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를 묵상하는 시 모음> 정연복의 ‘꽃의 계시’ 외
+ 꽃의 계시
앉은뱅이 꽃 앞에
가만히 무릎 꿇는다.
비록 몸은 작지만
주변을 환히 밝히는 꽃.
저 옛날 예수님 말씀처럼
말없이 세상의 빛이 되는 꽃.
세상의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오늘의 계시.
+ 계시
머릿속으로
나쁜 생각을 하면
명치끝이 예리한 칼에
찔린 듯 콕콕 쑤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니까
어서 생각을 접으라는
어디에선가 오는
은연중 계시다.
가슴속으로 밝고
꽃같이 예쁜 생각을 하면
마음이 평화롭기 그지없고
몸에도 생기 돋는다.
이렇게 좋은 생각을
빨리 실천에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어딘가에서 오는
무언의 계시다.
+ 들꽃의 계시
이름 없는 들꽃의
해맑고 환한 웃음에서
문득 계시를 들었다.
사는 일이 힘들어도
허투루 울어서는 안 된다고
삶은 거반 슬픔이고 눈물일지라도
살아 있음이 큰 은총이요
죽음마저도 복된 일이라고
말없이 말하는
들꽃의 계시를 들었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아
속상하고 슬플 때가 많지?
그래도 웃음을 잃지 마
나처럼 이렇게 말이야>
나지막이 얘기하는
따스한 계시를 들었다.
+ 새싹의 계시
긴 겨울 내내
알몸으로 찬바람 맞던
깡마른 나뭇가지 여기저기
연초록 작은 싹들이 고개를 내민다.
가만히 정지해 있는 듯
앙증맞고 여린 것들
하룻밤
또 하룻밤 지나며
갓난아기 손톱 자라듯
살금살금 생명을 틔운다
참을성 있는 목숨의 힘
조용히 보여준다.
올봄
그분의 계시이다.
+ 자연의 계시
일출과 일몰 풍경이
내 눈에는 똑같다.
시작과 끝이 하나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걸
문득 깨닫게 하는
자연의 계시가 아닐까?
+ 애기똥풀의 계시
집에서 교회까지
40분 남짓 종종걸음
제아무리 바빠도
문득 눈에 띈
작은 꽃 앞에 멈춰 섰다.
높은 담벼락
맨 밑바닥 그늘진 곳에서
환히 웃고 있는
너의 굳센 모습이야말로
살아있는 계시니까.
+ 철쭉의 계시
한철 생을 벌써 마감하고
누렇게 빛바랜 철쭉과
아직은 활짝 피어 있는 철쭉이
한데 어울려 있다.
피는 것과 지는 것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함으로 꽃의 한 생이
비로소 생겨남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오늘의 계시.
+ 행복의 계시
세 잎 클로버와 민들레 홀씨
둘이 한목소리로
들려주는 계시를 듣는다.
지금 네가 있는 자리가
아무리 맘에 들어도
얽매이고 집착하지 말 것.
하늘에 구름 흐르듯
인생의 참된 행복은
떠남과 흐름 속에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