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 2 대 정종대왕의 자녀들 이야기
정종대왕은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 조선 2 대 국왕 이고, 후사가 수십명에 이렀지만 정종의 왕위를 이은것은 바로 정종의 동생 태종 이방원 인데. 그 이유는 바로 정종대왕에게 적자가 없었다는 겁니다.
본처 즉, 정안왕후김씨가 소생을 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종대왕의 자녀들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떤 자손들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분이 많은것같습니다.
한번 따라와 보세요~
서 장남 의평군 이원생(李元生) ?~1461년
왕실 쉴드로 편하게 일생을 보낸 왕자입니다.
여러 번 직첩을 뺐기고 돌려 받기를 반복하는등 태종 세종의 스트뤠~스를 가중시켰었죠.
태종 17년 정유(1417) 9월 12일에 의평군의 직첩을 받습니다. 아버지가 왕위에 계셨거늘 직첩이 좀 늦었는데 그 이유를 들여다 보면 정종에게 실권이 없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보통 내어나 15세가 되기전에 직첩을 받게 되니 말입니다.
1422년 세종 4년 익평군 이석근·의평군 이원생·순평군 이군생 형제가 사헌부(司憲府)에서 탄핵을 받았는데
그 이유를 보면 태종의 국상기간에 최복(衰服) 즉, 상복을 일찍이 벗어 버렸다는 건데 당시를 보면 큰 죄로 다스렸을겁니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그들이 무지하며 종친이기에 용서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1425년 세종 7년에는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공식 문서에 사용된 도장을 위조하는데 이 일로 많은 탄핵과 큰 죄를 줘야한다고 대신들은 펄쩍 뛰지만 세종대왕께서는 "멀~리기서 편히 살거라~ " 라며 온정을 베풀기도 합니다.
이에 대신들 거품 물고 난리를 치는데 아랑곳 하지않으시고 "멀~리기서 편히 살거라~ " 만 반복하십니다.
또한 집에서 형제들과 불법 도살하여 검거됐다고 하는데 뒷말이 없는것으로 보아 요것도 그냥 넘어가준듯 합니다.
배위는 철원최씨로 금천감무(金川監務) 치숭(致崇)의 딸이고 5남 3녀을 두었습니다.
서 차남 순평군 이군생(順平君 李群生) 1392~1462
형과 어울려 다니며 같은 사고친 순평군은 숙의 지씨 소생으로 맏형 의평군과는 동복형제가 됩니다.
의평군과 더불어 문서위조는 물론 상복을 일찍 벗어버린일로 귀양하닌 귀양을 가는데 귀양지에서도 벗어나 각기 다른 곳에서 기거하다가 당시 지평 권시가
" 제발 쟤들 개과천선하게 죄좀 주세요~오오오오!!" 하는데
세종이
" 내 사촌이잖아~그냥 좀 봐줘!"하면서 무마해버립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유배마저 풀어줘서 in 서울 하게 됩니다.
세종24년 (1442)12월 5일에 다시 관직을 파면 당하는데
대신들은 무슨 일로 파면을 시켰는지 말해달라며 세종을 달달 볶아뎁니다.
이에 세종은
" 알 필요 없잖아? 내가 다 처리 했으니 말도 하지마! 짜증나! "
라며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다가 딱 일 년이 지나 직첩을 다시 내려줍니다.
그 후로는 좀 잠잠하게 지내다가 단종대에 이르러 영면하게 됩니다.
파란만장한 사고뭉치 왕자님.
서 3 남 금평군 이의생(錦平君 李義生) ?~1435
금평군 역사 윗 형들과 태조의 문서를 위조한 사건으로 곤욕을 겪습니다. 자업자득이죠
세종 9년(1427) 5월 9일에 음란한 행위를 했다며 직첩을 뺐기고 멀~리 귀양을 가는데 이유인즉 , 태종의 국기일에 형제들과 더불어 기생들과 탱자탱자 술판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귀양가서도 형제들과 부처지를 벗어나 유랑을 하며 놀러 다니다가 대신들 혈압을 급 상승 시키고,거품 무신분이 한 두분이 아니었으니 정종의 자녀들은 유난하게 조용히 지내신 분이 없는거 같네요.
안타까움..
서 4 남 선성군 이무생(宣城君 李茂生) ?~1435
생각을 해봅니다. 정종의 아들들이 대부분 사고뭉치 행동을 한것이 정종과 태종의 관계 탓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마치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의 눈을 피하기 위해 파락호 행동을 했던것 말입니다.
여하튼 선성군 또한 형제들과 어울려 다니며 사고를 치고 직접을 받았다가 뺐겼다를 반복하는데 한 여자를 형제끼리 서로 간통했던 일도 빌미가 됩니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왕손들을 관리하는데 엄격했다고 알려지는데 이들 형제들도 만날 끌려가 야단 맞고 직첩 회수 당해도 참 한결같이 사고쳐서 가뜩이나 당뇨로 혈압 높으셨던 임금님을 더욱 뒷목 잡게 했죠.
공부를 게을리 한다며 야단을 쳐도 하는척 마는척~
세조 3년에는 결국 강제 이혼을 당하는데 기생첩 탁금아(濯錦兒)를 아끼며 본처를 내쫓는 행패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서 5 남 종의군 이귀생(從義君 李貴生) 1393~1451
형제들 중 그나마 조용하게 살았는데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욱(李勖)을 무고해서 곤장을 맞을 뻔 했으니 직첩을 깎는일로 무마됐습니다.
문종 1년에 졸했는데 본 부인들에게 소생이 없었으므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습니다.
서 6 남 진남군 이종생(鎭南君 李終生) 1393~1470
세조 6년에 누이를 돌보지 않은 일로 파직을 당하받는데, 이복누이인 옹주의 남편이 일찍 죽어 집안이 궁핍해진 상원옹주를 돌봐주지 않았다는겁니다.
실록을 보면 대부분의 형제들에 인물평이 없었던 반면 성종대에 졸한 진남군의 졸기는 칭찬으로 가득합니다.
성종1년(1470) 11월 27일(신축)
진남군 이종생의 졸기
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이 졸(卒)하니, 조회를 철폐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전례(前例)와 같이 하였다. 종생은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아들로서 후궁(後宮) 이씨(李氏)의 소생이다. 홍희(洪熙) 을사년864) 에 정윤(正尹)에 배명(拜命)되고, 선덕(宣德) 경술년865) 에 원윤(元尹)에 승진되었는데, 이 해에 세종(世宗)이 종학(宗學)을 설치하고 종생에게 명하여 종학 유사(宗學有司)로 삼아 모든 종실(宗室) 학생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규찰하게 하였다.
경태(景泰) 임신년866) 에 문종(文宗)이 종실에 학문이 있는 자를 시험하여 강(講)하게 하였더니, 종생이 경서(經書)를 강하여 다 통하였으므로 문종이 이를 가상히 여기어 학생을 면하게 하고, 또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다.
계유년867) 정의 대부(正義大夫)에 승진되고 진남군(鎭南君)으로 봉해졌다.
성화(成化) 병술년868) 에 세조(世祖)가 종생이 근신(謹愼)하고 종실 가운데서 가장 어질다 하여 특명(特命)으로 사옹원(司饔院)과 장원서(掌苑署) 두 관사(官司)의 제조(提調)로 삼았다.
정해년869) 에 세조가 교태전(交泰殿)에 나아가 종친(宗親)을 불러 보았는데, 옥산군(玉山君) 이제(李躋)가 종생의 오른쪽에 앉아 있으므로, 임금이 이르기를,
“진남군이 나이가 많고 또 어진데, 어찌 옥산군(玉山君)의 아래에 앉았느냐?”
하고, 즉시 그 위로 앉게 하고, 명하여 자급(資級)을 뛰어 올려 숭헌 대부(崇憲大夫)를 제수하였다. 무자년870) 에 예종(睿宗)이 그 아들 이복(李復)을 익대 공신(翊戴功臣)으로 삼고 가덕 대부(嘉德大夫)로 승진시켜 제수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5세였다. 이간(夷簡)이라고 시호(諡號)하니,
마음을 편안히 하고 고요한 것을 좋아하는 것을 이(夷)라 하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게 하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한다.
아들 네 사람이 있으니, 이복(李復)·이형(李衡)·이이(李)·이연(李衍)이다. 종생은 성질이 공손하고 근신하며 성색(聲色)을 기뻐하지 않고, 자식을 교육함에 방정(方正)함이 있었다. 이때에 종실로서 일을 맡은 이가 적었으나, 이복(李復)은 절도사(節度使)가 되고, 이형(李衡)은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이연(李衍)은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를 영화롭게 여기었다.
서7남 수도군 이덕생(守道君 李德生) ?~1449
불가로 출가했다가 왕명으로 다시 머리를 기른일이 있는데
세종 13년에 공부에 소흘하게 한 까닭으로 노비들을 뺐겼고, 세종 15년에 꾀병을 부리며 공부에 소훌하다하여 다시 노비를 뺐긴느 일이 있었습니다.
맏형 이원생과 더불어 불법 도살한 죄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땡땡이 치는데 달인이었던 이유로 세종에게 누차 꾸지람을 듣는데 급기야 죄를 짖고 유배를 떠나는 길에 객사하게 됩니다.
이에 대신들은 직첩을 거뒀으니 종친 예로 장례를 치루니 마니로 말이 오가는데 결국 종친의 예로 장례를 치룹니다.
서 8 남 임언군 이녹생(林堰君 李祿生) 1399~1432
딱 윗 형님들 케이스인데 공부 안하고 땡땡이 치고 학질에 걸려 공부 못 하겠다고 핑계를 대다가 걸려서 노비 뺐기고
양녕 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와, 익녕군(益寧君) 이치(李袳)·서산군(瑞山君) 혜(譿)·순성군(順成君) 개()·원윤(元尹) 이녹생(李祿生)·정윤(正尹) 겸(謙) 및 이무생(李茂生) 과 석전이라는 넓은 거리에 모여 돌 던지는 놀이를 벌이고는 막대기로 치기도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어 금지한 놀이를 구경 갔다가 단체로 탄핵을 받습니다.
서 9 남 석보군 이복생(石保君 李福生) 1399~1447
넷째 형 이무생과 음란한 놀이를 한 일로 탄핵 크리를 받았는데 약계춘·보금 이라는 효령대군이 가까이 했던 기생들을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태종의 국기일에 말입니다. 못말리는 형제들인데 이 일로 분노한 세종은 복생을 원주(原州)로 유배 보냅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도 일탈~ 탱자탱자 놀다가 또 다시 탄핵을 받습니다.
또한 " 니들.. 오늘 울 아버지 태종 국기일인데 유배지에서 반성 잘 하고 있지?? 아님 죽어 ㅡㅡ?" 라고 묻는 세종에게
"헐.. 국기일에 당연히 반성 모드지...해주의 온정에 목욕재개 하고 반성 중입니다.." 라고 거짓말 하고 매 사냥 갔다가 세종 거품물고 뒷목 잡게 합니다.
이에 눈 돌아간 세종은 직첩 다시 뺐고 귀양지 옮겨서 귀양 보내버렸습니다.
서 10 남 덕천군 이후생(德泉君 李厚生) 1397~1456
제일 칭찬 받을 만한 정종의 아들로그 학문이 크게 미쳐 경서의 대의를 통달했으며, 학교 입학까지 면제 받았습니다.
일생을 공부하는 학자로 살며 다른 형제와 달리 문제를 일으킨 바 없습니다.
성빈 지씨의 아들로 배위는 고택군부인 장수이씨입니다.
서 11 남 임성군 이호생(任城郡 李好生) ?~?
세종21년(1439 ) 6월 6일 형제 이호생(李好生)·이말생(李末生)·이융생(李隆生)과 더불어 미복 차림으로 음란한 짓을 하는데 최~고 라 대신들 앞에서는 감싸주기만 하던 세종은 이들의 행실을 탓하며 직첩을 뺐고 노비도 압수하겠다고 노발대발 하지만 오히려 대신들이 이들을 감싸 무사히 넘겼습니다.
세종 26년(1444) 7월 1일 임성정(任城正)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서 12 남 도평군 이말생(桃平君 李末生) 1402~1439
도평군 역시 윗 형들을 다루는 사이 많이 거론된 인물이져. 임성군 이호생, 도평군 이말생, 정석군 이융생 과 더불어 행실이 제일 않좋다고 세종이 분노할 정도였습니다.
첫 부인은 일찍 졸 했는데 실록에보면 단아 하고 성품이 곧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BUT 도평군은 그렇지를 못했으니 거짓말을 해서 직첩을 뺐기고 추문으로 인해 직첩을 뺐기고 받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세종이 “이말생(李末生),이종생(李終生),이융생(李隆生)은 종학(학교) 말고는 외출금지를 시킬정도였습니다.
조강지처를 구박하고 기첩을 아끼니 대신들의 탄핵으로 직첩을 뺏기고 노비도 뺐겼네요.
서 13 남 장천군 이보생(長川君 李普生) ?~?
세종26년(1444) 7월 1일 장천정(長川正)의 작위를 받았고 고종황제대에 군으로 추증됩니다.
그 외의 기록은 전혀없네요
서 14 남 정석군 이융생(貞石君 李隆生) 1409~1464
세종이 그 행실이 좋지 않다며 지목한 삼형제 임성군 이호생, 도평군 이말생, 정석군 이융생 중 한사람입니다.
세종대왕을 화나게 한 적이 많았지만 세종의 쉴드 덕분에 호강하고 산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다가 세조 3년 직첩을 회수 당하고 귀양갔다가 다시 세조4년 충청도 홍주(洪州)로 귀양을 갑니다.
그리 행실이 좋지않아 임금들로 부터 야단야단을 맞고도 노는데에 빠져 친 동복누이인 상원옹주가 굶주리는데도 돌봐줌이 전혀없어 탄핵을 받게 됩니다.
서 15 남 무림군 이선생(茂林君 李善生) 1410~1474
세종 26년에 무림정의 작위를 받았고 그 외에는 특이한 이력이 없는데 형제들과 달리 지병을 갖고 있던지라
세조 8년에 악공(樂工) 황종생(黃鍾生), 사노(私奴) 가질박(加叱朴),김의동(金義同),오망지(吾亡知)등이 무림군의 아들 이종손을 구타한 일로 무림군의 다른 아들 명천정(明川正) 이장손(李長孫)이 상소를 올려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일을 안 세조는 " 무슨일을 그따위로 처리해! 당장 잡아 족쳐!" 라며 분노하게 됩니다. 구타를 한 이들은 바로 국문을 받게 됩니다.
무림군의 나이 57세 영면하는데 그 졸기를 보면
'얼굴과 거동이 공손하고 아름다움을 소(昭)라 하고, 마음을 편히 하고 고요함을 좋아함을 이(夷)라 한다.' 며 인품을 칭찬했습니다.
정종의 딸들
왕실 내력을 공부하다 보면 제일 막혀서 힘든공부가 왕실의 딸들 옹주 공주 말입니다.
그래서 부마의 기록으로 추측할까 합니다만, 부부라 할지라도 부마의 기록으로 추측하기는 여간 어려운게 아니죠.
정종의 딸들은 생졸년이 대부분 미상으로 그 기록또한 아주 적습니다.
서장녀 함양옹주(咸陽翁主 ?~?)
정종의 딸들은 세종 54권, 13년(1431) 10월 18일에야 군주 작위를 받습니다. 함양옹주 또한 마찬가진데, 옹주 작위는 고종황제에 이르러 받게 된것입니다.
옹주는 박갱과 나라에서 하사받은 여주에게 터를 잡고 살게 되는데,옹주의 남편은 밀양박씨 갱으로 옹주의 오빠들과 태조의 공식문서를 위조 했다가 부마 김세민과 자원안치 됩니다.
처남들과 어울려 사고를 치다가 세종 9년에 영면합니다.
서 2 녀 숙신옹주(淑愼翁主) 1401~1486
남편은 경주 김씨 세민으로 옹주의 오빠들과 태조의 공식문서를 위조 했다가 부마 박갱과 같이 자원안치 됩니다.
당시 세종은 직첩을 돌려주지 말라는 대신에게 불호령을 내리죠
" 아~나 진짜 내가 갸들이..잘못한 확실한 증거가 있으면 그냥 뒀겠어? 니들 지금 나한테 따지는거야? 증거가 없으니 죄 또한 없는거 아냐? 한 마디만 딱 한마디만 더해 가만 안둬! " 라며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 후로 자신의 잘못을 깨갈았는데 요직을 두루 지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몇번의 일로 귀양 갔다 in 한양 했다가
1448년 뇌물수수로 물의를 일으켜 탄핵을 받았습니다.
문종때에 작위를 돌려주려 하자 대신들은 " 임금님? 생각을 해봐요~! 김세민 저거 부마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처신을 바로하고 모범이 되야지.. 저런 골 아픈 짓 하는데 뭐...뭘 돌려줘요 ? 절대 안돼요!"
라고 외치지만 문종 " 아.. 어디서 악 쓰는 소리는 들리는거도 같고.. 에이 나 귀가 안들려~~" 라며 무시해 버립니다.
서3녀 덕천옹주(德川翁主) ?~1487.5.9 (묘비 기록)
다른 자매들과 같이 세종 13년에 군주 작위를 받았습니다.
부마와 옹주는 실록상 기록이 아주 미흡한데 군주작위를 받은것 외에는 단종 1년에 첨지중추원사를 세조 1년에 강릉 부사로 재임중에 졸했다는 기록밖에는 없네요다른 옹주들의 남편들이 처남들과 어울려 사고 치실때 이 부부는 조용히 살았던듯합니다.
서4녀 고성옹주(高城翁主) ?~?
남편인 김한이 오빠인 순평군과 간통사건에 얽히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신 옹주님.
남편 김한은 이 일 외에는 사고쳐서 시끄럽게 한 일은 없으니 계속 관직을 두루 거치며 장수했습니다.
서5녀 상원옹주(祥原翁主) ?~?
남편 일찍죽어 청산과부되고 남매들에게도 외면당해 슬픈 옹주.
평양조씨 효산에게 하가하는데 부마는 일찍 생을 마감하는데 옹주의 신분으로 부유하게 지냈을것 같지만 남편의 죽음과 더불어 생활이 궁핍해지고 왕실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언니 오빠들은 탱자탱자 놀고 다니는데 옹주와 자식들은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어찌어찌 알게된 세조가 이복오빠 동복오빠를 불러 불호령을 내리는데 이복오빠인 진남군 이종생만 파직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 제일 부유하게 살았던 모양?
후로는 왕실에게 살림을보살펴 줬습니다.
서 6 녀 전산옹주(全山翁主)
남편 이희종이 기생 일지화(一枝花)에게 홀딱 반해 재산 다 말아먹고 궁핍해지자 분노한 세종은
"너... 너.. 네 아내가 누군지 알아? 공정왕의 딸이자 내 사촌누이야.. 기생한테 빠져 눈물빼게해.. 재산 날려 니가 지금 살자는 거니? 죽자는거니? 너 좀 죽어보자"
하시며! 국문을 하니~혼쭐난 부마님. 그러나 누이가 안타까우셨던 세종대왕님
매년 의식주를 내려 그 살림을 보살펴 주려했으나. 그 아들이 장성해 살림을 보살필때까지만 보살피자는 의견에 동의하여 보살펴주었습니다.
그 후로는 실록에서 샤샤삭~ 사라지셨네요
서 7 녀 인천옹주(仁川翁主) ?~?
남편 이관식이 온양군사가 되어 문종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문종대왕은
“이제 각도에서 군기(軍器)를 만드니, 너는 부지런히 보살필 것이며, 또 의창(義倉)의 곡식을 거두어 주는 일은, 모름지기 때에 맞게 할 것이니, 너는 거기에 힘쓰라.” 며 위로를 합니다
그러나 세조대에 일을 제대로 해놓지 못해 불벼락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서 8 녀 함안옹주(咸安翁主) ?~?
부마에 대한 기록은 전혀없으며 옹주에 대한 기록도 군주 작위를 받았다는 몇 자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