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되는가?
추천의 말1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1
1.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
서론2
진실을 밝혀 주는 두 가지 테스트3
교훈5
원칙(3-5절)5
좇아야 할 양식(6절)8
가르침(7-11절)9
확인 질문11
원리에 대한 재확인12
2. 세상의 본질13
서론13
하나님은 무엇을 싫어하시는가?13
교훈17
세상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절)17
세상에 살되 속하지는 않음20
그리스도인은 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20
결론21
확인 질문21
원리에 대한 재확인22
3. 그리스도인의 본질23
서론23
복습23
세상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절)23
교훈23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2-14절)24
온전한 기도25
영적 청년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29
결론30
확인 질문31
원리에 대한 재확인32
4. 세상의 하는 일과 흐르는 방향34
서론34
복습35
세상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35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2-14절)35
교훈35
세상은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15-16절)35
세상이 흘러가는 곳 때문에(17절)40
확인 질문42
원리에 대한 재확인43
추천의 말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교회인 Grace Community Church의 담임 목사로, 순회 설교자로, 라디오 성경 교사로, 저술가로 주님을 섬기는 John MacArthur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Study Notes)는 주석서로, 개인 성경 연구서로, 그룹 성경 공부용으로, 그리고 설교 자료로 크게 사용되고 있는 귀한 책입니다. 그리고 1969년, 한 성도가 맥아더 목사님의 주일 설교를 듣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조그맣게 시작한 설교 테이프 보급이,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하여 1986년에는 600만 개의 설교테이프를 보급할 정도로, 그의 성경 강해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자 하는 분들, 교회학교 교사, 성경 연구 지도자, 그리고 목회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2월(1980년) 그의 초청으로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와, 그가 관계하고 있는 학교(Master College)에서 며칠 동안 특별 집회의 강사로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 때, 성도와 학생들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제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그것은 평소 그들이 받아온 성경 교육의 우수성을 입증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같이 우리에게도 이 한 권의 책이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합니다.
5대째 목회자 집안인 맥아더 목사님과는 고등학교(Bob Johnes Academy)동창입니다. 그의 성경 연구 안내서 한국어 발간이 제 가까이에서 사역의 짐을 나눠 지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도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주님을 바르게 섬기려는 성도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김장환
Billy Kim (극동방송사 . 아세아방송사 사장)
영혼의 생수(生水)를 흠뻑 마십시다
죤 맥아더(John Machrrhur)목사님은 독특한 강해 설교와 구절 강해식 성경 연구로 목회하고 있는 분으로서 현대 목회의 기수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담임하고 있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성도들에게 매주 말씀을 가르치며, 세계 200여 방송국에서 라디오 성경 강해 프로그램인 「Grace to you」와 오디오 및 비데오 테이프, 그리고 활발한 신앙 서적집필 활동을 통해 세계의 영어사용자들에게 큰 은혜를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무장이 가장 필요한 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 강해 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외치며 실천하는 목회 전선의 전우들이 있음을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력이지만 그 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발행인인 김 용호 목사님과 함께 찾던 중, 저희 생각에 우리나라의 강단설교 성향과 비슷하면서도, 독특한 방법으로 성경에 접근, 말씀을 말씀으로 강해하는 죤 맥아더 목사님의 성경 연구 안내서를 발행했으면 하고 바랬는데, 마침 그 무렵 평소 가까이 지내는 Grace Community Church의 부목사이며, 그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는 Master College의 부학장인 Bob Provost박사님과, 그 교회 문서 선교 책임자 Monrore Brewer목사님을 만나게 되어 서로 의논 끝에 발행하게 됐습니다.
이 책은 개인적 성경 연구 안내서와 자료서, 그리고 설교 자료로서의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히 자습할 수 있도록 편집되어 있으며, 목회자에게는 설교자료의 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든지 이 책을 잘 사용하기 위해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할 것입니다.
감수 / 송용필 (John Song)
● 요한일서 2:3-11 ●
1.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
서론
1. 그리스도인에 대한 정의(定義)
요한일서 2장 3-11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길거리에 서서 지나는 사람을 잠깐 붙잡고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면, 몇 가지 서로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정의를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요 주님으로 믿는 사람을 말한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인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하셨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2. 분별의 어려움
1) 구원받은 자의 외양
믿는 사람임을 자처하는 자의 경우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가를 정하는 문제가 좀 어려워진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어느 정도까지는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지만,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임을 사칭하는 자나 구원의 본질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자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사실은 진리를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 또한 명백해진다. 예를 들면, 요한일서 2장 19절에서도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했으나 결국은 그 교제 관계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거짓 그리스도인(마 13:38/ ”가라지”라고 표현됨)을 분별해 낼 수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들이 결국에 가서 기독교 신앙을 버린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들이 참 신자들 속에 함께 있을 때에는 그들을 구별해 내기가 어렵다.
2) 구원의 확신
구원받았는지의 여부가 의심스러운 그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더 크다. 그들 중에는 의심을 가진 사람, 증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나타나 보이는 믿음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을 지녔다고 그릇되이 인정받는 사람도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짐짓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장 9-10절에서 베드로는 신자가 어떻게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이런 것(영적 성숙함의 자질들)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베드로는 구원의 「상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5-7절)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받았음에 대한 앎도, 확신도 없다. 자신의 삶에 경건한 일들이 나타남으로써 우리는 무언가가 우리 자신을 변화시켰음을 확신할 수 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정말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의문을 갖게될 수도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원받은 사실을 알고 안심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삶에 그러한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촉구한다.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이는 중대한 질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았는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몇가지 확신의 요소들을 제공한다. 그 요소들은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이라는 각각의 제목하에 분류될 수 있다.
1) 객관적인 확신
객관적 확신은 우리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만들어 내시는 경건한 것들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1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당신의 생활에서 그러한 면들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당신은 진정으로 구원받았음을 마음 속에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2) 주관적인 확신
주관적 확신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어떤 것, 즉 성령의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 전자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후자는 눈에 보이지않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우리의 내적 확신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몇몇 구절이 있는데, 그 예로 다음 세 구절을 들 수 있다.
- 고린도후서 1장 12절 : 바울은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했다. 바울의 말을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는 내 양심의 증거 때문에 나의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안다. 내 양심 속에 있는 무엇인가가 내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알려 준다.”
- 요한일서 5장 10절 :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내주하시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그 증인은 바로 성령이시다. 그분은 신자가 받은 구원의 유효성(validity)을 증언하신다.
- 로마서 8장 14-16절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14-15절).
「아바」(Abba)란 ”아빠”와 같은 말로 사랑이 듬뿍 담긴 표현이다. 이 말은 어린아이가 자기의 자애로운 아버지에게 말하듯 우리가 하나님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16절은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안에 거할 수있다는 확신을 주심을 말하고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의삶 가운데 있는 성령의 내적 증거는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종류의 확증이 우리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요한일서 2장에서 사도 요한은 객관적인 확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 곧 각 개인, 교회, 그리고 세상에게 대한 그리스도인된 증거는 바로 성령께서 당신의 삶 속에 만들어 내시는 태도와 행동들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자기가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의심이 간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보통 이런 질문을 제일 먼저 하곤 한다. ”당신은 경건한 삶에 전념했습니까? 당신은 규칙적으로 말씀을 읽고 있습니까? 기도시간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성령을 충실히 좇아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자기가 신자라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구원의 열매가 당신 삶에서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일서 2장 3-11절의 주제이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 그것의 진위(眞僞)를 평가해 볼 수 있는 시험 방법 두가지를 제공한다.
진실을 밝혀 주는 두 가지 테스트
1) 교리 테스트
(1) 당신은 그리스도를 시인하는가 ?
그리스도에 대한 한 사람의 믿음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람의 주장이 정당함을 확인해 줄 것이다. 「시인하다」(confess)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to say the same thing)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교리 테스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관해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말하는가의 여부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요, 하지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점은 믿지 않소”라고 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요한일서 2장 22-23절 :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 요한일서 4장 2절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요한일서 5장 1절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진정으로 구원받았느냐 하는 것은 곧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느냐 혹은 그 사실에 동의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2) 당신의 죄를 시인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똑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 와서, 자신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자기 죄는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나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 말을 믿지 않는다.
- 요한일서 1장 6, 8절 :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한일서 1장 9-10절 : 9절은 만일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곧 용서받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10절은 또 말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2) 도덕 테스트
(1)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가 ?
요한일서 2장 3절은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2) 당신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가 ?
요한일서 2장 10절은 말한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요한일서 2장 3-11절의 논점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의 여부에 대한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테스트 즉 사랑과 복종에 대한 테스트이다. 요한일서 2장 18절 말씀으로 보건대 요한의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 혹은 ”적그리스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수신인들에게 순진하게 그들의 주장을 믿지 말고 ”영들을 시험하라”(4:1)고 권면한다. 그 교사들의 삶에서 순종과 사랑을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자질들은 그들의 영적 삶을 증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교훈
원칙(3-5절)
1. 복종의 전제(3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1) 주님을 안다는 확신
1장의 ”빛 가운데 행하면”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7절)라는 구절은 2장 3절의 ”저를 아는 줄”이라는 구절과 동의어이다. ”알다”(know)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기노스코」(gin sk )이다. 이 동사의 현재 완료 시제를 강조하여 이 구절을 다시 해석하면,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이미 그분을 알아 왔음을 계속해서 알게 된다”라고 할 수 있다. 한 그리스도인이 이미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구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알 수 있다고 요한은 말한다. 순종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없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사도요한은 말한다.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알듯이 우리가 그분을 진정으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순종은 확신을 낳는다. 의심을 품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대개 죄악과 관계를 맺고 있다. 죄악은 의심을 키우기 때문이다.
2) 계명을 지킨다는 것
(1) 의미
「지키다」(keep)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주의깊게, 엄격하게 복종한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난 이걸 해야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망치로 얻어맞을지도 모르니까 !”라고 말하게 만드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 복종하는 것은 참된 순종이 아니다.
「지킨다」는 말은 단순히 계명에 순종하는 행위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고자 하는 거룩한 욕구이다. 순종이란 부정적인 두려움이라기보다 사랑으로 영감되어서 마음의 가장 큰 바램이 된 것을 말한다. 당신은 순종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헨리 알포드(Hen-ry Alford)의 「헬라어 성경」에는 ”지키다”라는 말이 ”무언가 귀중한 것을 보호하는 것”이라 정의되어 있다[제 4권(시카고:무디출판사, 1968), p. 434]. 그리스도인은 마음 속에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큰 바램이 있을 때 자기가 정말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 말씀이 현재 시제로 된 것은 우리가 계속적으로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함을 함축적으로 말해 준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안전 장치로 무장하는 습관은 곧 구원받았다는 표시이다.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주장을 훼손시키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계명”을 나타내는 말로 모세의 율법을 가리키는 헬라어 「노모스」(nomos)를 쓰지 않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엔톨레」(entole)를 썼다. 우리는 3절의 ”그의”라는 대명사가 가리키는 분,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모세 율법에 찬동하는가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지키는가를 보아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밝혀 낼 수가 있다. 요한은 ”우리가 모세 율법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존중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갖게 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한다. 그분의 권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이 그분께 복종할 것은 기정 사실이다.
2) 어느 정도까지 지켜야 하는가?
계명을 계속하여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계속 지키는 사람이다(3절).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분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라 하겠다. 신약성경은 거듭나지 않은 자는 ”불순종의 아들들”(엡 2:2)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불순종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인간의 본성에 관한 강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 당신의 자녀들만을 보아도 인간의 그런 생활 방식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베드로전서 1장 14절은 거듭난 자를 ”순종하는 자식”이라고 정의한다. 순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3) 계명을 지킨 예
만일 순종적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 도대체 자기가 지금 충분히 순종하고 있는지 아닌지 궁금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절대 순종이라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가? 당신은 법적인 복종과 자발적인 복종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자발적인 복종이 바로 따뜻하고 진실한 복종의 정신을 보여 주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램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한 복종은 비록 결함이 있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그 흠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써 깨끗이 지워진다. 우리 주님을 좇는 복종은 율법의 제한을 받는 법적 복종이 아니라 사랑의 향기가 나는 자발적인 복종이다. 그것은 두려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애에 근거한 것이다.
- 요한복음 14장 : 승천하시기 전, 예수께서는 ”자, 이제 나는 떠난다. 내가 없을 때 한 가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너희들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었다. 만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제자들은 그 이후의 삶을 영적인 중풍병을 앓으며 보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15절)고 말씀하셨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은 율법이나 두려움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만 관련이 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21, 23절).
- 요한복음 15장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0, 13-14절).
- 시편 116편 :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12절)라고 말하여 복종의 정신을 표현했다. 하나님은 절대적 완전을 기대하지는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무언가 잘못을 저질러서 심한 징벌을 받고 구원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속에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복종하는 정신을 찾으신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바램을 늘 실현할 수는 없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하려는 바램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그 점을 이해하신다.
2. 믿음을 가장하는 자(4절)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1) 본문 설명
”진리”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나 그분의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 여기서 요한이 하는 말의 요점은, 그리스도인은 순종하고 비그리스도인은 순종치 않는다는 것이다. 비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순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욕구를 자기 나름대로 채운다. 요한은 말하기를, 그들도 그분을 안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2) 믿음을 가장하는 자들의 예
(1) 디도서 1장 16절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거짓 신자들은 도덕 테스트에서 낙제한다. 그들도 신앙고백은 하지만 실제 생활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지 못한다. 불순종하는 태도가 그들의 그 같은 주장이 무효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2) 누가복음 6장 46절
예수께서는 무리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말씀하셨다.
(3) 마태복음 7장 22-23절
심판 날, 크고 흰 보좌 앞에는(계 20:11-15)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3) 발각되는 위선
그리스도를 안다고 주장하면서 자발적인 복종의 정신이 그에 수반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모두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요한은 영지주의자들, 혹은 그 같은 주장을 하는 그 외의 사람들의 위선적 가면을 벗겨낸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모든 죄값을 다 치르셨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고 하며 은혜를 극단적으로 오용하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고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순종하기를 바란다고 요한은 말한다.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많지만 나는 그들이 정말 그분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하늘에 계신 그 큰 양반(the Big Man)만 아니었다면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요”라고 하던 한 나이트클럽 주인의 말이 생각난다.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 하지만 그것을 시험해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경우가 많다.
3. 사랑 안에서의 온전함(5절)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누구든지”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말이 하나님과의영적 연합은 특정한 선발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을 논박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지키는 능력은 선택된 소수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지킨다”는 동사에는 말씀을 계속적으로 지켜 보호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자발적인 복종의 정신을 가진 사람의 삶에는 그 사람 속에서 온전해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헬라어 원전에서처럼 목적의 소유격으로 본다면 이 말은 복종함으로써 온전해진,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언급하는 말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을 위한 사랑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
1) 본문 설명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복종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분명한 사랑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감상(感傷)도 아니고 신비로운 체험도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복종이다.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2, 16).
사랑은 복종 가운데서 드러나며, 또한 사랑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이다.
2) 예증
경건한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대 공회의 일원이었고 이름은 사울이었으며 우리에게는 바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이단 종파가 횡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분개했다. 그 종파의 중심 교리는, 몇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임이 분명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순교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것에 찬동했었다. 그때부터 그는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 9:1)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것을 일삼았다.
어느 날 그리스도인들을 투옥하고 박해할 권리를 그에게 부여한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특별 서류를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하나님께서는 그를 땅에 엎드러뜨리셨다. 다소(Tarsus)사람 사울은 ”주여 뉘시오니까”(행 9:5)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이든지 그 사람이 분명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신 후, 겸손해진 그 박해자는 자신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것인지를 물었다. 복종이 따르지 않는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주님의 주되심에 굴복하였을 때 바울이 맨 처음 생각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후에(롬 7장) 그는 술회하기를,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했다고 한다(22절).
좇아야 할 양식(6절)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라”(7절)
성경은 자주 우리가 따라야 할 원리와 모범이 되는 어떤 이를 제시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좇고 있으므로 너희는 나를 좇으라고 고린도인들에게 말했었다(고전 11:1).
1. 본문에 대한 정의(定義)
요한이 ”저 안에 거한다”고 했건 혹은 ”저를 안다”, ”빛 가운데 행한다”, ”사귐이 있다”고 했건, 이는 모두 구원을 언급하는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본에 자신을 맞춰야 한다. 6절은 우리가 정확히 그분을 닮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닮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그분께 많은 의무를 지고 있다. ”거한다”는 말은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5장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그 특유의 용어로서, 사도는 참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거한다고 말한다. 바꿔 말해,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생명력있고 생생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함께 나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분처럼 살 수 있다. 그분께 능력을 부어 주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안에도 살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예증
1) 그리스도의 겸손함에서
(1) 겸손에의 교훈
빌립보서 2장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하여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빌립보인들이 다툼을 버리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2절) 품기를 원했다. 3-4절에서 그는 겸손해짐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그들에게 말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겸손은 사랑을 키운다. 그는 그렇게 원칙을 가르치는 단계에서 그칠 수도 있었으나, 한걸음 더 나아가 편지의 수신인들에게 하나의 모본을 제시한다.
(2) 겸손의 모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5-8절). 예수께서 보여주신 본을 보라. 그렇게 높은 곳에서 그렇게 낮은 곳으로 몸을 굽힌 사람은 없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겸손의 예 가운데서 가장 큰 본을 보여 주셨다.
2) 그리스도의 순복에서
누구든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한다면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요한은 말한다. ”행한다”(walk)는 말은 한 사람의 생활 태도를 말한다. 당신의 생활 방식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그 같은 생활 방식은 하나님의 기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께서 순종적인 분이셨다는 것을 아는가? 그분은 모세 율법을 문자 하나하나까지 따르셨다. 그분은 메시야된 분으로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규정에 순종하셨다. 요한의 복음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강조한다.
- 요한복음 6장 38절 : 예수께서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 요한복음 8장 29절 :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 요한복음 10장 18절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 요한복음 14장 31절 :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의 온유한 순종은 우리가 각각의 삶에서 따라야 할 모본이다. 그리스도를 특징짓는 그러한 순종의 양태는 우리가 행해야 할 순종이기도 하다. 당신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셨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르침(7-11절)
요한은 복종에 대한 일반 원리를 제시한 후, 7절에서 11절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도덕 테스트의 주요한 논점은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당신은 사랑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서 사랑함에 있어 가장 우선되는 일을 말씀해 주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킨다면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정수(精髓)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자동적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기에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 모두를 할 수 있다. 로마서 13장 8-10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한다. 이웃을 당신 자신처럼 사랑하고 있다면 이웃을 죽이지 말라거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하지 않다. 사랑은 그러한 것들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1. 계명(7-8절)
1) 옛 계명(7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여기서 ”새롭다”(new)고 번역된 헬라 원어는 ”때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네오스」(neos)가 아니라 ”질에 있어서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카이노스」(kainos)이다. 이 말은 닳아서 헤어진 것을 대체해 주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말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어떤 것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나는 너희가 처음부터 - 너희가 복음을 들었던 최초의 때부터 - 들어 왔던 옛 계명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2) 새로운 의미(8절)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8절 말씀을 보면 7절과 대조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옛 계명을 주고 있는 것이라 밝히고 난 후 요한은 이제 자신이 새 계명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 계명들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하나를 알면 나머지 하나를 확실히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께서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신자들에게 교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34절) 사랑하라는 조건을 붙이셔서 그 계명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분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써 그 사랑을 직접 보여 주셨을 때 그 말씀은 새롭고 신선한 계명이 되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구약 시대의 계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알아 보는 데는 두 가지의 테스트가 있다고 했다. 그 하나는 교리 테스트(그는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는가?)이고, 나머지 하나는 도덕 테스트(그는 자발적으로 복종하려는 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도덕 테스트의 일부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그리스도에게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또 우리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고 요한은 말한다.
로마서 5장 5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교회 내의 새로운 기준으로 승격시키셨다는 의미에서만 새 계명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고 또 우리도 그분이 하신 것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주하시는 그분의 성령으로써 우리 안에 그 사랑을 심어 주셨다. 만일 당신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한다면 두 가지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복종의 정신을 갖고 있는가? 당신은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는가? 이는 단순한 제안 사항이 아니라 참 신자의 삶에 꼭 있어야 할 자질들이다.
2. 대조(9-11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이 구절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도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지 않는 영지주의자들의 위선을 공박한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그들이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음을 나타냈다.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하는 당신의 말은 사랑이 있는 삶으로 실증될 때에만 효력을 갖는다. 영지주의자들은 뽑힌 소수의 사람들만이 구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믿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가상적인 우월성을 뽐내었다.
10절은 당신이 만나는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애정을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것은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향해 사랑의 정신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거짓 그리스도인(”가라지”)들은 그러한 종류의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다. 사실, 가라지들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오래 견디어 내지를 못한다. 결국 그들은 참 신자들에게 화를 내며 이들이 찬성하는 것이라면 모두 멸시한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형제애를 귀히 여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어떤 곳을 가고 있는지 안다. 그는 빛 가운데 행하며,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복종과 사랑에 의해 증거된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사랑이 없는 어두움의 영역 속에서 행하고 있다면 당신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교리적인 면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자기 죄를 고백하는가를 보라. 그리고 도덕적인 면을 테스트해 보려면 그의 삶이 복종과 사랑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가를 보라. 자기가 정말 참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구원받았다고 믿음으로써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마음을 검토해 보라. 예수님의 이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라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확인 질문
1. 그리스도인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내려 보라.
2.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분별하기가 왜 어려운가? 요한일서 2장 19절 말씀으로 볼 때 거짓 그리스도인을 밝혀 내는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인가?
3.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하기 위해 베드로는 어떻게 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가?(벧전1:5-10)
4. 객관적 형태의 구원의 확신과 주관적 형태의 구원의 확신을 비교해 보라. 요한일서 2장에서 요한은 어떠한 형태의 확신을 다루고 있는가?
5.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데 대한 눈에 보이는 증거는 무엇인가?
6. 구원받았는지의 여부에 대한 교리적 측면의 테스트의 두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고, 각 내용은 성경의 어느 말씀으로 뒷받침되는지 그 구절을 찾아 보라.
7. 마찬가지로 도덕적 측면의 테스트로는 어떤 질문들이 있는지 밝히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성경 구절을 찾아 보라.
8. 범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왜 자기가 구원받은 사실을 의심하는가?
9. ”지킨다”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에서의 복종은 어떤 형태의복종인지 설명하라.
10. 법적인 복종과 자발적인 복종의 차이를 설명하라.
11.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가?(요일 2:4)
12.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에 관해 뭐라고 주장하는가? 요한일서 2장 5절에서는 어떤 말로 그들의 주장을 논박하는가?
13. 하나님에 대한 우리 사랑의 본질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표현되어서는 안 되는가?
14.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을 나타내셨을 때 바울은 어떻게 반응했는가?(행 9:6)
15. 성경은 먼저 원칙을 제시한 후, 그 다음으로 무엇을 주는가?
16. ”저 안에 거한다” ”저를 안다” ”빛 가운데 행한다” ”사귐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7.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처럼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8. 빌립보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행동 양식은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라.
19. 그리스도는 성부께 어떻게 순복하셨는가?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해 보라.
20. 예수께서는 옛 계명에 어떻게 새 의미를 부여하셨는가?(요 13:34)
21. 요한일서 2장 9-11절에 기록된 위선은 어떤 것이었는지 밝혀보라.
원리에 대한 재확인
1. 어떤 사람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검토해 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누군가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 믿음으로써 자기를 기만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을 갖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각종 회의(會議)를 통해 봉사할 사람을 택할 때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참 신자를 골라야 한다. 교회에서 초청 강사의 강론을 듣는다거나 라디오에서 어떤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주장과 그 사람의 생활이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종임을 실증해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하는 말의 정당성 여부를 분별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교회가 거짓 교사들에게 내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계시켰다(행 20:28-30). 요한은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고 편지의 수신인들에게 권했다. 진정한 신자인지의 여부를 알아 보기 위한 교리적, 도덕적 테스트로 어떤 질문들이 있는지 암기해 두라. 실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음으로써 잘못 인도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2.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철저한 자기 분석적 검토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냥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3장 14-18절, 4장 7-11절, 19-21절 그리고 5장 1-3절 말씀을 묵상하라.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성경을 읽을 때나 목사의 가르침을 받을 때 당신은 그러한 진리하에서 행동하는가?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일에 부딪칠 때 당신은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가? 매일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전념하라. 그렇게 하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지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요일 3:14/ 5:2).
● 요한일서 2:15 ●
2. 세상의 본질
서론
1. 하나님의 성품에 있어서의 대비점
1) 하나님의 사랑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기독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일서 4장 7-8절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을 본다. 그리고 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16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고 말한다.
2) 하나님의 증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 때문에 싫어하기도 하신다. 사랑의 반대, 즉 증오가 없으면 사랑도 있을 수 없다. 이 두 가지 감정은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칠 만한 것은 모두 싫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그 아이들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은 다 싫어할 것이다. 당신이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를 모독하거나 그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싫어할 것이다. 당신이 선을 사랑한다면 악은 미워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단은 싫어할 것이다. 일치되는 것을 사랑한다면 불일치되는 것은 싫어할 것이다.
시편에는 이와 같은 호오(好惡)의 감정, 그 관계의 예가 될 만한 구절들이 몇 가지 있다.
(1) 시편 97편 10절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사랑하는 것에 반대되기 때문에 싫어하게 되는 것에는 몇 개의 등급이 있을 것이다.
(2) 시편 119편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04, 113, 128, 163절).
어떤 일에 전적으로 전념할 때, 그 일을 거스리는 것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분개를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증오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싫어하시는가?
잠언 6장 17-19절에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의 목록이 쭉 나열되어 있다. 솔로몬은 어떤 것을 강조할 때 쓰이는 히브리 사람들의 숙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칠 가지니.”
1) 교만한 눈
교만은 치켜뜬 눈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이 교만한 눈이라는 히브리어 표현의 문자적 의미이다. 교만에 가득찬 사람은 얼굴을 반듯이 쳐들고 눈을 치켜뜬다. 교만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채우면 그것은 그 사람의 틀에 박힌 태도에 그대로 반영된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아닌 다른 사람, 다른 것이라면 모두 멸시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신다. 교만의 죄가 첫번째로 언급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불순종과 반항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롬 1:22).
2) 거짓된 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거짓말하실 수 없는 분이다(히 6:18). 그분께서 진실을 사랑하시고 거짓을 싫어하신다는 것은 성령께 거짓말을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기사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행 5:1-11).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에 자신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한 본보기로서 그들의 생명을 취하셨다.
3) 잔악한 손
17절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싫어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흉악하고 잔인한 성향을 가진 사람, 자기가 원하는 일에 실패나 좌절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해 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 살생을 싫어하시는 것은 그분이 친히 생명을 지으셨고 그것에 존엄성을 부여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의 생명을 취한 자는 자기 생명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정하셨다(창 9:6).
4) 사악한 마음
하나님은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을 싫어하신다. 악을 행하는 것도 나쁜 사람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어떻게 악을 행할까 하고 오래 궁리하는 경우에는 더 나쁜 사람이 된다. 사악한 마음은 새로운 범죄 방법을 고안해 내기 위한 사단의 작업장이다.
5) 악을 향한 발걸음
하나님은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도 싫어하신다(18절). 이것과 정상적인 죄와의 차이점은 정상적인 죄는 성경에 「실족」 혹은 「실책」으로 묘사된 반면, 악을 지향하는 사람은 고의적으로 가능한 한 빨리 죄를 향하여 급히 달려간다는 것이다.
6) 거짓 증인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또 한 가지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19절)이다. 하나님은 무고한 편을 비난하는 사람을 싫어하신다. 다윗, 예수, 그리고 바울도 거짓 증인들의 모함을 체험했다(시 27:12/ 마 26:59-61/ 행 25:7-8). 거짓을 증거하는 것은 정의의 장애물이 되고 무죄한 사람의 명예를 무너뜨리며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의 삶까지 파괴한다.
7) 이간하려는 마음
19절은 하나님께서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도 싫어하신다고 말한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일치 단결이 있어야 할 곳에 분열을 일으킨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 즉 진리, 선, 일치 등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것들이다. 그분은 인간이 진정으로 자신께 경배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우상 숭배와 외식적 종교를 싫어하신다. 그분이 싫어하시는 것은 곧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의 반대인 것이다.
2. 서신 내용의 분석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어떤 것을 소개한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세상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싫어하신다.
1) 주제 면에서
(1) 고찰
요한이 이 편지를 쓴 목적 중에는 참 그리스도인을 거짓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분별해 내려는 것도 있었다. 그는 누가 참 신자이고 누가 거짓 신자인지 보여 주고자 했다. 그의 편지를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짓 교사, 2장 18절에서 ”적그리스도”라 칭해진 자들에게 잠식(蠶食)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참으로 구원받았는지, 그리고 누구의 가르침을 좇아야 하는지 분별해 내기 어려운 때를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편지 전체를 통해 그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준 몇가지를 제시한다. 그 테스트는 크게 두 개의 범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는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의 테스트이고(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는지), 또 하나는 도덕적인 면에서의 테스트이다(하나님께 순종하고 형제를 사랑하는지). 요한은 2장 말미에서 다시 교리 면의 테스트(1장에서 시작했던)로 되돌아가 그리스도에 관해서의 교리 테스트를 소개한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2-23절).
(2) 상술
2절의 중반부에서 요한은 순종과 사랑이라는 도덕적 측면의 테스트 문제를 불쑥 꺼낸다. 사랑에 대한 도덕적 테스트는 세 부분으로 이뤄지는데, 각 부분은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힘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의 여부를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요한일서 2장 5절은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기 위한 첫번째 요건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두번째 요건은 ”형제를 사랑”(10절) 하느냐이다. 그리고 세번째 요건은 ”이 세상을 사랑치 말라”는 15절 말씀에 나타난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첫번째 요건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습관적으로 세상 사랑하기를 계속하지 않는다고 사도 요한은 말한다. 그러한 종류의 사랑은 기독교와는 조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지어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성경상의 근거
- 요한일서 4장 5-6절 :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 요한일서 5장 4-5절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고,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 요한복음 15장 18-19절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세상도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도 세상을 미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개별적인 인물들이 아니라 세상의 불경건한 체계이다.
- 골로새서 1장 13절 : 우리가 구원받으면 성부께서는 우리를 ”빛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만드시고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세상에서 하늘로 옮겨졌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 땅의 것이 아니고 하늘의 것이다.
- 야고보서 4장 4절 :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그분의 벗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15: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롬 8:16)이다. 우리는 분명 그분의 적이 아니다. 로마서 5장 1절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의 적으로 만들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본성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가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 형제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지를 보라. 하나님과 그 자녀들을 온전히 사랑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가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법적 구속에 의한 복종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패나 오도(誤導)된 사랑의 여지를 허용하는, 자발적이고 호의적인 복종을 말하고 있는 것임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과의 유희에 빠질 때도 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적용되는 때이다. 우리의 이상(理想)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때때로 그렇게 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복종의 정신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은혜롭게도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가 지은 죄의 값을 이미 치러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둘 다를 사랑할 수는 없다.
2) 역사적인 면에서
(1) 검토
사도 요한은 한 특정한 문제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돌리고 있는데, 그 문제는 다름아니라 영지주의이다. 영지주의 교사들도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고 있었다. 요한은 자기 편지에서 ”그들은 죄를 고백하느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시인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느냐? 그들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이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들이 하는 한 가지 일은 세상의 체계를 사랑하는 일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교회 안으로 스며들어와 세상의 철학을 퍼뜨렸다. 그들은 진정한 영성(spir-ituality)은 특별한 지식을 소유한 자만 가질 수 있다고 그릇되이 믿었다. 그들은 세상적 지식[헬라어로 그노시스(gn sis)]을 추구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 곧 「노스틱스」(Gnostlcs)라고 불리웠다. 그들의 철학 체계는 그들의 도덕 체계 만큼이나 세상적이었다.
(2) 예증
디모데후서 3장 2-7절은 영지주의 철학에 대해 기술한 듯하다. 디모데는 영지주의자들이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디모데에게 주는 바울의 경계는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주석가들이 많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머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영지주의자들에 대해서 이보다 더 잘 묘사한 것은 없다.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이 지닌 특징을 싫어하신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철학과 부도덕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요한이 그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없다고 말한 이유이다. 그들은 사실상 세상을사랑했다. 따라서 영지주의자들은 요한의 도덕 테스트 세째 항목에 걸린 셈이다. 요한은 서신의 수신자들이 누가 정말 구원받았는지를 구분할 수 있도록 도와 줌으로써 그들을 기만하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3. 현대 그리스도인에게의 적용
서신의 수신인들에게 세상 사랑하기를 그치라고 한 요한의 명령은 오늘날 우리에게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체계와 더불어 재미를 누리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도 그 진리에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를 고백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말은 반드시 모든 신자들이 자기 죄를 고백함에 있어 신실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해야 할 일을 우리는 권면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도 성경은 말한다. 단순히 복종하기를 소망하기보다는 복종하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계발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 형제를 사랑한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적확(的確)한 묘사이긴 하지만, 그들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권면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교훈
요한일서 2장 12-17절은 그리스도인이 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세상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절)
"세상”이라는 말은 위의 본문에서 여섯 번 사용되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5-17절).
1. 세상에 대한 정의(定義)
요한은 ”세상”이란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는가? ”세상”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코스모스」(kosmos)인데, 이 말은 세 가지의 기본 의미를 담고 있다.
1) 이 땅(the earth)
「코스모스」는 산과 바다가 있고 동식물의 삶이 있고 지구라는 이 별 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있는 현상적인(physical) 세계를 의미할 때 쓰는 말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24절에서 「코스모스」란 말을 그런 의미로 쓰고 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세상에 있는 피조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요한은 우리가 산들이나 강이나 바다, 하늘의 아름다움을 찬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시편 19편은 하나님의 피조된 세계는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1-2절). 하나님은 천체를 지으셔서 우리가 그분을 알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하셨다. 시편 104편을 읽으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해 시편 기자가 얼마나 경외감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사실,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생태학자가 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그저우연히 생긴 것일 뿐이라고 인간주의적으로 생각하는 불신자가 어떻게 그 풍경을 찬미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즐거움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을 사랑해야 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가 어느 날 쓰레기나 다름없는 종이 조각들을 한 뭉치 안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당신은 그것이 무언지 모르지만 아이가 만든 것이기에 칭찬을 해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예술 작품을 냉장고 문 위에 더덕더덕 붙여 놓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즉 어린 자녀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든 어떤 것을 당신에게 선물로 주면, 그것은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땅은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이 땅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는 말씀하고 계시지 않다.
2) 인류
「코스모스」는 사람들의 세계, 즉 인류(humanity)를 언급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의 ”세상”이 바로 이런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 예수님은 산과 강이 있는 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요한복음 1장 10절에서도 「코스모스」가 똑같은 의미로 쓰였다.
”그가 [현상적인] 세상에 계셨으며 [현상적인]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인간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리스도인은 인간들의 세상 또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편견을 갖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사랑하신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만큼 그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갈 6:10) 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어 죽게 하셨기에 우리는 세상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3) 악의 체계
「코스모스」는 악의 보이지 않는 영적 체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요한일서 2장 15절은 그 악의 체계나 그 체계의 모습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상의 체계는 하나님과 대적되는 것이다.
영어 사용자들은 어떤 체계(system)를 의미하는 말로 ”세계”란 단어를 쓰는 예가 종종 있다. 스포츠계(world of sports), 정치계(World of politics), 의학계(world of medicine)라는 말은 사회의 그러한 전문 영역들의 이상(理想)이나 활동상 혹은 목적 등의 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the world)이란 이 땅에 표출되는 대로의 사단의 이상이나 활동상, 그리고 목적 등을 의미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사단계의 체계는 하나님께 대적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동시에 사랑할 방법 같은 것은 없다. 요한은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 두가지 사랑은 서로 정반대의 것이다.
2. 세상의 모습
1) 세상의 왕
(1) 요한일서 5장 19절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세상의 악한 체계는 사단에게속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단의 나라는 양립할 수가 없다.
(2) 요한일서 4장 4절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세상에서 활동하는 사단보다 더 크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의 체계를 싫어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싫어하는 그 체계가 때때로 우리를 세속성과의 싸움에 휘말려들게 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세속적이라는 것은 반드시 당신이 하는 어떤 행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단순히 당신이 하는 어떤 생각에 대해서도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이다. 즉, 당신은 세속적인 행동은 하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욕구 정도는 가질 수 있다. ”나는 세상적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고 싶은 마음은 확실히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세속적이란 주로 세상의 일시적인 쾌락을 체험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3) 요한복음 12장 31절
세상의 악한 체계는 ”이 세상 임금”이라 칭해지는 사단에게 지배받는다.
(4) 에베소서 6장 11-12절
바울은 사단과 그 마귀들이 영적 영역에서 사악함을 자행한다고 말한다.
2) 세상의 백성
(1) 누가복음 16장 8절
사단은 사람들에게 올무를 씌워 자기의 악한 체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체계의 일부이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일컬어 ”이 세대의 아들들”이라고 하셨다. 이것도 알지 못하고 불신자들은 사단의 악한 체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2) 빌립보서 3장 20절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긴 하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신자들은 결코 세상 체계의 신하가 아니다.
(3) 요한일서 4장 3절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인지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으니라.”
적그리스도의 영은 궁극적인 적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예비하고 있는 세상의 악한 체계의 일부가 이미 되어 있다. 세상은 문자 그대로 적그리스도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적그리스도(anti-Christ)가 아닌 찬(讚) 그리스도(pro-Christ)이다. 둘 사이엔 절대 조화가 있을 수 없다.
(4) 요한일서 4장 1절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세상에는 거짓 교사들이 범람하고 있다.
(5) 요한일서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세상의 체계는 그리스도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비그리스도인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비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서로 정반대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부, 성자, 성령과의 사랑 안에 있는 반면, 세상 사람들은 사단을 맹목적으로 좇으며 자기 자신밖에 사랑할 줄 모른다.
(6) 요한복음 17장 6절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세상 중에서 선택된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7) 골로새서 1장 13절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리스도인은 천국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것이다(엡 2:6 참조).
(8) 요한일서 3장 13절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불신자들이 당신이 지지하는 것을 미워한다 해도 놀라지 말라. 그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인은 너무도 특이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9) 요한일서 4장 5-6절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세상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만을 듣는다. 그래서 내가 설교하는 말을 듣고 불신자들이 화를 내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세상에 살되 속하지는 않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중에서 선택되긴 했지만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간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세상 가운데 빠지지 않고 주의깊게 세상과 교류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물 가운데 보트가 떠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보트 안으로 물이 들어오면 문제가 생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 있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것은 그리 좋지 않다. 우리는 세상의 영역 가운데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단의 영역에 이르러 그 종된 자들을 구해 내는 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왜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가?
1) 세상은 하나님께 대적한다
세상의 본성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사랑치 않게 한다. 예수를 싫어하는 세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찬성하시는 모든 것을 모독하려 하는 체계를 당신은 사랑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맞서는 것의 일부가 될 수 있겠는가? 사단이 경영하고 그 마귀들이 관리하는 것의 일부가 되겠는가? 예수께서는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마 18: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세상의 체계가 저주받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나타내셨다.
2) 세상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세상은 영적으로 죽어 있고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요14:17)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다. 요한복음 17장 9절에서 예수께서는 성부께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3)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우리를 구하시고자 죽으셨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말한다.
4) 세상은 도덕적으로 오염되었다
베드로후서 2장 20절은 ”세상의 더러움”을 언급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한번 흘긋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것이 동물적인 야망, 교만, 탐욕, 자기 만족, 그리고 악한 욕구 등에게 지배당하고 있으며 또 경건함을 적대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의견은 그릇되어 있고, 세상의 목표는 이기적이고, 세상이 추구하는 쾌락은 죄악된 것이며, 세상의 영향력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세상의 정치는 부패했고, 세상의 영예는 공허하고, 세상의 미소는 가식적(假飾的)이며, 세상의 사랑은 변덕스럽다. 세상은 사단에 의해 경영되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체계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악한 체계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것을 절대 사랑해서도 안 된다.
5) 세상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미혹시킨다
사랑은 지고(至高)의 감정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당신은 그 사람에게 자신을 바친다. 두 남자에게 동시에 ”나는 당신들 둘을 똑같이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여자는 없다. 그보다 그녀는 ”당신들 중에 어느 사람을 더 사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것이다. 말 그대로의 정의에 의할 때, 사랑은 적수(敵手)를 모른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체계를 제일로 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최우선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그가 마땅히 헌신해야 할 바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것이 바로 요한이 15절에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말한 이유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래서 우리는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다.
결론
세상의 체계 내에는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육신의 정욕(16절)은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 성적 부도덕은 텔리비젼이나 그 밖의 다른 오락물에 만연해 있다. 육신의 정욕을 강조하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리지 않기란 정말 어렵다.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또 하나의 육신의 정욕은 폭식(暴食)이다. 즉석에서 음식을 주문하여 먹을 수 있는 간이 음식점 광고들이 수없이 많이 보이고 들린다. 이제 음식은 더 이상 생명의 유지만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반드시 음식이 훌륭하기 때문에 외식을 하러 가지는 않는다. 당신은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외식을 하러 간다. 오늘날엔 폭식을 피하기가 힘들다. 여기서의 폭식이란 단순히 체중이 정상치를 초과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필요로 하는 적정량을 넘어 육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우리가 거부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있다. 안목의 정욕(16절) 또한 그런 문제 중의 하나일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아 뭔가 새롭고 훌륭한 것이 눈에 띌 때 당신의 마음에 부당하게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다. 자존심 또한 또 하나의 문제이다. 이웃들이 뭐라고 할지 모르니까 이 상품을 꼭 사야 한다고 말하는 상업 광고 방송을 당신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고 정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데, 당신 안에 있는 죄가 세상에 대해 애정을 품도록 몰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면 그것을 그리스도께 고백해야 한다. 그분을 좀더 깊이 사랑하게 될때까지, 그분께 기도하고 그분에 관한 말씀을 읽는 데 일정한 시간을할애하라.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될수록, 당신의 삶에서 우선되어야할 경건한 일들을 제쳐 놓게 하는 것들에 대한 사랑은 적어질 것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기 때문에, 즉 우리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의 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확인 질문
1. 첫번째 편지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강조하고 있는가?
2. 하나님의 사랑과 분리할 수 없는 그분의 또 다른 반응은 무엇인지 설명하라.
3.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의 목록에서 교만의 죄가 제일 처음 언급된 주된 이유는 무엇이겠는가?(잠 6:17)
4. 요한이 이 편지를 쓴 목적 중의 한 가지를 밝히라.
5. 복종과 사랑의 테스트를 위한 세 가지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6. 요한일서 5장 4-5절 말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이 자기 믿음에 의해 세상에 관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7.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세상에 애착을 갖는 사람을 야고보서 4장 4절에서는 뭐라고 칭했는가?
8. 사도 바울이 반박하는 편지를 쓴 영지주의의 특별한 문제점은 무엇인지 설명하라.
9. 신약성경에서 ”세상”이라 번역된 헬라어의 세 가지 기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10. 그리스도인이 사랑해도 좋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형태의 세상은 무엇 무엇인가?
11. 세상의 체계는 누가 지배하는가?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 대답하라.
12. 비록 이 땅위에 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어디에 있는가?(빌 3:20)
13. 물 가운데 떠 있는 배가 세상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예증해 주는지 설명하라.
14. 갈라디아서 1장 4절 말씀으로 볼 때, 예수께서는 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는가?
15. 오늘날의 사회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육신의 정욕의 요소가 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16.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세상보다 예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는가?
원리에 대한 재확인
1.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으로 이야기된 일곱 가지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잠 6:17-19).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들 중에 단 한 가지라도 당신의 삶에 계속되어 나타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들 중의 몇 가지와 씨름하는 경우는 있을 수있다. 그 죄악들 각각에 관하여 당신의 삶을 분석해 보라. 당신을 위협할 가능성에 있는 어떤 영역에서든 늘 당신의 뜻을 하나님께 순복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러한 죄악들이 당신을 위협할 때 대응할 수 있도록 신약성경의 다음 성구들을 상고하라(눅 6:31-37/ 엡 4:15, 25/ 빌 2:2/ 딤후 2:22/ 히12:1, 13-14/ 약 4:10).
2. 마태복음 19장 16-30절을 묵상하라. 예수께서는 한 젊은 부자관원과 마주 서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셨다. 그 장애물은 바로 그의 재물이었다.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좇지 못하게 만드는 어떤 매력이 세상에 있는가? 그렇다면 야고보서 4장 4절 말씀을 기억하라.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3. 세상의 체계는 지극히 오염되어 있어 ”잠시 죄악의 낙”(히 11:25)을 누리라는 유혹을 받지 않고는 세상 가운데서 제대로 구실을 하기가 어렵다. 히브리서 12장 1-5절 말씀을 묵상하라. 인생의 경주에서 벗어 버리라고 그리스도인에게 명령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이유는? 달릴 때에 우리는 누구에게 시선을 두어야 하는가? 의로움의 연단을 받는 것은 힘들지만, 하나님께 대적하는 세상의 체계와 마귀의 세력에 능동적으로 대항하라는 의무를 부여받은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의로움을 향한 경주를 할 때 당신 자신을 강건케 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인가? 세상의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는 오래 참음으로 하라.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절대 잊지 말라.
● 요한일서 2:12-14 ●
3. 그리스도인의 본질
서론
요한일서 2장 12-17절은 사랑이란 주제에 관해 논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싫어하시는 사랑이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5절)라고 했다. 문맥상 ”세상”이라는 용어는 이 땅을 지배하는 악의 체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체계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그 체계가 성부께 대한 그들의 사랑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5장 19절은, 세상은 전적으로 사악한 자의 지배하에 있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보모가 아이를 요람에 넣고 어르는 장면을 생각케 한다. 사단은 온 세상을 자기 품안에 안고 어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이다(빌 3:20). 비록 인간의 사회를 지배하는, 사단의 뜻을 받드는 체계 내에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썩었고(벧후 1:4), 경건치 못하기(요일 2:16) 때문이다.
교회가 끊임없이 당면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진리를 말하는 자와 진리를 왜곡하는 자를 분별하는 문제이다. 요한 서신은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별해 내는 기준으로 삼을 만한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한다. 당신은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하는가를 보고 거짓 그리스도인과 참 그리스도인을 구분할 수 있다. 교리적 측면의 시금석은 그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시인하는가의 두 가지로 되어 있고, 도덕적 측면의 시금석 역시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가의 두 가치로 되어 있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형제로서의 그리스도인은 사랑하지만 세상은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체계를 계속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어느 한 편만을 택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마 12:30)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 6:24)라고도 말씀하셨다. 당신은 영적인 정신분열증 환자가 될 수 없다. ”나는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세상의 사단적 체계 또한 사랑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기는 하지만 세상과 더불어 재미를 누리는 경우는 가끔씩 있다. 세상 사랑하기를 그치라는 15절의 현재 명령형의 말씀은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바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상으로도 그리고 신분상으로도 습관적으로 세상의 체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 세상과 더불어 재미를 누려서도 안 된다. 구약성경은 말한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수 24:15).
복습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 네 가지를 제시한다.
세상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절)
교훈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2-14절)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15절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그 두 가지 사랑은 상호 배타적이다. 요한복음 8장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고 말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39-41, 44절)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으나 행동은 아브라함같지 않았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가계(家系)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가족이고 또 하나는 사단의 가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이나 인간의 형제됨을 믿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되시고 모든 사람이 다 우리의 형제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사단의 자녀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요한일서 2장 12-14절은 말한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 내에 있는 서로 다른 류(類)의 신자들에 대해 서술한다. 모두 다 그분의 자녀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영적인 어린아이이고 어떤 이들은 청년이며 또 어떤 이들은 아비들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사단의 체계를 사랑하지 않으며 그것에 충성을 바치지도 않는다.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과 가족 구성원들이 각각 처한 성숙성의 정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참 그리스도인은 죄사함받았고, 하나님을 알며, 사단의 체계를 극복했다. 하나님의 가족에게는 바로 그 본질에 의해 하나님과 사단의 체계를 동시에 사랑할 가능성이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자녀를 향해 확산된 자비(12절)
”자녀들아[헬라어 「테크니아」(teknia)]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 상술
「테크니아」라는 말은 특정 나이에 관계없이 모든 ”태어난 자들”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요한은 편지의 수신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분의 자녀로서 그들의 죄는 그분의 이름을 위해 용서되었다. 이는 참으로 엄청난 말이다. 우리의 죄는 우리가 용서되기를 구했기 때문에 용서된 것이 아니다(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맞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우리 죄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용서되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 자비의 행위가 그분에게 영광이 되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다. 그분께서 당신과 나를 용서하신 것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였다. 우리에게 용서받을 자격이 있어서 그리된 것은 아니다. 당신과 내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운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기로 하셨고 우리는 단순히 그 수혜자(受惠者)가 됐을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 보이기를 바라신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성경이 주로 강조하는 바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서 인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을 나타내 보이기 원하셨다. 당신이 은혜롭게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세상에 설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관대하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을 구속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실제로, 에베소서 3장 10절은 그분께서 천사들 앞에 교회를 자랑스럽게 내보이심으로써 천사들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를 찬양케하려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의 기본적인 이유이다. 자신의 자비를 나타내 보이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을 보여 주는 성경 구절 몇 가지를 검토해 보자.
2) 성경상의 근거
(1) 미가서 7장 18-19절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수사학적인 질문을 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얼마나 너그러운 하나님이신가 ! 그분은 자신의 자비로운 품성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죄를 용서하신다.
(2) 시편 32편 2절
다윗은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3) 시편 86편 5절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느냐 못받느냐의 판단 기준은 그분께 부르짖는가의 여부이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과 다르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은 늘 여전하시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풍성한 증거를 보지 못하고 있다.
(4) 이사야서 43장 25절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는 주된 이유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 자신을 위해서이다. 이 우주의 주된 주제는 그 창조자가 영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은혜를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인간을 용서하신 크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고원(高遠)한 모습을 필요로 한다.
(5) 누가복음 24장 47절
예수께서는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셨다.
(6) 에베소서 1장 4-6절
성부께서는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하셨다.
(7) 시편 25편 11절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다윗은 ”주여,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제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당신도 이와 같은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온전한 기도
”주여 00를 구원하셔서 당신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00가 병이 났으니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를 고쳐주소서”, ”주여 00가 병이 나서 이제 죽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하시든 당신께 가장 영광이 될 일로 하소서” 당신은 이러한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이 기도의 방법이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곧잘 우선 순위를 뒤바꿔 놓는다.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을 위해 기도할 때는 결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십시오, 하나님”이라고 기도했다면, 정말 올바른 기도를 드린 셈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을 제일 먼저 고려해야 한다. 너무 원하는 것이 많아서 그것이 쉽지 않을 때도 가끔씩 있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고, 또 하나님 영광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고 말씀하셨다. 바꿔 말해 ”내 이름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구하면 - 나에게 영광이 될 만한 어떤 것을 구하면 - 내가 그것을 행하리라”고 그분은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아버지여,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인 줄 제가 믿사오니 이것을 행하소서.”
이런 식으로 일관성있게 기도하는 사람은 곧 자신의 영적 성숙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어려울 때도 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늘 마음판에 새겨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면, 영적 성숙함에 도달하는 데도 곤란한 문제를 갖게 될 것이다.
(8) 시편 79편 8절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9) 시편 106편 8절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여호와는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또 우리도 구원하신다.
(10) 시편 109편 21절
다윗은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있었다.
”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선대하시며 주의 인자하심이 선함을 인하여 나를 건지소서.”
(11) 예레미야 14장 7절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자기 자신에 관해 하는 일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많이 염려한다면 그것이 바로 영적 성숙함이다.
(12) 이사야 48장 9, 11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은 죄사함을 받았다. 그분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나는 그분의 용서의 사실성(寫實性)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분이 정말 나를 용서하시는 건지 의심스러워요”라고 말한다. 그분이 자신을 위해 당신을 용서하기로 정하신다면 그 은혜로움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노력해서 그분의 용서를 얻는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는 얻을수도 없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일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용서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적 체계에 속한 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의 자녀들의 성숙 과정(13-14절)
1) 영적 성숙이란 무엇인가 ?
성경은 사람마다 영적 성숙의 정도가 다르다고 가르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성숙함에 있어 다 같은 수준에 있지는 않다. 그렇지 않다면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고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며,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서 영적 성숙의 과정이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마가복음 4장 28절
예수께서는 영적 성숙의 신비를 보여 주시기 위해 곡식이 자라나는 단계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 요한복음 21장 15-16절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물어 보실 때 그에게 자신의 어린양(lambs)뿐만 아니라 양(sheeps)도 먹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영적 성숙에 최소한 두 가지 다른 단계가 있음을, 즉 성숙한 양의 단계와 어린 양의 단계가 있음을 알고 계셨다. 나는, 목양(牧洋)을 하려는 설교자라면 자신이 치는 양떼 중에 어린 양도 있고 성숙한 양도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말 속에 그 두 부류의 신자 각각을 위한 멧세지를 늘 담고 있어야 한다.
(3) 로마서 14장 1절, 15장 1절
보다 약한 형제에 대한 바울의 논의는 신자마다 영적 성숙의 수준이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신령함(spirituality)은 성숙함과는 다르다. 신령함은 각일각(刻一刻)마다의 확정된 「절대」이고, 성숙은 하나의 과정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육체 안에서 행하는 반면, 신령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안에서 행한다. 당신은 성장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든 늘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분명히 될 수 있다. 그 반면, 육체 안에서 행함으로써 그 신령함을 상실할 수도 있다. 심지어 영적인 아버지의 수준에까지 이른 사람도 여전히 육체 안에서 행할 수 있다. 신령함의 여부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어떤 순간에서라도 그가 성령께 굴복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반면, 성숙함은 보다 더 신령한, 그리고보다 덜 육적인 사람으로 되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성숙의 과정은 신령함이라는 전체 배경 내에서만 진행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 신앙의 기초밖에 모르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써 영적인 청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육체 안에서 행하기 시작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성장은 멈춰 버린다. 그러나 성령께 굴복하면 그는 다시 자라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만 당신은 성장할 수 있다.
2) 영적 성숙에의 권면
영적인 갓난아이들이 모두 자동적으로 청년이 되는 것은 아니고, 영적인 청년이 자동적으로 아버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은 영적인 갓난아이일지 모르지만, 2년만 시간을 주어 보시오. 그러면 청년이 되어 있을 테니”라고 당신은 말한다. 하지만 영적 성숙은 단지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갑자기 사망하거나, 실족하거나 혹은 말씀 공부를 게을리한 탓에 영적인 유아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영적인 갓난아이들은 모두 청년과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만약 성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시는 것의 바로 그 핵심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은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혜에 있어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영적 성장 수준은 나이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3) 영적 성숙 여부의 검토
(1) 아이들(14상반절)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 아이들의 특성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영적인 아이의 단계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야 한다. 14절에서 ”아이들”로 번역된 헬라어는 「파이디아」(paidia)로서 12절에서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사람(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인 「테크니아」(teknia)와는 다르다. 「파이디아」는 어린아이를 의미하는 말로서 무지(無知)와도 관련이 있다. 영어에서 교육을 의미하는 단어인 「페더고지」(pedagogy)는 바로 그 헬라어에 어원을 두고 있다. 여기서의 아이들은 영적으로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이다. 그들의 지식은 구원의 기초에 한정되어 있다. 즉, 그들은 성부만을 알 뿐이다.
자연의 영역에서 볼 때, 갓난아이가 제일 처음 찾는 것은 그 부모이다. ”엄마”와 ”아빠”가 갓난아이들이 처음 배우는 말들이다. 이와 비슷하게 영적인 영역에서도 갓난아이 그리스도인의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자기 아버지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애착을 보인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분께 의지한다. 갈라디아서 4장 6절과 로마서 8장 15절의 바울의 말에 의할 때, 영적인 갓난아기는 하나님을 ”아바”(”아빠”를 의미하는 아람어)로 부른다고 했다.
거의 예외없이, 어린아이들은 지식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에 따라 행동한다. 그들은 사물을 이성적으로 추론하지 않는다. 단지 체험되는 일을 즐길 뿐이다. 그들은 쉽게 흥분하고 쉽게 두려워한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아이들은 자기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사단과 마귀가 자기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수있는지 의심한다. 예언에 관한 말을 들으면, 자기도 휴거되어갈 수 있을지를 염려한다. 그들은 이성적인 기초 위에서라기보다 감정적인 기초 위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때문에 곧잘 그런 종류의 두려움과 씨름한다. 성경 전체를 통해, 어린아이라는 개념이 영적인 의미에서 쓰일 때는 영적인 무지함을뜻한다.
- 아이들의 특성이 나타난 예
(1) 고린도전서 3장 1-2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고린도인들은 보다 깊은 영적 진리에 무지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기초적인 것만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유아기에 머문 까닭은 그들이 육에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영적인 성장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행할 때에만 있을 수 있다.
(2) 에베소서 4장 14절
어린아이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는 했지만 참 교리에 대한 한정된 지식 때문에 거짓 교리에 쉽사리 휩쓸린다. 이단 교리를 가진 사교(邪敎)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은 거의 예외없이 영적인 어린아이들이다.
(3) 마태복음 11장 25절
예수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문장의 대조적인 표현법은 ”어린아이들”은 무지하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제자들은 순진한 영적 어린아이들이었다.
2) 청년들(13, 14중반절)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 그들의 성경 지식
요한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수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것을 두 번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악한 자, 즉 사단을 이기려면 강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강해지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거하게 함으로써이다. 그렇게하면 당신은 영적인 청년이 된다. 영적인 갓난아이는 무지하지만 청년에게는 지식이 있다. 그는 더 이상 감정에 근거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적인 교만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 대부분 이 시기이다. 영적인 청년은 자기가 모든 해답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가 무엇을 안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만 10대가 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면 자기가 한때 생각했던 것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10대 때 생각됐던 것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자기가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오면, 영적 교만이라는 걸림돌에 걸리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 청년들의 힘의 사용
청년들은 교리적인 면에서 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악한 자를 이긴다. ”난 사단을 이긴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어요”라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난 사단에 대해서는 결코 재고하지 않는다. 사단에 관한 책을 읽을때조차도 나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하여 그 책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만을 생각한다.
마귀에 대해 너무 염려를 하는 나머지 그에 관한 책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영적인 청년이라면 당신은 사단을 이긴 것이다. 영적 청년은 교리적인 면에서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지 않는다.
영적 청년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거짓 교리가 당신에게 흥미를 주는 게 아니라 당신을 분격케 할 때, 당신은 자신이 성숙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라고 누군가가 물을 때 그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고 또 성경으로 그 대답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영적 청년이다. 청년은 감정과 정서의 지배를 받는 단계를 벗어나 말씀의 인도를 바란다. 영적 갓난아이들은 주로 자기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만 청년은 그렇지 않다. 자기 형이나 누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해서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아이를 본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란 본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적 청년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건전한 교리 위에 굳건히 서는 일이다.
- 사단에 대한 그들의 지식
(1) 사단의 전략
교리를 아는 것이 악한 자를 이기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간단히 말해서, 사단은 그릇된 교리의 영역 내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나는 ”마귀가 날 이렇게 만들었소”라고 말하지 않는다. 죄를 짓는 데는 마귀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내 육체가 제 스스로 그런 짓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은 육체의 일에 관하여 말해 준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죄를 두고서 이 귀신, 혹은 저 귀신 탓으로돌리려고 한다. 마귀가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긴 하겠지만 문제는 우리의 죄악된 육체이다.
사단과 그 무리들은 사람들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이봐, 더러운 생각 좀 해봐”, ”저 돈을 훔쳐라”, ”세금액을 좀 속여 보라구”라고 말하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마귀의 군대들은 할 일이 따로 있다. 사단은 우리의 육체가 세상으로부터의 충동을 받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세상의 체계를 통해 우리를 간접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2) 사단의 전략에 대한 성경상의 근거
- 고린도후서 11장 14-15절 : 사단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14절)로 가장한다. 그는 거짓 종교 체계 내에서 바삐 일한다(마찬가지로 ”의의 일군으로 가장”한 그의 종들도 역시 그렇다.) 그들이 그렇게 바쁜 것은 세상에 거짓 종교와 사교(邪敎)가 그만큼 많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 레위기 17장 7절 : ”그들은 전에 음란히 섬기던 수염소에게 다시 제사하지 말 것이니라.”
종교 영역에 있어서의 사단의 활동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실 그것은 마귀에게 바치는 제사였다고 구약성경은 말한다.
- 신명기 32장 17절 :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하여 거짓 신에게 제사지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이었다. 사단은 모든 거짓 종교에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닌 어떤 성물(聖物)에 절하는 자는 모두 마귀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 하겠다.
- 시편 106편 36-37절 :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저희가 그 자녀로 사신에게 제사하였도다.”
그들이 말하는 궤변의 수준에 관계없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사단에 의해 계획된 것이며 마귀에게 조종을 받는다. 사단은 그런 활동 무대에서 작용하고 있으므로 당신은 진리의 교리안에 견고히 설 때에 그를 이길 수 있게 될 것이다.
- 디모데전서 4장 1절 : 성경은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거짓 교리는 귀신의 권세가 아주 잘 작용하는 영역이다.
- 요한일서 4장 1절 :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경계시킨다. 그러한 선생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이다.(요일 2:18).
- 고린도전서 10장 20-21절 :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주님과 교제하는 동시에 이방인의 제사를 지냄으로써 귀신과도 교제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성경적인 기독교를 벗어난 종교는 모두 귀신의 영향을 받는 것들이다.
사단은 광명의 천사로 자신을 위장한다. 그것이 그의 주된 기능이다. 따라서 건전한 교리를 알면 사단을 이길 것이다. 구원받았을 때 당신은 세상을 이겼다(요일 5:4).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될 때 당신은 사단을 이긴다. 그리고 나면 남은 적(敵)은 육체뿐이다. 안타깝게도 그 문제를 제거하려면 하늘에 올리워 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영적인 청년에게 사단 같은 것은 문제가 될 리 없다.
(3) 영적인 아비들(13상반절, 14중반절)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영적 갓난아이들은 체험을 즐거워하고, 영적 청년들은 자신의 지식을 즐거워하지만 영적 아비들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영적 청년으로서 말씀을 아는 것과 영적 아비로서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
영적 아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깊은 곳까지 탐사를 했다. 그는 단지 교리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안다. 그는 말씀을 알고 또 그 말씀 속에 계시된 분과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기도에도 말씀 공부에 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적 아비는 하나님에 관해 개인적이고 체험적이며 깊이 있는 지식을 갖고 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알려 하여”(빌 3:10)라고 말했을 때 그도 그러한 종류의 지식을 마음에 두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심도있게 탐구하고자 한 것이다.
결론
1. 영적 성장에의 권고
하나님의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영적 성숙 수준은 각각 다 다르다. 이 책의 독자들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을 것이고 청년도 있을 것이며 아비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현재 어떤 수준에 있든지 영적으로 장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신약성경은 영적성숙의 과정에 관해 여러 가지 용어로 이야기를 한다.
1. 디모데전서 6장 11절은 ”의를 좇아야 한다”고 말한다.
2. 로마서 6장 4절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3. 로마서 12장 2절은 계속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4. 고린도후서 7장 1절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5. 에베소서 4장 15절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6. 빌립보서 3장 14절은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7. 골로새서 2장 7절은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고 말한다.
8. 베드로후서 3장 18절은 ”은혜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9. 골로새서 3장 16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영적 성장을 위한 요소
영적 성장은 신비적이거나 심리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함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말씀을 공부하고 거룩한 삶을 살면서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 행하면 자연히 성숙하게 된다. 어떤 비결같은 것은 없다. 영적 성장은 즉석에서의 눈속임이 아니다.
1)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성장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그 성장 과정을 ”성화”(聖化)라 칭한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32절에서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라고 말한다. 또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그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한다. 성숙은 말씀에서 비롯된다. 어떤 형식적인 비결같은 것은 없다.
2) 거룩한 삶
거룩함은 영적 성장의 두번째 필수 요소이다. 모든 알려진 죄를 비켜가면서, 모든 알려진 계명에 순종하면서 성령 안에서 행할 때 당신은 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려 애쓰고 성령께 굴복할 때 당신 안에 성령의 열매가 맺힌다. 하지만 거룩함조차도 말씀의 결과이다.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족이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지금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아이라면 청년이 되도록 하자. 지금 청년이라면 아비들이 되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본성 때문에, 즉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본성 때문에, 즉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확인 질문
1.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 첫번째의 두 가지 이유는 무엇인가?
2. 영적인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형제인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영적인 아버지이신가?
3. 하나님 자녀의 죄가 용서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4. 하나님은 왜 인간을 만드셨는가?
5. 죄를 사하실 때 하나님은 자신의 어떤 속성을 나타내 보이시는가?
6. 구약 시대의 하나님과 신약 시대의 하나님은 같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간과해 버리는 진리는 무엇인가?
7.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어떻게 그 사람의 영적 성숙 수준을 드러낼 수 있는지 설명하라.
8.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사실성(寫實性)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9. 요한복음 21장 15-16절은 영적 성숙의 수준이 신자마다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지적해 주고 있는가?
10. 신령함과 성숙함의 차이를 밝히라. 신령함의 여부는 무엇에 달려 있는가? 성숙함의 정도는 무엇에 달려 있는가?
11. 영적인 어린아이는 자동적으로 청년이 되고 영적인 청년은 자동적으로 아비가 되는가?
12. 바울은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 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아이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훈계하는가?
13. 영적인 어린아이의 지식은 어느 것에 한정되는가?
14. 청년은 어떻게 사단을 이기는가?
15. 영적 청년이 당면하고 있는 잠재적인 문제점은 무엇인가?
16. 자신이 영적으로 청년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17. 우리가 짓는 죄의 책임은 대부분 마귀에게 있는가? 사단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유혹하는가?
18. 사단과 그 무리들은 어디에 힘을 집중하고 있는가?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하라.
19.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사단을 일단 이기고 나면 정복해야 할 적(敵)으로 유일하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 완전히 정복되는가?
20. 영적인 아비의 특성을 서술하라.
21. 영적 성장은 무엇 무엇의 결과인가?
22. 모든 알려진 _____ 를 _____ 고, 모든 알려진 _____ 에 _____ 하면서 성령 안에서 행할 때 당신은 성장한다.
원리에 대한 재확인
1. 시편 86편을 읽고 5절 말씀을 암기하라. 그분께서 개인적으로 당신을 향해 펼치신 큰 자비를 인해 그분을 찬양하라.
2. 기도할 때 당신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인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욕구인가? 야고보서 4장 3절을 읽으라. 다음 일 주일 동안 기도할 때에는 당신의 기도의 동기를 의식하라. 당신이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 알고 있는 것에 일치되는 일에 기도의 목표를 두라. 요한일서 5장 14-15절 말씀에 의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확신은 무엇인가?
3.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첫번째 편지에서의 바울의 말을 숙고해 보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3:2).
당신은 영적인 영양을 공급받는 데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배경, 개성, 성숙성에 민감한가? 당신은 그들의 영적 성숙 수준에 비해 볼 때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더 많은 것을 요구해야 하겠는가? 기독교 서점이나 선교회에서 구할 수 있는 제자 훈련 자료들을 다양하게 공부하라. 그것들에 익숙해져서 훌륭한 품성을 함양시켜 줄 가르침을 성장의 특정 단계에 있는 신자들에게 줄 수 있도록 하라.
4. 영적 성장은 쉽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적(사단, 세상, 육체)들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을 힘든 싸움으로 만들고 있다. 영적 성장은 결단과 일관성을 요하는 일이다. 당신의 생활에는 그 두 가지 요소가 있는가? 당신은 영적 아비들이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보다 심오한 지식을 갖기 바라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견고히 세우시게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데 전념하라. 그러면 그분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을 지금 있는 곳에서 이끌어 내셔서, 보다 높은 영적 성숙 수준에 이르게 해주실 것이다.
● 요한일서 2:15-17 ●
4. 세상의 하는 일과 흐르는 방향
서론
1. 사단의 통치의 실제
신약성경에는 ”세상”이란 용어가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씌어졌다. 이 말은 원래 지구라는 「별」(planet)과 「사람들」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일찌기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역한 탓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배하라고 주신 별의 통치권을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세상에 대한 권리증서를 팔아 넘긴 셈이 되었고 그것은 사단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에서가 먹을 것때문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판 것처럼(창 25:27-34),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이고 싶은 근시안적인 욕구로 인해 사단을 상대로 하여 세상에 대한 생득권(生得權)을 선과 악에 대한 지식과 맞바꾸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바로 그때 사단은 세상의 통치권을 획득했고, 이로 말미암아 ”세상”이란 말은 세번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세상은 지금 이 별을 지배하고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체계를 의미하는 말이 된 것이다. 사단이 시작해 놓은 그 체계는 대환란(Great Tribulation)의 때가 올 때까지 계속 진전해 나갈 것이다. 사단은 세상을 경영한다. 누가복음 4장 6절이 그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란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세상을 지배하는 체계는 사단의 조종하에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언젠가 그것을 그 정당한 상속자에게 되돌려 주시게 될 것을 알고 계셨다.
2. 사단의 통치에 대하여
창세기 4장은 사단의 체계가 어떻게 운영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준다. 사단의 체계는 세 가지 요소로 특징지어지며, 이 요소들로 말미암아 사단은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
1) 거짓 종교
사단은 진리에 대해 반작용할 만한 것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 영원한 운명과 그밖의 다른 영적 진리에 대한 거짓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거짓말의 결과는 창세기 4장 6-7절에 제일 처음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가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그를 다스렸다. 자신이 대속을 위한 희생 제물을 요구한다는 점을 주님께서 분명히 알게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자기가 밭에서 키운 것, 즉 자기 노력의 결실을 그분께 가져왔다. 그러나 아벨은 피의 제물을 바쳤다. 창세기 4장은 인간의 노력에 기반을 둔 거짓 종교가 최초로 시작된 경위를 기록하고 있다. 아벨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을 바쳤고 그것은 궁극적인 희생 제물, 즉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가인은 자기 자신의노력의 소산을 바쳤고 그것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계속 존재해 온 거짓 종교의 유산이 되어 왔다. 모든 거짓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에 의해 하신 일에 근거해서 뿐만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 근거하여서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반항적인 존재이므로 만일 세상의 체계를 조종하려면 종교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것을 사단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맞서서 인간 자신의 업적을 드높이는 종교를 만들어 냈다. 근본적으로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종교밖에 없다. 즉, 신의 업적을 기리는 종교가 아니면 인간의 업적을 기리는 종교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2) 범죄
사단은 범죄를 통하여 인간의 삶에 두려움과 속박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창세기 4장 8절에 기록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
인간은 같은 인간을 적대시한다. 역사 전체를 통하여, 사단은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 간에 정해 놓으신 연합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 범죄와 논쟁과 폭동과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어떤 형태의 범죄이든 그것은 연합된 관계를 위협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거나 탐내거나 파괴할 때마다 - 심지어 그 사람을 죽일 정도에 이르기까지 - 하나님께서 온 인류 가운데 정해 놓으신 그 연합은 점점 더 와해되어 나간다.
3) 경건치 못한 삶
또 하나 사단이 그의 체계에 도입한 것은 하나님께 대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건치 못한 생활 방식이다.
사단은 인간을 포로로 만들 수 있는 체계를 개발했다. 그것은 반(反) 하나님, 그리고 적그리스도이다. 그것은 진리를 반역하는 체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시각에 모순되는 것이다. 그 체계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다. 세상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그 직접적인 책임이 사단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단은 그 일의 배후에 버티고 있다. 예를들어, 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죽음을 당한 연합군들이 모두 직접 히틀러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죽음의 배후에는 히틀러가 있었듯이, 유혹을 받을 때 당신은 사단에게 직접 유혹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의 배후에 사단이 있는 것이다.
복습
요한일서 2장 15절은 세상의 체계와 그것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한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신의 주장이 백지화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발전시키는 체계는 하나님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한 사람이 두 가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란 사단의 체계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정의하고 있다. 야고보서 4장 2-4절도 비슷한 권면을 하고 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동시에 두 가지를 사랑할 수는 없다. 참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처사이므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상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5)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에(12-14절)
교훈
세상은 이런 일을 하기 때문에(15-16절)
1. 현격한 대조(15절)
1) 하나님의 바램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세상이 하는 일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상은 범죄하도록 우리를 선동한다. 세상의 체계는 사람이 범죄하도록 유혹하게끔 고안되어졌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수록 우리 삶이 더욱 거룩해지기를 원하신다. 사단은 우리를 유혹하기 위해 세상을 이용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했기 때문에 세상의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저항 자체로 제상의 악한 의도를 근절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의 삶에 있기를 원하시는 거룩함을 대적하고 있다.
(1) 요한일서 2장 1절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우리가 죄 범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2) 에베소서 2장 10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 로마서 6장 17-18절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의의 종이다. 죄사함 받았기에 그는 새 주인을 섬긴다.
(4) 고린도후서 6장 14-17절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신다.
(5) 고린도후서 7장 1절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6) 빌립보서 2장 15절
우리는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야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삶으로써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비난할 수 없게 해야 한다.
(7)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13절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8)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9) 디도서 2장 14절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10) 야고보서 1장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11) 베드로전서 1장 15절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2) 베드로후서 3장 11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13) 요한일서 3장 7절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14) 요한일서 11절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는 데에는 많은 증거가 있다. 세상은 우리가 악하게 되도록 선동하려 애쓰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우리가 그 체계를 사랑할 수 없고, 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공존하는 것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라고 1세기의 유대 철학자 필로(Philo)는 말했다. [다메섹의 요한이 인용(Parall. Sacra A, Tit. xxx. p. 370)]. 그리스도인의 뚜렷한 증표는 그가 죄짓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거룩하기를 원한다. 죄를 지으면 그는 다윗처럼 회개하며 울부짖는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2) 세상의 더러움
요한일서 2장 15절은 세상의 일반적인 체계뿐만 아니라 거기에 속한 것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당신은 세상의 체계를 사랑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거기 속한 것에 매력을 느껴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세상에는 경건치 못한 종교, 물질주의적 경제, 자기 중심적 도덕 등이 있다. 그것들은 마땅히 갖추어져야 할 우리 모습과 또 우리의 삶의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에 매혹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엔 우리의 삶을 정결히 지키기가 매우 힘듭니다”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삶을 정결히 지키는 것은 늘 힘든 일이었지만 아마도 오늘날엔 대중 매체로 인하여 그렇게 살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신성 모독과 폭력, 그리고 성적 부도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아무런 감각도 갖지 못한다. 그러한 것을 접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세상적인 가치 체계에 몰두하도록 허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세상의 음악을 주의깊게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여러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긴 하지만, 세상의 음악이 담고 있는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과 조화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신의 귀가 그러한 음악으로 계속 공세를 받고 있다면, 세상의 도덕을 좇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텔리비젼도 마찬가지다. 텔리비젼을 볼 때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당신은 세상적 가치 기준을 주입받게 된다. 세상의 체계가 죄를 짓게 하려고 시동을 걸어 두었는데 그때 만일 그것과 더불어 즐기고 싶은 마음이 들면 당신의 삶에도 죄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세상의 특성, 즉 물질주의, 인간 중심주의, 부도덕함 속에 당신을 내맡긴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바로 그 본질적인 위치와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빌 2:15) 나타나도록 부름받았기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뭔가 다른 점이 있음을 볼 수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좋다. 올바른 사고의 양식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흠뻑 적심으로써 세상 체계와의 관계를 끊을 필요가 있다.
2. 세상의 내용(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 육신의 정욕
(1) 정의(定義)
이것은 사단이 세상적 체계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선동하는 세 가지 영역 중의 첫번째에 해당한다. 보통의 경우 육신의 정욕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를 하려는 마음을 갖게 만들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욕”은 그것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헬라 원전에서 「에피튜미아」(epithumia)로 나타나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악한 것을 충족시키려는 강한 욕구를 뜻하는 좋지 않은 개념의 말이다. ”육신”은 인간을 구성하는 일부분으로서 죄악에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은 아담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획득된 것이다. 육신은 범죄하기를 원하는, 우리 안에 있는 반항적인 자아이다.
”육신”의 정체를 좀더 분명히 밝히기 위해, 로마서 7장을 살펴보겠다. 바울은 거기서 인간의 이 특별한 영역을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로마서 7장 15-17절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인간의 육적인 본능을 이렇게 묘사한다. '내 속에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행할 수가 없을 듯싶다. 그와 동시에 내 속에 있는 그것이 '그것을 하지 말라'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든 그것을 하고야 만다”
인간의 본성에는 죄악을 행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18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영적인 의미에 육신은 아무것도 선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육신은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악한 성향이다.
(2) 개관
육신은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을 다 저지른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신의 정욕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네 가지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제시한다.
- 부도덕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19절). ”음행”(fornication)은 동성애(homosexuality), 동물과의 교접, 그리고 혼외에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성관계를 다 포괄하는 말이라 하겠다. 육체는 성적인 죄 외에 ”더러운 것”도 행할 수 있는데, 여기서 더러운 것이란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의 불결함을 의미하고, ”호색”이란 ”음탕함”(sensuality)를 말한다. 음탕한 특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관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사람이라 하겠다.
- 우상 숭배
육신은 성적인 영역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20절은 ”우상 숭배”와 ”술수”[헬라어로 「파르마키아」(pharmakia)]를 언급한다. 후자는 마술적인 관행(貫行)과 약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런 것들은 늘 이교도들의 우상 숭배 행위의 일부가 되어 왔다.
- 상호 교제 관계의 파괴
육신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려는 경향도 갖고 있다. 20-21절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를 언급한다.
- 방종
술에 취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도 가누지 못한다. 육신이 자제되지 않으면 그 육신의 욕구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같은 것들”(21절)이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1절은 육체의 일에 습관적으로 탐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말은, 그러한 종류의 일을 계속 행한다면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습관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그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셔서 육신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미워할 것이다. 구원받았을 때 당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누어 받은 자가 되었고, 그 속성으로 인해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하기 원한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의 약점, 즉 육신을 공격한다. 사단은 성(性)의 오용, 거짓 종교, 긴장된 인간관계, 그리고 파괴적인 무절제 등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다. 그는 우리의 육신을 선동하기 위해 그러한 자신의 체계를 이용한다.
2) 안목의 정욕
사단은 눈을 통해서도 우리를 선동한다. 눈 때문에 큰 곤경에 빠질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그 점에 있어, 눈이 먼 사랑은 눈이 성한 사람보다 의로운 삶을 사는 데 더 유리하다고 하겠다. 성경은 이 영역에 있어서 정욕에 직면했던 사람들에 대해 몇 가지 실례를 보여 주고 있다.
(1) 여호수아 7장 1-26절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아간은 그곳에서 전리품 몇 가지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아무것도 자기 것으로 취하지 말라고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은 그것을 취하여 자기 장막 밑에 파묻었다. 아간은 그 불순종의 대가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2) 사무엘하 11장 1-17절
다윗은 지붕 위에 올라가 있었다. 왕이었기에 그의 집 지붕은 다른 어느 누구의 집 지붕보다 높았고, 거기서 그는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 그가 만일 소경이었더라면 그 뒤에 따른 간음이라는 행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죄악으로 인해 한 사생아가 태어났고 밧세바의 남편이 살해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다윗가(家)의 파멸이라는 결과가 빚어졌다. 심지어 그의 친아들 중의 하나까지도 그를 해치려 했다.
(3) 마태복음 5장 27-29절
예수께서는 육신의 정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안목의 정욕에 대하여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거든 어떤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게 좋을 것이다. 부도덕한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 TV나 영화, 혹은 잡지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정욕을 갖게 하기 위해 계획된 일에 당신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4) 욥기 31장 1절
욥 시대의 여자들은 길고 품이 큰 겉옷을 입었다(여자가 손목을 잡아 끌지 않는 다음에야, 그 당시의 남자들이 어떻게 여자를 보고 흥분할 수 있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런데도 욥은 안목의 정욕을 피하기 위한 한 가지 현명한 원칙을 주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욥은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바른 것만을 본다면 곤란한 지경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시대의 문명을 사는 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보고 또 그것을 사고 싶어한다. 똑같은 차를 몇십 년씩 계속 몰고 다니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 차를 처분해야 할 명분을 수십 가지씩 생각해 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옷은 단순히 몸을 가려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오늘날의 의류 상점들은 좀더 맵시있게 보이고 좀더 나은 자기 이미지를 가꾸라고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홀려 있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곧 그 집에 싫증을 느낀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시편 기자와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시 119:37).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 이상을 바라도록 유도하고자 한다. 우리의 눈은 욕구를 갖고 있다. 당신도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즐기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단은 눈이 우리를 정욕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의 체계를 이용하여 '네 욕구를 충족시키라'고 유혹한다.
3) 이생의 자랑
죄악으로 가는 세번째 다리는 ”이생의 자랑”이다. 헬라어 「알라조네이아」(alazoneia)는 사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자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한 거지가 친구들에게 항구에 정박해 있는 선단(船團)이 다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은 그 중의 단 하나도 그의 것이 아닌데, 그는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자기 것이라 허풍을 떠는 것이다. 무언가 위대한 것을 소유하고서 자랑하는 것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허풍떠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생의 자랑은 다른 사람을 위해 큰 쇼(show)를 상연한다.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그저 그런 사람도 다른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어떤 자랑거리를 갖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실제 자기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게 하고 싶어서 자기 분수를 넘어 허세를 부리며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행동은 자랑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악의 세 가지 근원을 점층적인 표현을 써서, 즉 육욕, 탐욕, 교만의 순서로 밝히고 있다. 육욕은 인간 본능의 보다 저급한 부분이 부패한 것 즉, 인간의 열등한 욕구이다. 탐욕은 그보다는 고급한 부분이 부패한 것으로서 여자든지 자동차든지 집이든지 혹은 옷에 대해서든지 아름다운 것에 대해 갖는 이기적인 욕구를 말한다. 하지만 자랑은 인간 존재의 가장 고귀한 부분이 오염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다. 육욕에 의해 인간은 동물의 수준까지 비하되고, 탐욕에 의해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 서로 경쟁하며, 교만에 의해 그는 하나님의 높이에까지 이르려고 애쓴다. 세상은 당신을 죄악으로 몰아갈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세상은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상은 불의를 야기시키고 또 종말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세상이 흘러가는 곳 때문에(17절)
1. 세상의 덧없음
17절은 엄격히 대비되는 사실 두 가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디모데전서 2장 3-4절은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거하지만 세상과 그것을 좇는 자들은 사라진다. 세상의 운명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영원한데 세상은 사라진다. 생과 사의 2대 원칙은 함께 작용할 수가 없다. 교회는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지만 세상은 죽은 체계이다.
”지나간다”[passeth away ; 헬라어로 「파라게타이」(paragetai)]는 말은 여기서 현재 시제로 씌어 세상은 계속 와해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세상은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다. 죄는 사망을 낳기 때문에 세상은 자멸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은 죽어가는 체계이다. 세상의 제도들, 즉 가정, 재판 제도, 정부 등은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다. 세상은 죽음의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죄악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것은 모두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2. 성경에 묘사된 세상의 덧없음
1) 타락의 과정
(1) 데살로니가후서 2장 7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세상의 악은 사람들이 이전에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던 정도로까지 심화(深化)되어 가고 있다.
(2) 디모데후서 3장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세상은 스스로 파멸하는 중에 있다. 신자들은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다(빌 3:20).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썩어가는 체계에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덧없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과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다. 우리는 ”하늘에”(엡 2:6) 사는 것이다.
2) 멸망의 절정
(1) 배경
세상이 자멸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는 요한계시록 6-19장에서 보다시피 대환란 시기 동안에 온다. 5장은 하나님께서 오른손에 이 땅에 대한 권리증서인 책을 들고 보좌에 앉아 계신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그 권리증서는 사단이 에덴 동산에서 취하여 관장하고 있던 것이다). 여기서 한 천사가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2절)고 묻고 있고, 6-7절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그리스도) 같더라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
로마 사람들은 유서를 작성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그것을 공식적으로 개봉하지 못하도록 인(印)을 쳐 놓았었다.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이 책은 이 땅을 그 합당한 상속자로서의 그분께 기업으로 물려 주었다. 6장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은 그 인을 떼시고, 그때부터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2) 거부한 자들에 대한 보복
- 인(印)
첫번째로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적그리스도가 흰 말을 타고 나타난다(2절). 이 땅에선 화평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서로 죽이기 시작한다(4절). 갑자기 죄악이 극에 달하고 죽어가는 세상의 체계에 속한 모든 것이 넘어진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6절)라는 구절에서 지적되었다시피 큰 기근이 엄습한다. 바꿔 말해 밀한 되 값이 그 날 하루의 품삯과 맞먹는다는 것이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부유한 사람들의 몫으로서 손을 대면 안 되게 되어있었다(6절). 죽음이 세상에 범람하고 세상 인구의 1/4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8절) 죽임을 당한다. 전세계적으로 재난이 휩쓰는 이 3년 반의 기간 동안에는 ”큰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울”(12-14절) 것이다.
- 나팔
이 마지막 때의 심판에 관한 예언은 8장에서 계속 묘사되고 심판을 알리는 첫번째 나팔 소리가 울리고 나면 ”피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7절) 없어지고, 두번째 천사가 그의 나팔을 불면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어지더라”(8-9절).
이 일련의 사건들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운석(隕石)들에 의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신선한 물이 심하게 오염된다.
”물들의 삼분의 일이 쑥이 되매 그 물들이 쓰게 됨을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더라”
네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하나님께서 때를 심판하신다.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췸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온 우주가 쓰러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 다음 나팔 소리는 더 나쁜 일을 알린다. 여섯번째 나팔소리와 함께, 불과 연기와 유황에 의해 인구의 1/3이 죽음을 당한다(9:18). 사람들은 그래도 여전히 귀신에게 경배하면서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에 대해 회개하려 하지 않는다(20-21절).
(3) 세상 경제의 종말
18장에 이르러 사단이 세워 놓은 모든 악의 체계는 깨끗이 제거된다.
”그[세상의 체계]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18:9).
그 문화와 경제와 종교와 정부를 포함하여 세상의 체계가 모두 사라지면 그때까지 살아 있던 불신자들은 절망에 빠져 울부짖을 것이다. 심판이 다가오면 ”땅의 상고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기명이요 값진 나무와 진유와 철과 옥석으로 만든 각종 기명이요 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과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치부한 이 상품의 상고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가로되 화 있도다 화있도다 큰 성이여”(11-16절) 할 것이다.
그때는 세상의 음악도 그친다.
”또 거문고타는 자와 풍류하는 자와 퉁소부는 자와 나팔부는 자들의 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 물론 어떠한 세공업자든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보이지 아니하고 또 맷돌소리가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고”(22절).
(4) 승리의 음성
세상의 체계가 파괴되어 가고 있을 때에 하늘에서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릴 것이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계 11:15).
세상은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7장 31절은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 말한다. 세상과 더불어서는 재미조차 누리지 말자. 세상은 우리의 적이고 우리는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세상은 죄악을 선동하고 우리는 세상과는 다른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이긴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행동하라.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당신은 자멸해 가고 있는 세상적 체계의 일부인 셈이다. 당신은 이 세상의 신인 사단에게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극이다. 예수를 믿고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하신 일을 인정할 때, 그분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수 있음을 깨달으라. 그분은 세상의 악한 체계에서 당신을 이끌어 내어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약속이다.
확인 질문
1. 인간이 자신의 타고난 권리를 어떻게 세상에게 팔았는지 설명하라.
2. 세상을 지배하는 체계가 비록 지금은 사단의 관장하에 있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이 언젠가 어떤 일을 하실 것으로 알고 계시는가?
3. 사단은 창세기 4장에 나타난 진리를 제일 처음 어떻게 방해했는가?
4. 모든 거짓 종교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참예하는 것에 관해 뭐라고 주장하는가?
5. 사단은 무엇을 파괴하기 위해서 범죄와 논쟁과 폭동과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는가?
6. 사단은 세상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가? 설명하라.
7. 세상의 체계는 어떤 일을 하라고 우리를 선동하는가?
8. 한때 죄의 종이었던 인간이 그것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인이 되면 무엇을 섬기는가?(롬 6:17-18)
9.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삶을 정결히 지키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10. 요한일서 2장 16절의 문맥상 ”정욕”과 ”육신”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1. 육신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갈5:19-21)
12. 갈라디아서 5장 21절에서 볼 때, 육체의 일에 습관적으로 탐닉하는 사람이 절대 유업으로 상속받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13. 안목의 정욕이 아간과 다윗을 어떤 곤경에 빠뜨렸는지 설명하라.
14. ”이생의 자랑”의 성격을 드러내는 사람에 대해 묘사하라(16절).
15. 「육욕」과 「탐욕」과 「교만」의 차이를 설명하라.
16. 세상은 왜 파괴되어 가고 있는가?
17. 세상의 그 파멸의 마지막 단계는 언제 도래하는가?
18.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6장에 언급된 책에서 인을 떼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는가?
19. 세상의 체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감에 따라 하늘에서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가?(계 11:15)
원리에 대한 재확인
1.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대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디도서 2장 14절 말씀으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는가? 그 말씀은 사랑의 그 과단성 있는 행위에 대해 우리가 진심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디도서 2장 11-14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당신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의 목적에 얼마나 잘 부합되는지 평가해 보라.
2. 세속적인 매체를 통하여 세상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도록 우리의 환경이 조건지어졌음을 알고, 우리의 눈과 귀로 접하게 되는 것들을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평가해야 한다. TV는 당신으로 하여금 인간 관계와 물질주의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하지는 않는가? 그것은 매우 점진적으로 그리고 교묘하게 영향을 끼쳐, 당신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너무 세속적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기는 하되 신자는 아닌 사람으로 인정되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에 근거하여, 세속주의의 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진리의 등대로서 밝게 빛을 비춰 주고 있는지 검토해 보라.
3. 당신은 일시적으로만 진정될 뿐인 관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영원의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엡 5:10)를 계속하여 시험해 보고 있는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흠뻑 젖어들게 하는 일, 그분의 영감을 받은 성경 말씀에 따라 성령께서 당신을 인도하게 하시는 일에 전념하라.
4. 안목의 정욕은, 성 개방을 지향하고 물질주의적인 우리 사회의심각한 문제거리이다. 당신이 배우자가 아닌 어떤 사람을 갈망하는 죄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욥이 욥기 31장 1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눈과 계약을 맺으라. 부정한 관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정직과 신뢰에 바탕을 둔 건전한 관계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깨달으라. 이성과 의사 소통을 할 때는 오직 그 상대방의 눈만을 바라보는 데 집중하라. 물질적인 소유가 당신으로 하여금 정욕을 품게 만든다면, 마태복음 6장 19-33절 말씀을 묵상하고 시각의 초점을 다시 맞추라.
5. 하나님께서 들어와도 좋다고 은혜로이 허락하신 영원한 나라의 시민이 된 것에 대해 그분을 찬양하라.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임할 대환란의 끔찍한 때에 당신을 보존해 주실 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 8-17절을 묵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