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조언 만언사
어와 벗님네야 이 내 말씀 들어 보소.
세상살이 마음이 그 아니 복받칠까.
평생을 다 살아도 다만 백년이라
하물며 백년도 반듯 살기 어려운데
인생은 순간이오 하찮은 존재로다.
하늘과 땅 사이로 지나가는 손이로다.
빌려온 인생인데 꿈같은 몸 가지고서
남자가 해야 할 일 평생을 다 하여도
풀끝의 이슬이라 오히려 덧없거든
어와 내 신세야, 지난 세월 헤아리니
반생이 채 못 되어 이제 겨우 서른 넷
지난일 생각하고 지금 일 헤아리니
되돌리기 어려워라, 오르내림도 많았구나.
남들도 그러한가. 나 홀로 이러한가.
아무리 내 일이라도 나 역시 알 수 없네.
한숨 탄식 절로 나니 섬에서의 슬픔이라.
부모님 날 나실 때 죽은 나를 나으시니
부귀공명 하게 될지 외딴 섬에서 고생하게 될지
하늘이 도왔는지 신선의 처방인지
하루 만에 죽은 아이 홀연히 살아났네.
평생 운명 점을 치니 건강하게 오래 산다 하였는데
귀양갈 일 생각했고 이별할 일 생각했나.
때때옷 곱게 입은 노래자를 본받으며
부모 앞에 재롱떨며 시름없이 자랐는데
어와 기구하다 나의 운명 박명하다.
십일세에 모친 잃고 슬피 울다 기절하니
그때에 죽었으면 지금 고생 아니 하리.
한번 살 세상 두 번 살아 즐거움을 보려는지
큰 슬픔에 눈물 흘린 명절이 몇 번인가.
십년 길러주신 외가 은공에 호의호식 그렸으랴.
잊은 일도 많다마는 받들지도 못하였네.
새어머니 들어오셔서 어질게 키우셨으니
맹자 모친 본받아 일마다 덕을 베푸셨네.
증자 모친 베틀 던짐은 날 믿음이 아니었나.
눈밭에서 죽순 돋아 지성이 감천이요
가난해도 부모봉양 효자의 도리로다.
입신양명은 글쓰는 이의 영광이로다.
행세하는데 으뜸의 일 글밖에 또 있는가.
동사고문 사서삼경 당음장편 송명사를
자세히 숙독하고 글자마다 외웠으니
읽기도 하려니와 글짓긴들 아니하랴.
삼월 봄바람의 꽃 버들과 구월 국화 단풍 아래
시인 화가 벗이 되고 음풍영월 일 삼으니
당시의 격식이오 송명시의 재치로다.
글과 글씨는 한 가지라 어느 것이 다르겠나
짓기도 하려니와 쓰기를 아니하랴.
화려한 벽 글씨와 사치로운 공자의 병풍 글씨
왕희지의 글씨인가 조맹부의 글씨인가.
한 때는 재동이라 일컫더니 유명무실하여
배필을 얻지 못해 잠못 이뤄 생각하니
혼인이 늦어가다 이십 년에 맞은 부인
태도 바르고 얌전하여 여인의 법도 알았으니
내조에 어질어 성가시킬 징조로다.
어진 백부 아래 화목하게 모여 살아
집안 식구 한데 모여 기쁨슬픔 같이 하니
살림 걱정 누가 할까, 집안 가난 나 몰라라.
입신양명 길을 찾아 권문가에 몸을 맡겨
장군집과 정승집에 비장 기실처럼 드나들며
호탕하게 즐기는 것은 소년들의 놀이로다.
화려한 차림을 뽐냄은 나도 잠깐 하오리다.
예전 마음 전혀 잊고 미친 흥이 절로 난다.
귀한 벗과 가벼운 벗 모두 다 어울린다.
무릉장대 천진교도 명승지로 알려졌다.
삼청운대 광통교인들 놀이처가 아니런가.
매일매일 좋은 경치 술집마다 찾아가서
가득한 술 좋은 안주에 여인에게 빠져들어
아름다운 여인의 청아한 노래와 멋진 춤을 희롱할 떼
호화로운 풍류 생활 신선이 부러우랴.
모든 일에 관심 없다 홀연 양심 일어나네.
소년 놀이 그만하자 부모 근심 깊으시다.
화려함을 자랑마라 공부가 늦어간다.
옛 마음 다시 생겨 하던 공부 고쳐하여
밤을 새워 낮을 이어 쉬지 않고 하는구나.
부모봉양 하려던지 내 몸 위한 일이런지
수삼 년을 견디어 내니 무식함을 면하였다.
어와 바랐으랴 꿈결에나 바랐으랴.
어악원에 들어가서 궁궐의 문을 열어
몸 디미니 천한 내 몸 궁궐 근처 바랐으리
비단옷을 몸에 감고 귀한 음식 베고 있어
부귀에 쌓였으며 화려함에 잠겼어라.
벼슬길에 서너 일을 겸하게 되었구나.
나라 일을 잘못하여 복이 다해 화가 생겨
벼슬에서 쫓겨나 칠일 옥중에서 지내오니
곱던 의복 색 바래고 좋은 음식 맛이 없네.
끝없는 임금 은혜에 슬픔이 기쁨 되네.
어와 과분하다 임금 은혜도 과분하다.
두 궁궐일 맡긴 은혜 생각할수록 과분하다.
비단옷 좋은 음식 부귀영화 다시 얻고
장안 넓은 길로 화려하게 다닐 적에
친척이 아니어도 가까운 친척처럼
여기 가도 손을 잡고 저기 가도 반겨하니
입신도 하였다 하고 양명도 이루었다.
모든 일이 뜻대로니 임금 은혜 모를소냐.
충성이란 목숨을 다하는 일이러니
몸을 부숴 나라에 보답해야 하거늘
갑자기 부귀하니 상서롭지 못해
쓸모없는 말이 되어 버림받게 되었구나.
일어나면 망하게 되고 흥하면 슬퍼지니
다 오르면 내려오고 가득차면 넘치나니
호사다마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세상에 많은 죄 지어 꽃밭에 불 지른 듯
푸른 하늘 맑은 대낮에 천둥 번개 급히 치니
혼백이 달아나서 인사불성 되었구나.
옷도 무거운 약한 몸에 이십오 근 칼을 쓰고
족쇄를 찬 후에 감옥에 들었는가.
나의 죄를 헤아리니 산과 같고 바다 같다.
아깝다 내 일이야 애닯다 내 일이야.
평생 한마음으로 충효를 하려했는데
한 번 일을 그릇하여 불충불효 다 되었다.
이제 와 후회해 뉘우친들 무엇하리.
등잔불 치는 나비 저 죽을 줄 알았으면
어디서 신하가 죄 짓자 했겠냐마는
큰 액이 부닥뜨리니 눈조차 어둡구나.
마른 섶을 등에 지고 불속으로 들어간다.
재가 된들 뉘 탓이리, 살 가망 없다마는
내 목숨을 귀히 여겨 섬으로 보내시니
어와 성은이야 갈수록 망극하다.
나룻터에 배를 대어 부모친척 이별할 제
슬픈 눈물 한숨소리 막막하고 근심스러워
손잡고 이른 말씀 잘 가거라 당부하니
가슴이 막히는데 대답이 나오겠나.
취한 듯 미친 듯 눈물로 하직이라.
강 위에 배 떠나니 이 때에 이별이로다.
산천이 근심하니 부자가 이별함이로다.
노 젓는 소리에 흐르는 배 살 같으니
긴 강이 어느덧 가로 막겠는가.
바람결에 우는 소리 긴 강을 건너오네.
행인도 눈물지니 내 가슴 미어진다.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 엎어지니 애고 소리 뿐이로다.
천지에 울부짖어도 가야할 길 아니갈까.
범 같은 관차들은 빨리 가자 재촉하니
어쩔 수 없어 말에 올라 앞길을 바라보니
청산은 몇 겹이며 녹수는 몇 구비인가.
넘어가도 산이거늘 건너가도 물이로다.
석양은 언덕을 넘고 빈산이 적막한데
녹음은 우거지고 두견이 피 토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불여귀는 무슨 일인가.
네 일을 말하는가 내 일을 말하는가.
가뜩이나 허튼 근심 눈물에 젖었어라.
넓은 물로 이어지니 내 근심 먹음은 듯
수풀에 이슬 맺히니 내 눈물 뿌리는 듯
굼 뜨는 말 재촉하니 앞 참은 어디인가.
높은 재 반겨 올라 고향을 바라보니
아득한 구름 속에 갈매기 날 뿐이로다.
경기도 다 지나고 충청도 다다르니
계룡산 높은 산을 엉겁결에 지나쳤다.
고을마다 관문 받고 고을마다 점고하여
‘은진’을 넘어가니 ‘여산’은 전라도라
‘익산’ 지나 ‘전주’ 들어 ‘성시산림’ 들어보니
반갑다 남문 길이 ‘장안’도 그대로다.
‘백각전’ 펼쳐있으니 ‘종각’도 지나는 듯
‘한벽당’ 깨끗한데 아침 해가 높았구나.
‘금구’, ‘태인’, ‘정읍’ 지나 ‘장성’ 역마 갈아타고
‘나주’ 지나 ‘영암’ 들어 월출산을 돌아가니
만이천봉이 허공에 솟아 있는 듯
한 나라의 명산이라 경치도 좋다마는
내 마음 아득하니 어느 겨를에 살펴보리.
‘천관산’을 가리키고 ‘달마산’을 지나가니
낮밤 가리지 않고 몇 일만에 해변으로 왔단 말인가.
바다를 바라보니 파도도 세차구나.
끝이 없는 바다요 한계 없는 파도로다.
세상이 생겨난 후 하늘땅이 광대하거늘
하늘 아래 땅만 있는 줄로 알았더니
지금 볼 양이면 천하가 다 물이로다.
바람도 쉬어 가고 구름도 멈춰가네.
나는 새도 못 넘는데 저기를 어찌 가자는가
때마침 서북풍이 내 길을 재촉하는 듯
뱃머리의 흰 깃발 동남쪽을 가리키니
천석 싣는 대중선에 쌍돛을 높이 달고
건장한 도사공이 뱃머리에 높이 서서
지곡총 한 곡조를 어사와로 화답하니
마디마다 처량하다 귀양가는 이 마음 어떠할까.
머리 돌려 서울 보니 뜬 구름이 해 가린다.
나가는 길 어인 길인가 무슨 일로 가는 길인가.
불로초 구하려고 삼신산을 찾아가니
동남동녀 아닌데 방사 서시 따라가랴.
동정호 밝은 달에 악양루 오르랴나
소상강 궂은 비에 조상군 하려는가.
전원이 황폐해지니 귀거래 하려는가.
농어회 살쪘으니 강동거 하려는가.
다섯 오랑캐 속에서도 자기 몸을 구하려는가.
긴 고래 잠깐 만나 하늘로 오르려는가.
부모처자 다 버리고 어디로 혼자 가나.
우는 눈물 연못 되어 큰 바다에 보태는구나.
어디서 검은 구름 미친 바람 무슨 일인가.
산악 같은 높은 물결 뱃머리를 둘러치네
크나큰 배 조리 젓듯 오장육부 다 나온다.
임금 은혜로 남은 목숨 다하게 되겠구나.
초한 싸움 한나라의 장군 기신이 되려니와
서풍 해지는데 멱라수에 빠져죽는 굴원은 원치 않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운명
죽고 사는 일을 어찌할까.
삼일 밤낮 죽다 살아 노와 닻을 내려니
물길 천리 다 지나고 추자섬이 여기로다.
섬안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아주 심해
사면을 돌아보니 날 알 이 뉘 있을까.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니 물소리라
벽해와 상전이 나뉜 후에 모래 모여 섬이 되니
하늘이 만들어낸 지옥이 추자섬이라.
바닷물로 성을 싸고 구름으로 문을 내어
세상과 끊어졌으니 인간이 아니로다.
풍도섬이 어디메뇨 지옥이 여기로다.
어디로 가잔 말고 뉘집으로 가자는가.
눈물이 가리니 걸음마다 엎어진다.
이 집에 가 의지하려니 가난하다 핑계하고
저 집에가 의지하려니 사정있다 거절하네.
이집 저집 어느 집이 적객주인 뉘 좋다고
관청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맡았으나
관차에게 못한 말을 만만한 내게 하네.
세간 그릇 흩어 던지며 역정 내며 하는 말이
“저 나그네 헤아리소. 주인 아니 불쌍한가.
이집 저집 잘사는 집 한두 집이 아닌데
관리들은 뇌물 받고 손님네는 모진 말 들어
구태여 내 집에 연분 있어 와 계신가.
내 살림살이 가난한 줄 보시면 아니 알가.
앞뒤에 논밭 없고 물속에서 생계 이어
앞 언덕에 고기 낚아 윗동네에 장사 가니
삼망으로 얻은 보리섬은 믿을 것도 아니로세.
처자식 있어 세 식구도 먹고 살기 어렵거든
양식없는 나그네는 무엇 먹고 살려는고.”
집이라도 설 수 없어 기어들고 기어나며
방 한 칸에 주인 들고 나그네는 잘 데 없네
갈대 자리 한 잎 주어 처마 밑에 거처하니
찬 땅이 눅눅하고 짐승도 많기도 많네.
한 발 넘는 구렁이 한 뼘 넘는 푸른 지네
좌우로 둘렀으니 무섭고도 징그럽다.
서산에 해지고 그믐밤 어두운데
남북촌 두세 집에 솔불이 희미하다.
어디서 슬픈 소리 내 근심 더하는가.
이별하는 배 떠나니 노 젓는 소리로다.
눈물로 밤을 새워 아침에 조반드니
덜 담은 보리밥에 된장 덩이 한 종지라
한 술 떠서 보고 큰 덩이 내어놓고
그도 저도 아주 없어 굶을 때도 적지 않다.
여름날 긴긴 날은 배고파 어려워라.
의복을 돌아보니 한숨이 절로 난다.
남쪽 여름 찌는 날에 빨지 못한 누비바지
땀이 배고 땀이 올라 굴뚝 막은 멍석인가.
덥고 검은 것은 그러해도 냄새는 어이하리
어와 내 일이야 가련하게 되었구나.
손 잡고 반기는 집 내 가지 않았는데
등 밀어 내치는 집 구차하게 빌어 있어
좋은 밥과 반찬 어디 가고 보리밥에 소금 간장
비단옷 어디 두고 누더기를 입었는가.
이 몸이 살았는가 죽어서 귀신인가.
말하니 살았으나 모양은 귀신이다.
한숨 끝에 눈물 나고 눈물 끝에 한숨이라.
돌이켜 생각하니 어이없어 웃음 난다.
이 모양이 무슨 일인가 미친 사람 되었구나.
어와 보리 익는 가을 되었는가.
앞산 뒷산이 황금빛이로다.
남풍은 때때로 불어 보리 물결치는구나.
지게를 벗어 놓고 밭에서 일하는
한가하게 보이는 농부 묻노라 저 농부야.
밥 위에 보리술을 몇 그릇 먹었느냐.
청풍에 취한 얼굴 깨어난들 무엇하리.
해마다 풍년드니 해마다 보리 베어
마당에 두드려서 방아에 찧어 내어
일부는 밥을 하고 일부는 술을 빚고
밥 먹어 배부르고 술 먹어 취한 후에
배불리 먹고 격앙가를 부르나니,
농부의 저런 즐거움 이런 줄 알았다면
공명을 탐하지 말고 농사를 힘쓸 것을,
백운이 즐거운 줄 청운이 알았으면
꽃을 탐하는 벌과 나비 그물에 걸렸으랴.
어제는 옳던 일이 오늘이야 그른 줄 아나.
뉘우치는 마음 없지는 않겠지만
범 물릴 줄 알았으면 깊은 산에 올라가며
떨어질 줄 알았으면 높은 나무에 올랐으랴.
천둥칠 줄 알았으면 잠깐 누각에 올랐으랴.
배가 깨질 줄 알았으면 배에 쌀을 실었으랴.
실수할 줄 알았으면 내기 장기 두었으랴.
죄 지을 줄 알았으면 공명을 탐하였으랴.
산진메 수진메와 해동청 보라매가
깊은 숲에 숙여 들어 닭과 양을 차고 날때
아깝다 걸리었다 두 날개 걸리었다.
먹기에 탐이 나서 가시나무에 걸리었다.
어아 민망하다 주인박대 민망하다.
술 아니 먹은 헛주정에 욕설조차 놀랍지 않다.
혼자 말로 군말하듯 나 들으라 하는 말이
“건넛집 나그네는 정승의 아들이요,
판서의 아우로서 나라에 죄를 짓고
외딴 섬에 들어와서 이전 말은 하도 말고
여기 사람 일을 배워 고기 낚기 나무 베기
돗자리 치기 신 삼기와 보리 동냥하여
주인 양식 보태는데, 우리 집 객은 무슨 일로
하루 이틀 몇 날 되도 공짜 밥만 먹으려나.
써야 하는 열 손가락 꼼짝도 아니하고
걷어야 하는 두 다리는 움직이지 아니 하네.
썩은 나무에 박힌 끌인가, 전당 잡힌 촛대인가.
종 찾는 양반인가, 빚 받으려는 빚쟁인가.
동이성 친척인가, 방금 사귄 친구인가.
양반인가 상인인가, 병신인가 바보인가.
화초처럼 두고 볼까, 괴석이라 놓고 볼까.
은혜 베푼 일이 있어 특명으로 먹으려나.
제가 지은 죄 내 알 것인가, 제 시름 뉘 알 것인가.
밤낮으로 우는 소리 한숨 지고 슬픈 소리
듣기에 싫증 나고 보기에도 귀찮도다.”
한 번 듣고 두 번 듣으니 원통하고 분하다만
풍속을 보아하니 놀랍고 이상하다.
인륜을 모르니 부자간에 싸움이요
남녀를 가리지 않으니 계집이 등짐지네.
사투리가 이상하니 귀한 손님 알 것인가.
다만 아는 것은 손꼽아 헤아리기
둘 다섯 홑 다섯 뭇 다섯 꼽기로다.
포함과과 탐욕스러움이 예의염치 되고
분전승합으로 효제충신 삼으며
한두 가지 공덕으로 효도를 안다 하고
혼정신성은 보리 담은 대독처럼 볼품없고
출필고반필면은 벙어리라 아예 모르네.
왕의 도리가 미치지 않는 오랑캐의 행동이로다.
사람 마음 아닐진대 사람이라 책망하랴.
내 귀양살이 아니면 이런 모양 보았으랴.
조그마한 실개천에 발을 빠진 소경놈도
눈먼 줄은 한탄하고 개천 원망 안 하나니
주인이 아니어서 짖는 개를 꾸짖어 무엇하리.
아무것도 할 일 없어 생계를 생각하네.
고기를 낚자하니 배멀미를 어찌하고
나무를 베자하니 힘 모자라 어찌하며
돗자리치기 신 삼기는 모르거든 어찌하리
어와 할 일 없다 동냥이나 하여보자.
망건 벗고 갓 숙여 쓰고 홑 중치막에 띠 끄르고
총만 남은 헌 짚신에 부채로 얼굴 가리고
담배 없는 빈 담뱃대 심심풀이 들고나가
비틀비틀 걷는 걸음 걸음마다 눈물 난다.
세상살이 꿈이로다 내 일 더욱 꿈이로다.
엊그제는 부귀하되, 오늘 아침 가난하니
부귀가 꿈이런가, 가난이 꿈이런가.
장주호접 황홀하니 어느 게 정말 꿈인가.
한단치보 꿈인가 남양초려 큰 꿈인가.
화서몽 칠원몽에 남가일몽 깨고 나서
꿈에서는 흉하니 새벽에는 크게 길할 것인가.
가난한 집 지나치고 넉넉한 집 몇 집인가.
사립문을 들어갈까 마당에 서 있을까.
철없는 어린 아이 소 같은 젊은 계집
손가락질 가리키며 귀양다리 온다 하니
어와 이상하다 다리 이름 이상하다.
구름다리 징검다리 돌다리 흙다리라.
정월 대보름 밝은 달에
서울 거리 열두 다리 다리마다 바람 불어
옥단지와 금술잔은 다리다리 배반이요
적성가곡은 다리다리 풍류로다.
웃다리 아래 다리 썩은 다리 헛다리
철물 다리 판자 다리 사람 두 다리 돌아 들어
중촌에 올라 광통다리 굽은다리 수표다리
효경다리 마전다리 아량 위 곁다리라
도로 올라 중학다리 다리 내려 향다리요,
동대문 안 첫다리며 서대문 안 학다리
남대문 안 수각다리 모든 다리 밟은 다리
모든 다리 다 알아도 귀양다리는 금시초문
수종다리 습다리인가 천생이 병신인가.
아마도 이 다리는 헛디뎌 병든 다리
두 손을 늘어뜨리면 다리에 가까우니
손과 다리 멀다 한들 그 사이 멀지 않아
한 층을 조금 높여 손님이라 해 주렴.
부끄럼이 먼저 나니 동냥 말이 나오더냐.
장타령 입에 물고 나오지 않는 헛기침에
허리를 굽힐 때는 공손한 인사로다.
내 허리 가엾어 천한 것들에게 절이로다.
내 인사 위아래 없어 종에게도 존대로다.
혼자말로 중얼중얼 굶주린 중 들어왔나.
집안 사람 눈치 채고 보리 한 말 떠서 주며
“가져가오. 불쌍한 귀양 동냥 예사오니.”
막상 받게 되니 마지못해 고맙다 하네.
그럭저럭 얻은 보리 들고 가기 어려우니
노비 있어 운반하리. 아무튼 내 져 보리라.
갓은 숙였지만 홑 중치막은 어찌할까
주변머리 으뜸이라 어떻게든 지어볼까
넓은 소매 구겨 질러 품속으로 넣고 보니
긴 등거리 제법이라 별로 이상치 않네.
아마도 꿈이로다, 일마다 꿈이로다.
동냥도 꿈이로다, 등짐도 꿈이로다.
뒤에서 당기는 듯 앞에서 미는 듯
아무리 굽히려도 자빠지니 어찌하리.
멀지 않은 주인집에 천신만고 겨우 오니
어려운 이 마주하나 부끄러워 땀이 나네.
저 주인 거동보소 코웃음 비웃으며
“양반도 어쩔 수 없네. 동냥도 하시었오.
귀한 손님도 속절없네. 등짐도 지시었오.
밥값을 하였으니 저녁 밥 많이 먹소.”
네 웃음 듣기 싫고 밥 많아도 먹기 싫다.
동냥도 한 번이지 매양 빌어 먹으랴.
평생에 처음이요 다시 못할 일이로다.
차라리 굶을지언정 이 노릇은 못하리라.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신이나 삼자꾸나.
짚 한 단 추려다가 신날부터 꼬아보니
종이 노도 못 꼬는데 새끼 꼬기 어이하리.
한 발도 다 못 꼬아 손가락이 부르트니
할 수 없어 내려놓고 긴 삼대를 벗겨내어
돗자리 노를 배워 꼬니 근심 많은 이 내 마음
마음 붙일 데 없어 노꼬기에 붙이었다
날이 가고 밤이 새니 어느 계절 되었는가.
오동나무 낙엽지고 가을바람 쓸쓸하니
오리는 나란히 날고 가을 하늘 한 빛일 때
노란 국화 단풍은 비단 장막 되었으며
산 가득한 나무 풀은 잎잎마다 가을 소리
새벽에 서리칠 때 외기러기 슬피우니
먼저 들은 외로운 객 임 생각이 새로워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임의 얼굴 보고지고
나래 돋친 학이 되어 날아가서 보고지고
만리장천 구름 되어 떠나가서 보고지고
낙락장송 바람 되어 불어가서 보고지고
오동추야 달이 되어 비취어나 보고지고
분벽사창 가는 비로 뿌려서나 보고지고
추월춘풍 몇 해 동안 밤낮없이 지내다가
머나먼 곳 옮겨 와서 소식조차 끊어지니
철석간장 아닐진대 그리움을 견디겠나.
어와 못 잊겠다 임을 그리워 못 잊겠다.
용문검 태아검에 비수검을 손에 쥐고
청산리 벽계수를 힘껏 베어내도
끊어지지 아니하고 다시 이어 흐르나니
물 베는 칼도 없고 정 베는 칼도 없네.
물 끊기도 어려우니 마음 끊기 어이하리.
용 자취도 가볍게 되고 좋은 샘물 흐려져도
임 그리는 마음이야 변할 길이 있겠는가.
내 이리 그리운 줄 임이 설마 잊었으랴.
풍운이 흩어져도 모아질 때 있었으니
된서리 차다한들 비와 이슬이 아니 올까.
울음 울어 떠난 임을 웃음 웃고 만나고저.
이리저리 생각하니 가슴 속에 불이 난다.
간장이 다 타오르니 무엇으로 꺼야 할까.
끄기가 어려울 건 오장의 불이로다.
하늘의 물 얻어오면 끌 수도 있건마는
알고도 못 얻으니 혀가 말라 말이 없네.
차라리 편히 죽어 이 설움을 잊자하고
포구 모래밭 혼자 앉아 종일토록 통곡하며
바다에 몸 던지렴도 한두 번 아니오며,
쓸쓸한 한 문 굳게 닫고 온갖 생각 다 버리고
먹지 않고 굶어 죽으렴도 한두 번 아니오며,
일각삼추 더디 가니 이 고생을 어찌할까.
사립문에 개가 짖네 풀어준다는 문서왔나.
반겨서 바라보니 전어 파는 장사로다.
바다에 배가 오니 사문 실은 관선인가.
일어서서 바라보니 고기 낚은 어선이라.
하루는 열두 시간 몇 번을 기다렸나.
설움 모여 병이 되니 백 가지 병이 든다.
배고파 허기증과 몸 추워 냉증이요,
잠 못들어 현기증 늘 앓는 것은 조갈증,
술 때문에 든 병이라면 술을 먹어 고치겠고,
임 때문에 든 병이라면 임을 만나 고치나니
공명으로 든 병에는 공명하여 고치겠지.
활을 맞고 놀란 새가 과녁에 앉겠는가.
신농씨 꿈에 만나 병 고친 약을 물어
청심환 회심단에 강심탕을 먹는다 해도
천금준마 잃은 후에 외양간을 고침이라.
대장간 일 배웠더니 눈 어두운 모양이다.
어와 이 사이에 해 벌써 저물었다.
맑은 가을 다 지나고 추운 겨울 되었구나.
강촌에 눈 날리고 북풍이 세차게 불어
산의 위 아래 백옥경이 되었으니
십이루의 다섯 경치 모두 모인 듯하구나.
저 건너 높은 산에 홀로 선 저 소나무
오상고절은 내 이미 알았으니
광풍이 아무리 불어도 겁날 것이 없거니와
도끼 멘 나무꾼이 행여나 찍으려나.
동백꽃은 눈 속에 붉게 피었으니
눈 속의 동백꽃은 학머리처럼 붉었구나.
엊그제 그리 불던 바람 간밤의 이리 내린 눈에도
높은 절개 고운 빛이 변하지 않았으니
봄바람에 도리화는 도리어 부끄럽다.
어와 밖에서 자야하니 눈보라를 어찌하리.
버선 신발 다 없으니 발이 시려 어이하리.
하물며 찬 데 누워 얼어 죽기 잠깐이다.
주인에게 애원하여 반 칸 방에 의지하니
흙벽을 발랐어도 종이벽만 할 것인가.
벽마다 틈이 벌어 틈마다 벌레로다.
노래기 섞여 있어 웬만한 벌레 두려울까.
굵은 벌레 주워내고 작은 벌레 던져버려
대나무 얽어 문을 하고 헌 자리로 가리니
작은 바람 가리어도 큰 바람은 어찌하리.
길 가운데 나무 모아 아침저녁 겨우 짓네.
가난한 손님방에 불기운이 들어올까.
섬 거적 뜯어 펴니 선단 요가 되었거늘
개가죽 덮고 쓰고 비단이불 삼았구나.
적막한 빈 방안에 게발 물어 던지듯이
새우잠 움츠리며 긴긴밤 새워 지낼 때
위로는 한기 들고 아래로는 냉기올라
이름은 온돌이나 한 데만도 못하고야.
육신이 눈사람돼 오한이 저절로 날 때
송신하는 솟대인가 과녁 맞은 화살대인가.
비바람에 떠는 문풍지인가 칠보광의 금나비인가.
사랑하는 이 안고 떠나, 겁이 나 놀라 떠나.
양생법을 모르는데 이빨은 왜 부딪치나.
눈물 흘려 베개 젖어 얼음조각 비석인가.
새벽닭 홰홰우니 반갑다 닭의 소리
단봉문 대루원에서 문 열리는 시간이네.
새로 눈물지고 큰 탄식 하던 때에
동창이 이미 밝고 태양이 높았으니
게을리 일어나 앉아 굽은 다리 펼 때에
삭정이가 부러지듯 마디마디 소리 난다.
돌담뱃대에 담배 넣고 쇠똥불로 부쳐 물고
양지를 찾아 앉아 옷의 이 잡아낼 때
아니 빗은 험한 머리 두 귀밑을 덮어 있네.
내 모습 가련하다 그려내어 보내고자.
이 모습 흉한 모습 하나라도 그려 보내면
오늘날 이 고생은 꿈속의 일 되련마는
기러기 지난 후에 편지도 못 전하니
초수오산 천만편지에 내 그림을 뉘 전하리.
사랑스럽다 이 볕이여. 얼었던 몸 녹는구나.
백년을 쪼여도 싫다고야 하랴마는.
어이하여 조각구름 이따금 그늘지니
찬바람 지나칠 제 볕을 가려 애처롭다.
오늘도 해가 지니 이 밤을 어이 샐까.
이 밤을 지낸 후에 오는 밤을 어찌하리.
잠이라 없거들랑 밤이나 짧던지
매일매일 밤이 오고 밤마다 잠 못 들어
그리운 이 생각하고 살뜰히도 애석할 때,
목숨을 부지하여 밥 먹고 살았으니
인간 만물 생긴 것 낱낱이 헤아려 보니
모질고도 단단한 것 나밖에 또 있을까.
깊은 산속 백악호 모질기가 나 같으며
독 깨는 철몽둥이 단단하기 나 같으랴.
가슴이 터지니 터지거든 구멍 뚫어
고모 창자 세살 창자 완자창을 갖추어
이같이 답답할 때 여닫어 보고지고.
어와 어찌하리 설마한들 어찌하리.
세상 귀양 나뿐이며 인간 이별 나 혼자랴.
소무의 북해고생 돌아올 때 잊었으니
나 홀로 이 고생 설마 돌아가지 못할까.
일 하는데 마음 붙여 이 설움 잊자하여
짧은 낫 손에 쥐고 뒷동산 올라가서
서리바람 섞어 치는데 모든 나무 쓸쓸하고
천고절 푸른 대는 봄빛에 혼자로다.
곧은 대 베어 내어 가지 쳐 다듬으니
한 발 넘는 낚싯대라 좋은 낚시로다.
청올치 낚시 줄로 낚시 메어 둘러메고
이웃집 아이들아. 오늘이 날이 좋다.
샛바람 아니 불고 물결이 잔잔하니
고기가 물 때로다 낚시질 함께 가자.
헤진 갓 뒤로 쓰고 망혜를 조여 신고
낚시터로 나가가니 내 놀이 한가롭다.
가깝고 먼 산천이 붉은 햇빛 띄었으니
넓고 넓은 바다 오로지 금빛이라.
낚시를 던져두고 무심히 앉았으니
은린옥척이 절로 와 무는구나.
구태여 잡아갈까. 혼자 즐기기 낚시라.
낚시대를 떨어뜨리니 잠든 백구 다 놀란다.
백구야 나지마라 너 잡을 나 아니다.
너 본디 영물이니 내 마음 모르겠나.
평생에 사랑하던 임을 천리밖에 이별하니
사랑함도 좋거니와 그리움을 못 이기니
근심이 첩첩하여 마음을 둘 데 없어
흥없은 낚시대를 실없이 던졌으니,
고기도 안 무든데 하물며 너 잡으랴.
그래도 모르겠거든 네게 있는 긴 부리로
내 가슴 쪼아 헤쳐 붉은 마음 내어 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아마 거의 알 것이다.
공명도 다 던지고 성은을 갚으려니
태평한 때 한가로워 너 좇아 예 왔노라.
나 보고 날지 마라 네 벗이 되오리라.
백구와 수작하니 떨어지는 해는 아득하다.
낚시대 줄 거두어 낚은 고기 꿰어 들고
강촌으로 돌아 들어 주인집 찾아오니
문 앞에 짖던 개는 날보고 꼬리친다.
난감한 내 고생이 아마도 오랠 것이다.
짖던 개 아니 짖고 임자도 되는구나.
반나절 잊은 시름 저절로 다시 나니
아마도 이 내 시름 잊을 길 어려워라.
강가에 달이 지고 은하수 기울도록
방안 등은 어디 두고 눈을 감고 앉았는가.
참선하는 노승인가 불경 읽는 맹인인가.
팔도강산 어느 절에 중이면서 소경인자 있나.
누운 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임이 오랴.
내 생각은 무슨 생각 이다지 많았을까.
남경 장사 장사하다 반전장사로 밑졌는가.
이 생각 저 생각 아무 생각 다 생각해도
생각을 못 하니 끝없는 생각이로다.
끝없는 미친 설움 누굴 찾아 풀어야 하나.
담배가 벗이 되어 내 설움 위로하니
담배 피고 재를 떨고 다시 담아 불을 붙여
한 무릎에 서너 번을 피어내니
현기증에 두통 나고 설움 잠깐 잊혀져도
오랫동안 잊을 수 있나 홀연 다시 생각하니
이 일이 무슨 일인고 내가 어이 여기 왔나.
번화한 고향 어디 두고 외딴섬에 들어왔나.
오량각 어디 두고 두옥반간 의지했나.
안팎 장원 어데 가고 대창문 달았으며
서화도벽 어찌하고 흙벽 되었으며
산수병풍 어디 가고 갈대를 둘렀으며
각장장판 어디 가고 갈자리를 깔았으며
경주탕건 어디 가고 봉두난발 되었으며
버선짝 어디 가고 한쪽에만 신었으며
녹피당혜 어디 가고 육총짚신 신었으며
아침점심 어디 가고 일중하기 어려우며
사환 노비 어디 가고 머슴이 되었을까.
아침이면 마당 쓸기 저녁이면 불 때기
볕이 나면 쇠똥말리기 비가 오면 도랑치기
들어가면 집 지키기 보리 멍석 새 쫓기
좋은 집에 좋은 옷은 나도 전에 하였으나
좋은 음식 맛난 맛은 아마 거의 잊었어라.
설움에 쌓였으니 날 가는 줄 모르더니
생각 없는 아이들은 묻지 않은 말을 하네.
한 밤 자면 설날 오니 떡국 먹고 놀자 하네.
그 말을 곧이 안 듣고 바람처럼 들었더니
남쪽북쪽 이웃집에 떡치는 소리 들리거늘
손을 꼽아 헤어보니 오늘 밤이 그믐이다.
타향에서 맞는 명절 이 것뿐이 아니로다.
가난한데 아침오니 또 한 해가 되었구나.
송구영신이 이 한 밤뿐이로다.
어와 항상 그랬던가 저녁 밥상 그랬던가.
못 보던 네모 밥상 수저 갖춰 장 김치에
쌀밥이 수북하고 생선 토막 풍성하다.
그래도 설이로다 배부르니 설이로다.
고향을 떠난 지가 어제인줄 알았더니
내 이별 내 고생이 작년 일이 되었구나.
어와 섭섭하다 정초문안 섭섭하다.
부모님의 백발은 얼마나 늘었을까.
아내 방의 꽃과 새는 얼마나 늦었는가.
다섯 살에 떠난 자식 여섯 살이 되었구나.
임이라도 내 설움이 서럽다 할 것이다.
천리 밖에 이별하여 해가 벌써 바뀌도록
집안 소식을 꿈에나 들었을까.
구름산이 막혔는 듯 강바다가 가렸는 듯
의창전 겨울 매화 소식 물어볼 길 전혀 없네.
바닷길 일천리가 멀기도 하지마는
약수 삼천리에 파랑새가 소식 전하고
은하수 구만리에 오작이 다리 놓고
북해상 기러기는 상림원에 날아나니,
내 집안 소식 어이 하여 이다지 막혔는가.
꿈에나 혼자 가서 고향을 보련마는
원수같은 잠이 올 제 꿈인들 아니 꾸랴.
흐르나니 눈물이요 짓느니 한숨이라.
눈물도 한이 있고 한숨도 끝이 있지.
내 눈물이 모였으면 추자섬이 생겼으며
이 한숨이 쌓였으면 한라산을 덮었으니
해안에 노을지고 어촌에 연기 날 제
사공은 어데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산 위의 휘파람은 소 모는 아이로다.
자려는 새도 숲으로 잠을 자러 날아들어
짐승도 집이 있어 돌아갈 줄 알았는데
사람은 무슨 일로 돌아갈 줄 모르는가.
뵈는 것이 다 서럽고 듣는 것이 다 슬프니
귀먹고 눈 어두워 듣고 보지 말 것이다.
이 설움 오랠 갈 줄 분명히 알 양이면
할 일은 반드시 만사를 잊는 것이리라.
나 죽은 무덤 위에 논을 갈지 밭을 갈지
한번 죽은 혼백이야 있을는지 없을는지
옳고 그름을 분별함도 없을는지 있을는지
비가 올지 눈이 올지 바람 불어 서리 칠지
하늘 뜻이 의심스워러 알기가 어려워라.
마디마디 간장이 구비구비 썩는구나.
간밤에 불던 바람 이 산 저 산 비 뿌리니
구심동군이 봄빛을 자랑하는 듯
믿음직하네 자연의 이치 봄을 절로 알게 하니
나무나무 잎이 피고 가지가지 꽃이로다.
곳곳에 고운 풀에 봄바람 소리 들리거늘
눈 씻고 일어나 창문을 열어 보니
창문 앞의 나무와 꽃 웃는 듯하는구나.
반갑다 저 꽃이여 예 보던 꽃이로다.
낙양 성중의 봄빛도 저것과 한가지요
고향의 동산에도 이 꽃이 피었는가.
작년 이맘때쯤 웃음 웃어 보던 꽃은
술잔에 맑은 술 부어 꽃 꺾어 헤아리고
장진주 노래하여 무진무진 마셔가며
화려함을 즐기면서 저 꽃을 보았는데,
올해 지금 눈물 뿌려 보는 꽃은
아침에 먹은 나쁜 밥 점심 안 되어 시장해지니
싸구려 잔에 탁한 술도 돈이 없어 먹겠는가.
내 고생 슬픔으로 저 꽃을 다시 보니
작년 꽃 올해 꽃 꽃빛은 한 가지나
작년 사람 올해 사람 사람은 다르구나.
인생의 고락이 잠깐의 꿈이로다.
이런저런 허튼 근심 다 후려쳐 던져두고
철에 맞는 옷 그리워하는 눈앞 설움 난감하다.
한 벌 옷 입은 후에 춘하추동 다 지내니
아마도 이런 옷은 내 옷밖에 또 없으리.
여름에 많이 더울 때는 겨울을 바랐더니
겨울이 많이 추우니 도로 여름 생각하네.
쓴 것은 망건인가 입은 것은 철갑인가.
네 계절 여름겨울없이 봄가을만 되었으면
발꿈치 드러나도 이는 족히 견디어도
바지 밑 터졌으니 이 아니 민망한가.
내 손수 깁자하니 기울 것 전혀 없네.
애꿎은 실이로다. 이리 얽고 저리 얽고
고기 그물 걸어 맨 듯, 꿩의 눈 찍어낸 듯
바느질도 형편없고 솜씨도 대단하다.
예전까지 적던 밥 크게 된 것은 어쩐 일인가.
굶주린 범 가재 먹듯 밥 한 그릇 먹어치우네.
조반석죽이면 부잣집 늙은이 부러우랴.
아침은 죽이더니 저녁은 그도 없네.
못 먹어 배고프니 허리띠 탓이런가.
허기져 눈 들어가니 뒤통수로 나오는 듯
정신이 아득하니 구름안개 쌓였는가.
한 되 밥 얼른 지어 실컷 먹고 싶어.
이러한들 어찌하며 저러한들 어찌하리.
천고만상 아무련들 어찌하리.
의복이 넉넉하면 예절을 알 것이고
춥고 배고프면 염치를 모르나니
궁무소불위란 옛사람의 말한 것이라.
사불관면은 군자의 예절이요
기불탁속은 장부의 염치로다.
거센 바람 분 후에야 강한 풀을 알게 되니
가난할수록 굳세어 벼슬에는 뜻이 없어
삼순구식을 먹건 못 먹건
십년일관을 쓰건 못 쓰건 간에
염치를 모를 것인가 예절을 바랄 것인가.
내 생애 스스로 벌어 구차함을 면하려니
처음에 못 하던 일 나중에는 다 배우는구나.
돗자리를 먼저 만들자. 틀을 꽂아 내려놓고
바늘대를 뽐내면서 베틀을 들어놓으니
두 어깨 무너지고 팔과 목이 부러진다.
멍석 값 한 잎 들어 다섯 푼에 팔았구나.
약한 근력 기운 내어 부지런을 떨어보니
손뿌리에 피가 나서 종이 골무에 피어린다.
실 같은 남은 목숨 끊음 직도 하다마는
아마도 모진 목숨 내 목숨뿐이로다.
사람 목숨 소중함을 이제와 알 리로다.
누가 이르기를 세월이 약이라 하니
내 설움 오래 살면 화약이 아니 될까.
날이 지나 달이 가고 해가 지나 돌이로다.
작년에 베던 보리 올해 고쳐 베어 먹고
지난여름 낚던 고기 이 여름에 또 낚으니
새 보리밥 담아 놓고 가슴 막혀 못 먹으니
뛰든 고기 회를 친들 목이 메어 들어가랴.
설움도 남에게는 없고 못 견딤도 남과 다르니
내 고생 한 해 함은 남의 고생 십년이라.
흉함이 길함 될까 고진감래 언제 올까.
하나님께 비나이다 설운 원망 비나이다.
달력도 해 묵으면 다시 쓰지 아니하고
노여움도 밤에 자면 풀어져서 버리나니
한 해 일도 다 묵었고 사람 일도 묵었으니
천만 일들 죄 씻어주고 그만 저를 용서하사
끊어진 옛 인연을 고쳐 잇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