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병 이초시는 밭을 맬 때도 갓을 벗지 않는다. 이유인즉슨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비록 손에 흙을 묻히지만 자기는 양반이라는 것이다. 스무살이 넘어 초시에 늦깎이로 합격했지만 이후 과거는 보는 대로 낙방만 해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다 팔아먹고 이제 논밭 다섯마지기밖에 남지 않았다. 아이는 자꾸 낳아 식구수가 늘어 가자 이초시는 책을 접고 들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호미로 밭을 매면서도 갓끈을 고쳐 매며 “에헴에헴” 양반 행세를 해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집에 돌아올 때도 밭둑에 벗어 놓았던 두루마기를 입고 뒷짐을 진 채 배를 내밀고 고개를 빳빳이 세우면서 팔자걸음으로 염소수염을 쓰다듬는다. 자기는 양반이랍시고 아무한테나 하대를 한다. 옆집 사립짝 앞에 서서 “게 있느냐” 소리쳐 집주인 강서방이 나오면 “신구야. 너희 소, 하루만 빌려 다오. 논 썰게” 그 말에 이초시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많은 강서방은 눈살을 찌푸리며 “우리 소, 더위 먹었소” 한마디 쏘아붙이고는 뒤돌아 들어가 버린다. 양반 행세하느라 수없이 손해를 보지만 이초시의 양반병은 나을 기미조차 없다. 그러나 봄이 되면 이초시의 양반병은 많이 나아진다. “강생원. 새해를 맞이하니 신수가 훤하시구려.” 이초시가 길에서 마주친 강서방보고 억지웃음을 흘리며 아양을 떨면, 강서방은 시침을 뚝 떼고 “우리 집 곳간도 바닥이 드러났소이다” 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며 가던 길을 재촉한다. 이초시는 뒤돌아 쫓아가 강서방 소매를 잡으며 “그러지 말고 좁쌀 한자루만 꿔 주시오” 하며 매달린다. 보릿고개에 이초시네 땟거리가 끊어진 것이다. 이초시의 양반병이 가장 크게 도질 때는 가을이다. 비록 논밭 다 합쳐 다섯마지기밖에 안되지만 곳간에 양식이 쌓이면 안하무인이다. 내년 봄 보릿고개엔 또 이 집 저 집 양식 꾸러 돌아다니며 ‘강생원님’ ‘정씨 어른’ ‘박형’ 등 온갖 존대를 다 할 게 뻔한데도 당장은 ‘신구야’ ‘만석아’ ‘박가야’ 하며 시도 때도 없이 하대를 한다. 하루는 이초시가 장에 가서 술 한잔을 걸치고 푸줏간에 들렀다. “어험. 백가야, 돼지고기 한근만 썰어 올려라.” 옆머리가 희끗희끗한 푸줏간 주인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바로 그때 이초시 연배의 손님이 들어오며 “주인장, 돼지고기 한근만 주시오” 하자 푸줏간 주인은 질 좋은 목살을 넉넉하게 썰어 뒤에 온 손님에게 먼저 주고 이초시에게는 엉덩이살을 박하게 달아 줬다. 이초시는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손님 차별도 유분수지!” 그러자 푸줏간 주인이 빙긋이 웃으며 “푸줏간 주인이 달라서 그렇습니다요. 먼저는 주인장이 썰어 드렸고, 초시 어른께는 백가가 썰어 줬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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