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마지막은 시작이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 남기고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끝을 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어쩌면 아무도 끝을 본 사람이, 혹은 볼 사람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끝’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쯤 나와서, 만일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말이 아닐까 한다.
“진정한 끝?…, 저 끝의 마지막에는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것도 잔인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이요.”라는 말 말이다.
그 모든 ‘시작(출발)’은 끝이라는 종점(위치)을 향해서 간다. 때로는 끝(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가기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을 위해 ‘시작’했느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끝’은 흐름의 일정한 위치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종점을 잃고, 목표를 잃고 끝까지 가다가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왜 끝을 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끝이 있으니 간다’는 사람도 많다. 반드시 ‘끝내줄려고’만 한다.
끝을 보는 것은 좋다. 그런데 문제는 ‘쉽게 끝을 낸다’데 있다. 더 갈 수 있는데도 끝을 쉽게 보려고 하는 것 같다. 더구나 금방 끝이 나오는 것만을 찾는다. 끝이 내 눈앞에 어른거려야만 도전을 한다. 반드시 끝을 봐야 속이 시원해 한다. 때론 끝을 마음대로 정해 놓고는 ‘질’은 따지지도 않고 ‘양’만 채우고는 끝냈다고 만족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직 반쯤도 가지 않았는데 끝이라고 말을 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정은 생략한 채 끝만 보려고 한다.
길이 있어 가고, 가다보면 끝이 있을 뿐이지 반드시 끝을 보아야 만이 성공한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더구나 성공 여부는 끝에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그 길 자체가 바로 성공을 나타내기도 한다. 모든 끝이 나만을 위해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 나만의 끝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쓰는 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끝은 개인의 마음가짐에 따라 늘 유동적이다.
이처럼 개인에 따라 끝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또 끝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높이와, 길이가 다르다. 그래서 어디에 기준을 정할 지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끝을 두지 않는 것은 목표를 없애는 꼴이 된다. 목표가 아니더라도 휴식을 빼앗는 꼴이고 시작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끝’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끝이 없으면 ‘끝끝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끝이 없으면 끝이 없어서, 끝날 때까지 끝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시작을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의 시작은 끝이 있어야 가능한데.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은 끝장을 보아야 한다면서 끝 다음에 오는 그 어떤 것도 용납을 하지 않고 달리기도 한다. 과연 가능한가.
그러나 더 넓게 생각해 보면 ‘끝의 다음이 처음’인 듯도 하다. 끝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부분 그 다음이 시작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하고 끝이다”고 단호하게 말을 하는 사람도 얼마가 지나면 그 누군가와 ‘시작’하고 있다. 대학에 떨어져 자신의 삶이 끝난 것처럼 좌절하는 사람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것은 끝이 아님을 알게 된다. 연필을 쓰다보면 점차 달아져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 이는 곧 그 연필로서는 끝이 되지만, 그건 또다른 시작을 낳는다. 연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연필 그 자체로 보았을 때 달아짐은 곧 ‘끝’이지만.
나를 위해 너를 끝내는 것은 너를 죽이는 것이다. ‘끝이 시작’이 되는 것은 내가 승리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뿐 아니라 하찮은 미물의 경우도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시작을 위해 꽃을 끝내고, 음식을 끝내고, 연료를 끝낸다. 죽는 이상 모든 것은 끝이다.
이는 지구가 존재하는 하나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기도 하다. 개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죽고 사는 문제가 처음이고 끝이지만,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하나의 흐름일 듯도 하다. 즉, 나는 이 인류를 이어가는 하나의 끈인지도 모른다.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동일하게 떠오른다고 해도 어제가 31일이면 오늘은 1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모든 것에 시작과 끝을 두었다. 그렇지만 그 끝은 끊김이 아니라, 긴 과정의 한 경계선이기도 하고 단조로움을 막는 휴식이기도 하다.
1m, 2m, 3m로 세다가 얼마 지나 999m 다음에 1000m가 되지만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1km가 된다. 1시간, 2시간, 3시간이 이어져 24시간 다음에는 ‘하루’로 센다. 25, 26시간은 없다. 24시간 다음의 한 시간을 합하면 25시간이지만 시간은 24로 끝을 맺는다.
끝과 시작,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다. 어떤 것을 끝냈다고 그 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끝이 없으면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이상 끝은, 끝은 있되 그것은 바로 시작이어야 진정한 끝이다. 그 진정한 시작은 또한 준비이어야 하고 그 준비는 바로 시작을 낳아야 한다. 이러한 시작과 끝의 흐름을 우리 주변의 문제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자.
우선, 달력에 적혀있는 요일의 문제이다. 언제부턴가 달력의 요일 순서가 ‘월→화→수→ …’의 순서에서 ‘일→월→화→ …’의 순서로 바뀌었다. ‘노동’을 하고, 그리고 ‘쉼’이었던 것이 휴식을 취한 연후에 출발한다는 의미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은 ‘금→토→일→월’로 표기된들 하등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일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개인의 노동 성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일을 서둘러 하고 남는 시간을 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일단 쉬고 나서 한꺼번에 일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쉬는 시기를 어느 때로 하느냐의 문제일 뿐, 그 일 자체가 그로 인해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쉼과 노동은 동전의 앞뒤와 같기 때문에 쉼만 있고, 노동만 있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쉬기 위해서 노동을 하느냐, 노동을 위해서 쉬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달력의 요일 순서가 이제 와서 바뀌어진다고 한들 ‘더 쉬는 것도 아니고, 더 노동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등 상관할 바는 아니다. 일과 쉼은 늘 연속적이기 때문에 이제는 쉼이 먼저냐, 노동이 먼저야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쉬느냐, 어떻게 노동하느냐의 질의 문제이지 양과 시기의 문제는 아니다. ‘일을 하는 것 같이 놀고, 노는 것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과연 적절한가’의 문제는 근무 환경과 관련된 것이다. 쉼과 노동을 하나로 본다면 이는 근무 환경이 대단히 좋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한다. 일을 하면서도 ‘나는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이 즐겁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하는데 있어서의 즐거움의 문제가 게으름을 피우고 시간만 때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쉼과 일’, ‘일요일이 먼저냐 월요일이 먼저냐’ 하는 것은 다만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일종의 조삼모사(朝三暮四)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의 기분을 다소 좋게 하기 위해,(사실 일요일을 앞에 둔다고 해서 별도로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별 어려움 없이 누가 시켰다고 할 수도 없이, 언제부턴가 일요일이 달력의 앞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서구적 문화의 유입의 문제나 기독교적인 문화의 배경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다분히 이기적 발상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을 하기 전에 쉰다는 것이 인간 존중의 문제라기보다는 노동을 하기 전에, 출발을 하기 전에 정신을 무장하고 결집을 다지고, 약속을 하자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일을 하고 쉬는 문화이다. 마라톤을 하기 전에 쉬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것이다. 정신적 다짐의 시간이다. 수많은 전략을 구상하는 시간이다. 쉼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 기능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라톤을 하고 나서 쉬는 것은 아무 구속이 없다. 그래서 쉬고 싶어한다.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조건 쉬고 싶어한다. 쉬는 데 무슨 전략이 필요하겠는가.
달리기 전의 쉼과 달린 후의 쉼은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부담의 문제이다. 누구나 학생 시절에 매를 맞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매를 맞기 전과 매를 맞은 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알 것이다. 매는 먼저 맞는 것이 좋다. 그래야 쉬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매를 맞기 전에 놓여진 시간은 쉬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시간이다.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것은 먼저 매를 맞는 것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다음으로 숫자를 통해 살펴보자.
배열의 문제이다. 초등학생용 수학 노트를 보면 ‘1→2→3→ …’의 순서가 언제부터인가 ‘0→1→2→ …’로 바뀌었다. 0이 1의 앞에 오는 것으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인 0에 새롭게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1이 0에게 선두 자리를 빼앗긴 셈이다. 선두를 단순히 빼앗겼다는 것 이상으로, 1이라는 가치가 전에는 시작, 즉 노동의 출발이라는 것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녔었다. 그런데 그 앞에 0이 들어서서 선두가 되어버린 것이다. 0이 그 노동을 위한 준비 단계로 엄연한 가치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 가치는, 우리가 달리기에서 보면 “준비~, 시작”이라고 할 경우에 준비가 바로 0에 해당하고 시작이 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요일의 가치와 0의 가치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있어서는 준비 과정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준비”라는 예비 신호를 하지 않고 바로 “시작”이라는 신호를 하는 것은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사람이 준비를 마친 그 순간, 바로 시작을 외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시작”이라는 신호 전에 출발을 하면 또한 부정이 된다. 그래서 ‘준비 없는 시작’은 공정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여기서의 준비는 ‘행사 당일의 문제’이다. 행사를 위한 연습으로서의 많은 시간을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성질이다.
1 다음에 이어지는 2의 가치가 1의 다음이고 또 3의 연결이라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수의 나열은 같은 의미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0은 ‘무엇의 다음이고 1의 연결’이라는 말은 성립이 잘 되지 않는다. 0은 1부터 이어지는 모든 다음 수의 준비일 뿐이다. 이는 일요일이 월요일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화요일, 수요일, …, 토요일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 만큼 0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0이 없이는 1이 없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0이 없이는 그 다음의 모든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미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0은 개인차가 심하다. 1부터 이어지는 모든 수는 일정한 순서가 있어서 그에 해당하는 일정한 부피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0은 1에 이르기 전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그 부피를 늘릴 수 있다. 오늘을 위해,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1년 아니 10년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바로 0은 하루가 되기도 하고 1년이 되기도 하고 10년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 0은 개인의 능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수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0의 기간이 길다고 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일에 맞는, 노동에 맞는 준비여야 하기 때문이다. 종이와 종이를 붙이기 위해 못을 사용할 필요가 없듯이, 일의 양과 질에 맞는 적당한 수준의 0을 가진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자세이다. 하지만 이 준비의 단계에서도 당사자의 능력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동일한 일을 동일하게 준비해도 그 결과는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만일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인간의 삶이 불공평할 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가치는 그 무엇과의 동일함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과의 차별 속에서 더 빛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0과 10의 차이를 살펴보자.
우리는 ‘일, 십, 백, 천, 만’이라는 단위로 셈을 한다. ‘영, 십, 백’으로 단위를 세지 않는다. 0은 셈 속에는 필요 없는 숫자이다. 그래서 ‘일, 십, …’이다. 그렇다면 10은 0과 분명히 다른 그 무엇이 있다. 앞에서 논했듯이 0은 모든 수에 두루 적용되는 불특정 숫자이다. 하지만 10은 1부터 시작해서 최초로 도달한 1차적인 목표의 숫자이다. 그 자체로 일단 완결성을 지닌 개념이다. 그러면서 백의 출발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0과 10은 엄연히 다른 의미로 쓰인 듯하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바로 한 살이 된다. 1년이 지나면 두 살이 된다. 즉 0살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시기이다. 그래서 1년의 개념인 한 살을 바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먹는 것이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시기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즉 사람으로 완성된 상태부터 나이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로 세상에 나오기 이전에 이미 인간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존엄을 보다 폭넓게 해석한 이치이다. 이 경우도 0은 독립된 출발 이전을 인정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만큼 0은 가치 있는 것이고 반드시 있어야 할 과정이다.
‘아홉 수에 걸렸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를 의미함과 동시에 완성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타내는 전제로 하는 말로, 그것은 완성을 위한 마지막 진통의 시기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9는 어떤 단위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 마지막은 10이어야 한다. 10개를 하나의 묶음으로 하는 우리의 문화는 1부터 10까지를 하나로 묶는다. 하지만 0부터 시작을 할 경우에는 9로 마감하는 것이 열 개가 되기는 한다. 그러더라도 9는 반드시 10을 뒤에 두어야만 그 소임을 다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초등학생의 수학 공책에는 0부터 9까지밖에 없다. 10은 어디로 가버렸다. 10을 0과 같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잘못이다. 0부터 시작해서 9 다음에 분명히 10이 있어야 한다. 편의상 10이라는 숫자가 ‘1과 0’의 결합이기 때문에 일종의 반복이라는 판단에서 그리했겠지만 10을 0과 동일한 셈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일 듯하다. 수학 노트에 0부터 써야 한다면 마지막은 9가 아니라 10으로 끝나야 한다. 이는 우리 문화이기 때문이다.
0이 다른 숫자와 같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이나 간에 표지에 해당하는 쪽은 쪽 번호를 넣지 않는다. 속지부터 1번이다. 표지는 1쪽이 아니다. 표지는 0쪽인 것이다. 그렇지만 0쪽이라고 번호를 매기지 않는다. 번호가 없어도 그 자체로 큰 몫을 하기 때문이다. 0은 1의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행복의 출발이 1이라면 그 행복을 위해 투자한 모든 시간이 바로 0이다.
그렇지만 0의 몫을 따로 번호 매기지 않는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 모두 0의 연속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0의 연속, 끊임없이 삶의 여러 문제들과 싸우는 과정, 이것이 모두 0인 것이다. 그리고 그 0은 10을 향해 가는 것이다. 1부터 9는 10을 향한 과정일 뿐이다. 그 10이 어떤 경우에는 24시간이라는 이름으로 완성을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60분이라는 것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길게는 12개월도 되고, 환갑이 되기도 한다. 무엇을 완성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10은 그만큼 가깝게 혹은 멀리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0과 10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0의 가치가 10에 버금가는 것이고 10의 결과가 0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어서 그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서로 버금가는 것이지만 그 역할은 이렇게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의 음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도, 레, 미, …’로 시작해서 통상 마지막이 ‘도’로 끝난다. 그러나 이는 ‘도, 레, 미, 파, 솔, 라, 시’까지가 한 음계(일정한 음의 순서로 음을 차례로 늘어놓은 것. 동양 음악은 5음 음계, 서양 음악은 7음 음계를 기초로 함)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도’는 처음 도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7음계로 한 ‘도, 레, 미, 파, 솔, 라, 시’로 끝나면 왠지 허전하다. 이미 습관이 그리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완전하지가 않다. ‘도’로 시작해서 ‘도’로 끝나야 완전한 느낌이 든다. 음악적 이론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무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앞의 ‘도’는 시작이라는 의미인 듯하고, 뒤의 ‘도’는 끝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중복이라기보다는 있어야 할 가치, 그 가치는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이 되는 흐름인 듯하다.
그러다가 끝에 온 ‘도’ 그 다음에, 계속해서 이어지는 ‘레’를 만나면 ‘도’는 또다시 출발이 된다. 아니 출발이라기보다는 이어주는 하나의 흐름, 끈이 된다. 굳이 시작이니, 출발이니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일요일이 시작을 의미하면서 아울러 끝이 되듯, 0이 시작이면서 아울러 10을 잉태하듯, ‘도’도 시작이면서 동시에 끝이 된다. 이러한 흐름이 없이 시작과 끝이 반드시 모든 것에 명확히 존재한다면 우리의 삶은 아마 대단히 부담스러울 것이다. 1년을 마감하는 의미로 망년회를 갖는 것은 출발과 마감을 분명하게 긋고자 하는 의도이다. 회갑에 걸게 잔치를 하는 것도 그러한 이치이다.
출발이 중요하다. 시작이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출발하기 이전의 준비이다. 이것이 바로 일요일이고 이것이 바로 0이다.
밤과 낮의 문제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다.
잠을 자고 나면 아침이 온다. 밤이 지나야 낮이 온다. 상쾌한 아침은 편안한 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어느 교사가 학생에게
“너희들 좋은 말로 할 때 웃어라, 안 웃으면 혼날 줄 알아!” 하고 말을 한다면 과연 그 웃음이 자연 발생적으로 나오게 될까. 혼이 나지 않기 위해서 웃는다는 것은 그 웃음이 웃음일리 없다. 쓰디쓴 표정일 뿐이다. 상쾌한 아침이 포근한 잠에서 이루어지듯 웃음은 웃기는 그 상황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근한 잠은 또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활기찬 하루의 노동에서 온다.
그래서 밤과 낮은 누가 먼저랄 것이 없다. 동전의 앞뒤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우선 필요로 한 것은 출발로서의 1이 아니라 1을 위해 0을 갖는 것이다. 0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0이 없이 오직 10만을 위해 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남이라는 성스러운 의식과 그 산모의 고통이 없이는 탄생의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시작이 있고 그리고 반드시 끝이 있지만 끝이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시작을 위한, 끝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준비만 잘 하면 끝이 좋다. 준비가 잘 되었으면 시작이 순탄하다. 이러한 흐름이 바로 끊임없는 또다른 준비가 된다. 그 시작과 끝에 들어 있는 준비, 이 준비가 바로 성공할 준비인 것이다. 준비된 사람을 이 사회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