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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고난 중의 위로/시편 19:49-56

작성자송달웅|작성시간10.10.29|조회수60 목록 댓글 0

                                                 고난 중의 위로

 

시편 19:49-56                                                                                                   2010.10.31.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찬송가 415장 1절만 다 같이 부르고 말씀을 듣겠습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볕 심히 뜨겁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아멘

 

이 찬송 시는 엘리자베스 세실리아 더글러스 클레페인(1830∼1869)이라는 영국의 여류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1868년에 지었습니다. 그리고 1872년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의 가정에서 애독하던 신앙 잡지 ‘가보’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 찬송 시에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은혜를 ‘십자가 그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클레페인 시인은 사람들에게 ‘햇빛’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도우며 살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갔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다보면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합니다. 여기에 계시는 성도님들 중에도 고난 없이 사신 분은 한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던 동방의 의인인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해보면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난은 성도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연단과 함께 믿음의 성숙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에 힘들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더 굳게 하는 계기로 삼아 더 큰 축복을 받아내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고난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난을 당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엄청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해방되어서 불과 사흘 길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복지를 무려 40년 동안이나 걸었습니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사막이었습니다. 물도 없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입니다. 광야에는 불뱀과 전갈이 있습니다. 사나운 아말렉도 있었습니다. 이 광야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숱한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그들에게 커다란 축복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제 49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로마 마르틴 루터 신부가 일으켰습니다.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오래 된 교회였으나 너무나 타락해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말 한 마디가 성경보다, 하나님보다 위대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교회는 성경도 하나님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못 된 짓을 다 하면서 백성을 무참하게 짓밟아 괴롭혔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면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세 번 놀랍니다. 영국의 런던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고색 찬연한 모습과 수많은 거대한 무덤을 보고 놀랍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노트르담 성당의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고 놀랍니다. 로마에서는 웅장하고 거대한 베드로성당을 보고 놀랍니다. 이 어마어마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거대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죄를 사면해준다는 면죄부를 팔아서 가난한 백성들의 피를 빨아 그 어마어마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이에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잘못 된 교회의 95개 조항을 지적하고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인간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된다는 주장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입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이 세 가지가 종교개혁의 중심 사상이었습니다. 다 같이 따라서 하십시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아멘. 네, 감사합니다.

 

루터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모든 고난을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감당했습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교회를 개혁하고 변화시켜서 오늘날 우리가 속한 개신교 기독교의 기틀을 놓았습니다. 루터는 자신을 죽이기 위하여 쳐 놓은 고난의 그물 속에 말없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루터가 죽음을 각오한 철두철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끊임없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승화시켜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입니다.

 

그러면 루터가 고난을 이기고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이것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키포인트입니다. 본문 49절-50절 말씀입니다. 우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믿음은 오직 말씀으로 지켜집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이 안 생깁니다.

 

고난당할 때,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없으면 소망은 사라지고 맙니다. 성도는 말씀으로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때, 낙심과 절망이 찾아올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고난당할 때 가장 힘든 것은 사람들의 조롱입니다. 나의 고난을 보면서 누군가가 은근히 기뻐하며 비웃습니다. 루터도 조롱을 당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왜 그런 일을 당해?” 하고 비웃습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느냐?”고 비웃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는 불신앙적인 말이기 이전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믿는 네가 왜 그 모양이냐?’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속이 상합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합니다. 이때 고난당하는 성도가 숨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본문 51절-52절 말씀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고 말 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위로는 누구의 말을 들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위로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목회에 나름대로 성공한 나이 많은 목사님이 불의의 사고로 외동딸을 잃었습니다. 지금까지 교인들의 장례식을 수없이 많아 치렀습니다. 그때마다 좋은 말로 위로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목사님의 외동딸이 죽고 나니 다른 사람이 하는 위로의 말이 한 마디도 귀에 안 들어왔습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 위로는 말로 되는 것이 나이구나!’ 상당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목사님 자신이 자신을 위로할 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스스로 위로가 가능할까요? 그것은 오직 주님의 옛 규례들과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여러 상황과 여건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 믿음만 포기하면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교회를 포기하면 눈에 보이는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도들은 주님과 교회를 섬기기 위해서, 오직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의 이익을 포기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의 행위가 어리석은 행위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 결단 속에는 죽음을 이기는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초대교회에서처럼 믿음을 지키다가 직장을 잃는다거나, 가족에게 버림을 당한다거나, 수모와 모욕을 당할 일이 없습니다. 중세의 루터의 시대와 같이 어마어마한 종교적 권위로 성도들과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때는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는 죽을 각오로 살아가야만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생활근거를 위협하는 고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죽음을 각오로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순교적인 각오가 아니면 믿음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늘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려면 평안하기를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하게 믿는 성도에게는 여러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이기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말씀이 믿음 지키게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성도를 이끄시고 고난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의 믿음으로 어떤 고난도 성도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에는 하늘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믿음으로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도의 생활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성도는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가 고난을 피하는 것은 주 예수님을 피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이 오면 “아멘” 하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몸소 고난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도 고난을 달하면서 교회를 개혁했습니다. 우리도 고난을 이겨야 신앙생활을 개혁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주님이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우리 교회에 고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고난을 이기고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 날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물도 없고 풀도 없는 광야, 인적도 드물고 험한 사막 길로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낮에는 불볕더위로 밤에는 강추위에 시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호렙에 이르렀을 때에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율례와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왜 십계명의 말씀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암시였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이 없었다면 어떻게 광야 40년을 참고 견디며 지나왔겠습니까. 아마 이스라엘에게 말씀이 없었다면 그들은 가나안 진군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광야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며 고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주님에게 사탄이 와서 시험합니다. ‘너 배가 고프지? 이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어봐라.’ 아주 달콤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이 말씀이 없이는 배고픈 고난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한 것은 자신의 의지도 또 누구의 도움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광야와 같은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고난 중의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가끔 우리를 광야로 쫓아내십니다. 광야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은 믿음의 시험대입니다.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고난을 이기기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이기는 길은 오직 믿음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고난을 피하면 더 큰 고난이 찾아옵니다. 고난을 정면으로 만나야 합니다. 모든 고난을 가슴으로 안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아멘.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서 “고난 중의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출생의 고난부터 죽음의 고난까지 있습니다. 자라고 배우고 시집장가 가고 직장에 다니고 병들고 죽고 하는 생로병사의 고난이 연속적으로 있습니다. 이런 고난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고난은 무더기로 몰려옵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지 마세요. 고난을 즐기세요. 네? 제가 웃긴다고요? 마음속으로 어떻게 고난을 즐길 수 있냐고 묻는 성도가 있습니다. 고난을 즐기는 방범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삶의 푯대로 삼고 “고난 중에 위로” 받으면서 어떤 시련이 고난으로 오더라도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송달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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