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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高宗 皇帝) 7

작성자고산(高山)|작성시간19.01.25|조회수494 목록 댓글 0



왕릉이 아닌 황제릉

 


명성황후는 1866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1874년 고종의 뒤를 이을 순종을 낳았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자 명성황후는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하여

친청 친러 정책을 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은 자객을 보내 1895년 10월8일 경복궁 건천궁 에서 민비를 살해한다.

명성황후는 처음에 서울 청량리에 묻히었으나 고종이 승하하자 이 곳 홍릉에 합장된다.

 

이곳 능터는 고종이 직접 조성하고 설계하였으나 1919년 고종이 승하 하자 일제는 왕의 무덤인 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반 왕족의 무덤인 묘로 격하하려고 했다.

왕실에서는 서울 청량리 홍릉에 모셨던 명성황후를 이곳으로 천장하여 고종과 합장하는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새로 능을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옮겨 왔을  뿐이라고 주장한것이다.

황제가 홍후의 능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홍릉은  역대 조선의 왕릉과는 모습이나 형식이 많이 다른 것은 고종이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고치면서 왕을 황제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능도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 따왔다. 

국호까지 고치며 황제로 격상시키면서  한편 능의 형식은 여전히 중국의 것을 흉내내는 것은  

기존의 왕릉과 큰 차이는 정자각이 없고 침전이 대신하고 봉분 주위에 있던 여러 석물 들이 홍살문과 침전 사이에 세우는 것.

왕릉의 석물에는 양 호랑이가 있었으나  황제릉에는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들을 순서대로 세워놓았다.

 

高宗의 장례식

고종의 장례는 1919년 3월3일에 거행되었다. 

3.1만세 운동 바로 이틀 후이었다.

온 나라가 만세운동으로 뒤숭숭한 가운데  장례식에 참석한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70여명이었고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관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장례를 일본식으로 치루고 복장도 일본 고유의 상복을 착용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순종을 비롯한 종친들이 참석하기를 기피하였고 일본은 억지로 강제로 순종과 종친을 참석시켰다. 

한산했던 장례식과는 달리 장례 행렬이 금곡에 도착하였을 때 길가에는 수 만 명의 백성들이 나와 통곡을 하였으며

밤이 되자 지나가는 마을마다 불을 밝혀 고종의 마지막 길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고종은 생존 시에 이 자리를 마련해 놓았으며 이 릉의 도면을 침전에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좋아 했다고 한다.

고종은 고영희 라는 사람을 직접 중국에 보내 명태조의 효릉을  그대로 본땄다.

고종이 죽자 친일파 신하 윤덕영은 금곡은 장례 경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명성황후가 묻힌 청량리의

홍릉으로 합장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곳 능은 이미 조성이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이 곳에 묻히고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이장하여 합장된다. 

그래서 이름도 홍릉이다.

 

고종 독살설         

             

고종은 1919년 1월21일 아침 6시에 덕수궁에서 사망하였다. 67세이었다.

고종의 사망 원인은 당시 일제에 의하여 뇌일혈로 발표되지만 그 날 아침 한약 식혜 또는 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때문에 사망하였다는 주장이 사망 당시부터 현재에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고종독살설은 당대에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3,1운동의 배경이 되었지만  당시의 정국을 살펴보면 근거없는

소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헤이그밀사 사건 이후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 난 고종이 의병이나 독립운동 세력에게 상징적 구심점이어서

독립을 위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여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혁명단에서 고종을 망명시켜 항일운동을 활성화할

계획이 드러나는 등 일제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는 존재이었다.

 

더구나 고종은 덕수궁에서 망국의 한 을 씹으면서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고액의 내탕금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으로

지원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살에 관련된 인물로는 이완용 이기용 한창수 윤덕영 민병석 한상학등이 있으며 어의 안상호도 의심을 받고 있다.

 

이들 중 이완용과 이기용은 일제 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은 친일파로써

특히 이완용은 일본왕 앞에서 고종을 독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하였다. 

독 을 탄 음료를 고종에게 직접 전달한 궁녀는 일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은 여러가지 의혹만 있을 뿐 사건의 실체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과 주변의 움직임들을 보아 틀림없을 것이라는 설 이 요즈음의 시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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