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을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
-인공지능, 나는 누구인가
달려라. 뛰어라. 달리는 나를 통해 풍경도 달리 보인다. 내가 움직이니 풍경도 움직인다. 텅 비었다고 여겼는데 충만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추하게 보였던 것이 아름답게 보여진다. 문제는 왜곡된 시선, 어그러진 신경인지회로다. 이를 제거하여 본다. 잘 나가는 예술가의 창의적 신경인지회로를 내 것으로 지정하여 받아들여본다.
지정 치료가 시작된다. 새로운 창의적 신경인지 매뉴얼, 이게 내 것이 된다. 시나리오 창작 영감이 솟구친다. 질 좋은 예술작품이 나올 것 같다. 꿈같은 이야기다. 내가 바뀌니 내 안의 예술가적 창의성은 최고조다. 어느 순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자가 되어 있다. 내가 공부했던 학과 인지도가 올라간다. 학과의 지표도 좋아졌다. 내가 다녔던 대학도 행정 당국의 지정 대상이 된다. 모든 대학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재단의 연극 <지정>(장우재 작, 박정희연출, 아시아문화재단 예술극장1)은 영화감독 지망생 제니의 심리치료 성공담을 다루고 있다. 지정 치료자의 성공 수기는 얼핏 만화 같은 이야기 색조를 담고 있다. 대상은 그대로인데 나의 신경인지회로가 문제다. 이는 거리두기 관극으로 이어지게 한다. 이 연극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찾기에 초점을 맞춘다. 자가 지정으로 내 안의 부정적인 요인이 제거된다. 내 안에 다른 이의 창의적인 신경인지회로와 정보들이 들어와 내 것으로 작동한다. 그 덕분에 나는 예술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린다.
문제는 나의 정체성 여부다. 타자의 신경인지회로가 작동하는 한 그게 과연 나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내 앞에 펼쳐진 삶, 내 앞에서 이루어진 예술가적 성공 궤적, 이게 내 정체성인가, 이게 내 삶의 본질인가. 이전의 나는 무엇인가. 이 공연은 이를 향한 질문을 매 장면 마다 숨겨 놓고 있다.
주인공 제니의 변신 전후 과정이 현미경식 화법으로 조망 보고 된다. 이는 영화예술 창조의 방식을 통해, 교수들의 학과 운영 회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제니의 지정 치료에 대한 각자의 긍정적 관점과 거부 내지 무시하려는 부정적 관점이 제기된다.
관객은 이를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 내지 부인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인물들의 토론과 충돌은 공연장 전체를 토론장 내지 담론의 현장으로 바꿀 수 있다.
이 연극의 매력은 보물 같은 메타 컨셉으로 사유와 상상의 풍요로움을 무한대로 펼쳐감에 있다. 지정 치료로 변화해가는 과정은 퍼즐 맞추기를 방불케 한다. 잦은 건너뛰기 구성, 예측 불허의 순간 던져진 복선과 암호, 관객은 수수께끼 풀기를 향해 이들을 꿰어 맞추고 조합 탐색하느라 정신없다. 공연은 풀릴 듯 풀리지 않도록 봉인 해제의 열쇠를 보여주지 않는다.
‘지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자, 제니의 모습이 바뀌어 있다. 이전의 삐딱한 예술학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극도의 예를 갖춘 자, 친절과 사회성이 넘치는 행동, 그 반복 축적은 이질감을 유도한다.
정다희 감독을 향한 제니의 포옹 역시 자신감과 생명력이 넘친다. 상대를 부러워하며 흠모해 왔던 자와 자기만의 예술가의 길을 걷는 자, 두 인물의 관계가 뒤집힌다. 성공을 누린 자와 박탈감에 젖어 있는 자, 초인공지능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난 자와 초인공지능에 얽매이기 싫어 떠나는 자, 두 인물 사이의 기묘한 비틀림과 길항 상황이 연출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 이전의 너와 지금의 너, 포옹을 주도하는 자와 포옹에 이끌려가는 자, 충만함과 말없음의 조우가 메타 사유와 상상의 촉수를 건드려 낸다.
관객은 직사각형 무대 양쪽에서 서로를 마주보는 방식으로 관극에 임한다. 무대엔 그 어떤 소품이나 구조물을 찾아볼 수 없다. 탄력적인 반응 연기, 상상 공간 확장, 기동력있는 장면 변환 연출이 이루어진다. 초인공지능 콜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로 등장한다. 그곳은 문제된 제니의 자아 내지 심연일 수도 있다. 검정 고글 썬글라스 차림 쿨리, 그의 안내에 따라 문제의 간판도, 자동차 소음도 편안한 이미지로 돌변한다. 문제 요인은 바깥 현실이 아니다. 그것 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신경 인식 체계다.
제니가 출품한 영화 <박씨전>, 문제는 구멍 뚫린 박씨의 얼굴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는 것, 저주의 마법에서 풀린 박씨 얼굴이 미인이었다는 스토리가 제니의 영화에선 비틀려진다. 신경인지 심리학적 관점에서 미인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신경인지 스펙 때문이라는 것, 때문에 보일 듯 하다가 결국 보이지는 않는 여주인공의 얼굴 처리, 이 메타 컨셉은 얼핏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내 자신의 불명료한 신경 인지 체계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조망 사유케 한다.
뚫린 구멍 사이로 투사된 강렬한 빛, 순간 드러난 투명 얼굴 영상, 내 신경인지회로가 바뀌니 오래전 꿈꾸던 새로운 현존 초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달리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본질을 접할 수 있다는 깨달음, 그 극점에서 ‘컷’하면서 달리는 활력 넘치는 제니의 모습이 또 다른 상상을 자극한다.
“인공지능, 나는 누구인가”. 관객은 자기 정체성 회복을 향한 철학적 사유와 반성적 쾌감에 젖어 공연장 문을 열고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