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의 신학사상(1)
성경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하려는 것인데 영생을 주는
것은 성경자체가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는 '나' 즉 그리스도라는 살아
계신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소개
하는 방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성경은 곧 가장 권위있다고 비판하여 판정
한 사본이 곧 우리의 '성경'이오 이'성경'에 기록적 오류가 있다면 그
저 그런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대전 전.후 신학사조의 변천 (1949.11)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이다. 이렇게 성경을 성경의 설 자리에 서게 하고 그
목적론적인 면에서 성경무오설을 수립할 때 우리는 어떤사
람을 향해서나 대담하게 전도할 수 있다.
-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에 대하여 (1950.3) -
I. 머 리 말
한국신학의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을 처음 시도한 신학자들 가운
데 한 사람은 김재준이다. 김재준은 본래 성서의 신학적 이해를 문
자적 제한으로부터 해방하여 폭넓은 해석을 시.도했기 때문에 때로
는 자유주의신학자로 때로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로 많은 비판을 받
아왔다. 그러나 그의 신학의 또 한면은 감성주의적 요소와 더불어
인간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했던 점도 있다. 이런 면모는 과히 김재
준의 인물과 신학사상의 다양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들이며, 이
때문에 김재준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게 어려운 점이
기도 하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 전래 100주년을 넘기면서 짧았던 한국 기독교
사의 흐름 속에서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결이 종래에
는 장로교 교단.극가 가져왔으며, 한국의 장로교회의 분열은 수많
은 종파를 낳는 현상을 지켜 보았다. 보수정통주의적 신학자들은이
러한 분열의 책임을 서양의 과학주의와 새로운 비성서적 성서해석
을 따르는 신신학자들의 태도에서 싹이 텃다고 비판한다. 그런가하
면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지켜가려는 진정 순교자적 자세로
보수정통주의 신학의 큰 흐름을 역행하는 사람들은, 분열은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보수정통주의적 성서관이 신화적인 차
원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 유아적 단계에서 하나님의 본체와 말씀의
. 핵심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대표적인 대립투쟁의 양상은 이른바 박형룡파와 김재준파로 양분
된, 장로교회 안의 두 세력의 극한성에서 빚어졌고, 그것이 구체적
으로 교단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점을 예사로 볼 수 없을 것이
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느 한 입장의 대변인적인 태도를 갖는다거나또
는 한 입장을 정죄하려는 중세기의 종교재판적 작태를 나타내기 위
하여 이런 글을 쓰기 보다는 오히려 두 봉우리들의 정점을 그 자체
로 정확히 분석하여 이해함으로써 무엇이 신학사상이 한국 기독교
. 계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하는 점을 찾아 보려는데 그 목적을
을 둘 것이다.
II. 김재준의 생애
1. 신학이전
장공 김재준은 1901년 9월 26일 함경북도 경흥에서 엄격한 유
교집안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기로부터 성장과정에 관한 자
제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기로부터 성장과정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아직 출판된 것이 없어 우리는 그 스스로 1985년 4월 6일부터 같은
해 8월 31일까지 20회에 걸쳐 [크리스챤신문]에 연재한 "나의 생애
와 신학" 및 방송원고들과 여러 편의 그의 글들 가운데 찾아 낼 수
밖에 없다.
"나의 생애와 신학"의 첫호는 "신학이전"이란 제목이 붙어져 있는데,
그것은 매우 의미있는 제목이다. 그는 그의 신학자로서의 삶의 분기
점 이전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그가 받은 유교적, 도교적 교육과
그의 삶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원래 나는 유
교 가정에서 자랐고 선친께서 유학자였기 때문에 예수교에 대하여는
반감을 가졌었고 간혹 순회전도하는 매서인이 들러 밤을 새가며 전도
해도 아버님은 '나는 공맹지도하는 사람이오 공호이단이면 사해야의
라했오'하.첩용 아예 들으려하지 않으셨다... 내가 일곱살쯤 됐던가
어쨌든 사랑방 구석에 앉아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나는 물론 아버
님 편이어서 예수교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고 스스로 맹세하곤 했다"
이렇게 김재준은 그의 기독교 접촉의 첫 순간을 말하였다. 그러나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실체를 체험한 것이다. 그는 1920년 초
가을 서울 숭동교회에서 김익두목사가 인도하는 장로교 연합부흥회에
호기심을 갖고 참석했던 것이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창세기 1장 1절
에 근거한 설교말씀에 감화 감동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
하는 순간 얼어붙은 냉철하고 근엄하고 고지직했던 유학적 혈액은 녹
기 시작했고 그 혈관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힘차게 흘러가
기 시작했다.
그때의 심정변화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믿으면 그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체험하게 된다.'
믿으시오''이제 곧 믿으시오'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마음은 화끈
뜨거워지고 기쁨이 충만해졌다. 이건 하느님이 직접 주시는 하늘의화
평이었다."
그후 그는 동숭교회에 교인등록을 함과 동시에 "미지근하게. 믿을 수
가 없어" 이미 성령의 불길로 뜨거워진 가슴을 갖고 더 많은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각 교회를 찾아가서 설교말씀을 들으며 그의 믿음의열
기를 더하려고 노력하였다. 초신자의 불같은 신앙과 기독교 진리탐구
의 열성이 그를 계속 말씀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설교들에 만족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어느 설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진부하고 구태의연한 평양신학
교 축음기판인 것 같았다"라고 그때 그의 설교에 대한 비판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불만족스러운 설교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살상
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꼈으며, 그래서 독학으로 당신의 많은 기
독교 저서들과 특히 일본 사람인 '우찌무라, 가가와,우에무라, 등의
저서와 서양 기독교 명저들을 탐독하며 기독교의 본질을 찾아내곤 하
였다. 김재준의 신학의 과격한 면이나 비판의식이 이미 기독교를 접
하는 순간에서부터 싹텄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기독교 신학이해는
철저히 비판신학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는 기존 세력이
나 기존 신학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기독교적 삶의터
전을 이루려는 매우 비타협적. 인물로서 형성되었으며, 이것이 그의
일생의 모습이었고 본질이었다. 이미 신학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
는 소년으로서, 특히 부흥회에서 믿기로 결심한 초신자요, 아직 기독
교의 본질을 접하기도 전에 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성격을 비판할 정도
의 지성인있던 김재준! 그는 과히 한국 기독교를 도전적 기독교 기질
로 이끌어가서, 한 유형의 신학사상을 만들어낸 효시의 기질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서 철저한 비판의식은 그후 그의 신학사상의 사회화에
서 구현된 실체로 나타나게 되었지만, 그러한 형성체에는 또 하나.
동기가 깊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그의 삶의 야누스적 모습을 이루고
있는 그의 원초성이기도 하다. 비판의 또 다른 대극적 기질! 이것이
아마도 자연에 대한 숭고함에 감동하는 느낌의 작용일 것이다. 이것
을 장공은 "자연"이라고 불렀고 또한 같은 의미 맥락에서 - 물론 개
념적 표현은 다르지만-"낭만"이라고 불렀다.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
의 신학기질이 이미 낭만주의을 껴안고있는 포근한 품에서 자유를 만
끽하며 형성되었고, 성장하여 독립된 인격체로서 한국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바로낭만주의의 .민 가, 아니 역설적으로 표현하
면 자연에서 자유롭게 자란 그의 성장기 때문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김재준은 그의 기독교개종의 근본적 동기를 이런 시각에서해
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의 개종이 그의 낭만주의적 기질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의 "무소유의 낭만"이란 글에는 이
런 기분을 그대로 옮겨놓은 곳이 있다.
지금부터 약 40여년전, 내가 겨우 20을 넘을락 말락한 시대였으니까,
돌이켜 생각한다면 정말 격세지감에 없지 않아요! 그때는 말하자면낭
만주의시적이러서 지금과 같은. 빡빡한 현실주의와는 다른 분위기가
젊은 이들의 가슴을 설레고 있었습니다. 내가 유교가정에서 혼자 기
독교에 개종한 것도 어느 면에서는이런 낭만정신이 작용한 것이 아니
었던가 생각됩니다. 유교의 그 빡박한 교훈과 계율을 초월한 기독교
의 '자유하는 영'의 사람으로서의 낭만입니다. 전락자, 밑바닥에 침
전된 인간에 대하여 사랑의 너그러움, 죽음에서 절망하지 않고 생명
을 노래하며 영원을 모험하는 모습, 무덤을 헤치고 부활한다는 불퇴
전의 삶의 의욕 등등이 '젊음'에 생명의 낭만을 느끼게 했다고 봅.
다.
이처럼 그가 "자유","낭만","영원","부활"등을 현실주의의 궤도로부
터 승화된 차원에서 받아들이려했던 것은 사실상 그를 지배했던 강한
타율적 유교문화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 충동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그 스스로 표현된 것처럼 철저히 유교교육에 의해
서 양육된 것이다.
어린 마음이 계곡의 황혼을 즐기던 것은 지금도 유난히 맘에 떠오는
일중에 하나라 하겠오이다. 황혼이 짙어지고 만물이 호수 속에 잠기
듯 어둠에 가라앉으면 여기저기서 반딧불이 반짝이고 초가울이면 귀
뚜라미며. 온갓 벌게들이 울어제칩니다. 초생달이 반조각 하늘에 걸려
앉고 수없이 종종 밝힌 별들이 당장 떨어질듯 깜박일 때, 혼자 풀위
에 멍석을 깔고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무언가 시라도 쓰고 싶은, 차분
하면서도 들뜬 소년의 가슴에 작은 우주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고 말
하고 싶어 집니다. 아홉살 때까지 선친 앞에서 한문을 읽다가 신학문
을 배워야 된다는 권고에 따라 머리를 깍고 향동학교라는 소학교에다
니기 시작했지요. 그러니까 그게 합방 직후였습니다. 그전, 융희 3,4
년 때에는 개화운동이 우리 산골에까지 퍼져서. 지사타입의 어른들도
종종 들리고 했었지요. 그런 관계로 나도 그런 방향에서 신학문을 시
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나의 나이 아직 10대에도 이르지 못한 소년
이었지만, 벌서 사서는 다 떼었고 삼경이란 것도 조금 읽고 해서 유
교의 전통은 제절로 피부에 배어들게 되었었습니다. 논어전편을 통강
하고 공자님의 풍모를 마음에 그리면서 어른들과 인의예지에 대한 토
론도 했지요. 신이나서 도덕론을 주고 받으면 20대의 늙은 학도들이
온전히 동료취급을 해주는 것이 신기스러웠습니다.
그의 성장기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순박한 소년으로
서 자연에 빠져 있었고, 낭만을 즐기며 문학을 그리워했는가 하는 모
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시를 짓고 싶은 감성이 자연에 대한 느낌
을 표현하려는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늘의 별과 가을의 우수,
풀벌레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그의 감성을 자극하였고, 이런 정서
는 장공을 더욱 감정의 인물로 형성시켜 주었다.
문학에는 흥미가 있어서 명치시대의 작가들, 특히 백근파 작가들을
좋아했다. 이사이의 시가도 탐독했다. 번역들도 많이 읽었다. 톨스토
이전집, 도스또.슬뵀걋활, 빅톨위고의 [장발장(레미제라블)], 흑기
사 등 닥치는대로 읽었다. 읽노라면 나는 쓰고 싶어진다. 그래서 구
상도하고 등장인물의 성격과 세리프 등도 나열해보고 한다. 이런 저
런 것들이 원고지를 메꾼다. 모아놓으니 수천매(?)나 된다. 벽장높이
보다 더 높아서 벽장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신학이전"의 장공! 사상적 혼합주의의 소년기를 가졌던 김재준은결
국 종교적으로는 유교의 계율과 교훈으로부터 형성된 그의 삶을 기독
교의 사랑과 영생의 존재가로 전환하였고, 자연과 낭만의 감성주의는
그. 강한 지적 추구욕과 더불어 비판의식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따뜻한 피와 차가운 이성이 그의 신학의 저변에서 합
류하고 있는 신학의 길을 이어간 것이다.
2.신학에의 서장
장공은 과연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이라는 강한 의식을 한번도 저
버린 적이 없는 철저한 크리스챤이었기에 그의 신학에는 항상 강한
자신감이 넘쳤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비판의 소리들도 그를 꺽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독백하였다. "나는 맘먹었다 '신학'이 내
학문의 분야였구나! 싫든 궂든 나에게 신학 시키.졍 것이 하느님의
이미 정하신 경륜이었구나!" 이렇게 그는 확신하면서 미국에로의 긴
여행을 떠난 것이다. 프린스톤 신학교에 신학하기 위하여 떠난 것이
다. 그는 그 전에 이미 일본 청산학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1928년
3월 같은 학원 신학부를 졸업한 터였으므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을 중
심으로 교수진이 짜여졌던 청산학원으로부터 많은 신학적 기초 지식
과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극단
의 보수주의 신학에 더 매력을 가졌던 것은 반작용의 원리처럼 단순
한 반동이었다. 보다는 두 세계의 정복자가 되어 보려는 야심이었다.
그는 항상 강한 점과 약한점, 외연과 내연의 조화일치라는 일종의 변
증법적 합일원리를 즐겨찾는 신학자이므로 자유주의 신학과 보수주의
신학을 자기 자신의 능력안에서 융화하여 하나의 김재준 신학을 만들
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학에의 서장이 이처럼 전개되면서 그는 첫장을 청산학원에서 자유
주의 신학으로 채웠고 두번째 장을 프린스톤에서 보수주의 신학으로
채웠다.
그 당시 프린스톤은 메친교수의 극단적 보수주의와 교장인 스티븐슨
의 교회.(ecclesiastic)보수주의와의 대결이 노골화한 무렵이었다.
나는 메친교수의 강좌를 많이 택했다. 청산학원이 거의 극단적 자유
주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극단적 보수주의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프린스톤에서 1년정도 신학공부를 한후에(1929년9월) 웨스턴신
학교로 옮겨 구약을 전공하였다. 1931년 5월에 '출애굽 년대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을 졸업논문으로 제출하여 신학사(S.T.B) 학위를 받았
으며, 그 다음해인 1932년 5월에는 '펜타툭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
동'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S.T.M)학위를 받고 . 뵀구탭규낯 졸업
하였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재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 교목겸 교사로 취
임하여 영어, 조선어,한문,성경등을 가르쳤으며, 특히 신학공부를 하
려는 학생들을 한 주일에 한번씩 가르치며 그의 신학을 정립해 나갔
다. 그때 숭전재학중이던 김정준,숭중에 다니던 정대위를 비롯하여네
댓명이 장공의 개인지도를 받으며, 장차 한국신학계의 인물로 커가고
있었다.
3. 내가 믿는 하나님
김재준 신학을 논할때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보려는 사람들은장
공신학이 단순한 합리주의적 차원이외의 다. 차원들을 종교적문제로
끌어들이려는 면과 성서비평학을 새로운 신학방법론으로 끌어들여 성
서자체를 여러 맥락에서 해석하려는 면을 지적하면서 그의 신학입장
을 자유주의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김재준신학에 대한 자리매김은 인
위적으로 되어질 수 없으며, 더욱이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해석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의해서 규정될 수도 없다. 그는 분명히 그 자신이자
유주의 신학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공포한 것이다. 그는 해방후
한국교회의 신학논쟁을 정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말을 남겼
다.
이때.의 한국교회의 신학 논쟁은 정통주의 대 자유주의가아니라 정통
주의 대 신정통주의의 양태로 전개되었다. 세계 교회는 이미 두 극단
에서 새로운 종합에로 상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여
전히 이미 지양된 한 극단인 정통주의 신학 일색이었기 때문에 그것
이 세계 신학 일생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 신학의 현단계의 주류
인 신정통 신학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대결하는 상대방이 그전에 있던 '자유주의신
학'인 줄로 오인하고 돈키호테 식의 용기를. 부렸던 것이다. 사실 그
상대가 자유주의 신학(이른바'신비학')이었다면 멋진 승산도 가히 기
약할 수 있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상대자가
이미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함께 이기고 올라선'신정통주의 신학'이
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적 패배는 단시일 내에 결정되고 만 것이었
다.
그의 진술은 신학논쟁에 대한 두 대립적 입장을 객관적으로 소개한
것이 아니고, 그의 신학노선이 보수주의와 대립되어 있는 신정통주의
임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이미 자유주의는 극복되었고 보수주.의는
아직도 새로운 신학사조가 밀려오고 있는 것을 모르고 계속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을 향해 공격하고 있음을 냉소적으로 묘사하였다.
돈키호테적 만용을 가진 것으로 보수주의자들을 싸잡아 비판한 것이
다. 그러나 그의 신학의 한계는 바로 비판을 위한 감정적 비판을 자
행하면서 보수주의를 철저히 적대시한 것이다. 그리고 몇몇 곳에서는
거의 근거가 희박한, 오직 논쟁에 이기기 위한 필전을 펴기도 했던것
이다. 이런 그의 신학 사상을 그의 신개념으로부터 유출시켜 분석하
는 것이 어떤 논증보다 더 의미있. 것이므로 여기에서 그의 진술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관한 이해를 살펴보자.
1985년 7월 13일 [크리스챤신문]에 그는 14번째의 "나의 생애와 신
학"을 연재했다. 이날의 제목은 "내가 믿는 하나님"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신앙경험대로 고백한다면 내가 예수를 믿노라 할 때에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되었고 내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예수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믿게 됐다는 그 자체가 성령의 내재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재준의 신학을 이단신학으로 정죄하던 이유는 바로 그의 성서관이
었으.며, 신학방법론적 문제에 있어서는 신인식이 문제였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와서 그의 전기적 단편에서 그의 신관을 간략하게 말하
고 있다. 그러나 이 짧은 고백은 그의 전생애를 신학하면서 남긴 신
앙고백이었다. 김재준은 정통보수주의를 공격하면서 그의 입장을 표
명한 이 신앙고백은 신앙에서는 매우 온건한 신앙중심주의이고, 신학
방법에 있어서는 새로운 세계관에 적응하기 위한 비판적이며 분석적
방법도 성서해석에 도입하려고하는 점이었다. 그는 그러나 종교 상대
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서 인정하면서도 그의신
관은 그에게 성령의 불길을 쏟아주는 하나님,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
력을 인정하는 그리고 믿는 시앙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성령의 내재를 경험했다. 맨처음 믿기로 작정한 때에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성령의 하늘 위로와 기쁨, 그리고 복음증거 때문에
사람없는 외따른 집 독방에서 핍박자의 쇄도를 기다리던 깊은 자정(
밤 12시)에 내 생명속에 화산처럼 솟구쳐 오르던 그 형언할 수 없는
영의 기쁨이었다.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성.책가 고요히 살고 있다.
김재준의 신앙고백에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는 몇 가지 문제점도 있으
므로 그의 형태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점도 있다. 한철하 교
수는 김재준 신학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김재준 목사의 신학사상은 역시 신정통주의 신학에서 따운 "그리스
도 중심"주의 또는 '말씀'의 신학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도 철
학적 근거를 강력히 부정하고 초월절 차원 또는 계시 일변도의 새로
운 실재론을 들고 나오는 따위의 것이라기보다, 즉 자유주의신학을배
격한다는 의미에서 케리그마적 신.극 성격을 띠고 있다기보다, 오히
려 출발점을 전연 자유주의 내지 합리주의에 두고 보다 완전히 불신
아에 떨어지는 것을 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신정통주의의 그리스
도 중심적인 신학을 붙든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런 김재준 신학사상에 대한 단정은 그의 입장의 모호성을 말하려
는 것이다.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기고권이 발탁되면서, 과격한 방
향으로 돌아선듯한 인상도 풍긴다. 어떻든 한철하는 김재준의 신학입
장을 "자유주의신학을 용납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분명히 단정
하였다.
이러한 단정의. 근거로서 그의 신학수업을 "극단적 자유주의" 청산학
원에서 시작했고 프린스톤에서의 1년정도 보수주의에 접한 것 외에는
자유주의 신학경향을 띤 웨스턴신학교에서 학위과정을 마친 것을 실
증적으로 제시하며, 설명하고 있다. 이점은 주재용이나 박봉랑을 비
롯한 한국신학대학 교수진과 신학자들의 김재준 신학사상 분류법과매
우 다른 점이다. 아마도 김재준은 신정통주의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보수주의 신앙인의 면모도 구비한 점에서 철저한 신정통주의자도 아
니며, 보수주의 신학자는 더욱 아니었다고 하겠다. .아마 이런 많은요
소가 포괄되면서 수용성을 갖는 신학이 곧 장공 신학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