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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냐 아저씨>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2

작성자시골선비|작성시간26.06.23|조회수37 목록 댓글 0

<바냐 아저씨>를 통해 본 창의적 연극 컨셉2

-비틀림에서 뒤집기로의 상상력 

 

 

1. 엇갈림의 날줄, 비틀림의 씨줄

 

체홉의 <바냐 아저씨>는 인생에서 늘 엇갈림과 비틀림을 통찰케 한다. 엇갈린 사랑 방정식은 체홉의 또 다른 명작 <갈매기>에서 볼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관통하는 실존 테마다.

 

엘레나를 향한 바냐(보리스 플로트니코프 분)의 구애, 그러나 엘레나는 젊은 의사 아스트로프(드미트리 나자로프 분)에게 관심을 갖는다. 소냐는 아스트로프를 사모한다. 모두가 각자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단 한 번도 쌍방통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늘 그들의 사랑은 엇갈린다. 일방통행이다. 인생의 본질, 바로 이런 엇갈림과 비틀림의 연속일까. 소냐는 못생긴 얼굴 때문에 괴롭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녀는 이로 인해 끙끙 앓는다. 엘레나 역시 괴롭다. 소냐의 러브콜을 자신이 직접 전해 주어야 한다. 상대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이다. 속내 감추기의 딜레머, 그녀의 독백 언어엔 죄책감으로 가득하다. 갈등은 늘 파편 변주음으로 그친다. 또 다른 이웃 인물들의 딜레마가 이어진다. 가식과 가짜, 가면과 위선을 허용하는 자들, 이 때문에 술을 마시고 속내를 터트려 본다. 러시아 민중들의 터트리기 소통 방정식, 그 질펀함이 새롭게 변주된다.

 

이 연극 연주의 또 다른 매력은 묘사와 변주의 아름다움에 있다. 늘 내면의 어둠만을 바라보는 자들, 절망과 자학 스펙트럼이 공감 영역을 확장시키고 동시에 다채로운 반응 정서로 변주된다.

 

자신이 쓸모없다며 빛을 잃어가며 자학하는 자, 이런 바냐(보리스 플로트니코프 분)의 절망은 그 주변 대다수의 인물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환자의 진료에 최선을 다하였지만 노동자들은 죽어간다. 의사는 자신의 무기력을 한탄한다. 스스로의 무능에 그는 절망한다. 교수 역시 병들어버림과 늙음을 한탄한다. 젊은 아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자책감으로 인해 그는 더욱 괴롭다. 엘레나 역시 남편의 통증과 질병을 고쳐줄 수 없음에 절망한다.

 

나는 그 누구도 사랑할 자격도, 사랑할 가치도 없는가. 나는 무의미한 존재, 쓸모없는 존재인가. 이게 인물 모두의 공통된 딜레마다. 주절거림, 어두운 내면을 향한 독백, 각 그림엔 시적 감수성과 사실성이 우러나온다. 인물의 딜레마, 부정적 색조, 연민의 색조, 공감과 동정의 색조 까지 우러나오면서 체홉의 묘사는 관조의 아름다움마저 다채롭게 경험케 한다.

 

술 취함, 술주정, 심야 시간과 어둠, 극단의 고요, 괴성을 지르며 노래하고 춤추는 자들, 진정 즐거워서 춤추는 것인가, 아니면 우울과 절망을 감추려는 역설적 행동인가. 자기 우울, 자기 폐쇄, 만남은 술 취함으로 그치지 않고 예측 불허의 돌발 구애 행동으로 터져 나온다. 이는 바냐에게 그리고 의사 아스트로프에게도 공히 적용된다.

 

의사 아스트로프(드미트리 나자로프 분), 의자를 목에 걸고 계단을 내려온다. 인간이 사물로 표현된다. 간이 의자에 짓눌린 자, 그만큼 그는 질식 직전에 있다. 숲그림 도면을 들고 엉기적거리며 그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시선은 늘 주변 사물들과 교감을 이루지 못한다. , 이상세계에 대한 상징인가. 그 숲이 인구 급증으로 파괴된다. 자연 본래의 생명력, 자연의 복원 능력, 생태 회복 능력을 갈구하여 본다. 이미 파괴되어 버린 숲과 자연, 이를 알리는 풍경 도면은 당사자의 와해된 내면 심리에 대한 비유 처방이다.

 

의사로서의 정체성, 교수로서의 정체성, 농장 관리자로서의 정체성, 아내로서의 정체성, 각 인물들은 자기 본질을 상실한 지 오래다. 모두가 허무의 늪 안에서 허우적거린다. 회복하기에 때가 너무 늦은 것일까. 공연은 막판 다양한 변주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허무에서 회복 및 자기 긍정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희미하게나마 우러나온다. 각각 자신의 고유한 실존 한계선에서 허우적거리는 형상들, 그러나 혼돈과 절망의 변주음 사이로 한 줄기 빛의 언어, 빛의 형상이 자리한다. 이는 어떻게 펼쳐질까.

 

외투, 모자, 가방을 들고 떠나가려는 자들, 작별을 준비하기 위해 무대 우측 현관에서 기다리는 자들, 카오스 뒤의 코스모스, 혼돈 이후의 질서, 절규와 외침에 뒤이어 고요와 차분함이 연출된다. 화해, 떠남의 이미지, 아쉬움, 더 잘할 걸..., 이는 증오와 반발의 방금 전 이미지와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분노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조야하게 대하고 짐승처럼 절규하던 자, ,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 속절없음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다양한 틈새 공간에서 사유의 맛을 유도하는 연출 작법이 선을 보인다.

차분함이 의미를 발한다. 열림과 교감 가능성을 이제야 배우고 떠나가려는 자들, 사랑의 열망, 그 회한과 후회의 정서, 무대 전면 좌측 방향 공간으로 퇴장하는 자들, 몸의 언어로 반응하고 보고하는 자들, 제한된 무대 공간임에도 수많은 내밀 공간이 빚어지고 되살아난다.

 

다수의 배웅 속에 떠나는 자들이 있다면 홀로 떠나는 자도 있다. 상처를 남기고 가는 자가 있는가 하면 상처를 보듬고 가려는 자도 있다. 인생의 허무를 배우고,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고, 그 뒤끝을 알아차렸기에 이제 인생을 어둠과 밝음 모두를 통째로 조망할 수 있음을 알아가는 자, 이는 무대 위에 남겨진 소냐(이리나 페고바 분)와 바냐, 그리고 유모 마리나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 관조 철학을 관객 역시 함께 배우고 공유할 수 있어 마냥 실존 철학자가 된 듯하다.

 

이제 일을 해야지...’, 장부를 뒤적거리는 자들, 잉크를 찍어 장부 정리를 하며 억지로나마 생기를 되찾으려는 자들, 창문 너머 안쪽 중앙 거실, 이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바 냐 (쓰고 있다) ‘2일 기름 20푼도... 216일 또 기름 20푼도... 메밀국수가.....’ (사이)방울 소리 들린다.

마리나 떠났어요.

(사이).

소 냐 (돌아와서 촛불을 탁자 위에 놓는다) 떠났어요...

바 냐 (주판을 가지고 계산한다) 합계가... 15... 25...

소냐 앉는다, 쓴다.

마리나 (하품을 한다) 오호, 하느님...

찔레긴 발끝으로 조용히 들어와 문턱에 앉아 낮게 키타를 친다.

 

바냐 (손으로 소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냐, 난 정말 괴롭구나! ,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네가 알 수 있다면!

소 냐 어떻게 하겠어요. 또 살아야지요! (사이) 아저씨, 우리 살아나가요. 길고 긴 낮과 밤의 연속에서 끊임없이 살아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을 참고 견디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나이 든 후에도 남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때가 오면 그땐 우리는 편하게 죽어서 , 무덤 저쪽에 가서 그동안 괴로웠던 것과, 울었던 것, 힘들었던 것들을 이야기 하도록 해요. 그러면 하느님도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거예요, 그 때는 아저씨, 아저씨도 저도 밝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삶을 보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기쁨에 넘쳐서 지금의 불행을 감동과 미소로 뒤돌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편안히 쉬게 될거예요. 아저씨, 저는 믿어요, 열렬히, 뜨겁게 ..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그의 손에 얹은 채, 지친 목소리로) 우리는 편히 쉬게 될 거예요!

 

찔레긴 조용히 기타를 친다.

 

우리는 편안히 쉬게 될 거예요! 우리는 천사의 소리를 듣고 온통 보석 같은 하늘을 보게 될 거에요, 그리고 세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충만한 용서 속에 사라져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의 삶은 마치 어머니처럼 평온하고, 부드럽고, 달콤하게 될 거예요. 전 믿어요, 전 믿어요……. (손수건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불쌍한 정말 가엾은 우리 바냐 아저씨, 아저씨 우시는 군요…….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아저씨는 평생 행복이라는 걸 모르셨지요. 허지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냐 아저씨, 조금만 기다리세요…….

 

바냐의 옆모습, 일에 몰두하는 소냐의 그림, 일과 독백 사이로 어둠을 극복하려 하고 긍정과 밝음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 교차한다.

 

거실 창문이 하나 둘 닫힌다. 바깥 덧창문마저 닫히기 시작한다. 스텝들이 직접 나와 덧창문을 설치하며 닫아나간다. 인생의 문, 누군가를 향해 설치되고 열려지다가 다시 닫힌다. 인생의 장막 역시 이 처럼 열리고 닫힌다. 일 하다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자, 잠 들어가는 자, 손으로 팔베개를 한 자, 책상에 엎드러지는 자, “편히 쉬게 될 거예요, 편히 쉬게 될 거예요소냐(이리나 페고바 분, 황금마스크 최우수 여배우상)의 독백 언어로 극은 마무리된다. 아픔, 인생무상, 홀로 내팽개쳐진 정서,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일을 몰두하려는 자들, 열려진 덧창문 사이로 서서히 쓰러지고 잠들어가는 이미지가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무대 중앙 핀 조명 사이로 소냐의 마지막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일하다 지쳐 쓰러져 잠드는 소냐, 한 줄기 빛이 그녀에게 집중되다가 아웃된다. 조명 아웃과 더불어 덧없는 인생 그림 역시 사라진다. 연극은 한편의 시로 마무리된다. 침잠의 맛, 사유의 묘미가 무궁무진하게 우러나온다.

 

 

2. 뒤집기 이미지 연출과 무대 변용의 무한성

 

연극의 미학은 행동의 미학에서 출발한다. 행동으로 승부를 걸어야 극은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이 극에선 갈등과 대립의 행동 그림이 절제 내지 생략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연극은 실패한 연극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인생이란 우주를 공시적 관점과 통시적 시선으로 조망하게 한다. 관극 포인트는 묘사 그림에 대한 통찰과 관조다.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그림들, 사유하면 할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온다.

 

작가는 뒤집기와 관조의 묘미를 염두에 두고 극 설계를 시도한다. 줄다리기 구조는 공연 전체의 배면에 숨겨져 있다. 농장 관리자로서 성취 의도, 여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의도, 이 모두 반동적 상황과 만나면서 무너진다. 작가는 이를 플롯의 일부로만 설정할 뿐이다. 대신 이미지 묘사 과정에서 뒤집기 처방이 이루어진다. 공연 초반 부정적 이미지가 공연 후반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된다. 문제 인물은 공감의 인물로 변용된다. 혐오 인물은 동정 인물로 전환된다. 가식 인물은 진솔함의 인물로 변주된다.

 

교수는 공연 중반과 말미에 연민과 긍정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삶의 무의미성에 젖어 절망하는 의사가 자연 예찬론자로 등장한다. 숲을 통해 자연의 샘솟는 생명력을 복원하고픈 철학이 그를 통해 구체화된다. 이는 체홉의 자연 철학이다. 인물의 행적과 캐릭터는 늘 상반된 두 관점으로 조망되면서 생명력을 얻어간다.

 

, 저 인물에게 저런 긍정적인 캐릭터, 공감할만한 아픔과 갈등 심리가 있었단 말인가

 

삶을 한 측면으로, 한 시선으로 조망하고 판단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어수룩한 것인가를 이 작품은 깨닫게 한다교수 세레브라코프(올레그 타바코프 분)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그러나 교수는 늙고 병든 자로 등장한다. 세월의 무게와 질병의 굴레,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는 일순간 연민 대상으로 클로즈업된다. 그는 총을 겨눈 바냐를 용서한다. 젊은 아내의 정서적 일탈 행동, 그는 이를 모르는 척하며 의연함을 드러낸다. 인생 관조자, 차분함의 이미지가 우러나온다. 하얀 모자와 코트를 입고 걸어가는 품새, 모두와 화해를 한다. 바냐(보리스 플로트니코프 분)와 화해의 작별 키스를 나눈다. 예의와 절제, 품격 높은 언행이 연출된다.

 

엘레나 역시 무위도식, 나약함과 위선 이미지를 벗는다. 교수의 아내로서 그리고 소냐의 계모로서 절제와 중용을 회복하려 한다. 귀부인의 품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위선과 가짜라는 편견을 뒤집어엎는다. 관객은 편견에서 벗어난다. 거리두기 관극 전략 효과다. 체홉만의 독특한 묘사 사실주의 전략이다.

 

작가는 지배 계층, 상류층 인물을 형편없는 인물로 격하시킨다. 그 대신 소외된 자들에게서 인간적 사랑과 기다림의 아름다움을 빚어 넣는다. 얼굴이 곰보인 찔레긴은 달아난 아내를 이해하려 한다. 그는 명예를 선택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유모 마리나(나탈리아 츄라프레바 분), 철학자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기다림의 이미지, 섬김과 일에 몰두하는 이미지가 트레이드 마크다. 이른 아침에도, 늦은 심야에도 그녀는 교수의 시중을 들기 위해 늘 대기한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 처럼 할퀴고 다툰다. 이를 숱하게 보아오면서 그녀는 인생 철학자로서의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

 

구구 구구구....’,

꽥 꽥 꽥...’

 

사람들의 모순된 행동에 대해 유모는 철학적 선문답 기호로 반응한다. 겉눈과 속눈을 갖고 반응을 한다. 계속 움직이는 손놀림, 뜨개질, 차 끓이기, 차 마시려는 자 섬기기, 그리고 답답해하는 자의 마음을 달래기, 그녀는 최고의 치유 능력을 발한다. 그녀의 거리두기 언어와 비유 해법, 관객 역시 관조와 사유 그리고 변증법적 성찰 묘미를 깨닫는다.

 

러시아 타바코프 극단은 차 마시기 풍경 연출 및 창문 퍼포먼스 연출을 통해 무대 변용 및 공간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각 움직임에는 리듬감이 살아 있다. 동시에 삶의 깊이와 철학을 성찰케 한다. 풍경 창문 오브제를 넘나들며 펼치는 퍼포먼스, 인생의 창문, 철학의 창문 열기가 시작된다. 비유 오브제의 창의적 활용이 심미성과 철학성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공연 설계 문법을 탐구하려는 자들을 주목케 하고 흥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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