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심 4~6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2) 탈북민 수기
이끄심 4화 - יָלַךְ 얄라크 : 고향을 떠나다 (2)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4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 여정을 이어갔지만 이 먼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헤매고 있는 우리를 딱하게 생각하셨는지 이 산행을 반강제적으로 끝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이끄셨다.
그 날도 영하 30도가 넘는 혹독한 날씨였다. 온 몸이 꽁꽁 얼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발은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온통 흰 눈에 덮인 논밭만 보였고 인가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발 이 너무 시려서 논 한가운데 쌓아놓은 볏짚단 속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서로의 발을 옷 속에 품어 녹여주었다. 얼음덩이와 같은 엄마의 두 발이 내 배 위로 들어오는 순간 머리끝까지 느껴지는 추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얼어붙은 발을 서로의 품속에 넣고 잠시동안 죽어가던 세포를 다시 깨웠다. 볏짚 사이에서 추위를 피한 우리는 날이 밝아 올 때쯤 혹시나 사람들이 몰려올까 경계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날이 밝아오니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사방에 눈이 온통 반짝반짝 빛났다. 우리의 몰골은 영락없는 거지꼴이었지만, 보여지는 매무새나 추위, 배고픔, 고단함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는 오직 대한민국을 가기 위해서 걷고 또 걸었고 그 1차 목적지는 길림성(吉林 省) 길림시(吉林市)였는데, 얼마나 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불안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동쪽을 바라 보며 산과 마을을 넘고 또 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어느 날, 우리는 수백마리의 닭들이 들판에서 ‘꼬꼬댁’ 거리며 놀고 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수백 마리의 닭이 뛰어노는 광경을 보았다. 그 닭들을 보며 엄마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저 많은 닭 중에 딱 한 마리만 먹어봤으면…”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눈앞에 보이 는 그림의 떡과 같은 닭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면서 왜인지 모르게 일어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뭔가 물컹한 것이 발 끝에 걸렸다. 눈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하얀 눈 속에 닭 세마리가 죽어 있었다. 내 발이 닿은 닭의 안에서는 생쥐들이 닭 내장을 파먹다가 우르르 도망갔지만, 다행히 나머지 두마리는 아직 상태가 멀쩡했다. 우리는 서로 번갈아 보며 웬 횡재인가 싶어서 죽어있는 닭들을 주워서 탈탈 털어 어머니와 나의 배낭에 넣었다. 닭을 너무나 손쉽게 주운 것이 믿어지지가 않아 이것이 웬 떡인가 싶었다. 고맙고 기쁘고 신이나서 발걸음도 가벼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리고 왜소했던,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자기몸 가누기 힘들었던 나에게 꽁꽁 얼어 붙은 닭의 무게는 생각보다 더욱 상당했다. 나중에는 버리고 싶을 만큼 어깨가 무거웠다. 게다가 하필 그 날은 걷고 걸어도 우리가 들어가서 몸을 녹일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어렵게 매고 온 닭을 그냥 버릴까 했던 그때, 다행히 인적 없는 어느 과수원의 초막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겨울내내 사람이 머문 흔적이 없는 곳이었다. 어머니는 바닥에 모닥불을 피우고, 초막 주변에 있는 깡통들과 솥뚜껑을 주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하얀 눈을 떠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물이 끓어오르자 어머니는 닭의 털을 뽑고, 가지고 다녔던 맥가이버 칼로 대충 닭을 조각내어 삶았다. 뽀얀 국물이 올라오며 닭이 익어가는 향이 얼마나 좋았던지 침을 꼴깍꼴깍 넘어갔다.
마침내 닭이 익었다. 간을 맞출 소금 하나 없었지만 닭다리를 하나 잡고 뜯으니 그 순간에는 그 닭다리가 지구상 그 어떤 음식보다도 맛있었다. 얼마 만에 먹는 고기인지... 우리 가족은 닭 비린내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너무도 맛있게, 숨소리도 내지 않고 허겁지겁 닭고기를 먹었다. 그러고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배부름과 포근함에 취해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모닥불의 불씨가 꺼질 즈음 어머니께서는 몸을 쭈그리고 서로에게 기 대어 자고 있는 우리들을 챙기시며, 땔감이 떨 어진 것을 보시고 불이 꺼지지 않도록 땔감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셨다.
그런데 온통 눈이 가득 쌓인 어둠 속에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각목을 불에 때려고 주워서 꺾으시다가 그만 한 각목에 박혀있던 대못을 밟고 마셨다. 어머니의 발은 못에 관통되었고 삽시간에 퉁퉁 부어올랐다. 어머니는 천으로 발을 대충 묶고 지혈을 하셨다. 끔찍한 고통이 발끝에서부터 전해져 왔지만 어머니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을 걱 정하시기 보다는 이제 어떻게 여정을 이어갈까를 걱정하셨다.
그렇게 한참을 통증과 싸우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박 잠드셨던 어머니는 그 잠깐 동안 차를 타고 이동하는 꿈을 꾸셨다. 잠에서 깨신 어머니는 그 꿈을 생각하시며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차를 얻어 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셨다. 중국말도 못하고 어떤 사람과 마주칠지도 모르지만 도박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북 조선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나의 한자 실력이 빛을 발했다.나는 ‘길림(吉林)’이라고 한자로 종이에 썼고, 우리는 그 종이를 들고 걸어서 강변도로까지 나왔다. 처음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손도 내밀지 못하고 몇 대의 차를 그냥 보냈다.
그러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어 손을 흔들었고, 지나가던 용달차 하나가 우리 앞에 멈추어 섰다. 나는 길림이라는 한자가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시계와 기차를 그려서 보여주었다. 그 아저씨는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에 태워 주었다. 아저씨 눈에는 우리가 매우 의심스럽고 위험해 보였을 것이다. 그 당시에도 중국으로 넘어 오는 북한사람들을 숨겨주거나 도와주면 많은 벌금 등 처벌과 불이익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우리 남매들의 모습이 안쓰럽고 딱하셨는지 더 이상 캐묻지 않으시고 운전만 하셨다. 그 와중에 우리는 졸지도 않고 창밖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압록강 과 북한이 계속 보였다. 당장이라도 북한 군인들이 넘어와 우리를 데리고 갈 것 같아 자꾸 신경이 쓰였고 불안했다. 한참을 달리자 마을들이 보였고 우리 눈앞에는 중국 변방대 군인들이 검열하는 초소가 보였다.
검문소에서 모든 차량을 검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저씨는 예상을 하셨는지 차를 검문소에서 멀찍이 세우시고는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 하셨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리시며 차 문을 잠그셨다. 우리 마음은 차를 탄 것에 대한 후회로 가득해졌다. 영락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 가 된 우리는 가슴을 졸이며 아저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한참을 군인들과 이 야기를 하셨고, 다시 차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특별한 검열 없이 그곳 을 통과할 수 있었다.
검문소를 통과할 때 아저씨의 표정은 다소 비장하셔서 우리는 아무 말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달리고 달려 림강(臨江)이라 는 도시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중국 도시의 광경에 동생들은 “우와, 우와!”를 연발했고, 길 바닥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와 멀쩡해 보이는 귤, 만두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종알거렸다. 하지만 나는 불안하기만 한 것이 도무지 역이 보이지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도 않으니 물어볼 수도 없었고, 또 고마운 아저씨를 의심하면 안 될 거 같아 내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저편 멀리 뾰족하고 높은 시계탑이 보였다. 그제야 우리가 제대로 잘 도착 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아저씨는 기차역 옆 골목에 차를 세우시고 우리를 내려주셨다. 그리고 나와 동생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가라고 손짓하셨다. 떠나는 아저씨에게 우리는 고마움을 다 표현하지도 못한 체 배꼽인사만 여러차례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림강시 기차역 앞에서 우리는 난생 처음 도착 한 중국의 도시 모습에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그러다가 역 근처에 “림강조선족식당” 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국경지역 도시나 마을에는 조선말을 하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고 간판도 한글로 적힌 것이 많지만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나는 조선말 간판이 신기했고, 오랜만에 보는 한글이 반갑기도 하고, 또 식사 를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 식당으로 뛰어 들어 갔다. 다른 가족들도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식당을 향했다. 우리는 우리의 몰골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하게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몇날 며칠 제대로 먹지 못해 허기진 우리는 식당 안에 모든 것이 신기했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 식당의 주인아 주머니는 한참을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더 니 “어머나! 세상에! 저기… 북조선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눈에 보이는 꼬락서니나 말하는 투나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너무 놀란 우리 가족 은 동시에 "아니에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아주머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 아니, 딱 봐도 그런데... 빨리 이리 오시오. 지금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되오." 라며 우리를 식당 뒤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는 방 하나를 열어주 셨다. 우리는 주인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그 여관방에 들어갔다.
방에서 엄마의 발을 살펴 본 아주머니는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며 놀라셨다. 어머니께서는 돈을 좀 줄 테니 진통제를 구해줄 수 있는지 부탁하셨고 아주머니는 알겠다며 문을 잠그고 나가셨다. 한시름 놓은 우리 는 따뜻한 방안에서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께서 돌아오셨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에게 쓸 진통제와 함께 허기진 우리를 위해 죽을 쒀서 상을 차려주셨다. 우리는 죽으로 모처럼 제대로 요기를 했다.
진통제를 드시고 쉬면서 어머니 발의 통증도 점차 가라앉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깨끗하게 씻고 묶은 때를 벗겨냈다. 입고 있던 옷도 아주 해어지고 엉망이었는데 아주머니께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여러 크기의 옷을 한 보따리를 가지고 오셨다. 한 숨 돌리신 어머니께서는 우리의 목적지인 길림시를 가기 위해 아주머니께 도움을 요청했 다. 아주머니께서는 무슨 일로 길림시에 가려 고 하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어머니께서는 거기 친척이 있어서 도움을 받으려 한다고 얼버무리 셨다.
그러고는 다시금 도움을 요청하며 가지고 계시던 돈 얼마와 작은 금덩어리 하나를 아주머니께 드렸다. 아주머니께서는 바로 기차표를 구매해주셨다. 다행히 빠른 기차표가 있었지만 이곳은 시골이라 길림까지 한 번에 갈 수 없었다. 기차의 종점은 통화시(通化市)였는데 그곳에 내리면 다시 한 번 기차를 타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머니의 도움으 로 우리는 무리없이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처음 경험하는 중국의 기차는 모든 것이 신기 했다.
특히 승객들이 열차 안에서 삶은 차단(茶蛋) -중국에서 간식으로 먹는 차단(왼쪽)과 해바라기 씨-을 먹고 해바라기씨를 엄청 빠른 속도로 까서 먹는 모습과 그 소리가 이상하게 재미 있었다. 그렇게 쉼 없이 사람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종점에 다다랐다. 이제 다시 기차표를 사야했는데 중국말을 모르니 어떻게 표를 구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 떻게 하면 기차표를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역의 의자에 앉아있는데 의자 뒤편에서 조선말이 들렸다. “하... 이제 들켰어. 어떡하지?” “그러니까 내가 조심하라고 하지 않았나. 당신 안까이 (아내)한테 들키지 않게.” “그래서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해? 이 동네에서는 이제 더는 못 산다.” 조용히 듣고 있으려니 아무래도 내연관 계의 커플인 것 같았다.
그 사람들 사정은 알 바 아니었지만 조선말 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다. 우리는 그 커플에게 기차표를 구매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서 돈을 쥐어주었다. 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흔쾌히 표를 대신 구매해 주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기만 하지 않고, 둘이서 숙덕숙덕 하더니 자기들도 길림시로 가야 겠다며 같이 기차표를 구매했다. 그렇게 같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들은 내내 우리에게 길림에는 왜 가는지, 친척들이 거기 사는 것이 맞는지, 친척이 연락은 되는지 등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얘기하게 되었고, 어머니는 친척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 크게 한턱 낼 것이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셨다. 그런데 그들은 ‘친척을 찾지 못하게 되면 산둥에 가서 일할 수 있다, 그 곳에는 여성분들이 일하기 좋은 일자리가 많다’며 우리를 꼬드겼다.
이미 기차역에서 자신들의 행로를 고민하던 둘의 대화를 뒤에서 들었던 우리는 이 사람들이 단순히 친절을 베푸 는 것이 아닌 다른 꿍꿍이속이 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 가족을 어디론가 팔아먹으려는 심산일 것이다. 도움을 받았고 우리 신분이 불안하다보니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떼어낼까 고민하였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길림시에 도착했다.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목적지에 한 발 앞까지 온 것 이다. 우리 가족과 그 커플은 택시를 잡아탔다. 우리는 친척이 대한민국 영사관 근처에 있다고 둘러대었기 때문에 그 커플은 택시기사에게 영사관으로 가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택시 기사가 도대체 영사관을 찾질 못했다. 그렇게 도시를 거의 두 바퀴를 돌았지만 헛수고였다. 어머니는 왜 영사관이 없는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해서 안절부절 못하셨다. 이 와중에 그 이상한 커플은 우리에게 친척집에 가기 어려워졌으니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계속 강하게 이야기하여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할 수 없이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우리를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려는 그 커플에게 화장실만 잠깐 다녀오자며 근처에 조선말로 ‘연희조선족식당’이라고 적힌 간판을 단 식당을 가리켰다. 빨리 볼일 보고 오라는 말에 우리 가족은 그 식당에 들어갔고, 들어가자마자 주인 아주머니에게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다.
주인아주머니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우리를 가게 안쪽 방에 데리고 가서는 조용히 있으라고 하시고 문을 잠그셨다. 잠시 후, 우리가 도통 나오지 않자 그 남녀 커플이 가게로 들어왔다. 아주머니와 그 커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커플은 아주머니를 추궁하며 우리의 행방을 찾으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우리가 왔다가 볼일 보고 뒷문으로 나갔다고 둘러대셨다.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 커플이 아주머니를 수상쩍게 여기며 추궁하자 아주머니는 가게 장사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며 큰소리 치셨고 결국 그 커플은 가게에서 쫓겨났다. 이런 상황을 소리로 듣고 있던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점심시간이 지나고 손님이 빠진 이후, 아주머니는 우리가 있는 방의 문을 여셨다. 그리고는 우리를 위해 난생 처음보는 음식들로 한상 부러지게 차려 주셨다.
그동안 제대로 음식조차 먹지 못했던 우리를 위해 섬겨주신 것이다.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진수성찬에 눈이 뒤집혀서 허겁지겁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대부분의 음식에는 향신료가 첨가되어 자극적이었고 기름진 음식들로 한 가득이었지만 너무나 감사하고 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결국 얼마 먹지도 못하고 포만감과 느끼함에 수저를 내려와야 했고, 오랜 기간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갑자기 과식을 하는 바람에 우리 가족 모두 배탈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차례로 화장실로 들락날락하는 것을 본 아주머니께서는 자신이 차려준 음식 때문에 우리가 고생하게 되었다고 속상해 하셨다.
우리를 도와주신 식당 주인아주머니를 우리는 ‘은명이 이모’라고 불렀다. 이모는 식당일을 마치시고도 주로 식당 뒤편 방에서 쉬셨고 본인 집에는 잘 들어가지 못하셨다. 날이 어두워 오고, 식구는 많고, 당장 지낼 곳은 없었던 우리를 위해 이모는 선뜻 자신의 집을 내어주셨다. 건강상태도 좋지 못했고 몰골도 말이 아니었던 우리에게 은명이 이모의 친절은 정말 큰 도 움이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와 동생들은 이모가 마련해준 집에 머물렀고, 나는 식당에서 이모 일을 도와드리며 이모와 함께 지냈다. 이모는 특별히 나를 예뻐해 주셨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한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이모와 나는 저녁도 먹고 쉬면서 이모가 하시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 리고 낮에 식당이 붐비는 바쁜 시간이면 나도 이모를 도와 음식 서빙도 하고 갑자기 필요해진 식자재나 물품들을 인근 가게에서 사오기도 했다.
식사 시간이 지나 가게가 한적해지면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요리해서 나에게 먹이기도 하셨다. 이모는 단골손님들이나 이웃에게 나를 시골에서 올라온 조카라고 소개했다. 이모와 나는 정말 가까운 가족과 같았다. 이모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하셨고, 또 남편과는 이혼하고 딸을 홀로 키우셨다. 혼자 돈을 벌어서 고등학생 딸을 앞으로 대학까지 뒷바라지해야 했기에, 이모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셨다.
하루 종일 그렇게 일을 하신 이모는 저녁이 되면 꼭 어딘가가 아파와 잠을 이 루지 못하곤 하셨다. 나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모의 몸을 마사지 해 드렸고 이모에게 힘내시라고 긍정적인 말도 해 드렸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주일이 되면 예배 드리러 가시는 이모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이모가 어떤 활동이나 모임에 나가시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하루는 이모에게 예배는 어디에서 하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이모는 교회에 가신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이모가 교회에 가시는 주일에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혼자 방에 있으면서 이모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는데 너무나 지루하고 심심했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린 이모는, 교회에 서 돌아오시면 나에게 성경말씀을 읽어주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속으 로 ‘이모가 많이 외로우셔서 어딘가에 기댈 곳 이 필요하구나.
내가 이모를 더 이해하고 도와 드려야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밤에 일을 마치고 이부자리를 펴 놓으면 이모는 꼭 성경책 을 꺼내 묵상 하셨고, 흥얼거리며 찬송가를 부르셨고,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 하셨다. 그런 이모를 보고 있으면 하루의 고단함이 보이지 않고 참 행복해 보였기에 나는 늘 마음속으로 이모를 응원했다.
이모가 전문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주거나 적 극적인 전도를 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또 같이 교회를 다니거나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모의 신앙은 나에게도 소중하게 다가왔다. 이모는 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늘 하고 다니는 자그마한 십자가 목걸이가 늘 있었다. 나는 커서 꼭 이모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 다.
하루는 어떤 일로 힘들어하는 이모에게 힘이 되고 싶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이모한테 꼭 순금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사드릴께요” 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이제 막 10대 초반 소녀인 나의 당돌한 이야기를 들으신 이모는 웃으시며 “너 밖에 없다” 하시고 나를 꼭 앉아주셨다.
그러면 나는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모 진짜예요! 꼭 사드릴 거예요!” 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밤마다 웃고 울면서 이모와 함께 지 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든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예비해주셨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우연이겠지만, 나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본다. (계속)
-----------------------------------------------------------------------------------------------
이끄심 5화 - שי야샤브: 거류하다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5
은명이(가명) 이모 덕에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생활은 정리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여전히 대한민국이었다. 어머니는 이모에게 길림시에 있다는 대한민국 영사관을 찿고 있다고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런데 길림시에는 한국 영사관은 없고 베이징에 가야 한다고 했다. 기껏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가 길림에 도착했던 99년 초에는 동북 지역에 한국 영사관이 없었고, 그 후로 몇 개월 뒤에야 심양(선양)에 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우리는 대한민국 영사관이 길림시에 있는 줄 알고 그곳으로 왔던 것이다. 우리는 한국행을 위해 베이징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곳에 가면 당연히 한국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들으신 은명이 이모는 아무래도 어머니가 먼저 상황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그동안의 여정이 너무나 고달프기도 했고,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이들을 다 데리고 베이징에 가는 것은 분명 위험 할 것이라는 의견이셨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베이징 방문에 필요한 모든 부분에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베이징에 가신 어머니께서는 그 곳 상황이 그리 쉬워 보이지 않다고 느끼셨다. 베이징 대한민국 대사관 근처는 공안 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 기웃거리거나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이면 단번에 그들의 의심을 사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며칠간 그 주변을 배회하던 어머니께서는 베이징보다는 제3국, 베트남을 통하면 상대적으로 쉽게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셨다.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다음 목적지를 정하신 어머니는 길림으로 돌아온 후 베트남으로 갈 준비를 마치셨다. 가족 모두가 함께한 이번 여정은, 감사하게도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은명이 이모의 도움이 매우 컸다.
덕분에 우리는 순조롭게 중국 남부의 남녕(난닝)시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남녕시의 첫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찜질방 같은 무더위가 우리를 반겨주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 무더위 속에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뜨거운 차를 마시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베트남에 가보니 베트남도 남녕시와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베이룬강 (Beilun River, 北侖河)을 건너야 했다.
또 다시 강을 건너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 는 우리의 여정에는 도강(徒江)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 따라다니는 듯 했다. 관광객처럼 위장하고 베이룬강 지역을 관람하는 쪽배를 하나 섭외했다. 그러다 한적하고 외진 곳에 다다랐을 때 배를 운전하는 아저씨에게 우리끼리 구경하고 싶다며 돈을 주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서 베트남 땅에 발을 내디뎠고, 잘 닦여있는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더니 순식간에 총기를 든 베트남 국경 수비대들이 우리를 쫒아왔다. 알고보니 그들은 우리가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강을 넘어오는 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꼼짝없이 베트남 국경 수비대에서 취조를 받아야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호통을 치고 윽박질러도 우리는 두렵지 않은 척 해야 했고, 절대 중국인이 아니라고 우겼다.
우리는 끝까지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우기며 한국 영사관에 우리를 데려가 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여행 중에 여권을 분실했다고 둘러대었다. 베트남에서의 취조의 과정은 언어적 장벽으로 인해 상당히 진전이 더뎠다. 중국말이나 한국말, 영어 모두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그들은 우리의 사진을 찍고, 우리의 한국 집주소 를 적어내라고 했다.
당연히 한국에 집이 없었던 우리는 은명이 이모가 주셨던 한국 화장품 샘플에 적혀 있는 화장품 제조사 주소 를 적어냈다. 그곳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고 위험한 상황도 여러번 있었지만, 오직 대한민국에 가기 위한 일념으로 모든 고통과 수모 그리고 어려움을 견뎌냈다. 그렇게 산속에 있는 국경수비대에서 한 달 넘게 생활을 하고 도시와 가까이 맞닿은 본부에서 약 2개월 동안 생활하였다.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베트남어도 몇 마디 익히게 되었고, 안면을 튼 베트남 군인들도 전보다는 부드러워진 태도로 우리를 대하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나와 엄마는 그들의 안내에 따라 국경 수비대 대령 집무실로 들어가게 되었고 수화기를 전해 받았다. 나는 단번에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온 반가운 소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설레고 기뻤던지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힘들었다. 그렇게 조심스레 어머니는 수화기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한민국 대사관입니 다. 먼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사정상 탈북자를 받을 수가 없으니 오시던 길로 되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내 귀를 의심 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이셨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려고 했으나 이미 전화기에서는 “뚜, 뚜, 뚜” 하는 기계음만 흘러나올 따 름이었다.
갑자기 우리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이 바뀐 것 같았다. 1분 1초가 영겁의 시간 같았고 하루가 1년 같이 느껴졌다. 한국에 가겠다는 희망을 품고 먼 길을 돌아온 우리에게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우리를 거부했으니,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인가? 설상가상으 로 24시간 안에 북측에서 우리를 잡으러 온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선택 의 여지가 없었다.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만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무조건, 우리가 가진 모든 짐들을 버리고서라도, 그날 밤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결단했다. 모두가 잠든 밤 12시쯤이 기회라고 판단했다. 우리는 일찍부터 방에 불들을 소등하고 보초서고 있는 경비병이 자리를 비우기만 바랬다.
이윽고 둥근달이 환하게 떠오르고 밤이 깊어졌다. 마침 늘 성실히 자신들의 임무를 다 했던 경비병이 그때만큼은 마치 우리에게 도망갈 기회라도 주는 마냥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이때를 틈 타 시설을 탈출했다. 그리고 처음 강을 건너 왔던 산너머 강변을 향해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몇 시간을 뛰었을까? 저만치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경비대원들이 추격해 온 것이었다.
동남아의 우거진 숲들과 가시덩굴을 헤집으며 군견들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는 듯했다. 온 몸이 가시에 긁혀가며 우여곡절 끝에 처음 출발지점이었던 베이룬 강변에는 도착했지만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처음 건널 때와는 완전히 다른 강의 모습이었다. 3개월이 다 되도록 그곳 베트남에서 우기를 보냈던 지라 그 사이 강물이 크게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대로 있다가 잡힐 수는 없으니 우리는 결국 넘실거리는 강으로 들어설 결단을 했다. 서로를 잃지않기 위해 평소 가방에 챙겨두었던 밧줄로 황급히 서로의 몸을 묶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절대로 물을 마시지 말고 발버둥치지 말라고,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뜬다고 신신당부하셨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현실적으로 거센 물살 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저 물살에 몸을 맡긴 상태로 반대편으로 떠내려가려고 애썼다.
강물에 삼켜지지는 않을까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데 그 와중에 오토바이 소리와 군견들이 짖는 소리가 가깝게 들려왔다. 우리는 사투 끝에 새벽이 밝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할 무렵에야 건너편 중국 땅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다행히 다치거나 물살에 휩쓸린 사람 없이 모두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무사히 탈출한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실망과 절망감은 너무 컸다. 뚜렷한 목적과 희망을 가지고 이곳까지 왔는 데 강을 넘어온 우리는 이제는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일단 우리는 길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다시 돌아 왔다는 것 자체는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한국행을 바라던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꺾여 버렸다. 무엇보다 북한에서부터 목적으로 삼았던 한국행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사그라졌다.
대한민국에서 우리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제 북한도, 남한도 갈 수 없으니 중국에서 잘 살아 보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중국 땅이지만 당장 우리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우리 힘으로 살아가겠노라 결단하고 길림시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사실 그 도시도 여정 간에 잠시 머물던 곳에 불과했으니, 우리는 집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은 길림시 강남과 강북을 가로지르 는 송화강(松花江) 다리 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낙심은 컸지만 중국에서 살기로 결심을 한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시기 시작했다. 다행히 은명이 이모네 식당에서 일을 하셨던 주방 큰어머니가 우리의 사정을 알고 자신의 집에 와 있으라고 해 주셨다. 어머니는 침과 뜸을 놓을 줄 아셨는데, 평소 관절이 안 좋으셨던 큰어머니가 어머니를 많이 의지하시기도 했고, 오래전 부터 남편과 이혼하고 외로운 삶을 살고 계셨기 때문이기도 했다.
-송화강(松花江) -길이는 약 1,960km, 백두산 천지 비룡폭포에서 시작해 길림성 과 흑룡강성 지역을 흐르는 강
비록 나무로 불을 때는 단칸방의 작은 집이었지만, 당장 이몸 하나 덥혀줄 곳이 있다는 것이 우리 가족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와 주방 큰어머니는 낮에 일하러 나가셨다. 불법체류자인 우리 남매는 혹시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봐 밖에서 자유롭게 다니지 못했다. 당시 중국은 1가구 1자녀 정책 때문에 가정에 아이들이 2명 이상 되면 중국정부가 단속도 했고, 평생 벌금과 함께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라면 월급까지 삭감시키는 어마무시한 정책이 있었다.
이런 상황 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나 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까지 뿔뿔이 흩어져야 할 상황에 놓였다. 우리는 당연히 학교도 다닐 수 없었다. 우리는 주로 뒷산에 가서 사 람들 눈에 띄지 않게 놀다가, 해가 질 때 쯤 땔감으로 쓸 죽은 나무나 떨어진 가지들을 모아서 주워서 내려오곤 했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우리를 도와주신 여러 은인들이 우리 가족을 생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한 은인 중 팡즈 이모는 어머니가 우연히 버스정류장에서 만 난 조선족 버스운전사였다. 중국말을 못하는 어머니를 보고 시골에서 온 조선족인줄 알고 말을 걸어 오셨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팡즈 이모는 처음에는 북한사람을 도왔다 가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생각하셔서 어머니를 외면하셨지만, 나중에 나와 동생들을 보시고 마음이 녹으셨는지 우리 가족을 많이 보살 펴 주셨다.
처음 우리 남매들을 보시고는 우리를 붙잡고 하염없이 우시던 팡즈 이모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집에만 갖혀 있는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셨던 팡즈 이모는 지인이 하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지낼수 있도록 알아봐 주셨다. 그곳은 노래방이 딸린 2층짜리 카라오케 식당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낮에는 주방에서 커다란 접시를 닦았고, 손님들이 다 나간 밤에는 청소를 담당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많은 시간에는 절대로 홀에 나가지 않았다. 식당주인이셨던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안쓰러워 하셨고 늘 맛있는 음식으로 위로해 주셨고 가끔은 방에 가서 쉬라고 편의도 봐 주셨다. 나는 그곳에서 재워주고 음식을 주는 것 만으로 감사했기에 누구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곳에는 지방에서 올라오셔서 일하는 이모님들이 많았고, 식당 뒷편에 있는 직원들 숙소가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한달을 지냈다. 그곳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 일과가 끝나면 여전히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는 늘 몰래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식당에서 일하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나를 대견해 하면서도 늘 위로해주셨던 건 팡즈 이모셨다. 그리고 자유롭게 이모의 집에 드나들 수 있도록 집을 열어주셨다. 팡즈 이모의 집은 내 맘에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이런 안식처가 없었다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던 중국에서의 생활을 어찌 견딜 수 있었을까.
한편 우리 가족은 불법체류자로서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족 이모들은 항상 우리 집이 애들이 많다고 걱정을 하셨다. 앞서 말했다시피 중국은 1가구 1 자녀 정책으로 2~3명의 아이들이 한 집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의심을 사게 되고 신고대상 이었다. 그래서 한 명은 기숙학교로 보내야 서로가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여자보다는 남동생이 씩씩하게 혼자서도 잘 지낼 것이니 남동생을 기숙학교로 보내라고 엄마를 재촉하곤 했다.
남동생은 결국 가짜신분을 만들어 다른 도시의 기숙학교로 보내지게 되었다. 여동생도 감사하게도 학교를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우리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활력을 되찾으신 주방 큰어머니께서 어머니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여동생의 총명함을 보고 교직에 종사하고 있는 친척에게 여동생이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여동생은 주방 큰어머니의 친척집에서 지내며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로 이해해주고 유일하게 의지하던 여동생이 없으니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 진 것만 같은,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괴롭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여동생이 없는 1년을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방학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여동생을 보니 너무 반가웠다. 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보며 부러움과 약간의 질투심이 없지는 않았지만, 여동생도 나름대로 남의 집에서 눈칫밥을 먹어가며 혼자 공부하며 쓸쓸히 지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왔고 여동생과 헤어지기가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하루는 큰어머니와 어머니를 붙잡고 우리를 갈라놓지 말라고 울면서 사정을 했더랬다. 아무래도 어린 동생들에 비해 나이가 있다 보니 나는 학교에 가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기 어려웠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는 분을 통해 한 조선족학교 교장선생님을 소개받으셨고, 교장선생님 방으로 찾아가 몇날 며칠을 무릎을 꿇고 여동생과 나를 수업만 듣게 해달라고,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든 감당하겠다고 간청하셨다.
교장선생님은 난색을 표하셨지만, 우리 가족의 딱한 사정과 어머니의 끈질긴 노력 끝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해 주셨고 그렇게 나의 최대 소원이었던 여동생과 함께 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소학교 1학년을 마친 여 동생은 2학년으로, 나는 처음부터 5학년으로 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나는 중국어를 하나도 못해서 수업만 되면 졸기 일쑤였다. 그나마 예체능 과목은 따라갈 만 했지만 한어(중국어 국어) 수업 시간만 돌아오면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 말에 엎드려있기 십상이었다.
답답했던 담임 선생님은 내 자리를 전교1 등 하던 친구인 환우의 옆자리로 옮겨주셨다. 환우는 선생님께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가 숙제를 하도록 옆에서 보채다가, 나중에는 답답 했는지 내 숙제를 대신 해주기 시작했다. 사실 환우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학교에서 점심시간만 되면 도시락 사 먹을 여건이 안 됐던 나는 늘 운동장 한켠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수업 시작하기 전에 교실로 들어오곤 했다.
한 번도 학교에서 점심을 먹은 것을 본 적이 없는 환우는 내가 늘 굶는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하루는 자기 어머니가 싸 주신 3단 도시락을 나에게 통으로 내어 주기도 했는데, 나는 또 그것을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가져오다 도시락 국물이 가방에 흘러서 책이 다 젖은 적도 있다. 처음에는 나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자기 도시락까지 건네주는 환우에 대해 미안함은커녕 고마움도 느끼지 못했지만, 환우가 나 때문에 너무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공부를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하니 한어 교과서를 통으로 외워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공부를 시작했다. 이런 저런 주변의 도움과 나의 노력까지 더해져 나중에는 중국어를 상당 수준으로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에 힘쓰기 시작하며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내일 부터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어떤 위험을 감지하셨는지 갑작스럽게 이사를 결정하신 것이다. 우리 가족은 얼마 후 한 시골 조선족 마을로 이사를 갔다. 시골로 옮기면서 어머니는 그간 모아놓은 돈을 털어 가족들의 가짜 호구를 만들었다. 이제 가짜이긴 하지만 호구가 생긴 덕분에 문제없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여동생은 체계적으로 학교를 꾸준히 다녔지만, 나는 또 월반에 월반을 걸쳐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학생의 신분에 충실했고 여동생과 나는 최선을 다했다. 나중에 나는 시골학교에서 반장을 했고, 여동생은 전교회장까지 할 정도로 공부나 여러 방면에서 우수했다.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지만 은인들의 도움과 어머니의 헌신 덕분에 우리의 중국 정착은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다. 몇 년간의 수고 끝에 이제야 그곳에서의 미래를 조금씩 그려볼 만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혼돈속에 빠뜨릴 어둠의 그림자가 서서히 몰려오고 있음을 그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계속)
----------------------------------------------------------------------------------------------------------------
이끄심 6화 - 다시 그곳으로 탈북민 수기 김서윤 전도사 23,6
어머니는 어떡하든 중국에서 성공해서 잘 정착하고자 애쓰셨다.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 공부도 시키고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이방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서 살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 하셨다. 그러나 뜻밖에 상황은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2002년 6월 초여름이었다. 한국 축구 대표팀을 응원하는 “오! 필승 코리아”가 중국에서도 울려 퍼졌다.
나는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이면 밤새 응원하고 싶어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한국이 폴란드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그 열기에 나도 덩달아 들떠 있었다. 그런 열기속에 그날도 하교하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나를 사업 미팅자리로 데리고 가셨다. 중국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어머니를 도와 통역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5분 정도 흘렀을까... 그 곳에 갑자기 공안(公安)들이 들이닥쳤다. “움직이지마!” 라고 소리치며 순식간에 공안들이 엄마와 나를 에워쌌다. 나와 어머니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고, 우리는 개처럼 끌려 봉고차 에 태워졌다. 나는 난생 처음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처지를 경험했다. 잡혀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따져 물었지만 그들은 공안국(公安 局)에 가면 알게 될 것이라고만 했다. 너무 놀란 가슴은 쿵쾅거렸고, 무서워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공안국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어머니는 각각 별도의 장소에서 24시간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의 죄목은 불법체류였다. “너희는 북조선에서 왔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불법적으로 거주하고 돈을 번 죄가 크다”고 했다. 우리는 돈을 써서 호구를 만들었기 때문 에 끝까지 중국인이라고 우겼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항변은 제대로 듣지 않고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거리더니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왔다. 너희를 신고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공안들은 우리의 정체를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너희 같은 사람을 신고하면 나라에서 포상금도 주는데 너 같으면 신고 안하겠는가?” 그렇다. 어머니가 맘에 들지 않았던 동업자 부부가 사업을 독차지하고 포상금을 받겠다고 우리를 신고해버렸던 것 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중국에 살면서 만났던 분들 대부분은 우리를 신고하지 않고 눈 감아 주시거나 불쌍히 여겨주신 좋은 분들이었다. 그렇지만 악한 사람들의 함정을 언제고 운좋게 피해갈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돈으로 호구까지 만들었건만 우리는 결국 이 땅에서 불법 채류자와 이방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 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짜 호구를 만들어서 중국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는 죄목이 추가되었다. 그 시각, 공안들은 우리 집을 샅샅이 훑어 쑥 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가족사진을 우리에게 들이밀고는 사진에 있는 여동생과 남동생의 행방을 물었다. 그 사진은 비록 신분도 불안하고 갈 곳도 없지만, 그럼에도 낭만과 희망을 가지고자 애쓰는 그 순간의 우리들의 모습을 기록하기 위해 찍어둔 가족사진이었다.
중국에서 사는 그동안 어머니는 우리들의 모습을 종종 사진으로 담곤 했다. 길림시 송화강변은 겨울이면 버드 나무가 하얀 눈꽃이 피어올라 아름답고도 신기할 정도였는데,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희망을 담은 그 사진이 이제는 내 동생들을 위협하는 단서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남동생은 다른 도시의 기숙사 학교에 있었고, 여동생은 전교회장으로 늦게까지 학교활동을 하느라 마침 집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생들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둘러대었다.
그 사진과 함께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을 모두 중국공안이 압수해 갔다. 고향에서 부터 간직해 온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그리고 그리운 아버지 사진도 그날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우리 손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와 어머니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조사에 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중국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미련도 사라졌다.
다만, 미친듯이 우리를 엄습해왔던 것은 북한으로 가면 우리는 총살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평생 바깥구경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생각하면서도 여 동생은 붙잡히지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 했다. 밤새 진행된 취조가 끝나고 아침이 되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서 봉고차에 태웠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창밖으로 내가 살던 아파트 근처가 눈에 들어왔다. 여동생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여동생을 잡으러 온 것이었다.
‘아마도 여동생은 쑥대밭이 된 집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직감하였을 거야. 만약 여동생이 다른 이모들 집으로 피신을 가 있으면 함께 북송 되지 않을 수 있어.’ 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집 앞에 서 정신나간 사람처럼 서있는 여동생을 발 견했다. 동생은 엄마와 언니를 찾으며 아파트 1층에서 밤새 울고 있었던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공안이 눈치채기 전에 이쪽으로 오지 말라는 몸짓을 취해 봤지만, 내 모습을 본 동생은 그런 신호는 보이지 않았는지 곧바로 나를 향해 달려와 안겼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엉엉 울었다. 동생을 잡으러 온 공안은 그 모습을 보고는 별일 아니니 울지말고 차에 타라고 했다.
그리고 “속상하겠지만 너네는 중화인민이 아니어서 너희가 살던 고향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며 너희 고향에 가서 살면 되지 왜 여기 와서 사는 거냐고 했다. 그들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다. 목숨을 걸고 넘어온 우리의 노력이 모두 헛것이 되었다는 허탈함과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 셋은 도문 변방대 구류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길림역에서 기차를 통해 도문으로 가는데, 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커다란 트렁크에 들어있는 수갑들이 보였다. 별의별 종류의 수갑이 들어있었는데, 어린 마음 에 그 수갑들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졌다.
공안들은 우리를 보며 아이들도 수갑을 채우네 마네하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동할 때는 수갑을 차고 차 안이나 기차 안에서는 수갑을 하지 않는다는 배려 아닌 배려를 받았다. 마침 오후 5시쯤으로 퇴근시간이어서 역에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 수많은 인파 사이로 중국 연변 도문시에 위치한 공안 변방대대 변방 구류심사소. - 도문변방수용소라도고 불리며 북송 예정 탈북자들이 주로 수감된다.
참고 기사: “중 도문변방수용소에 탈북자 수십 명 구금 중”, 자유아시아방송, (2021.08.04.) -에 수갑이 채워져 탑승구로 끌려가는 그 길이 그렇게 치욕스러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넘어올 수밖 에 없었던 우리의 마음을 그 누가 알아줄 수 있을까? 절망한 우리는 기차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식사도 거부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엄마와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던 옥이 이모는 우리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자신의 집을 팔아서 라도 손을 써서 도와주시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풀려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가 또 신고하면 다시 잡혀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처지라는 것을 깨달은 우리는 옥이 이모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리를 숨겨주시고 보살펴 주신 이웃들 덕분에 위험을 넘기고 이렇게 살아왔는 데 결국은 북한으로 강제송환 당한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빠지면서도 우리를 도와주셨던 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우린 세 모녀는 물 한모금 넘기지 못했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도문 변방대에 도착한 우리는 약 10일 정도 그곳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할 것이 많은 사람들은 두 달 넘게 머물기도 했지만, 우리는 중국에서 별다른 불법을 행하지 않았기에 조사 할 것이 별로 없었다.
그곳에서 만난 어떤 한 이모님은 십수 번이나 북송 을 경험하셨다고 한다. 그분은 북송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죽지는 않지만 많이 힘들 것이라고 일러주셨다. 그리고 북한에 가면 굶으니 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미 넋이 나가버린 우리는 여전히 음식이 있어도 잘 먹지 못했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고 음식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며칠을 먹지도 않고 두려움에 벌벌 떨며 잠도 못 자는 우리 가족을 보며 변방대원들마저 우리를 걱정하기도 했다.
이들은 갓 군에 입대하여 변방대로 배치를 받았는지 딱 봐도 나이가 어려보였다. 그들은 중국말에 유창한 나와 동생에게 자주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너무 걱정 말라며, 북조선에 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니 다 살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북조선에서 북 송된 사람들에게 집도 주고 먹고 살게 해 준 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은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는 순진무구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곳에서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했다.
하루는 변방대 군인이 나를 불러 외부 청소 일을 시켰다. 하루 종일 방에만 갇혀 있느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시설의 높은 벽을 바라보며 어린 마음에 ‘이 벽 을 사이에 두고 바깥세상과 단절이 되었구나, 자유가 없는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화장실을 청소하고 거울을 닦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 건물을 벗어나면 얼마나 좋 을까’ 하며 되뇌었다. 청소를 마치고 복귀하는 길에 인솔 군인이 시설의 다른 곳들도 구경시켜 주겠다며 바로 방으로 가지 않고 이곳 저곳 둘러서 갔다.
그러다 변방대 한 구석에 있는 방에서 아이들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그 곳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부터 5살 정도 되는 아이들까지 모아놓은 방이었다. 왜 저 방에는 아이들만 있냐고 물었더니 군인이 하는 말이 기가 막혔다. 중국 공안들이 탈북 여성을 잡으러 갔을 때, 탈북자 엄마들이 도망갈 때 놓고 간 아이들이나, 보호자 없이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잡혀와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한 눈에 봐도 아이들 상태는 좋지 못했다. 이들 중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아이 들은 북한으로 보내진다고 했다. 이들 중 일부는 중국 친척들이 보석금을 주고 빼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거의 방치 상태였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는 중국인이 매우 야만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우리 가족 에게 호의를 베풀고 친절하게 대했던 변방대 군인일지라도 다시는 그들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불법 체류자 신분이라지만 북한사람들이라는 이유로, 또 그들의 자녀들이란 이유로 이렇게 무시하고 인권을 침해하고 함부로 대할 수 있는지... 그들의 태도와 말투, 인권 침해와 차별, 그 이면의 잔인함과 미개함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먹지 못했던 것이 나중에는 그들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는 단식투쟁이 되었다. 다시는 중국에서 살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을 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북한으로 가야 할 날이 왔다. 예상보다 빠른 북송이었다.
아침 일찍 부터 변방대 안은 시끌벅적했고 분위기도 여느 때와 달리 살벌하게 느껴졌다. 명단과 이름이 불린 사람들 순으로 들어올 때 입었던 반팔에 반바지로 갈아입고 나오니, 다시 수갑을 채워 봉고차에 태웠다. 차에서는 그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매우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들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그렇게 중국 도문과 북한 온성을 잇는 도문대교 중간 경계선에 차가 도착했다.
이제는 중국에 남고 싶은 생각도 북한으로 가고 싶은 생각도 모조리 없어지고 그냥 사라지거나 죽고 싶었다. 이것이 제발 꿈이길 바랐지만 이미 다리 중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북한 보위부 사람들의 모습은 이것이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명단을 받고 인수인계가 되면 북한 쪽으로 한 사람씩 넘겨졌다. 넘어갈 때는 수갑을 풀어서 중국 측에서 다시 가져간다. 수갑은 중국 것이니까. 보위부의 수갑은 녹이슬고 사람 수 만큼 충분치도 않아 보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보위부원들과 북한 군인들이 우리를 한 건물 앞마당으로 인솔해 갔다. 우리는 무릎 꿇고 쪼그리고 조용히 앉아있어야 했다. 옆 사람과 말이라도 하거나 기웃거리면 군화 발로 사정없이 채였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 가늠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푹 떨구고 있길 한참이 흘렸다.
한 간부가 우리에게 모두 신발 끈을 풀라고 했다. 신발 끈을 풀어 바닥에 내려놓자, 그 신발 끈으로 옆 사람의 손목을 묶으라고 했다. 그 변 변찮은 끈 하나 없어 신발 끈으로 손목을 묶으라고 하는 꼴을 보며 열악한 북한의 현실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우리는 오래된 목탄차에 실렸다. 시속 15킬로 로나 달릴 수 있을는지 의심스러운 그 목탄차는 덜덜거리며 느릿느릿 산길을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중 한 남자가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을 가고 말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를 잡으려고 보위부원들이 추격했지만 끝내 잡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제발 잡히지 말고 무사히 도망갈 수 있길 빌었다. 그 덕분인지 다행히 그 아저씨는 잡히지 않은 듯 했지만, 열이 바짝 오른 보위부원들은 남아있는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다. 얼마나 산길을 달렸을까... 이윽고 커다란 대문이 나타났다. 문이 열리자 보위부원들이 각목을 하나씩 들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는 잡혀 온 사람들 중 남자들을 피가 철철 날만큼 때렸다. 도망가지 못하게 반쯤 죽여 놓는 것이다. 동생과 나는 그렇게 맞지는 않았지만 그 모든 광경이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웠 다. 보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를 숙이고 있으면 머리를 때리면서 쳐다보라고 했고 눈을 감고 있다 들키면 보라고 했는데 안본다며 따귀를 맞았다.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죄수복은 지급되지 않았다. 잡혀올 때 입고 온 그대로 지내야했다.
우리가 잡혀 온 시기가 여름이었기에 우리는 나중에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되었지만, 우리는 계속 여름옷으로 난방도 없고 창문도 창살만 남아있는 감옥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다. 잡혀온 다른 사람들 중에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거나 씨스루 옷을 입은 여성들도 있었다. 노랑머리나 빨강 머리로 염색한 이들도 있었다.
(목탄차 -유류 대신에 목탄 등을 연료로 사용하여 운행하는 차를 말하는 데 주로 화물차의 적재함 앞부분에 보일러를 설치하고 여기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동력을 얻게 된다. (참고: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www.korea.kr)) 반팔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중국에 살면서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염색을 한 것인데 그대로 북한에 잡혀 온 것이다. 다양한 옷과 머리를 보며 보위부원들은 자본주의에 물들었다며 온갖 욕을 해댔다. 그 중 한 여자 분은 긴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는 데, 하필 그것이 눈에 띠었는지 그 여자는 그 들의 폭력의 먹잇감 신세가 되어 머리채를 잡혀서 벽에 쿵쿵 찍히는 등 말도 안되는 폭행을 당해야 했다.
그곳에서의 학대는 정말 무시무시했다. 임산부에게도 자비란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의 아이를 뱃속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죄였다. “이 간나 새끼, 다른 씨를 배왔구나!” 라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강제로 유산을 시키는데, 약으로 안 되면 배를 발로 차서라도 그렇게 했다.
그렇게 강제 유산을 하게 되면 임산부 역시 생존하기 힘들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보며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바로 북한 보위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중국 변방대는 야만적이라면 북한 보위부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이런 곳에서는 한시도 있으면 안되겠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어린애들이라 많이 맞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상당히 고통을 당하셨다.
왜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냐며 어머니를 심문하기 시작한 이들은, 어머니에게 한국 사람을 만났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썅간나 새끼, 도강이나 하고 말이야! 거기서 남조선 새끼들 만났어 안만났어?!” 어머니께서 만난 적이 없다고 답을 해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 드라마를 봤는지 선교사를 만났는지, 목사를 만난 적이 있는지, 교회를 갔는지 끈질기게 추궁을 했다. 우리가 도문변방대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절대 북한에서 남조선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면 안된다고 우리에게 충고했다.
북한은 그 무엇보다도 한국 사람들을 만나고 기독교인들을 만나는 것을 혐오하고, 그것을 가장 큰 죄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보위부원들이 자백하라고 어머니를 구타했지만 어머니는 끝까지 시치미를 떼셨다. 이미 과거에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사서 보위부에 잡혀간 적이 있으셨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교회는 가본 적도 없고, 성경책이 무슨 책인지도 모른다고 하셨다. 또 시골에만 살아서 한국 드라마는 접하지도 못했다고 하셨다. 사실 나는 K-pop 의 팬이었다. 그때 유행했던 HOT, 터보, SES, 핑클을 나도 너무 좋아했고 디바의 “왜 불러” 라는 노래나 터보의 “검은 고양이 네로”를 즐겨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한국 음악을 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절대로 그것들을 안다 고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우리는 대역죄인이 되는 것이다.
보위부 사람들이 의심하고 열받아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나와 동생의 북한말이 어눌하다는 점이었다. 어려서 탈북을 하고 중국말을 배우다 보니 말투가 북한 말투와 달라졌다. 조선족 이모들이랑 어울렸던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길림시에 사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그 조상들이 남한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말투도 남한 쪽에 가까웠다. 우리는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지만, 보위부에서는 림수경이 북한에 넘어왔을 때 쓰던 말투 같다며 수상해했다. 그 때문에 아무리 봐도 한국 사람하고 같이 지냈을 것이라며 더욱 철저하게 조사를 받았지만, 그들은 우리에게서 어떤 꼬투리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조사를 받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는 시설은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개구멍만한 문이 있는 3평 정도 되는 방이 세 개가 있고, 그 뒤로는 긴 복도가 있었는데, 방 두개에는 여자들이, 마지막 방에는 남자들이 수감되었다. 좁은 방에 40명 가까이 수감되었기 때문에 다들 서서 자거나 서로 기대어 서 있어야 했다. 누구 하나가 넘어지면 우르르 넘어지기도 했다. 복도에도 약 200명의 사람들이 조르르 누워서 잠 을 잤다.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약 한 달 동안 복도에서 지낸다.
방의 환경도 매우 열약했지만, 복도는 음침하고 빛도 더 안 들어오는 힘든 환경이었다. 그래서 복도에 있는 사람들은 방에 있는 사람들이 빨리 조사를 마치고 단련대로 가기를 기다렸다. 방에 사람들이 단련대로 이송되면, 복도에 사람들이 방으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복도에서 지낼 동안에는 조사도 받지 않았다. 수감자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자 그곳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그곳은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사람이 굶어죽기도 하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처음에는 밥이라고 나눠주는 한줌도 안되는 양의 죽을 옆에 할머니께 드리곤 했다. 예전에 중국에서 음식을 잘못 먹고 죽을 뻔한 적이 있었던 후로 음식을 함부로 먹지 못했기 때문 이다.
보위부가 주는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를 더러운 음식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온갖 스트레스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약했던 여동생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장티푸스로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나는 동생의 건강이 매우 걱정되었지만, 간호는커녕 제대로 된 동생의 병세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세 식구가 함께 있으면 조사 받는 동안 말을 맞춘다는 이유로 나를 엄마와 동생과 다른 방으로 수감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으로 옮겨지고부터 본격적인 심문이 이루어졌다.
내가 있던 방에는 특이한 아줌마가 두명 있었다. 그들은 방구석에 돗자리를 깔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배식을 받으면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고, 늘 앉아서 중얼중얼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처음에는 정신병자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들은 이미 처형이 확정된 중범죄자들이라 다들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불쌍하게 그들을 쳐다보곤 했지만 정작 그들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후에 이들이 한국인 선교사와 성경공부를 했고 더군다나 한국으로 가기 위해 몽골로 가던 중 붙잡혀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둔 그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두려워하거나 떨지 않는 듯 보였다.
나는 붙잡힌 순간부터 북송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죽음을 앞둔 이들이 보여주는 평온한 모습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에 대해서 또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다. 중국에서 만났던 은명이 이모도 기독교인이셨고, 이모 옆에 있으면서 이모가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만, 나는 옆에서 지켜보았을 뿐 같이 신앙 생활을 하거나 교회를 방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신앙에 대한 이해, 영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나에게도 이들의 평온한 모 습이 이례적으로 다가왔고, 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이 저들에게 두려움의 공포를 이겨내고 평안을 가지도록 하는 것일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지금에서야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 천국소망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북한 땅 가운데 이러한 성도들의 희생이 있고, 또 그들을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있고, 나에게도 내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귀한 그분 의 자녀들을 만나도록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절망적인 그곳에서도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지금도 짙은 어둠에 갇힌 그 땅의 영혼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계속)
한국오픈도어선교회
www.opendoor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