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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소총 야화 05

작성자석양 노을|작성시간24.11.14|조회수66 목록 댓글 4

 고금소총 빛바랜 우정

 

동네 사람들은 명신이와 순덕이를 여자 관중과 포숙아로 칭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돈독한 우정을 뜻하는 고사성어처럼 동갑내기 두 여자의 우정은 참으로 끈끈했다.

천석꾼은 안되지만 삼백석 부자인 유 진사의 딸 명신이와 찢어지게 가난한 전 생원의 딸 순덕이는 자매처럼 친했다.

이웃에 동갑내기라 소꿉장난할 때부터 둘은 단짝이더니 어른이 돼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

명신이 어머니는 순덕이를 친딸처럼 가까이했다.

 

어느덧 둘은 시집갈 나이가 됐다.

명신이 큰오빠의 혼담이 깨지고 나자 어머니는 명신이를 불러 소곤소곤 한참 동안 얘기하더니 순덕이를 맏며느릿감으로 지목했다.

명신이가 가장 적극적이었고 아버지 유 진사도 흔쾌히 허락했으며 당사자인 큰오빠도 싫다고 하지 않았다.

사주단자가 오가고 꽃 피고 새 우는 춘삼월에 혼례를 치렀다.

단짝 친구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가 돼 명실공히 한식구가 됐다.

용모도 수더분한 데다 말이 없고 매사에 진중한 순덕이는 유 진사네 종부로 시댁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연년생으로 낳은 두 아들은 젖먹이었던 때를 빼놓고는 시부모가 맡아 키웠다.

 

이제 명신이 혼담이 오가기 시작했다.

산 넘고 물 건너 이웃 고을의 스물한살 민 초시가 신랑감으로 낙점됐다.

먹고사는 데 아무 걱정이 없는 부자 유 진사는 과거에 급제할 사위를 보고 싶어 한 것이다.

일사천리로 무르익어가는 봄을 붙잡아 혼례 날짜를 잡았다.

장에 가서 혼수를 장만하는 번거로운 일을 순덕이가 밤잠을 자지 않고 진두지휘해 시어머니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혼례를 코앞에 두고도 명신이 어머니는 뒷짐을 지고 마실을 다녔다.

명신이 어머니는 고쟁이에 차고 다니던 곳간 열쇠를 흔쾌히 풀어서 종부 순덕이 허리에 손수 채웠다.

거창하게 준비한 혼례를 무사히 치른 며칠 후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신행을 가는 날 올케와 시누이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명신이가 삼십리 떨어진 이웃 고을로 장차 사또가 될 민 초시네 집에 갔더니

가문이 어떻고 몇대 선조가 무얼 했느니 양반 자랑만 하고 살림은 쪽박이었다.

더구나 신랑인 민 초시는 백면서생에 과거는 다섯번이나 낙방한 상태였다.

명신이는 신랑이 과거에 급제해 사또 부인이 되는 꿈에 부풀어 민 초시가 공부를 소홀히 하면

안방 문을 잠그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반 십년에 명신이의 주변도 많이 변했다.

친정아버지는 사위가 급제하는 것도 못 보고 북망산천으로 떠났고 이듬해 어머니도 따라갔다.

툭하면 쌀독은 바닥을 드러냈고 칠전팔기로 시험에 붙길 기대했건만 민 초시는 여덟번째 과거에 또 낙방한 뒤

책을 몽땅 꺼내 불살라 버렸다.

명신이는 사또 부인은 고사하고 당장 입에 거미줄을 칠 판이라 금비녀와 호박 목걸이를 내다 팔고는 사흘 동안 울었다.

 

명신이는 결국 친정으로 갔다.

올케 순덕이는 쌀도 아닌 고작 겉보리 한자루를 내주며 “사또 어부인이 되실 분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하는 것이다.

명신이는 겉보리를 친정 소죽솥에 쏟고 자루는 아궁이에 처박아 버린 뒤 집을 나왔다.

 

명신이 신랑 민 초시는 술타령만 하는 파락호(건달)가 됐다.

사실은 파락호도 못되는 것이 주머니에 돈이 없으니 허구한 날 삼십리를 걸어

처남인 순덕이 남편 유 생원을 꼬셔서 술집을 전전하는 것이다.

성실한 농사꾼이었던 명신이 큰오빠 유 생원은 손아래 매부를 따라 기생집을 드나들면서

‘이런 재미있는 세상도 있었구나’ 느끼며 주색에 푹 빠져 노련한 행수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

 

어느 날 순덕이가 명신이를 찾아왔다.

명신이 뒤로 머슴이 쌀 한가마를 지고 왔다.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아서 순덕이가 바닥을 치며 분통을 터뜨리더니

글피에 신랑 첩의 집을 때려 부수러 가는데 명신이도 동행할 것을 권유했다.

명신이는 펄펄 뛰는 순덕이를 보지도 않고 가타부타 말 없이 처마 위의 제비집만 쳐다봤다.

 

결전의 날, 순덕이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그 뒤로 순덕이의 친정 남동생, 사촌 남동생, 친구, 친정엄마, 이모가 모여

손에 몽둥이를 들고 저잣거리 기생집 뒷골목에 있는 행수 기생 살림집으로 쳐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숴라”고 외쳤지만 박살이 난 건 순덕이네 돌격부대였다.

눈에 멍이 들고 옷이 찢어지고 다리를 절며 패잔병들은 퇴각했다.

순덕이 일당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행수 기생에게 귀띔해준 명신이는 안방에서 주인과 수정과를 마시고 있었다.

저잣거리 왈패 외인 부대원들도 전투를 끝낸 뒤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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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멋쟁이 신사(華谷)ㆍ公認 孝菴 大法 | 작성시간 24.11.14 new 멋진 좋은 작품 감명 깊게 잘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호근 서당{浩 根 書堂 } | 작성시간 24.11.14 new 감사 합니다.
  • 작성자온돌 | 작성시간 24.11.14 new 에궁 ㅠㅠ
  • 작성자혜야 | 작성시간 24.11.14 new 아이구 분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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