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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신앙의 중심개념으로서의 자유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09.12.02|조회수511 목록 댓글 0

침례교 신앙의 중심개념으로서의 자유

 

 

 

 

 

 

 

 

 

 

 

 

1999年 12月 31日

 

浸禮神學大學校 神學大學院

 

神 學 專 攻

鄭 光 煥

 

 

金 勝 鎭 指導敎授

碩 士 學 位 論 文

 

 

 

 

침례교 신앙의 중심개념으로서의 자유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제출함

 

 

 

 

 

1999年 12月 31日

浸禮神學大學校 神學大學院

 

 

神 學 專 攻

 

鄭 光 煥

鄭光煥의 碩士學位 論文을 인준함

 

 

 

 

 

 

 

 

 

 

 

1999년 12월 31일

 

 

 

 

 

 

 

 

심 사 위 원 장 ____________________인

 

심 사 위 원 ____________________인

 

심 사 위 원 ____________________인

 

 

 

 

 

목 차

 

서 론 ...................................................................................................................... 1

1. 연구목적 ..................................................................................................... 1

2. 연구배경 ..................................................................................................... 2

3. 연구방법 ..................................................................................................... 3

Ⅰ. 침례교 신앙의 근원 ....................................................................................... 4

1. 침례교의 정의 ........................................................................................... 4

2. 침례교의 기원 ........................................................................................... 6

3. 침례교와 종교개혁의 유산 .................................................................... 9

1) 종교개혁 .............................................................................................. 9

2) 침례교와 종교개혁 .......................................................................... 17

Ⅱ. 침례교 역사와 자유 ..................................................................................... 20

1. 자유의 의미 ............................................................................................. 20

2. 침례교와 자유 ......................................................................................... 23

1) 침례교와 자유교회운동 .................................................................. 23

2) 침례교와 성서 .................................................................................. 24

3. 침례교 고백문과 자유 ........................................................................... 26

1) 침례교 정체성에 관하여 ................................................................ 28

2) 침례교 연맹 규약 ............................................................................ 30

3) 침례교인의 이상 .............................................................................. 32

Ⅲ. 침례교의 원리와 자유 ................................................................................ 35

1. 성서의 자유 ............................................................................................ 35

2. 영혼의 자유 ............................................................................................ 38

3. 교회의 자유 ............................................................................................ 41

4. 종교의 자유 ............................................................................................ 44

결 론 ................................................................................................................. 48

 

참고문헌목록 ....................................................................................................... 50

 

 

 

 

 

 

 

 

 

 

 

 

 

 

서 론

 

1. 연구목적

“침례교회의 성장은 장구한 교회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신약성서의 신앙원리를 발견하고 이 원리에 따라 그들의 신앙생활을 틀 잡아 온 사람들의 자연발생적 모임과 운동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특정한 교조나 창시자를 가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제한과 자유를 공유하고 있는 침례교회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성경에 의해 제한되고 통일되면서도 자유와 다양성을 지닌다는 외견상의 이율배반적인 논리를 아무런 불편 없이 인격 속에 체험적으로 실감하고 있는 것이 역사 속의 침례교의 모습이며 이런 무리들이 지닌 신학이 침례교 신학의 정체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침례교는 신학이 없는 교파라고 알려져 왔다. 신학이 아니라 신학자도 없고 성서해석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 타당한 원리마저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학이 없고 성서해석에 대한 원리가 없고서야 어떻게 하나의 교파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지금까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제시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침례교 정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해봄으로써, 침례교 정체성을 확인하고, 그 이면에 깔려있는 침례교의 기본정신인 “자유”를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침례교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침례교 신앙의 특성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도록 돕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배경

어린 시절부터 20세가 될 무렵까지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연구자는 군복무를 앞두고 장로교회에서 침례교회로 신앙생활의 적을 옮기게 되었다. “침례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선입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생활에 적응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외형상 장로교에서의 “세례” 의식 대신 “침례” 의식을 행한다는 것과 “장로” 제도 대신 “안수집사” 제도를 두는 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질문이 생겨났다. “왜 침례교인인가? 침례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장로교와 감리교 그리고 성결교 등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침례교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진행되었다. 연구자의 이런 의문이 결코 개인적인 것만은 아니었음을 동료들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연구자의 이런 작은 노력이 침례교 목회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이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특히 “자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교회사 강의를 통해서였다. 침례교 신앙의 모든 근원에는 “자유정신”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강의를 통해 배우게 된 때문이었다. 이 개념을 이해할 때 침례교 신학 혹은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신이 본 연구를 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3. 연구방법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침례교 신앙의 중심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분석, 비교, 종합, 평가하는 형식을 취했다. 특정한 신학적 관점을 배제하고, 각각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한 “서술적” 방법을 사용하였다. 침례교 신앙의 근원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신약성서의 교회관과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의 관점에서 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유”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신약성서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개념에 제한하였다. 그리고 침례교 자유운동을 다룸에 있어서 침례교 역사 안에서 그 범위를 한정하였다.

Ⅰ. 침례교 신앙의 근원

 

1. 침례교의 정의

침례교는 17세기 무렵 영국에서 출발하였다. 서남침례교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로버트 베이커(Robert A. Baker)는 그의 책 「침례교 발전사」(The Baptist March in History)에서 “영국에서 나타난 신약성서 기독교인의 무리는 1644년에 이르러 ‘침례교인’ 이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고 주장하였다. 저명한 침례교 역사학자 로버트 토벳(Robert G. Torbet) 역시, 그의 책 「침례교회사」(A History of the Baptist)에서 헨리 베더(Henry C. Vedder)의 글을 인용하여 “1641년경부터는 침례교의 교리와 행습이 그 본질적 특색에 있어서 오늘날 그것과 꼭 같았다”고 결론 지었다.

덴버 신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브루스 셸리(Bruce Shelly)는 그의 책「현대인을 위한 교회사」(Church History in Plain Language)에서 조금 이른 1609년을 최초 영국 침례교회의 출발로 보았다. 침례교의 출발에 관하여 약간의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17세기의 영국에서 침례교가 출발하였다는 점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침례교인”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침례교인들이 신앙의 표시로 행한 “침수침례”와 연관이 있다. 그 당시 교회들은 유아세례를 보편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다. 침례신학대학교 윤리학 교수인 최봉기의 지적대로 유아세례는 교회와 사제 그리고 국가가 “공민권의 수단과 납세의 원천적 근거”로 삼았다. 침례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면서 믿는 자의 침례를 주장하였다. 침례를 행하는 소수의 무리들의 이러한 행동은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분명히 위협적인 행동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었다. 침례교인들은 믿는 자에게 침례를 베푸는 행위 이외에도 중요한 신앙의 원리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인 워드(Wayne E. Ward)의 지적대로, “침례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여졌음이 분명하다.” 침례가 중요하게 보여졌던 이유는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가시적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침례교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침례를 행한 것 때문에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받았지만, 그것이 신약성서에 충실한 신앙의 외적 표현으로 받아들였던 이유로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다. 베이커의 책표지에는 “침례교인”이라는 명칭에 대한 유래가 익명으로 실려 있다:

 

침례교란 명칭은 그 유래에서 독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이 전체 의 특성과 본질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경에 거스를 정도로 끈질지게 본래의 입장을 고수하는 자들에게 냉소적으로 붙여준 별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침례교도들은 단지 신약성서의 진리를 초대 교회가 전수해 준 그대로 믿고 사수하려다가 핍박자들에 의해 이단 침례교도라고 낙인찍힌 자들인 것이다.

 

침례교인들이 침례를 고집한 이유는 신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표현인 외적 방법까지도 성서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윌리엄 터크(William Tuck)의 지적처럼, 침례교인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조소와 경멸적으로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영광의 명칭이 되었다. “침례교인”이라는 명칭은 침례교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일컫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2. 침례교의 기원

침례교의 기원은 자유교회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유교회는 국가교회와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 당시, 교회와 국가는 연합되어 있었다. 따라서, 교회와 국가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셸리의 지적처럼, “교회는 영적 구원의 문제를, 국가는 지상에서의 복리 추구”를 위해 함께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종교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받아들였다. 한 사람이 출생하면, 그 사람은 국가의 시민이 되는 동시에 유아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된다. 종교를 선택할 자유나, 개인의 양심에 따라 신앙적인 행동을 할 자유를 갖지 못했다. 이것은 교회가 국가의 법률적인 통제 아래 놓여 있다는 의미가 된다.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국가가 신앙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주장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앙의 있어서 궁극적인 권위는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강조했다. 자유교회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1490-1526)과 펠릭스 만츠(Felix Manz)가 이끄는 스위스 형제단이 국가교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신들만의 교회를 조직한 1525년이었다. 셸리의 지적처럼, “그리하여 이들은 세례 사건 직후 취리히를 떠나 인근의 졸리콘(Zolikon)촌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일월 말경 최초의 아나뱁티스트(Ana- baptist)교회가 조직되었으니, 현대 역사상 최초의 자유교회(국가와 연계되지 않은 교회)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물론, 자유교회의 전통이 16세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이전 세기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독특하게 나타난 것은 16세기에 대륙의 아나뱁티스트 전통과 영국의 청교도 분리주의 전통”이었다. 대륙의 아나뱁티스트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는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에 같은 지역에 살았던 아나뱁티스트가 영국의 분리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17세기 영국의 침례교인들이 추구하였던 신앙의 사상에서 아나뱁티스트가 추구한 신앙사상과의 유사성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527년 슐라이트하임(Schleitheim)에서 아나뱁티스트가 모여서 합의한 오늘날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으로 불려지는 것에는 몇 가지 중요한 사상들이 나타난다. 셸리는 이들의 신앙고백문에 나타난 사상을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 번째는 흔히 재세례파에서 “제자도”라 일컫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의 관계는 내부적 경험이나 신조의 수용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과의 매일 동행하는 것이어야 하는바,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모범이 신자의 변화된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한다고 하였다....두 번째 원칙인 사랑의 원칙은 첫 번째 원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자연스레 파생되었다. 이들을 비재세례파들과의 관계에서 비폭력주의를 고수하였다. 이들은 전쟁에 나가지 않았으며, 박해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않았으며, 국가의 강제적 성격을 띤 행위들에 참여하지도 않았다....세 번째 원칙은 우리가 현재, 교회 권위에 관한 “회중주의적 이해”라 부르는 것인데, 실제로 루터나 쯔빙글리의 경우에도 개혁 초기에는 이러한 경향을 띤 바 있었다. 재세례파 집단은 오직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기초하여 세례받는 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각 신자는 그의 동료 신자들을 위한 제사장이었으며, 불신자들을 향해선 선교사의 역할을 하였다. 일체의 교회 문제에 관한 결정은 회중 전체의 의견을 좇도록 하였다.... 네 번째 원칙은 철저한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 할 수 있겠다. 기독교 신자들은 “자유롭고, 강제 당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신앙을 결단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최초, 자유교회의 사람들이 고백한 신앙고백문을 통해 우리는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들 가운데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의 신앙체험, 회중주의, 종교의 자유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원칙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아나뱁티스트가 국가교회로부터 자신들만의 노선을 걸을 수 있었던 배후에는 신약성서연구를 통한 권위에 대한 새로운 확신이 있었다. 이들은 성서연구를 통해 교회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신약성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야말로 그들이 따라야 할 교회의 모델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성서해석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16세기의 대륙의 아나뱁티스트를 포함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주어진 혜택이다. 토벳의 지적처럼 “성서를 통해 하나님께 순종할 자유”를 갈망하지 않았다면, 국가교회로부터의 과감한 분리를 추구할 수 있는 동기를 공급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의 자유교회를 탄생시킨 16세기 대륙의 아나뱁티스트의 헌신은 침례교인들에게 자유로운 국가 안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로 존재함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추구할 수 있도록 자유에 대한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참된 권위 아래에서 진정한 순종을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참된 신앙공동체 회복을 위해 신학적 신앙과 거대한 교회적 배경을 수정하려고 시도하여 온 개혁자들 가운데 개혁자들임에 분명하다.”

 

3. 침례교와 종교개혁의 유산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개혁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탄생시키고, 서방 기독교권의 교황 지도권을 종식시켰다. 초기 프로테스탄트 진영 내에는 네 개의 주요한 집단들이 있었다. 이들은 루터파, 개혁주의, 아나뱁티스트, 성공회로 나누어진다.

 

1) 종교개혁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신학 논쟁을 목적으로 95개 신조문을 작성하여, 당시의 관습대로 이것을 비텐베르크 성채 성당 문에 붙였다. 1517년 10월 31일의 일이었다. 그의 주장들 가운데는 면죄부가 결코 죄를 사하지 못한다는 것과 연옥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면죄부는 헌금자에게 거짓된 안전감을 부여함으로 오히려 해롭다는 것 등이 포함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거대한 운동에 불을 붙여 놓았다. 루터는 이것을 계기로 독일 교회의 개혁을 시작하였고 역사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셸리는 루터가 남긴 공헌을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그는 네 가지 중요한 가톨릭의 질문들에게 새롭고 통찰력 있는 해답들을 제시하였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에 대해서는, 선행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라고 대답하였다. 궁극적인 종교적 권위의 소재는 눈에 보이는 조직체인 로마교회가 아니라, 성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라고 하였다.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기독교 신자들의 전체 공동체라 고 응답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기 때문 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의 정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성속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유용한 소명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 하였다.

 

루터의 공헌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장벽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종교 개혁 당시 루터의 표어였던 “오직 믿음으로”와 “오직 성경으로”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서의 권위에 근거한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놓았다. 또한, 루터는 그 당시 라틴어로 된 성서를 고국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함으로써 일반대중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그의 성서번역은 종교개혁의 확산과 독일어 보급, 그리고 국가로서의 독일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성서에 근거한 개인의 신앙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침례교인들은 루터에게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인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1536년 7월, 독일의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로 가는 도중 제네바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칼빈은 윌리엄 파렐(William Farel)을 만나 제네바에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칼빈은 루터와 같이 프로테스탄트의 기본적 4개 신조에 있어서는 신념을 같이 하고 있었다. 칼빈은 루터보다 한 세대 늦게, 다른 지역에서 출생하였으며,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셸리의 지적처럼, “루터는 농부요, 수도사요, 대학 교수였다. 칼빈은 학자요, 법률가로서, 혼란한 시기에 번창하는 교역 도시에서 목회를 하였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다른 수요를 충족시켜야 했으며, 서로 강조점이 다른 기독교적 해답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에 건축된 신학과 교리, 실제 교회의 모습은 여러 가지 중요한 점들에서 차이가 있었다. 만일 루터의 요절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이었다면, 칼빈의 요절은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것이었다. 칼빈은 바울, 어거스틴, 루터가 가르쳤던 기독교 전래의 예정론의 교리 속에서 종교적 헌신의 근원을 발견하였다. 칼빈과 루터는 양자 모두 하나님의 존엄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속성이 루터에게는 죄 사함의 기적성을 알려 주었는 데 반해, 칼빈에겐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시고야 만다는 점을 확신 시켜 주었다. 그리하여 칼빈은 그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칭의에 앞서 하나님의 주권을 먼저 취급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스위스의 제네바로 부터 시작된 칼빈주의는 프랑스, 홀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뉴잉글랜드 등으로 파급되었다. 42년간 예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회사를 강의하였던 로랜드 베인톤(Roland H. Bainton)은 칼빈주의자들의 모습을 그의 책「16세기의 종교개혁」(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선택된 소수의 집단이었으며, 하나님 외에는 어떤 절대 주권도 인 정하지 않았으며, 구원에 관하여 염려하지 않았으며, 불변하는 하나님의 예 정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즐겼으며, 이 세상의 향락을 탐하지 않고 오직 주권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하였다. 세상 왕국들을 정복하는 외에는 다른 오락을 몰랐으며, 세상 군왕들의 목을 자르고, 황무지를 개척하며, 이를 통해 이 지상 위에 거룩한 국가 사회를 이룩하고자 했다.

 

 

칼빈주의의 공헌은 신앙에 대한 강한 확신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할 영역을 확대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와 국가 전체에 미쳐야 하며 궁극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갖도록 만들었다. “확실한 신념과 의로운 생활 규범을 유지하는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 의해 공공생활과 정책의 색채가 결정된다면, 어떤 국가도 기독교적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사상은 침례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의 현실 구현이라는 측면을 볼 수 있도록 안목을 열어주었다. 후에 칼빈주의의 사상이 영국이라는 상황에서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청교도를 통해 구체화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침례교가 태동하는 데 있어서 밑그림을 제공하였다.

 

아나뱁티스트의 출발은 독일어 사용권인 스위스 취리히에서 쯔빙글리에 의해 주도된 개혁운동과 연관을 맺고 있다. 쯔빙글리는 학자이면서 인문주의자였다. 그는 복음적인 개혁자로서 사람을 끄는 힘과 강인한 인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재능 있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헬라 고전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역시, 쯔빙글리의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의 젊은 인문주의자들은 학문을 사랑하고 에라스무스를 존경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이용하여 쯔빙글리는 그들에게 헬라어 신약성서를 소개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그들은 개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레벨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인물들의 열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쯔빙글리를 앞서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1525년 1월경에는 미사집전, 유아세례 등과 같은 결정적인 논쟁을 통해 쯔빙글리와 결별을 선언한다.

최초의 아나뱁티스트로 불려온 사람들은 1525년 1월 21일 그로스뮌스터(Grossmuenster)가까이에 있는 펠릭스 만츠(Felix Manz)의 집에서 첫 번째 모임을 가짐으로써 그들만의 교회출발을 선언하였다. 여기서 전직신부였던 게우르게 블라우로크(George Blaurock)는 또 다른 형제 콘라드 그레벨에게 침례를 요청하여, 그레벨로 부터 침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레벨로 부터 침례를 받은 블라우로크는 또 다른 몇 몇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서남침례교 신학교 교회사 교수인 에스텝(William R. Estep)은 헤롤드 벤더(Harold Bender)의 글을 인용, “콘라드 그레벨이 취리히 교회에 대한 취리히 시의회의 판결을 거부한 것은 그 사건이 비록 명확치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도, 근대의 ‘자유교회’운동의 기원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했다. 대적들은 이들을 가리켜 “아나뱁티스트”라 부르기 시작했다. 아나뱁티스트가 추구한 목표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데 있었다. 베인톤의 지적처럼 “아나뱁티스트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어는 ‘복구(Restored)’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내세운 표어는 ‘복구 혹은 복원(Resti- tution)’이었다.”

성서에 근거한 자발적인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추구하려했던 아나뱁티스트는 많은 핍박과 박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아나뱁티스트의 순수한 신앙의 복구 노력은 안타깝게도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뿐만 아니라 가톨릭 양측으로부터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이것은 16세기의 혼란한 상황 가운데에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조치였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스트가 주장하는 신앙의 자유가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아나뱁티스트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국가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당한 고통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 당시 상황을 베인톤은 멘노 시몬스(Menno Simons)의 글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했다:

 

일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일부는 비인간적으로 참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그 후에 말뚝에 묶여 노끈에 목이 졸려 있었다. 산 채로 태우거나 천천히 그슬려 죽이기도 했다. 일부는 칼로 찔러 죽인 후에 그 시체를 새들의 밥으로 주기도 했다. 일부는 고기밥이 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궁핍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했으며, 산악이나 사막에서 굶어 죽어 갔으며, 굴과 웅덩이에 거주하기도 했다. 나라에서 나라로, 도시에서 도시로 부녀자들과 어린애들을 이끌고 도망 다녀야 했다. 모든 사람들에 의해 미움 받고, 학대받고, 거짓 혐의를 받고, 비난받아야 했다.

 

아나뱁티스트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에 충실한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하다. 자신들이 옳다고 믿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참된 헌신의 모습을 아나뱁티스트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가 침례교인들에게 남겨준 유산은 무엇인가? 아나뱁티스트가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추구해온 신앙의 유산은 20세기의 모든 진보된 문명이 가지는 값진 소유가 되었다. 에스텝의 주장처럼 “교회 및 국가의 분리를 보장받으면서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곳에는 모두 그 유산이 남아있다. 제자의 도리에 관한 아나뱁티스트의 이상이 꽃피는 곳에는 모두 그 유산이 있는 셈이다.”

 

만약, 루터교 종교개혁이 수도사의 조그만 방안에서 시작되었고, 아나뱁티스트가 기도회에서, 그리고 칼빈주의 교회가 학자의 책상에서 시작되었다면, 영국의 종교개혁은 국가의 정치적 사건, 특히 왕위 계승의 문제로부터 연유하였다고 볼 수 있다. 1533년 6월경 앤 볼레인(Ann Boleyn)은 영국 국왕 헨리(Henry) 8세의 왕비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녀의 즉위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영국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경로를 통하여 종교개혁의 물결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성공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영국의 국왕인 헨리 8세가 앤 볼레인을 새로운 왕비로 맞아들인 것은 전 왕비 캐더린(Catherine)이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출산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는 캐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 하고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트(Clement) 7세에게 결혼을 성립시킨 특별허가취소를 요청하였다. 이것은 캐더린과의 지난 18년간의 결혼생활이 무효라는 교황청의 허가를 받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황은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국왕의 요청을 미루었다. 그러자 헨리는 이 문제의 해결을 스스로 시도하였다. 1533년 왕은 비밀리에 앤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5월에 영국의 교회 법원은 헨리와 캐더린 사이의 혼인은 처음부터 무효였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에 교황은 헨리에게 파문 처분을 내렸고, 헨리는 로마교회와 결별하게 되었다.

1534년 헨리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반포함으로써 자신이 영국 교회의 유일한 수장임을 선언함과 동시에 독립된 영국 국교의 출발을 알리게 된다. 헨리의 관심은 교리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로마가톨릭교회 대신 영국 가톨릭교회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 교회가 로마교회로부터의 분리 이후에도 전통적인 신조를 계속 고수하였다. 그 당시에 영국 국교내의 중요한 변화는 두 가지였다. 즉, 수도원 폐지와 영어로 된 성서번역작업이었다. 헨리는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잃어버린 수도사들이 떠난 수도원의 재산을 압류하여 국고를 보충하고, 귀족이나 향사 계급들의 지지를 얻는 데 사용했다.

성서번역작업에 관한 로마교회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라틴어 판 성서에 의존하여 교리 문제들을 결정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마일스 커버데일(Miles Coverdale)로 하여금 일반인들이 접할 수 있는 영어성서번역판을 내놓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헨리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더 풍성한 자유를 구가하는 시대를 마련하는 장을 마련하였다. 1547년, 헨리가 사망한 후, 그의 병약한 10살 짜리 아들 에드워드(Adward) 6세가 헨리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다. 에드워드의 재위 기간 중, 처음 3년 동안은 서머셋 공작(Duke of Somerset)이 섭정하였다. 이 시기에 영국교회는 개혁의 진보를 경험했다. 일반들에게도 성찬식의 포도주가 주어졌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교회의 각종 성상들은 철거되었다. 무엇보다 서머셋의 섭정기간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업적은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출판이라 할 수 있다. 주로 크렌머가 작성하였던 이 기도서를 통해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영어로 된 예배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1533년에 에드워드가 죽고 캐더린의 딸 메리(Mary)가 즉위하였을 때, 친 프로테스탄트적 동향은 갑작스런 중단을 맞았다.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영국을 다시 가톨릭 노선으로 돌려놓고자 하였다. 그녀는 4년 동안 그 부친보다 훨씬 더 가혹한 종교정책을 수행하였다. 개혁에 앞장섰던 대주교 크렌머를 비롯한 거의 300여명의 프르테스탄트들이 화형장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메리는 유명한 “피에 젖은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558년 말 메리가 사망하자, 헨리 8세와 앤 볼레인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의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가 즉위하였다. 그녀는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 종교의 평화를 추구하였다. 교회의 예배의식은 가톨릭 양식을 답습하면서, 침례와 성만찬을 그리스도가 제정한 진정한 성례로 인정하였다. 엘리자베스의 39개 신조문(Thirty-Nine Articles)은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트적이었으나, 그 외의 많은 신조들은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양쪽을 다 만족시키기 위해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작성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중도적인 신앙노선은 메리의 재위 기간 중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피신하였던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을 영국으로 불러들인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을 보고 “시온의 나태(The Ease of Zion)”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직접 성경을 읽었으며 그것에 따라 이상적인 영국의 종교개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청교도(Puritan)”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국가 전체에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2) 침례교와 종교개혁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개혁당시 두드러지게 개혁을 주도했던 네 그룹의 발생 배경과 사상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침례교인들이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유일한 권위를 성서에 둔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남긴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에스텝의 지적처럼 성서의 권위는 “종교개혁의 확실한 시금석이요 로마가톨릭과 종교개혁 사이를 가르는 명확한 경계”이다. 개혁자들 가운데 교리와 규율문제에 있어 아나뱁티스트 보다 더 “오직 성경으로”를 주장한 집단은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아나뱁티스트의 개혁적 성향은 단호하였다. 쯔빙글리가 취리히 교회회의의 미사 집전을 받아들이자 후에 재침례교인이된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그를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칙을 폐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결별하였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아나뱁티스트의 개혁적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침례교인들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또 하나 중요한 정신적 유산은 종교의 자유이다.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이 17세기를 거치면서 신앙의 양상이 다양화되면서 서로 다른 신앙고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도 개혁자들 사이에 견해차이를 보였으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루터의 경우, 로마 가톨릭의 체제 내에서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교회를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추진할 수 없었다. 칼빈 역시, 제네바라는 도시 전체를 개혁시키는 데 몰두한 나머지 교회와 국가의 일체사상에서 떠나지 못했다. 물론, 칼빈의 사상인 하나님의 통치가 세속정부와 사회전체에 미쳐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국가의 일치사상이 낳은 부작용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 당시 국가의 권력은 교회가 원하는 대로 반대자들을 처벌하는 데 사용되었다. 화형의 위협은 이단자들의 개종과 일반신도들에게 경종을 울려줌으로써 타락과 방종을 예방하는 이중적 효과를 거두었다. 각 교파들은 자기들만의 존재와 신앙을 위해 투쟁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아나뱁티스트의 특별한 노력을 베인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각 개인들이 각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구가하기 위해 투쟁했다. 따라서, 오늘날 침례교를 비롯해 많은 개신교단이 누리고 있는 종교의 자유는 그 당시의 지식인들의 사려 깊은 경험과 지혜가 한 몫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순교한 사람들의 증거와 자비의 호소가 발휘한 효력의 결과였다.

 

침례교인들이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신자 제사장 주의로 불려지는 것이다. 루터는, 교황이 머리가 되는 거룩한 계급제도라는 전통적 교회관을 파기하고, 모든 신자들이 다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께 영적 제사를 드렸던 신자들의 공동체가 교회라는 초대 교회의 입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 결과 개인의 결단에 의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유와 특권을 회복시켜 놓았다. 그리고 자발적인 결정에 의해 모여진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임을 인식시켜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앙사상들은 종교개혁의 좌파로 알려진 아나뱁티스트의 영향과, 루터와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를 포함한 개혁자들과 영국의 개혁운동 모두에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Ⅱ. 침례교 역사와 자유

 

1. 자유의 의미

“자유”라는 말이 올바르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또는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해야 할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자유롭다”라고 말했을 때, 그가 방금 감옥으로부터, 빚으로부터, 아내로부터, 또는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되었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와졌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런던대학교 교수이며 정치철학자인 모리스 크랜스턴(Maurice Cranston)은 그의 책「자유란 무엇인가」(Freedom-A New Analysis)에서 사람들이 자유의 대상을 구체화시키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들은 자유라는 이름에 너무나 익숙해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냐?”고 물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냐고 물어야 한다고 암시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언제나 이렇게 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크랜스턴의 지적은 오늘날 침례교인으로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혹은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만약 초기 침례교인들에게 “당신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를 질문한다면 그들은 분명한 답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성서의 권위에 근거하면서, 그 누구의 간섭과 제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개인의 양심의 선택에 의한 신앙을 추구한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침례교인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내용의 대답을 할까? 연구자는 여기에서 정치. 철학. 경제.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자유를 다루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범한 상황 가운데서의 자유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어떤 속박이나 부담이 없어지면, 잠시동안 그 특수한 속박이나 장애 그리고 부담으로부터 해방감과 흥분을 경험하게 된다.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먼저, 허가 또는 금지에 대한 상례적인 제한을 받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나 일시적 기분을 만족시킬 기회를 가질 때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느낀다. 다음으로는, 좋지 않은 습관들 가운데 하나를 극복할 때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느낀다. 마지막으로, 속박하던 상태가 변하는 것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자유롭다고 느낀다. 민간인이 군에 징집되는 경우 민간인 생활의 특유한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와 진다. 반대로, 군에서 제대하는 경우, 군대 생활의 특유한 속박으로 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 일반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즉, 자유는 “무엇으로부터~”라는 대상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속박이나 부담 등에 대한 분명한 지목함이 전제된 상황 속에서 자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침례교인들은 일찍이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 어떤 대상이라 할지라도 개인의 신앙에 대해서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믿어왔다. 비록 국가의 최고 통지자라 할지라도 개인의 신앙 문제를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상이 침례교인들로 하여금 국가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침례교인들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국가의 시민으로서 충성을 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이 자유를 주장할 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속박과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는 욕구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때문이다.

침례교인들이 누리고자 했던 첫 번째 자유인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자유인 “무엇을 할 자유”로 이어진다. 침례교인들은 국가나 교권 등의 거짓된 권위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하는 동시에 참된 권위인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의 권위에 순종할 자유를 추구하였다. “인간의 자유란 이성에 의한 지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유란 실현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은 공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는 “진리를 추구할 때”(요8:32)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연구자는 자유의 의미를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자유의 의미를 통해 침례교인들이 추구해 왔던 자유를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침례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추구해온 자유는 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이었다. 허긴은 성서 가운데 나타난 인간의 자유가 가지는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고전 8:9 ; 10:31). 나의 자유가 적절하게 적용되지 못하여 남의 자유나 양심을 구속하거나 해치면 이미 그것은 진정한(타당한) 자유가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영역에서도 자유는 절대적이 아니다.

다음으로 자유는 도덕적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도덕의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울은 이 사실을 신앙은 사랑으로 행위에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갈 5:6). 그리스도의 자유는 정의, 완전, 양선 및 의로움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함을 성서는 주장하고 있다(벧전 2:16).

셋째로, 자유는 책임적이다. 마르틴 루터는「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글에서 자유의 책임성을 강조하면서(고전 9:19)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 안에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 안에서, 곧 신앙을 통하여 이웃 안에서 살고 있음”을 역설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회적 책임성과도 분리 될 수 없음을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자유는 결코 무제한적인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침례교인들은 국가의 잘못된 권위로부터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자유를 주장함으로써, 교리적인 신앙 중심에서 벗어나 성서 중심으로의 복귀를, 전체주의적인 공동체에서 개인의 권위가 보호되는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로의 전환을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추구해온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와 무엇을 할 자유,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2. 침례교와 자유

1) 침례교와 자유교회운동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 처럼, 침례교의 출발은 자유교회운동에 기초하고 있다. 자유교회운동의 정신은 국가로부터의 간섭 없이 자발적인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에 의해 모여지고, 운영되는 자율성에 기초한다. 처음부터 침례교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믿었다. 영국 최초의 침례교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50-1616)와 같은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헬위스는 자신이 쓴 소책자, 「불법의 비밀에 대한 간략한 선언서」(A Short Declaration of the Mystery of Iniquity, 1612)의 사본을 제임스 왕에게 보냈다. 사적인 헌신서에서, 헬위스는 왕에게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라는 사실을 상기 시켰다. 그러므로 왕은 그의 백성들의 영적인 생활을 관장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헬위스는 감옥형을 선고받았고, 그곳에서 죽었다. 헬위스의 후계자인 존 머튼(John Murton) 또한 「심판 받고 정죄된 종교의 박해」(Persecution for Religion Judged and Condemned)라는 책을 출판한 후에 동일한 운명의 길을 걸었다. 윌리엄 틸먼(William M. Tillman, Jr)의 지적처럼, “침례교인들 외에 다른 무리들도 영국의 분리주의 운동의 일부였지만, 종교의 자유에 관해서 침례교인들 만큼 탁월한 사람들은 없었다.”

영국 식민지 내에서 종교의 자유를 위한 으뜸가는 투사는 로저 윌리암스(Rodger Williams, 1603-83)였다. 영국 침례교인들은 윌리암스의 유명한 저서인 「박해의 피묻은 교리」(The Bloudy Tenent of Persecution, 1644)에 있는 그의 모든 주장들에 동조하고 있었다. 종교 박해의 경향이 있었던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분위기를 거부하면서, 미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절정에 이르게 한 것은 이를 이론으로부터 실천으로 이행하게 한 윌리암스의 노력때문이다.

이러한 침례교인들의 노력은 권리장전(Bill of Right)이 미국의 헌법의 일부가 되는 데 기여하였다. 헌법의 제정자인 제임스 메디슨은 제1수정안의 용어에 관해 침례교인들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의회는 종교의 설립 또는 그것에 대한 자유로운 의식을 금지하는 것에 대한 어떤 법도 제정해서는 안 된다.” 침례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신앙은 허긴의 지적처럼 “국가나 관헌 그리고 교권에 의한 타율적 신앙이 아닌 자율에 의한 신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침례교인에게 있어서 종교의 자유는 절대적이요 필수적이었다.

 

2) 침례교와 성서

국가로부터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궁극적인 권위인 성서에 순종하는 자유로 이어진다. 이것은 자유교회운동의 유산을 물려받은 침례교인들이 간직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신앙전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침례교인을 일컬어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한다. 에드워드 콜(Edward B. Cole)은 그의 책「침례교의 유래」(The Baptist Heritage)에서 이 사실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침례교는 다른 여러 역사적인 기독교 단체와는 달리, 그 신앙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어떤 회의나 어떤 종류의 교회나 조직체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다. 침례교인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권위를 성경에 깊이 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침례교인들을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침례교인들이 국가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신앙생활의 유일한 권위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성서에 권위에 대해 우위권을 주장한 사람들이 침례교인들만은 아니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유럽의 아나뱁티스트,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들도 침례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성서의 권위에 대해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

1525년 그레벨과 만츠 등이 이끄는 스위스 형제단이 취리히 시의회에 의해 유아세례를 강요당하였을 때, 그들은 시의회의 명령에 불복하였다. 그리고 독자적인 침례를 베풂으로서 자유교회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도 독자적인 성서연구의 결과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최초의 영국 침례교회를 탄생시킨 존 스미스(John Smith)는 나름대로 헬라어판 신약성서를 연구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서는 유아세례의 예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스미스는 교회는 언약의 개념에 의한 연계가 아닌 신앙고백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스미스를 따랐던 40명의 회중은 스미스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신앙고백을 근거로 침례를 받았다. 우리는 여기에서 국가의 전통이나 권위보다는 성서의 권위를 우위로 둔 사람들의 용기있는 행위를 엿볼 수 있다. 침례교인들의 용기 있는 신앙의 결단은 고문과 화형 등의 처벌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 가운데 참된 신앙인이 가져야 할 권위에 대한 헌신의 모범을 남겨 놓았다.

침례교인들이 성서의 사람들이라는 것과,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자유의 사람들이라고 불려지는 데에는 상호 연관성을 갖는다. 그들이 성서의 사람들이었기에 신앙의 자유를 외칠 수 있었고, 신앙의 자유를 부르짖었기에 그들은 성서의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자유의 근원은 하나님과 그 분의 계시인 성서인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 역사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침례교 고백문과 자유

기독교에서의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신뢰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확신과는 달리 계시에 근거한 체험과 예배의식 등을 통해 인격의 내부에 형성되는 마음의 태도이다. 신앙은 개인생활을 통일하는 중심 역할을 하는 한편, 신앙의 표현인 신조, 조직, 제도를 가지는 공동체 생활을 통일하는 중심이 되기도 한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신앙을 교리나 신조들을 통해 표현해 왔다. 침례교 역시 자신들의 신앙내용을 고백문 형태로 진술해왔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고백문을 최종적인 기준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침례교인들이 자신들이 작성한 고백문을 최종적인 권위에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윌리암 터크(William P. Tuck)는 그의 책「침례교회의 전통」(Our Baptist Tradition)에서 몇 가지를 제시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경험이 신앙의 기초라고 믿기 때문이다. 둘째로, 침례교인들은 신앙이란 인격적인 것이지 명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셋째로, 침례교인들은 신자들의 제사장직을 믿기 때문에 비신조적 사람들이다. 이 말의 의미는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이 될 권리를 가지고 있고 당신 스스로가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믿는다. 마지막으로, 침례교인들은 성경이 모든 문제에 대해 충분한 지침이 되며, 궁극적인 권위가 된다고 믿는다.

 

 

침례교인들이 신조를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신조가 갖는 강제성과 규율 때문이다. 신조는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의 기회를 제한함으로서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선교적, 변증적, 교육적, 측면들의 범위 안에서 신앙의 내용을 고백문 형태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교리적이기 보다는 서술적인 선언으로서 특별한 지역적 상황 아래에서 유동적으로 변형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여기에서는, 1989년 7월 침례교 세계연맹의 침례교 유산 위원회에 의해 작성된 “침례교 정체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고백문과, 1987년 2월에 결성된 남 침례교 연맹(The Southern Baptist Alliance)에 의해 만들어진 “침례교 연맹 규약,” 그리고 1964년 미국의 첫 번째 침례교 전국 조직(The first Baptist national organization)결성 150주년제를 위해 준비된 “침례교인의 이상”이라는 제목의 선언서를 중심으로 고백문에 나타난 자유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침례교의 정체성에 관하여

“침례교의 정체성에 관하여”라는 이름 붙여진 이 선언서는 신조적이기 보다는 상당히 서술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문서의 결론 부분에는 다섯 가지 요약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요약문은 침례교의 정신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선언서는 1989년 7월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서 침례교 유산 위원회에 의해 인준되었다.

침례교의 정체성에 관하여

 

침례교인들은 : 침례와 주의 만찬에서 상징된 예수를 믿음으로 개인의 구 원 체험을 강조하는 전체 기독교의 구성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서 자유로운 지역 회중 안에서 함께 연합하고, 신앙과 삶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 하려는 사람들이다.

 

신앙과 행습의 모든 문제에서 성서의 권위를 따르는 사람 들이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자유가 있 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할 대위임 명령이 모든 구성원의 책 임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침례교의 정체성에 관한 요약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요약문에서 다루고 있는 첫 번째 내용은 침례교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과 특성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침례와 성만찬을 통해 표현되며,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적인 결단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신앙은 지적인 동의의 차원이 아닌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얻어지는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두 번째, 교회의 위치와 권한에 관하여 진술하고 있다. 침례교인들은 우주적인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침례교인들이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지역교회를 의미한다. 지역의 회중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치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지역교회가 자치적으로 교회를 다스림에 있어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요약문의 세 번째 내용은 침례교인들이 성서에 대해 갖는 권위의 우위성을 보여준다. 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권위가 있다. 즉, 교리, 신조, 고백문 등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안내역할을 해온 권위들이 있다. 이러한 권위들의 유용성을 침례교인들은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만이 최종적인 권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성서가 신앙과 행습에 있어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요약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네 번째의 내용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진술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하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국가나 그 어떤 단체나 개인이라 할지라도 신앙에 있어서 강제할 수 없다. 이것은 침례교인들이 일찍부터 주장해온 사상이기도 하다.

요약문에서 제시하고 있는 다섯 번째의 내용은 교회의 사명과 역할에 관한 진술이다. 교회는 세상에 존재함으로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침례교인들은 복음전파의 사명이 소수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교회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이 힘써야 할 책임으로 인식한다.

침례교의 정체성에 관한 짧은 진술은 침례교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신앙의 방향과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이며 자발적인 신앙, 모든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여 다스리는 자유로운 교회, 신앙에 있어서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선택할 자유, 그리고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는 자유와 더불어 책임을 중요시하는 침례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살펴볼 침례교 고백문은 “침례교 연맹규약”으로 불려진다.

2) 침례교 연맹 규약

이 규약은 남침례교 총회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자 온건주의자들이 취한 조직적인 반응의 결과로 남침례교 연맹이 조직되면서 이루어졌다.

침례교 연맹규약

 

역사적인 침례교 원리들, 자유들, 그리고 전통들을 분명히 밝혀야 하며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종이 되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응답해야 할 이 시점에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앙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되는 개인은 교회가 역사 적으로 이해한 것과 현대의 성서 연구가 제공하는 최선의 방법들에 의존하면서 성서를 읽고 해석할 자유가 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지역교회는 자신들의 삶과 선교를 결정 하고 지도자를 세우며, 남자든 여자든 사역에 은사가 있는 자로 여겨 지는 사람들을 목사로 임명할 자유가 있다.

 

셋째, 여러 가지 기독교 전통들 속에서 표현되며, 복음을 증거 하려는 모든 곳에 있는 신자들과 협력한다.

 

넷째, 교회 안에서의 지도자의 위치는 종의 역할이며, 그는 종이신 우리 주 님을 모델로 따르고, 선교와 사역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람과 협력한 다.

 

다섯째, 회중, 대학, 그리고 신학교에서의 신학적인 교육은 성서의 권위를 존중해야하며, 열린 마음으로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여 연구하는 사 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모든 사람들이 회개와 믿음, 화해와 희망,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정의에 참여하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 을 선포해야 한다.

 

일곱째, 자유로운 국가 내에서의 자유교회의 원리를 주장하며, 국가든 교회 든 자신의 목적들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을 반대한다.

침례교 연맹규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개인성서해석의 자유, 지역교회의 자치권, 복음전파를 위한 타 교회와의 연합,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역할, 기독교교육에서의 성서의 권위와 성서교사들에 대한 존경, 영혼구원과 사회정의실현에 대한 교회의 책임, 자유로운 국가 내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로 요약할 수 있다. 침례교 연맹 규약의 특징은 이 규약이 가장 최근에 진술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20세기를 살아가는 침례교인들이 믿고 주장하는 신앙의 사상들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침례교인들이 추구해온 신앙전통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침례교인들이 계속해서 주장해 온 것들인 성서의 권위와 해석의 자유, 지역교회의 자치권, 종교의 자유 등에 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교회에서의 지도자의 역할을 구체화시켜 묘사한 부분과, 교회의 역할에 있어서 영혼구원과 사회정의를 동등한 차원에서 다루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침례교인들이 추구하는 자유가 신앙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틀의 변화를 제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침례교의 고백문은 “침례교인의 이상”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것이다.

 

3) 침례교인의 이상

이 고백문은 18세기 남침례교 총회의 지도자이며 학자였던 헤링(Ralph A. Herring)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위원회에 의해 준비되었다. 여기에는 권위, 개인, 그리스도인의 삶, 그리고 교회에 대한 침례교의 이해를 담고 있다.

침례교인의 이상

 

권위 : 기독교 권위의 궁극적인 원천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인생의 모 든 것은 주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성서는 영감으로 이루어진 하 나님의 뜻과 방법의 계시로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르침에서 완성 되었으며, 우리의 믿음과 실천의 권위 있는 규범이다. 성령은 인간 에게 자신과 자신의 뜻을 나타내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 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권위의 음성을 설명해 주시면 확인해 주신 다.

 

개인 : 개인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므로 무한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존경과 인정을 받을 만하다. 각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및 종교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 지고 있으며 도덕적 및 종교적 의무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께 책임을 지게 된다. 모든 사람은 양심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하 나님 앞에 자유를 가졌으며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권리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 주면서 자신의 종교 적 신념을 증거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 : 죄로부터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써, 오직 주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 할 때에만 허락된다. 기독교 제자 직분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삶의 전체와 관계하며 완전한 순종과 전 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 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제사장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될 의무가있다. 가정은 인 간의 복리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가 정 생활의 발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최 대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 나 라의 두 세계에 속한 시민이며, 보다 높은 하나님의 법은 물론 땅 의 법도 따라야 한다.

 

교회 : 교회의 총괄적인 의미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하 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 신자들의 사귐의 공동체이다. 지역 개교 회의 의미로 교회는 예배, 양육 및 봉사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결합 한 침례 받은 신자들의 사귐의 공동체이다. 한 교회의 회원 자격은 자발적으로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충성스러운 제 자의 직분에 자신을 바치는 거듭난 사람들에게만 정당하게 베풀어 지는 하나의 특권이다. 침례와 주의 만찬은 교회의 두 가지 의식으 로서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이들을 지키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개인적인 체험에 있어서 영적인 실체들을 포함한다. 교회란 하나의 자치적인 조직체로서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복종해야 한 다. 교회의 민주적인 치리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신자들의 평등 권과 책임을 적절하게 반영해 주고 있다. 교회와 국가는 모두 하나 님으로 말미암아 제정되었으며 그 분 앞에 우리는 책임을 져야한 다. 이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 하지만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받 은 기능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때에 상호간의 인정과 서로 도와 줄 의무가 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임이 있으니, 곧 교회 의 사명은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특성과 사역은 세상 에 속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침례교인의 이상”에서 진술하고 있는 침례교인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 선언서는 앞에서도 진술하였지만, 네 가지의 큰 주제를 중심으로 진술하고 있다. 궁극적인 권위는 무엇인가? 누가 주체인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교회는 무엇인가? 이러한 주제와 관련된 질문들의 해답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다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중요한 관점은 침례교인들이 추구하는 자유가 가지는 양면성이다.

침례교인들은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동시에 공동체인 교회를 동일한 선상에서 다루고 있다. 개인과 공동체를 대립관계에 두는 경우, 어느 한 쪽을 강조가 쉬우며 이 둘은 항상 갈등관계에 놓여질 수 밖에 없다. 침례교인들은 역사 속에서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이라는 두 관계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시켜 왔다.

또한, 침례교인들은 종교적인 권위에 대한 순종을 삶의 현장에서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신앙원리를 구체화 시켜야 할 장소인 가정, 사회, 국가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입증하려고 힘썼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침례교의 원동력은 자유정신에 기인하고 있다. 본질에 충실하면서 방법론에 있어서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특징을 침례교인들이 가지고 있기에, 시대에 맞추어 다양한 형태의 신앙고백문을 진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침례교인들의 신앙의 원리를 엿보기 위해 세 종류의 고백문을 살펴보았다. 침례교 선조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는 본질에 충실하면서 주위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침례교인들에게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자유정신에 있음도 볼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세 종류의 신앙고백문이 침례교 신앙을 대변할 수 있다거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진술은 아니다. 그렇지만 서로 다른 시기에 작성된 고백문을 통해 침례교인들이 추구해온 신앙정신의 연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침례교의 원리와 자유

 

침례교인들이 역사 속에서 추구해 온 신앙의 원리들은 주로 권위, 개인, 그리고 공동체인 교회, 그리고 국가와 상호 연관을 맺고 있다. 권위와 관련하여 침례교인들이 던진 질문은 ‘신앙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권위는 무엇인가, 그리고 권위를 해석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개인에 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얻는 데 있어서 중재자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과 ‘중재자가 필요하다면 중재자와 함께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관심이 모아졌다고 할 수 있다. 교회에 관련된 침례교인들이 가진 신앙원리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를 다스리는 주체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형성 되었다. 마지막으로 교회와 국가라는 긴장관계를 통해 침례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사상을 형성해 왔다. ‘신앙과 관련하여 국가가 행사하는 권위는 어디로부터이며 그 권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국가와 교회의 역할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등의 질문을 던짐으로서 침례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 체계를 형성해 왔다.

여기서 연구자는 권위, 개인, 공동체 그리고 국가와의 관계를 자유라는 관점에서 침례교의 자유를 성서의 자유, 영혼의 자유, 교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라는 네 가지 주제로 구분하여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성서의 자유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성서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서 성서가 개인과 교회의 삶 가운데 중심이 되어야 하며, 학적으로 탐구할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게 그러나 반드시 성서를 연구하고 복종할 책임이 침례교인들 안에 있다는 확신이다.” 침례교인들만 성서를 독점하지 않는다. 그리고 침례교인들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대부분의 신앙들을 다른 교단으로부터 물려받았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고 있으며, 신학적인 활동과 역사적인 기원이 일반교회와 다르지 않다.

침례교인들이 성서해석과 관련하여 가지고 있는 원리 가운데 첫 번째는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의 기준이다. 침례교인들은 성서 자체를 우상화하거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성서 연구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성서가 증거하고자 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는 일에 있다. 러스 부쉬(L. Russ Bush)와 톰 네틀스(Tom J. Nettles)는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인 「침례교인과 성경」(Baptists and Bible)에서 “침례교인들은 성경책을 숭배하지 않는다. 종이와 잉크는 숭배 받을 가치가 없다.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을 깨닫는 일에 토대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침례교인들이 성서를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에게 최상의 권위를 두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성서에 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권위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침례교인에게 있어서 예수는 성서가 해석되는 기준이다. 침례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가 성서를 해석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신약성서의 고백 때문이다(롬 10:9 ; 빌 2:11). 따라서, 침례교인들이 성서에 다가갈 수 있는 자유와 해석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유는 성서가 주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침례교인들이 성서해석의 자유를 주장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계속적으로 순종하기 위함이다. 근대 침례교의 아버지로 알려지고 있는 존 스미스의 경우, 그는 초기에 영국 국교회 목사로 교육받았다. 그러나 후에 스미스는 분리주의자의 그룹에 참여하게 된다. 스미스의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진리와 신앙에 순종할 자유를 갈망한 때문이다. 결국 스미스는 침례교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신념인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라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은 성서가 완료된 것이지만 성서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결코 완전하거나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침례교인들은 성서에 대해 살아 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적으로 연구하는 열린 태도를 갖는다.

침례교인들이 성서 해석과 관련하여 주장하려는 세 번째 원리는, 다른 모든 종교적인 권위들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일로 나타난다. 모든 신조들, 신앙고백서들, 교회의 기구들과 종교회의들에 대한 모든 교리적 선언들이 성서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다는 확신이다. 이러한 침례교인들의 주장은 터크의 지적처럼 “교리적 선언들의 불완전성과 성서의 충분성”을 믿는 그들의 믿음에 근거한다. 침례교인들이 이처럼 교리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적인 교리들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이러한 교리적 가르침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을 지배할 권한이 없으며, 다른 생활의 영역에서의 사고와 연구를 방해할 목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침례교인들이 성서의 해석과 관련하여 가질 수 있는 소중한 원리는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서의 개인의 판단이다. 침례교인들은 올바른 성서 해석을 위한 기준을 전해 줄 공식적, 비공식적 기관을 갖지 않는다. 이는 각 신자 개인이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성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다. 만약, 신자들이 성령에 인도된다면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강조하는 내용 가운데 불일치와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때로는 충돌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인들은 성서를 해석하는 자유를 소중히 여겨왔다. 왜냐하면 침례교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성서해석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권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개인에게 무거운 책임을 부과한다. 부쉬와 네틀스는 개인의 성서 해석의 자유에 대한 책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있어야 하며 성경의 언어와 문화와 인물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고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마련되어진 모든 기회들을 충분히 활용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이 같은 마음을 길러야 할 의무에서 제외된 자는 없다. (푸주간의 일군, 빵굽는 사람, 촛대를 만드는 자, 의사, 법률가, 그리고 인디언 추장)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탐구를 계속할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2. 영혼의 자유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영혼의 자유는 신조의 강요나 목사의 간섭, 시민 정부의 방해 없이 모든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와 의무가 침례교인들 안에 있다는 역사적인 확신이다.”

레지 멕닐(Reggie McNeal)은 멀린스의 글을 인용하여, “성경에 대해 침례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개인적 해석의 자유와 성경에 대한 복종이라면, 개인과 관련해서 침례교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자유”라고 했다. 영혼의 자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침례교인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 용어들과 말들로 설명되어 왔다. “개인의 능력,”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능력,” “개인적인 신앙,” “영혼의 자유,” “영적인 신앙,” “신자의 제사장 직분,” 등이 영혼의 자유라는 사상의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었다.

영혼의 자유가 의미하는 첫 번째 사상은 개인이 중심에 있다. “기독교 내의 영혼의 능력은 개인주의 원리를 주장한다. 본래 종교적 관계란 하나님과 개인인 인간 사이의 관계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영혼의 자유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한다. 개인에 대한 침례교인들의 강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적인 확신에 근거한다.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각 개인은 하나님 아래에서 도덕적인, 영적인, 그리고 종교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체험은 개인적인 것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체험은 대리인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서 대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정해 줄 수가 없다. 개인이 이와 같은 결정들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은, 바로 개인이 그러한 결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침례교인의 신앙 전통상, 신앙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개인주의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삶(마16:15)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했다. 침례교인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개인적이며, 관계적이며, 직접적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결단은 자유로우며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영혼의 자유는 결코 인간의 자기-능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침례교인들은 결코 개인들이 자신들을 충분히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복음에 대한 침례교인들의 이해는 가장 기본적인 것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엡 2:8-9 ; 딛 3:5-6). 그러나 이 은혜는 항상 개인적인 믿음에 의해 제한된다.

영혼의 자유와 관련한 첫 번째 원리가 신앙의 개인성에 있었다면, 이와 관련된 두 번째 원리는 회개의 경험의 다양성에 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회개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셔든의 지적처럼, “집회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미국의 많은 침례교인들은 회개를 오직 하나의 유형, 즉 자발적이요, 직접적이요, 감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즉각적인 회개와 함께 한 쪽으로 치우친 이러한 편견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의 계속되는 성장과 성장을 무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 영혼의 자유를 소유하기를 한다면, 우리는 다양한 신앙의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영혼의 자유를 다룸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침례에 관한 것이다. 침례교인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침수침례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표현해 왔다. 이미 앞에서 다루었듯이 침례교인들의 초기의 관심은 침례의 방법보다는 침례의 주체, 즉 누가 침례를 받는가에 있었다. 이는 침례교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인 때문이다.

최초의 침례교인들은 침수침례를 베풀기 훨씬 전부터 신자들에게 침례를 시작했다. 1609년경에 스미스는 침례는 신자들에게만 집행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고,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물을 부어 침례를 시행하였다. 처음 그들이 침례를 시행한 방식은 관수례였다. 그러므로 초기의 침례교인들의 관심은 침례의 방식에 있기보다는 침례의 주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침례사상은 개인적이고도 자원적인 신앙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침례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그리고 자원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믿음의 결과로서 침례 받는 것을 원하였다. 침례는 새로운 목적으로 살겠다는 약속의 표시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주이시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침례교인들은 침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들은 침례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한 표시나 상징으로만 받아들였다. 침례교인들은 바울이 로마서 6장3절에서 언급하였듯이, “그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은 그리스도에게 헌신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침례를 준다. 아울러 침례교인들은, 침수침례가 신약에 나타난 회개를 가장 잘 증거해 주는 침례의 방식임을 믿는다. 침수침례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것이 교회 안에서 중생한 사람들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상징임을 확신하는 때문이다. 이와 같이 침례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개인적이며, 경험적이며, 자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3. 교회의 자유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교회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서 지역 교회가 자신들의 회원과 지도자를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고,.... 남녀를 불문하고 사역자로서 은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목사로 임명할 수 있으며, 교파 연합과 선교운동을 위한 타 교단의 운동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는 역사적인 확신이다.”

침례교인들은 교회의 정의에 대해 두 가지로 구분한다. 즉, 지역적인 교회와 보편적인 교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보편적인 교회는 모든 세대들의 모든 구속받은 자들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 따라서 침례교의 교회론은 침례교인이 아닌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침례교인들이 교회에 대해 정의할 때에는 주로 “침례 받은 지역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의미한다. 터크는 교회의 지역적 특성에 대해 카버(W. O. Carver)의 글을 인용하였다:

 

교회는 인간 역사 속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핵심이다. 지역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대리인이다. 즉, 지역교회들은 이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통하여 승리하게 된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Colonies)인 것이다.

 

 

각 지역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하나의 독특한 표현이다. 그리고 지역 회중의 한 일원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침례교인들이 스스로 다스릴 자유, 예배 형태의 자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할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지역교회라는 용어들 속에서이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자유가 의미하는 것은 지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에서 자신의 일을 수행할 권리와 책임을 소유함에 있다.

침례교인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방식은 회중 정체로 불린다. 회중 정체에서의 권위는 교회의 모든 회원에게 있다. 침례교인들이 민주적인 정체를 추구하는 이유는, 다른 형태보다도 효율성과 확실성에서 우수한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회중 정체가 성서적이라고 믿는다. 회중 정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 역할의 중요성을 유지시켜 주는 점이다. 더욱이 자유교회의 정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결정하는 데에 모든 신자의 평등을 인정한다.

회중 정체를 통해 지역교회는 자신들의 회원과 예배 스타일을 결정한다. 자신들의 설교전략을 세우며, 자신들의 일군들을 선출한다. 회중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목사 혹은 집사로 봉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일군으로 임명할 수 있다. 빌 레너드(Bill J. Leonard)는 침례교의 회중의 권한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회중들은 회원들의 입회 혹은 거절하였고, 징계를 하였고, 복음 사역자로 인정 받기를 원하는 자들의 소명을 확인하였다.... 회중들과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 사역을 위한 개인의 소명을 구체화하고, 확인하고, 확증 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회중은 침례교회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주요 원천이었다. 침례교인들이 회중의 참여와 결정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회중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침례교인들이 교회의 자유를 주장할 때 또 하나 중요한 신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예배를 계획하고 진행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이다. 침례교인이 예배의 자유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진정한 영적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침례교인의 예배는 예배의 형식에 대해 규정짓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예배는 아주 의식적으로 드려지며, 다른 예배는 아주 격식이 없는 예배로 드려질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의식에 관한 침례교인들의 입장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만을 신약성서의 의식으로 받아들인다. 침례교인들은 이들을 의식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직접 이것들을 명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마 28:18-20 ; 고전 11:24-25). 이 의식들은 지역교회가 위임한 신자(주로 목사)에 의해서 신자들에게만 실시된다.

침례를 행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침례교는 침수침례를 행한다. 침례교인들이 침수침례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침수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그리고 부활사건이 신자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상징성을 가장 잘 묘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롬 6:3-4). 주의 만찬의 경우, 침례를 받은 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으며 이 의식을 통해 신자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감사한다. 나아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의 지체의식을 확인하면서 사랑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침례교인들이 추구하는 교회의 자유에는 선교와 전도를 위해 다른 교회들과 연합하는 것을 포함한다. 침례교인들은 지역 교회의 자치권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침례교인들과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협동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이것은 사역함에 있어서 지역교회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침례교인들은 지역교회가 서로 연합할 때에 나타나는 효율의 극대화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침례교인들의 연합사역은 지방회, 주 총회, 전국총회 또는 침례교 연맹 등에 의한 관할에 의한 강제에 근거하지 않는다. 다만 지역교회의 필요에 의해 자원하여 참석할 뿐이다. 그 어떤 단체나 기관이라 하더라도 지역교회를 강제할 수 없다. 이것은 연합의 중요성 때문에 지역교회의 자치권이 침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신앙원리에 근거한 교회관 때문이다.

 

4. 종교의 자유

침례교인들이 주장하는 “종교적인 자유는 카이사르(Caesar)가 그리스도가 아니듯이 그리스도도 카이사르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면서, 종교의 자유, 종교를 위한 자유, 종교로부터의 자유가 침례교인들 안에 있다는 역사적인 확신이다.” 침례교인들은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그의 책 「국가와 하나님 나라」(The State in the New Testament)의 서문에서 국가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모순되게 보였음을 지적했다. “나는 국가가 이중적으로 보인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단지 로마서 13장 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말씀과 요한계시록 13장의 ‘바다로 부터 나온 짐승’으로서의 국가를 함께 언급할 필요가 있다.” 종종 침례교인은 시민 정부에 감사하는 “로마서 13장의 사람들”이었다. 때때로 그들은 필사적으로 국가에 대항하는 “계시록 13장의 사람들”이었다. 쿨만의 지적처럼 “국가가 그 한계 내에 있거나 그 한계를 벗어나는 것에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자로서 혹은 마귀의 도구로서 묘사”하였다. 그러나 대부분 침례교인은 국가를 합법화하고 제한성을 두는 “마태복음 22장의 사람들”이었다.

종교의 자유를 통해 표현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요구했던 침례교인들은 항상 일관된 태도를 취해왔다. 침례교인들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개념들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그들은 성서를 읽었고, 그것이 침례교인들의 신앙과 행습에 기본적인 지침이었다. 자유에 대한 침례교인의 신앙은 성서에서 기인하였다. 성서는 자유에 대한 외침을 지닌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을 때, 침례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인격이라는 선물과 자유를 주셨음을 믿는다. 자유는 단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행위에 의해서 의도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자유는 해방하시는 하나님의 본성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하는 성서의 견해에 기초하는 사상이다.

침례교인은 신앙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주장한다. 침례교인의 유산 속에서 종교의 자유는 몇 단계의 차원을 가진다. 먼저, 종교의 자유는 완전한 종교의 자유의 성취를 의미하지 단순히 종교의 허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의 허용은 편의상 허락해 준 것이나 종교의 자유는 원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둘째, 역사적으로 침례교인은 종교의 자유가 특별한 몇몇 사람들 혹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침례교인은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다. 믿지 않을 사람의 권리도 믿을 사람의 권리만큼 중요하다. 틸먼의 지적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면, 진정으로 그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을 자유를 가지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셋째, 종교의 자유는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하지 교회와 국가의 타협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와 현대 세계에는 네 가지 유형의 교회-국가 관계가 있다.

첫 번째는 국가 위의 교회로서 중세 시대에 많이 나타났다. 두 번째는 국가 밑의 교회로서 20세기의 공산 국가에서 나타났다. 세 번째는 국가와 특정한 교회의 타협으로서 가장 현저한 사례는 영국의 성공회이다. 표현의 자유는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특혜가 한 교회에 주어지는 형태이다. 네 번째 유형인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다. 이것은 “자유로운 국가에서의 자유로운 교회”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미국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침례교인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침례교인은 세계에서 가장 힘있는 국가에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그룹들 가운데 하나이다. 힘은 침례교인들을 부패하고 만들고 침례교의 유산에 대해 눈을 가리게 한다. 쿨만은 “교회가 국가에 대해 그릇된 태도를 취할 때 즉 교회가 국가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국가가 그것이 하는 모든 일에서 전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에 반복해서 잘못된 해결책을 얻게 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종교자유의 원리를 지키는 데 사용되는 힘은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틸먼은 침례교인들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으로서 “종교의 자유”를 강조하기 위해 텍사스 주 달라스 제일침례교회의 목사였던 조지 트루엣(George W. Truett, 1867-1944)의 연설을 인용하였다:

 

종교의 자유라는 아주 귀중한 원리와 관련지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요구 받고 있는가? 그것에 수반된 모든 역사와 유산과 함께 그 원리는 궁극적으로 의미있고 책임있는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우리는 종교자유의 원리가 우리 시대와 우리 후손들의 시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김없이 보존하자고 이제와 영원토록 굳게 다짐하자.

 

 

그렇다. 오늘날 침례교인들이 누리고 있는 신앙의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침례교 조상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이 소중한 유산을 인식하는 일과 전수할 책임이 오늘을 살아가는 침례교인들에게 있다.

 

 

 

결 론

 

연구자는 지금까지 침례교의 정신적 유산을 “자유”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침례교의 전통을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연구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은 침례교 전통과 정체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침례교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례교인을 말할 때 “자유 정신”을 제외하고서 침례교를 설명하기는 힘들 다. “침례교인들은 누구인가?” “침례교회의 역사와 신학적 특징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우리들 사이에 계속되는 질문이다. 신자의 침례, 회중 정체, 지역 교회주의, 성서의 권위와 해석의 자유, 지역교회에 있어서의 회원자격 등 많은 대답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상은 자유의 표현이며, 이 정신이 참되게 이해될 때에만 침례교회의 원리가 이해될 수 있다는 지적은 참으로 적절하다.

어떤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고 살 수는 없다. 우리가 침례교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침례교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인식되어 있지 않다. 오늘날 한국의 침례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위기를 경험하는 것은 김용복의 지적처럼, “한국침례교는 아직 이렇다 할 신학적 혹은 교리적 정체성을 세워본 일이 없는 때문이다.” 따라서, 침례교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서는 침례교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얻기 위한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부시와 네틀스 역시 정체성을 인식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적절한 지적을 하고있다:

역사적인 자각이 없다면 교단이라는 것은 모든 교단들이 과거에 걸어갔던 길들을 대부분 답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역사에 대한 강한 주체 의식은 방향을 시정하여야 할 곳에서 시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주며 힘과 단합의 자세로서 앞으로 정진하여 나아가게 한다.

 

오늘날 침례교를 포함하는 모든 교파와 종교 단체들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보장받으면서 종교적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은 침례교 조상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소중한 유산이라는 사실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 유산은 16세기 대륙의 재침례교인들로부터 출발한 자유교회전통과 17세기 영국의 침례교 조상들로부터 유래하였다. 신앙의 조상들의 자유를 위한 외침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메아리쳐 왔다. 그리고 지금도 침례교인들 가슴속에서 울려나고 있다. 핍박과 고통의 댓가를 지불함으로써 얻은 자유를 후손들인 우리가 부주의함으로 잃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셔든의 지적처럼 “침례교의 자유는 깨어지기 쉬우며, 너무나도 쉽게 내부로부터 포기되며, 너무나도 쉽게 외부로부터 침해당하는” 때문이다.

 

 

 

 

참고문헌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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