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제] 현대시

[파이널 실전모의고사] 박목월, 「나무」 / 나희덕, 「땅끝」

작성자구렛나루|작성시간16.09.13|조회수2,371 목록 댓글 0

[31~3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을 지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와 보였다.

온양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박목월, ‘나무

()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 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 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 나희덕, ‘땅끝

 

31. (), ()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환되고 있다.

역설적인 표현을 통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비유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중의적인 의미의 시어를 사용하여 의미를 확장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여 화자의 현재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32. ()<보기>와 같이 정리할 때, <보기>에 대한 이해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A에서 화자는 여행 중에 늙은 나무를 수도승처럼 말이 없는 인격체로 인식한다.

B에서 화자는 떼를 져있는 나무를 과객처럼 유유자적한 존재로 파악한다.

C에서 화자는 산마루에 멀리 서 있는 나무를 통해 삶의 외로움을 드러낸다.

D에서 화자는 내 안에 뿌리를 펴에서 나무라는 외부 존재를 내면화하게 된다.

A~D의 과정을 통해 화자는 묵중하고 침울하며 고독한나무를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33. <보기>를 참고하여 ()의 화자를 이해한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인간은 외부 세계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경험하는 공간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창조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세계와 삶에 대한 의식을 재정립하여 살아간다.

 

산 너머라는 외부 세계에 있는 고운 노을의 아름다움을 동경했다.

어린 시절 땅끝을 찾아가 자신이 나비처럼 연약함을 인식했다.

지금은 살면서 겪게 되는 위기를 막바지땅끝이라고 생각한다.

땅의 끝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땅끝에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다시 여기에올 것이라 예상한다.


=

[31~33] 박목월, 나무/ 나희덕, 땅끝

() 박목월, 나무

http://blog.naver.com/ongsimjang/220479394774

http://blog.naver.com/kyorai/120060456009

http://zlgi.tistory.com/76

http://9594jh.blog.me/220478998409

해제 이 시는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을 전개하면서 여행 중에 본 나무의 모습에서 받은 각각의 인상을 수도승, 과객, 파수병으로 비유하고 있다. 수도승의 묵중함과 과객의 추움, 파수병의 외로움이 화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삶에 대한 인식을 미적으로 표현한 산문시로, 자연물에 감정을 투영하여 삶이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성찰을 드러내고 있다.

주제 나무를 통한 삶의 성찰과 깨달음

내용 흐름

유성에서 ~ 서 있었다.: 늙은 나무의 묵중함

다음 날 ~ 추워 보였다.: 나무의 춥고 침울한 모습

공주에서 ~ 외로와 보였다.: 산마루에 서 있는 외로운 나무

온양에서 ~ 기르게 되었다.: 화자의 마음에 뿌리 내린 나무의 모습

 

() 나희덕, 땅끝

http://9594jh.blog.me/208158219

http://blog.naver.com/yhoon30/220742424029

http://blog.naver.com/vocapia/220099666608

해제 이 시는 땅끝을 소재로 하여 좌절과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실제 지명을 의미하기도 하는 땅끝, 육지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극한 상황을 의미한다. 화자는 땅끝에서 절망하지 않고, 위태로움 속에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는 역설적 인식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있다.

주제 땅끝에서 발견한 절망에 대한 역설적 인식과 극복 의지

내용 흐름

1: 어린 시절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차고 오름.

2: 험한 세상에서 느끼는 절망감

3: 절망의 끝에서 깨달은 삶의 아름다움

 

31 작품 간의 공통점, 차이점 파악

정답이 정답인 이유 ▶▶

()는 나무를 수도승’, ‘과객’, ‘파수병으로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는 땅끝을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으므로 이 가장 적절하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에는 여행을 함에 따른 공간의 이동이 나타나 있고, ()에는 과거(1)-현재(2)-미래에 대한 추측(3)’이라는 시간의 흐름이 나타나므로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환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에는 역설적인 표현이 없으며, ()에는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에만 역설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적절하지 않다.

()에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시어가 없으며, ()땅끝은 구체적인 지명으로서의 땅끝과 삶의 막바지를 뜻하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에만 중의적인 의미의 시어가 사용되었으므로 적절하지 않다.

()에는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는 표현은 없으며, ()에는 1연에서 과거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있고, 2연에서는 현재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대비하여 화자의 현재 상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공통점으로 적절하지 않다.

 

32 화자의 정서, 태도 파악

정답이 정답인 이유 ▶▶

화자는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며 본 나무들을 어설픈 과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나무를 외롭고 쓸쓸한 이미지를 지닌 존재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를 속세를 떠나 조용하고 편안하게 사는 유유자적한 존재로 파악 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화자는 늙은 나무를 묵중한 수도승으로 인식하여 인격을 가진 존재로 파악하고 있으므로 적절하다.

화자는 나무를 파수병으로 인식하는데 나무가 외로와 보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무가 외로워 보이는 것은 화자가 감정을 나무에 투영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정서를 드러낸 것이므로 적절하다.

화자의 내면에 나무가 뿌리를 펴는 중이다. 이는 나무라는 외부의 자연적 존재를 화자의 내면으로 끌어들여 내적으로 인격화한 것을 표현한 것이므로 적절하다.

화자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화자가 나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러한 동일시를 통해 화자는 나무와 흡사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33 외적 준거에 따른 작품 감상

정답이 정답인 이유 ▶▶

2연에서 화자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다고 하였다. 즉 나비는 아름다운 존재로, 화자는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삶의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나비가 연약한 존재임을 뜻하는 시어가 아니므로 적절하지 않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

1연에서 화자는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기 위해 그네를 타고 발을 굴렀다. 이때의 산 너머는 외부 세계와 교섭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볼 수 있고, ‘고운노을이라고 하였으므로 아름다움을 동경했다는 것은 적절하다.

2연에서 화자는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 들어오는 막바지인 땅끝에 서 있다. 이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몰려 있다는 뜻으로, 화자는 이를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된다고 표현하고 있다.

3연에서 화자는 땅의 끝에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화자는 위태로움속에 아름다움’, 즉 희망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이는 화자가 공간의 의미를 재창조한 것이므로 적절하다.

3연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희망을 발견한 화자의 삶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낸 것이다. 또 살아가면서 삶의 막바지에 몰리게 되어도 다시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므로 적절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