자라 밤하
늘에 뜬 고독한 달(月)을 사랑한 한 염세적인 인간.
그리하여 스스로의 이름을 천월(天月)이라 지은 외로운 절세마두......!
그는 정녕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그는 평생을 오로지 살생(殺生)으로만 이끌어 왔단 말인
가?
그렇다.
확실히 그는 백이십 평생을 정(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끼지 못
하고 살아온 냉혈인(冷血人)이었다.
그런데 그가 백이십 번째의 생일(生日)을 맞이하던 날, 그의 일생
에 다시 없을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으니.......
< 序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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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1 章. 월광(月光), 그리고 운명(運命)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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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고봉(奇岩高峯).
지상의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연하게 솟아오른 검봉(劍峰)
이었다.
전체가 암석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봉우리는 칼을 거꾸로 세워놓은
듯 날카로워 보였다.
마치 하늘을 찌르려는 듯한 기세였다.
언제부터인가 낡은 백의(白衣)를 입은 한 노인이 검봉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만월(滿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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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름한, 아니 어찌 보면 푸른 빛으로 가득 찬 달빛이 산야(山野)를 비추고 있었다.
그에 따라 노인의 모습도 온통 푸른 달빛에 젖어 있었다.
낡은 소맷자락 밖으로 비어져 나온 마디가 툭툭 불거진 노인의 손에는 한 자루의 녹이
슨 고검(古劍)이 쥐어져 있었다.
노인의 모습은 강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도무지 정이라고는 한 점도 느껴지지 않는
비정(非情)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노인은 평생을 그렇게 사는 데 익숙해져 있는지도
몰랐다.
물씬 풍기는 고독한 분위기, 노인의 모습은 지금 그가 바라보고 있는 날카로운 검봉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절대고독(絶對孤獨), 유아독존(唯我獨尊), 그것이 노인과 검
봉을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비유일런지도 몰랐다.
백 세가 넘어보이는 얼굴임에도 주름은 별로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인상에서 흐르는
패도적인 기운으로 인해 노인은 이미 나이를 초월해버린 듯 했다. 노인의 예리한 흰
눈썹의 끝에서는 싸늘한 서리가 풀풀 날릴 것만 같았다.
노인은 기이한 눈빛으로 푸른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을 향한 그의 눈이 차츰 회상
에 젖어 들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달(月)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신비한 달빛이 날 이끌었기 때문이지.
노인의 강렬한 눈빛도 달빛이 내려앉은 듯 신비한 광망을 발하고 있었다.
'철이 들 무렵, 내 곁에 아무도 없음을 알았을 때 오직 저 달빛만이 유일한 나의 벗이
기도 했지.'
그의 추상같은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부터 나는 달을 더욱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달은 나의 위안이자 유일한 친구였으
니까.'
백의노인은 날카로운 검봉과 달을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감회에 빠져 들었다. 문득 무
엇을 생각했는지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만월이 떴을 때였다. 내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내 손을 잡은 채 저 달을 보며 죽었을 때 나는 또 얼마나 달을 원망하며 눈물을 뿌렸
던가? 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것이 수수(愁愁)롭기만 하거늘.......'
여기까지 생각한 노인은 손에 쥔 녹슨 검을 들어 올렸다. 그 검은 손잡이는 물론 검집
까지 낡고 보잘 것 없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절대 보검(寶劍)이나 명검(名劍)은 아
니었다.
노인은 자신의 낡은 애검을 내려다보며 까마득히 흘러간 팔십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어느 고병기상(古兵器商)을 지나며 아무렇게나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
검을 발견했지. 너무나 녹슬고 볼품이 없어 그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던 검이었어. 그
러나 난 이 검을 본 순간 웬지 모르게 애착을 느꼈지.'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같은 것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검의 신세가 나와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는지도 몰랐다. 비슷한 운명(運
命)....... 후후! 아무튼 이후로 내가 곧 검(劍)이요, 검이 내가 되었지.'
백의노인은 낡은 검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자, 이젠 가야 한다. 오늘은 또 어디서 자야 하나? 사해(四海)를 둘러 보아도 내가
갈 곳은 단 한 군데도 없구나!'
노인은 서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다시금 냉막한 기
운과 오만한 표정이 되살아났다.
'제아무리 이슬과 찬바람을 맞는다 해도 내 곁에는 저 달과 이 검이 항상 존재한다.
염천월(閻天月)! 너는 결코 고독하지 않다!'
혈해마존(血海魔尊) 염천월.
이 노인이 바로 일대의 대마두인 염천월이었다. 일생을 피로 점철된 혈로(血路)를 걸
었던 불세출의 대마두 염천월이었던 것이다.
염천월은 달빛을 받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한
줄기 탄식이 흘러 나왔다.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한 쓸쓸함을 느낀 것이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내심 부르짖었다.
'염천월! 너도 이제 늙었는가? 이토록 나약해지다니.......'
그는 곧 부인하듯 고개를 완강하게 내저었다.
'아니다! 정(情) 따위는 생각하지 마라. 염천월, 그런 것은 너와 관련이 없는 것이다.
홀로 주유하다 어느 쓸쓸한 황야에서 숨져야 할 것이 주어진 운명일지라도 결코 일생
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염천월은 이렇게 부르짖고는 신형을 날렸다.
휘익!
월광(月光) 속으로 한 줄기 흰 점이 백선(白線)을 그리며 유성처럼 쏘아졌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쾌속한 신법이었다.
갈대밭.
달은 이미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스스스스.......
한 줄기 바람인 양 갈대잎을 눕히며 한 인영이 나타났다. 그는 바로 염천월이었다.
그가 지남에 따라 갈대잎 스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주위의 숨막힐 듯한 정적을 조
용히 흔들었다. 벌써 몇 시진 동안을 그는 이렇게 걷고만 있었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특히나 이렇게 달이 밝은 밤에는 더욱 그랬다. 갈대밭 속을
걷던 염천월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을 느꼈는지 그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깊숙한 두 눈에서는
싸늘한 한광(寒光)이 뻗쳐나왔다. 그는 사방에 가득 자라있는 갈대를 훑어보며 소리
쳤다.
"주위에 숨어있는 놈들은 누구냐!"
그러자 일진의 광소(狂笑)가 밤하늘을 울렸다.
"크하하하하......! 과연 혈해마존 염천월답구나!"
한 명의 인영이 갈대숲 속에서 솟아난 듯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시뻘건 눈썹을
가졌으며, 전신에 핏빛 혈의(血衣)를 걸친 음침하게 생긴 늙은이였다.
"으음....... 적미살군(赤眉殺君) 혁무천(赫武天)!"
염천월의 침음성 뒤로 나타난 혈의노인, 즉 적미살군은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뜻밖인가? 염천월."
염천월은 눈썹을 찌푸렸다.
"네 놈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너의 두 형제도 함께 왔겠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름끼치는 괴소가 사위를 울렸다.
"으핫핫핫......!"
"크크크크......! 네 추측이 맞다. 우리 형제는 항상 함께 다닌다."
좌우의 갈대 속에서 유령처럼 두 괴인이 솟아 나왔다.
오른쪽의 인물은 기괴하게도 두 눈이 녹색을 띄고 있었으며 옷도 역시 녹의를 입고 있
었다. 왼쪽 인물은 백랍같이 창백한 얼굴에 시체같은 모습이었다. 옷은 눈처럼 흰 백
의를 마치 수의(壽衣)처럼 걸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서운 살기를 뿜으며 염천월을 포위했다. 그러나 염천월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세 괴인을 쓸어보며 침중하게 말했다.
"음! 벽안마군(碧眼魔君) 혁무기(赫武奇), 백시령군(白屍靈君) 혁무회(赫武悔), 너희
들이......."
염천월의 안색은 어느새 쇠처럼 굳어지고 있었다.
세 명의 괴인.
그들을 일컬어 사천삼군(死天三君)이라 불렀다.
당금(當今) 사도무림의 최절정고수인 그들은 개개인의 무공이 현 무림의 지주인 구파
일방(九派一幇)의 장문인들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정사를 막론하고 그들을
당할 고수나 집단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는 사천삼군(死天三君)이라는 무서운
별호가 붙은 것이었다. 과거 그들은 모두 우연히 혈해마존 염천월과 개인적으로 겨룬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중요한 일로 인해 그들이 서로 떨어져 있을 때였다. 결과적
으로 그들은 모두 처참하게 패했고, 급기야 이번에 세 명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사천삼군의 첫째인 적미살군 혁무천이 살기를 띄었다.
"염천월. 지난 오 년 동안 우리는 네 놈의 뒤를 추적했다. 그리고 오늘에야 이 사위림
(死葦林)에서 네 놈을 없애게 되었다."
"사위림?"
염천월은 나직이 되뇌고는 주위의 무성한 갈대를 둘러보며 자조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곳은 즉 죽음의 갈대밭이란 말인가?"
벽안마군이 비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왜, 전신이 오싹해 지느냐?"
염천월의 입가에 기이한 미소가 어렸다.
"글쎄, 과연 너희들 뜻대로 될지 의문이군."
이번에는 백시령군이 싸늘하게 내뱉았다.
"염늙은이, 이제 너는 이 사위림에서 혼(魂)을 잃은 망객(亡客)이 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될까?"
"크흐흐....... 물론이다."
"사천삼군, 너희들은 정말 자신하느냐? 이 염천월을 죽일 수 있다고?"
적미살군의 눈이 무시무시한 살광을 폭사했다.
"염천월! 승산이 없으면 이 자리에 오지도 않았다."
벽안마군도 음침하게 한 마디 거들었다.
"너는 오늘 이 사위림(死葦林)을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벗어난다 해도 그
것은 육신(肉身)이 아닌 혼백(魂魄)이 될 것이다."
염천월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처절무비한 살기가 일어났다. 그는 잠시 묵묵히 침묵하더
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사위림에는 두더쥐처럼 땅 속에 숨어 있는 친구들도 있군. 이제 그만 나오시지."
그 말에 사천삼군은 모두 흠칫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들의 눈에는 비록 순간적이기
는 했으나 일말의 두려움이 찰라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아미타불....... 염시주의 날카로운 눈은 벗어날 수가 없구료."
웅후한 불호와 함께 후면에서 두 명의 화상(和尙)이 불쑥 솟아 나왔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은 무척이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화상들로서 한결같이 똑같은 잿빛 가사(架裟)
를 걸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미에 깊숙한 두 눈, 번뜩이는 안광도 똑같았다.
염천월은 서서히 몸을 돌려 두 화상을 마주보았다.
"으음. 쌍존승(雙尊僧), 그대들도?"
쌍존승.
그들은 또 누구인가? 일찍이 무림에서 가장 신비의 단체로 알려져 있는 고사(古寺)가
있었다.
이름하여 천불사(天佛寺).
이는 이백 년 전부터 강호무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존재였으나 그 이름만 알려져 있
을 뿐 어디에 있는지조차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혹자는 중원(中原)의 깊은 비역
(秘域)에 있다고도 했고, 일각에서는 변방의 오지(奧地)에 있다고도 했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오래 전부터 구파일방의 성세를 억누르고 무림에 큰 영향력
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것은 쌍존승이라 불리는 두 노승이 때때로 무림
에 등장하여 놀라운 무공으로 무림을 경동시켜 천불사의 존재를 주지시켰기 때문이다.
쌍존승은 모두 백 세가 넘은 나이였다.
천승(天僧)과 지승(地僧).
이것이 그들의 이름으로 통칭 천지쌍존승(天地雙尊僧)이라고도 불리웠다.
염천월은 쌍존승과 사천삼군을 둘러보고는 냉소했다.
"이 자리에 정(正)과 사(邪)의 최절정 인물들이 모두 모였군."
이어 그는 주위를 향해 싸늘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조무래기들도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마치 그의 말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도처에서 갈대잎 스치는 음향이 일며 무수한 인영
들이 속속 출현했다.
휙! 휙휙휙----!
대략 사십여 명의 인영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승(僧), 도(道), 속(俗) 등 다양한 부류
의 인물들이었고 휴대하고 있는 병기 또한 종류가 틀렸다. 그러나 한결같은 것은 그들
의 얼굴에 서려있는 사무친 원한과 증오, 그리고 무서운 살기였다.
스스스스슥-----!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신형을 유령처럼 옮겨 염천월을 가운데 두고 포위했다.
염천월은 싸늘한 한광이 깃든 눈으로 그들을 일일이 응시했다.
'보아하니 이 놈들은 모두가 한 지방을 주름잡는 놈들이다. 어쩌면 이 싸움이야말로
내 평생 최대의 위기가 될지도 모르겠군.'
염천월은 이렇게 생각했으나 그의 신색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할 뿐, 추호의 두려움이
나 긴장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쌍존승 가운데 천승(天僧)이 불호를 외우며 외쳤다.
"아미타불. 염시주, 이제 피바다의 고행(苦行)을 마치고 부처님에게로 돌아갈 때가 되
었소."
적미살군이 살기띈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흐흐....... 염천월, 너의 피가 이 사위림을 적실 것이다."
염천월은 하늘을 바라보며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곧 있으면....... 달이 지겠군."
"무슨 말이냐?"
적미살군이 불쾌한 낯빛으로 되묻자 염천월의 음성은 갑자기 냉정하고 결연해졌다.
"저 달이 나를 지켜보는 한 나는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뭣이?"
적미살군의 놀람성은 하나의 서곡이었다.
차르르르륵-----!
염천월의 손에 들려져 있던 검이 괴음을 발하며 허공에 섬뜩한 살혼(殺魂)을 뿌렸다.
사위림(死葦林), 죽음의 갈대밭에 피와 죽음의 폭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파츠츠츳----! 채앵----!
"크---- 아---- 악!"
그것은 차라리 비명이 아니라 귀를 찢는 듯한 호곡성이었다. 예리한 금속음에 따라 난
무하는 피보라, 둥근 만월(滿月) 아래 수십 갈래의 선혈이 무지개를 그리고 있었다.
"아---- 아---- 악----!"
달은 한을 품은 채 피를 토하며 서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혈풍이 적막한 밤에 사(死)
의 노래(曲)를 불렀으니.......
츠츠츠츳.......
귀신조차도 두려움에 떨 정도의 검무(劍舞)!
인세(人世)가 곧 지옥의 아수라계로 화하니 사자(死者)의 망혼들이 끝없이 울부짖었다
"크---- 으---- 악----!"
죽음이 오고 망혼이 육신을 떠난 뒤 남는 것은 오로지 피, 피가 강을 이루며 천지를
범람하고 있었다.
스스스.......
한 줄기 피비린내를 동반한 바람이 죽음의 갈대밭을 휩쓸었다. 그에 따라 피에 젖은
갈대들이 망혼의 춤인 양 마구 출렁였다.
한 명의 인영이 거의 기울어가는 달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다름 아
닌 혈해마존 염천월, 진혼곡(鎭魂曲)조차 거부하는 듯한 무시무시한 이름이었다.
염천월의 낡은 백의는 찢어질 대로 찢어져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멍하니 피가 뚝뚝 흐르는 고검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텅 빈 듯 공허해 보이는 한 쌍의 눈(眼).
주위의 처참한 피보라를 둘러보는 그의 눈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단
지 그의 신형이 약간 비틀거리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곧 몸을 돌려 버
렸다.
적수를 일거에 모조리 도륙한 희대의 살객(殺客).
그는 피가 뚝뚝 흐르는 녹슨 검을 집어 넣고는 걷기 시작했다. 다소 음랭하고 고독한
그의 독백이 뒤를 이었다.
"나를 막지 마라. 천하의 그 누구라도 나를 막는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혈해마존 염천월, 그가 아니면 천하의 그 누구도 내뱉을 수 없는 실로 광오한 읊조림
이었다.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사위림에는 이내 숨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스스스.......
피냄새 짙은 바람결이 다시금 갈대위를 고적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피바다가 되어버린 채 단지 시체만이 즐비하게 깔린 그곳에서 한
가닥 신음성이 들렸다.
"으으......."
무엇인가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물체가 있었다.
노승(老僧).
그는 바로 천지쌍존승 중 한 명인 천승(天僧)이었으나 피에 흠씬 젖어 있는 그의 모습
으로 미루어 그때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천승은 간신히 일어선 후 시체더미 속을 헤집으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이어 그의 시선
이 참담한 절망을 드리웠다. 이미 한 덩어리의 육괴로 화해버린 지승(地僧)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천승은 눈물을 뿌리며 탄식을 발했다.
"아아, 혈해마존 염천월! 그는 인간(人間)이 아니다. 어찌 인간이 그토록 무서운 살성
(殺星)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사지가 절단되어 뒹굴고 있는 사천삼군(死天三君)의 처참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
어왔다.
"천하에서 명성을 날리는 사천삼군과 우리 쌍존승, 그리고 사십 명의 고수들이 추풍낙
엽처럼 쓰러지다니....... 이는 정녕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천하 무림을 떨어울리던 명성답지 않게 천승은 그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천승은 지승의 시신을 안더니 비틀거리며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그의
유원이 서린 음성이 바람을 타고 무섭게 들려오고 있었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다! 염천월, 그대의 무공이 비록 천하제일일지라도 천
불사(天佛寺)의 손길은 끝까지 너를 추적할 것이다......."
휘이---- 잉----! 스스스슥.......
싸늘한 새벽의 한기가 바람에 묻어왔다. 갈대잎 스치는 소리가 더욱 스산한 가운데 천
승은 그렇게 죽음의 사위림을 빠져나갔다.
이제 사위림에는 더이상 살아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경 위에 서녘에 걸린 한 점의 달(月)만이 마지막 잔광(殘
光)을 토해내고 있을 따름이었다.
산서성(山西省) 여량산(呂梁山).
한 노인(老人)이 나타났다.
혈해마존(血海魔尊) 염천월(閻天月), 바로 그였다. 낡은 백의(白衣)의 앞가슴을 피로
물들인 채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비틀거리며 여량산중을 걷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본다면 그의 걸음걸이는 영락없는 술취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리고 황
량한 야산(野山)을 넘으며 하나의 커다란 바위를 발견했을 때 그는 실제로 취기에 가
까운 피로를 느꼈다.
쿵---!
염천월은 바위에 부딪치며 풀썩 주저앉았다.
푸스스.......
그의 어깨와 부딪친 바위가 바스러져 흘러내렸다. 그러나 염천월은 이를 전혀 의식하
지 못한 듯 최대한 편한 자세로 바위에 기대 앉았다.
가슴에 은은한 통증을 느끼며 그는 중얼거렸다.
"쌍존승, 그 놈들이 설마 천극광염공(天極光焰功)을 익혔을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염천월의 창백한 얼굴에 자조에 가까운 고소가 번졌다.
"육십 년만에 처음이다. 상처를 입은 것은....... 과연 천불사의 고수는 허명을 얻은
게 아니었군."
그는 전신에서 차츰 기력(氣力)이 떨어져 가는 것을 스스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스스스---- 휘이잉----!
가을바람(秋風)이 그의 기진한 육신을 훑고 있었다. 근처의 나무에서 낙엽(落葉)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누렇게 퇴색된 낙엽은 바싹 말라있어 몹시도 처량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몇 개의
낙엽이 염천월의 발치에 떨어져 바스락거렸다.
염천월의 고독한 눈이 멍하니 낙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이 낙엽처럼 덧없이 이 세상에서 스러지겠지. 후후......."
그는 힘없이 웃더니 갑자기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쿨룩! 쿨룩! 쿨룩....... 욱!"
그것은 기침이라기 보다는 토혈(吐血)이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열릴 때마다 검은
피가 한 움큼씩 튀어 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염천월은 기침이 진정되자 피묻은 입가를 소맷자락으로 쓰윽 문질러 닦고는 뒤로 누웠
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자신에 대한 연민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는 그의 얼굴은
고요하다 못해 평화로와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한순간, 그의 눈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야수에 가까운 그의 본능이 인기척
을 느낀 것이다.
염천월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는 경악성을 터뜨리는 한편 아연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고목나무.
그것에 대해 그는 미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극심한 부상도 그렇거니와 허탈한 심리가
주변 상황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그의 사고를 차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 고목의 가지 위에 한 명의 소년(少年)이 흡사 나무와 일체를 이루는 정물인
양 한가롭게 걸터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이제는 정말로 세상을 뜰 때가 되었나 보구나.......'
당금의 천하제일고수이자 혈해마존이라 불리우는 염천월은 그제서야 찬찬히 소년의 외
양을 뜯어보았다.
나이는 겨우 칠팔 세 정도. 그래서인지 소년의 용모는 그야말로 티없이 순진무구해 보
였다.
크고 동그란 두 눈은 가이없는 가을하늘처럼 맑고 깊었으며 발그레하게 상기된 귀엽게
생긴 소년의 얼굴에서는 세속의 더러움 따위는 단 한 점도 찾을 길이 없었다.
마치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천상(天上)의 천동(天童)과도 같은
모습이라고나 할까?
다만 유감이라면 일신에 걸친 소년의 의복이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머리에는
용모에 어울리지 않는 몹시 큰 털가죽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어찌 보면 우스꽝스럽
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선천적인 미동(美童)의 모습을 결코 해하거나 감축시키지는 못했
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햇살이 더욱 찬연하듯 오히려 소년의 천진난만한 일면을 두드
러지게 할 뿐이었다.
'으음.......'
염천월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이 풀어져 버렸다. 그는 단지 담담한 심경으로 상
대가 산 속의 소년답지 않게 산뜻하고 귀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상대는 무림인이 아닌 것이다.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살벌
한 적수가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방심은 당연지사였다. 더우기 소년의 모습에서 전해지는 천진함은 그로
하여금 묘한 안식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소년의 호기심 어린 초롱한 눈망울이 자신에
게로 향해져 있었다.
"휴우......."
염천월은 그 눈길에 한층 나른해지는 기분이 되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바위
에 등을 더욱 편안히 기대는 그에게 소년이 먼저 물어왔다.
"할아버지는 어젯밤 술을 마셨나요?"
귀엽고 분명한 음성이었다. 다만 첫마디 치고는 너무나도 엉뚱한 질문인지라 염천월은
어이가 없었다.
그는 피식 웃었으나 담담히 되물었다.
"그건 왜 묻느냐?"
소년은 눈을 반짝이며 제법 관심있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까부터 할아버지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걸어왔고 또 몹시 피곤한 표정을
짓고 있잖아요?"
염천월은 역시 실소했다.
"그래, 나는 술을 먹었다."
소년의 영민해 보이는 눈이 갑자기 찌푸러 들었다. 그러더니 마치 충고라도 하듯 또박
또박 말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면 안 좋아요. 건강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할아버지같이 나이많은 분은 술을 드시면 절대로 안 되는 거예요."
염천월은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소년은 충고(?)를 그치
지 않았다.
"만약 술에 취해 산 속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 아녜요? 잘못하면 사나운 짐승
들의 밥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풍진강호를 피(血)로 씻던 대마두 염천월.
그는 소년의 거침없는 나무람이 싫거나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기이한 호
감마저 일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댄 채 물었다.
"너는 이 근처에 사느냐?"
"네, 저 쪽으로 조금만 가면 저의 집이 있어요."
소년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위를 기었다.
쿵---!
소년이 땅에 내려섰다. 그 바람에 큰 가죽털 모자가 쓸려내려와 소년의 눈을 덮어 버
렸다.
소년은 이내 고사리같은 손으로 모자를 치켜 올리고는 잰 걸음으로 염천월에게 다가왔
다. 이어 소년은 염천월의 맞은 편에 앉더니 손으로 턱을 괴며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
았다.
그러다 문득 소년은 그의 앞가슴에 묻은 피를 보더니 약간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할아버지도 우리 아버지같이 피를 토하는 군요?"
염천월은 괜스리 움찔했다.
"너의 아버지도 피를 토하느냐?"
소년의 해맑던 얼굴이 금세 침울하게 변했다.
"저의 아버지는 요즘 들어 계속 술을 드세요. 그래서 건강이 아주 나빠요. 매일 기침
을 하시는데 그때마다 피를 토하곤 해요."
소년은 풀이 죽어 버린 듯 눈을 내리깔았다.
"정말 걱정이 되어 죽겠어요. 제가 아무리 말려도 아버지는 듣지 않아요. 그리고 또..
.... 어떤 때는 저를 막..... 때리기도 해요......."
소년이 울먹울먹하자 염천월의 입에서 자신이 듣기에도 몹시 괴상한, 격앙된 음성이
튀어나왔다.
"너의 아버지는...... 난폭하구나!"
그러자 소년은 급히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예요! 아버지는 정말 좋은 분이에요. 단지...... 술만 드시면......."
"으음."
"술을 드실 때만 그럴 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술 먹는 사람을 싫어해요."
염천월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럼 너는...... 왜 나하고는 이야기를 하느냐?"
소년은 얼굴을 붉히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웬지 할아버지는 무척 다정하고 인자한 분 같아요."
염천월은 가슴 한 귀퉁이가 뜨끔했다.
'내가, 다정하고 인자하다고?'
그의 얼굴에 쓰디쓴 자조가 스치고 지나갔다.
"욱! 쿨럭! 쿨...... 럭......."
그는 다시 심한 기침을 해댔다. 심리적인 영향인지 가슴의 통증이 다시 격발된 것이다
"할아버지!"
소년이 불안한 음성으로 부르짖었으나 염천월의 기침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쿨럭! 쿨...... 럭......."
소년은 크게 상심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것 봐요! 술을 너무 마시니 그렇게 아프잖아요. 할아버지, 제가 가서 물이라도 떠
올까요?"
그 말에 염천월의 눈이 이채를 띄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어 나직하게 말했다.
"물....... 얘야, 물은 그만 두고 술을 좀 가져 오겠느냐?"
"네?"
소년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렇게 취하고도 또 술을요?"
"안...... 될까......?"
염천월은 짐짓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덧 그도 천진한 소년으로 동화되어 있는
것인가?
협박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일개 소년을 앞에 두고 그는 간절한 부탁을 하고 있는 것
이다.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그야말로 까무라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 반면에 소년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염천월의 늙은 얼굴이 처량해 보이자 그만 마음이 약해졌다.
"그럼 조금만 갖다 드릴테니, 내일부터 술을 안 마시겠다고 약속하시겠어요?"
염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한다......."
소년은 얼굴이 환해지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럼, 곧 다녀 올께요!"
소년은 이렇게 외친 뒤 쏜살같이 산 아래 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다 갑자기 소년
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중턱 쯤에서 뚝 멈추더니 돌아섰다.
"할아버지! 어디 가시지 말고 꼭 기다려야 돼요!"
소년의 청량한 외침이 산허리에 휘감겨 들었다. 염천월은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며 다
시금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안심하고 다녀 오너라."
그러자 소년은 다시 몸을 돌리더니 재빨리 사라져 갔다.
염천월은 한동안 소년이 사라진 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귀여운 아이다.......'
한참 후에야 그는 탄식하며 눈을 내리 감았다. 그는 처음 본 소년에게 말할 수 없이
정(情)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특히나 맑고 명랑한 듯 하면서도 진한 애수가 함께 깃
든 소년의 큰 눈동자는 그로 하여금 먼 옛날을 생각나게 했다.
'그때 그녀가 죽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내게도 저런 손자가 재롱을 떨고 있겠지
.......'
염천월의 얼굴에는 곧 쓰라린 표정이 일었다.
'아! 염천월, 너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구나. 왜 잊어야 하는 과거를 자꾸만 되새
기는가?'
이윽고 그는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이를 악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염천월! 너는 언제나 외로운 방랑객이 아닌가? 부질없는 감상에 빠지지 말고 가자!
또 떠나야 한다.'
염천월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 순간 그의 발길을 뒤로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각인된 소년의 모습이었다. 가다말고 돌아서서
신신당부하던 표정, 소년의 그 천진한 얼굴에는 그에 대한 깊은 애착이 담겨 있지 않
았던가?
염천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소년의 영상을 지우려는 듯이....... 이어 그는 마음
을 다잡은 듯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없었다.
가다가 멈추고, 또 가다가 멈추기를 대체 몇 번인지 몰랐다. 마침내 포기하고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표정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역시 알 수 없었다.
단지 눈에 보일 정도로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이제껏 냉막하고 공허하기만 하
던 그의 눈에 희한할 정도로 부드러운 빛이 감돌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염천월은 멀리 드넓은 창공을 바라보더니 불현듯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아! 이제 보니 오늘이 나의 백이십 번째 생일(生日)이었군."
본시 고아(孤兒)였던 염천월.
그에게도 생일은 있었다. 바로 보름달(十五夜)이 뜨는 날, 즉 염천월은 스스로를 보름
밤에 태어났다고 믿고자 했으며 그때부터 중추절(仲秋節)이 그의 생일이 되었다.
오늘, 해마다 돌아오는 중추이자 자신의 생일.......
염천월은 다시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더니 일체의 표정을 모두 거두어 버렸다. 따라서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그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소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굽이로부터 뛰어 올라왔다. 가슴에 작은 호로병을 안은
채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소년은 몹시 숨을 헐떡이면서도 반색을 했다.
"헉! 헉...... 계, 계셨군요!"
염천월은 소년이 다가오자 쓴웃음을 지으며 반문했다.
"그럼 내가 갈 줄 알았느냐?"
"저, 저는 웬지 모르게 할아버지가 훌쩍...... 떠...... 날 것만 같은 느낌이 들.....
. 어서......."
호흡이 미처 정돈되지 않아 연신 힘겹게 이어지는 소년의 말에 염천월은 또다시 가슴
이 찡하니 울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가지 않기를 잘했구나.'
소년은 활짝 웃으며 수중의 호로병을 내밀었다.
"자, 여기 술이 있어요."
"고맙구나."
염천월은 호로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산촌 특유의 독하고 진한 술향기가 풍겼다.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은 않고 기이하게도 가슴의 옷을 플어 내고 있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음......."
소년이 물어도 염천월은 신음을 발할 뿐이었다.
그의 풀어 헤쳐진 가슴에 찍혀 있는 선명한 붉은 장인(掌印)을 보고 소년이 화들짝 놀
랐다.
"할아버지! 그것은 왜 그렇게 됐지요?"
염천월은 그제서야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젯밤 술이 취했을 때 어떤 못된 자가 때린 자국이다."
소년은 대뜸 흥분하여 외쳤다.
"나쁜 사람이군요! 할아버지같이 나이 많은 분을 때리다니!"
말을 잃고 만 염천월을 향해 소년은 작은 주먹을 다부지게 움켜쥐어 보였다.
"내가 이 담에 크면 반드시 그 사람을 혼내줄 거예요. 꼭!"
염천월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고맙구나."
그는 술을 손바닥에 따르더니 가슴의 붉은색 장인에 대고 문질렀다. 술이 피부에 스며
들자 즉각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염천월의 얼굴에 조소가 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적중당하면 영원히 치유할 수 없다는 천극광염장이 이깟 술로 치료된다는 사실을 알
면 기고만장한 천불사 놈들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의 생각대로 가슴의 뻘건 장인은 거짓말처럼 술로 씻겨 나가고 있었다. 소년이 그것
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신기하네요. 어째서 맞은 자리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죠?"
염천월을 기분이 밝아져 자신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 나는 이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남에게 맞아도 걱정을 하지 않는
단다."
소년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맞는다는 것은 좋지 않아요."
"허허허허......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염천월은 계속하여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스스로도 크게 놀라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아! 내가 웃다니....... 지난 백 년 동안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던 내가 아니던가?'
기실 혈해마존 염천월은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냉혈한, 이것이야말로 그를 일컫는 가
장 올바른 표현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천월은 지금 웃고 있었다.
한 천진난만한 소년(少年)을 만남으로써 바야흐로 염천월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었
다. 그는 내부에서 일어나는 놀라움을 갈무리하며 기이한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소년 또한 총명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아직 네 이름을 묻지 못했구나."
염천월의 말에 소년은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제...... 이름요......?"
웬일인지 매우 난처한 듯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네 이름 말이다."
"제, 제 이름이 좀 우스워서......."
소년이 더듬거리며 말 끝을 흐리자 염천월은 호기심을 느꼈다.
"이름이 뭔데 그러느냐?"
소년은 한동안 끙끙대더니 자못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성(姓)은 제갈(諸葛)이에요."
"제갈이라, 그럼 이름은?"
"이름은...... 이름은...... 월(月)...... 풍(風)이라고 해요."
"월풍(月風)!"
염천월은 그 이름이 전혀 우습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에 벅찬 감동이 밀려듬을 금치
못했다.
"월(月)....... 월풍......."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우울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거봐요! 할아버지도 역시 괴상한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염천월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풍아(風兒)야. 절대 그렇지 않다. 정말 나는 네 이름이 좋단다."
소년의 얼굴은 대번에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이에요?"
"그렇다. 정말이다."
그러자 소년은 들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태어나던 날, 유난히도 달(月)이 밝고 바람(風)이 거세게 불었대요."
"음, 그래서 월풍(月風)이라 했군."
"네! 그런데 제 이름을 듣는 사람들은 언제나 웃어요. 무슨 이름이 그러냐고요."
염천월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어렸다.
"그건 그 사람들이 무식해서 그렇다."
소년은 씨익 웃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모두 엉터리예요. 저도 사실은 제 이름을 무척 좋아해요."
노소(老少).
각기 기구한 운명(運命)을 걸머진 두 노소가 서로 웃으며 정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평생을 피비린내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온 염천월의 삭막했던 가슴에도 따스한 정(情)
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실로 백여 년 만에 처음 인간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어느덧 석양(夕陽)이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소년, 즉 제갈월풍(諸葛月風)은 붉은 석양을 가리키며 더욱 환한 음성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석양이에요."
"그래, 무척 아름답구나."
"할아버지, 저 석양이 지면 곧 달이 뜨겠죠?"
염천월의 내면에서 또다시 작은 파랑이 일었다.
"그래, 보름달이 뜰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해놓고 스스로 취해버린 듯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표정이 마구 흔들렸다.
제갈월풍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할아버지,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는 지체없이 나무 위로 날쌔게 기어 올라갔다. 염천월이 어리둥절하여 물었다.
"왜 그러느냐?"
제갈월풍은 고목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눈을 반짝이며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엄마를 기다리는 거예요."
"엄마?"
"네, 저의 어머님은 제가 세 살 때 제 곁을 떠나셨어요."
제갈월풍은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가셨냐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을 꺼내면 술을 더
마셔요."
염천월은 그만 말을 잊은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제갈월풍이 계속 석양을 응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자꾸 물으니까 대답했어요. 어머님은 제가 열살이 되기 전에 돌아오신다
는 거예요."
염천월은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으음....... 그럼 곧 있으면 오시겠구나."
"네. 석양이 지고 둥근 만월이 뜨면 어머님이 많은 선물을 들고 오신댔어요. 아버지는
지금도 어머님 얘기만 나오면 침울해 하시지만요."
염천월은 무언가 깨달아지는 바가 있자 부지중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아! 이 아이의 모친은 이미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갔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제갈월풍의 모친은 그가 세 살 때 정말로 죽은 것이었다. 아울러
그 사실은 염천월로 하여금 또다시 가슴에 진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월풍.......'
염천월은 제갈월풍에게로 급격히 끌려드는 마음을 억제키가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사위에 어둠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마침내 동(東)쪽에 달이 떴다. 만월(滿月), 십오야(
十五夜)의 보름달이었다.
천지는 수려한 달빛으로 인해 신비한 경관을 이루며 은은한 푸른 빛에 물들어 갔다.
노소(老少) 두 사람은 모두 달을 바라보며 넋을 잃었다.
염천월의 혼(魂)은 그대로 달 속에 들어가 있었으며 제갈월풍의 눈 속에도 둥근 달이
떠 있었다. 마치 달 속에 빠진 듯 멍하니 달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에게 있어 그
이상의 진한 교감은 따로이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노소는 밤이슬로 인해 의복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꽤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은 달이 중천에 걸린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제갈월풍이 힘없이 나무에서 내려왔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해져 있었다.
"오늘도 오시지 않았어요. 어머님은 이 풍아가 보고 싶지도 않나 봐요."
염천월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풍아야, 너는 지금 몇 살이냐?"
부드럽고 인자한 음성이었다. 제갈월풍은 나직히 대답했다.
"일곱살이에요."
"허허허...... 그럼 아직 삼년이나 남았지 않느냐? 어머님은 그때 틀림없이 올 것이다."
제갈월풍의 얼굴이 금세 활짝 펴졌다.
"맞아요. 제가 공연히 우울해 했어요. 어머님은 반드시 오실 거예요. 어머님은 이 풍
아를 사랑하실 테니까요."
이번에는 염천월의 두 눈이 출렁였다. 오히려 완전히 슬픔을 떨쳐버린 제갈월풍이 그
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집이 어디예요?"
염천월은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 집이 어디냐고?'
그는 곧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이 근처다."
제갈월풍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미안한 듯 말했다.
"저희집이 크다면 같이 갈텐데....... 방이 하나 뿐인데다 아버지가......."
염천월은 콧날이 시큰해질 정도로 감정의 동요를 느꼈으나 제갈월풍이 더이상 뭐라 말
하기 전 짐짓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허...... 풍아야, 나도 집이 가까우니 괜찮다."
제갈월풍의 고개가 일순 푹 떨구어졌다. 그는 끝내 염천월에 대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
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는 불쑥 물었다.
"그럼 내일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흐음?"
염천월은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눈이 기이한 빛을 담은 채 소년을 바라 보
았다.
제갈월풍의 갈망이 그의 망막에 세차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간절히 대답을 기다리는
순진한 소년을 향해 염천월이 할 수 있는 말이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래....... 물론이지."
제갈월풍은 펄쩍 뛰다시피 좋아했다.
"아! 다행이에요. 풍아는 너무나 기뻐요. 그럼 내일 아침에 여기로 오면 되나요?"
"그래, 그러렴."
제갈월풍은 안심한 듯 뒤로 물러나며 꾸벅 절을 했다.
"할아버지, 그럼 풍아는 이만 가보겠어요."
"그래."
제갈월풍은 아래로 달려내려 갔다. 얼마쯤 가다가 그는 아까처럼 몸을 돌리더니 작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염천월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윽고 제갈월풍은 언덕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염천월은 한동안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그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쓸
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 밤도 이슬을 맞고 자야겠군.'
그러나 곧 믿을 수 없게도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 올랐다. 염천월은 내심
자문했다.
'웬일일까? 오늘밤 이다지도 마음이 포근한 것은....... 나의 백이십 번째 생일(生日)
날.......'
그는 점차 기울어가는 만월을 바라보았다.
그 속에서 그는 제갈월풍의 귀여운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잘 자라. 풍아야....... '
염천월.
그는 지극히 안온한 심경이 되어 스르르 눈을 감았다.
< 第 1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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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2 章. 한천강(恨天江)의 조손(組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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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량산(呂梁山) 기슭.
이곳에 한 채의 모옥(茅屋)이 생겨나더니 한 노인(老人)이 살기
시작했다.
비록 강팍한 용모였으나 노인의 눈빛은 항상 인자하고 부드러웠다.
실제로 평생 웃음 한 번 보일 줄 모를 것 같은 메마른 얼굴에는
끊임없이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조락(凋落)의 가을이 가고 초겨울로 들어섰다.
여량산 기슭의 후미진 곳에는 드문드문 흰 눈이 쌓이기도 했다.
특히 고봉(高峯)에는 노승의 눈썹인 양 백설이 늘 차분히 얹혀져
있었다.
오시(午時)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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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옥의 마당에서는 이곳에 살고 있는 노인이 언제부터인가 정성스러운 손길로 토끼의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노인은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돌로 쌓은 낮은 울타리 밖으로 언덕 아래를 살피고 있었
다. 그의 얼굴에는 무엇을 기다리는 표정이 역력히 보였다.
영락없는 평범한 촌로(村老).
지금 그가 벌이는 일련의 행위들은 꼭 그랬다. 그러나 그는 분명 혈해마존(血海魔尊)
염천월이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고독한 낭인을 자처하던 그가 제갈월풍이라는 한 소년 때문
에 일생(一生)을 가름하던 기질마저 바꾸어버린 것이다.
"올 때가 됐는데?"
염천월은 중얼거리고 나서 다시 담장 밖을 건너다 보았다. 그러던 한순간, 그의 흰 눈
썹이 섬칫 치켜 올라갔다. 인기척을 감지한 것이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그러나 풍아는 아니다. 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경공(經功)
이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다.'
염천월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절히 변하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그는 피와 죽음만이 존재하는 강호무림에 대해 염증을 느낀지 오래였다. 따라서 그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경계하며 내심 기구하는 심정이 되었다.
'제발 지나가는 과객이길 바랄 뿐이다.'
마침내 인기척이 지척에 이르렀다. 동시에 그의 기대는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냉랭하고 살기 띈 외침이 여량산의 정적을 흔들었다.
"염천월! 나와라."
'기어코!'
염천월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이내 염천월은 싸늘한 눈
빛을 흘리며 서서히 몸을 돌렸다.
"어떤 친구인가?"
"흐흐흐......."
음산한 괴소가 울리더니 유령처럼 담장 앞에 한 인영이 나타났다. 마치 차가운 한풍이
모옥을 뒤덮는 듯한 순간이었다.
나타난 괴인영(怪人影).
그는 전신에 흑의(黑衣)를 입은 삼십 가량의 사내로써 낯빛은 흑의와는 너무나 대조적
으로 창백하여 마치 시체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용모는 매우 준수한 편이었으나 행색이 괴이했다. 검은 띠를 머리에 둘렀는
가 하면 손에도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는데 허리에도 역시 검은 색의 흑검(黑劍)을 차
고 있었다.
염천월은 상대방이 처음 보는 자라고 느꼈다.
"너는 누구냐?"
그가 묻자 흑의인은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염천월, 이십 년 전 너의 손에 죽은 흑살방(黑殺幇)의 방주 흑살귀검(
黑殺鬼劍) 장여항(張如恒)을 기억하겠지?"
염천월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음, 그럼 너는?"
흑의인은 독랄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그렇다! 내가 바로 그 분의 아들인 장죽산(張竹山)이다."
염천월은 침중하게 물었다.
"복수를 하러 왔나?"
장죽산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두말 하면 잔소리다. 아버님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장장 이십 년이란 세월 동안 칼을
갈아왔다."
염천월은 잠시 묵묵히 서서 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장죽산은 살광을 폭사하며 외치고 있었다.
"염천월! 자, 어서 검을 뽑아라."
염천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다."
"흐흐흐....... 염늙은이, 이제 겁이 나느냐?"
염천월의 얼굴에 일순 섬뜩한 살기가 스쳤다. 그는 곧 평정을 회복하더니 담담히 말했다.
"확실히 너의 무공은 대단히 높다. 그러나 아직 노부의 적수는 못된다."
장죽산은 다시 이를 갈며 외쳤다.
"싸워보지도 않고 무슨 흰 소리냐?"
"노부는 한 눈에 너의 무공수위를 알 수 있다. 너는 아직 내 상대가 안 된다."
"닥쳐라! 염늙은이, 나의 검을 받아라!"
장죽산은 금세라도 흑검을 뽑을 기세였다. 그의 전신은 흡사 복수와 원한으로 똘똘 뭉
쳐 있는 듯 했다.
염천월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담장 밖으로 내다보이는 언덕 아래를
향해 힐끗 시선을 주었다.
'이럴 때 풍아가 오면 큰일이다!'
염천월은 서서히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좋다! 나가서 싸운다면."
장죽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좋다! 어쨌든 내 오늘 네 놈의 피로 아버님의 젯상을 씻을 것이다."
휙----! 휙!
두 사람은 몸을 날렸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언덕을 몇 개 지나 한적한 산기슭에 이르렀다. 그곳에
는 얼음으로 화해버린 눈이 덮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 대치하고 섰다.
"염천월! 자, 검을 뽑아라!"
장죽산의 살기 품은 음성이 언 공기를 쨍 하고 울렸다.
반면에 염천월은 전혀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수중에는 항상 들고 다니던
고검도 보이지 않았다.
"노부는 검을 버렸다. 그러므로 이 양 손으로 상대하겠다."
장죽산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튕겼다.
"늙은이, 후회할 것이다! 나의 검은 잔인하고도 정확하다. 어찌 맨 손으로 막으려 하
느냐?"
염천월의 입가에 얼핏 조소가 어렸다.
"장죽산, 너의 검법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아직 멀었다. 노부는 한 쌍의 육장(肉掌)만
으로도 충분히 너를 감당할 수 있다."
"뭣이? 건방진!"
쐐-- 애---- 액!
언제 뽑았는지 보이지도 않을 만큼 쾌속하게 흑검이 다섯 가닥의 검은 선을 그리며 염
천월을 몰아쳤다. 실로 가공할 정도의 검세였다.
그러나 염천월은 두 다리를 꺾고, 미끌어 뜨리고, 회전하며 순간적으로 극히 자연스럽
게 상대의 빠르고 악독한 검세를 모조리 피해 버렸다.
쉬----익! 쌩----!
장죽산의 검은 계속하여 끈질기게 염천월을 따라 붙었다. 어지럽게 난비하는 흑광은
주위의 눈을 날리고 대기를 산산조각으로 갈라놓았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십초의 공격이 섬전처럼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염천월은 여전히 여
유있는 자세로 슬쩍슬쩍 검공을 모두 피해버렸다. 흑검은 그의 옷자락 하나도 건드리
지 못했다.
장죽산은 그만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과연 혈해마존 염천월이다!'
복수의 피를 마시며 이십 년 동안 연마했던 흑혼검법(黑魂劍法)이 상대에게 무용지물(
無用之物)이 됨에 그는 극심한 비통에 빠지고 말았다.
염천월은 기이한 신법으로 검세에서 빠져 나가더니 외쳤다.
"장죽산! 그만 물러나라. 노부는 더이상 살생을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에 장죽산은 아예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닥쳐라! 살인마."
쐐---- 액----! 쉭----!
그는 흑검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재차 덤벼들었다. 그것은 동귀어진의 악독한 수법이었
다.
"으음."
염천월의 눈에서 칼날같은 신광이 뻗었다. 검풍과 검기가 온몸을 토막낼듯 엄습해오자
한 가닥 살기가 솟구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과거의 염천월이 아니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살심(殺心)을 억누르
며 달을 따르는 그림자처럼 흑검의 세 치 근처에서 물 흐르듯 신형을 날렸다.
휙! 휙----!
장죽산의 필살의 검법은 또다시 무산되고 말았다. 동시에 장죽산의 문호(門戶)가 크게
열렸다.
이른바 절호의 기회였다. 염천월의 오른손이 한 차례 섬전처럼 번뜩였다.
팍---!
"윽!"
쨍그랑!
염천월의 수도(手刀)는 정확히 장죽산의 맥문을 쳤고 장죽산은 그만 수중에서 검을 떨
어뜨리고 말았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염천월의 수도는 미끌어지듯 날아가며 그의 어깨
를 가격했다.
퍽---!
"헉!"
장죽산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튕겨나갔다. 그는 피가 배이는 어깨를 손으로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이로써 그는 더 싸울 능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염천월은 차갑게 그를 노려보았다.
"네가 앞으로 백 년을 더 수련한다 해도 나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염천월은 말을 마치자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장죽산의 눈에서 악독한 빛이 솟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죽어랏----!"
그가 품 속에 손을 넣었다 빼는 찰나지간, 한 움큼의 독침(毒針)이 허공을 갈랐다.
쉬쉬쉭----! 슉!
날카로운 파공성과 동시에 염천월의 냉랭한 외침이 울렸다.
"너는 끝까지 비겁하구나!"
독침은 무형의 반탄력으로 인해 즉각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 버렸다. 뒤를 이은 것은
오히려 장죽산의 답답한 신음성이었다.
"으윽---!"
무거운 장력에 가슴이 뽀개지는 듯한 격통을 느끼며 장죽산은 뒤로 날아갔다.
쿵----!
바닥을 나뒹구는 그를 보며 염천월은 여전히 차갑게 내뱉았다.
"노부는 더이상 강호의 일에 관여치 않을 것이다. 나를 건드리지 말아라. 조용히 이대
로 내버려 두는 게 너의 신상에도 이로울 것이다."
그러나 장죽산은 그의 말에 수긍하기는커녕 이를 악물었다. 이어 그는 벌떡 일어서더
니 무엇인가 품 속에서 홱 뿌려냈다.
카---- 오!
날카로운 괴성이 울리며 흰 빛이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염천월은 흠칫 놀라며 급히 피함과 동시에 손으로 흰 물체를 움켜 쥐었다. 그것은 한
마리의 작은 고양이같은 형상으로 머리에 붉은 색의 뿔이 돋쳐 있는 괴수(怪獸)였다.
그것을 보자 염천월은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음....... 이제 보니 너는 이 독각묘(獨角猫)로 나의 뒤를 추적했구나."
장죽산의 얼굴에 대뜸 공포가 어렸다.
'으으....... 일류 고수들도 두려워하는 저 독각묘를 손 안에 움켜 쥐다니!'
염천월은 무심한 표정으로 독각묘를 내던졌다.
크---- 악!
독각묘는 비명을 지르며 즉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완전히 으깨어져 죽은 것이다.
염천월은 장죽산을 바라보며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거라. 내 옛날 같으면 너를 죽여도 백 번은 더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
"으으......."
장죽산은 완전히 기가 질려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버렸다. 염천월은 더이상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버렸다. 장죽산은 비로소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염천월
의 뒷등을 향해 소리쳤다.
"염가야! 두고 보자. 내 오늘은 그냥 돌아가지만 훗날 반드시 복수를 하고야 말 것이
다."
장죽산의 음성에는 뼈저린 살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염천월은 못들은 체 계속 걸어갔으나 내심 격랑처럼 이는 회한을 어쩔 수 없었다.
'아! 피, 복수....... 이 모든 것은 언제나 끝나려는가?'
휙---!
그는 마치 고통에서 일탈하려는 몸부림처럼 신형을 쏘아올렸다. 피의 윤회(輪廻)를 잊
고 하나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듯.......
모옥.
염천월의 표정은 모옥의 안마당을 보는 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마당 가운데에 제갈월
풍이 서 있었던 것이다.
추위를 막기 위해 산짐승의 털옷을 껴입은 제갈월풍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귀
엽게 보였다.
"풍아야, 내가 왔다!"
염천월은 가슴의 진동을 제어하지 못해 들뜬 음성으로 외치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제
갈월풍이 반색을 지었다.
"할아버지! 어디 갔다 오세요? 풍아는 한참이나 기다렸단 말이에요."
제갈월풍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자 염천월은 절로 마음이 밝아짐을 느끼며 너털웃
음을 터뜨렸다.
"허허....... 미안하다. 그 대신 이 할아버지가 풍아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마."
제갈월풍의 눈이 다시금 별빛을 뿌려냈다.
"어떤 것인데요?"
"허허....... 조금만 기다려 봐라."
염천월은 곧 한 쪽에 치워두었던 토끼를 꺼내 뒷마당으로 갔다. 뒷마당에는 진흙과 나
무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건 뭐하는 것이에요?"
제갈월풍이 호기심에 묻자 염천월은 즐거운 마음이 되어 흔연하게 웃었다.
"두고 보려무나. 무엇을 하는지."
그는 가죽을 벗긴 토끼의 몸에 진흙을 두툼하게 발랐다. 이어 나무를 모아 불을 붙인
다음 진흙덩이가 된 토끼를 불 위에 올려 놓았다.
"으응?"
제갈월풍은 이런 식으로 고기를 굽는 것을 처음 보았는지 흥미를 가지며 바짝 다가들
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불 옆에 앉아 있는 그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기까지 했다.
잠시 후.
고기가 익는지 구수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
제갈월풍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는 냄새예요."
"허허...... 그러냐?"
염천월은 진흙덩이를 굴리며 골고루 불길이 닿게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길이 사라지고 고기 익는 향기가 더욱 진동했다.
염천월은 진흙덩이를 들어낸 뒤 손으로 흙을 뜯어냈다.
"아!"
제갈월풍은 또 한 번 탄성을 질렀다. 흙덩이가 떼어지자 붉게 익은 토끼의 살이 그 사
이로 보여졌던 것이다.
"허허...... 토끼고기는 이렇게 구어야 맛있단다."
염천월은 웃으며 신중하게 나머지 진흙을 떼어냈다.
이윽고 잘 익은 토끼의 고기가 고스란히 드러나자 염천월은 연신 군침을 삼키는 제갈
월풍에게 고기를 찢어 건네 주었다.
"자, 어서 먹어라."
"네!"
제갈월풍은 급히 받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다.
염천월은 자애로운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훈훈한 인정(人
情)이 가득 타오르고 있었다.
제갈월풍이 문득 먹던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안 드세요?"
"허허...... 나는 네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른 것 같구나."
제갈월풍은 먹던 고기를 내리며 금세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 할아버지가 안 드시면 풍아도 먹지 않겠어요."
"허허헛...... 알겠다. 그 녀석......."
염천월은 흐뭇한 웃음을 발하며 고기 한 점을 떼어 입에 넣었다. 그의 늙은 눈에 서서
히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염천월은 내심 간절히 부르짖고 있었다.
'신(神)이여! 제발...... 이 늙은이의 작은 행복마저 빼앗아 가지말아 주시오.......'
그는 급히 소매로 눈가를 문질렀다. 어느새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나온 것이다.
정녕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세(一世)의 대마두이자 대살성(大殺星)인 염천월이 이
토록 나약하고 인정많은 노인으로 변모했다면 과연 그 누가 믿겠는가?
아무튼 일노일소(一老一少)는 마냥 흥겨웠다. 두 사람은 그림처럼 마주앉아 담소하며
토끼고기를 먹고 있었다.
염천월은 요즘 들어 심기가 매우 불편해져 있었다.
벌써 며칠째 제갈월풍에게서 소식이 없자 그는 의아한 한편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따
라서 오로지 제갈월풍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풍아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석양(夕陽)이 지고 있었다.
염천월은 석양을 바라보며 마음이 한층 더 암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에 제갈월풍이 이토록 크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그간에 제갈월풍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모옥을 찾아와 놀다가고는 했다. 그
러니 연 닷새 동안을 찾아오지 않자 염천월의 마음은 불안의 먹구름에서 도시 헤어나
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상심을 떨치고 일어서기에 이르렀다.
'어디 내가 한 번 찾아가 보겠다.'
휙----!
염천월은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한 점의 유성인 양 어두운 밤하늘을 가르고 언
덕 아래로 날아갔다.
언덕을 두 번 넘으면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초라한 한 채의 초옥이 있었다. 그
초옥이 바로 제갈월풍의 집이었다.
염천월은 순식간에 초옥이 있는 언덕 기슭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절로 경
악성이 터져 나왔다.
"앗!"
놀랍게도 초옥에서는 뭉클뭉클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풍아의 집에 불이 나다니!'
염천월은 안색이 급변한 채 신법에 박차를 가해 빛살처럼 초옥 앞으로 날아갔다.
완전히 화염에 휩싸인 초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이럴 수가!"
염천월은 급히 주위를 훑어 보았다. 그러던 한순간 그는 또 한번 안색이 급변하고 말
았다. 초옥과 조금 떨어진 곳에 제갈월풍이 멍하니 선 채 불타는 초옥을 바라보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염천월은 소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목도하고는 부르짖듯 소리쳤다.
"풍아야!"
제갈월풍도 염천월을 발견하자 울음섞인 외침을 발했다.
"할아버지!"
그러나 소년은 눈물어린 눈가에 그래도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두 주먹으로 눈물을 쓰
윽 문질러 닦고 있었다.
염천월은 새삼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음성이 다소 떨려 나왔다.
"어, 어떻게 된 일이냐? 어째서 집에 불이 났느냐?"
의외로 제갈월풍의 대답은 야무졌다.
"제가 질렀어요!"
"뭣이!"
염천월은 크게 놀랐다.
"왜? 무엇 때문에?"
제갈월풍의 얼굴에 일순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오일 전부터 아버님의 병세가 심해지셨어요."
"아버님은 어디 계시냐?"
그 말에 제갈월풍은 잠시 멍해지는가 싶더니 손가락으로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저 연기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시잖아요?"
"그, 그럼...... 이미......?"
제갈월풍은 두 눈에 처량한 미소를 띄웠다.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으음......."
"그, 그래서...... 그래서...... 하늘 높이 날아가서 먼데 계시는 어머님을 만나시라
고 화장을...... 흑흑......."
결국 제갈월풍은 어린애였다. 그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염천월의 품에 안겨 들었
다.
염천월은 작은 소년의 등을 두드리며 내심 탄식했다.
'아! 이 불쌍한 녀석, 너의 운명은 어쩌면 나와 이리도 흡사하단 말이냐?'
제갈월풍은 이내 그의 품에서 벗어나더니 다시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버지가 제게 말했어요. 결코 슬퍼하지 말라고....... 웃으라고 말이에요."
제갈월풍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할아버지, 저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번...... 이번만은
...... 저도...... 울고 싶은 걸요......."
"풍아!"
염천월이 그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래, 울어라! 실컷 울어라. 너의 그 슬픔이 씻겨나갈 때까지 마음대로 울어라. 이
할아버지가 네 아버님에게 잘 말해주마."
그러나 제갈월풍은 슬며시 몸을 빼내더니 억지로 웃었다. 천하의 그 어떤 울음보다도
더 슬프게 보이는 웃음이 소년의 얼굴에 흐르고 있었다. 오히려 염천월의 눈이 축축히
젖어 들었다.
'강인한 녀석! 그러나 강인한 것은 무감한 것과는 다르다. 아아! 이 아이는 항차 이
고통을 어떻게 딛고 일어서야 하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던 연민은 곧 다른 색채로 바뀌어갔다
'그렇다! 이 아이는 나와 인연이 너무도 깊다. 반드시 내가 이 아이의 고독을, 아니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
제갈월풍이 신색을 바로잡으며 그의 소매를 끌었다.
"할아버지, 가요! 이제 이곳을 떠나요."
염천월은 나직히 물었다.
"어디 갈 데가 따로 있느냐?"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하지만 더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는 않아요. 어디로든 떠날 거예요."
제갈월풍은 먼저 걸음을 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꼿꼿이 걷고 있었다. 그가 내심
눈물을 철철 쏟고 있음을 염천월은 모르지 않았다.
염천월은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휘황한 달빛 아래 두 노소가 말을 잊은 듯 계속 걷고 있었다.
지금 두 사람이 지나는 곳은 그들이 지난 날 처음 만났던 고목나무와 바위가 있는 장
소였다.
제갈월풍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목나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지 위에 걸
터앉아 어머니를 기다리던 마음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염천월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풍아야, 이제는 어머님을 기다리지 않을 작정이냐?"
소년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그러나 그는 역시 급히 눈물을 닦
으며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 이제 어머님은 풍아가 기다리지 않아도 될 거예요."
염천월이 의아해하자 제갈월풍은 부언했다.
"아버님이 찾아 가셨으니 제가 기다리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거예요."
염천월은 그 말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아! 이 아이는...... 도저히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생각이 깊구나. 결국 어머니가 죽
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이 아닌가?'
제갈월풍은 그때까지도 고목나무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둥근 만월
로 시선을 옮겼다.
염천월은 나직히 기침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아야, 이 할아버지의 집으로 갈까?"
제갈월풍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그 모옥 말인가요?"
"아니다. 이 할아버지에게는 진짜 집이 있단다."
제갈월풍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그건 어디예요?"
염천월은 감회가 깃든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무척 먼 곳이지. 저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쯤 될까?"
제갈월풍이 대뜸 그의 말을 받았다.
"가요! 저는 어디까지라도 할아버지를 따라가겠어요. 저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내가 어찌 너를 버릴 수 있겠느냐? 안심해라. 나는 너와 같이 영원히 살고 싶단다."
"정말이에요?"
"그래, 정말이다."
제갈월풍의 눈이 다시 젖었다.
"할아버지! 고마와요."
"고맙긴......."
염천월은 소년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 가자. 비록 백여 년 동안 찾지 않은 곳이지만 이제 돌아가면 그곳은 따스한 정
(情)이 넘치겠지. 풍아가 있으니까.'
두 사람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눈부신 달빛이 퍼부어지는 가운데 커다란 강(江)이 앞을 가로 막았다.
쏴---- 아---- 콰르르---!
급격한 물살이 굉음을 내며 흘렀고 달빛이 급류에 부서져 산산조각이 된 채 떠내려가
고 있었다.
지극히 아름다우면서도 밤을 홀로 지나는 물줄기가 웬지 처량하게 느껴지는 강(江),
그리고 이곳 강변에 긴 그림자를 대동하고 나타난 염천월과 제갈월풍.......
제갈월풍은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급류를 이루고 있는 강을 굽어보았다.
"할아버지, 저 강의 이름이 뭔지 아세요?"
염천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른다."
제갈월풍의 서글픈 눈이 강상(江上)에 고정되었다.
"저 강의 이름은 한천강(恨天江)이에요."
"한천강?"
"네, 원래는 물결이 잔잔했대요. 그런데 언제인가 저곳에 한 명의 소년(少年)이 빠져
죽었대요."
제갈월풍은 낮은 음성으로 계속 말했다.
"그러자 그 소년의 할아버지가 소년의 시체를 찾으러 밤낮없이 강을 헤매다 찾지 못하
고는 강에 몸을 던져 버렸대요."
염천월의 몸이 한 차례 부르르 떨렸다. 불현듯 심중에 치밀어 오르는 한 줄기 상념이
급류보다 더욱 세차게 그의 심장을 두드린 것이다.
따라서 제갈월풍의 낮은 음성은 이제 그의 귓가에 이르자 천둥소리보다 더 큰 공명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 이후...... 저 강은 물결이 거세어졌고 특히 밤만 되면 귀신의 호곡을 토해낸대요
. 마치 손자를 찾는 할아버지의 울부짖음처럼 말이에요......."
제갈월풍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았다.
염천월은 묵묵히 한천강을 응시했다. 그러나 어두운 밤, 격류로 인해 일어나는 뿌우연
물안개는 그의 의식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말았다.
'한천강.......'
염천월은 전율과 함께 내심 되뇌이더니 멍하니 서 있는 제갈월풍을 바라보았다.
"풍아!"
염천월은 소년의 작은 몸을 당겨 으스러져라 끌어 안았다. 제갈월풍 또한 다소곳이 그
의 품에 몸을 맡겼다.
콰르르---- 쏴아아----!
물살의 굉음 속에서도 제갈월풍은 천천히 꿈나라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마도 한천강의 사이좋은 조손(組孫)이 그의 꿈길을 지배하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염
천월의 품 안에서 미소를 띈 채 평온하게 눈을 내리감고 있었다.
"풍아......."
염천월은 나직히 부르더니 제갈월풍의 감긴 눈 위에 자신의 뺨을 갖다대었다. 차갑고
축축한 물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미루어 채 마르지 않은 눈물 방울이 소년의 눈에 매달
려 있었던 것 같았다.
염천월은 일순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으나 잠이 든 소년의 고른 호흡에서 한 가닥 위
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소중한 보물을 대하듯 한동안 황홀한 시선으로 소년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강을 바라보았다. 모진 풍랑 뒤에 찾아온 고요와도 같이 그의 마음은 잔잔히 가라앉고
있었다.
'한천강에서 죽었다는 그 노인....... 후후....... 누군지는 모르나 무척 공감이 가는구나.'
문득 제갈월풍을 안은 그의 팔에 강한 힘이 배이고 있었다.
"좋다! 풍아, 이제부터 너는 나의 손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너를 보호할 것이다. 설사 나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
휘---- 익----!
그 자리에서 날카로운 경풍이 일었다.
염천월이 제갈월풍을 안은 채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은 거짓말처럼 한천강의 수면 일장(一丈) 위로
뜬 채 날아가고 있었다.
놀라운 신법, 아니 있을 수도 없는 경공술이었다.
염천월의 모습은 곧 한천강 건너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한천강의 격류 위로 눈부신 달빛만이 변함없이 뿌려지고
있었다.
< 第 2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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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3 章. 소년(少年)의 재치(才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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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이--- 잉---- 휘잉!
광풍(狂風)이 삭막한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중원(中原)의 북쪽.
살을 에이는 한풍(寒風)에 대지(大地)는 온통 꽝꽝 얼어 있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인지라 눈보라는 그야말로 기승을 부리며 천지를
마구 할퀴고 있었다.
휘---- 이---- 이---- 잉!
광풍폭설에 뒤덮인 협서성(峽西省)의 진령산(秦嶺山) 부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무렵이었다.
노소(老少) 두 사람이 눈보라를 헤치며 나타났다.
좁고 험한 산로(山路)에 나타난 두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혈해마
존 염천월과 제갈월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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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천월은 혹독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두터운 옷을 입지 않았다. 단지 어깨에
피풍 하나만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반면에 제갈월풍은 전신을 털옷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추위
로 인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기실 어린 나이의 제갈월풍으로서는 이러한 날
씨에 여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큰 무리였다.
염천월은 추위에 떨고 있는 그를 측은한 듯 내려다 보았다.
"풍아야, 추운가 보구나."
제갈월풍은 이를 딱딱 마주치면서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겨, 견딜만 해요."
염천월은 심히 안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품 속에서 한 개의 옥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
어 붉은 단약을 한 개 쏟아낸 그는 그것을 제갈월풍에게 내밀었다.
"이것을 먹어봐라."
"그, 그게 뭐예요?"
"이 할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태을열양단(太乙熱陽丹)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이것
을 복용하면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내의 양기(陽氣)가 크게 증진된단다.
"그, 그래요?"
제갈월풍은 굳어버린 조막손으로 단약을 받아서는 단숨에 꿀꺽 삼켰다. 그러자 이내
배꼽 근처가 뜨거워지더니 온 몸에 후끈후끈한 열이 발생했다.
추위가 단번에 말끔히 사라졌는가 하면 더운 열기에 두터운 털옷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실로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영효에 제갈월풍은 탄성을 발했다.
"야! 정말 신기하네요? 온 몸이 후끈후끈해졌어요."
제갈월풍은 쾌활하게 웃으며 허리를 쭉 폈다.
"허허...... 그러냐?"
제갈월풍은 또 무엇을 발견했는지 펄쩍 뛰며 외쳤다.
"할아버지! 저길 보세요. 불빛이 보이고 있어요. 아마 객잔인가 봐요."
염천월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과연 눈보라 속에서 멀리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오! 그렇구나. 빨리 가 쉬자."
노소 두 사람은 걸음을 재촉하여 산길을 걸어갔다.
천파객점(天巴客店).
눈보라를 맞으며 깃발이 찢어질듯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 밑에는 등이 걸려 흔들리고
있었다.
이 객점은 진령산 일대를 지나는 행인들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규모가 크지 않고 조촐
한 편이었다. 그저 근처에 있는 수십여 호의 인가들 사이로 비집고 자리잡은 평이한
객점일 따름이었다.
눈보라 때문인지 객점의 목문(木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끼---- 익!
염천월은 목문을 밀고 들어갔다.
객점 안에서 열기와 함께 음식냄새, 술냄새 따위가 확 끼쳐왔다. 의외로 많은 손님들
로 북적거리고 있었으며 이십여 개의 탁자가 거의 가득 메워지다시피 한 상태였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계산대에 앉아 있던 뚱뚱하고 기름기가 질질 흐르는 중년사내가
뒤뚱거리며 다가왔다.
"헤헤헤....... 어서 오십시요. 손님."
염천월은 주인인 듯한 그 사내에게는 일별도 않고 무심한 눈으로 와글대는 객점 안을
둘러보았다.
'음, 눈보라가 많은 사람들의 발을 묶어 놓았군.'
마침 비어있는 하나의 탁자가 있어 염천월은 그리로 안내되었다. 제갈월풍은 그를 따
라 자리에 앉고는 깊숙히 눌러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었다.
발갛게 상기된 미동(美童)의 얼굴이 드러나자 객점주인은 아첨하듯 웃었다.
"헤헤헤....... 정말 귀엽게 생긴 도련님이시군요."
그는 선심을 쓰듯 말을 이었다.
"자, 자, 도련님. 추울테니 이리 와서 불 좀 쬐도록 해요."
그는 한가운데에 놓인 장작을 때는 화로를 가리켰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
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난 춥지 않아요. 괜찮으니 걱정 말아요."
객점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동의 당돌함에 다소 당황한 모양이었다. 염천월의
착 가라앉은 음성이 그를 일깨웠다.
"여기 여아홍(女兒紅) 두 근 하고 이곳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 몇 가지만 주게."
객점주인은 급히 허리를 굽혔다.
"네, 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그는 뚱뚱한 몸을 뒤뚱거리면서도 나는 듯 주방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염천월은 다시금 찬찬히 주위를 훑어 보았다.
한 쪽 구석에서는 십여 명의 우락부락한 모습의 장한들이 모여서 골패짝을 맞추며 도
박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둥글게 모여있는 탁자에는 은자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한결같이 등에 갖가지 무기를 꽂고 있는 걸로 보아 그들은 분명 무림인들임에 틀림없
었다. 염천월은 눈살을 조금 찌푸리고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밖의 탁자에는 대충 상인(商人)들이나 평범한 여행객들이 술을 마시거나 잡담을 나
누고 있었다. 염천월의 예리한 눈이 한 곳을 살피다가 순간적으로 번쩍 신광을 발했다.
그곳에는 이십칠팔 세 쯤 되어 보이는 한 미부인(美婦人)이 귀엽게 생긴 팔구 세 정도
의 소동(小童)과 함께 불안한 표정으로 급히 음식을 들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미부인의 용모는 정녕 천하절색이라 할만 했다. 머리칼을 앞으로 내려
위장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였으나 역시 천성적인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염천월은 미부의 곁에 있는 소동을 본 순간 내심 실소했다.
'흠! 저 아이는 계집아이군. 그런데 변장을 하다니 무슨.......'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무림의 일에 상관하지 않기로 한 이상 모녀(母女)로 보이는
그 여인들에게서 모종의 사연이 짐작된들 일체 관심을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작금에 와서 그의 관심사는 오직 한 가지, 제갈월풍뿐이었다. 그의 눈이 부드러운 빛
을 띈 채 제갈월풍을 향했다.
그의 앞에 음식과 술이 날라져 왔다.
"풍아, 시장하겠구나. 어서 들도록 해라."
제갈월풍은 빙긋 웃으며 젓가락을 들더니 얼른 염천월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할아버지가 먼저 드세요."
염천월의 가슴에 다시금 따스함이 파문처럼 번졌다.
"그래, 어서 들자."
두 노소는 곧 음식을 맛있게 들기 시작했다.
염천월은 이따금씩 자음자작으로 여아홍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슨 생각이 들
었는지 잔에다 붉은 색의 여아홍을 가득 따르고는 물었다.
"풍아야, 너도 술 한 잔 하지 않겠느냐?"
제갈월풍이 질겁을 했다.
"저, 저는 술을 못해요!"
염천월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녀석아, 술을 많이 드는 것은 좋지 않지만 남아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술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주도(酒道)라도 가르치려 함인가? 마치 그의 뜻을 헤아려보기라도 하는 듯 제갈월풍은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다가는 대답했다.
"그럼...... 딱 한 잔만요."
제갈월풍은 술잔을 받더니 눈을 꼭 감고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러나 그는 곧 목구멍이
확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눈 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억! 콜록! 콜록! 콜록......."
제갈월풍은 충격을 받은 듯 정신없이 기침을 해댔다.
"허허허......."
염천월은 소년을 보며 가가대소했다.
"킥!"
어디선가 참았던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듯한 소리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또한
매우 청아하고 가느다란 소리였다.
제갈월풍은 창망중에도 급히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은 바로 미부와 소동
이 있는 곳으로써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는 소동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매우 아름답게 생긴 소동의 용모를 대하자 제갈월풍은 화를 내기보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야! 꼭 인형같이 예쁘게 생긴 애구나."
반면에 그와 눈길이 부딪치자 소동은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제갈
월풍은 그 행동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
'무슨 사내애가 저렇게 부끄러움을 탈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소동을 주시했다.
소동은 한순간 살그머니 고개를 들다가 제갈월풍이 여전히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염천월이 빙그레 웃었다. 아울러 그는 기분이 유쾌한 듯 술
을 한 잔 따라 쭉 들이켰다.
꽝----!
갑자기 엄청난 소리와 함께 객점의 목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 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
섰다.
그들 중 가운데의 인물은 금의를 입은 노인으로 육순 가량의 우람한 체격이었다. 두
눈에서 신광이 뻗쳐 나오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가죽띠에 열두 자루의 금빛 단도를 나
란히 꽂고 있었다.
그의 옆 오른쪽 인물은 흑의를 입었으며 기이하게 얼굴까지도 검은 색이었다. 뿐만 아
니라 밖으로 드러난 피부가 모두 흑색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는 형상이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왼쪽의 인물이었다. 그는 전신에 백색 장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
이 시체를 연상케할 정도로 창백한 백색을 띄고 있었다.
그들 흑백의 두 인물은 극히 대조을 이루는 한편 웬지 모르게 비슷한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또한 그들은 허리에 각기 똑같은 금도를 차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서자 구석에 앉아있던 미부의 안색이 대변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 인물은
미부와 소동이 있는 곳으로 접근해 갔다.
금의노인이 미부의 앞으로 가더니 음산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흐....... 무림지화(武林之花) 곽수옥(郭水玉)! 어디까지 도망갔나 했더니 이
곳에서 꼬리를 말고 있었군."
미부, 즉 곽수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걷혔다. 동시에 그녀의 눈가에서는 파르르 경
련이 일고 있었다.
그녀는 곧 눈매를 싸늘하게 모으며 앙칼지게 응수했다.
"탈백금도(奪魄金刀) 여문비! 대체 우리 모녀에게 원하는 게 뭐예요?"
탈백금도 여문비는 즉시 살기를 드러냈다.
"후후후....... 몰라서 묻느냐? 노부가 원하는 건 물론 그 만년취옥정(萬年翠玉情)이다."
곽수옥은 흠칫했으나 이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
"흐흐....... 곽수옥, 권하는 술은 들지 않고 벌주를 마실 셈이냐?"
곽수옥은 더욱 완강한 반발을 보였다.
"흥! 나는 만년취옥정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자 여문비는 주먹을 펴더니 곽수옥의 앞 탁자를 내리쳤다.
쾅!
다음 순간 탁자에서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 올랐다.
푸스스.......
이윽고 그가 손을 떼자 탁자에는 시커멓게 탄 장인(掌印)이 뚜렷이 찍혀 있었으며 그
깊이가 능히 삼 푼은 되어 보였다.
그를 보고 있던 염천월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음, 대단한 적살장(赤殺掌)이군. 저 자는 이미 십일성(十一成)의 화후에 도달했다.'
그 사이에도 탈백금도 여문비는 협박하듯 추궁하고 있었다.
"자, 이래도 내놓지 않겠느냐? 목숨을 보물과 바꿀 셈이냐?"
곽수옥은 만면에 땀방울을 매달면서도 여전히 부인했다.
"모른다! 나는 그런 것을 모른다."
여문비는 이를 갈았다.
"정녕 관(棺)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계집이군."
그는 고개를 돌려 흑의인을 바라보더니 차갑게 명령했다.
"흑무상(黑無常)! 저 계집을 잡아 전신을 샅샅이 뒤져봐라!"
"예!"
흑의인은 괴상한 음성으로 대답하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검은 얼굴에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곽수옥에게 손을 뻗쳤다.
"이, 이런!"
곽수옥은 안색이 잿빛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흐흐흐....... 계집년! 너는 장주님(莊主)의 말을 못들었느냐? 내가 손을 쓰기 전에
일찌감치 보물을 바쳐라."
"모른다! 나는 모른다!"
곽수옥은 더욱 앙칼지게 외쳤다.
이 소요로 인해 객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집중되어 있었다. 한쪽
탁자에서 골패짝을 돌리던 십여 명의 장한들도 손을 멈추고 눈에 괴상한 빛을 번뜩이
며 주시하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을 한 계집이구나!"
흑무상은 거칠게 외치고 나서 쌍장을 우악스럽게 휘둘러 공격했다. 곽수옥은 진땀을
흘리며 간신히 섬섬옥수를 마주쳤다.
펑----!
"으음!"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녀는 거센 충격을 받은 듯 나직한 신음을 지르며 연속 뒤로 다
섯 걸음이나 밀려나갔다. 반면에 흑무상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을 뿐이었다.
두 사람의 실력차는 너무도 현격했다.
"흐흐흐....... 곽수옥! 어디 이번에는 나의 흑풍장(黑風掌)을 받아봐라."
음산한 음성의 뒤를 이어 흑무상의 장력이 검은 기운을 띈 채 무섭게 세 갈래로 몰아
쳐갔다.
슈---- 슈---- 웅----! 찌---- 익!
파공성과 함께 날카로운 음향이 들렸다. 전력을 다해 피했으나 곽수옥의 오른쪽 어깨
가 길게 찢겨져 나갔다.
백설같은 피부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녀는 한쪽 팔을 축 늘어 뜨리고 말았다. 어깨에
심한 부상을 입은 것이다.
"흐흐......."
흑무상은 조금도 여유를 주려하지 않았다.
휙휙----! 슈욱----!
그는 연속적으로 악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따라서 검은 기류가 숨통을 조일듯 곽수옥
을 휩쓸어갔다.
기실 곽수옥의 무공도 그리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연약한 여인인데다가 오랜 도피
생활과 겹친 피로로 인해 공력의 태반이 감소된 상태였다.
"악!"
그녀는 손목이 죄어드는 것을 느끼며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흑무상의 검은 손
이 그녀의 맥문을 꽉 움켜쥔 것이었다.
"흐흐....... 계집년, 결국 이렇게 될 걸 앙탈을 부리다니!"
흑무상은 징그럽게 웃으며 손목에 힘을 주었다.
"아악----!"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에 곽수옥의 비명은 더욱 처절해졌다. 그러나 여문비의 싸
늘한 음성이 떨어졌다.
"흑무상! 뒤져라."
"넷!"
흑무상의 시커먼 손이 막 곽수옥의 품을 쑤시고 들어갈 찰나였다. 갑자기 찢어질듯 날
카로운 외침이 울렸다.
"이 놈아! 내 어머님을 놔라!"
원한 맺힌 그 음성의 주인공은 물론 곽수옥과 동행이던 소동이었다. 소동은 나섬과 동
시에 즉각 조개같이 작은 손을 휘둘러 흑무상을 공격하려 했다.
그때까지 음침하게 서 있던 백의인, 즉 백무상(白無常)이 그 순간 손을 쭉 뻗었다.
"악!"
소동은 여지없이 백무상에게 팔뚝을 잡히고 말았다.
"놔라! 놓지 못하겠느냐?"
소동은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그러나 한 번 꽉 잡힌 팔뚝은 마치 강철고리에라도 걸
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기를 쓴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흑무상이 입가에 흉칙한 웃음을 짓더니 시커먼 손을 그대로 곽수옥의 가슴 속으로 밀
어 넣었다.
"아악! 네 놈이......."
곽수옥은 수치와 분노에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흑무상은 감정이라고는 터럭
만치도 없는 무뢰한이었다.
거침없이 여인의 가슴 속을 뒤지던 그의 손에 무엇인가 딱딱한 물체가 잡혔다.
"흐음!"
흑무상은 희색을 띄며 급히 움켜쥐어 꺼냈다. 하나의 작은 옥함, 그것을 본 흑무상은
물론 여문비와 백무상 등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빨리 열어 봐라!"
여문비의 급촉한 명령에 흑무상은 재빨리 옥함의 뚜껑을 열었다. 옥함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벽록색 광채가 찬연한 하나의 구슬이 들어 있었다.
흑무상은 들뜬 음성으로 외쳤다.
"장주님! 맞습니다. 과연 만년취옥정이 틀림없습니다."
곽수옥이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이 놈들아!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 돌려다오!"
짝---!
흑무상의 검은 손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닥쳐라! 계집년, 더이상 나불대면 입을 찢어놓고 말겠다."
곽수옥은 그 서슬에 그만 안색이 핼쓱해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여문비가 득의 만면한
채 괴소를 지었다.
"흐흐흐....... 곽수옥, 흑무상은 아름다운 여자를 조심스럽게 다룰 줄 모르니 얌전히
있거라."
그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점잖게 말을 이었다.
"흑무상, 만년취옥정을 찾았으니 이제 그 계집을 놔 줘라."
"알았습니다. 장주님."
흑무상은 곽수옥을 홱 뿌리쳤다.
"악!"
쿵---!
곽수옥은 뒤로 밀려나가 벽에 부딪치며 나동그라졌다.
흑무상은 옥함의 뚜껑을 닫은 뒤 공손히 여문비에게 바쳤다. 여문비는 만족한 얼굴로
옥함을 받아 품 속에 넣었다.
이때, 골패를 돌리던 십여 명의 장한들이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문비! 잠깐만 기다려라."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매부리코의 장한이 소리쳤다.
"네 놈들은 누구냐?"
여문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매부리코는 음침하게 말했다.
"우리는 십자문(十字門)의 십자십성(十字十星)이다."
"십자문?"
여문비의 얼굴에 약간의 당혹이 스쳤다.
"그럼 네 놈들이 십자혼검(十字魂劍) 누자석(累子石)의 졸개들이란 말이야?"
매부리코는 대답 대신 분노를 떠올렸다.
"흐흐...... 우리는 벌써 오래 전부터 보물을 점찍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먼저 가로
채다니!"
여문비의 얼굴에 대번에 살기가 퍼졌다.
"뭣이? 누자석, 그 놈이 감히 나 탈백금도 여문비가 하는 일을 방해한단 말이냐?"
매부리코의 기세도 만만치는 않았다.
"흐흐...... 여가야! 금도장(金刀莊)과 십자문은 협서 아래에서 쌍벽을 이루며 서로
침범한 적이 없다. 네가 감히 이제 와서 우리 문주를 무시할 수 있단 말이냐?"
여문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망설이는 빛이 떠올랐다. 그는 다소 음성을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만년취옥정은 하나 뿐이거늘,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매부리코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야 물론 우리 십자문이 차지해야 마땅하다."
여문비의 표정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미친 놈들! 보자보자 하니까 정녕 기고만장이구나. 내 네 놈들을 살려둘 수가 없다."
휘---- 휙! 휙----!
여문비의 쌍장이 번개치듯 번뜩였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쾌속절륜한
장법이었다.
우당탕! 쿵! 와지끈----!
"어--- 억!"
탁자와 의자 등이 박살나며 두세 명의 장한이 가슴과 어깨 등을 얻어맞고는 뒤로 날아
가 버렸다.
여문비의 공격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쉭! 쉬익---!
귀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세 줄기의 금빛이 뻗어나갔다. 여문비의 별호와 같
은 이름인 탈백금도 세 자루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것이다.
십자문의 장한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강호에 명성이 쟁
쟁한 탈백금도를 피해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크--- 으---- 악!"
세 마디의 비명이 일더니 세 장한이 탈백금도에 목이 관통되어 핏줄기를 뿜으며 날아
갔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무시무시한 상황이었다.
"으으......."
나머지 일곱 장한이 공포에 찬 신음을 발했다. 그들은 회의에 한 시선으로 동료들의
시신을 내려다볼 뿐 섣불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죽음(死)의 명령이 떨어졌다.
"흑백무상! 누자석이 오기 전에 놈들을 모두 죽여라."
여문비의 끔찍한 살령이었다.
"옛!"
흑무상과 백무상은 대답과 함께 살벌하게 상대를 덮쳤다. 어느새 그들의 허리에서 금
도(金刀)를 뽑혀져나와 무시무시한 검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츠츠츠츳---!
"크---- 아--- 악!"
피무지개를 그리며 두 개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지옥을 방불
케하는 혈전장으로 화해버렸고 손님들은 공포에 질려 덜덜 떨며 구석으로 일제히 피신
했다.
상황이 예상 밖으로 급진전되자 십자십성의 우두머리인 매부리코는 당황한 나머지 겁
먹은 음성으로 외쳤다.
"무, 물러가자!"
"흐흐흐....... 나 여문비의 손에서 도망을 가겠다고?"
여문비의 음랭한 목소리가 그들의 간을 오그라붙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는 것
은 오로지 사지(死地)일 따름이었다.
"으---- 악!"
다시 피보라와 함께 두 명이 허리가 동강나 쓰러졌다. 이제 나머지는 세 명뿐, 그나마
그들은 손발이 굳어버려 항거 능력조차 상실한 지 오래였다.
흑백무상은 잔혹한 미소를 뿌리며 다시 금도를 날렸다.
슈---- 욱! 츠츳----!
"크--- 으---- 악!"
순식간에 십자십성의 인물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이는 모두 불과 숨 몇 번
쉴 동안에 벌어진 참경이었다.
흑백무상은 조용히 피묻은 금도를 거두고 있었다. 문득 흑무상이 핏발선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장주님, 누자석이 이 일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여문비는 구석에 몰려 있는 손님들을 음험한 눈으로 쓸어본 뒤 냉막하게 내뱉았다.
"증거를 없애면 된다."
"어떻게?"
"흐흐....... 시체를 치우고 나서 이곳에 있는 놈들을 모조리 없애면 될 것이 아니냐?
흑백무상은 서로 마주보며 입술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옛! 알겠습니다."
그들의 대답이 떨어진 순간 손님들은 물론 객점주인의 똥똥한 얼굴은 한결같이 흑빛으
로 변해버렸다. 단지 증거인멸을 위해 그들은 아무 죄도 없이 무참하게 죽어가야 할
판국이었다.
삽시간에 지옥의 공포가 객점 안을 엄습했다.
염천월은 힐끗 눈을 들어 제갈월풍을 바라보았다. 제갈월풍은 작은 입술을 꼭 다문 채
분노가 깃든 눈초리로 장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미부는 두려움과 원한이 뒤범벅이 된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었
다. 그녀 옆의 소동, 아니 소녀(少女) 역시 잔뜩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 명의 손님이 살금살금 문 쪽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 행동은
여문비나 흑백무상의 눈을 피할 정도로 은밀할 수는 없었다.
번쩍 금빛이 이는가 싶자 참담한 비명이 터졌다.
"으---- 악!"
손님은 그대로 몸이 반쪽이 되어 피바다에 쓰러져 버렸다. 즉사를 면치 못한 것이다.
백무상이 피묻은 금도를 시체의 옷자락에 문지르고 있었다.
흑무상은 성큼성큼 미부, 즉 곽수옥의 앞으로 걸어갔다.
"흐흐흐....... 곽수옥,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다."
스르릉.......
그는 금도가 다시금 서서히 뽑혀져 나왔다.
"잘 가거라."
휘익---!
금도가 허공으로 치켜 올려지는 것을 보며 곽수옥은 체념한듯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실로 절대절명의 위기인 찰나, 어디선가 낭랑한 음성이 울려왔다.
"잠깐만!"
"응?"
흑무상이 의아하여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의 일도를 제지한 것은 전혀 뜻밖의 인물
이었다. 그의 눈 앞에 서 있는 자는 불과 칠팔 세밖에 안 되어 보이는 귀여운 소년이
었다.
흑무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꼬마, 조금 전 네가 나를 불렀느냐?"
소년은 다름아닌 제갈월풍이었다.
"그래요."
제갈월풍의 태연한 말투에 흑무상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요 꼬마놈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섰을까?'
그의 뇌리에 번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옛부터 무림에는 조심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고 전해져 왔다. 그것은 바로 늙은이(老),
여자(女子), 거지(乞), 소년(少年) 등으로 그들이야말로 항상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타 엄청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흑무상은 미간을 좁혔다.
'틀림없이 무슨 내력을 지닌 꼬마임이 분명하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자 비로소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소년의 등 뒤 탁자에서 한 명의
백발노인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몹시도 냉막한 신색을 지닌 노인.
그는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천히 물을 마시
고 있었다.
흑무상의 기세가 다소 꺾였다.
'아무래도 저 늙은이가 수상쩍다!'
과연 탈백금도 여문비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던지 제갈월풍에게 다가왔다.
"소형제(少兄弟), 자네 이름이 뭔가?"
자못 정중한 질문에 반해 제갈월풍은 총명한 눈을 반짝이며 오히려 당차게 되물었다.
"갑자기 제 이름은 왜 묻죠?"
여문비는 기가 막혀서인지 헛기침을 해댔다.
"헛험! 뭐,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세."
제갈월풍의 응수는 점입가경이었다.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여문비의 얼굴에 대뜸 싸늘한 한기가 번졌다.
'요 꼬마놈은 꼭 여우같구나!'
이때, 제갈월풍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노형제(老兄弟)께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여문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노, 노형제?"
그는 평생을 통해 이런 상황에 처하기는 처음이었다. 강호에서 드날리던 위명은 고사
하고 고작 칠팔 세밖에 안된 꼬마에게 육십이 넘은 자신이 노형제라 불리우고 보니 차
라리 귀를 의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제갈월풍이 그를 향해 씨익 웃었다.
"저도 원래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어요. 다만 당신이 저를 소형제라 불러서 저도 그
렇게 부르는 것이에요."
"뭐, 뭣이!"
여문비의 얼굴은 울그락불그락 말이 아니었다. 어찌 들으면 지극히 순진무구한 말인지
라 정작 울화를 터뜨릴 수가 없으니 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래, 나에게 하고 싶다는 말이 무엇이냐?"
간신히 화를 눌러참고 묻는 그를 향해 제갈월풍은 가당치도 않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노형께서는 스스로를 무림의 고수(高手)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그런데?"
제갈월풍은 갑자기 픽 웃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제 생각으로는 노형께서는 누자석이라는 사람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아요."
자존심을 건드리는 그 말에 여문비의 인내는 서서히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불쾌한 얼
굴로 거칠게 반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만약 노형이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굳이 십성(十星)을 죽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이곳의 사람들을 전부 죽여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대로 정곡을 찔려버린 여문비는 대번에 벌레를 씹은 꼴이 되어 더듬거렸다.
"그, 그것은....... 음......."
"하하하....... 만약 내가 노형이라면 누자석 따위는 겁내지 않고 그가 오기를 당당히
기다릴 거예요."
"으음......."
여문비는 침중한 신음을 터뜨리더니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서 심한 갈등이 교차되고 있었다.
실상 그는 내심 여러가지 생각으로 갈등해야 했다. 제갈월풍의 말은 곧 그의 공명심과
직결된 말이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여문비는 결심한 듯 호쾌하게 말했다.
"좋다! 소형제, 네 말이 맞다."
그는 좌우를 돌아보며 추호도 망설임없이 명령을 내렸다.
"흑백무상! 가자."
"옛?"
흑백무상은 의아해 했으나 곧 그를 따라 문으로 걸어나갔다. 여문비가 문을 나서려다
말고 멈칫 서더니 물었다.
"소형제,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제갈월풍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제갈월풍(諸葛月風)!"
여문비는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제갈월풍! 소형제에게 어울리는 멋진 이름이다. 내 반드시 그 이름을 기억하겠다."
여문비는 제갈월풍에게 한 번 더 눈길을 주더니 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휴우....... 아! 살았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꼭 지옥의 문(門)까지 갔다가 되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모두 감탄과 고마움의 시선을 제갈월풍에게 쏟았다.
제갈월풍의 세 치도 못되는 혓바닥이 그들을 구한 것이 아닌가? 염천월이 너털웃음치
며 일어섰다.
"허허헛....... 풍아야, 너의 재치로 위기를 넘겼구나."
"뭘요."
겸손해하는 그에게 염천월은 곽수옥과 소녀를 가리켰다.
"그러나 저 부인은 보물을 잃었으니 소용이 없지 않느냐?"
제갈월풍은 다시금 신비하게 씨익 웃더니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 아주머니는 그 만년취옥정이란 것을 잃지 않았어요."
곽수옥이 그 말을 엿듣고는 깜짝 놀라 다가왔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공자."
제갈월풍은 여전히 작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흑무상이 아주머니의 품에서 보물을 꺼낼 때 아주머니는 반항을 했지만 그 행동은 사
실 그다지 긴박해 보이지가 않았어요."
"으음?"
"그리고 십성과 여문비가 싸울 때도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오히려 득의의 미소가 어렸
거든요."
"그, 그거야 당연한......."
"더구나 중요한 것은 여문비가 떠나자 아주머니는 누구보다도 크게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거든요."
제갈월풍의 예리한 추리에 곽수옥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옆에 있던 염천월조
차도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제갈월풍은 이번에는 기이한 표정으로 소동을 한 번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더욱더 소
리죽여 덧붙였다.
"아마 진짜 보물은 저 애에게 있을 것......."
곽수옥이 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아! 소공자의 눈은 정말 무섭군요. 그래요. 모두 맞아요."
동시에 그녀는 간절한 애원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제갈월풍은 재빨리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선선히 웃어 주었다.
"염려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저는 절대 그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예요."
"고, 고마와요. 소공자......."
곽수옥은 감격해마지 않았다.
제갈월풍은 문득 빙긋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누자석과 여문비는 머리가 터지도록 싸우겠는데요."
"호호......."
"허허헛......!"
곽수옥과 염천월이 함께 대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염천월은 창 밖을 보더니 말했다.
"음, 눈보라가 멎었다. 풍아야, 우리는 그만 떠나야겠다."
"네!"
제갈월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곽수옥을 향해 의젓한 자세로 포권했다.
"아주머니, 그럼 나중에 뵙겠어요."
곽수옥의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해졌다.
"소공자, 오늘의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어요."
"별 말씀을요."
제갈월풍은 소녀에게도 인사했다. 그의 한 쪽 눈이 장난스럽게 찡긋 감겼다.
"소낭자(少娘子)도 안녕히."
"저, 저......."
소녀는 그만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그녀는 남장한 사실이 발각되자 심한 부끄
러움을 느낀 것이었다.
소녀는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자꾸만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아
무런 말도 못하고 말았다.
제갈월풍이 염천월과 함께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가고 있었기 때
문이다.
소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그친 밤길에 노소 두 사람이 점차 멀어져가는 것이 보였다.
곽수옥 또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곽수옥은 곧 행장을 수습하며
소녀의 어깨를 만졌다
"얘야, 우리도 그만 가자. "
기이한 밤(夜).
두 모녀는 각기 마음 속에 미련을 안은 채 눈 그친 밤길을 걸어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어쩌면 먼 훗날에 있을 재회(再會)를 꿈꾸고 있는지도.......
< 第 3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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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4 章. 영기석부(靈氣石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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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산(大雪山).
중원의 지붕 히말라야를 일컫는 대영산.
서역(西域)과 접해 있으며 사시사철 만년설(萬年雪)을 이고 있는
대설산은 하늘과 땅은 물론이거니와 시선 닿는 곳이 온통 은빛 일
색이었다.
혹한이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휘... 이... 잉! 휘잉......!
살을 한 겹 한 겹 도려낼 듯한 한풍이 대설산 설야를 온통 휩쓸고
있는 가운데 대설산 동쪽 기슭으로부터 두 인영이 등장했다.
일노일소(一老一少).
그들은 혈해마존 염천월과 제갈월풍이었다.
기나긴 여정과 풍설에 지친 듯 두 사람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염천월이 어떠한 인물인가?
그는 당금 무림천하에서 그 이름만으로도 공포를 느끼게 하는 인
물로 단지 외양이 초췌해 보일 뿐, 피로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어린 제갈월풍은 기진맥진이었다.
그는 근 두 달여에 걸친 천산북로(天山北路)의 여로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염천월은 걷다말고 돌아섰다.
제갈월풍은 저만치 뒤쳐져 힘겹게 걷고 있었다.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풍아야, 힘든가 보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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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월풍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길을 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소년의 음성에는 한 가닥 오기가 숨어 있었다. 염천월은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은 겉으로는 부드러우나 속은 굳기가 강철같구나. 그야말로 보기 드문 외유내
강(外柔內剛)의 성격이구나.'
제갈월풍은 고개를 들어 온통 백설천지인 웅대무비한 대설산을 둘러보았다. 마치 거대
한 병풍(屛風)처럼 앞을 가로막은 채 하늘까지 닿아 있는 거대한 산이었다.
"할아버지 집은 아직 멀었나요?"
"거의 다 왔다."
어느덧 대설산 경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거대한 은백천지의 산은 인간의 발길을 거부
하고 있었다. 태고(太古)이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설지 위를 염천월은 제갈월풍
을 옆구리에 낀 채 달렸다.
휙휙!
그는 마치 땅을 밟지 않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제갈월풍은 귓전에서 쌩쌩! 하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다 왔다."
염천월은 신형을 멈추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맞은 편에 우뚝 솟은
한 설봉(雪峯)을 가리켰다.
"저 봉우리 위에 나의 집이 있다."
제갈월풍의 눈이 설봉으로 향해졌다. 봉우리는 수백 장(丈)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빙
벽(氷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설사 하늘을 나는 새라 할지라도 결코 그 매끄러운 빙
봉은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야! 굉장히 높은 봉우리구나!'
제갈월풍은 내심 탄성을 발하며 영롱한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곳을 오르죠?"
염천월은 빙그레 웃었다.
"곧 알게 된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빙봉의 아래에 당도했다. 염천월은 고개를 한없이 뒤로 꺾어도 보
이지 않는 봉우리 정상에 시선을 던진 채 기이한 음성으로 물었다.
"풍아야, 너는 혹시 어기충소(御氣沖 )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제갈월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듣는 말이에요."
"허허....... 어기충소는 지금으로부터 구백 년 전(九百年前) 천풍자(天風子)란 도인
이 창조한 것이다."
"그게 뭔데요?"
"설명하자면 어기충소는 신선(神仙)들처럼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제갈월풍은 신기한 듯 반문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날 수가 있나요?"
염천월은 자상하게 답해 주었다.
"그것은 도가(道家)의 현문정종토법납진기(玄門正宗吐法納眞氣)를 길러 전신을 깃털처
럼 가볍게 하면 가능해 진단다."
제갈월풍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비록 총명한 소년이었지만 무공의
무 자도 모르는 그가 심오한 뜻이 담긴 염천월의 말까지 선뜻 납득할 수는 없었다.
염천월은 제갈월풍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자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할아버지가 직접 보여 주겠다."
그는 손을 뻗어 제갈월풍의 허리를 안았다.
"자! 보아라. 차앗---!"
기합성을 듣는 순간 제갈월풍은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휘익---!
염천월은 한 손에 제갈월풍을 안은 채 마치 학(鶴)이 창공으로 치솟듯, 혹은 용(龍)이
전신을 꿈틀거리며 승천(昇天)하듯 일직선으로 솟아오른 것이었다.
그야말로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염천월은 구름을 뚫고 끝없이 솟구쳐 올라
가고 있었다. 정녕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신기(神技)였다.
제갈월풍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아찔한 느낌이 들었다. 귓전으로 쉴새없이 바람이
쌩쌩거리며 스쳐갔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구름과 안개뿐이었다.
제갈월풍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 할아버지는 진정 신선(神仙)과도 같은 분이셨구나.'
소년의 가슴 속에는 이때부터 웅풍(雄風)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도 그같은 경공을
배워 마음껏 천하를 주유하고픈 욕망이 피어난 것이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빙봉의 정상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체가 얼음으로 뒤덮인 하나의 분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넓이는 대략 백여 장
정도로 밑에서 볼 때는 칼끝같기만한 산봉우리에 이러한 분지가 있다는 것은 실로 믿
기 어려운 일이었다.
분지는 온통 매끄러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때문에 자칫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미끄러져 추락할 것이 분명했다.
염천월은 제갈월풍을 내려놓고는 분지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아! 커다란 웅심(雄心)을 품고 이곳을 떠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백 년이 흘렀구나!'
제갈월풍도 그를 따라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집은 어디에 있어요?"
염천월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다 왔다. 어서 가 보자."
그런데 이때였다.
"우---- 우우우----!"
불현듯 멀리서 빙봉을 쩌렁쩌렁 울리는 장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한 줄
기 인영이 빛살처럼 날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영은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그 자는 내려서자마자 대뜸 호통부
터 쳤다.
"어느 놈이 감히 이 천도봉(天道峯)의 영기석부(靈氣石府)를 찾아 왔느냐?"
나타난 자, 그는 괴이한 분위기를 지닌 백발이 성성한 꼽추노인이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주름살이 가득한 꼽추노인의 얼굴에 두 개의 흰 눈썹이 근 두 자에 달하는 길이
로 길게 뻗쳐있다는 점이었다.
신선의 탈속한 풍모와 추(醜)함을 동시에 지닌 괴노인.
그런데 꼽추노인은 염천월을 본 순간 깜짝 놀라더니 전신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이
어 그는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는 것이었다.
"주, 주인님!"
그의 음성은 격동으로 인해 마구 떨리고 있었다. 염천월 역시 그에 못지않은 격동을
보였다.
"구(丘) 노인! 오랜만이네......."
그의 음성 또한 알게 모르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구(丘)라 불리운 꼽추노인은 그를 올
려다보더니 신음처럼 부르짖었다.
"아아! 주인님......."
노인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나직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격한 듯한 두
노인의 해후(邂逅)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이 젖게 할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구노인, 노부는 진정 그대에게 할 말이 없네. 그저 미안할 뿐....... 평생을 이곳에
서 홀로 기다리게 했으니......."
꼽추노인은 갈쿠리같은 손을 들어 눈물을 씻어냈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노복은 차마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염천월은 탄식하더니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구노인, 노부는 오늘 이후로는 더이상 떠돌아 다니지 않기로 결심했네. 이제 남은 여
생을 이곳에서 보내겠네."
꼽추노인은 만면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님,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염천월은 생각난 듯 또랑또랑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는 제갈월풍을 가리켰다.
"구노인, 풍아와 인사하게."
꼽추노인은 의아한 눈빛으로 제갈월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번
쩍 이채를 발했다. 깨끗하고 순결해 보이는 제갈월풍의 눈망울과 부딪쳤기 때문이다.
염천월은 흐뭇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이 아이는 노부의 손자일세. 앞으로 구노인이 잘 보살펴 주기 바라네."
그러자 꼽추노인은 무릎 꿇은 채 제갈월풍에게 절을 했다.
"소공자님께 노복이 인사드립니다."
제갈월풍은 크게 당황했다.
"저, 저는......."
그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자 염천월이 부드럽게 말했다.
"풍아야, 구노인은 이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노인이다. 앞으로는 구
노인이라 부르고 잘 따라야 한다."
제갈월풍은 그 말을 듣자 눈을 반짝이며 급히 꼽추노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구노인, 저는 풍아예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무, 무슨 말씀을....... 소공자께서 오히려 노복을 잘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염천월은 미소를 띈 채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 자! 이제 그만하고 안으로 들어가세."
그제서야 꼽추노인은 일어섰다.
"노복을 따라 오십시오."
일행은 빙봉의 분지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기이한 형상으로 우뚝 솟아있는 한 빙벽 앞에 당도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그저 하나의 얼음에 뒤덮인 암벽이었다. 꼽추노인은 빙벽을 향해 손
을 뻗어 한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기기깅! 하는 기이한 음향과 함께 빙벽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빙벽 한가운데 통
로가 나타났다. 통로는 아래로 기울어져 있었고 잘 다듬어진 계단이 축조되어 있었다.
'정말 신기하구나. 암벽 속에 계단이 있다니.......'
제갈월풍은 온통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그는 두 노인의 뒤를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갔
다. 십여 장을 내려가자 바닥은 평탄하게 이어졌다.
통로는 온통 매끄러운 석재(石材)로 되어 있었다. 또한 외부와는 달리 훈훈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더우기 통로는 매우 밝았다. 그것은 일 장 거리마다 천장에 야명주(夜
明珠)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통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잠시 후 하나의 석실(石室)
이 나타났다.
결코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초라하지도 않은 석실이었다.
석실에는 부드러운 호피(虎皮)가 깔려 있었고, 돌 탁자와 돌침상, 그리고 역시 돌로
된 서가(書架)에 고서(古書)가 빽빽이 꽂혀있어 고아한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벽에 걸린 몇 점의 고서화(古書畵)가 한층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기도 했다. 제갈월풍
은 이같은 방 안의 풍경을 연신 신기한 듯 둘러보고 있었다.
이때 휙!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빛이 그의 가슴 속으로 뛰어들었다.
"앗!"
제갈월풍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미 흰 빛의 물체가 그의 품 속으로 기어들어간 후
였다.
"응?"
제갈월풍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품속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기 때
문이다. 느낌이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얼른 고개를 숙여 품속을 살펴본 그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아!"
그것은 한 마리의 짐승이었다. 흰털에 적색(赤色)의 아름다운 눈을 가졌으며, 등에는
한 줄기의 금빛털이 자라있는 고양이였다.
제갈월풍은 귀여운 마음이 일어 조심스럽게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고양이도 그의
손길을 받자 기분이 좋은 듯 스르르 눈을 내리 감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할아버지, 이 고양이의 이름이 뭐죠?"
염천월은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대소했다.
"허허허....... 놀랍구나. 백아(白兒)는 웬만해서는 사람의 손길을 싫어하는데 금방
네게 안기다니. 아마도 네가 이곳의 소공자임을 알아보았나 보구나."
제갈월풍은 연신 짐승을 쓰다듬으며 다시 물었다.
"이 고양이의 이름이 백아인가요?"
염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백아는 고양이와 비슷할 뿐이지 고양이는 아니다. 이 짐승의 원래 이름
은 금선백령묘(金線白靈猫)라고 한다. 놈은 보기에는 조그맣고 귀엽지만 묘강(猫畺)에
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사납기가 호랑이보다 더하고 어떤 창칼로도 상처를 내지 못한다."
제갈월풍은 눈이 동그레졌다.
"더구나 이 할아버지가 기르면서 무공을 가르쳤기 때문에 웬만한 무림의 고수라도 이
백아를 당할 수가 없단다."
"아!"
제갈월풍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백아를 내려다 보았다. 영성(靈性)이 서로 통한 것일
까? 백아는 가르랑거리며 몸을 그에게 찰싹 기대왔다.
염천월은 그를 이끌고 석실에서 옆으로 통하는 통로로 데려갔다. 통로 좌우로는 몇 개
의 석실이 더 있었다. 염천월은 그 중 한 방으로 그를 인도했다.
"오늘부터 이곳이 네 방이다."
"이...... 방이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방(房).
제갈월풍은 방을 둘러 보았다. 바닥에는 역시 호피가 깔려 있었으며, 구석에 있는 침
상에도 호피가 덮여 있었다. 작고 단단해 보이는 집기들이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이곳이 내 방이라니!'
제갈월풍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만의 방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눈은 쉴새없이 이리저리 구르며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꼽추노인과 염천월은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염천월은 자애롭게 말했다.
"자, 오늘은 피곤할테니 그만 푹 쉬어라."
제갈월풍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들뜬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할아버지. 백아와 같이 잘래요."
"허허....... 그래라. 하지만 조심해라. 백아가 얼굴을 할퀼지도 모르니까."
"백아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이미 절 좋아하는 걸요."
캬우----!
백아의 갑작스러운 울음이 그 말을 시인하는 듯 했다.
"거보세요. 백아도 그렇다잖아요."
제갈월풍은 신이 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허허....... 알겠다. 어서 자거라."
염천월은 만면에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꼽추노인도 자못 만족한 얼굴로 돌
아섰다.
'아! 주인님께서 웃음을 보이실 줄이야! 모두가 소공자님의 덕분이구나.'
꼽추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제갈월풍은 마침내 이 날부터 영기석부에서 지내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염천월과 제갈월풍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다정하게 마주 앉았다. 그곳은 염천월이 기
거하는 큰 방으로 두 사람은 각기 호피의자에 앉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염천월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풍아야, 내 오늘부터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
제갈월풍의 눈이 신비한 광채를 발했다. 염천월은 자애스런 눈으로 그를 쓸어보며 덧
붙였다.
"그러나 그 전에 네게 이 할애비의 지난 날에 대해 들려줄 것이 있다."
제갈월풍은 궁금한 듯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염천월의 표정은 서서히 진득한 회한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
로 말을 꺼내고 있었다.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에 대해.......
염천월(閻天月).
그는 일찍이 천애고아(天涯孤兒)로써 오로지 자신의 성(姓)이 염(閻)이라는 것 밖에는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자라면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온갖 학대와 구박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굴욕이자 고통이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그에게는 단지 적(敵)
일 뿐이었다. 바야흐로 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낮보다는 밤을 좋아하게 되었으며, 밤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
행히도 밤이면 하늘에 달(月)이 떠올라 유일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는 달을 너무도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천월(天月)이라 짓게 되었다.
밤에만 존재하는 달과 염천월, 그는 이후로 달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십사 세 때 되던 해에 염천월은 우연히 커다란 기연을 만나게 되었다. 구백 년
전(九百年前)의 도가제일(道家第一) 기인(奇人)이었던 천풍자(天風子)의 비급인 천풍
신록(天風新綠)을 얻은 것이었다.
염천월은 침식을 잊다시피하며 천풍신록을 익혔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탈피하는 유
일한 길은 무공을 열심히 익히는 것 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기도 했던 염천월은 만 삼 년만에 무공을 터득하고는 십칠 세 때
강호에 나왔다. 그러나 그의 출도는 강호에 하나의 살성(殺星)이 출현한 것이나 다름
이 없었다.
염천월은 강호에 나오자마자 무서운 피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먼저 자신을 학대한 모
든 사람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한 번 피를 보게 된 그의 성격은 차츰 편협하게 되어갔다.
그는 사파(邪派) 인물이라면 불문곡직하고 죽였다. 또한 정파(正派) 인물이라도 조금
이라도 위선을 보이는 자에게는 가차없이 살수(殺手)를 내뻗쳤다.
그리하여 염천월의 등장은 강호상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나이 이십을
약간 넘었을 때였다. 그러나 피비린내 나던 그의 생(生)에도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강남(江南)의 한 지역을 지나던 그는 흑도(黑道) 인물들에게 겁간당할 위기에 처한 한
명의 절세미녀(美女)를 구해주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모용사란(慕容思蘭)이었다.
그 후 두 남녀는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다.
모용사란은 강남의 명문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외동딸이었다. 모용세가는 비록 강남무
림에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유독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그녀는 강
호에 시녀와 함께 유람을 나왔다 봉변을 당할 뻔 했고 그때 염천월을 만나게 된 것이
었다.
염천월은 그녀를 통해 생애 처음으로 따뜻한 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모용세가의 가주(家主)인 신주패검(神州覇劍) 모용강(慕容剛)에게 딸을 달라고 청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주패검 모용강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일신에 피가 마를 날이 없는 출신성
분도 확실치 않은 염천월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염천월은 분노했다. 결국 그 일이 발단이 되어 전 무림에 무서운 혈풍(血風)이 불어닥
칠 줄을 모용강은 꿈에도 몰랐다. 비분을 안고 돌아선 염천월이었으나 모용사란은 자
신의 생을 그에게 의탁키로 하고 가문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다.
결국 두 사람은 결합했다. 뜨겁고 순수한 열정을 지닌 청춘남녀에게 강호의 이름이나
명분 따위는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그 길로 강호에서 은퇴하여 행복하고 달콤한 생활에 젖었다. 비록 일 년이
채 못되는 기간이었으나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은 생애 최고의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은 일 년만에 끝이 났다. 두 사람의 행방을 찾던 모용강이 마침 염천월이
식량을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버린 것이었다.
모용강은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모용사란을 모용세가의 뇌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런데 당시 모용사란은 사랑의 결실인 염천월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다.
한편 모용사란은 뇌옥에 갇혀 절망하다가 마침내 병이 들고 말았다. 결국 그로인해 뱃
속의 아이는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기를 잃은 모용사란은 결국 절망한 나머지 한(恨)을 품은 채 자결하고 말
았다.
뒤늦게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염천월은 큰 충격을 받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로
인해 그의 마음은 산산히 부서졌고 살심으로 똘똘 뭉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비분
을 참지 못하고 모용세가로 달려갔다.
모용세가는 희대의 대살성(大殺星)을 잘못 건드린 죄로 그야말로 혹독한 대가를 치루
어야 했다. 수백 년을 면면히 이어내려온 세가가 일순간에 붕괴되고 만 것이었다.
아무도 염천월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다. 모용세가는 염천월의 손에 완전히 초토화되
고 말았다.
다만 염천월은 모용강만은 죽이지 못했다. 그것은 일 년 동안이나마 그의 아내였던 모
용사란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단심(丹心)은 또다시 강호에 엄
청난 혈겁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이번에는 거꾸로 가문을 혈세당한 모용강이 강호에 무림첩(武林帖)을 돌린 것이었다.
결국 염천월은 희대의 살인마로 낙인찍혀 무림의 공적으로 몰리게 되었다.
염천월은 귀령산(鬼靈山) 단혼애(斷魂涯)에서 최후의 무림인들의 추격에 몰려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실로 공전절후(空前絶後)요,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혈전이 벌어졌다
단혼애의 싸움은 일찍이 무림개사 이래 없었던 대참사(大慘事)였다. 근 백여 명의 정
파고수들이 염천월의 살수에 피를 뿌리며 죽어간 것이다.
염천월 또한 그들의 차륜전(車輪戰)을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피를 뿌리며 단혼
애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데 어찌 알았으랴! 운명의 신은 실로 얄궂기만 한 것이었다. 단혼애에서 떨어져
죽을줄만 알았던 염천월은 그곳에서 또 한 번의 광세기연을 만난 것이다.
그는 단혼애 아래의 한 절동(絶洞)에서 혈천무보(血天武譜)를 얻게 되었다. 혈천무보
는 바로 수백 년 전 천하를 피로 씻었던 대마두(大魔頭) 혈천마제(血天魔帝)가 남긴
개세의 마공(魔功)이 수록된 비급이었다.
염천월은 불타는 증오심을 갖고 단혼애 아래에서 혈천무보를 연마했다. 그로부터 수
년이 흐른 후, 무림에는 더욱더 끔찍한 혈풍(血風)이 휘몰아쳤다. 혈풍의 장본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염천월이었다.
염천월의 복수는 실로 잔혹했다. 그는 모용강을 죽인 후 자신을 합공했던 정파 고수들
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복수의 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한 마디로 피의 화신이 된 것이
었다.
그로인해 염천월은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오로지
증오에 찬 무림인들의 살기어린 눈빛이요, 뒤 따르는 것은 끈질기고도 집요한 추적이
었다.
결국 그는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처럼 천하를 유랑(流浪)하며 피바다 속을 누벼야 했다.
염천월은 절대로 싸움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싸움을 걸면 마주 검을 세웠고,
또한 반드시 상대를 잔혹하게 죽였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사랑했던 아내 모용사란을
잃은 후 세운 자신의 율법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는 무시무시한 별호가 따라다녔다.
- 혈해마존(血海魔尊).
"......!"
제갈월풍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염천월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모두 듣고
나자 어린 그의 가슴에 비원이 가득차버린 것이었다.
얘기를 마친 염천월은 착잡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풍아야, 이제 이 할아버지의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이래도 너는 할아버지가 좋은
사람 같으냐?"
제갈월풍은 슬픔에 잠긴 음성으로 대답했다.
"할아버지. 풍아는 할아버지가 결코 나쁘다고 생각할 수 없어요. 또...... 설사 할아
버지가 정말로 나쁜 사람일지라도 저에게만은 천하의 그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그는 감정이 북받치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저는...... 진정으로 할아버지를 사랑해요."
"푸, 풍아야......."
염천월은 격동을 못이긴 채 떨리는 손으로 제갈월풍을 끌어안고 말았다.
"그래, 고맙구나. 풍아....... 나같은 늙은이에게도 남아 있는 복이 있는지...... 만
년에 너같은 손자를 얻었구나."
제갈월풍은 눈물을 씻으며 밝게 웃었다.
"풍아도 복이 있어요. 좋은 할아버지를 얻었으니까요."
"허...... 허허헛....... 그래, 네 말이 맞다. 우리는 복(福) 있는 조손이다. 허허허헛......!"
방 안에는 뜨거운 인정(人情)과 화기(和氣)가 넘쳐 흘렀다.
한 칸의 석실(石室).
돌탁자를 사이에 두고 염천월과 제갈월풍이 마주 앉아 있었다. 돌탁자 위에는 한 개의
옥갑(玉匣)이 놓여 있었다.
"풍아야, 그것을 열어 보아라."
"네."
제갈월풍은 호기심에 가득 차 천천히 옥갑의 뚜껑을 열어 젖혔다. 옥갑 속에는 두 권
의 책자(冊子)가 들어 있었다. 꺼내 보니 그것은 모두 누렇게 빛이 바랜 양피책자였다
<천풍신록(天風神錄)>
또 한 권의 책자에는 현기(玄氣) 어린 필체로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혈천무보(血天武譜)>
제갈월풍은 책자의 핏빛 글씨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느끼며 몸을 오싹 떨었다. 염천월
이 그에게 물었다.
"풍아야, 이 두 권의 책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느냐?"
제갈월풍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풍아의 생각으로는....... 음, 천풍신록은 좋은 느낌이 드는데 혈천무보에서는 어쩐
지 나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염천월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다. 천풍신록은 무림사상 정도의 제일인자라 할 수 있는 천풍자(天風子)가
남긴 것이고, 혈천무보는 칠백 년 전(七百年前) 사도무림의 패자였던 혈천마제(血天魔
帝)가 남긴 것이다."
제갈월풍은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치 자석에 끌리듯 마음이 강력
하게 끌려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염천월은 잔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이 두 권의 비급은 모두 개세적인 무공을 담고 있어 그 중 한 권만 익혀도 능히 천하
를 독패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비급의 무공은 워낙 성질이 상반(相反)되어
한꺼번에 익히기는 불가능하다."
제갈월풍은 염천월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수는 없었으나 온 정신을 기울여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 할애비는 두 가지 무공을 합치려다가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결
국은 단념하고는 내공의 힘으로 두 가지 무공을 체내에서 분리시켰을 뿐이다."
제갈월풍은 한 마디 한 마디를 빠짐없이 머리에 담아두었다. 그는 비록 무공의 무 자
도 몰랐으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조금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확
실한 것은 두 권의 책자가 굉장한 무학을 담은 기서라는 사실이었다.
염천월의 표정이 문득 엄숙해졌다.
"오늘부터 너는 천풍신록에 적힌 구환신공(九環神功)을 익혀라. 네가 이 신공의 절정
에 이르면 그 다음을 가르쳐 주겠다."
그는 제갈월풍이 보는 앞에서 천풍신록의 첫 장을 넘겼다. 먼저 구환신공(九環神功)이
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고 다시 장을 넘기니 그 구결(九訣)이 수록되어 있었다.
제갈월풍은 온 신경을 기울여 구결의 자자구구(子子句句)를 머리 속에 집어 넣었다.
<구환신공은 모두 구 단계를 지니고 있다. 일 단계가 증진될 때마다 운공(運功) 시 머
리 위에 한 개의 환(環)이 영출된다. 만일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도합 아홉 개의 환(
環)이 나타나며 종내에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불사신(不死神)이 된다.......>
실로 엄청난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구결은 너무나 심오하여 제갈월풍으로
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제갈월풍은 첫날은 일단 구결을 암
기하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다음 날부터 그는 구환신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제갈월풍이 운공을 하는 횟수는 하루에 두 번으로써 해가 중천(中天)에 뜨는 정오(正
午)와 달이 중천에 걸리는 자정(子正)으로 정해졌다.
이때만 되면 그는 영기석부를 나와 빙봉, 즉 천도봉 꼭대기의 얼음에 걸터 앉아 정좌
한 채 공력을 키웠다. 해와 달을 바라보며 음양(陰陽)의 정기(精氣)를 체내로 흡수하
는 것이다.
염천월은 제갈월풍의 무공을 증진시키기 위해 꼽추노인으로 하여금 대설산에서만 자생
하는 천년설연자실(千年雪蓮子實)을 따서 매일 복용케 했다.
천년설연자실은 대설산의 정화를 받고 자라는 영초(靈草) 중의 영초였다. 그러므로 제
갈월풍의 내공은 일취월장,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급증되었다.
이제 제갈월풍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실
제로 그의 몸은 새의 깃털같이 가벼워져 있었다.
염천월은 제갈월풍이 무학방면으로만 뻗어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그는 석실
안의 수많은 고서(古書)를 제갈월풍에게 틈틈이 읽게 했다.
실상 염천월은 제갈월풍이 무림의 일에 휘말리기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진실한 인간
으로 자라준다면 더이상 원할 바가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혈해의 길을 걸어온 데 따
른 반작용이기도 했다. 그가 문학(文學)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 지도하는 이유도 바로
그때문이었다.
한편 꼽추노인은 제갈월풍을 소공자로 지성으로 섬겼다. 원래 그는 팔십 년 전 무림에
악명을 떨친 바 있는 공포의 대마두였다.
장미신타(長眉神陀) 구일비(丘一飛).
이것이 그의 지난 날의 별호와 이름이었다.
장미신타 구일비는 이미 나이가 백사십이 넘어 있었다. 그는 과거 죽을 고비에서 염천
월에게 네 번이나 구함을 받았었다. 그로 인해 자진하여 염천월의 노복이 된 것이었다.
세상에서 혈해마존 염천월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장미신타 구
일비였다.
세월은 말없이 흘렀다.
대설산 천도봉의 영기석부(靈氣石府)에는 외로운 삼 인과 영물 백
아(白兒)만이 일체의 외부 간섭없이 살고 있었다.
비록 인적없는 고봉절지(高峯絶地)였으나 영기석부 내에는 언제나
훈훈한 정(情)이 넘치고 있었다.
혈해마존 염천월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부드럽고 인자한 노인이 되어 항상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덧 오 년(五年)이라는 시간이 화살같이 흘렀다.
< 第 4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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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5 章. 광세기연(廣世奇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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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春).
만물(萬物)이 소생하는 양춘가절(陽春佳節).
그러나 대설산(大雪山) 천도봉만은 여전히 한랭한 겨울이었다.
비록 눈보라가 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천도봉은 만년을 녹지 않
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무수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빙봉(氷峯)은 변함없이 그 모습을
지켜온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가장 변해가는 것은 오히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
간(人間)일런지도 몰랐다.
제갈월풍(諸葛月風)의 나이도 어느덧 십삼 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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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는 천진한 어린 아이에서 제법 청년티가 나고 있었다. 골격도 월등히 굵어졌으
며, 음성도 이전에 비해 훨씬 힘차게 변해 있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오직 한 가지, 그것은 바로 그의 천진난만한 두 눈(眼)이었다. 아직
도 꿈꾸듯 영롱해 보이는 눈은 누구나 한 번 보면 그 순결함에 스스로의 악(惡)을 부
끄러워 할 정도로 맑았다.
마침 염천월은 제갈월풍의 공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약초(藥草)를 구하러 여행을 떠나
고 없었다.
제갈월풍은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염천월은 오 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제갈
월풍에게 무공은 가르쳐 주지 않고 오직 구환신공(九環神功)만을 연마시켰던 것이다.
이미 제갈월풍의 구환신공은 칠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운공(運功)을 할 때마다 그
의 머리 위에 일곱 개의 환이 영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갈월풍의 체내에는 무궁무진한 내력(內力)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것
은 구환신공과 아울러 매일 복용하다시피 한 천년설연자실, 그리고 각종의 특제된 영
약(靈藥) 덕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염천월은 도통 무공의 초식을 전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여기에는 물론 제갈월풍이 모르는 사연이 있었다. 그것은 염천월이 알고 있는 무공초
식들이 너무도 패도적(覇道的)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상태
에서 연마한다면 자칫 주화입마(走火入魔)할 우려가 있었다.
방 안.
제갈월풍은 탁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은 거의 하루를 책읽는 것으로 보내는
형편이었다.
탁자 위에는 백아(白兒)가 두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은 더없이 귀엽고 평
화스러워 보였다. 이때 책을 읽던 제갈월풍의 눈이 문득 반짝 빛을 발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는 읽고 있던 책을 탁 덮었다. 몸을 벌떡 일으킨 그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백아, 따라와라."
그가 옷소매를 벌리자 이제껏 졸고 있던 백아는 붉은 눈을 번쩍 뜨더니 날쌔게 날아들
었다.
휘익----!
백아는 금세 그의 옷소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제갈월풍은 방을 나섰다. 그는 통로를 지나며 한 석실 속에서 장미신타가 한창 무엇인
가를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장미신타는 제갈월풍을 발견하고는 일손을 멈추며 물었다.
"소공자님, 어디 가십니까?"
제갈월풍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심심해서 바깥 바람 좀 쐬려고요."
"허허....... 바람을 쐬는 건 괜찮지만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마십시오."
제갈월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구노인,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장미신타 구일비는 굽은 허리를 펴며 부드럽게 미소했다.
"이 늙은이에게 무슨 부탁입니까?"
제갈월풍은 다가가며 다시 물었다.
"구노인은 과거 무림에서 위맹을 떨친 고수였다지요?"
구일비는 움찔하더니 곧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지난 일은 왜 물어 보십니까?"
"그저 궁금해서요."
구일비의 늙은 얼굴에 일순 회상이 어렸다. 그의 표정에는 감회와 함께 언뜻 오만해
보이기도 하는 기개가 떠올랐다.
"이 늙은이가 강호에 활동했던 것은 벌써 팔십 년이 넘은 일이외다. 당시 노부의 무공
은 결코 만만치가 않았소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패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제갈월풍은 감탄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
"구노인의 무공은 어떤 것이었는데요?"
그 말에 장미신타 구일비는 호기가 치솟는지 신색을 바꾸며 대답했다.
"노복의 특기는 장법(掌法)에 있었소이다. 그리고 가끔 금련(金鍊)을 사용하기도 했소
이다."
제갈월풍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조르듯 말했다.
"구노인, 풍아에게 그 무공 좀 가르켜 줄 수 없겠어요?"
구일비는 갑자기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설마 제갈월풍이 이런 부
탁을 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구일비는 짐짓 난색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소공자님. 노복이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소공자님께서 구
환신공을 배우는 중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응석을 부리며 매달렸다.
"저는 이미 구환신공이 칠 단계에 이르렀어요. 칠 단계를 넘으면 할아버지께서도 무공
을 가르쳐 주시기로 약속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아직 아무 말도 없으시잖아요."
그는 구일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본격적으로 졸라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오실 동안 구노인의 무공을 가르쳐 줘요. 네?"
장미신타 구일비는 몹시 난처해지고 말았다.
"그, 그것은......."
"에이, 어서 가르쳐 줘요. 풍아는 구노인의 무공을 배우고 싶단 말이에요."
구일비는 그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허허허....... 알겠소이다. 노복이 졌습니다."
"야! 구노인, 고마와요!"
이윽고 장미신타 구일비는 제갈월풍에게 지난 날 무림에서 위명을 떨치게 했던 자신의
독문 무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노복의 무공은 사도(邪道)에 속해 있소이다. 수십 년 동안 살기(殺氣)를 제거하기 위
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제갈월풍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급히 물었다.
"그 무공의 이름이 뭔데요?"
"노복의 무공은 적혈공(赤血功)과 적혈십이장(赤血十二掌)입니다."
제갈월풍은 조급히 또 물었다.
"금련의 무공은요?"
구일비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허허허....... 소공자께서 그간 어지간히 무공에 갈증을 느꼈던 모양이구려. 금련을
쓰는 수법은 탈명구련(奪命九蓮)이라는 것입니다."
제갈월풍은 무안한 듯 씨익 웃었으나 계속 졸라댔다.
"어서 그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구일비는 제갈월풍의 이런 행동이 결코 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공에 대한 그의
열정이 대견하기조차 했다.
"일단 약속을 했으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께는 절대 비밀로 해야 합니
다."
제갈월풍은 만면에 활짝 웃음을 피웠다.
"물론이에요! 절대 할아버지께는 말하지 않겠어요."
장미신타 구일비는 마침내 제갈월풍에게 무공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적혈공
의 구결을 전수했다.
적혈공은 실로 괴이무쌍한 신공이었다. 실상 장미신타는 백여 년 전 무림의 일대 흉마
(兇魔)로서 무공의 화후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훨씬 능가했다.
그만큼 그의 무공은 개세적이었으며 특히 적혈공은 그가 가장 자랑하는 독문기공이었다.
적혈공을 펼쳐내면 양 손바닥이 완전히 적색(赤色)을 띄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적중당
하면 사람이고 짐승이고 가릴 것 없이 전신이 새까맣게 타 죽는 것이다.
적혈공의 구결은 난해하고도 복잡했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그 어렵고 긴 구결을 모두
암기해 버렸다. 더구나 그는 구결의 운용까지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구일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노부도 이 무공을 연마하는데 근 십 년이나 소비했거늘, 소공자는 하루만에 모
두 이해하다니!'
구일비는 일이 이렇게 되자 더욱 신명이 났다. 그래서 그는 내친 김에 적혈십이장까지
전수하기로 마음 먹었다.
"소공자님, 보십시오."
구일비의 양 손바닥이 문득 시뻘건 적색을 띄우더니 뜨거운 화기(火氣)가 피어 올랐다
화르릉----!
구일비는 양 손바닥을 춤추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수십 가닥의 불꽃이 석실의 사방을
메웠고 화기로 인해 공기가 달아올랐다.
실로 놀라운 위력이었다. 그것은 더우기 구일비가 단지 일성(一成)의 공력만으로 적혈
십이장을 전개한 것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구일비는 전개를 마쳤다. 어찌나 빨리 펼쳤는지 혈광(血光)만이 눈 앞
에서 번쩍 했을 뿐이었다. 제갈월풍은 눈을 크게 뜬 채 장법을 주시하고 있었다.
"소공자님, 몇 초나 기억하셨습니까?"
구일비의 물음에 제갈월풍은 싱긋 웃어 보였다.
"모두 기억했어요."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구일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럼 풍아가 제대로 기억했는지 한 번 봐 주세요."
제갈월풍은 작은 손바닥을 춤추듯이 휘둘렀다. 그러자 적혈십이장의 모든 초식이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이럴 수가?'
구일비의 놀라움은 극에 이르렀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다! 어찌 단 한 번 보고 모든 초식을 기억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구일비는 놀라움이 가라앉자 이번에는 품 속에서
금빛을 발하는 하나의 쇠사슬을 꺼냈다.
"소공자님, 이것이 탈명구련(奪命九蓮)입니다. 잘 보십시오."
딩! 딩! 딩.......
맑은 금속성에 이어 무수한 금선(金線)이 허공을 갈랐다.
육안으로는 볼 수조차 없는 빠른 변화였다. 그것도 제갈월풍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
고 초식을 지켜 보았다. 그의 뇌리에는 하나하나의 동작이 박혀들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금련을 넘겨 받은 후 조금도 틀리지 않게 탈명구련을 시범해 보였다. 비록
속도와 화후면에서는 떨어졌지만 초식의 변화는 거의 완벽할 정도였다.
'아! 놀라운 일이다.'
구일비는 입을 딱 벌리는 한편 점점 더 흥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뭇 흥분해
마지 않았다.
"흐음, 소공자님의 능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럼 기왕 내친 김에 이번에는 마환보(魔
幻步)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슥! 스스슥!
장미신타 구일비의 신형은 삽시에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는 석실 안에서 변화무쌍
한 보법을 펼친 것이었다.
그야말로 신묘하기 이를데 없는 보법이었다. 무궁무진한 변화가 상생상극하여 상대방
은 오직 환영(幻影)을 볼 뿐 그림자조차 볼 수 없는 기이한 보법이었다.
제갈월풍은 마환보도 어렵지 않게 배워버렸다. 그는 무서울 정도의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마환보를 서너 번 연습한 뒤 신형을 멈추며 물었다.
"구노인, 또 다른 무공은 없나요?"
구일비는 아연실색했다. 그는 실소를 터뜨리며 양팔을 번쩍 들고 말았다.
"허허....... 소공자님, 살려주십시오. 노복은 이미 마지막 밑천까지 다 털어냈습니다."
그제서야 제갈월풍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와요. 구노인."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갈월풍은 석실을 물러나며 명랑하게 덧붙였다.
"풍아는 나가서 무공을 더 연마하겠어요."
그는 백아와 함께 영기석부를 빠져나갔다.
천도봉(天道峯).
아직도 천도봉 정상은 온통 얼음투성이였다.
제갈월풍은 이전과는 달리 자유자재로 빙봉 위에서 활동할 수가 있었다. 그는 구일비
에게서 배운 무공을 실습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그의 무공시전은 점차 더 완벽해졌고 속도도 무척 빨라졌다.
휙! 휙---!
그가 일거수 일투족을 움직일 때마다 얼음덩이들이 가루로 변해 사방으로 날아갔다.
제갈월풍은 손발을 멈춘 다음 하늘을 바라 보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제갈월풍의 얼굴 또한 땀 한 방울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제갈월풍은 한 계곡에 내려섰다.
그가 내려선 곳은 봉우리 위와는 전혀 다른 별천지(別天地)였다. 훈훈한 기운이 감도
는 가운데 이곳저곳에 이름모를 기화요초가 만발해 기향을 풍기고 있었다.
봄날의 정취가 극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었다.
"야! 정말 아름답구나. 백아, 나와 봐라."
제갈월풍이 들뜬 음성으로 소리치자 그의 소매 속에서 백아가 튀어나왔다.
캬오!
과연 백아도 기쁜지 울음을 터뜨리며 주위를 내달았다. 제갈월풍은 동심(童心)이 치밀
어 올라 계곡 밖을 바라보며 경쾌하게 말했다.
"백아, 우리 저곳까지 누가 먼저 가나 시합해 보자."
백아도 찬성하는 듯 기성을 발했다.
"자, 간다!"
휘익!
제갈월풍은 몸을 날려 전력으로 질주했다. 바람이 옷자락을 찢을 듯이 펄럭이며 쌩쌩
거리는 날카로운 음향을 전하고 있었다.
실제로 제갈월풍의 질주하는 속도는 인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한참
을 달리다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백아가 마치 그림자인 양 그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아는 전신의 흰털이
찰싹 붙은 채 무서운 속도로 내닫고 있었다. 발이 채 땅에 닿을 겨를도 없었다.
금선백령묘(金線白靈猫)라는 이 영물은 본시부터 천리마(千里馬)보다도 빨리 달릴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루에도 수천 리를 달린다는 말이 있었다.
"엇!"
제갈월풍의 입에서 짧은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잠깐 돌아보느라 방심하는 사이 백
아가 어느새 그를 스치고 지나가 저만큼 앞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제갈월풍은 은근히 약이 올랐다. 그는 비마영(飛魔影)의 경공을 펼쳤다.
그러자 그의 신형은 수 배나 더 빨라져 쾌속하게 날아갔다. 따라서 옷자락이 찢어질
듯이 팽팽해졌는가 하면 귀를 찢는 파공성이 울렸다.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거의 동시에 어느 봉우리 아래에 도착했다. 제갈월풍
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가쁜 숨
을 몰아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백아, 너 정말 굉장히 빠르구나?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으니."
캬오!
백아는 고개를 그의 옷소매에 비벼댔다. 제갈월풍은 흐뭇한 표정으로 백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백아가 전력으로 달리지 않았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느닷없이 백아가 두 눈에서 적광(赤光)을 폭사하며 전신의 털을 무섭게 곤두세우는 것
이 아닌가?
캬아아!
동시에 백아는 사납게 이빨까지 드러냈다. 제갈월풍은 의아했다.
"왜 그러느냐? 백아."
그때 갑자기 허공으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엇!"
급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제갈월풍은 그만 두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한 마리의 거대
한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날개 한 쪽의 크기만도 근 스무 자에 달하는 독수리. 그 거응(巨鷹)은 전신이 눈부신
금빛 깃털로 뒤덮여 있었다. 날개를 퍼득일 때마다 폭풍을 일으켜 지상의 풀과 나무들
이 온통 뽑혀나갈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 굉장히 큰 독수리구나.'
제갈월풍은 감탄해마지 않았다.
캬아악!
백아는 여전히 전신의 털을 곤두세운 채 허공을 향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있
었다. 그러나 거대한 금응(金鷹)은 허공을 빙글빙글 돌 뿐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
았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제갈월풍이 입을 열었다.
"백아, 가만 있어. 너 때문에 저 독수리가 못내려 오잖아."
그는 백아를 안아 품 속에 넣었다. 백아는 일단 품속에 들어가더니 잠잠해졌다.
"어이! 이리 내려와라."
제갈월풍이 두 팔을 흔들며 외치자 금응은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날
개를 접고 아래로 내려왔다.
쏴아아!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금응은 제갈월풍의 앞 오 장 거리에 내려앉았다. 독수리의 모
습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두렵기는커녕 금응이 매우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슴없이
금응에게로 다가갔다. 금응은 타는 듯이 시뻘건 눈으로 다가오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금응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런데 점차 거리가 좁혀질수록 금응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 점의 적의도 없
는 제갈월풍의 순수한 눈과 접하자 갑자기 온순하게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금응의 덩치는 제갈월풍보다 몇 배나 컸다. 가까이서 보니 날개를 접고 있는 몸체만도
웬만한 말(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단하구나. 정말 근사하다."
제갈월풍은 호감을 가지며 손을 내밀어 독수리의 깃털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러자
독수리는 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만히 있었다. 제갈월풍은 금응이 자신의 손길
을 거부하지 않자 친밀감이 일어났다.
"너 이 근처에 사니?"
크악! 크---- 악!
금응은 마치 그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울어댔다. 제갈월풍은 신기한 생각이 들어 환
성을 질렀다.
"야아! 너 내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니?"
크크악!
금응은 또다시 울음을 토해내는가 싶더니 고개까지 끄덕여 보였다. 제갈월풍의 얼굴에
는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음! 그렇다면 넌 내 친구다. 금빛털을 갖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금아(金兒)라고 부르
자."
금응은 말똥말똥한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제갈월풍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얼마쯤 시
간이 지나자 금응은 갑자기 등을 내보이며 날개를 푸드득 거렸다.
그 모습에 제갈월풍은 반색을 했다.
"타라고?"
크--- 악!
금응의 고개가 또 한 차례 끄덕여졌다. 제갈월풍은 기쁨을 금치 못하며 망설이지 않고
독수리의 넓은 등에 훌쩍 올라탔다.
휘익---!
금응은 곧바로 날개를 활짝 벌리더니 허공으로 불쑥 치솟았다. 제갈월풍을 태운 채 눈
깜짝할 사이에 까마득한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아!"
제갈월풍은 밑을 내려다 본 순간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아찔하기는 했으나 푸른 창공에 안겨든 채 지상을 한 눈에 굽어보는 소년의 마음 속에
서는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일어나고 있었다.
쉬--- 잉----!
금응은 무섭게 대기를 가르며 어디론가 계속 날아갔다. 세찬 바람이 줄곧 얼굴과 몸을
때리므로 제갈월풍은 떨어지지 않기위해 금응의 깃털을 단단히 붙잡고 있어야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척 많은 거리를 비행했다고 생각되었을 때였다. 제갈월풍
은 금응이 아래로 급속히 하강하는 것을 느꼈다.
휘리릭---!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듯한 세찬 기류를 고스란히 받으며 제갈월풍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벅찬 희열 때문이었다.
하나의 절벽을 낀 채 금응은 마치 흐르는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금응은 마침내 한 곳에서 멈추었다. 그곳은 절벽 중간에 불쑥 튀어나온 거대한 바위
위였다. 그런데 바위 바로 위에 절벽으로 뚫려있는 하나의 검은 동구(洞口)가 보였다.
"이런 곳이 있었다니......."
제갈월풍은 강한 호기심에 휩싸인 채 어두운 동구를 주시했다.
휘이익!
금응은 그를 실은 채 동구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속은 매우 넓어서 체격이 큰 금응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쯤 가자 동굴은 점차 좁아져 금응이 더이상 날아갈 수가 없었다. 제갈월풍은 금응
의 등에서 내려섰다.
'왜 금아가 날 이 동굴로 데려 왔을까?'
그는 짙은 의문을 느끼며 동굴 안을 둘러보았다.
동굴은 천연으로 이루어진 듯 천장이나 벽에 종유석(鐘乳石)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
다. 제갈월풍은 영약으로 인해 안력이 크게 증진되어 동굴 안을 환히 볼 수가 있었다.
그가 두리번거리자 금응이 부리로 그의 등을 밀었다.
"날더러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냐?"
금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월풍은 더욱 호기심이 일어났다.
'대체 동굴 안에 무엇이 있길래 들어가라는 걸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좋다. 들어갈 테니까 대신 넌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
금응은 염려 말라는 듯이 다시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윽고 제갈월풍은 지대한 관
심을 품은 채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더니 나중에는 인공(人工)으로 다듬은 듯한
석도(石道)로 이어졌다.
'이곳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갈월풍은 내심 중얼거리며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하나의 커다란 석실(石室)에 당도하게 되었다. 석실은 넓이가 오 장여 정도
되었는데 천장에 주먹만한 야명주(夜明珠)가 박혀 있어 대낮같이 밝았다.
"앗!"
석실 안으로 들어선 제갈월풍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석실 중앙에 하나의 큰 탁자가 있
었고 그 뒤로 한 명의 청수하게 생긴 중년서생(中年書生)이 정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이 있었구나......!'
제갈월풍은 급히 두 손을 마주 잡으며 그 중년선비를 향해 공손히 입을 열었다.
"허락도 없이 안으로 들어와 죄송합니다. 저는 제갈(諸葛)......."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는 안색이 변했다. 무언가 괴이함을 느낀 것이었다.
제갈월풍은 조심스럽게 중년서생에게 다가갔다. 과연 중년선비는 온 얼굴에 푸른 빛이
감돌고 있는 것이 산 사람이 아니었다.
차디찬 시신(屍身)이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이었구나!'
제갈월풍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섬ㅉ했으나 그렇다고 두렵지는 않았다. 그는 실상 어떤
일에도 몹시 대범한 편이었다.
그는 쓴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낡은
양피지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제갈월풍은 급히 양피지를 읽어 보았다. 양피지는 무척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대가 이곳으로 들어온 것은 노부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노부는 제(齊) 나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무공(武功) 익히기를 좋아했다.>
제갈월풍은 글을 읽고는 놀라마지 않았다.
"아! 이 분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인물이셨구나."
그는 곧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거의 이천 년 전 사람인데 아직도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니......'
제갈월풍은 다시 양피지에 수록된 글을 읽었다.
<노부는 천하를 유랑(流浪)하며 무학을 배우다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알려진 구기자(丘
奇子)란 분의 문하(門下)로 들어갔다. 그러나 삼 년만에 더이상 배울 것이 없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분은 대단한 기인이셨나 보구나!'
제갈월풍은 점차 마음이 이끌리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노부는 홀로 깊은 산중에 들어가 무공을 연마했다. 해(日)가 가고 달(月)이 가
는 줄도 몰랐으며 심지어는 침식마저 잊고 몰두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이 흘렀다. 근
백 년(百年)이 흐른 것이었다. 따라서 노부의 무공은 극(極)에 이르러 인간의 한계 내
에서는 그 이상 진전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노부는 다시 무림에 내려왔다. 그
러나 막상 무림을 종횡하면서 천하의 모든 무공이 보잘 것 없음에 한탄한 나머지 도로
산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이곳에 들어온 자여, 그대가 노부의 무학을 배운다면 능히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치뤄 사도가 된다면 지금 바
로 제자로 받아 들이겠노라.>
어찌 보면 자만에 찬 광오한 글귀였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도리어 일말의 동정심이 솟
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분은 어쩌면 무척 외로운 분일지도 모른다. 자부심이 이토록 강한 데다 평생을 오
직 무공에만 바쳤으니.......'
제갈월풍은 어릴 적부터 외롭게 자라왔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고독에 대해 잘 이해했
다. 그는 남긴 문구만 보고도 그가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는 일평생 천하를 오시하며 고독하게 살았을 중년서생의 푸르게 변색된 얼굴을 바라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연민이 치밀어 오르자 제갈월풍은 결정을 내렸다.
'그래. 내가 이 분의 제자가 되어 드리자. 비록 산 사람이 아니라지만 무슨 상관이 있
겠어?'
제갈월풍은 탁자 앞에 꿇어 엎드려 아홉 번 절했다.
"제자 제갈월풍이 사부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돌탁자가 순식간에 땅속으로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제갈월풍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바닥으로 꺼져버린 돌탁자는 잠시 후 다시 솟아 올랐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었던 탁
자 위에 한 개의 옥갑(玉匣)이 놓여져 있었다.
'이것은?'
제갈월풍은 궁금함을 금치 못하며 옥갑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옥갑 속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한 벌의 백의유삼(白衣儒衫)과 한 자루의 검(劍), 그리고
한 권의 책자였다. 책자 위에 양피지 한 장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구배지례를 취했으니 이제 그대는 나의 제자다. 이 사부의 이름은 여백천(呂白天)이
라 하며 활동할 당시 복마진군(伏魔眞君)이란 별호로 불리웠었다. 비록 살아 생전에
사도의 연을 맺지는 못했으나 후세의 제자를 위해 세 가지 물건을 남기니 필히 무림정
의(武林正義)를 위해 사용하기 바란다.>
양피지에는 세 가지 물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백의유삼은 천고(千古)의 보의(寶衣)로써 백삼천보의(白衫天寶衣)라고 하는 것이었다.
일명 어잠풍(御潛風)이라고도 했다. 이 어잠풍은 만년천잠신사(萬年天蠶神絲)와 천익
룡(天翼龍)의 껍질, 만년신학(萬年神鶴)의 침 등으로 만든 것으로 입을 경우 어떤 창
칼도 침입하지 않을 뿐더러 수(水), 화(火), 독(毒)이 불침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잠
풍을 입은 채 내공을 연마하면 공력이 절대로 마르지 않고 급속도로 증진하는 영효를
지니고 있었으며 경공(輕功)을 펼치면 하늘을 마음대로 훨훨 날아다닐 수가 있었다.
제갈월풍은 어잠풍의 설명을 읽고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옷이 존재했단 말인가?'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옷을 펼쳐 보았다. 어잠풍은 은은히 빛나는 백색(白色)의
유삼(儒衫)으로 왼쪽 가슴에 수실로 풍(風)이란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천의 촉감이 극히 부드러운가 하면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다. 제갈
월풍은 어잠풍을 어루만지며 눈을 빛냈다.
'정말 신기한 옷이구나!'
그는 이번에는 검(劍)을 집어 들었다.
<노부는 평생 검법(劍法)을 연마하지 않았다. 검에는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히 얻은 이 신검(神劍)만은 그대를 위해 남겨둔다.>
양피지에 적힌 검에 대한 설명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검의 이름이나 내력같은 것은 적
혀있지 않았다.
제갈월풍은 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전체가 순백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루나 검집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매우 질긴
한편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게 했다.
손잡이 부분의 끝에는 초승달 형상의 조각이 달려 있었는데 그것을 본 순간 제갈월풍
은 마음이 이끌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검을 뽑아보았다.
스르릉----!
마치 익룡(翼龍)이 낮게 우는 것 같은 음향이 울리며 눈부신 백광(白光)이 석실을 가
득 메웠다.
"으음!"
제갈월풍의 가슴 속에서는 불현듯 웅심(雄心)이 솟아났다. 그는 한 가닥 호연지기가
일어 내심 한 가지 결심을 굳혔다.
'좋다! 지금부터 이 검을 내 분신으로 삼자. 앞으로 이 검의 이름은...... 월영(月影)
이다.'
제갈월풍은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집어든 것은 책자였다.
<금정단서(金頂丹書)>
표지에는 금빛 글씨로 그같이 씌여져 있었다.
첫번째 장을 여니 그곳에는 복마진군의 친필(親筆)인 듯한 글귀가 보였다.
<노부가 평생에 걸쳐 창안하여 발전시킨 무학을 기꺼운 마음으로 제자에게 전(傳)한다
.>
제갈월풍은 감읍하는 심정이 되어 책자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책자 속에는 여러 가지
심오한 무공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주를 이루는 것은 현문태을신공(玄門太乙神功)이
었다. 특히 괴이한 것으로는 삼절강(三絶 )이라는 무공이었다.
그것은 세 가지 단계로 나누어 강기( 氣)를 수련하는 것으로써 백강(白 ), 묵강(墨 ),
혈강(血 )으로 구분지어져 있었다. 이 괴이한 명칭이 붙여진 삼절강의 구결은 제갈월
풍으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것들이었다.
그 밖에도 금정단서에는 광범위한 무공의 원리(原理)에 대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인지라 제갈월풍은 금정단서를 덮고 말았다.
'할아버지께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물건을 도로 옥갑 속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옥갑을 들어내자 옥갑 밑에 다
시 한 장의 쪽지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노부는 이곳 동굴에 들어와서 한 가지 기물(奇物)을 발견했다. 그것은 전설 속의 만
년혈삼(萬年血蔘)으로 노부는 크게 기뻐했으나 곧 실망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만년혈삼은 팔천 년밖에 안 된 것으로 이천 년이 더 지나야 효험을 얻을 수 있기 때
문이었다. 만일 그대가 인연이 있다면 그것을 취하라. 만년혈삼이 완전히 익었을 때는
아홉 개의 꽃잎이 피어나고 주위에는 붉은 안개가 서려 있을 것이다. 만년혈삼은 동
굴 제일 안쪽의 비동(秘洞)에 있다. 석실 좌측의 문(門)을 열고 들어가라.>
제갈월풍은 즉시 석실의 좌측 벽을 살펴 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하나의 문(門)이 있었다.
끼익---!
문을 밀자 하나의 암동(暗洞)이 나타났다.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담담한 기향(奇香)과
축축한 습기가 확 풍겨왔다.
제갈월풍은 망설이지 않고 암동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그의 귓전으로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전해져 왔다.
'아! 이런 곳에 연못이 있었다니.......'
암동의 끝.
그곳에는 신비하게도 약 일 장 정도의 넓이로 맑은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다. 물을 보
자 제갈월풍은 자연스럽게 갈증을 느꼈다. 그는 곧 몸을 숙여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한 가닥 차갑고 청량한 기운이 뱃속으로 스미는가 싶자 정신이 더욱 명료해지는 기분
이 들었다.
'야! 정말 시원하구나.'
제갈월풍은 자못 신이 난 듯 급기야 연못물로 세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시력과 청력이 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기실 그가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 이 연못은 지난 날 복마진군조차도 알아내지 못했던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연못물은 지화(地華)로 형성되어 인체의 감각들이 가진 기
능들을 극대화 시켜주는 기능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제갈월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림인이면 꿈에서도 도달하려 애쓰는 천안통(
天眼通), 천이통(天耳通)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연속되는 기연의 중첩이랄까? 그는 실로 하늘이 점지한 복록을 타고난 행운아임에 틀
림없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문득 제갈월풍의 입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연못 옆의 한 바위 위.
그곳에 만년혈삼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한 눈에 그것이 만년혈삼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줄기는 한 자 정도, 복마진군의 말대로 아홉 송이 꽃이 피어 있고
붉은 안개가 주위에 은은히 서려 있었다.
제갈월풍은 만년혈삼을 뽑아냈다. 바위의 윗부분이 모래처럼 부서져 있어 혈삼의 뿌리
는 의외로 쉽게 뽑혀 나왔다.
어린아이 팔뚝 굵기만한 만년혈삼은 피처럼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코를 찌르는
향기에 이끌려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에 넣고 깨물었다.
그러자 만년혈삼은 굳이 씹을 필요도 없이 사르르 녹더니 그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리
는 것이었다.
'정말 신비한 맛이구나!'
제갈월풍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맛은 차치하고라도 입안에 남는 향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청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편 약간 두려움이 치밀기도 했다. 만년혈삼의 복용으로 인해 이상한 변화라
도 일어날까봐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참이 지나도 그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안도를 느끼며 입안에서 계속 감도는 향기를 음미한 채 암동을 빠져 나가려 했다.
이제 그의 손에는 만년혈삼의 남은 줄기와 아홉 송이의 꽃이 들려져 있었다.
'이것도 혹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제갈월풍은 줄기와 꽃을 소중히 품 속에 갈무리했다. 그의 발걸음은 경쾌하게 처음 당
도했던 석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석실로 돌아오자마자 복마진군의 시체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비
록 얼마되지 않는 시간 동안이었으나 자신의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轉機)가 도래했
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부님, 하해와도 같은 은혜를 입은 이 제자는 그만 떠날까 합니다. 제자가 아직 어
리고 미숙하여 장담할 처지는 아니나 한 가지만은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
제갈월풍의 음성은 격정으로 인해 다소 떨려나오고 있었다.
무려 이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은 사제지간(師弟之間), 이는 어쩌면 동시대에 맺어진
것보다 더욱더 무거운 의미를 지닌 인연일지도 몰랐다.
제갈월풍은 나이답지않게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제자는 사부님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무림정의를 위해 이 한 몸을 불사르겠습니다.
쿠르릉---!
문득 굉음이 들리더니 복마진군의 시신이 땅 속으로 푹 꺼진 것은 그때였다. 동시에
그 자리에는 하나의 석판(石板)이 튀어 올라왔다.
석판에는 금강지력(金剛指力)으로 새긴 듯 힘찬 필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너는 이제 노부의 제자다. 항차 복록을 이룰 것을 지하에서나마 기원하노라. 잠시 후
이곳은 영원히 폐쇄될 것이다. 일각 후면 지각(地殼)의 변동으로 동굴이 무너질 것이
니 너는 속히 빠져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럼 무운을 비노라.
복마진군(伏魔眞君)>
"아! 사부님......."
제갈월풍은 마치 복마진군이 살아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복마
진군의 완벽한 안배에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낀 것이다.
그는 시간이 촉박함을 한탄하며 다시 아홉 번 절을 올리고는 지체
없이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쿠르르릉-----!
동굴의 석벽이 흔들리며 굉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는 급히 신형을 날렸다.
이미 천장과 벽에 균열이 가며 동굴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대략 일각 쯤 후,
그가 동굴을 벗어나와 절벽 중턱에 솟아있는 바위까지 왔을 때였
다.
꽈르릉----! 꽈꽝!
엄청난 굉음과 함께 동굴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말았다.
복마진군의 유체도, 아니 동굴이 존재했던 흔적조차도 제갈월풍의
눈 앞에서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 第 5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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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6 章. 절대종사(絶代宗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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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월풍은 한동안 무너져버린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움직일 생각
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얼마전 까지의 일들이 도무지 현실로 여겨지지 않았다.
만일 그의 손에 들려있는 옥갑(玉匣)이 아니었다면 한 차례 꿈을
꾸었다고 여겨졌을 정도였다.
제갈월풍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천도봉으로 돌아가자. 할아버지와 구노인께서 걱정하시겠구나. '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의당 그곳에 있어야 할 금응(金鷹), 즉 금아(金兒)가 보이
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금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돌아갈 길이 막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성이 워낙 천진하고 낙천적인 제갈월풍은 곧 걱정을 뒤
로 한 채 생각을 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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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아는 무슨 생각으로 날 사부님이 계신 동굴로 안내한 것일까?'
그것은 실로 수수께끼와도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그가 짐작인들 하
였겠는가?
금응은 본시 과거 복마진군이 키우던 것으로 근 삼천 년을 산 희대의 영조였다. 금응
은 하루에 일만 리(一萬里)를 날 수 있으며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는 선악까지도 구별할 줄 알았다.
그로인해 제갈월풍은 금응에게 선택된 것이었다. 금응은 복마진군의 유시를 받들어 동
굴을 수호하며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월풍을 만난 후 그를 복마진군의 후
계자로 삼기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안내해온 것이었다.
제갈월풍이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이 놈의 독수리! 저리 비키지 못하겠느냐?"
그 소리는 바로 절벽 아래의 계곡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금아다!'
제갈월풍은 즉각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는 비마영의 신법으로 절벽에
바짝 달라붙어 그림자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잠시 후, 계곡에 내려선 제갈월풍은 뜻하지 않은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곤룡포를 입은 위맹하게 생긴 한 노인(老人)이 금아와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 아
닌가?
노인은 육순(六旬) 쯤 되어 보였는데 두 눈에 신광이 이글거렸으며 위풍당당한 모습이
었다. 그는 금빛 섭선(攝扇)을 휘두르며 날카로운 초식으로 금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캬아악----!
금아 또한 괴성을 지르며 허공을 솟구쳤다 내리 꽂히며 노인을 공격하고 있었다.
파파팍----!
섭선이 내쏘는 강맹한 경기가 금아를 향해 무섭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돌멩
이가 날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곤룡포 노인이 문득 거칠게 외쳤다.
"이 놈의 독수리가 제법 무공을 아는구나!"
그의 눈에서 섬뜩한 살기가 내뻗쳤다.
"어쨌든 네 놈은 한낱 미물일 뿐! 나 천안신군(天眼神君)에게 걸린 이상 살아남지 못
하리라!"
그의 섭선이 무시무시한 회오리와 함께 환영을 일으켰다.
캬악! 캬르르----!
마침내 금아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허공으로 높이 솟구쳐 오르고 말았다.
그 광경에 관전하고 있던 제갈월풍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노인의 무공은 굉장하구나. 금아도 함부로 덤빌 수 없겠구나.'
아닌게 아니라 금아도 노인이 만만치 않다고 여겼는지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 금아는 금세 반격을 시도했다.
캬아악!
괴성을 지르며 금아는 쏜살같이 내리 꽂히며 발톱을 세워 공격해 갔다. 자칭 천안신군
이라는 노인은 열 손가락을 쫙 펴더니 금아를 향해 지풍(指風)을 날렸다.
슈슉----! 퍽! 퍽---!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십지(十指)가 모두 금아의 가슴과 목에 격중되었다.
그러자 금아는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토하며 다시 날아올랐다. 그러나 두 눈에 혈광을
뻗치더니 깃털을 뻣뻣하게 세우며 재차 내리 꽂혔다.
"아니! 네 놈이 나의 금강지(金 指)를 맞고도 끄덕도 않다니!"
천안신군은 대경실색했다.
이번에는 금아의 발톱과 부리가 대단한 기세로 덮치고 있었다. 금아의 공격권 안에 갇
힌 천안신군은 마침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때였다.
"금아! 멈추어라."
한 줄기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크아악---!
금아는 날개를 퍼득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이어 공격권
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얌전히 내려앉는 것이었다.
"......?"
천안신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신광이 충만한 눈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한
명의 소년이 우측 십여 장 밖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저 소년이 나타났단 말인가?'
아무리 싸우던 중이라 해도 그의 이목을 속이고 이렇게 가까운 위치에 누군가 나타났
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 금아는 낮게 비행하여 제갈월풍에게로 날아갔다. 이어 몹시 반가운 듯 부리를 그
의 옷자락에 마구 비벼대는 것이었다.
"하하! 한참 찾았다. 금아!"
제갈월풍도 반갑게 웃으며 손을 들어 금아의 날카로운 부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극
히 다정해 보이는 그 모습에 천안신군은 안색을 굳히며 물었다.
"네가 그 독수리의 주인이냐?"
"맞아요."
제갈월풍은 다소 차갑게 대답했다. 금아와 싸우는 것을 본 그로서는 상대가 별로 달갑
지 않게 여겨졌던 것이다.
천안신군의 눈살이 살짝 찌푸러졌다.
"으음, 너의 사부는 누구냐?"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제갈월풍은 얼마전 일을 생각해 내고는 낭랑하게 대답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요."
천안신군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
'이 놈이 지금 감히 노부를 기만하려 드는가?'
그러나 이내 그는 표정을 풀고 말았다. 짐짓 차가운 태도를 보이는 소년이 웬지 그다
지 밉살스럽지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소년의 순수하고 맑은 동공을 대하자 자신의 의구심이 오히려 민망해지고 말았다.
일체의 악의(惡意)라던가 속(俗)의 티끌이 발견되지 않은 제갈월풍의 눈(眼).
그것은 그로 하여금 이 신비스런 소년에게 한없이 빨려들게 했다. 무언중 상대를 동화
시키는 힘이 깃든 듯한 신비한 눈이었다.
천안신군은 문득 호감이 일어났다.
"소형제,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제갈월풍은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제갈월풍(諸葛月風)이라고 해요."
"제갈월풍? 헛헛헛....... 정말 멋진 이름이구나. 네 모습과 잘 어울리는구나."
제갈월풍은 그 말에 활짝 웃었다. 자신의 이름이 좋다고 칭찬받기는 이번이 세번째였
다. 바로 염천월과 지난 날 한 객점에서 만났던 탈백금도 여문비, 그리고 천안신군이
었다.
그는 천안신군에게 일었던 반감을 깨끗이 지우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존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천안신군은 헛기침을 하며 가슴에 드리워진 수염을 쓸었다.
"흠! 노부는 천안신군(天眼神君) 곡우(曲雨)라 한다."
그는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소형제는 이곳에 사느냐?"
제갈월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여기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있어요."
"그럼 저 독수리를 타고 이곳까지 온 모양이군."
"네."
천안신군 곡우는 은근한 눈길로 제갈월풍을 응시했다.
"소형제, 너는 강호에 나온 적이 있느냐?"
제갈월풍은 약간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요."
"흠, 그럼 장차 강호에 나올 생각이냐?"
제갈월풍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요."
천안신군은 갑자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노부에게는 너만한 딸이 있다. 굉장히 예쁘게 생긴 아인데 네가 오면
소개시켜 주마."
"저, 저는......."
제갈월풍이 얼굴을 붉히자 천안신군은 대소를 터뜨렸다.
"핫핫핫! 소형제, 노부가 원래 이곳에 온 이유는 한 가지 약초(藥草)를 캐기 위해서
였네. 그러나 헛수고만 했을 뿐 찾지 못했지. 그러다 이 독수리를 만났다네."
제갈월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금아랑 싸우게 된 것인가요?"
"그렇지."
천안신군은 뭔가 망설이는 듯 하더니 다시 빙그레 웃었다.
"음, 소형제를 만난 김에 노부가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은데, 어떨까?"
"무엇인데요?"
제갈월풍의 반문에 천안신군 곡우는 품 속에서 한 개의 금전(金錢)을 꺼내 던져 주었다.
제갈월풍이 받아 살펴보니 금전의 전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양각으로 각인되어 있
었다.
- 제(帝).
곡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장차 무림에 나오면 호북성(湖北省)에 있는 제왕문(帝王門)에 한 번 들러라. 만일 무
림에 나가 어려운 일을 만났다면 그 금전을 보여주거라. 그럼 누구라도 네게 한 번쯤
은 양보해 줄 것이다."
제갈월풍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무림에서 굉장히 위명을 떨치는 분인가 보군요?"
곡우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헛헛! 약간 그런 셈이지!"
그의 만면에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소형제, 내 너에게 한 가지 무공을 전해주고 싶다. 배워 보겠느냐?"
제갈월풍의 얼굴에 금세 희색이 떠올랐다. 바야흐로 그는 한창 무공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따라서 무슨 무공이든 관심이 있었다.
"어떤 것인데요?"
천안신군 곡우는 수중의 금빛 섭선을 흔들었다.
"노부는 이 섭선으로 무림에 성명(成名)했다. 네게 금마팔선(金魔八扇)을 보여 주겠다."
좌르륵----!
금빛이 번쩍 일어나며 순식간에 곡우의 몸은 섭선의 광망 속에 가려졌다. 섭선은 겹겹
이 환영을 그렸고, 접혀지는 순간 찌르고, 자르고, 끊어지고, 밀어내는 동작이 신묘무
비하게 전개되었다.
윙----! 위잉----!
웅휘한 파공성과 함께 막강한 경기가 장내를 뒤덮었다. 그러나 곡우는 금마팔선을 한
초식도 쉬지 않고 단번에 시전하여 불과 숨 몇 번 들이쉴 사이에 전개를 끝내 버렸다.
그는 섭선을 거두며 물었다.
"잘 보았느냐?"
제갈월풍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 얼마나 기억할 수 있겠느냐?"
곡우는 물어보면서도 내심으로는 제갈월풍이 한 초식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제갈월풍은 솔직히 대답하면 그가 놀랄까봐 눈알을 굴리며 이렇게 답했다.
"약간... 기억했어요."
곡우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아졌다.
"그래, 몇 초까지 기억했느냐?"
"대강... 사초(四招)정도요."
그는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혔다. 본의 아니게 거짓을 말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천안신군 곡우의 안색은 홱 변하고 말았다.
'뭐라고? 노부의 금마팔선은 초식의 변화가 복잡하고 난해하기가 천하에 으뜸인데 단
한 번 보고 사초나 기억해? 딸아이 같은 천하기재(天下奇才)도 단 일초를 배우는데 하
루를 꼬박 소비했건만......!'
곡우는 아무래도 의심이 일었다.
'이 녀석이 어쩌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 시험해 봐야겠구나.'
그는 다소 경직된 음성으로 말했다.
"기억한 것을 시전해보일 수 있겠느냐?"
"네."
제갈월풍은 곡우가 내미는 섭선을 받아들었다. 그는 신기한 듯 섭선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그 광경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그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곡우는 자신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대하면 대할 수록 제갈월풍에 대해 호감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제갈월풍은 마침내 섭선을 움직였다.
쫘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금마팔선의 초식이 전개되었다. 제갈월풍은 초식을 전개
하면서 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기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사초의 초식이
곡우가 펼친 것과 거의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각 초마다 한두 군데씩의 변화가 틀렸다. 기실, 그것은 제갈월풍이 일부러 그
런 것이었다.
'이럴 수가!'
곡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실상 그는 일초(一招) 정도만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그가
전 초식을 펼친 것은 단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쾌속하게 떨
쳐냈던 것이다.
제갈월풍을 바라보는 천안신군 곡우는 내심 은근히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만일 이 녀석이 무공을 계속 익힌다면 훗날 나를 훨씬 능가할 지도 모른다.'
내심 이런 불안이 일자 그의 눈에는 얼핏 살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무림인의 생리였다. 그러나 곧 곡우는 쓰디 쓴 고소를 금치 못
했다. 그가 누구인가?
천하무림을 진동시키는 일문의 지존(至尊)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제 젖비린내가 간신
히 가실까말까한 소년에게 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허허....... 내 이게 무슨 꼴인가? 천하의 제왕문주(帝王門主)가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곡우는 내심 혀를 차며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제갈월풍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년의 영
기발랄한 모습에서 더욱 수치를 느끼며 슬며시 살심(殺心)을 걷어내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형제, 훗날 무림에 나오면 꼭 제왕문에 들려주기 바란다."
그것은 진심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그 말에 제갈월풍은 공손히 읍하며 대답했다.
"좋아요. 꼭 찾아가겠어요."
"핫핫핫핫핫......!"
천안신군 곡우는 호탕한 대소를 남기며 장대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모습은 삽시에 계
곡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갈월풍은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성격이 급하시긴 하나 나쁜 분은 아니구나. 더구나 호탕한 일면도 있고......."
그는 중얼거린 후 금아를 돌아보았다.
"금아, 이제 우리도 가자. 날 천도봉까지 데려다 주겠지?"
금아는 낮게 울으며 어서 타라는 듯 등을 낮추었다. 제갈월풍이 올라타자 금아는 거대
한 날개를 펼치며 창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대설산(大雪山) 천도봉(天道峯).
제갈월풍은 금아를 탄 채 천도봉 정상까지 되돌아 왔다.
하늘에서 본 대설산의 빙봉(氷峯)은 장관이었다. 햇빛 아래 봉우리 전체가 마치 투명
한 수정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기석부 앞에는 염천월과 장미신타 구일비가 초조한 모습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
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제갈월풍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할아버지......!"
기쁨에 찬 음성이 허공에서 들려왔다. 염천월과 구일비는 급히 고개를 들어보고는 깜
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이 본 것은 단지 허공을 선회하는 거대한 금빛 독수리 뿐이었다.
한편 제갈월풍은 급한 나머지 허공 삼십 장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 내렸다.
"아, 아니!"
염천월은 비로소 제갈월풍을 알아 보고는 그만 대경실색했다. 그는 황급히 떨어져 내
리는 제갈월풍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상상치도 못할 광경이 벌어졌다. 제갈월풍의 신형이 허공에서 꿈틀하는가 싶더
니 한 바퀴 원을 그리듯 회전하고는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서는 것이 아닌가?
염천월은 크게 놀랐다.
'풍아가 언제 저런 경공술을?'
"할아버지!"
제갈월풍은 그의 품에 달려와 안겼다. 염천월은 짐짓 노한 듯 큰 소리로 꾸짖었다.
"풍아! 대체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냐?"
제갈월풍은 얼굴을 푹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밖의 경치가 보고 싶어서요."
염천월은 아직도 허공에 떠서 맴도는 독수리를 가리켰다.
"저 독수리는 무엇이냐?"
"참!"
제갈월풍은 그제야 생각난 듯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금아! 내려오너라."
쏴아아아아!
금아는 폭풍을 일으키며 일직선으로 바닥에 내려 꽂혔다. 염천월은 매우 놀라는 한편
내심 짚히는 바가 있었다.
'풍아가 기연을 만난 것 같구나.'
그는 침착을 회복하며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풍아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서 얘기해 보아라."
그 말에 제갈월풍은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무척 신기한 일을 만났어요. 사부(師父)님도 모시게 되었고요."
"사부?"
염천월이 의아해하자 제갈월풍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히 얘기했다. 금아를 만난
일, 그리고 동굴에서 복마진군의 제자가 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염천월과 구일비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놀라움은
기쁨으로 변했다. 제갈월풍이 만난 기연은 천하에 다시 없는 희대의 대기연이었던 것
이다.
제갈월풍의 얘기가 끝나자 염천월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허어! 이 녀석, 이 할애비가 오히려 너보다 더 기쁘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복마진군
의 무학을 이어 받다니."
제갈월풍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복마진군을 아세요?"
염천월은 대답 대신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우선 네가 얻었다는 물건을 보자."
제갈월풍은 옥갑을 꺼내 보였다. 염천월은 옥갑의 뚜껑을 열어 살펴보고는 감탄해마지
않았다.
"흐음, 정녕 훌륭한 물건들이다.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탈취하고자 나
설 기보들이군."
그는 먼저 금정단서(金頂丹書)를 펼쳐 보았다. 내용을 훑어보는 염천월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때요?"
제갈월풍이 묻자 염천월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과연 대단하군! 이것은 복마진군이 남긴 무학비급의 진본(眞本)이다."
제갈월풍은 갑자기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복마진군의 무공은 할아버지와 비교해 어느 정도인가요?"
그의 질문에 염천월은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녀석아, 어찌 이천 년 전의 인물과 나를 논(論)할 수가 있느냐?"
그러나 그는 곧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복마진군은 이천 년 전 무림의 불세출인(不世出人)이었다. 그는 달마조사(達摩祖師)
나 장삼봉(張三峯)보다도 무공이 한 수 위였다."
제갈월풍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염천월은 미소를 띄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
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굳이 비교를 하려든다면 그의 무공과 나의 무공은 각기 틀린 장단점이 있다."
"어떻게요?"
"장법(掌法)이나 신공(神功)으로 치면 복마진군이 노부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요?"
염천월은 눈빛을 번뜩였다.
"반면 검법(劍法)이나 경공(輕功) 방면은 이 할아버지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지."
"야아! 그럼 할아버지의 무공은 굉장한 것이었군요?"
제갈월풍의 환호에 염천월은 짐짓 호통을 쳤다.
"이 녀석! 넌 이제껏 이 할애비가 쑥맥인 줄 알았더냐?"
"하하하......!"
소년의 밝은 웃음 소리가 염천월의 얼굴에 미소를 띄우게 했다. 곁에 있던 구일비도
이 광경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염천월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복마진군은 무척 고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입가에 불현듯 한 줄기 고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노부가 무척 공감하는 부분이다. 평생 적수(敵手)가 없었지만 친구도 역시 없
었으니까."
염천월은 이어 염려가 깃든 시선으로 제갈월풍을 응시했다.
"그런데 네가 두 명의 외로운 인물의 무공을 모두 이어받게 되었으니....... 더욱더
외로운 인물이 될까 걱정이구나."
제갈월풍은 숙연해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아직 어린 소년인 그로서는
향후 자신이 놓이게 될 운명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는 염천월의 지극한 정(情)이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제갈월풍의 커다란 눈동자가 출렁이고 있었다. 염천월의 담담한 음성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풍아야, 내일부터는 네게 본격적으로 무공을 연마시키겠다."
"아!"
제갈월풍의 심장이 격하게 뛰놀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기다리던 말인가?
"원래는 네가 열다섯 살이 될 때부터 가르치려 했지만 만년혈삼을 복용해 내공이 이미
백 년(白年)이 넘은 이상 더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다."
제갈월풍은 만년혈삼의 줄기와 꽃이 생각나 말했다.
"만년혈삼은 먹었지만 이것을 가져 왔어요."
그가 소중히 간직해 가지고 온 혈삼의 줄기와 꽃을 꺼내 내밀자 염천월의 얼굴에는 희
열이 떠올랐다.
"오! 이건......."
염천월의 노안은 금세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그는 급히 만년혈삼의 줄기와 아홉 송이
의 아직도 채 시들지 않은 꽃송이를 움켜쥐며 말했다.
"이것은 천고(千古)의 신물(神物)이다. 비록 뿌리보다는 못하지만 역시 무궁한 효험이
있다."
"그럼 다행이네요. 풍아는 그런 줄 몰랐어요."
"이것이라면 지금껏 내가 만들고자 고심했던 신단(神丹)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다."
제갈월풍은 궁금하여 물었다.
"신단(神丹)이라니요?"
염천월의 음성이 흥분을 띄었다.
"그 신단은 무림사상 최고의 영약(靈藥)이 될 것이다."
제갈월풍과 구일비는 염천월을 바라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 신단의 이름을 구천신단(九天神丹)이라 짓겠다."
그는 기이한 눈으로 제갈월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천신단은 네가 앞으로 강호에 나갔을 때 커다란 이용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할아버지......."
염천월의 얼굴에는 인자한 미소가 흘렀다.
"이제부터 낮에는 이 할아버지의 무공을 익히고 밤에는 복마진군의 무학을 익히도록
해라."
표정과는 달리 그의 두 눈에서는 번쩍 신광이 일었다.
"어쩌면 너는....... 노부도 이루지 못한 정사(正邪) 양대 신공의 합일을 이룰 수 있
을지도 모르겠구나."
"......!"
제갈월풍은 그 말에 영롱한 눈빛을 반짝였다.
"자! 풍아야,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
염천월을 선두로 일행은 영기석부 안으로 들어갔다.
염천월과 제갈월풍은 석실의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제갈월풍은 진지한 태도로 경청했다.
"너는 앞으로 무림 역사상 그 누구보다 강한 무제(武帝), 즉 절대종사(絶代宗師)가 될
것이다."
"절대종사!"
제갈월풍은 나직하게 되뇌어 보고는 입술을 한 일 자로 꽉 다물었다. 가슴에서 일어나
는 거센 격랑을 제어하기 힘든 때문이었다.
염천월의 엄숙한 음성이 다시 이어졌다.
"그러나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또한 함부로 살생(殺生)을 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필시 이 할아버지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명심하겠어요."
"무릇 무력(武力)으로 사람을 굴복시키는 일은 쉬우나 참된 마음까지는 얻을 수 없는
법이다. 너는 훗날 반드시 인품과 덕망으로써 악인을 교화시켜야 한다. 알겠느냐?"
말을 하는 염천월의 표정에는 장엄한 빛마저 어리고 있었다. 자신의 뼈저린 과거에서
유추된 결론이기에 더욱 그런지도 몰랐다. 비록 피바다를 헤치며 천하를 군림해 왔으
나 그것은 지금에 와서 회한으로 맺혀졌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 제갈월풍이 자신의 전철을 되밟게 하지 않으려 한 마디 한 마디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절대종사(絶代宗師)는 신과도 같다. 무림의 그 누구도 절대종사란 이름이 붙은 자는
없다. 복마진군도 그렇고,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너는 될 수 있다."
"할아버지!"
제갈월풍의 얼굴에는 그 순간 형언키 어려운 웅지(雄志)가 서렸다. 달을 사랑하며 외
롭게 살았던 불운한 소년, 그가 염천월의 깊은 안배와 사랑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것
이다.
염천월은 자애로운 손길로 그를 쓰다듬었다.
"너는 무림(武林)의 영원한 별이 되어야 하느니....... 반드시 무림사에 길이 남을 절
대종사가 되거라."
'절대종사.......'
제갈월풍은 두 눈에 한성과도 같은 총광을 담으며 내심 부르짖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는 기필코.......'
제갈월풍은 본격적인 무공수련에 들어갔다.
천풍신록(天風神錄)은 구백 년 전 정도 제일의 인물인 천풍자(天風子)가 남긴 그 비급
이었다. 그곳에는 크게 다섯 가지의 무공이 실려 있었다.
구환신공(九環神功), 현천무극장법(玄天無極掌法), 현천무극지(玄天無極指), 현천유성
보(玄天流星步), 어기충소(禦氣沖宵)가 그것이었다.
이 무공들은 하나같이 엄청난 위력을 담은 현문(玄門)의 최절정 기학(奇學)들이었다.
제갈월풍은 그 중 구환신공(九環神功)을 이미 오 년 전부터 익혀 기초가 든든한 상태
였다.
현천무극장법(玄天無極掌法).
이는 모두 팔식(八式)으로 되어 있었는데 각 일식마다 모두 여덟 가지의 변화(變化)가
포함되어 도합 육십사식(六十四式)의 장초(掌招)나 다름이 없었다.
이 장법은 정종(正宗)의 무공으로써 변화보다는 무변(無變)에 그 이치를 두고 있었다.
동(動)보다는 정(靜)의 장법이라고 해야 옳았다.
그러나 일단 전개되면 그 뻗어나오는 힘이 가공할 정도로 강맹했다. 더구나 완전한 양
강(陽剛)의 역류(力流)로써 웬만한 고수는 스치기만 해도 오장육부가 박살이 나 버린다.
현천무극지(玄天無極指).
이것은 불가(佛家)의 탄지신통(彈指神通)과 흡사했으나 그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절정
에 이르면 단숨에 삼백육십지(三百六十指)를 날릴 수가 있었다.
현천유성보(玄天流星步).
이 보법은 실로 신기막측한 보법이었다. 제갈월풍이 장미신타 구일비에게 배운 마환보
(魔幻步)가 환상적이라면 이 보법은 쾌(快)를 위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개되면 상대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일제히
공력을 받는 형국이 된다. 따라서 현천유성보는 적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적을 혼란
에 빠뜨려 여러 명을 한꺼번에 상대할 수도 있었다.
어기충소(禦氣沖宵).
이것은 수 년 전 혈해마존 염천월이 제갈월풍을 안은 채로 시전한 적이 있었다.
일단 경지에 오르면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는가 하면 절벽과 봉우리쯤은 단숨에 솟
구쳐 올라갈 수 있었다. 실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신비한 경공이라 할 수 있었다.
천풍신록에 적혀있는 무공은 하나같이 절세무공들뿐이었다. 만일 그 중 십분지 이, 삼
만 터득해도 능히 강호를 주름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므로 제갈월풍은 하루하루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무학을 성취시켜
나갔다. 이는 그의 타고난 재질도 재질이려니와, 만년혈삼으로 인한 백 년 내공이 뒷
받침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제갈월풍은 낮에는 천풍신록을 익히는 동시에 밤이 되면 금정단서(金頂丹書)의
무학을 익혔다.
그는 금정단서에서 내공의 기반을 이루는 현문태을신공(玄門太乙神功)을 연마했다. 덕
분에 제갈월풍의 무공은 알게 모르게 놀라울 정도로 증진되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마침내 해가 기울고 달이 지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는 무공광(武功狂)이
라도 된 듯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무공에만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제갈월풍은 영기석부의 한 빙암(氷岩)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구환신공의
운공을 끝낸 뒤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모습은 지난 일 년 동안 무척 많이 변모해 있었다. 비록 십사 세밖에 되지 않았
지만 벌써 기골이 청년과 같이 자라 있었으며, 눈빛은 흐르는 별과도 같았다.
그의 모습은 누구나 한 번 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을만치 강렬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섰다. 그때 맞은 편에서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
를 짓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염천월이었다. 그는 얼마 전 제갈월풍의 머리 위에 여덟 개의 환(環)
이 영출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음, 저 녀석의 무공진도는 도대체 측정할 수조차 없이 빠르구나.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결과다.'
염천월은 문득 탄식을 금치 못했다.
'과거 노부조차도 구환신공의 팔 단계에 이르기까지 근 십 년(十年)이나 걸렸다. 그런
데 풍아는 불과 육 년만에.......'
제갈월풍은 우뚝 선 채 곧 두 다리를 고무래 정자(丁字)로 벌리더니 장법(掌法)을 펼
쳐 보였다.
우--- 웅---!
그의 손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마치 꽃송이가 날리듯 얼음가루가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
갔다. 동시에 희뿌연 강기( 氣)가 장력을 따라 사오 장(四五丈) 길이로 뻗쳐 나갔다.
그것은 바로 현천무극장법이었다. 염천월은 내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천무극장법을 벌써 저토록 익숙하게 펼쳐낼 줄이야!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구나!'
한편 제갈월풍은 시전을 마친 뒤 경쾌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어때요?"
그의 얼굴은 약간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더욱 보기가 좋았다. 염천월은 사랑스러운 느
낌이 들어 빙그레 웃었다.
"훌륭하다.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그러자 제갈월풍이 눈을 반짝이며 졸랐다.
"그럼 이제 다른 무공을 가르쳐 주세요."
그 말에 염천월은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 이 녀석, 무공이란 무작정 배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제대로 소화를
해내야지, 하나를 배워도 완전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전 싫어요. 할아버지, 빨리 다른 것을 가르쳐 주세요."
그는 떼를 쓰듯이 염천월에게 매달렸다. 그는 염천월의 앞에서는 늘 응석을 부리는 손
자일 따름이었다.
염천월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 그래, 알았다. 이 녀석아."
이때였다. 문득 옷자락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한 가닥 인영이 빙봉 위로 솟구쳐 올라
왔다.
"아! 구노인이 왔나 봐요."
제갈월풍이 반색을 하며 외쳤다.
과연 나타난 자는 장미신타 구일비였다. 구일비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인가로 내려갔
다 오는 길이었다.
염천월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빙긋 웃더니 양손에 커다란 자루를 두 개 들고 막 지면
에 착지하는 구일비를 불렀다.
"구노인, 그 물건을 석동에 두고 오게."
"왜 그러십니까? 주인님."
"허허....... 다녀오면 그 이유를 말하겠네."
구일비는 두말없이 다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빙봉 위에 나타났다.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분부가 계신지?"
"구노인, 지금부터 풍아와 대결을 해보게."
"넷?"
구일비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염천월의 호탕한 웃음이 뒤를 이었다.
"허허헛! 풍아, 저 녀석이 자신의 무공을 굉장히 믿고 있는 모양이네. 자네가 쓴 맛을
한 번 보여주게."
"그, 그렇지만......."
"걱정하지 말게. 저 녀석은 이제 웬만큼 기초는 익혔으니 이젠 실전(實戰) 경험을 쌓
아야 할 때네."
그 말에 장미신타는 눈을 번쩍였다.
"좋습니다."
염천월은 이번에는 제갈월풍을 돌아보았다.
"풍아야, 구노인과 대결해 보아라."
제갈월풍은 뜻밖의 상황에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음, 할아버지는 구노인과 대결을 시킴으로써 내 실력을 알아보려 하시는구나.'
문득 그는 호기가 치미는 것을 느끼며 성큼 구일비의 앞으로 나섰다.
"구노인, 풍아를 부탁합니다."
장미신타 구일비의 얼굴에도 자못 흥취가 일어났다.
"허허....... 오랫동안 무공을 쓰지 않아 몸에 녹이 슬었는데 잘못하다가 소공자의 주
먹에 맞아 늙은 뼈다귀가 부서질지도 모르겠소이다."
"구노인은 너무 겸손한 말씀을......."
제갈월풍은 다소 얼굴을 붉혔으나 곧이어 자세를 잡으며 야무지게 외쳤다.
"그럼 풍아가 먼저 공격하겠어요!"
제갈월풍은 현천무극장법의 기수식(起手式)을 취하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던 구일비
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훌륭한 자세다. 조금도 빈 틈이 없구나.'
그러나 지난 날 무림의 최절정 고수였던 그도 서서히 공격자세를 취했다. 제갈월풍은
그가 취한 자세야말로 적혈장법(赤血掌法)의 기수식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차앗!"
윙----!
제갈월풍은 기합성과 함께 어지럽게 몸을 날리며 좌우장(左右掌)을 동시에 날렸다.
휙! 휙---!
희뿌연 경기가 구일비의 전신을 물샐 틈 없이 휘감았다. 와중에서 장미신타의 카랑카
랑한 외침성이 울려 나왔다.
"조심하시오! 소공자."
구일비의 신형이 흔들! 하는가 싶더니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환영만이 어른거리는 가운데 시뻘건 장영(掌影)이 제갈월풍을 몰아쳤다.
퍼펑---!
"앗!"
제갈월풍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초가 지나자 그는 그만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말았다. 그것은 실력이 모자라기보다는 대적경험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었다.
구일비는 여유만만하게 제갈월풍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약 팔성(八成) 정도의
내공만을 발휘할 따름이었다.
퍼펑---! 휙! 휙---!
그러나 초수를 거듭할수록 제갈월풍의 초식은 점차 노련해져 갔다. 그의 신형이 안정
을 되찾자 흰빛 기류가 붉은 장영을 뚫고 눈부시게 뻗쳐 나갔다.
이윽고 약 이십여 초에 이르렀을 때 전세는 막상막하의 국면을 치닫게 되었다. 구일비
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어! 불과 일 년 사이에 이토록 증진을 보았다니.'
불현듯 그의 가슴에 잊었던 호기가 치솟은 것은 그때였다. 그는 공력을 구성(九成)으
로 끌어올려 다시 제갈월풍을 밀어 부쳤다.
펑---! 위잉---!
"앗!"
제갈월풍은 타격을 받은 듯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그의 손발이 일시적으로 어지러
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는 금세 침착하게 현천무극장법을 전개하여 상대해
나갔다.
'정말 놀랍구나!'
구일비는 이번에는 십성(十成)으로 공력을 끌어올렸다.
콰쾅! 화르릉----!
엄청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회오리쳤다. 적혈십이장의 진실한 위력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제갈월풍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는 전신이 화로에 빠진 듯 뜨거움을 느
끼며 분전했다.
다시 십여 초가 경과하자 그는 조금씩 싸움에 익숙해져 갔다. 어지럽던 손발이 유연하
게 되고 구일비의 공격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구일비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제갈월풍이 자신의 십초도 받아내
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이럴 수가! 나의 십성 공력을 감당하다니.'
마침내 그는 공력을 십이성(十二成)으로 끌어 올렸다. 기왕 시작한 것 제갈월풍을 위
해서라도 진짜 무서운 무공을 겪어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적혈십이장이 펼쳐졌다. 번쩍! 하는 순간 화광(火光)이 온통 주위를 뒤덮으며 가공할
기세로 제갈월풍을 덮쳐갔다.
제갈월풍은 전신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그도 전력으로 현천무극장을 전개해 맞섰다.
그야말로 불꽃 튀는 대접전이 벌어졌다. 백광(白光)과 적광(赤光)이 천도봉 정상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백룡(白龍)과 화룡(火龍)이 서로 교전하는 모습과도
같았다.
제갈월풍은 처음에는 밀렸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맞수를 이루어 나갔다. 물론 그가 사
전에 구일비로부터 적혈십이장을 전수받지 않았다면 이 정도까지 버틸 수는 없었을 것
이다.
장미신타 구일비라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무림을 휩쓸던 공포의 대마두가 아니던가?
그러나 다시 말하면 구일비와 막상막하를 이루는 제갈월풍이야말로 더욱 경이롭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관전하던 염천월이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만 해라!"
파팍---!
두 사람은 각기 가벼운 일장을 교환한 뒤 떨어졌다. 제갈월풍은 사뭇 얼굴이 붉게 달
아올라 있었다.
염천월은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이 녀석아, 네가 감히 구노인을 이길려고 했더냐?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다. 구노인이 진정한 살수(殺手)를 펼쳤다면 너는 패해도 벌써 패했을 것이다.
제갈월풍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 그는 난생 처음으로 격렬한 실전을 치뤄 아직도 가슴이 크게
뛰고 있는 중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보기에 벌써 너는 무려 열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
겼다. "
제갈월풍은 얼굴을 붉힌 채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것을 보고 염천월은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그러나 네가 불과 일 년만에 이런 성취에 오른 것은 정
말 대단한 일이다. 내, 내일부터는 혈천무보(血天武譜)의 무공을
전수해 주겠다. "
"아! "
제갈월풍은 감격하여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득 그의 눈에서는 바위라도 뚫을 듯한 정광이 내뻗치고 있었다.
< 第 6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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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7 章. 월영검법(月影劍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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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월풍은 혈천무보(血天武譜) 상의 패도적인 무공을 배우게 되
었다.
그것은 한결같이 사도(邪道)의 극악한 마공(魔功)들로 과거 칠백
년 전 천하를 피로 물들이던 혈천마제(血天魔帝)가 남긴 것이었다.
그 위력은 하나같이 잔혹하기 짝이 없었으며, 방어보다는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천풍신록의 무공과는 완전히 상반(相反)된다고 할 수 있
었다.
잔살혈영공(殘殺血影功).
혈천무보에 실린 이 무공을 전개하면 얼굴에 핏빛 거미줄같은 혈
선(血線)이 생겨 보기에도 끔찍한 혈마(血魔)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손바닥까지도 혈선이 가득 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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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 공력에 맞으면 상대방은 한 줌의 혈수(血水)로 변하게 되고 만다. 그야말로
끔찍한 마공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밖에도 무서운 무공들이 숱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마공사공(魔功邪功)의 집대성(集
大成)이라고나 할까?
혈륜구장(血輪九掌).
이는 장력을 전개할 경우 핏빛 월광(月光)이 허공을 온통 혈륜(血輪)처럼 메우게 된다.
신속하고도 위력이 엄청나 일단 전개되면 방원 십 장 이내의 생명체는 비명지를 겨
를도 없이 모두 소멸되고 마는 것이었다.
특히 장력에 격중된 사람은 혈장인(血掌印)이 찍히게 되며 전신이 시뻘겋게 변해 버린
다. 그리하여 일명 마혈인(魔血印)이라고도 불리웠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혈천무보의 맨 뒷부분은 찢겨져 나가고 없었다. 제갈월풍은 의혹을
금치 못했으나 염천월이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이 없으므로 그 또한 묻지 않았다.
어느덧 이 년(二年)이라는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제갈월풍은 오로지 무학에만 몰두해 있었다. 하루하루가 항시 새로운 날이었으
며 고통과 단련의 날이기도 했다.
피땀을 흘리며 무공연마에 사력을 다하는 제갈월풍의 모습에서는 어언 절대고수(絶代
高手)의 면모가 엿보이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밤에도 쉬지 않고 금정단서(金頂丹書)의 무공을 익혔다.
특히 현문태을신공(玄門太乙神功)은 오랫동안 익힌 덕분에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현문태을신공.
이는 구환신공에 버금가는 현문도가(玄門道家)의 무공으로 위력으로 말하자면 구환신
공보다 오히려 한 단계 위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신공은 천지간(天地間)의 모든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으며 기이무쌍(奇異無雙) 하기
로도 천하에서 으뜸이었다.
또한 금정단서에는 장법(掌法)도 수록되어 있었다.
섬전풍뢰삼장(閃電風電三掌).
이것은 건양(乾陽)에 그 이치를 둔 것으로 마치 벽력과도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극쾌(極快)에 달하면 장력은 섬전(閃電)으로 화하고 극강(極强)에 달하면 낙뢰(落雷)
를 능가하는 위력이 있었다.
그외에도 금정단서에는 수십 가지의 무공와 무학원리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었다. 마치
무경총요(武經總要)와도 같은 무학의 보전(寶典)이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정단서의 끝부분에는 금강부동신공(金剛不動神功)의 구결이 적혀 있었다.
금강부동신공.
이는 도가 최상의 신공으로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어 금강불괴의 선인지로(仙人之路)를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도가인들이 꿈에라도 도달하려는 무상신공(無常神功)이었다.
구결의 심오막측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때문에 익히기 위해서는 혹독한
고련이 요구되었으나 완성을 보았을 경우에는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 될 수 있
었다.
창칼은 물론 수화독(水火毒)이 불침인 현문도가 최상의 개세신공이었던 것이다.
비록 제갈월풍이 아무리 천하기재라 해도 이 신공만은 깨우치기가 힘들었다. 그리하여
꾸준히 연마했음에도 그의 수위는 고작 이성(二成) 정도에 이르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단 이성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가 얻은 것은 대단했다. 그는 초인적인 정력(定
力)을 얻어 어떤 상황하에서도 절대 동요하지 않는 정심입신(靜心立神)의 경지에 도달
한 것이었다.
이런 경지라면 섭심미혼대법(攝心迷魂大法)과 같은 사술(邪術) 따위에는 절대 걸려들
염려가 없었다.
금강부동신공에서는 세 가지의 강기( 氣)가 파생되었다.
백강(白 ), 묵강(墨 ), 혈강(血 ) 등의 삼절강(三絶崗)이 그것이었다.
제갈월풍은 삼절강 역시 기초만을 익혔을 따름이었다. 금강부동신공을 익혀야만 삼절
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백강(白 ).
이것은 일단 운공하면 전신이 백광(白光)에 싸이게 된다. 상대가 감히 눈을 뜨지도 못
할 정도로 눈부신 백색광채에 덮히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부신 흰빛만 발산된다. 백강이 발출되면 능
히 수십 장 밖 사람의 생명(生命)을 주머니 속 물건 취하듯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묵강(墨 ).
이것은 운공 시 전신에 새까만 윤기가 흐르게 된다. 반면 신형은 극히 둔하게 변하는
데 대신 몸의 무게가 수만 근이 되어 그 어떤 물체라도 일거수 일투족에 가루로 만들
고 파괴해 버릴 수 있는 지극히 패도적이고 가공할 무공이었다.
혈강(血 ).
이를 전개하면 전신이 핏빛 안개에 덮혀 버린다. 혈인(血人)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손을 내뻗을 때마다 혈무(血霧)가 뻗어나가 상대를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원래 금강부동신공은 불가(佛家)의 선공(禪功)과 같은 것으로 방어가 그 위주였다. 그
러나 금강부동신공을 기초로 연마하는 삼절강은 잔혹한 공격이 목적인 바, 사기(邪氣)
마저 물씬 풍겼다.
당시 천하제일인이었던 복마진군이 무슨 생각에서 삼절강을 남겼는지는 모르지만 제갈
월풍은 그 끔찍한 위력에 때로 전신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공에 관한 제갈월풍의 흥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본시 온후한 성품의 그였으나
그는 금강부동신공을 전심전력으로 연마했다.
석실(石室)에 제갈월풍과 염천월이 서로 마주앉아 있었다.
제갈월풍의 나이 이제 십육 세.
늠름한 청년(靑年)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은 준수하기 이를데 없었다. 백옥빛 피부를
바탕으로 우뚝 솟은 콧날과 검끝처럼 수려하고 날카롭게 뻗은 눈썹이 준수한 그의 기
상(氣像)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시선을 끄는 부분은 그의 두 눈이었다.
신비로울 정도로 기이한 광채를 뿜어내는 그 눈은 이전보다 더욱 깊고 맑아져 흡사 고
요한 심연(深淵)을 연상케 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일게
한다고나 할까?
또한 그의 전신에서 흐르는 탈속(脫俗)한 기품은 인세의 속기(俗氣)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했다.
염천월은 지그시 제갈월풍을 응시하며 물었다.
"풍아야, 너는 왜 혈천무보의 뒷장이 찢어졌는지 아느냐?"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모릅니다."
염천월은 낮게 탄식했다.
"내가 혈천무보를 얻었을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제갈월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천월은 담담히 설명했다.
"이 할아버지는 처음에 그곳에 실려있는 검법을 연마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검
법에 커다란 단점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염천월은 눈썹을 모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 검법은 비록 거의 완벽했으나 수십 년을 연구한 끝에 나는 백일곱 군데의 단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일곱 군데나요?"
제갈월풍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찌 그토록 많은 단점이 있을 수 있단 말
인가?
"그렇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염천월의 입가에 기이한 웃음이 피어 올랐다.
"나는 그 단점들을 오랜 세월에 걸쳐 모두 보강했다. 그로인해 그 검법은 비로소 완전
무결해졌다."
"아!"
"나는 애초부터 검(劍)을 좋아했기 때문에 평생 검 이외의 다른 무공은 사용해본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무림인들은 내가 천풍신록이나 혈천무보의 무공을 익힌 것조차 알지
못한다."
염천월은 잠시 이상한 표정으로 제갈월풍을 바라보더니 이내 탄식하듯 말했다.
"원래 나는 너에게 그 검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 했다."
제갈월풍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그 검법이 너무도 악독하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너의 착한 심성(心性)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염천월은 문득 안광을 번뜩이더니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그 생각을 바꾸었다. 아무리 사악한 검법일지언정 그것을 옳은
일에 사용한다면 곧 정(正)의 검법이 되기 때문이다."
"......!"
제갈월풍은 염천월의 말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세상의 진리란 반드시 하
나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가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자 염천월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네게 그 검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제부터 너는 모든 무공을 중단하고 오직
그 검법을 익혀야 한다."
"네! 할아버지."
제갈월풍의 준수한 얼굴에는 흥분과 기대감이 떠올랐다.
단애(斷涯) 위.
염천월은 제갈월풍과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는 주위를 살펴보며 엄숙히 입을 열었다.
"풍아야, 오늘부터 이곳에서 수련하도록 하자."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백색의 검을 넘겨 주었다.
"이 검은 앞으로 네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검을 놓지 말아라. 검이란 것은 손에 익을
수록 좋기 때문이다."
제갈월풍은 공손히 두 손으로 검을 받았다. 그것은 복마진군에게서 얻은 월영검(月影
劍)이었다.
월영검을 움켜쥐자 그의 가슴 속에서는 호기와 웅심이 치솟았다.
염천월은 정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너는 검을 뽑는 연습부터 해라. 명심할 것은 발검(拔劍)이야말로 검법 중에
서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검을 뽑는 일이 어렵다고?'
제갈월풍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염천월은 엄숙하게 말했다.
"즉 네가 검을 뽑으려고 작정했을 때 네 검은 이미 뽑혀져서 초식을 전개하고 있어야
한다."
"......?"
제갈월풍은 흠칫했다. 얼핏 염천월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것은 심검합일(心劍合一)이 이루어지면 가능해진다."
제갈월풍은 나직히 뇌까려 보았다.
"심검합일......."
그 날부터 제갈월풍은 검법의 수련에 들어갔다.
그는 염천월의 명대로 오직 발검(拔劍)만을 연습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수
천 번, 수만 번도 넘게 검을 뽑는 연습만 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의 손에는 온통 물집이 잡혔으며, 전력을 기울여 발검 연습을
하느라 신열이 나 입술이 죄다 갈라터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자나깨나 한 시도 월영검을 손에서 놓지 않
았다. 마음이 곧 검이요, 검이 곧 마음에 이르는 경지를 깨닫기 위해 그는 검에 자신
의 혼(魂)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는 월영검과 함께 살았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한 달, 두 달...... 석 달이 흘렀다.
'나는 월영검이요. 월영검이 곧 나다.'
다시 백 일(百日)이 지났다. 제갈월풍이 검을 잡은 지 이 백일이 흐른 셈이었다.
제갈월풍은 월영검을 검집째 든 채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발검!'
그의 마음이 홀연히 움직였다. 언뜻 보기에는 검집에 손을 얹었을 뿐, 검은 뽑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번쩍! 하고 한 줄기 검광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쩌어어억----!
문득 맞은 편 오 장 밖에 서 있는 한 그루 빙목이 두 동강이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월영검은 언제 뽑혔는지 육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을 뿐더러 아예 뽑히지도 않은
듯 검집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
제갈월풍의 물처럼 고요한 눈이 자신의 검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
를 띄운 채.......
"허허허! 성공이다! 풍아야. 축하한다."
문득 자애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염천월이 나타났다.
"아! 할아버지."
염천월은 몹시 만족한 얼굴로 다가왔다.
"내 예상으로는 일 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다. 그런데 불과 이백 일만에 성취해 내다
니, 네 열성과 노력이 기간을 단축했구나."
"모두가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허허허....... 아니다. 네 자질이 뛰어났던 탓이지."
염천월은 슬쩍 고개를 들어 중천에 걸린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제 두 번째 단계를 익혀야겠구나. 오늘부터는 검을 든 채 태양을 직시해라. 눈부신
태양빛과 대적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이 단계에 올라설 수가 있다."
"넷?"
제갈월풍은 놀랐다. 인간의 눈은 태양을 마주 볼 수 없는 법이다. 만일 억지로 태양을
직시하면 자칫 눈이 멀 수도 있었다. 그런데 태양을 마주 보아야 한다니?
"그것은 안광만으로도 적의 마음을 제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양빛을 두려워
않는데 어찌 사람의 안광 따위가 겁이 나겠느냐?"
"아!"
제갈월풍은 탄성을 발했다.
그야말로 초극(超克)의 경지, 무학이 이를 수 있는 지고의 경지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제갈월풍은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도 역시 인간이었다. 처음에 그는 태양을 직시하자마자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했다. 하루, 이틀...... 부단한 시간과의 싸움만이 가냘픈 희망일 뿐이었다.
차츰 그의 눈이 태양을 마주본 채 견디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리고 백 일(百日)이라는
시일이 흘렀을 때야 마침내 태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이번 성취 역시 염천월의 예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염천월은 만면에 흐뭇한 미소
를 지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진짜 검법을 가르쳐 주겠다."
그 말에 제갈월풍의 가슴이 크게 진동했다.
"그 검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염천월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이름이 없다. 혈천무보에 혈천도법(血天刀法)으로 수록되어 있던 것을 내가 검
법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어디 네가 한 번 이름을 붙여봐라."
"음......."
제갈월풍은 잠시 침음하더니 수중의 검을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월영검법(月影劍法)....... 어때요?"
"월영검법? 달 그림자 검법이라는 뜻이냐? 허허....... 괜찮군. 그럼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염천월의 말에 제갈월풍은 다시 물었다.
"초식의 이름도 없나요?"
"없다."
"그럼 모두 월(月)자를 집어넣는 것이 어떨까요?"
염천월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건 네가 알아서 하렴."
"그럼 풍아가 초식 이름을 붙이겠어요."
이들의 대화, 그것은 오로지 태어나서 달만을 사랑하던 두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내
면의 대화였다. 그러니 범인(凡人)이 어찌 그 의미를 알 수 있겠는가.
아무튼 제갈월풍은 무림사상 최고의 검법인 월영검법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살같은 세월은 또다시 이 년(二年)이 흘러갔다.
석실(石室).
돌탁자 위에는 월영검(月影劍)이 놓여 있었다.
제갈월풍은 두 손을 무릎에 놓은 채 공손한 자세로 무릎꿇고 있었다. 염천월은 자애스
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풍아야, 네가 이곳에 온 지 몇 년이 되었느냐?"
제갈월풍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약 십일 년 정도 되었습니다."
염천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십일 년.......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너도 벌써 십팔 세가 되었구나."
제갈월풍의 준수한 눈썹 끝이 일순 파르르 떨렸다.
'그렇군. 내 나이 벌써 열 여덟.......'
염천월은 월영검을 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월영검법을 모두 터득했다. "
제갈월풍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지 않다. 너는 모두 훌륭하게 익혔다. 이제는 이 할아버지에 비해도 조금
도 손색이 없다."
염천월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잠시 후 그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풍아야, 월영검법(月影劍法)의 근본은 무엇이냐?"
제갈월풍은 의아했다.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그러나 그는 곧 얼굴을 가다듬더니 엄숙한 음성으로 답했다.
"정(靜)입니다."
"그것이 변하면?"
"섬(閃)입니다."
"섬의 다음은 무엇이냐?"
"류(流)입니다."
"그 다음은?"
"살(殺)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점차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염천월은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물었다.
"살(殺)의 최고경지란 무엇이냐?"
"천(天), 지(地), 인(人), 심(心), 검(劍) 등의 오체합일(五體合一)입니다."
염천월의 눈이 예리한 광망을 뿜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합니다."
염천월은 표정을 풀더니 낮게 탄식했다.
"그렇다. 월영검법은 천하무적이다. 이 할아버지가 백 년을 떠돌아 다녔지만 아직 월
영검법을 오 초 이상 전개한 적이 없었다. 상대가 모두 그 안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
았기 때문이다."
제갈월풍이 침묵하고 있자 염천월은 빙그레 웃었다.
"너는 무공수련을 끝냈다. 너의 무공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너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고 할 수 있다."
제갈월풍은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숙일 뿐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천월
이 문득 걱정이 깃든 음성으로 물었다.
"풍아야, 너는 요즘 무공수련이 끝나는 시각이면 금아를 타고 대체 어딜 가느냐?"
"그, 그것은......."
제갈월풍은 당황하여 말 끝을 흐렸다.
"속세가 그리우냐?"
"저는......."
제갈월풍이 대답하지 못하자 염천월은 부드럽게 덧붙였다.
"널 탓할 생각은 없다. 한창 패기가 넘칠 나이에 이런 산중(山中)에서 세월을 보내자
니 지겹기도 하겠지."
제갈월풍은 급히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할아버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염천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녀석, 변명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 보면 안다."
제갈월풍은 움찔하더니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이번 겨울이 지나고 나면 세상에 내려가는 것을 허락
하겠다."
제갈월풍의 얼굴이 일순 환하게 밝아졌다. 딱히 감정을 드러내려고 한 것은 아니나 아
무래도 기쁨을 감출 수는 없었다.
'풍아.......'
그러한 제갈월풍의 모습에 염천월은 웬지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리는 듯 허전함을
금치 못했다. 쓸쓸한 바람만이 그의 마음을 마구 휘젓고 있었다.
잠시 후 제갈월풍은 방을 나갔다.
염천월은 혼자 남게 되자 더욱 고독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석벽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풍아가 떠나면....... 이 영기석부에는 다시 찬 바람이 불겠군.'
염천월의 백미가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마음같아서는 풍아를 절대로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다. 이 늙은이의 헛된 욕심일까?'
어느덧 그의 얼굴은 처량하게 변했다.
'풍아는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놈이거늘.......'
염천월은 허탈한 미소를 뿌리고 있었다.
'그래, 잡지 말자. 풍아를 위해서라면 결코 잡아서는 안 된다. 그 아이는 이제 나만의
손자가 아니라 무림을 위해 일해야할 젊은 영웅이 아닌가?'
이때였다.
"윽! 콜록! 콜록! 콜록......."
갑자기 염천월은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입술 사이로 피가 비
치고 있었다.
염천월의 안색이 순식간에 핼쓱하게 질려버렸다.
'이건.......'
그는 멍한 시선으로 옷자락에 묻은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금세 수십 년
쯤 더 늙어 보였다.
'요즘 들어 체력이 점점 약해져가는 것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
염천월의 얼굴에는 짙은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잠시 그는 석상인 양 꼼짝도 않고 굳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한쪽 벽으로 다가간 그는 벽의
한 곳을 꾹 눌렀다. 벽의 한 귀퉁이가 열리며 자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속에는
낡은 두루마리가 한 개가 보관되어 있었다.
염천월은 두루마리를 들어 활짝 펼쳤다. 그것은 뜻밖에도 한 명의 절세미녀(絶世美女)
의 초상화였다.
월궁(月宮)의 항아가 무색할 정도의 미녀도(美女圖).
그림을 바라보는 염천월의 얼굴이 점차 환상과 애환으로 뒤덮였다. 그는 바로 눈앞의
사람에게 하듯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사란(思蘭), 정말 오랜만이오. 아마 거의 백 년만인 것 같소."
그림 속의 미녀는 은은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깊고 그윽한 눈이 염천월을 향해 웃고
있었다.
"그대는 그동안 저승에서 어떻게 지냈소?"
천하기인인 혈해마존 염천월, 그는 도취된 듯 그림 속의 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란, 나는 무척 즐겁다오. 사랑하는 손자가 있으니 말이오. 그대도 그 아이를 보았
다면 무척 좋아했을 것이오."
그림 속의 미녀(美女)는 지난 날 염천월이 사랑했던 모용사란, 다름 아닌 바로 그녀였
다. 염천월은 그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이 세상 누구라도 친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 놈은 정녕 순
결무구한 놈이라오."
염천월은 다시 가슴을 움켜잡으며 괴로운 듯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콜...... 록......."
간신히 기침이 진정되자 그의 읊조림이 이어졌다.
"솔직히 요즘에 나는 두려웠소. 이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까 조바심이 났던 거요."
염천월의 얼굴에는 온통 쓸쓸한 빛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제 당신을 보니 이 세상을 떠나도 좋을 것 같구려. 어차피 풍아는
더이상 나의 손이 필요없을 만큼 훌륭하게 자라 주었고 성격도 온유하고 다정다감하니
절대 전도(前道)가 어둡지 않을 것이오."
염천월의 입가에 한 줄기 기이한 미소가 스쳤다.
"아마 그 아이에게는 많은 여인(女人)들이 따를 거요. 그렇게 되면...... 이 늙은이는
생각도 않겠지."
그는 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물었다.
"사란, 당신은 혹 놀라고 있지 않소? 내가 이토록 마음이 약해진 것이 이상하지는 않소?"
염천월은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나는 약해진 게 아니라오. 어차피 이것은 하나의 귀일(歸一)이오. 인간은 모
두 마지막에 이르면 똑같아지는 법이오."
그의 얼굴에 다시금 죽음의 그늘이 덮였다.
"사란, 당신을 또다시 볼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당신의 얼굴만은 영원히 잊지 않
을 것이오. 영원히......."
염천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두루말이를 말아 벽속에 집어 넣고는 문
을 닫았다.
"음! 쿨럭! 쿨럭! 쿨럭...... "
참았다가 터지자 기침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
피가 튀어 나오는 것은 물론 염천월은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
을 느껴야 했다.
"윽! "
염천월은 안색이 잿빛이 된 채 비틀거리며 돌탁자의 모서리를 움
켜쥐었다.
빠직!
그의 손에서 돌탁자의 모서리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으음....... "
염천월은 침중한 신음을 토하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는 곧바로 바닥에 앉아 운공조식을 취했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안색이 회복되어 정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염천월의 흔들리는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제 세상을 떠나야할 때가 왔다는 신
호일지도 모른다. '
죽음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단지 한 가닥 걱정이 남아 그를 침울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휘청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 第 7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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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8 章. 도둑의 조종(祖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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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신타 구일비는 물건을 구입하러 하산(下山)할 준비를 하고 있
었다.
제갈월풍은 떠날 차비를 하는 구일비를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염천월은 그런 제갈월풍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풍아야, 오늘은 너도 구노인과 같이 저자로 내려가 구경을 하고
오너라. "
"네? "
제갈월풍은 뜻밖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곧 환한 표정을 지
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
염천월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헛! 녀석, 그렇게도 좋으냐? "
제갈월풍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저, 저는 그저...... "
염천월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그리고 구노인에게 은자(銀子)가 충분히 있으니 네가 사
고 싶은 물건이 있거든 마음대로 사거라. "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
이윽고 제갈월풍은 구일비와 함께 영기석부를 나섰다.
밖으로 나와 하늘을 살피던 제갈월풍이 다소 들뜬 음성으로 제의
했다.
"구노인, 우리 금아를 타고 갑시다. "
"금아를요? "
구일비가 아연해하자 제갈월풍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 쪽이 빠르고 좋으니까요. "
제갈월풍은 즉시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곧 하늘에서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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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비는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금아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어! 저 녀석도 구천신단(九天神丹)을 두 알 먹은 이후로는 더할 수 없는 영물(靈物)
이 되었군."
구천신단(九天神丹).
이는 염천월이 평생 모아온 진귀한 수백 가지의 영초와 만년혈삼의 줄기, 아홉 송이의
꽃 등을 섞어 제련한 것으로 모두 열 개 뿐이었다.
염천월은 그 중 두 알 씩을 각기 금아와 백아(白兒)에게 먹였다. 그 이유는 훗날 제갈
월풍이 강호에서 활약할 때 두 짐승들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세심
한 배려 때문이었다.
과연 금아와 백아는 구천신단을 복용한 이후로 부쩍 더 영리해졌고 신력(神力)도 수
배나 증가해 있었다.
"구노인, 어서 타요."
제갈월풍이 먼저 금아의 넓은 등에 오르자 구일비도 망설이지 않고 올라탔다.
휘--- 익----!
금아는 눈 깜빡할 새에 까마득한 하늘 높이 치솟았다. 구일비는 그만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거 정말 대단하오이다! 이런 곳에서 만약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 늙은 몸은
남아나지도 못하겠구려."
제갈월풍은 그 말에 경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구노인, 그런 걱정은 하지 마세요. 금아의 등은 보기보다 무척 안전하니까."
그는 대견하다는 듯이 금아의 넓은 등을 두드렸다.
금아도 매우 기분이 좋은 듯 힘찬 울음소리를 발하며 날개를 저어 나갔다. 제갈월풍이
문득 호기심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다.
"참, 그런데 그 물건을 사는 곳에는 구경할 것이 많나요?"
"허허....... 공자께서는 꽤나 궁금하신 모양이구려."
"솔직히...... 그래요."
"하긴 무리도 아니외다. 허허허허......."
"하지만 할아버지께는 절대로 이런 말씀을 드리면 안돼요?"
"주인님이 아신들 야단 치시지는 않을 텐데요."
구일비의 말에 제갈월풍은 두 눈 가득 염려를 드리웠다.
"겁이 나서가 아니란 건 구노인도 아시잖아요?"
"알겠소이다. 허허허허......."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금아는 벌써 먼 거리를 날았다.
"공자, 이 근방에서 내려야 하오."
아래를 쳐다본 제갈월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아직 들판인데? 구노인께선 사람들이 금아를 보고 놀랄까봐 그럽니까?"
"허허....... 그렇소이다."
제갈월풍은 즉시 금아의 등을 탁 쳤다.
"금아야, 이만 내려가자."
금아는 곧바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이 내려선 곳은 관도(官道)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이었다.
제갈월풍은 금아의 날카로운 부리를 쓰다듬으며 당부했다.
"금아, 너무 멀리가지는 말아라. 내가 휘파람을 불면 언제라도 금방 돌아와야 한다."
금아는 알았다는 듯 부리를 그의 어깨에 몇 차례 부빈 후 다시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잠시 후 금아의 모습은 창공 저편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제갈월풍은 구일비를 돌아보며 쾌활하게 말했다.
"가요, 구노인."
두 사람은 나란히 관도로 접어 들었다. 약 반 각 가량을 가니 커다란 하나의 시진(市
鎭)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곳은 장구(藏口)라 불리우는 곳으로 서장성(西藏省) 내에서 제법 큰 시진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구일비의 뒤를 따라 인파를 헤쳐나가며 처음 보는 풍물들을 사뭇 신기한
시선으로 구경했다. 구일비가 그를 돌아다 보더니 말했다.
"공자, 노복이 물건을 살 동안 공자께서는 홀로 구경을 하시구려."
제갈월풍은 마음이 동해 선뜻 응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서 다시 만날까요?"
구일비는 미소를 띄며 말했다.
"아까 우리가 내렸던 곳에서 두 시진 후에 만나는 것이 좋겠소이다."
"좋아요."
"허허....... 공자, 그럼 구경 많이 하기 바라오이다."
"고맙습니다. 구노인."
제갈월풍은 혼자 떨어지자 거리를 쏘다니며 이것저것 다양한 구경을 했다. 그는 보이
는 모든 것이 흥미로왔다. 아무리 시시한 것들이라도 그의 눈에는 훌륭하게만 보였다.
도무지 하루 종일을 돌아다녀도 싫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상가(商街)나 번화한
객점 따위가 있는 곳을 걸으며 계속 구경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어느덧 그의 발길은 장구의 중심가에 이르렀다. 그곳은 사람이 들끓기가 어깨를 부딪
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인(行人)들은 한결같이 인파에 섞인 제갈월풍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선망의 시선을 던졌다. 그것은 제갈월풍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오! 저렇게 멋진 청년이 있다니."
사실 제갈월풍은 절세의 미공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
을 놓아주지 않았고 특히 아녀자들은 그를 보자 얼굴을 붉히며 발길을 뗄 줄 몰라했다.
거리의 한 곳에서 타는 듯한 새빨간 홍의(紅依)를 입은 소녀(小女)가 나타났다. 그녀
는 입은 옷처럼 얼굴도 발그스름했다.
홍의는 전신에 착 달라붙은 옷으로써 날씬하고 굴곡이 선연한 처녀의 육체를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에서는 음탕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녀 특
유의 발랄함만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홍의소녀는 대단한 미녀(美女)였다. 나이는 대략 십칠팔 세 정도 쯤 되어 보였다.
등 뒤에는 붉은 수실이 달린 보검을, 왼손에는 채찍을 감아쥔 채 홍의소녀는 거만하고
상큼한 시선으로 주위를 바라보며 사뿐사뿐 걷고 있었다.
그녀를 발견한 제갈월풍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구나.'
문득 그는 십일 년 전 한 객점에서 보았던 소녀가 생각났다.
'그때 소동으로 변장하고 있던 그 소녀도 무척 예뻤지. 지금쯤은 아마 굉장한 미녀가
되어 있겠지.'
갑자기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것이었다. 십사오 세 가량된 거
지소년이 밥그릇을 들고 홍의소녀에게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아가씨, 이 불쌍한 거지에게 한 푼만 적선합쇼."
홍의소녀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뜸 코를 감싸쥐며 호통쳤다.
"아휴! 냄새....... 이 거지야, 당장 저리 비키지 못하겠느냐?"
그녀는 앙칼지게 뿌리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나 지저분한 거지소년은 끈덕졌다.
그는 땟국물이 흐르는 손으로 덥썩 홍의소녀의 옷소매를 잡으며 매달렸다.
"아가씨, 한 푼만......."
"요 놈이?"
홍의소녀는 날카롭게 외치며 손바닥을 뒤집었다.
"어이쿠!"
쿵---!
거지소년은 그만 저만큼 밀려나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광경에 제갈월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외양과는 달리 마음이 곱지 못한 여인이군.'
"아이, 더러워!"
홍의소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옷소매를 툭툭 털다가 제갈월풍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한동안 못박힌 듯 제갈월풍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홍의소녀는 곧 아름다운 얼굴에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응?'
제갈월풍은 일순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저 소녀가 왜 알지도 못하는 내게 저런 웃음을 보내는 걸까?'
홍의소녀는 재차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급히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
자 쓰러져 있던 거지소년이 히쭉 웃더니 뭉기적거리며 일어섰다.
그 순간 제갈월풍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거지소년은 다시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제갈월풍은 눈여겨 그를 지켜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거지소년은 비교적 부유해 보이는 사람이 눈에 띄자 옷소매에 매달리
는 척 하더니 번개같은 솜씨로 전낭(錢囊)을 훔쳐내는 것이 아닌가?
'허! 저 녀석은 조금 전에도 바로 저런 방법으로 은자를 훔쳐냈을 것이다. 괘씸한 꼬
마 녀석이로구나.'
제갈월풍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당한 방법으로 은자를 벌지않고 못된 수를 쓰다니. 요녀석, 어디 혼 좀 나봐라.'
그는 재빨리 땅바닥에서 돌멩이를 몇 개 주워 전낭 속의 은자를 빼고는 대신 채워 넣
었다. 그리고는 한가롭게 뒷짐을 짓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나직이 시구를 중얼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부잣집 귀공자 같았다.
거지소년이 드디어 그를 발견했다. 순간적으로 소년의 눈에희색이 스쳐갔다.
'옳지! 봉황이 걸렸구나.'
마치 이런 중얼거림이 내포된 듯한 표정이었다. 제갈월풍이 이미 자신의 속내를 넘겨
짚고 있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흥! 요 놈, 봉황을 잡았다고 좋아하고 있겠지만 내 너에게는 까마귀도 되어줄 생각이
없다.'
과연 거지소년은 밥그릇을 내밀며 다가왔다.
"마음씨 좋은 공자님, 한 푼만 적선합쇼."
제갈월풍은 짐짓 차갑게 거절했다.
"내게는 은자가 없다."
거지소년은 치근덕거리며 더욱 바짝 다가들었다.
"그러지 마시고......."
그의 검은 손이 제갈월풍의 옷소매를 잡았다.
"이 녀석아, 옷 더러워진다."
제갈월풍은 호통치며 재빨리 손을 놀렸다.
"캑!"
쿵!
거지소년은 자지러질 듯한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제갈
월풍은 어이가 없었다.
'이 녀석 봐라? 그냥 슬쩍 민 것뿐인데.'
그러나 그는 벌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라 활발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거지소
년이 뒤에서 투덜대고 있었다.
"어이쿠! 정말 더러워서 이 거지노릇도 못해 먹겠네."
"칵!"
거지소년은 침을 뱉더니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졌다.
성 밖 한 채의 낡은 사당.
거지소년은 흥얼거리며 사당으로 들어갔다. 낮인데도 사당 안은 어두컴컴했다.
"사부님!"
거지소년이 부르자 부시시 몸을 일으키는 다른 거지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칠순(七旬)
가량으로 얼굴 한가운데에는 주먹만한 딸기코가 잔뜩 주독(酒毒)이 든 채 달려 있었
으며 눈은 실같이 가늘었다.
꼴이 소년보다 더 지저분하여 머리칼에서 금시라도 이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늙은 거지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더니 호통을 쳤다.
"이 녀석아, 곤히 자는 사람을 왜 깨우느냐?"
거지소년이 그에게 다가갔다.
"헤헤헤....... 사부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거지노인은 실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겼느냐?"
"헤헤! 물론이지요."
"그래, 그게 뭐냐?"
"오늘은 모두 다섯 탕을 했지요. 더구나 그 중 두 탕은 봉황이란 말입니다."
"뭣이?"
거지노인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급히 일어나 앉더니 유쾌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도 이제 제법이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더니 이 스승한테 배운 수법으
로 네가 밥값을 하는구나."
그 말에 거지소년은 불만을 터뜨렸다.
"아니, 시시하게 왜 밥값입니까? 말씀으로는 사부님의 실력을 능가한다고 하시면서......."
노인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오냐. 그래, 과연 너는 내 제자다. 어디 한 번 물건을 꺼내 봐라."
소년의 안색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그는 작은 눈을 치뜨며 매우 야무지게 말했다.
"사부님, 은자에 관해서는 사제지간에도 정확해야 합니다."
거지노인이 눈을 희번득이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거지소년은 냉정한 어투로 대꾸했다.
"이제까지는 벌어온 은자를 몽땅 사부님께 바쳤지만 오늘부터는 안 됩니다."
거지노인의 빗자루같은 눈썹이 불쑥 치켜올라갔다.
"이 녀석아, 내가 언제 네 은자를 떼먹는다고 했느냐? 너에게 받은 것은 모두 네 놈이
커서 장가갈 밑천이란 말이다."
거지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줘도 돼요. 어쨌든 오늘부터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공평하게 반반씩 분배해야 합니다."
거지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참으로 못된 녀석이로다! 좋다. 이 녀석아, 어서 전낭이나 꺼내 보아라."
거지소년은 의기양양하여 품 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곧 창백하
게 변하고 말았다.
"응? 아, 아니! 전낭이 하나밖에 없다니......."
거지소년은 손에 잡혀나오는 단 한 개의 전낭을 보며 크게 당황했다. 그는 다시 전신
을 이잡듯 샅샅이 뒤져 봤지만 역시 더이상 전낭은커녕 동전 한 닢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구!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지? 분명히 다섯 명을 털었는데 나머지 네 개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모양에 늙은 거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라. 네 놈이 사부를 몰라 보고 큰 소리를 치더니만 하늘이 노하신 게야."
거지소년은 얼굴이 시뻘개졌다.
"사부님, 하지만 이 한 개 전낭만 해도 상당한 무게가 나가니 많은 은자가 들어있을
거예요."
"어서 끌러 보아라. 쯧......."
거지소년은 급히 전낭의 끈을 풀어헤쳤다.
"맙소사!"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것은 환성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전낭 속에는 은자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가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세, 세상에! 이럴 수가?"
거지소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입장이 바뀌어 사부의 권위(?)를 되찾은 노인이
대로하여 외쳤다.
"이런 멍청한 놈! 내가 은자를 훔치랬지, 언제 돌멩이를 날라 오랬더냐? 너같은 놈은
내 제자도 아니다."
거지소년은 울상이 되어 부르짖었다.
"아이고! 내가 오늘 도둑의 조종(祖宗)을 만난 모양이구나."
그러자 거지노인이 다시 호통쳤다.
"이 녀석아! 혹시 네 물건이나 없어지지 않았나 살펴봐라."
"아!"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듯 허겁지겁 허리춤을 뒤져보던 거지소년은 혼비백산하여 외
쳤다.
"사부님! 영패(令牌)가 없어졌어요."
"뭐라구?"
거지노인은 이제 정말로 화가 난 듯 빗자루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펄쩍 뛰었다.
"이, 이 똥물에 튀겨죽일 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거지소년은 기가 질려 꼼짝도 못하다가 문득 무엇이 생각난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알겠다! 그 번지르르한 놈이 바로 날도둑이었구나."
그는 떠오르는 인물 중 제갈월풍을 짚어낸 것이었다.
"당장 가서 그 도둑놈을 잡아오겠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흥분한 거지소년은 화살처럼 사당 밖으로 내달았다. 노인은 머리
가 아픈지 이마를 탁 치며 드러누웠다.
"어이구! 내 저런 놈을 제자라고 가르쳤으니....... 한심하군, 한심해......."
그러나 그는 말과는 달리 금세 잠이 든 듯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곯고 있었다.
한편 제갈월풍은 한 객점에서 태연히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그는 내심 솟구쳐 오
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후후....... 지금쯤 그 거지녀석이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그의 입가에 슬쩍 신비한 미소가 어렸다.
'감히 내 물건을 슬쩍 하려 들다니 혼이 나도 싸지.'
이때, 그가 있는 객점의 이층 주루로 한 소녀가 들어섰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 거리
에서 보았던 홍의미소녀였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제갈월풍을 발견하고는 고혹적인 입술가에 배
시시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갈월풍은 어리둥절해지는 기분이었다.
'저 소녀는 아까부터 왜 나만 보면 저렇게 웃는 걸까?'
그는 정말로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홍의소녀의 미소에는 분명 뚜렷한 이유
가 있었다. 그녀 자신만이 아는.......
홍의소녀는 자리에 앉더니 음식을 주문했다. 그녀는 급한 일이 있는 듯 음식이 나오자
빠른 동작으로 먹기 시작했다.
예쁜 여인은 먹는 모습 역시 아름다왔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갈월풍은 문
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참, 저 소녀는 은자가 없지 않은가?'
이를 꿈에도 알 리 없는 홍의소녀는 맛있게 식사를 다 마치고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무슨 속셈인지 계산대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제갈월풍이 있는 곳으로 사뿐사
뿐 걸어왔다.
'응?'
제갈월풍이 의아하여 흘깃 쳐다보자 그녀는 고혹적인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께서는 이곳에 사시나요?"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이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소이다."
홍의소녀는 흰 치아를 드러내며 생긋 웃었다.
"제 이름은 성영하(成英荷)예요. 그럼 다음에 봐요."
제갈월풍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 멍청해져
버리고 말았다. 설마 홍의소녀가 이토록 대담무쌍하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
이다.
그 사이 그의 대꾸를 기다리지도 않고 홍의소녀, 즉 성영하는 저만큼 걸어갔다. 그녀
는 계산대 앞에 서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모두 얼마예요? 저기 앉아있는 공자님 것까지 합쳐서."
그 말을 들은 제갈월풍은 기가 막혔다.
'내 것까지 계산한다고?'
그러나 그는 폭소가 터지려는 것을 참느라 무진 애를 써야했다.
'후훗! 자신의 은자가 사라진 것도 모르면서. 곧 재미있는 사태가 벌어지겠군.'
한편 장궤는 홍의소녀를 향해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고 있었다.
"네, 네! 은자 두 냥 반인뎁쇼."
성영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인심을 쓰려했다.
"좋아요. 오늘은 이 아가씨가 기분이 몹시 좋으니 세 냥을 주겠어요. 나머지는 가지세요."
장궤의 입이 옆으로 쭉 찢어졌다.
"아이구, 고맙습니다! 낭자."
그러나 다음 순간, 품 속에 손을 집어넣던 성영하는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은자가 없다니!'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파랗게 질려버렸다. 장궤의 표정도 그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그는 풍부한 장사경험으로 인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금세 눈치챈 것이었다.
"헤헤! 음식값은 은자 두 냥 반인뎁쇼."
벌써 장궤의 눈썹은 위로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그, 그게......."
성영하는 난색을 지으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장궤는 마침내계산대에서 벌떡 일어서더
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빨리 음식값을 내시오."
공손하기 짝이 없던 그의 음성이 어느새 험악할 정도로 거칠어져 있었다.
"나, 나는......."
성영하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난생 처음 겪는 모욕인데다 분노와 수치로 인해 그
녀는 제대로 입을 열지도 못했다.
이때 그녀의 등 뒤에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 낭자의 계산은 내가 하겠소."
"으응?"
성영하는 깜짝 놀라며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타난 사람이 제갈월풍임을 알자 이내 얼
굴이 홍시가 되어 버렸다.
제갈월풍은 씨익 웃어보이며 말했다.
"낭자, 부담 갖지 마시오. 나중에 갚으면 될 게 아니오?"
성영하의 아름다운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나중에 갚으면 된다고? 보아하니 이 작자는 지금 나를 조롱하고 있구나.'
그녀는 내심 이가 갈렸으나 별다른 도리가 없자 화를 억누르며 잠잠히 있었다. 제갈월
풍은 여전히 짓궂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은자 세 냥을 꺼내 계산대에 올려 놓았다.
이때였다. 누군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달려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거지소년이었다.
거지소년은 씩씩거리며 올라오다가 제갈월풍을 발견하고는 대뜸 눈알을 부라리며 욕설
을 퍼부었다.
"이 날도둑놈아! 어서 내 은자를 내놓아라."
제갈월풍은 갑작스런 그의 출현에 움찔했으나 곧 시치미를 뚝 떼고 짐짓 점잖게 응수
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멀쩡한 사람더러 날도둑이라니."
거지소년은 이미 이성을 잃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흥! 거짓말하지 말아라. 나는 다 알고 있다. 내가 힘들여 번 것을 쓱싹하다니, 네 놈
은 나보다 한 술 더 뜨는 도둑놈이다."
"뭣이!"
성영하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번쩍 일었다. 뿐만 아니라 객점 안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그러나 거지소년은 이런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
한 듯 계속 제갈월풍을 노려보며 악을 바락바락 썼다.
"내놔라! 그렇지 않으면 내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
그는 흥분한 나머지 제갈월풍이 기묘한 손놀림으로 무엇인가를 그의 품에 넣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어느새 거지소년의 품 속에 자신이 슬쩍했던 물건
들을 몽땅 도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실상 그 수법은 너무나 빠르고 교묘해 객점 안의 다른 사람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갈월풍은 짐짓 당황한 척 말했다.
"이보게, 소형제! 차분히 얘기하세. 난 자네가 사람들한테 구걸을 하는 척 하면서 은
자를 훔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네. 그런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
게 무슨 행패인가?"
그 말에 가장 분노한 것은 누구이겠는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홍의소녀 성영하였다. 바야흐로 그녀의 쌓인 울분이 한꺼번에 터
져나올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랬었구나! 이 거지 놈, 오늘 내 손으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그녀는 다짜고짜로 거지소년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누구냐?"
거지소년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러던 그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나, 낭자는......."
짝---!
거지소년은 눈 앞에서 불똥이 튀는 것을 느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따귀를 얻어
맞은 것이다. 대번에 그의 왼쪽 뺨에는 시뻘건 손바닥 도장이 찍혀 버렸다. 어찌나 호
되게 맞았는지 그의 입술 끝이 터져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성영하의 분노가 그까짓 따귀 한 대로 풀릴 리 만무였다.
"네 놈이 감히 나 홍낭자(紅娘子)의 물건을 훔치다니!"
"호, 홍낭자!"
순간 거지소년의 안색은 마치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 핼쓱하게 변하고 말았다.
'으으!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구나! 상대가 악독하기로 소문난 홍낭자일 줄이야!'
홍낭자(紅娘子).
그녀는 벌써 수 년 전부터 무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여살성(女煞星)으로 성정이 불
같이 급한데다 오만하기 짝이 없어 누구던 간에 비위에 거슬리기만 하면 가차없이 독
랄한 살수(殺手)를 펼쳤다.
그녀는 칠십 년 전 은거한 전대(前代)의 기인(奇人) 독죽신니(毒竹神尼)의 제자로서
절정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더우기 약 일 년 전에 그녀는 검(劍)과 채찍으로 황하(潢河) 일대의 소문난 수채(水寨)
황룡방(黃龍幇)을 단신으로 해체시킨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의 손 아래 무려 사오
십 명의 고수가 죽거나 무공을 전폐당했다.
그 사건 이후로 홍낭자의 위명은 사해(四海)를 떨어 울려 아무도 감히 그녀를 건드리
려는 사람이 없었다.
거지소년은 혼백이 달아날 정도로 놀랐다. 그가 물건을 훔친 장본인이 설마 강호의 여
살성으로 이름난 홍낭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절망은 잠깐이었다. 그의 머리는 이미 비상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은연중
교활한 미소를 짓더니 오히려 따지듯 묻고 있었다.
"낭자, 대체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러십니까?"
성영하는 대로했다.
"흥! 죽고 싶어 환장을 한 놈이구나. 내 전낭을 훔쳐가고도 이제 와서 발뺌을 하겠다
는 거냐?"
거지소년은 황급히 부인했다.
"그, 그건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뭐라고?"
"정말입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한 번 뒤져 보십시오."
거지소년은 불쑥 자신의 앞가슴을 내밀었다.
성영하의 고운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아무리 여살성이라 해도 처녀는 처녀였다. 어
찌 처녀로서 그것도 더러운 거지의 품을 뒤진단 말인가?
객점 안의 손님들은 이 광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과연 어떻게 일이 전개될는지 궁
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홍낭자는 홍낭자였다.
"좋다! 어디 뒤져 보겠다. 만일 나온다면......."
그녀는 두 눈에 섬뜩한 살기를 띈 채 옥수(玉手)를 불쑥 거지소년의 품으로 집어 넣었
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손에는 여러 가지 물건이 딸려 나왔다.
그것을 본 거지소년의 안색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이... 이럴 수가!"
한편 성영하는 네 개의 전낭과 함께 나온 하나의 죽부를 보더니 눈썹을 매섭게 치켜
올렸다.
"흥! 이제야 네 놈이 누군지 알겠다. 네 놈은 바로 개방( )의 소악마로 불리는 소절
투(小絶偸) 동방아(東方兒)구나! 내 네 놈의 껍데기를 벗기고 네 스승인 대절투(大絶
偸) 그 늙은 놈을 찾아 함께 땅 속에 묻어 버리고 말겠다!"
정녕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오싹 끼치는 말들이 그녀의 작고 매력적인 입술에서 한꺼번
에 쏟아져 나왔다.
"으으......."
거지소년, 즉 소절투 동방아는 그만 사색(死色)이 된 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
나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 짧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얏!"
동시에 그는 오른발로 날쌔게 성영하의 가슴을 걷어 찼다. 그러나 성영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흥! 네 놈이 감히......."
그녀는 옥수를 들더니 가볍게 그의 발을 낚아챘다.
파팍!
동방아는 신속하게 발을 회수했다. 덕분에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냄새나고 온통 헤어
져 버린 그의 신발짝뿐이었다.
"어멋!"
성영하는 질겁을 했다. 졸도해 버릴 만큼 고약한 냄새가 그녀의 후각에 고스란히 스며
든 때문이었다.
"이, 이 더러운!"
그녀는 눈살을 와락 찌푸리며 신발을 내동댕이쳤다.
바로 그 순간 동방아는 귀신같은 신투(神偸) 솜씨로 성영하의 손에서 죽부를 뺏더니
그대로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와지끈!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창문을 박살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서라! 이 미꾸라지같은 놈!"
독이 오를 대로 오른 홍낭자 성영하는 목청이 터져라 고함치며 역시 뚫린 창으로 신형
을 날려 추격해 갔다.
객점 안의 손님들은 모두 이 광경에 폭소를 터뜨렸다.
"와하핫……!"
제갈월풍도 마찬가지로 한껏 웃어제꼈다.
"하하하하......!"
이어 그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구일비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느낀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객점을 나서며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오늘은 무척 재미있는 날이었군.'
그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계속 웃고 있었다.
천도봉(天道峯).
제갈월풍과 장미신타 구일비는 금아를 타고 창공을 날아 봉우리 정상에 도착했다. 그
런데 천도봉 정상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앗!"
금아의 등 위에서 천도봉을 내려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악성을 내지
르고 말았다.
염천월이 전신에 피투성이가 된 채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에게 협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바닥에는 선혈이 낭자했고 이십여 구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었다.
펑---!
"윽!"
놀랍게도 염천월은 계속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의 등과 허리, 다리 등은 온통 상처투
성이였으며 쉴 새 없이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쿨록! 쿨록......."
염천월은 연신 기침을 해대고 있었는데 기침을 할 때마다 시커면 핏덩이가 울컥울컥
솟아 나오고 있었다. 실로 참담한 모습이었다.
혈해마존 염천월은 천하제일인으로 불리우던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내공이 절반 이상
이나 감퇴되어 버린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은거한 노기인(老奇人)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에 반해 흑의인들의 기세는 무자비했다. 그들은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악랄한 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때문에 염천월은 계속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는 이미 생사가
경각에 달린 것으로 보였다.
정녕 일세의 대마존(大魔尊) 염천월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정사실이다. 그 광경에 장미신타 구일비는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길
게 장소를 터뜨렸다.
"우--- 아---- 아----!"
구일비는 길게 장소를 터뜨리더니 그대로 금아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근 오십 장의 높
이였다.
휘--- 리--- 릭---!
그가 내려서자마자 전세는 삽시에 뒤집어졌다.
"크--- 아--- 악---!"
장내에는 처참한 피의 살륙전이 전개되었다. 구일비가 손바닥을 한 번 휘두르자 오륙
명의 흑의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이, 이럴 수가...! 으아악!"
흑의인들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린 살성(殺星)에 대해 기겁을 했다. 그러나
구일비의 분노는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무시무시한 살수를 뻗치고 있었다. 그 바람에 흑의인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거꾸러져 가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공격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제갈월풍도 어느새 금아의 등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그는 만사를 제치고 염천월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그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왔다. 가까이 가보니 이미 염천월은 기식이 엄엄해져 있었다.
의식불명인 염천월의 코와 입에서는 쉴새 없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를 힐끗 돌아보던 구일비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에서
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백여 년 간을 잠자고 있던 대살성(大煞星)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었다.
"으아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그 한 마디가 끝이었다. 그는 손바닥에서 핏빛 혈류를 뻗어내면서 마치 지옥의 야차처
럼 흑의인들 속으로 뛰어 들었다.
"앗! 적혈공(赤血功)이다! 피해라---!"
"저 자는... 장미신타다!"
흑의인들은 그제서야 장미신타의 신분을 알아채고는 혼비백산했다. 그들은 목숨을 부
지하는 길은 달아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음인지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몇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애당초 공포의 대살성 장미신타를 만난
것부터가 죽음의 신을 불어들인 셈이었다.
꽈꽝---! 우르릉--- 꽝---!
"크아아아악-----!"
피! 피....... 삽시간에 봉우리 위는 피로 물들어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흑의인들
은 반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몰살 당하고 말았다. 그들의 시체는 형상조차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져 있었다.
"으으...... 과연 장미신타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한 명의 흑의복면인이 공포에 질린 신음을 발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장미신타 구일비는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네 놈은 누구길래 감히 이곳을 습격해 왔느냐?"
흑의인은 경황 중에도 이를 부드득 갈았다.
"장미신타! 네 놈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크크크....... 복수는 결국 이
루어지지 못한단 말인가?"
흑의인은 갑자기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어 제꼈다. 그러자 의외로 청수하게 생긴 사십
대 중년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는 네 놈은 누구냐?"
구일비의 물음에 중년인은 원독에 찬 음성으로 대꾸했다.
"흑살방주(黑殺幇主) 장죽산(張竹山)이다!"
장죽산이라면 바로 십일 년 전 염천월이 여량산에 모옥을 짓고 제갈월풍을 벗삼아 살
때 찾아왔던 자였다. 당시 염천월은 한 가닥 자비심으로 그를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을 남긴 것이다.
"장죽산인지 누군지 몰라도 네 놈이 감히 주인님을 해하다니......!"
구일비는 물론 상대를 알 리가 없었다. 다만 그의 살심은 이미 하늘 끝까지 솟구치고
있었다.
이때 장죽산이 거칠게 내뱉았다.
"훗날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다!"
동시에 그는 신형을 뒤로 날렸다. 그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의 몸은 천
도봉 아래의 절벽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이런 교활한 놈! "
구일비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발을 굴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때였다.
제갈월풍의 분노에 찬 외침이 울렸다.
"금아야! 저 놈을 죽여라! "
끄아악!
그러자 허공을 맴돌고 있던 금아가 화살처럼 절벽 아래로 내려 꽂
혔다.
그리고 잠시 후,
처절한 비명이 절벽 아래로부터 울려왔다.
"크아아아악---! "
보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절벽 아래로 추락해가던 장죽산은 금아의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 비참한 최후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 第 8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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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9 章. 월광(月光) 속에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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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주인님은......? "
장미신타 구일비가 초조한 신색으로 다가왔다.
제갈월풍은 대답 대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이미 염천월의 상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무공은 물론 학문과 의도(醫道)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한 그는
이미 염천월의 천명이 다했음을 느낀 것이다.
"할아버지...... "
제갈월풍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구일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급히 염천월의 맥문을 잡아 보았다.
다음 순간 그의 얼굴도 절망으로 횟빛이 되고 말았다.
"아아! 주인님! "
제갈월풍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구일비는 믿을 수 없는 듯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찌하여 이런 일이? 하늘도 무심하오! "
제갈월풍은 홀연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소매로 눈물을 훔치더니 염천월의 등 뒤
에 정좌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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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두 손바닥을 가지런히 뻗어 염천월의 명문혈(命門穴)에 붙였다. 곧 그의 정순한
내공이 서서히 염천월의 체내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구일비도 그 광경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약간 떨어진 채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제갈월풍은 본신의 진기로 꺼져가는 염천월의 생명에 마지막 불꽃을 피우려하고 있었
다. 만일 이 순간에 외부의 경동(驚動)이 일어난다면 염천월은 물론 제갈월풍까지 위
험해 지는 것이다.
"......."
구일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호법하며 제갈월풍과 염천월을 지켜 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잿빛을 띄던 염천월의 얼굴에 차츰 홍조가 감돌더니 마침내
의식을 회복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입을 열었다.
"풍아야....... 그만...... 두어라......."
"할아버지!"
제갈월풍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들으며 염천월은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나는 틀렸다......."
"할아버지! 으흑흑......."
제갈월풍은 걷잡을 수 없는 오열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염천월의 상
세는 너무도 엄중해 설사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염천월은 떨리는 손으로 제갈월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벌써 일 년 전부터...... 나의 내공은 감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평범
한 사람이나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제갈월풍이 격동하여 외쳤다.
"왜? 왜? 그것을 숨기셨습니까? 왜......?"
염천월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아이야, 나는 염천월이다. 무림사상 가장 강한 고수인 혈해마존(血海魔
尊) 염천월이다. 그런 내가 어찌 빈 껍데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었겠느냐......."
그의 음성에는 진한 고독이 배어 있어 그야말로 늙은 호랑이와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겨내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저한테만은......."
염천월은 다시금 고소를 떠올렸다.
"풍아야....... 내 나이 백삼십이 넘었다.......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 죽는다 한들..
.... 무슨 유한이 있겠느냐......."
그는 제갈월풍의 손을 꼭 잡으며 감회 깊은 음성으로 말했다.
"지난 십여 년 간...... 너와 함께 살아온 세월은 정말...... 행복했다......."
"할아버지......."
"나같은 늙은이가 말년에 너같이 영민하고 착한 아이를 만나다니.... 우욱!"
염천월은 검은 핏덩이를 한 모금 토해냈다. 제갈월풍은 다급히 부르짖었다.
"할아버지! 말씀하지 마세요."
그러나 염천월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다.......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모두 말하고 싶구나......."
"할아버지......."
"지난 십 년 간...... 네가 있었기에 나는 진정 행복했다....... 나는 이것을 언제나.
..... 하늘에 감사해 왔다."
"흐흑......."
제갈월풍은 나직히 흐느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가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들끓고 있
었다. 그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설사 자신의 뼈가 부서져 나가고 육신이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염천월을 살려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주인님! 흐흑......."
장미신타 구일비가 털썩 무릎을 꿇더니 통곡을 했다. 낙타등같이 굽은 그의 등이 크게
들먹여지고 있었다.
염천월은 길게 탄식하며 그를 향해 말했다.
"구노인....... 슬퍼하지 말게......."
"주, 주인님......."
염천월은 촛점이 흐려진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자네에게는 정말...... 미안할 뿐이네....... 그 동안 아무 것도 해준 것
이 없으니......."
"흐흑흑....... 주인님---!"
"자네는 비록 스스로 종으로 자처했지만...... 젊은 시절부터...... 나보다도 오히려
나이가 많은 자네가...... 날 섬기며 정성을 다 바쳐 주었으니....... 난 사실 진작부
터 자네에게 형제(兄弟)같은...... 정(情)을 느꼈다네......."
이어 염천월은 제갈월풍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풍아를...... 부탁하네......."
"어흐흑흑......."
장미신타 구일비는 얼음판에 얼굴을 묻고 통곡해마지 않았다. 염천월은 서서히 뒤집혀
가는 눈을 억지로 뜨려 애썼다.
"풍아야....... 내 죽기 전에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할아버지......."
염천월은 그의 손을 더듬어 잡으며 말했다.
"결코...... 함부로 살생을 하지 말아라....... 너만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말
아라.......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낳느니...... 너는 진정...... 무
림을 위한...... 협객(俠客)이 되어야 한다....... 부디...... 진정한...... 절(絶)..
.... 대(代)...... 종(宗)...... 사(師)가...... 되어...... 다오......."
제갈월풍은 그 말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염천월의 음성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네가 옳다고 생각하면...... 주관대로 밀고 나가라. 설령
모든 사람들이 널...... 배척해도...... 나만은...... 이 할애비만은...... 너의 편임
을...... 잊지...... 말아라......."
"할아버지!"
염천월의 몸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내...... 죽더라도......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것....... 푸...... 풍아야......."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혈해마존(血海魔尊) 염천월, 그는 이렇게 죽은 것이다.
"할아버지----!"
"주인님!"
제갈월풍과 장미신타 구일비의 처절한 외침만이 텅 빈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달(月)이 뜨고 있었다.
중천(中天)으로 떠오른 보름달, 그 달빛 속에 한 기인(奇人)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그
누가 알랴? 고독한 노영웅(老英雄)의 혼(魂)이 지닌 숱한 애환을.......
대설산(大雪山) 천도봉.
봉우리의 정상에 하나의 무덤이 생겼다. 그리고 그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어두운 세상(世上)에 태어나 오직 달(月)만을 사랑했던 고독한 노인(老人), 달빛(月
光) 속에 잠들다.>
천하에서 가장 고독했던 노인, 살면서 오직 달만을 사랑했던 노인의 무덤은 천도봉 정
상의 차가운 얼음 속에 세워졌다. 세상과는 등을 진 외로운 무덤이었다.
그러나 달이 뜨면 달빛이 무덤을 환히 비추었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은 반드시 외롭지
만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만월(滿月)이 뜨는 날이면 한 명의 청년과 노인이 정성껏 제사를 지내곤 했다.
무덤에 술을 뿌리고 절을 하며 무덤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노인과 대화를 하는 것
이었다.
달(月).
그 속에 노인의 얼굴이 떠올라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 정녕 외롭지 않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더니 다시 봄이 찾아왔다.
이른바 춘삼월(春三月).
천도봉 위에 한 명의 청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하나의 길고 검은
보자기를 손에 든 채 등이 구부정한 한 노인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제갈월풍이었다.
"구노인은 정말 계속 이곳에 남아 계시겠습니까?"
장미신타 구일비는 몇 달새 부쩍 늙은 모습이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노복의 나이 백사십 세가 되었소이다. 남은 여생을 이곳에서 주인님과 벗하며 살고
싶습니다."
"구노인!"
제갈월풍은 떨리는 손으로 구일비의 손을 마주잡았다. 구일비는 짐짓 밝은 웃음을 지
으며 말을 이었다.
"공자님, 어서 떠나십시오."
"구노인......."
제갈월풍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탄식하듯 말했다.
"매년 첫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 찾아 오겠소. 매년......."
그는 구일비의 손을 놓고 몸을 돌렸다.
"삐익!"
그가 휘파람을 불자 하늘에서 날개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아가 출현했다.
크--- 악---!
금아가 바닥에 내려 앉았다. 제갈월풍은 금아의 등에 올라타고 이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구노인! 안녕히......."
멀리에서 제갈월풍의 음성이 들려왔다.
장미신타 구일비는 눈물어린 얼굴로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듯 그는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주인! 주인님의 말을 잊지 마십시오. 소주인은 반드시 절대종사(絶代宗師)가 되어
야 합니다.'
차츰 날이 어두워졌다. 천도봉은 마침내 어둠의 장막에 갇혀 버렸다.
제갈월풍, 그는 금아를 타고 있었다.
금아는 힘껏 멀리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어느덧 어둠 속에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
제갈월풍은 홀린 듯 달을 응시했다. 드높은 하늘에서 보는 달은 눈이 시리도록 더욱
크고 밝았다.
그 달 속에 한 명의 얼굴이 나타났다. 몹시도 자애스런 얼굴이었다.
"할아버지......."
그가 탄식하며 나직이 부르자 달 속의 염천월은 미소를 지었다. 아울러 그 미소는 점
차 파안대소로 변해갔다.
- 헛헛헛....... 이 녀석, 풍아야! 이제 강호로 나가는구나. 그래, 너는 자랑스러운
나의 손자다.......
제갈월풍의 가슴은 마구 격탕했다.
"할아버지!"
그 순간 달 속의 얼굴은 사라져 버렸다. 금아가 날개를 접으며 어디론가 급속히 떨어
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갈월풍은 비로소 금아가 자신을 등에 실은 채 오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허공을 날
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내심 고소를 짓고는 금아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금아, 미안하다. 네가 피곤하리라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구나. 이제 그만 내려가
쉬자."
크--- 악---!
금아는 그의 마음을 아는 듯 구슬프게 울었다.
호남성(湖南省) 의창(宜昌).
천하의 명호(名湖)인 동정호(洞庭湖)가 인근에 있는 의창은 번화한 시진(市鎭)으로 양
자강(陽子江)이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봄(春), 봄이었다.
강남(江南)의 봄은 그 풍광이 수려하기로 이름 나 있었다. 처처에 도화림(桃花林)이
우거져 도화향을 진동시켰으며 신록이 우거진 구릉마다 싱그러운 새들의 지저귐이 들
려왔다.
소류강(小流江).
이는 의창의 서북쪽을 흐르는 양자강의 한 지류였다. 강 언덕에는 수류(水柳)가 늘어
져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강언덕 위에 한 명의 백의서생(白衣書生)이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한가하게 뒷짐을 지
고 서 있었다.
그의 모습은 유려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용모가 송옥(宋玉)이나 반안(潘安)을 뺨칠 정
도로 영준했다. 특히 희고 맑은 피부와 깊고도 지혜가 충만한 두 눈은 신비스러운 매
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수중에 검은 색의 긴 보자기를 들고 있는 백의서생, 그는 바로
제갈월풍이었다.
그는 한동안 강가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길은 배가 다니는 도선
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선장에는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대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서생도 있었
고, 장사꾼도, 또 나그네도 있었다.
그들은 한 척의 크지 않은 배에 앞다투어 타고 있었다. 제갈월풍도 그들 사이에 끼어
배에 올랐다.
곧 배는 사람들로 꽉 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사공이 손님이 더 모아지기를 은근히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러자 손님 중에 어느 한 사람이 소리쳤다.
"여보시오, 사공! 이제 사람도 웬만큼 찼으니 그만 갑시다."
"그렇소! 빨리 갑시다."
손님들은 너도 나도 소리치며 배가 떠나기를 요구했다.
"좋소이다! 그럼 출발하겠소."
오순이 다 되어 보이는 사공이 걸찍한 음성으로 대꾸하고는 곧 노를 젓기 시작했다.
끼익! 끽! 삐걱---!
배는 힘겹게 물살을 헤치며 강으로 나갔다.
"잠깐만!"
외침과 함께 도선장에 두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한 명의 노인과 어린 소녀였다. 노인
이 음성을 높여 다시 외쳤다.
"사공! 배 좀 대 주시오."
배는 벌써 사오 장이나 뭍에서 떨어져 있었다. 사공은 귀찮은 듯 짧게 내뱉았다.
"다음 배를 타시오."
노인은 몹시 급한 일이 있는 듯 사정조로 말했다.
"시간이 없어서 그렇소! 부탁이니 배를 좀 대 주시오."
그러나 배는 도선장에서 점점 멀어져 갈 뿐이었다. 노인은 갑자기 소녀를 옆구리에 끼
더니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휘익----!
놀랍게도 노인은 소녀를 낀 채로 강물이 출렁이는 허공을 오륙 장이나 날아 건넜다.
쿵---!
그는 뱃전에 무사하게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대경실색했다
"세, 세상에 사람이 하늘을 날다니!"
그들은 한결같이 두려운 눈초리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더욱 겁을 집어먹은 자는 아무
래도 사공이었다. 그는 무슨 불호령이라도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지 매우 전전긍긍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중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노인은 사공을 전혀 탓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소녀를
데리고 구석자리로 가 앉을 뿐이었다.
'.......'
제갈월풍은 감탄어린 눈으로 노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노인은 나이는 육순 정도. 일신에는 낡은 마의(麻衣)를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답지 않
게 무척 강직하고 고집이 있어 보였다.
그와 동행인 소녀는 이제 겨우 십이삼 세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깜찍한 용모 때문
인지 매우 귀여워 보이는 그녀는 뭇사람의 시선을 끄는 취의(翠衣)를 입고 있었다.
다만 소녀는 무엇인가 상당히 급한 일이 있는 듯 초조한 신색이 역력했다. 이때, 마의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갈월풍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에 일순 놀람이 스쳤다.
'음! 탈속한 기품하며... 비범한 용모로다.'
마침 취의소녀도 주위를 살피다 역시 제갈월풍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그것은 제갈월
풍의 용모가 워낙 출중한 나머지 충분히 사람들의 눈을 끌만 했기 때문이다.
취의소녀도 제갈월풍을 발견하자 처음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가
벼운 미소와 함께 장난스럽게 한 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제갈월풍은 귀여운 생각이 들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러자 취의소녀 또한 방긋 웃더니
옆의 노인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건넸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어 소녀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 제갈월풍에게로 다가왔다.
노인은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소협, 실례해도 되겠소이까?"
"물론입니다."
제갈월풍이 자리를 비켜주자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노인은 주위를 살피더니 물었
다.
"소협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제갈월풍은 잠시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뚜렷하게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악양(岳陽)에나 한 번 가볼까 하는 중입니다."
"악양....... 좋은 곳이오."
노인은 은근한 음성으로 재차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소협의 고향은 어디시오?"
제갈월풍의 얼굴이 다소 침울해졌다.
"산서성(山西省)입니다."
"상당히 북방(北方)이구려. 소협의 이름은 어찌 되시오?"
"소생은 제갈월풍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이제까지 눈망울을 굴리고 있던 취의소녀가 명랑한 음성으로 끼어 들었다.
"아! 제갈오빠이셨군요. 소매는 소접홍(蘇蝶紅)이라고 해요."
그녀가 웃자 입가에 보조개가 패였다. 그녀는 초롱한 눈으로 제갈월풍이 들고 있는 긴
보자기를 보며 물었다.
"오빠는 무공을 익히셨나요?"
제갈월풍은 천진난만한 소녀, 즉 소접홍에게 문득 호감을 느끼며 담담히 대꾸했다.
"별로 신통치 못한 재간을 몇 수 배웠을 뿐이지."
소접홍은 배시시 웃었다.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랬어요. 소매가 보기에는 오빠의 무공은 정말 뛰어날 것 같아요."
제갈월풍은 밝게 웃었다.
"하하하....... 겸손이 아니다."
노인이 이번에는 꽤 진지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소협의 사부는 어느 고인이신지?"
제갈월풍은 그 말에 염두를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복마진군이나 할아버지의 명호를 입 밖에 낼수는 없다. 괜스리 이들을 동요시킬 필요
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는 곧 태연하게 말했다.
"본래 소생은 향시(鄕試)에 몇 번 응시를 했으나 번번이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한 거지노인을 만나게 되어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거지노인?"
마의노인이 부쩍 관심을 보이자 제갈월풍은 고소를 지었다.
"그 분은 참으로 괴짜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생은 그 분과 대화하는 동안 서로 마
음이 통하는 것을 느끼고 기뻐했지요. 그 분도 같은 생각이셨는지 한동안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때 그 분께서는 소생에게 근근히 몸을 지킬 정도의 무예를 몇 수
전수해 주셨습니다."
노인의 눈빛이 갑자기 심상치 않게 변했다.
"소협, 그 노개(老 )의 모습은 어떻게 생기셨소?"
제갈월풍은 멈칫했으나 이왕 내친 김이라 적당히 꾸며댈 수 밖에 없었다.
"그 노인장은 여기저기 기운 낡은 장삼을 입었으며 수중에 항상 호로병이 떨어지지 않
았습니다. 더구나 나이도 지긋하신 분이 온갖 괴이한 행동을 서슴치 않더군요."
노인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혹시 그 어르신이 아닌지 모르겠군!"
제갈월풍은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짐짓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노인은 안색을 굳히더니 신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칠십 년 전에 은거한 주개(酒 )가 한 분 있소. 일명 취선개(醉仙 )
라 했는데 혹시 소협의 사부이신 괴걸노인이 바로 그 노선배가 아닐지?"
제갈월풍은 고개를 흔들었다.
"글쎄, 소생은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신비에 가려진 분인지라....... 그런데 그 취선
개란 분은 어떤 분입니까?"
"그 분은 최절정의 고수이자 진정 괴인(怪人)이라 아니할 수 없소. 그 당시 무림에는
쌍벽을 이루는 괴물로 남북이괴(南北二怪)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남자요, 한 사람은
여인이었소."
제갈월풍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요?"
"그 중 남괴(南怪)가 취선개이며 북괴(北怪)는 손속이 악랄하고 성격이 불같이 급한
독죽신니(毒竹神尼)였소. 두 사람은 성격과 행동이 너무도 괴이하여 그들을 대해본 사
람이면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 정도였소. 그러나 무공만은 각기 일문(一門)을 세울 만
큼 고절하여 각대문파에서도 그들 두 사람의 괴행에 대해서는 감히 참견하지를 못했소."
제갈월풍은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어 물었다.
"그럼 지난 날의 장미신타(長眉神駝) 구일비와 비교해서 누가 더 무공이 높습니까?"
"장미신타!"
마의노인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그는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장미신타는 남북이괴보다도 이십 년이나 앞선 인물이오. 더구나 그는 한 때 강호를
피로 물들인 대마두(大魔頭)인데 어찌 비교할 수 있겠소? 소협은...... 그를 잘 아시오?"
"어쩌다 이름을 들었을 뿐입니다."
제갈월풍이 미소를 짓자 마의노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휴우, 그의 무공은 악랄무비하고 잔혹하여 그의 손에 걸린 자는 흑백양도를 막론하고
살아난 사람이 없었소이다. 남북쌍괴도 그에 비하면 한 수 정도는 떨어진다고 할까?"
제갈월풍은 내심 중얼거렸다.
'구노인이 그토록 엄청난 인물이었을 줄이야.'
그는 새삼 대설산 천도봉에서 백아(白兒)와 함께 쓸쓸히 지내고 있을 구일비의 모습이
몹시 그리워졌다.
제갈월풍은 마의노인과 짧은 시간에 상당히 친숙해졌다.
상강일룡(相江一龍) 공평(孔平).
그것이 마의노인의 명호였다.
상강일룡 공평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제갈월풍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인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근래에 보기 드문 청년이구나.'
제갈월풍은 공평으로 인해 근래의 무림 상황에 대해 다소나마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한편 취의소녀 소접홍은 그 사이 제갈월풍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명랑하게 조잘
대면서도 관심이 깃든 예쁜 눈을 한 번도 그에게서 떼지 않고 있었다.
배는 양자강의 지류인 소류강을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사공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노를 젓고 있었다. 사공의 노젓는 동작은 느릿느릿하기만 했다. 그러나 수십 년 간
노를 저으며 살아왔기에 그는 물살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적절히 힘을 내어 배
는 흔들림도 없이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강 양 쪽의 경치를 감상하
고 있었다. 무르익은 봄의 절경(絶景)이 사람으로 하여금 넋을 잃게 만들 정도였다.
'정말 아름답구나. 대설산에서는 볼 수 없는 경치로구나.'
제갈월풍도 풍광에 한껏 도취되어 있었다. 그는 강물에 한 손을 담근 채 물살을 느끼
고 있었다. 소류강은 맑고 깨끗하여 이따금 바닥을 유영하는 물고기가 보이곤 할 지경
이었다.
이때였다. 문득 상강일룡 공평이 무엇을 발견한 듯 안색을 굳혔다. 그는 맞은 편을 바
라보고 있었다.
맞은 편에 한 척의 괴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는 엄청난 크기의 거선으로서 뱃머
리가 뾰족하고 그 앞에는 용두(龍頭) 형상의 철물(鐵物)이 달려 있었는데, 그로 미루
어 거선은 전선(戰船)같기도 했다. 괴선의 기둥 위에는 흑색 바탕에 황금색의 교룡(蛟
龍)이 수놓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교룡방(蛟龍 ) 놈들이군!"
공평이 나직히 부르짖었다.
한편 괴선은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어 거선은 약 십여 장 거리
에서 멈추었다. 동시에 거친 웃음소리가 울려왔다.
"으하하하! 상강일룡 공평! 네 놈이 과연 우리 교룡방의 눈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느냐?"
괴선의 선수(船首)에는 세 명의 흑의노인이 십여 명의 흑의인을 대동한 채 우뚝 서서
이쪽을 바라보며 외치고 있었다.
상강일룡 공평은 배에서 벌떡 일어섰다. 배 안의 손님들은 거선의 출현에 놀라 급히
배의 뒷전으로 피신했다.
"교룡삼패(蛟龍三覇)! 백안문(白雁門)은 결코 네 놈들의 행위를 잊지 않을 것이다. 네
놈들이 일시적으로는 득세할지 모르나 반드시 궤멸되고 말 것이다!"
상강일룡 공평의 말에 괴선 쪽에서 괴소가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 어림없는 소리! 절대 네 말대로 될리가 없다. 우리는 이미 네가 이
강을 건너려는 이유도 알고 있다."
"뭣이?"
공평은 물론 소접홍까지 그 말에는 흠칫했다.
"흐흐흐....... 네 놈은 지금 백안문을 구하기 위해 뇌화곡(雷火谷)의 도움을 받으러
가는 길이 아니냐?"
"네, 네 놈들이 어찌 그것을......."
"크흐흐....... 가봐야 헛수고만 할 뿐이다. 뇌화곡은 벌써 우리 교룡방에 의해 멸절
된 지 오래다."
"뭐라고?"
공평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고 말았다. 이때 어린 소접홍이 반발하듯 야무지게 외쳤다.
"교룡삼패! 거짓말 말아라. 뇌화곡이 시시한 교룡방 따위에 당할 리가 없다."
그러자 즉각 괴선 쪽에서 답변이 왔다.
"크하하하......! 꼬마 계집애야! 보아 하니 네가 바로 백안문의 작은 여우 소접홍인
가 보구나. 그러나 네 년도 내 말을 들으면 수긍하지 않고는 못배길 것이다. 흐흐흐..
..... 천하제일의 방파인 제왕문(帝王門)의 고수들이 이 일에 참여했다면 결과가 어떻
게 되었겠느냐?"
"제... 제왕문!"
공평과 소접홍은 동시에 경악성을 터뜨렸다. 곁에 있던 제갈월풍도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왕문이라면 오 년 전에 만났던 그 노인, 즉 천안신군(天眼神君) 곡우(曲雨)가 바로
제왕문주가 아니었던가?'
아울러 그는 곡우가 그에게 건네주었던 금빛 동전이 떠올랐다.
'내게 한 번 들러달라고 했었지.'
이때 괴선의 선수에 서 있던 세 흑의노인 중 한 명이 다시 음침한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상강일룡, 네 놈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애초부터 백안
문의 그 계집이 우리 방주( 主)의 뜻을 거스른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공평은 대로하여 외쳤다.
"닥쳐라! 노부는 절대 이대로 굴복하지 않겠다."
흑의노인은 다시금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그래? 그렇다면 맛을 보여 줘야지!"
그는 뒤를 돌아보더니 살기띈 음성으로 명령했다.
"얘들아! 저 보잘 것 없는 배를 단숨에 부숴 버려라."
"아아!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됐구나."
배에 탄 손님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들은 교룡방의 행패와 실
력에 대해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호북(湖北) 일대에서 양자강을 무대로 수상(水上)
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온갖 횡포를 부리는 집단, 이것이 바로 교룡방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쏴--- 아---!
물살을 가르며 괴선은 그대로 배를 향해 부딪쳐 왔다. 공평은 크게 당황하여 소리쳤다
"이 놈들아! 우리는 그렇다치고 어찌 무고한 사람들까지 모두 몰살시키려 하느냐?"
교룡삼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괴선은 더욱 무서운 속도로 부딪쳐올 뿐이었다.
만일 괴선의 선두에 달린 용두 부분에 부딪친다면 작은 배는 그야말로 박살이 날 것이
뻔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월풍은 마침내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그는 은밀히 구환
신공(九環神功)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변이 벌어졌다. 달려들던 교룡방의 거대한 배가 마치 거대한 무형(無形)의
벽에 부딪친 듯 멈추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쿵---!
그뿐만이 아니었다. 괴선은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함은 물론 서서히 뒤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하하! 살았다......."
배 위의 손님들은 원인이야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살았다는 느낌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나 이들의 반응과는 달리 교룡삼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안색이
변해 동시에 외쳤다.
"어떤 숨은 고인(高人)이 교룡방의 일을 방해하는 것이오?"
그러나 작은 배 안에서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교룡삼패는 노기가 치밀어 재차 고함
쳤다.
"이제 보니 겁많은 졸장부였구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디선가 칼칼하면서도 창노한 음성이 즉시 들려왔다.
"교룡삼패! 너희들은 실로 간덩이가 부은 놈들이구나. 감히 노부를 능멸하려 들다니?"
"누... 누구냐?"
교룡삼패는 안색이 변해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강상에는 출렁이는 물결뿐이었고, 작
은 배에는 목소리의 임자로 보이는 인물은 아무리 둘러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으핫핫핫핫핫......!"
예의 음성이 일진 광소를 터뜨렸다. 그것은 강물이 출렁거릴 정도로 웅후한 진기가 담
긴 소성(笑聲)이었다. 교룡삼패는 가슴이 울렁거림을 느끼고는 경악해마지 않았다. 이
어 그들은 무엇인가 흰빛이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는 급히 몸을 사렸다.
팍---!
물체는 그들의 발치 끝에 떨어져 깊숙이 박혔다. 그것을 급히 살펴본 순간 교룡삼패는
대경실색했다.
"억! 이럴 수가?"
거선의 갑판은 단단한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 나무 갑판에 한 장의 종이(紙)가 박혀
팔랑거리고 있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한 장의 종이를 날려 나무에 꽂다니, 그것도 십여 장이나 떨어진 거리를 격하고 날린
종이였다. 그것은 엄청난 공력을 가진 고수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절기
중의 절기였다.
교룡삼패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종이를 빼보았다.
"헉!"
그는 그만 얼굴이 백지장이 되고 말았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여 있었던 것
이다.
- 혈해마존(血海魔尊).
"혀... 혈해마존!"
교룡삼패는 한결같이 몽유병자처럼 부르짖으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흐흐흐....... 교룡삼패, 노부를 알겠느냐?"
교룡삼패는 감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때 예의 음성이 울려왔다.
"본시 노부는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너희들의 작태가 너무나 한심하여 나섰다
. 과연 네 놈들 중 누가 노부를 막는가 보겠다."
한편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상강일룡 공평과 소접홍은 짙은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였다. 그들의 의문을 대변이라도 하듯 교룡삼패 중 한명이 거칠게 외쳤다
"노부는 혈해마존이 나타난 것을 믿지 않는다. 대체 어떤 놈이 그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느냐?"
그러나 곧 그는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말았다.
"크윽!"
"삼제(三弟)!"
나머지 교룡이패는 안색이 급변하여 급히 그를 부축했다. 쓰러진 자의 얼굴에는 놀랍
게도 선명한 도화빛 장인이 찍혀 있었다.
"도, 도인장(桃印掌)! 이것은 염천월의 독문표기......."
교룡이패는 공포에 찬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도인장으로 말하자면 과거 혈해마존 염천
월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을 때 사용하던 표식무공이었다. 도인장이 나타난 이상
교룡삼패는 더 의심할 용기마저 상실해 버렸다.
"가... 가자! 선수를 돌려라---!"
교룡방의 배는 삽시지간 방향을 바꾸더니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거선
이 멀리 사라져 버리자 제갈월풍은 짐짓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네. 흉악한 자들 같으니....... 저들에게는 왕법(王法)
도 없단 말인가?"
"왕법?"
공평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소협, 저들은 왕법은 안중에도 두지 않소."
그는 이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어째서 혈해마존이 우리를 돕는지 도시 이해할 수가 없구려."
제갈월풍은 반문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단 말이오?"
공평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혈해마존 염천월은 무림사상 천하무적의 고수요. 아무도 그 자를 당할 자가 없소. 그
러나 그는 언제나 혼자의 몸으로, 그 누구를 돕는 법도 없을 뿐더러 타인의 도움도 받
지 않는 인물이오."
제갈월풍은 빙그레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글쎄요? 무슨 이유가 있겠지요."
공평의 안색이 문득 침중해졌다.
"아무튼 빨리 백안문으로 돌아가야 할텐데...... "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러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군. "
제갈월풍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비록 미약하나마 소생이 도울 일이라도 없겠습니까? "
공평은 그 말에 크게 기뻐했다.
"소협께서 도와주시기만 한다면야..... 실상 노부는 지금으로써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외다. "
소접홍의 얼굴에도 희색이 떠올랐다.
"제가 보기에 오빠는 무공이 대단한 분 같아요. "
제갈월풍은 짐짓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하하하...... 과찬이오. 자꾸 그러면 부담스러울 뿐이오. "
"아니오. 노부가 보기에도 그렇소이다."
공평이 말을 거들자 소접홍은 더욱 신이난 듯 종알거렸다.
"호호...... 그것 봐요. 공할아버지도 그렇게 보이신다잖아요. "
"이거야 원! "
제갈월풍은 하릴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사이에 배는 어느덧 건너 편에 닿고 있었다.
< 第 9 章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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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 10 章. 신비(神秘)의 백안문(白雁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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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岳陽)에서 서북으로 십여 리 떨어진 관도(官道).
세 명의 인물들이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제갈월풍과 상강일룡 공평, 그리고 소접홍이었다.
제갈월풍은 그들을 통해 백안문에 대해 자세한 내력을 알게 되었
다.
백안문은 모두 여인(女人)들로만 구성된 집단으로 문주는 백안신
녀(白雁神女) 기옥봉(奇玉鳳)이었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기녀(奇女)이자 무림제일미(武林第一美)로
불리워지는 여인, 백안신녀 기옥봉은 무공은 물론 미색과 재질까
지 두루 갖추어 천하에 방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 자신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신비에 가려져 있었
다.
백안문은 호북성에 있었으며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
구하고 호북제일의 방파라 할 수 있는 교룡방과 쌍벽을 이루는 세
력을 구축했다.
교룡방(蛟龍幇)은 본래 약 백여 년 전부터 양자강의 수로(水路)를
손아귀에 쥐고 있었다.
그들의 세력은 매우 넓고 방대한 편이었다.
그런데 최근 신임방주인 교룡번신(蛟龍飜身) 당백호(唐白虎)로 인
해 두 방파는 충돌을 하게 되었다.
교룡번신 당백호로 말하자면 삼십여 세의 나이로 천성적으로 여색
(女色)을 밝히는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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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려 일곱 명의 부인이 있음에도 백안신녀 기옥봉을 한 번 보고는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백안신녀에게 구혼을 하기에 이르렀다.
뜻이 높고 고고한 백안신녀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만무였다. 그녀는 당연히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에 당백호는 분노했고 그 결과 두 방파 간에 싸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얘기를 듣고 나자 제갈월풍의 눈에는 한 가닥 경멸이 스쳤다.
"일문을 이끄는 방주라는 자가 단지 구혼을 거절당했다 하여 분쟁을 일으키다니......."
소접홍도 야멸찬 음성으로 거들었다.
"감히 까마귀가 봉황을 얻으려 하다니 말이 되나요? 정말 당백호, 그 자는 너무도 파
렴치해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그에 반해 상강일룡 공평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백안문이나 교룡방은 그 세력이 비슷한 처지요. 누가 이길지는 겨뤄봐야 아는 것이오
. 게다가 지금은 제왕문(帝王門)이 개입했으니 일이 어렵게 되었소."
제갈월풍은 담담히 물었다.
"제왕문이 그렇게 강합니까?"
공평은 안색이 더욱 굳어졌다.
"소협께서는 강호에 처음 나와 잘 모를 것이외다. 제왕문은 현 무림에서 가장 무서운
단체요. 더구나 문주인 천안신군(天眼神君) 곡우(曲雨)는 한 자루의 금마선(金魔扇)으
로 전 무림을 종횡무진하는 자요."
제갈월풍은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혈해마존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공평은 흠칫했다.
"그것은 말하기 곤란한 문제요."
"왜 그렇습니까?"
"천안신군은 염천월이 무림에서 사라진 후에 등장했소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
여 년 전에 나타났소. 그러나 그는 불과 십 년 사이에 제왕문이라는 무림제일의 단체
를 만든 인물이오."
"......."
"다만 노부의 사견으로는 아무래도 그가 혈해마존보다는 조금 뒤질 것 같소이다. 혈해
마존은 천하제일 고수였으니까."
일행은 관도를 벗어나 협도(峽道)로 들어서고 있었다.
휘익!
문득 파공성과 함께 한 인영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떨어졌다. 나타난 인영은 이십
오륙 세쯤 되어보이는 준수한 용모의 은의청년(銀衣靑年)이었다.
그는 왼손에 괴이한 모양의 은빛 도(刀)를 들고 있었는데 풍도가 매우 비범하고 용모
또한 준수한 청년이었다.
은의청년은 나타나자마자 느긋한 웃음을 보였다.
"홍아(紅兒), 오랜만이다."
소접홍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내뱉듯 쏘아 부쳤다.
"왜 또 나타났지요?"
은의청년은 호탕하게 웃었다.
"핫핫핫......! 홍아는 이 오래비가 보고 싶지도 않았나 보구나. 첫인사가 그게 뭐냐?
소접홍은 코웃음을 쳤다.
"흥! 별 꼴이야. 누가 당신을 오빠라고 했나요?"
은의청년은 능글맞게 웃었다.
"후후후! 좋다. 어쨌든 간에 너는 내가 왜 여기 나타났는지 아느냐?"
"흥! 내가 알게 뭐예요?"
"홍아, 난 지금 백안문을 구하러 왔다. 백안문은 지금 위기에 몰려 있지 않느냐?"
소접홍은 눈꼬리를 치뜨며 냉소를 터뜨렸다.
"누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했나요? 문주 언니도 아마 당신의 도움 따위는 원치 않을 거
예요."
은의청년이 오만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없으면 곤란할텐데?"
"하나도 곤란할 것 없어요."
소접홍은 보란 듯 제갈월풍의 소매에 매달렸다.
"당신을 대신해 제갈오빠가 도와주실 거니까요."
"뭣이?"
은의청년의 표정이 홱 변했다. 그는 그제서야 비로소 제갈월풍의 존재를 느낀 모양이
었다. 동시에 그의 안면은 보기 싫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평소 자신의 용모에 자부심을 가졌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눈 앞의 상대를 보니 그야
말로 반딧불을 달빛에 견줄 정도가 아닌가?
은의청년의 눈에는 대뜸 살기가 피어 올랐다. 그는 공평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상강대협의 의견도 홍아와 같소?"
공평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곧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소."
은의청년의 입에서 음산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흐흐흐....... 그렇다면 저 친구의 무공이 상당한 모양인데 어디 한 번 시험을 해봐
야겠군."
그 말에 제갈월풍은 역겨운 듯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치졸한 자로군.'
반면 공평과 소접홍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상강일룡 공평이 급히 은의청년을 만류했다.
"이러지 마시오. 천하의 도객(刀客)을 자처하는 소협이 뭐가 답답해 생면부지의 인물
과 대적하려 드시오?"
그러자 은의청년의 입에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친 음성이 튀어 나왔다.
"흐흐흐....... 공늙은이! 입 닥쳐라. 계속 떠들면 늙은 네 목까지 날려 주겠다."
"뭐, 뭣이!"
공평은 분노하여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어린 놈이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내 상강일룡의 이름을 걸고 네 놈
을 교훈하겠다."
그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은의청년과 정면으로 맞섰다.
"공대협. 참으십시오."
제갈월풍이 그를 막고 나섰다. 은의청년은 거만하게 물었다.
"흐흐....... 진작 나설 것이지. 네 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제갈월풍은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본 뒤 조용히 말했다.
"소생의 성(姓)은 제갈이라고 하오."
"제갈? 흐흐흐....... 어쨌든 상관없다. 그런데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내 어찌 알겠소?"
은의청년의 얼굴에는 한 가닥 조소가 떠올랐다.
"나는 은린마도(銀鱗魔刀) 팽여룡(彭如龍)이다."
제갈월풍이 그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강호견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설사 안다 한들 동요될 그도 아니었다.
그가 반응이 없자 은린마도 팽여룡은 오히려 안달이 난 듯 추궁했다.
"너는 본인의 명호를 들어본 적이 없느냐?"
제갈월풍은 솔직히 대답했다.
"소생은 강호초행이오."
'무식한 놈!'
은의청년은 내심 이를 부드득 갈았으나 더욱 거만하게 내뱉았다.
"좋다. 어쨌든 너는 본인의 은린마도를 받아볼 의향이 있느냐? 만일 두렵다면 무릎을
꿇고 세 번 개짖는 소리를 내라. 그럼 용서해 주겠다. 핫핫핫......."
안하무인격인 팽여룡의 말에 분개한 것은 소접홍이었다.
"팽여룡! 당신의 행동을 언니에게 다 이르겠어요."
"후후....... 홍아야, 나는 네가 뭐라 이르건 상관치 않겠다."
은린마도 팽여룡은 짐짓 여유를 보였다.
"자! 어찌 하겠느냐?"
제갈월풍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후후....... 이 자는 자기도취에 빠져 제 정신이 아니구나. 아니, 백안문주에게 정신
을 뺏긴 나머지 이성을 잃었을지도.......'
이어 그는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만일 이도저도 싫다면?"
"건방진 책벌레 놈!"
챙!
팽여룡은 호통과 함께 은린마도를 뽑았다.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자 은빛 비늘이 덮
힌 괴형의 도가 허공에 무수한 은파(銀波)를 형성했다.
"어디 은린마도의 맛 좀 보거라!"
쐐--- 애--- 액!
은린마도가 허공을 가르자 순식간에 수백 갈래의 은광이 제갈월풍의 전신을 뒤덮어 버
렸다.
"아!"
공평과 소접홍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들이 보기에는 제갈월풍이 도저히 감당해낼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였다. 은빛 도광에 싸여있던 제갈월풍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릿해지더니, 증발이라
도 하듯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마환보(魔幻步)를 펼친 것이다.
"웃!"
팽여룡은 상대방이 수백 줄기의 은광 속에서 귀신같이 꺼져버리자 크게 당황했다.
'내 은린마도를 이렇게 쉽게 피해내다니!'
그는 제갈월풍이 어느새 좌측으로 물러나 있는 것을 보고는 즉시 재공격했다.
쉬쉬쉭---!
은린마도는 물결같은 도망(刀網)을 뿌리며 다시 제갈월풍을 짓쳐 들어갔다. 실로 변화
무쌍하고도 쾌속한 도법(刀法)이었다.
반면 제갈월풍은 마치 가랑잎처럼 가볍게 도의 그림자 속을 누볐다. 십여 초가 지났지
만 팽여룡은 그의 옷자락조차 베어내지 못했다.
제갈월풍은 계속 뒷짐을 진 채 여유만만하게 발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광경에 공평
과 소접홍은 희색이 만면했다.
그들은 설마 제갈월풍의 무공이 이토록 고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특히 소접홍의 기
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아! 제갈오빠는 역시 기인(奇人)이었구나.'
이때 제갈월풍의 온유한 음성이 들렸다.
"팽형, 이제 그만 합시다."
팽여룡은 분성을 내질렀다.
"닥쳐라!"
동시에 그는 더욱 무서운 살수(殺手)를 전개했다.
은린마도는 찍고, 자르고, 밀고, 후벼내면서 잔인하고 악독하게 살광을 뿌려냈다. 제
갈월풍은 마환보를 펼치면서도 찌르는 듯한 살기와 도법의 흉맹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 자의 도법에는 조금도 인정이 없구나.'
마침내 그는 은근히 노기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암암리에 적혈십이장 중
제 오초인 적인패류(赤印覇流)를 수도(手刀)로 변화시켜 떨쳐냈다.
쨍!
"크윽!"
정녕 믿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은린마도는 제갈월풍의 수도에 맞아 뒤로 그대로 날아
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팽여룡은 왼쪽 어깨가 떨어져 나갈 듯한 타격을 받고 비명을
질렀다.
팽여룡은 어깨를 움켜쥔 채 뒤로 연속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으며 입가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필시 적지 않
은 부상을 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으으....... 네, 네 놈이!"
제갈월풍은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팽형, 사실 이렇게까지 손을 쓸 생각은 없었소. 다만 당신이 나를 너무 핍박하기에..
....."
"으웩!"
은린마도 팽여룡은 대답 대신 피를 한 모금 토해 냈다. 그의 안색에는 핏기라곤 한 점
도 없었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 땅에 떨어진 은린마도를 회수했다.
"두고 보자! 제갈....... 너의 성(姓)을 기억하겠다. 그리고 반드시 복수하겠다."
팽여룡은 원한에 찬 부르짖음을 남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 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지자 소접홍이 탄성을 지르며 깡총깡총 뛰었다.
"아! 제갈오빠, 너무도 멋졌어요."
기쁨이 큰 탓이었을까? 그녀는 제 풀에 겨워 제갈월풍의 품으로 뛰어들고 말았다.
'......!'
졸지에 그녀의 교구를 받아안게 된 제갈월풍은 당황을 금치 못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
었다.
'내게 만일 누이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소접홍은 배시시 웃더니 천진하게
말했다.
"봉(鳳)언니도 오빠 이야기를 들으면 틀림없이 감탄하실 거예요."
공평도 흔연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노부 정말 탄복했소이다. 평생에 이런 무공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이오."
그는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과연 일대 기인(奇人)이신 취선개(醉仙介) 노선배의 제자다운 솜씨요."
'맙소사!'
제갈월풍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렇게나 둘러댄 죄(?)로 그는 꼼짝없이 일면식도 없는
취선개의 제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와서 부인해봤자 더 우스운 꼴이 될 것만 같았다.
"별 말씀을요.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과 입술이 각기 다른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공평은 약간 어두운 기색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팽여룡이 원한을 품고 사라졌으니 머지않아 소협에게 곤란한 일이 닥쳐올 것
이오."
"곤란한 일이라면?"
"소협은 혹시 금검은도무영비(金劍銀刀無影飛)란 말을 들어 보셨소이까?"
제갈월풍은 검미를 치켜 올리며 반문했다.
"글쎄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공평은 자못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그것은 최근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최절정고수 삼인(三人)을 일컫는 말이오. 게
다가 그들은 서로 남매지간이오."
"......."
"첫째는 금검패황(金劍覇黃) 팽천룡(彭天龍), 둘째가 은린마도 팽여룡, 그리고 세째는
무영환녀(無影幻女) 팽수련(彭水蓮)이라 하오."
제갈월풍은 은근히 흥미가 당겼다. 강호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듣는 말마다 신기할 뿐
이었다.
"그들은 무공으로 치자면 강호의 노마(老魔)들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정도요. 사
실 은린마도 팽여룡의 무공은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서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오."
제갈월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세째인 무영환녀 팽수련은 무림제일의 경공술(輕功術)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녀
의 손에서 방출되는 무영산매비침(無影酸梅飛針)은 천하에 피할 자가 없소이다."
제갈월풍은 여기까지 듣고는 밝게 웃었다.
"하하하....... 소생은 잘못한 게 없으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오면 그때가서 적당히 대처하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공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제갈소협의 무공이라면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소이다. 그러나 역시
조심은 해야할 것이오. 어둠 속의 창칼은 피하기 어렵고, 한 주먹으로 열 주먹을 당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소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공대협."
이윽고 제갈월풍 일행은 다시금 갈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협로에 사람이 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공술을 전개해 달리기 시작했다.
악양(岳陽) 근교.
악양 시성(市城)에서 북쪽으로 십여 리 정도 떨어진 들판에 한 채의 낡은 사당(謝堂)
이 있었다.
해가 중천에서 약간 기울었을 무렵. 세 인물이 사당 근처에 나타났다. 그들은 다름 아
닌 제갈월풍 일행이었다. 그런데 막 사당으로 접근하려는 순간, 그들을 가로막는 그림
자들이 있었다.
휙! 휘익----!
도합 다섯 줄기의 인영들이 사당 안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뜻밖에도 모두가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누구냐?"
여인들 중 한 명이 아름다우나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소접홍이 재빨리 앞으로 나
섰다.
"저예요! 소접홍이에요."
그러자 가운데 여인이 반색을 했다.
"소사매로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늦었지?"
소접홍은 간단히 대꾸했다.
"뜻밖의 사정이 있어서요. 방주 언니께선 오셨나요?"
여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방주님은 급한 일이 있어 잠시 나가셨다."
"그럼 안에 누가 있지요?"
"천호단주(天狐壇主)께서 계시다."
"아!"
소접홍은 가벼운 탄성을 발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제갈오빠,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그 말에 다섯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갈월풍에게로 쏠렸다. 아울러 그녀들은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저런 미공자가 있었다니.......'
다섯 명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제갈월풍은 그녀들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실례하겠소이다. 낭자들."
여인들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은 뚫어져라 그의 얼굴을 바라볼 따
름이었다. 제갈월풍은 그녀들의 따가운 시선에 그만 얼굴이 뜨뜻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어 가볍게 헛기침을 발했다.
"험! 험......."
그제서야 다섯 여인은 정신이 번쩍 든 듯 길을 터주었다. 제갈월풍과 공평은 소접홍의
뒤를 따라 낡은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당 안은 의외로 정갈한 분위기였다. 그곳에
서 한 명의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이 홀로 앉아서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떨기 부용(芙蓉)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 세 가량, 옥같은 피부에 또렷한 오관과 성숙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그녀의 호수같은 두 눈에는 지혜가 가득 담겨져 있었고 섬섬한 아미(峨眉) 끝은
날카롭게 귓바퀴까지 뻗쳐있어 단호하면서도 정열적인 면모가 엿보였다.
소접홍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옥(玉)언니, 뭘 생각하고 계세요?"
노란옷의 여인은 비로소 명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아! 소사매구나. 언제 왔지?"
상강일룡 공평이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남(藍)낭자는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군."
여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머! 공노선배님께서 오셨군요."
제갈월풍을 보더니 여인은 눈을 반짝 빛냈다.
"이 분은?"
소접홍이 나섰다.
"언니, 이 분은 제갈오빠예요."
그녀는 즐거운 표정으로 재잘거리며 제갈월풍에게 여인을 자세히 소개시켰다.
다지선자(多智仙子) 남연옥(藍燕玉).
이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남연옥은 백안문에서 천호단주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두뇌가 비상하여 백안문
의 모사(謀師)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이제껏 백안문을 좌지우지하던 계획은 한결같이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미모로도 유명하여 백안문주인 백
안신녀 기옥봉(奇玉鳳)과 함께 당금 무림의 오대기녀(五大奇女)로 불리우고 있었다.
설명을 들은 제갈월풍은 포권지례를 취하며 내심 감탄해마지 않았다.
'미모와 재능을 한 몸에 갖추었다더니 과연 이 여인의 행동거지는 범상치 않구나.'
남연옥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록 평범한 서생차림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이 남연옥이 보기에 이 분은 틀림없는
일대기재(一代基才)임이 분명해.'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들은 야릇한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한동
안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남연옥의 심중에는 한 줄기 기이한 상념이 일고 있었다.
'내 지금까지 천하의 뭇사내들을 돌같이 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분은 처음이다. 사내
들 특유의 추한 본성(本性)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다니....... 어쩜 이다지도 맑고 순
수한 눈빛을 지녔을까?'
마침내 그녀는 제갈월풍에게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그로인해 그녀는 제갈월풍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때 소접홍이 짓궂은 음성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옥언니!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 보세요?"
"응?"
남연옥은 번쩍 정신을 차리고 그만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말았다.
"아! 내가 언제......."
그녀는 난처한 입장을 모면하기 위해 얼른 말을 돌렸다.
"참, 내 정신 좀 봐. 자, 어서들 앉으세요."
그녀의 권유에 따라 일행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당 안에는 포단이 의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다지선자 남연옥은 소접홍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그 동안의 경과
를 묻고 있었다.
소접홍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백안신녀 기옥봉의 명을 받고
기옥봉의 외숙부가 되는 상강일룡 공평을 청하러 갔던 일로부터, 공평을 만나 뇌화곡
으로 가다가 교룡방의 방해를 받아 지체하게 되었던 일 등을 자세히 얘기했다.
남연옥은 그때까지 조용히 듣고 있더니 다지선자라는 외호답게 얘기의 흐름 중에서 골
자를 캐내어 물었다.
"정말 혈해마존이 출현했단 말이냐?"
소접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해가 없었어요. 오히려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녀의 밝은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남연옥은 어두운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실로 걱정이로구나. 향후 무림은 더욱 무서운 폭풍에 휩쓸리겠구나. 천하의 대마존인
혈해마존까지 나타났으니......."
그 말에 제갈월풍은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생각이 깊은 만큼 기우(杞憂)가 많은 낭자로군. 후후....... 그러나 안심하시오. 낭
자. 혈해마존은 앞으로 절대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오. 아니, 오히려 그 피바람
을 잠재우려 할 것이오.'
그것은 제갈월풍의 진심이었다. 그는 혈해마존 염천월의 유지대로 가능한 살생을 배제
하고 정의와 화합으로 무림을 평정하려 결심을 굳힌 것이다.
소접홍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오다가 은린마도 팽여룡도 만났어요."
"그 자를?"
남연옥의 얼굴에는 언뜻 경멸이 떠올랐다.
"하지만 제갈오빠가 그 자의 콧대를 깨끗이 눌러버렸어요."
"무슨 소리냐?"
소접홍은 신이 나서 당시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아!"
남연옥은 얘기를 모두 듣고 난 후 새삼 경이의 시선으로 제갈월풍을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제갈소협은 대단한 분이셨군요. 실례지만 사문(師門)이 어찌 되시는지?"
소접홍이 얼른 그 말을 가로챘다.
"제갈오빠의 사부님은 바로 취선개 노선배님이에요."
남연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은린마도 팽가가 제압당한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제갈월풍은 실로 울지도 웃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것 참.......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이때 상강일룡 공평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 세우며 물었다.
"그런데 남낭자, 듣자하니 제왕문이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던데 대체 어찌된 영문이오?
남연옥의 얼굴에 금세 수심이 깃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교룡방보다야 본문이 한 수 위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교룡번신 당
백호, 그 자가 제왕문의 고수들을 포섭하고 보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예요."
"그렇다면 제왕문에서 움직이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오?"
"그들은 제왕문 외오당(外五堂) 당주 중 한 명인 적발혈혼마(赤髮血魂魔) 나조극(羅朝
極)과 제왕문의 장사(長沙) 분타주인 백면귀재(白面鬼才) 화문악(華文嶽), 그리고 그
의 수하인 음산칠귀(陰山七鬼)등 다수예요."
공평의 안색이 대변했다.
"적발혈혼마까지?"
제갈월풍은 공평의 반응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적발혈혼마란 대체 어떤 자입니까?"
공평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해 주었다.
"그 자는 이십 년 전에 은거했던 대마두로 지난 날 혈해마존 염천월에게 패한 후 사라
졌었소. 그런데 제왕문의 당주로 다시 나타나다니......."
남연옥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 자뿐 아니라 백면귀재 역시 대단한 고수예요."
"으음."
장내는 잠시 침중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제갈월풍은 국외자의 입장이기 때문에 더이상
참견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남연옥과 공평, 소접홍 등은 이후의 대책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별 뾰족한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우선 문주인 백안신녀 기옥봉이 부재중인데다가 백안문의 주요고수들이 채 집결되지
않은 상태라 달리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시간을 끄는 것만이 유일한 대책일 따
름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이곳에서 시간을 벌면서 방주님과 본문의 제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야만 해요."
남연옥이 막 말을 맺었을 때였다.
"아악!"
밖에서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어 한 가닥 음산한 외침이 그 뒤를 이
었다.
"백안신녀 기옥봉! 나와라---!"
사당 안에 있던 일행들은 아연실색했다. 그들은 급급히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사당의 뒤쪽.
그곳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십여 명의 흑의장한들에게 둘러싸여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
었다. 그 중 한 여인은 이미 어깨에서 핏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는 전신에 홍의를 입고 머리카락과 얼굴이 시뻘건 괴인(怪人)이 서 있었다. 그리
고 그의 옆에는 창백한 얼굴의 중년서생이 음침한 일곱 명의 청의노인을 뒤로 거느리
고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십여 명이나 되는 흑의인들을 거느린 삼십대 가량의 인물도 눈에 띄었
다. 제법 준수하나 두 눈에 음탕한 빛이 흐르는 자, 그는 흑의에 가슴에는 교룡(蛟龍)
의 수를 놓고 있었다. 제갈월풍은 장내의 상황을 면밀히 주시했다.
'음, 머리칼이 붉은 저 자가 바로 적발혈혼마이겠군. 중년서생은 백면귀재, 그 뒤가
음산칠귀겠지. 그리고 흑의장한들을 거느리고 있는 자는 물론 교룡방의 방주인 교룡번
신 당백호이겠고.'
그의 판단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당백호가 먼저 음산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흐흐흐...... 남연옥, 기옥봉은 어디 있느냐? "
다지선자 남연옥은 즉각 싸늘한 음성으로 맞받았다.
"당백호! 네 놈은 끝까지 백안문을 물고 늘어질 셈이냐? "
당백호는 코웃음쳤다.
"흥! 그 도도한 계집이 내게 굴복하지 않는 한은 그럴 것이다. 감
히 나 당백호의 청혼을 거절하다니, 이렇게 된 이상 무슨 수를 써
서라도 그 계집을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 "
남연옥의 두 눈에서 한기가 뻗쳐 나왔다.
"당가야! 꿈도 꾸지 말아라. 너같은 놈은 감히 문주의 신발을 신
길 자격도 없다. "
"뭣이? "
당백호는 대노하여 거칠게 외쳤다.
"어디 멋대로 주둥이를 놀려 봐라! 내, 네 년도 함께 첩으로 삼아
주마. "
"뭣이! "
남연옥은 극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억지로 화를 눌러 참았다.
< 第 10 章 終 >
제 1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