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기독자료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09.11.26|조회수315 목록 댓글 0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

-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중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 -

 

 

 

이천우목사/성약교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부제: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중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를 다루었습니다. 본 글은,

Ⅰ. 들어가는 말

Ⅱ. 신적작정과 예정 교리

Ⅲ. 예정 교리에 의한 선택설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Ⅳ. 전선택설(타락전 선택 교리)과 후선택설(타락후 선택 교리)의 비교

Ⅴ.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두 견해에 대한 경향

Ⅵ.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중 과연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

 

의 순서로 기술하였습니다. 독자께서는 본 글을 읽으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선택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그 관점을 가져 나가시기 바랍니다.

 

 

 

Ⅰ. 들어가는 말

 

본 글을 시작하면서 들어가는 말로 다음의 성경 몇 군데를 참고 구절로 보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 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12).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 1:11)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딛 1:2)

 

"이 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롬 16:25)

 

 

Ⅱ. 신적작정과 예정 교리

 

이 여러 성경구절에서 보듯이 우리의 구원은 창세 전에 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의 작정에 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일으키는 기인(基因)은 신적작정[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있습니다(글의 전개성 글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신적작정이란 용어를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라는 용어로 병행하여서 사용합니다). ‘신적작정’(decree)이란 하나님의 외적 사역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말하는 것인데 이를 교리적이고도 신앙고백적으로 잘 정리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제 3장 1,2항에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장차 있을 모든 일을 작정하셨으며, 따라서 장차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를 알고 계신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신적작정’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에 따라 정하신 영원한 목적(계획)”이요 이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역으로서, 이 사역이 하나님의 시간적 사역으로 구체화되고 전개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신적작정은 전적으로 세계와 인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방법으로 되어집니다. 칼빈은 신적작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성의 가장 깊은 데서 나온 이론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인 ‘신적작정’이 천사와 인간과 관련하여, 특히 인간의 구속사와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 잘 나타납니다. 이를 다루고 있는 돌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겠습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는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돌트 신조 제7장)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3항).

 

이 천사들과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히 그리고 변치 않게 계획되어 있는 것이며, 그래서 그들의 수효는 확실하고 확정적이므로, 그것은 더하거나 뺄 수가 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4항).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의 뜻의 비밀한 계획과 선하신 기쁨을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 없는 은혜와 사랑에서 그렇게 선택하신 것이며, 믿음 또는 선한 행위, 또는 그들 안에 있는 인내, 또는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다른 것을, 그를 감동시켜 선택케 하는 조건들이나 원인들로 미리 보신 것 없이 하신 것이며, 그리고 모두가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려고 선택하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5항).

 

신적작정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신적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는데, 이를 위해서 어떤 천사들과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으며, 또한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정 교리에서 신적작정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룰 구원의 예정이고, 다른 하나는 멸망의 예정입니다. 이때 이 예정과 관련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또한 영원한 멸망에 이를 사람들을 유기하셨습니다. 이것을 이중예정(二重豫定), 또는 쌍방예정(雙方豫定)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든지, 아니면 영원한 멸망에 이르든지, 어떠한 궁극적인 결과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은 예정 교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적작정에 의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예를 ‘야곱과 에서’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롬 9:13). 그것은 야곱은 선택받았기 때문이요 에서는 유기되었기 때문인데, 이는 토기장의 비유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향하여 당연한 권리를 행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다루어집니다(롬 9:19-24). 칼빈은 잠언 16장 4절의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선택과 유기의 동시적 궁극성을 말하였습니다. 즉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과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이 종말적 영원의 결과는 시원적 영원(始源的永遠)인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과 완전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 사실을 깨닫고서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 초두에서 이를 언급하였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3-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6항도 이와 동일한 언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 같이,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자신의 목적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는 모든 방편들을 미리 작정하셨다. 그에 따라 택함 받은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게 된다. 그리고 효과적이고 합당한 때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도록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함을 받으며 양자되고 성화된다. 또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오직 택함 받은 사람들 외에는, 다른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이 예정하신 선택의 직접적인 목적은 택함 받은 사람들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곧 신적작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선택된 예정인 것과 영원한 멸망에 이르도록 유기된 예정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것은, 그들 각 사람에게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에 의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사람으로 선택한 자를 내적 소명(중생)과 외적 소명(복음을 통한 부르심)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할 사람에게는 불순종으로 거부하게 하십니다.

 

 

Ⅲ. 예정 교리에 의한 선택설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예정 교리를 극도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이 문제가 화두(話頭) 거리가 아니므로 다루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 교리를 받아들이지만 여기에 연계되어 있는 구원 얻을 자의 선택이 ‘타락전’인가, 아니면 ‘타락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이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명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이 두 견해에서 어느 것이 성경적입니까? 종교개혁을 시점으로 할 때 그 이전에도 이 양자의 입장은 존재해 왔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거론되고 있는 어거스틴은 후선택설 견해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어거스틴주의자들이 모두 같은 견해를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도 전선택설의 견해를 취하는 전선택설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서는 루터, 칼빈, 쯔윙글리는 전선택설주의자였습니다(그러나 칼빈주의자들 중에는 칼빈을 전선택설주의자가 아닌 후선택설주의자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워필드, 윅스가 그들입니다). 그러나 불링거는 후택설을 지지하였습니다. 좀 더 후대에서도 베자, 고마루스, 피터 말터, 장키우스, 울지누스, 펄키우스, 트윗지, 트리클랜드, 푸치어스, 벌마누스, 윌시어스, 코므리는 전선택설을, 리벨, 왈라이우스, 매스트릭트, 투레티니, 와말크, 띠몰은 후선택설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은 비록 이 양자의 교리 중에서 자기가 서 있는 노선이 있지만 어느 한쪽 노선을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양자의 교리가 전적으로 상호 배치하지 않는다는 이해를 갖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령 후택설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전선택설과 배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견해가 “다 성경의 지원(支援)을 받고 있으면서 모두 모순에 빠지며 각자가 진리의 요소에 치중한다”고 한 벌콥의 말에서도 잘 알 수 있는데, 그를 비롯하여 다이크, 바빙크, 카이퍼, 벌카우어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타락 사이의 연락은 우리에게 불가측하다”고 하였으며, 박형룡도 이에 동의하여 “카이퍼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죄 사이의 연락은 ‘우리에게 계시되지 아니한다’는 인정으로 결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현하 우리 나라의 교계의 입장은 어떠합니까? 우리 나라 교계의 일반적인 입장은 후자 쪽에 서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 교계의 흐름이 어느 신학자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래서 신학을 하는 분들이 어느 신학자에게서 수학(修學)하였는가에 의하여서 크게 좌우되고 있기 때문인데, 우리 나라 교회가 장로교회의 비중이 크고, 더욱이 개혁파의 교회임을 말할 때 이 교회가 받아들이고 있는 신조 문서들은 후선택설의 교리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돌트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후택설의 견해를 함의하고 있는 신조 문서들을 의논하고 작성한 위원들이 다 후택설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주관한 의장인 트윗스는 아주 열렬한 전선택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수는 다른 편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의 교계는 후택설의 견해를 지지하는 세가 강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예정 교리에 의한 당신의 백성의 선택은 타락전 일까요? 아니면 타락후 일까요? 아니면 자신은 어느 한편에 서 있을지라도 양자의 입장이 다 충분히 고려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것의 분명한 견해를 가질 수 있기 위하여서는 먼저 선택 교리의 두 견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며, 도대체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그럼에도 팽배하게 함께 주장되어 오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데 따라 우리가 진정 확고히 서 있어야 입장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선택설에는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견해의 이해에 있어서 또 서로 다른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1. 첫 번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 타락전 하나님의 선택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①창조될 자 가운데서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고 어떤 자들을 영멸하도록 정하심 ②창조하심 ③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심 ④피택자들을 구속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심 ⑤이 구속을 선택된 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심 이라는 구도 속에서 선택을 다룹니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세상 창조와 역사 안에서의 인류의 타락에 앞서 선택이 있다고 봅니다. 반면에 타락후 하나님의 선택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①창조하심 ②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심 ③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의 복락을 주시기로 택하시고 또 어떤 그들이 받을 영멸의 화에 그대로 버려두심 ④피택자들을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심 ⑤그리스도를 통해서 획득된 구속을 피택자들에게 적용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심 이라는 구독 속에서 선택을 다룹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보는 대로 세상 창조와 역사 안에서의 인류의 타락이 있고 그 타락한 자들 가운데서 일정한 자의 선택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순서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곧 선택의 작정이 창조와 타락의 작정 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로 다루는 것은 여기에서는 배제합니다. 이는 곧 두 번째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이해에서 이 중에서 과연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는 것은 본 글이 진행되어 가는 속에서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Ⅳ. 전선택설(타락전 선택 교리)과 후선택설(타락후 선택 교리)의 비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인간의 구속과 관련한 예정 교리는 개혁파 교회의 동일한 신학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3장 3항). 그런데 이 예정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다루게 되는 ‘선택 교리’의 이해에 있어서는 두 견해가 상반되게 대치되어 오고 있습니다.

 

1. 전선택설

 

이 중에서 전선택설의 견해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인 영원 전부터 신적작정의 일부인 하나님의 예정에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창세 전에 되어진 것인데 이것이 인간의 타락의 작정 전에 되어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러니까 예정 교리에서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온 인류의 창조와 타락의 작정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전선택설에서 보는 작정들의 순서들을 박형룡의 교의신학 신론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선택설은 창조하고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들을 예정의 작정에 포함시키고 논리적인 순서에 치중하며 예정의 인격적 요소를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들에까지 확자아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을 상술과 같이 한다. 그리하여 이 설은 구원의 계획에 포함된 작정들의 순서를 아래와 같이 결정한다. (1)그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려는, 특별히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능 뿐으로 존재하는 관념적 피조물(觀念的被造物)들의 얼마의 구원과 나머지의 침륜(沈淪)에 자기의 은혜와 공의를 크게 나타내시려는 하나님의 작정 (2)이 같이 선택되고 유기된 자들을 창조하시려는 작정 (3)그들의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 (3)피택자들을 칭의하시고 비피택자들을 정죄하시려는 작정.“

 

이 전선택설은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창조될 사람의 구원의 예정에서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따르고 있는 것에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전선택설은 후선택설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그것은 (1)하나님의 마음속에 가능 뿐으로 존재하는 창조되지 않은 사람[관념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선택을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선택의 작정을 죄의 동력적 원인으로 제시하면서도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도록 해석되는 것은 원치 않는데 이러한 견해로 피기자(被棄者)의 영원한 형벌을 신적 의지의 대상으로 삼아 피택자(被擇者)들의 영원한 구원과 동일한 의미와 동일한 양식으로 말하여 영원한 멸망에 인도하는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향한 방편 속에서 다루면서도 죄에 대한 예정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선택설은 타락하지 않은 무죄한 사람들을 유기의 대상으로 삼아 정죄를 받게 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인 신관, 곧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신가에 대하여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3)은혜언약과 중보의 교리를 구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전선택설의 기초 위에는 유익한 은혜언약의 교리와 중보의 교리를 구성하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언약과 언약의 중보는 다 후택설적으로만 생각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논리적으로 중보는 오직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에만 신적작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것은 은혜언약의 구성을 위한 유일발기점(唯一發起點)이라고 합니다.

 

 

2. 후선택설

 

반면에 후선택설의 견해는 우리가 선택받은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인 영원 전부터 신적작정의 일부인 하나님의 예정에 있었던 데 따른 것으로 창세 전에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선택설과 동일한데 다만 그 선택이 인간의 타락이 있고 나서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후선택설은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선택[과 유기]의 작정보다 순서적으로 앞선다고 보는 것입니다. 창조와 타락의 허용 작정들이 있은 후에야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있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전선택설에서 보는 작정들의 순서들을 박형룡의 교의신학 신론에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후선택설은 창조와 타락에 대한 작정을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의 작정 보다 앞선 것으로 보아 보다 더 역사적인 순서를 제시하며 예정의 인격적 요소는 창조와 타락 허용의 작정들이 있은 후에야 작정에 나타났다고 보며 예정의 한 부분인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의 행동만 아니라, 그의 공의의 행동도 포함한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이 설이 제시하는 구원의 계획의 순서는 (1)사람을 거룩하고 복되게 창조하시려는 작정 (2)자기 의지의 자결정에 의한 사람의 타락을 허용하시려는 작정 (3)이 유죄한 집단으로부터 일정한 수를 구원하시려는 작정 (4)남은 인류를 그들의 범죄하는 자결정에 버려두시고 그들을 그들의 죄에 해당하는 형벌에 처하시려는 작정.”

 

여기서 보는 대로 후선택설은 인간의 타락의 작정을 선택의 작정에 앞서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택의 대상들을 타락한 죄의 상태 중에 있는 자로,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합되어 있는 자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받아 누리는 자로 말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후선택설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실시의 역사적 순서에 잘 조화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후선택설 또한 전선택설주의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그것은 (1)전선택설과 마찬가지로 후선택설 또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죄의 관계의 문제는 두 설에게 다 같이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여깁니다. 후선택설을 말하는 사람들은 타락의 작정 후 선택의 작정을 주장함으로써 유기의 선택으로 인해 다루게 되는 죄의 원인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죄의 조성자라는 비난이 돌아갈 가능성을 방어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알미니안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하여 또한 필연적으로 인간의 타락에 있어서 죄의 허용적 작정의 교리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전선택설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된다고 봅니다. (2)후선택설은 신적작정의 통일성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세계를 창조하실 것을 작정하셨는데 타락의 작정이 선택의 작정 전에 다루어짐으로써 창조의 작정과 선택의 작정이 연계 있게 시원적이고 목적론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Ⅴ.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의 두 견해에 대한 경향

우리가 선택설의 두 견해의 비교에서 보는 대로 전선택설과 후선택설이 갖는 견해에서 차이점은 우리에 대한 선택이 세상 창조 이전이냐 아니면 이후에 있은 일이냐 하는 것이거나 또는 세상 역사 안에서의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사건 이전에 있은 일이냐 아니면 이후에 있은 일이냐 하는 것이 아닌 단지 작정들의 순서에 관한 것입니다. 선택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있었으며 첫 사람 아담의 죽음으로 인한 인류의 타락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그 누구도 견해를 달리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이것이 모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리쉬는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사람들을 창조하신 이후에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으로 타락하자 일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심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셨다“고 하였습니다. - 에베소서 1장 3-6절은 이에 대한 뒷받침을 강력히 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으며 또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세상의 창조가 있기 전, 그리고 역사 안에서의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온 인류의 타락이 있기 전에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선택설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후선택설주의자들도 견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작정에 있어서 그 작정이 창조와 타락의 작정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그 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에 있어서는 후선택설의 견해가 보다 지지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칼빈의 선택설에 대한 이해를 전선택설로보다는 후선택설로 보는 경향이 보다 강한 신학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워필드는 칼빈을 후선택설의 주장자로 봅니다. 죤 스탠포드 윅스는 칼빈과 요나단 에드워즈의 선택론을 비교하는 논문에서 칼빈을 후선택설의 견해를 가진 자로 말합니다. 이는 우리 나라의 교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현재 후선택설의 견해를 지지하는 자의 한 사람인 이승구는 베드로전서 1장 20절의 칼빈의 주석에서 칼빈이 후선택설의 견해를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그 순전한 상태에 오래 서 있지 못할 것을 미리 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선하심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상실된 인류를(the lost race of man) 파괴된 상태로부터(from ruin) 구하시는 구속자가 되도록 정하신 것이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말씀에 의하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빠져 잃어진 사람들을(the lost) 그 파괴된 상태로부터(from ruin) 구원하시도록 정해졌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의 문맥을 살 필 때, 이런 말을 할 때 칼빈이 역사적인 타락 사건이 있은 후에 그 타락으로 인해서 상실 된 사람들을 구하시려 구속자로 임명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칼빈은 영원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류의 타락이 있을 것임을 보시고, 그렇게 타락될 이 들을 그 파멸 상태(from ruin)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세우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칼빈의 말을 다시 한번 더 인용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은혜의 치료책으로 우리의 병을 미리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 는 죄에로의 타락에 대한 작정이 있고, 그 후에 그리스도를 통한 치유책을 마련하시는 작정 이 있는 것이 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다 시간-이전적(pre-temporal)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비록 우리가 시간 이전의 작정의 순서를 생각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칼빈은 창조 이전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에베소서 1:4에 대해서 주석하면서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선택으로 우리를 멸망하여 가는 가운데서 구원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도 문맥에 유의하면서 잘 이해해야 하는 말의 하나이다. 여기서 칼빈은 역사상 타락 사건이 있은 후에 있는 선택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칼빈은 선택은 세상의 토대를 놓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들의 창조 이전에, 따라서 첫 사람이 죄와 사망 가운데로 타락하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말했던 자신의 말과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될 것이고, 에베소서 1:3-4의 맥락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하는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나타나 고 말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적어도 자신이 주석하고 있는 에베소서 1:3-4의 의미도 모르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리는 칼빈이 선택의 상황을 타락을 바라보는 상황으로 놓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영원 가운데 있는 작정의 순서상 타락이 선택에 앞서는 것임을 칼빈이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피기우스에 반박하여 쓴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논문’에서도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선택되지 않은 이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지로 불신에 거하는 것이고, 신앙의 빛이 없으며, 완전한 어두움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이 말에 의하면 선택되지 않은 이들은 타락된 인류의 상태, 그 온전한 어두움에 그대로 방치되어져 있다. 그렇다면 함의상 선택된 이들은 이런 온전한 어두움과 빛이 없는 상태, 불신의 상태로부터 구해진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선택이 이루어진 상태는 이미 타락이 전제되어진 상태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선택하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실 수 있는 것은 ‘파멸을 위한 재료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칼빈은 말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에 대한 예정이 이루어진 때는 창세 이전이므로 ‘우리가 아직 존재하기 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우리는 창조될 것이고 타락될 것으로 보여진 것이다. 이렇게 타락된 것으로 보여진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보실 수 있는 것은 ‘파멸을 위한 재료’뿐이다. 따라서,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우리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이 상황 가운데서는 모든 사람이 정죄 받아 마땅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기까지는 죄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정죄 받아 마땅한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작정이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우리가 이미 상실되어져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글(*이승구 교수의 홈페이지에서 올려져 있는 2002년 9월 7일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조직신학 분과 논문 발표인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한 고찰(1)'에서 일부 발췌한 것임)에서 보듯이 이승구가 선택설을 후선택설로 지지하는 것은 선택의 작정이 인류의 타락이 있을 것을 미리 보시고서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타락하여 잃어진 사람들을 그 파멸 상태로부터 구원하시도록 정하셨다고 보는데 따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이 전제되어진 상태에서 선택의 작정 또한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빈의 글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예정론의 이해에 있어서 선택설이 글에 따라서 전선택설로 때로는 후선택설로 보여지는 것 같은 것은 칼빈이 선택설에 대해 비일관성 있게 모호한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보면 때로는 창세 이전의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선택을 다루고, 때로는 세상 역사 안에서의 선택을 다룬 데 따른 것일 뿐 오히려 일관성 있게 후선택설의 견해에서 다루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후선택설의 지지가 더욱 힘을 얻는 것은 개혁교회의 회의에서 결정되고 작성된 신앙 문서들이 후선택설의 견해를 말하고 가르치는데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돌트 신조 7장을 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 받은 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는 자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여기에서 보듯이 돌트 신조는 선택은 창세 전에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인간이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라고 말하여 선택의 작정 순서가 창조와 타락 후에 있는 후선택설의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표준 문서에서도 후선택설의 견해를 보게 됩니다. 먼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 위에 행사하시는 그의 주권적인 능력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베풀기도 하시고 거두시기도 하는 바, 택함 받은 자 이외의 나머지 인류에게는 그 자신의 뜻을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따라서 그들의 죄를 인하여 그들을 버려두시고, 그리고 그들이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이는 그의 영광스런 공의를 찬미케 하려 하심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자들의 선택이 논리적 순서에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하신 데 따른 것이며 어떤 자들이[택함을 받은 자 이외의 남은 자들이] 유기되어 영벌에 처해지는 것이 그들의 죄를 인하여 치욕과 진노를 당하도록 작정된 데 따른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즉 선택의 작정이 타락의 작정 후에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단정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문.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비참한 것이 무엇입니까?

답: 모든 인류가 타락함을 인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어서 생전에 모든 비참함과 사망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20문.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한 지위에서 멸망하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홀로 그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구속받을 자들을 영생 얻게 하시려고 선택하시고 은혜의 언약을 세우셔서 구속자로 말미암아 저희를 죄와 비참한 지위에서 건져내시고 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려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모든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에 있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을 선택해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과 그 일을 영원한 때 이미 그리스도의 구속의 언약적 관계를 통해서 해 나가도록 하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연 선택설에서 타락후 선택설은 타락전 선택설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을만한, 그러니까 이 두 견해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안에서 되어진 사실을 믿음으로 가지는 성경적인 이해에 의한 것인데 단지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어느 것이 우선이냐 하는 관점에서 타락후 선택설이 타락전 선택설보다 보다 더 성경적인 관점에서 갖는 견해로 여겨지는 듯 합니다.

 

 

Ⅵ.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중 과연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

 

그러나 필자는 초두의 여러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그리고 다음의 사실을 들어서 전선택설, 그러니까 타락전 선택설의 견해를 갖습니다. 그러한 까닭은,

 

첫째, 전선택설이 공격받는 주 요인인 하나님의 마음속에 가능 뿐으로 존재하는 창조되지 않은 사람[관념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선택을 입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과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만들며,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으로 드러나게 할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수인 144,000 무리가 하나님의 선택의 수인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물론 이 수와 상대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666의 수 또한 선택의 수인 것에 대해서도 이견이 없습니다. 구원의 선택과 유기의 선택은 그것이 전선택설에 의한 것이든, 또는 후선택설에 의한 것이든 죄의 원인과 죄에 의한 인간의 타락을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시냐 하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의 허용 작정 교리는 분명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교리의 이해 속에서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죄의 허용 작정 교리는 그 죄의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뜻(목적)의 이해에서 출발할 때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궁색한 변명으로서가 아니라 그 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서 설득력을 갖습니다.

 

하나님에게서는 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며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영원 전에 가지신 계획을 이루시는 일로서 작정 교리가 다루어질 때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데 대한 계획에 ‘죄’ 또한 작정 속에서 다루어지며, 그래서 이 ‘죄’ 또한 하나님에게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위해 가지신 계획에서 다루어지는 죄를 우리가 다루는 멸망의 값을 가져다 주는 죄의 개념, 그리고 그 죄의 부패 성향으로 나타나는 악의 개념으로 인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에서 출발하고 있는 죄는 그런 죄의 개념이 아닌 이미 영원 전에 하나님이 계심으로써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는 그 하나님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들어 가실 것인지에 대해 계획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방식의 하나로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의 원인자이시냐?”,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이시냐?”를 방어하는 차원에서 단지 하나님이 죄와 상관없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기 위해 얼버무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죄를 자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데 등장시키고 있다는 이해를 가져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죄의 등장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연계하여 그 시원적이고 목적론적인 이해 속에서 볼 때 ‘악’이 아닌 ‘선’의 문제였으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다면 타락의 작정 전에 선택의 작정에 있어서 유기를 말하는 것은 논리적인 순서로도 전혀 위배되지 않습니다. 후선택설의 견해가 죄의 조성자 여부 문제를 하나님에게 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미니안의 주장을 동조하지 않는다면 죄의 허용 작정 교리를 말하게 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나라에 가지신 계획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 그 나라를 구성하는 백성과 그 백성들을 어떤 방식으로 채워 가실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작정도 없이 타락의 작정을 다룬다는 것은 오히려 논리적인 순서에서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택의 작정을 다룸에 있어서 유기의 선택과 관련하여 이를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다루며 인간 타락의 작정 또한 그 영역 안에서 다루면서 죄의 허용 작정을 말하는 것은 결코 논리적인 순서에서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여기에서 죄의 원인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본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몇 몇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선택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 구절들이 타락전 선택으로 말하거나 또는 타락후 선택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창세 전에 있은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 안에서 선택 교리를 말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구절만 가지고는 타락의 작정 전후로 선택의 작정 여부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계시의 총체적 관점에서 선택설이 타락전인지 또는 타락후인지를 가려 어느 선택설이 성경과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다루며,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영원한 작정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이해를 갖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다루어진 선택설의 견해가 우리의 구원 예정과 관련하여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작정이 창조와 타락과 선택, 또는 선택과 창조와 타락과의 연계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으며 그러할 때 사실 전선택설인가 아니면 후선택설인가 하는 것은 그야 말로 어느 견해의 입장에 서 있든지간에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에서 볼 때 배타적이기보다는 공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견해 중에서 어느 견해를 갖고 지지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반감되거나 배척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전선택설이든지 또는 후선택설이든지 간에 이는 그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창세 전 영원 세계에서의 논리적 순서의 이해일 뿐, 사실상 피조 세계에서 적용되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인류의 타락이 왔으며 그리스도의 안에서 선택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구속받아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첫 사람 아담 이래로 모든 인류 중에서 어떤 자들이,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을 수 있었던 것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어 말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 작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떤 자(야곱)들은 사랑하고 어떤 자(에서)들은 미워하신 것이며, 여기에 대하여 그 누구도 하나님의 불의, 불공평을 운운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하나님은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이시오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이방인 중에서도 얼마든지 부르시는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 작정의 교리가 지닌 가치를 봅니다(롬 9:14-26).

 

그런데 말입니다. 다시 언급합니다만, 하나님의 선택 작정의 교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시원적인 근원과 그 목적에서 본다면, 그래서 성경의 총체적인 주제인 ‘하나님 나라’에서 선택과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갖는 그 연계성을 하나 하나 본다면, 전선택설의 견해를 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 곧 영원 전에 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사시며 통치하시는 자신의 그 영원한 나라를 어떻게 세워 가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신 것입니다. 이는 성경 전반에서 계시되고 있는 언약에 의한 구속사에 의하여서 능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들로 충만히 채워 가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구성하는 ‘충만수’의 작정을 가지셨다는 것은 결코 억측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는 충만수의 작정에 의해서 또한 그 충만수를 이루어 가는 방식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자들로 구성하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으로 난 자로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으로 난 자’란 범죄하여서 타락한 상태에서의 육으로 난 자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받은 사람의 성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받은 데 따라 사람이 영적인 마음을 지녔으나 피조 된 몸의 성격으로서는, 그래서 땅이란 세상에 속한 몸의 성격으로서는 피조 되지 않은(새하늘과 새땅이 재창조나 갱신의 의미를 지닐찌라도) 하나님 나라와 일체를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칼빈이 생각한 대로 영원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류의 타락이 있을 것임을 보시는[*선택의 작정이 있었기에 또한 인류의 타락의 작정 속에서 인류의 타락을 내다보신 것이다. 이는 예지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영생할 것을 미리 예견하셨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육의 성질을 하늘에 속한 몸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드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일을 정하시고 그분 안에서 구속받을 자들로 하나님 나라를 구성하실 것을 작정하셨다는 생각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실 자들 중에서 자신의 나라를 이룰 자를 선택하는 작정을 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계획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선택의 작정 교리가 다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타락의 작정이 하나님 나라 라는 계획 속에서 그리고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방식인 구원의 작정 속에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창조와 타락의 작정에 앞서 선택의 작정이 있었다고 봅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그 나라를 구성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있었고, 세상 창조의 작정과 모든 사람의 타락의 작정이 있었습니다. 인류의 타락이 만인 타락임에도 불구하고 만인 구원이 아닌 그리스도의 구속에 의한 제한적 속죄의 교리로 자연스럽게 다루어지는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의해서 세상 창조가 있었으며 역사 안에서 인류의 타락의 허용과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셔서 그분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택자를 불러모으시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에 따라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것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 3-12절의 말씀에 잘 부합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총주제가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채워 가시는 일에 있어서 이를 처음부터 하나님의 시원적이요 목적으로 두고 그래서 그 계획을 실천해 가시는 일로서 여기와 연계될 수밖에 없는 선택과 창조와 타락의 작정을 함께 생각하고 다루지를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그 시작을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진 계획과 그 실천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별개로 인간의 선택과 창조와 타락, 또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과 선택으로 다루며, 그래서 구원받을 자들로 충만해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현재적으로 임하였으며 이제 ‘장차’ 세말에 나타나서 있게 될 미래적인 나라의 개념으로만 다룬다면 그때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시원적이고 목적론적인 계획에 의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자들 중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갈 나라를 위해 준비한 나라의 개념이 되어서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주체가 아니라 그 나라를 구성할 자들이 주체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예정 교리에서 보는 선택 교리는 전선택설인가?, 후선택설인가? 전선택설과 후선택설 중 과연 어느 선택설이 성경적인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선택설이든 다 성경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전선택설을 주장해도 후선택설의 견해 또한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이는 후선택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선택설을 영원 전에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이루어 가실 계획을 가지신 것에서 출발할 때는 전선택설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