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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강해

갈라디아서강해10(갈4:1-8)

작성자강물처럼|작성시간19.12.29|조회수123 목록 댓글 0

갈라디아서강해10(4:1-8)

 

율법과 복음은 다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율법과 복음은 하나입니다. 같습니다.

율법은 그림자라면 복음은 실체입니다.

무엇에 대한 실체 입니까? 구원에 관한 실체입니다.

 

좀 어렵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율법과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구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는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 혹은 자격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율법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선생에 비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아주 초등적인 학문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알게하는 단계가 바로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크고 확실한 구원의 표징을 주셨는데

바로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구원의 가장 크고 확실한 표징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한 속죄의 양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속죄의 양처럼 죄 값을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치르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고 영생에 대한 분명하고도 확실한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3년 공생에 동안 내내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가르치신 가르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식입니다. 곧 구원의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주신것도

모두가 구원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은 다른게 아니라, 동일한 것이며

 

단지, 율법은 바울의 의하면 초등학문으로 비유하지만, 복음은 좀더 성숙된

자유자로서, 즉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승화되어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됨을 이야기 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죄에 대해서 우리가 자유함으로 극복하고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자유자로 스스로 죄를 이기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율법의 시대에는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이 이래서는 안되고, 저래서는 안되고

일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대로 우리가 살았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우리 스스로가 죄에서 해방됨을 알고 자유자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살아야 할 바를 알고 사는게 바로 복음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인고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과 아들의 신분은 틀리다 말씀드렸습니다.

 

종일 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자로 아들이 된 이는 자유합니다.

이게 복음이라는 겁니다.

 

복음은 자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입니까? 아닙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는 방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의 아들이고 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아들답게, 딸답게 사는게 마땅합니다.

목사의 아들로 혹은 딸로 사는게 부담스럽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율법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내가 목사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 부담이 있죠.

그런데, 그게 부담이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율법의 사람이라는 겁니다.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복음은 자유하게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어느 일정한 테두리에 가두어 보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율법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알아서 하는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을 주심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복음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성하고,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더욱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럴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늘 몽학선생 밑에서 초등학문 속에서 살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4절에 보면, 때가 차매....라는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아래 율법의 종노릇하며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양자됨을 얻어 이제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로 인해서.....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거 아닙니다.

 

 

 

 

종으로서는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아들로서만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실 때, 이제 우리를 더 이상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로 받아 주셨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친구 아버지를 아저씨라 합니까?

내 아버지는 내 친구의 아버지도 되는 겁니다.

내 친구의 아버지는 곧 나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제 어릴 때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 아버지를 부를 때, 아저씨라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뭐라 그럽니까? 아버지라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요15:9-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해 뭐라그러십니까?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뭐라고요?....친구라 하리니.....

 

 

 

여러분, 이 선포는 얼마나 엄청난 선포인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그리스도의 친구라...

그런데, 우리가 어찌 과거 종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바울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7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후로는 종이 아니다....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버지의 유업...다시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격이 있는 위치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종으로 다시 돌아가서야 되겠느냐는 겁니다.

 

 

 

 

여러분, 이 모습을 보면, 과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서 가나안을 갈 때, 홍해 앞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애굽의 종살이를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뭐라고 원망합니까?

우리가 죽을 곳이 없어서 여기서 죽이려고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했느냐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1775년에 버지니아주 초대 지사를 지냈던 패트릭 헨리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가 없는 종의 모습이 좋았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왜 그럴까요? 진짜 자유인으로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도 이 종의 모습으로 돌아갈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3: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한탄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죄의 종노릇하며 살던 과거로 회귀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지난 갈327절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로 옷 입어라고 말합니다.

옷은 그 사람의 행동을 좌우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를 표현해 줍니다.

 

군인은 군복을 입어야 합니다.

의사는 의사의 옷이 있습니다.

사무직은 사무직에 어울리는 옷을 입습니다.

노동자는 노동하기에 적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노동자가 사무직에 있는 화이트 칼라를 입고 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꾀어 종의 자녀로 살게합니까? 그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복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율법을 초월해서 살아야 합니다. 율법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됩니다.

 

십일조를 해야 복을 받고, 주일 성수를 잘 해야 복을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일성수를 잘해야 하고, 십일조를 잘내야 한다....

그런 분이 계십니다. 그건 율법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십일조 생활을 하는 것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고, 봉사와 섬김을 하는 것이지.

 

십일조 생활을 잘하고, 주일을 잘지키고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내리신다?

초보적인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연조가 늘어나고, 믿음으로 성숙하고 성장하면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이제는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자로서 성숙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제 율법의 초보에서 복음의 성숙한 옷을 입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복음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옷 입고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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