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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 皇帝(고종황제) 3

작성자고산(高山)|작성시간24.03.07|조회수267 목록 댓글 11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반목 

 

사실 고종시대는 고종이 주인공이 아닌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의 10년 집권(1864 ~ 1873)은 말

그대로 권불십년 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권력은 고종의 부인인 명성황후 민씨가 틀어쥐었다.

사실상 고종이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고는 하나 아버지인 대원군과 직접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는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 야심이 있었던 명성황후는 그의 바람막이 역할로 제격이었다.

고종의 우유부단한 이미지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의 강력한 카리스마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종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의지하고 믿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1866년 명성홍후와 가례를 올린 고종은 자신의 첫 사랑인 궁녀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을 얻었다.

명성황후 또한 그렇게 원하던 왕자를 얻었지만 그 왕자는 항문이 막히는 장애가 있었다.

왕자는 결국 변을 보지 못하고 생후 5일 만에 사망하였다. 

  

왕자의 죽음이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때문이라는 오해를 낳으면서 명성황후의

흥선대원군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다가 1880년 13살 밖에 안 된 완화군이 급질로 사망하자 이번에는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의심하였고 두 사람 간의 대립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으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 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궁궐을 피해 도망처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명성황후가 입었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라의 천진으로 압송 되었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나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정치 간섭을 받았다.   

 

대한제국    

조선은 근대 이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의례상의 위계적 아시아 국제질서 때문에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지 못하였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세계관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갑신정변

 

1884년 갑신정변 때 급진 개화파들은 혁신정강 제1조에서 중국이 납치해간

흥선대원군을 하루 속히 돌려 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의행은 폐지할 것 등을 공포하였다. 또한 조선국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종래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 라고 호칭하던 것을 대군주 라고 호칭하도록 하고

국왕을 전하라 하고 부르던 것을 황제와 마찬가지로 폐하라고 높여 부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황제의 명령과 같이  칙 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국왕 자신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짐 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것은 완전자주독립을 강화하려는개화파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러한 시도도 중단되었다.

 

대조선국 

 

갑신정변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후 10년이 지나 갑오경장에 이르러 온건개혁파가

집권하자 다시 국왕의 지위를 황제의 지위로 높이려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갑오경장 정부는 1894년 7월 29일부터 우선 첫단계로 국왕을 공식적으로 군주로부터 다시 대군주로 호칭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조선왕조의 개국기년을 사용하여 1894년은 개국 503년이 되었다.

그들은 다음 단계로 1895년 1월7일부터 국왕이 종묘에 나아가 조상에게 서고문을

바치는 형식으로 홍범 14조 를 공포하였다.

그런데 제1조에 청국에 의부하는 생각을 끊어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는 것을

선언하여 중국와의 관계에서 조선 국왕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지위로 자리함을 공포하였다.    

 

또한 그들은 1895년 8월 27일에 국호를 대조선국으로 개칭하고  대군주를 황제로

격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계획은 집행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 갑오경장 내각이 붕괴됨으로써 개화파의

국왕을'황제'로 격상시키려는 운동은 다시 중단되었다.

뿐만 아니라 열강에게 이권을 빼앗겼으며 정권은 친러 수구파에 의하여 농단되었다.

1896년 7월 2일 창립된 개화파의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와 자주적 수구파들은

연합하여 고종의 환궁에 총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897년 2월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한 지 약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정상을 되찾게 되었다.

고종의 환궁 뒤 개화파와 수구파들은 힘을 모아  칭제건원을 추진하였다.

그들은 이것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국왕과 정부는 칭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건원을 하기로 하여 1897년 8월16일 건양을

광무로 고쳐 건양 2년을 광무 원년으로 고쳤다.

건원에 성공한 개화파와 수구파는 연합하여 칭제운동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7년 9월 25일 독립협회 회원인 농상공부협판 권재형은 

황(皇) 제(帝) 왕(王)은 글자는 다르지만 한 나라가 자주독립하여 의지하지 안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뜻을 가질 뿐 아니라 황제의 위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만국공법상 조금도

어긋남이 없으므로 정부와 협의하여 그 방책을 정해서 조속히 보호를 올림으로써 임금을

높이는 여론에 부응하고 문약하며 의부하는 의심을 깨트려야 할 것입니다 '라고 칭제를 주장하는 상소를 하였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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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탱구 | 작성시간 24.03.16 즐독합니다.
  • 작성자초수동 | 작성시간 24.03.16 내용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신사아닌 신사 | 작성시간 24.03.16 고종황제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 작성자황포돗대 | 작성시간 24.03.16 조선 말기의 왕가의 몰락해가는 모습과 대한제국이 일본 놈손에 나라를 통째로 넘겨주어 식민지가된 암울한 시기였지요


    잘 보구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노준식 | 작성시간 24.03.24 작품 잘 보고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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