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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아저씨>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1

작성자시골선비|작성시간26.06.20|조회수28 목록 댓글 0

<바냐 아저씨>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1

-창문 퍼포먼스와 비유의 연극 철학

 

 

1. 창문 퍼포먼스와 비유의 연극 철학

 

창문 퍼포먼스가 철학성과 공연성을 확장케 한다. 창문 열기와 닫기 움직임, 이는 마음 문 열기와 닫기의 움직임과 비례한다. 창이 열리면 인생 창문이 열린다. 사유와 성찰의 창문 역시 열린다.

 

창문 안쪽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그림이 연출된다. 창문 바깥 세계에 여인이 다른 남자와 키스를 벌인다. 낯 뜨거운 상황, 아니 여인(마리나 쥬디나 분)을 또 다시 빼앗겼다는 느낌이 바냐(보리스 프로트니코프 분)를 엄습한다. 여인에 대한 애증 정서, 잠복된 핵폭탄, 그 뇌관에 불이 부쳐진다. 사람들 긴장한다. 창문 여닫기 움직임 역시 긴장미를 자아낸다. 마음이 닫혀진다. 마음이 혼란스럽다. 창문은 제 멋대로 개폐된다. 창문은 폐쇄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급박하고 강렬하게... 관객 역시 숨을 죽인다.

 

러시아 타바코프 극단의 <바냐 아저씨>(안톤 체홉 작, 민디우가스 카프바우스키스 연출, 김태훈 번역,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해외초청작)는 엇갈린 사랑의 함수를 날줄로, 존재론적 갈등 함수를 씨줄 삼아 인생 실존의 무대와 참 방향성이 무엇인가를 성찰케 한다.

 

왜 저 남자는 비틀린 어린애 행동으로 일관하는 걸까’. 남자(보리스 프로트니코프 분)는 불만투성이다. 일하기는 커녕 늘 술만 마신다. 시비를 일삼고 조롱과 비아냥거림이 행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남의 아내에게 무례한 행동을 벌인다. 주변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다. 이는 정상이 아니다. 바냐라는 저 인물, 왜 저럴까. 극은 수수께끼 이슈를 제공한다. 비밀 사연 캐기를 통해 극적 서스펜스 역시 고조된다.

 

대형 저택 실내외 구조물이 아르코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운다. 무대 우측엔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무대 좌우 중앙엔 여덟 개 투명 유리창 구조물이 설계되어 있다. 이 연극엔 차 마시는 그림이 자주 선을 보인다. 뒤이어 창문 여닫기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차 마시는 자, 그 내면 심리가 변할 때 마다 창문 여닫기 그림 역시 뒤바뀐다. 차 마시는 일상, 사람들에게 여유가 있고 웃음이 있다. 평화로움이 있고 나눔과 즐김이 있다. 이는 겉 풍경이다. 이면에 아픔이 있고 가슴앓이가 있다. 게으름과 나른함과 무료함이 꿈틀거린다. 기다림이 있고 인내가 있다.

 

노모 마리아(올가 바르네트 분)는 차를 마시며 브로슈를 읽어나간다. 당대 시대 문화를 반영해주는 브로슈 글감들, 브로슈 읽기는 늘 차 마시기와 더불어 행복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다. 허구인지 모른다. 노모와 주변 사람들의 이런 행동, 바냐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풍경이다. 바냐의 눈에 브로슈 기사는 허세 부리기의 수단으로 보인다. 브로슈는 위선 이미지로 보일 뿐이다. 브로슈 기사를 믿는 자와 불신하는 자, 갈등은 실랑이로 이어진다.

 

밤낮 없이 차를 준비하는 자, 기다림은 얼핏 지치고 무의미한 것 보인다. 기다림 사이로 일의 생명력이 연출된다. 기다림 사이로 나눔과 희망을 연출하려는 자가 있다. 유모 마리나(나탈리아 츄라프레바 분). 그녀는 이 저택의 불화와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집오리를 부르는 소리, 닭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의 반응 해법이다. 저건 무얼까. 추상의 해법 기호, 관객은 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한다.

 

차 마시기가 창문 안쪽 실내에서 펼쳐진다. 차 마시기가 실내 풍경에서 창문 바깥으로 확장된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찻잔이 오고 간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나눔이 이루어진다. 배우들의 신체 언어엔 리듬감이 배어 있다. 건강한 일상을 구가하는 자, 창문 오브제와 신체 오관이 자연스레 하나 된다. 마음이 자유로울 때 창틀 경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가의 노래는 삶의 찬가가 된다. 차를 나누며 꿈꾸는 자, 꽃꽂이는 환희의 송가로 변주된다.

 

각 인물의 내면은 창문 열림 규모 및 개폐 상황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는다. 내면이 어두워지면서 창문 닫는 속도 역시 빨라진다. 마음 문이 닫히자 창문 모두 닫힌다. 창문 오브제는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비유적으로 일깨워준다. 여덟 개의 대형 유리 창문, 그게 열리고 닫힌다. 어떤 때는 빠르게 연희 그림이 펼쳐진다. 또 다른 경우엔 매우 여리고 차분하다. 우울과 어둠의 양이 많아질수록 폐쇄 속도, 폐쇄의 크기와 분량 역시 빨라지고 많아진다. 반면 나눔과 교감 그림이 많아질수록 열린 창문 숫자가 늘어난다. 창문 퍼포먼스, 이는 인물의 내면 심리에 대한 비유다. 그 비례 극함수를 보기 시작하면서 사유의 묘미는 몇 배로 확장된다.

 

 

2. 분출과 억제의 연극 미학

 

아저씨(보리스 플로트니코프 분)가 아기 요람 그네에 파묻혀 유아 행동을 벌인다. 교수(올레그 타바코프 분)의 꼴을 접하기 싫다. 그와의 만남 자체가 고통 그 자체다. 그의 내면은 온통 어둡다. 요람에 누워 흐느적거리는 자, 차 마시는 자들과 달리 그는 허무만을 씹고 있다. 냉소와 미움, 허우적거림이 행동의 근저를 이룬다. 교수는 죽은 누이의 남편이다. 교수는 한 동안 연모했던 여인 엘레나마저 빼앗듯 데려가 살고 있다.

 

교수에게 매월 돈을 부쳐 왔다. 농장 빚을 갚기 위해 바냐는 일평생 일해 왔다. 한 때 교수를 존경했다. 한 때 교수의 글을 흠모해 왔다. 그러나 이 모두 무의미, 무가치하게 보인다. 일평생 그를 위해 헌신해 왔던 게 너무도 원통하다. 남는 게 허무와 배신감이다. 병들고 퇴물이 되어 돌아온 교수 세레브라코프, 더군다나 그 자가 이 집에 오면서 모든 게 엉망이 되고 말았다. 모두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점심 무렵에 아침을 먹어야 한다. 저녁 무렵에야 점심을 먹어야 한다. 희망의 빛을 볼 수 없다.

 

교수를 보면 속이 뒤집힌다. 엘레나(마리나 쥬디나 분)를 보면 더욱 화가 난다. 막가는 식의 행동, 남의 아낙에게 구애를 벌인다. 펄쩍 뛰며 거부 정서를 토로하는 여자다. 그럴수록 애증 정서는 커진다. 사건이 터진다. 창문 너머에서 의사가 여자에게 기습 키스를 벌인 것이다. 다른 남정네의 키스를 받아들인다. 사지가 굳는다. 말문이 막힌다. 분출과 억제의 길항 작용, 그 끈이 끊어질 분위기다. 폭풍 전야의 전운, 긴장이 무대와 객석을 채우고도 남는다.

 

차는 술로 대체된다. 차 마시려는 자의 만남은 가식과 위선 행동처럼 보인다. 술을 통해 답답함이 해소되는가. 움직임이 격해진다. 언어와 행동 역시 조야해진다. 노골적 정서가 분출된다. 터트림은 공격 이미지로 이어진다. 자학의 강도, 냉소와 조롱의 색조 역시 짙어진다. 모두가 자는 심야 시간, 춤추는 자, 술 취함과 고성방가를 벌인다. 욕정을 주체 못하는 젊은 여인, 손 방석을 들고 나른함과 가녀림을 구가하는 여인, 이런 모습을 볼수록 속이 뒤틀린다. 배신 정서는 조롱과 가학 정서로 변주된다. 모친은 바냐를 힐난한다. 이런 분위기가 싫다. 이런 자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지옥이다.

 

무례와 천박함이 겉 행동이라면 갈등과 자학 심리는 바냐의 내면을 채운다. 여인은 늙고 병든 남편에 대해 무기력하다. 남편의 신경질, 그 자의 혐오스런 행동은 보는 자 모두를 짜증나게 만든다. 교수는 주변 사람들을 챙길 줄 모른다. 그의 병적인 삶이 주변을 감염시킨다. 그는 이웃의 가슴앓이를 보지 못한다. 욕망이 충만한 젊은 여인, 젊은 아내를 방치한 늙은 남정네, 욕설과 의심 그리고 가학성 핀잔 강도는 높아만 간다.

 

무언가 중대 발표가 있다. 앞마당에서 서성이는 자들, 계단 층계에 앉아 기다리는 자들, 간이 의자1,2,3 주변을 맴도는 자들의 풍경이 연출된다. 창문에 기대어 차분함을 연출하는 자, 앉았다가 서 있다가 빙빙 의자 둘레를 돌며 불안을 주체 못하는 자도 있다. 설렘 속에서 사모함을 주체 못하는 자들, 답답한 현실을 타개할 묘책이 발표되는 것인가. 은근히 기다리려는 자들, 그러나 환상은 깨진다. 기대감은 무너진다. 인간은 늘 자기 내면의 우주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발표자 역시 자신의 문제만을 바라볼 뿐 이웃들의 문제를 돌아보지 못한다. 상의와 협조라는 미사여구 언어, 현학적인 교수 이미지가 연출된다. 이는 가짜다. 위선이다. 극단의 이기, 극단의 욕심이 숨겨져 있다. 집을 팔겠다는 선언, 다이너마이트 뇌관에 불이 붙는다.

 

삶의 터, 현존의 처소, 이를 송두리째 팔아넘긴다는 발상, 흥분 안할 자가 어디 있을까. 이 집과 영지 구입을 위해 진 빚, 그 빚을 갚기 위해 온 삶을 다 바쳐 왔는데……. 도무지 감당하기 힘들다. 그 감당 못할 충격, 언어가 꼬인다. 발걸음, 움직임도 꼬인다. 시선 및 손놀림이 정상이 아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자, 어딘가를 향해 달려간다. 총소리 들린다. 도망쳐 나오는 자, 총을 들고 추격하는 자, 긴박감이 연출된다. 말리려는 자와 흥분하는 자, 탈출구를 찾지 못해 꽁꽁 얼어버린 자, 총을 다시 겨누며 돌진하는 자, 다시 빵 소리 울린다. 모두가 혼비백산이다. 무너지는 자는 누굴까. 도망자인가, 총 쏘는 자인가.

 

스릴과 서스펜스가 고조된다. 무대는 역동성을 발한다. ‘어허, 무슨 큰 일 났네. 저러다가 저 가족들, 완전 망가질 터인데…….’ 부조화 그림이 예기치 않는 상황으로 발전된다. 관객은 긴장과 스릴을 맘껏 즐긴다. 줄다리기 양상이 뒤집힌다. 쫒아가려던 자가 울부짖으며 무너진다. 왜 그럴까.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자, 자신이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자라는 자책감에 그는 무너진다. 또 다른 색깔의 울부짖음이 이어진다. ‘, 내가 살상자가 되다니’, ‘이런 충동을 제어 조절 못하는 짐승 같은 자는 아닐까…….’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모르핀 약병을 감춘 채 자살을 꿈꾸는 자, 사다리에 오르는 자, 말리려는 자, 실랑이가 막판 연극 에너지를 발한다.

 

여림과 느림, 그 전반적 템포가 와해된다. 카오스, 격렬 이미지, 얼마의 정적과 침묵, 후회하는 자, 공포를 주체 못하는 자, 깨달아가는 자, 잠잠해 하는 자, 이에 대해 직접적인 반응을 하는 자, 은폐물이나 무대 측면에서 등장하는 자, 간접적인 반응을 하는 자, 공연은 막판 역동성과 정태성이 교차한다. 긴장의 강도가 최고조에 이를 때 작가는 묘사의 아름다움을 빼놓지 않는다. 삶의 깊이와 그 비밀을 깨달아가도록 유도하는 관조의 미학이 이 작품 공연의 기본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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