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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강해6 (갈2:11-21) 이신득의 이신칭의

작성자강물처럼|작성시간19.12.01|조회수313 목록 댓글 0

갈라디아서강해6 (2:11-21) 이신칭의以信稱義

 

초대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종교풍습에 젖어 있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여전히 풍슴이나 신앙은 유대교에서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엄격한 구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사실 베드로도 이것이 문제점이라는걸 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도 환상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 집으로 가서 고넬료와 교제하고 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기독교인들의 이런 유대교적 신앙의

한계에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복음의 대전제는 모든 나라와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흑인이냐 백인이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풍습이나 종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나라와 인종, 직업과 신분에 있어서 차별이 없습니다.

평등합니다.

구원 받는데 이런 것들이 제한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런데, 초대 유대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야 구원받는다는 제한을 여전히 두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할례문제요, 우상의 재물을 먹는 문제였습니다.

이런 반유대교적인 풍습을 가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조차도 싫어할 정도였습니다.

근데, 베드로도 이런 초대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관을 무시하지 못했습니다.

눈치를 봤습니다.

그게 바로 안디옥교회에서 터진 사건입니다.

 

한번은 베드로 사도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먹으면서 교제를 나누었는데

그때 예루살렘에서 야고보 사도가 보낸 유대기독교인들이 이 안디옥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기독교인들이 겁이나서 사도 베드로가 그 식사자리를 박차고 피해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유대기독교인들도 같이 자리를 피해버렸습니다.

심지어 그당시 존경받는 바나바라는 사람도 베드로처럼 그 이방인과의 식사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이게 11-13절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유대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종교적 풍습과 습관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으로 복음을 가로 막고, 차별했습니다.

복음은 차별이 아니라, 평등입니다. 공평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모두가 같고 동일하다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 사도들 조차도 이 대전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버린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수천년이 지난 지금은 그런 일이 없는가?.....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도 한번 말씀드린적이 있는걸로 기억하는데

제 선배 목사님 중에 교회가 성장 할려면, 우리가 매주토요일마다 섬기는 이런 어렵고 가난한 사람이 교회를 오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은 나중에 교회가 부흥되고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담했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차별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거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누추한 사람이 왔다고 그런 사람은 오면 안돼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설혹 자기 맘에 안드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지마라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화려한 교회는 누추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이 다니면 불편해 합니다.

, 예배를 드리는데, 차별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2가지 평등한게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는 죄인이라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두 번째는 또한 동시에 우리 모두는 주님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이 대전제 앞에서 그 누구도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교회안에는 그런 차별이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복음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에서 떠나도 한참 벗어난 모습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비복음적인 것에 대한 실랄한 비판이 담긴 곳이 바로 갈라디아서인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이 비겁한 신앙의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실랄하게 꾸짖습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리에 우리는 확실해야 합니다.

눈치를 보며 신앙생활하는 것은 온전한 믿음에 서 있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복음은 단호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 유대인 되는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두란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두란노교회 교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되어서도 안됩니다.

두란노교회를 다니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다 어느어느 교회 교인이 되어버렸잖아요.

반드시 우리교회를 다녀야 믿음이 좋아지고 구원이 있다?....

우리교회는 저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다....그건 복음하고 전혀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두란노교회를 현제 다니고 있기 때문에 두란노교 교인인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그러면 다른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우리 두란노교회를 안다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우리교회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니가 다니는 교회보다 우리교회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건 교만이지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은 모든 것에서 평등하다는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적인 어떤 잣대나 기준을 가지고 교회를 제단하고 교인을 제단하고 평가합니다.

큰 교회를 다니는 성도나 목사는 그 교회의 사이즈와 믿음이 비례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다 불신앙적인 행태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 세상의 그 어떤 형식이나, 잣대를 가지고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냐로 구원받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런 외식에 빠진 베드로를 크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14절에 나옵니다.

그런데, 그 책망이 지금 오늘 우리한국교회와 성도들도 들어야 할 책망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겁니다.

어떤 기독교적 관습과 관행, 그리고 문화로 구원받는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하심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이신득의, 혹은 이신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고 선하고 바른 삶의 사람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게 아니라

그냥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는 그 여기심으로 구원받는 사실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이냐 행위냐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지만, 행위로 구원받을 사람은 이 땅에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누구라도 구원에 있어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기 때문에 구원을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 마땅 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냐, 복음주의자냐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서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복음주의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은 자꾸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상대방과 나를 비교하고 평가하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깁니다.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인은 기도할 때, 자신의 목을 꼿꼿하게 세워 서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나님 저는 저 죄인인 세리와 같이 않음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죄인 취급을 받던 당시 세리장이는 자기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는 죄인입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주의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저들과 같아서는 안된다. 저들과 같지 않음에 감사한다.....이건 교만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하거나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부끄러운 죄인됨을 알고 깨달아서

더 이상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며 삽니다. 이게 복음주의입니다

 

구원은 자기 의로움으로 얻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저 값없이 주는 은혜와

그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에 대해서 내 의를 자랑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구원에 대해서 평가하지 못합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차별적 신앙행위를 한 베드로 사도를 무섭게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선배입니다.

감히 그 당시 사도로 존경받는 인물 예수님의 수제자로 존경받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버리고 왜곡된 신앙의 모습을 보인 베드로를 사도 바울은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고 그의 잘못된 신앙을 질책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복음안에서 사는 것은 내가 잘나고 똑똑하고 착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호흡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율법을 지키는 행위나 착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나의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우리의 삶 가운데서 나타내는 복음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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