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 그 대립적 관계와 해결책
a.급진적 해결
급진적 해결(radikale Lösung)은 단지 궁극적인 것만을 고려함으로 거기서는 궁극 이전의 것과 완전한 단절이 있을 뿐이다.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은 상호 배타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궁극 이전의 것의 파괴자요 원수가 되며, 궁극 이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적한다. 그리스도는 세계가 성숙하여 불태워 지도록 넘겨지는 것의 표징이다. 여기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모든 것은 심판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두 가지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편이냐,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편이 아닌 자는 나를 배반하는 자이다.”(마12:30) 모든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궁극 이전의 것은 모두 죄이며 부정이다. 다가오는 종말에 직면하여 기독교인에게는 단지 궁극의 말씀과 궁극의 행동이 존재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생긴 것은 이미 그 중요성을 잃고 기독교인은 거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서는 세계의 모든 질서는 붕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전부가 아니면 무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도 여기서는 변하여 모든 저항을 경멸하고 분쇄하는 냉혹한 율법이 된다.
b.타협적 해결
다른 하나의 해결은 타협이다. 여기서는 궁극적인 말씀은 원칙적으로 궁극 이전의 말로 부터 분리된다. 궁극 이전의 것은 자기 안에 존재의 권리를 갖고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위협당하거나 협박당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존속하고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하나님이 만든 이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행해져야 한다. 더우기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 궁극적인 것은 일상적인 것 저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미 존재한 것들에 대한 영원한 의인으로서, 또 이것은 기존하는 사물에 부담이 되는 고소로 부터 형이상학적인 성화(聖化)로서 존재한다. 자유로운 자비의 말씀은 지금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가치를 확증하는 모든 궁극 이전의 것을 지배하는 은총의 율법이 되었다.
c.예수 그리스도의 해결책
위에 제시한 이 두 개의 해결책은 똑같이 극단적이고 똑같이 진리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상호배타적인 관계에서 고려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똑같이 정당하고 필연적인 사상을 허용할 수 없는 추상화(Verabsolutierungen)이다. 급진적인 해결은 모든 것의 종말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협적인 해결은 창조주와 보존자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속, 시간과 영원은 풀 수 없는 투쟁 가운데서 서로 대립하고, 그 결과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은 해체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붕괴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삶은 급진주의적인 것도 타협주의 적인 것도 아니다. 이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요성 앞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의 중요성이 이 두 개의 해결책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준다. 순수한 기독교 자체의 이념조차도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체의 이념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극단주의도 타협주의도 존재하지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이 존재한다. 기독교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계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또 인간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신인(神人, Gott-menschen)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하고 그만이 현실적이고,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이 세계는 마지막 날을 위해 성숙할 때까지 보존될 것이다.
극단주의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 들일 수가 없다. 그는 창조된 세계와 불화하고, 대심문관의 이야기 가운데서 급진적인 예수상을 만들어 내는 이반 카라마조프적인 인물이다.
타협은 언제나 궁극적인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생긴다. 기독교적 타협정신은 오직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새긴다. 궁극적인 것을 단념하고 전혀 보잘 것 없는 세계의 지혜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열려진 태도이고 기독교인의 사랑이라는 사고 방식이 등장한다.
극단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실적인 것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똑같이 반그리스도적(christuswidrig)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대립에서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에 대한 문제는 극단주의에서도 타협주의에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결정되고 해답이 주어진다. 오직 그에게서만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가 해결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하나님을 믿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곳에서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되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되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육신의신학,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수립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 생활에 대한 사고방식에서도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학에만 기초를 둔 기독교 윤리는 쉽게 타협접적 해결로 빠지며, 단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근거를 두고 수립된 윤리는 극단주의나 열광주의(Schwärmerei)로 빠진다. 오직 이 세 개의 통일에서 대립이 해소된다.
예수 그리스도, 인간 그 자체(der Menschen)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의 현실 가운데 들어온 것을 뜻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타락한 피조계에 대한 최종적인 유죄판결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궁극 이전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러나 궁극적인 것의 심판에 굴복하는 궁극 이전의 것을 위한 은총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죽음에 종말을 고하고 삶에 새로운 창조를 불어 넣고, 새 생명을 선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했으나, 인간은 그의 죽음의 한계선에 이르기까지는 궁극 이전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간 세계와 십자가가 서 있는 세계에 머문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적으로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되는 메시지 가운데서 우리와 만난다. 기독교인의 삶은 성육신의 능력에 의하여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고 , 부활의 능력 가운데서 사는 삶을 뜻한다. 그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이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다.
C.길 예비
1.말씀을 위한 길의 예비
말씀이 선포되기 위해 즉 궁극적인 것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즉■다시 말하면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은 은총의 도래를 위하여 필요한 길 예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궁극 이전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의인을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며, 빵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 안에 서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을 알고 궁극적인 것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이 궁극 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그것이 궁극 이전의 것(ein Vor-Letztes)이다. 은총의 도래는 궁극적인 것이다.
궁극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극단주의의 위험과, 궁극적인 것을 경시하는 타협주의의 함정,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얻지 못한 자들의 상황 즉 은총이 자기에게 미치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상황. 이러한 것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길 예비에 관하여, 그리고 궁극 이전의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노예에게 자유를, 권리 상실자에게 권리를, 굶주린 자에게 빵이 주어져야 하고, 또 모든 가치가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와 교회사의 증언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 하는 것은 사회개혁과 같은 특정한 바람직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문제만은 아니며,오히려 모든 것은 길 예비라는 행위가 하나의 영적인 현실이라는 사실 위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조건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의 은혜로운 도래는 오직 영적인 길 예비 뒤에 따라온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것 때문에 궁극 이전의 것이 주목되고 힘을 얻게 되어야하는 것이 길 예비에 속하는 일이다. 길 예비란 참회를 뜻한다(마3;1 이하). 참회는 구체적인 전환을 말하며 행위를 필요로 한다. 길 예비가 목표로 하는 마음의 상태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인간존재와 선한 존재(Menschsein und Gutsein)라는 두 개의 규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은총으로부터 의롭게 되어지기 위한 궁극 이전의 것이다.
2.주님의도래
오직 주님의 도래가 인간 존재와 선한존재의 완성을 가져 온다. 도래하는 주님 자신만이 길을 예비할 수 있고, 또 그가 인간을 전혀 새로운 인간 존재와 선한 존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길 예비의 목표는 바로 우리 자신이 결코 길을 예비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는데서 성립되며, 또 길 예비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회개에로 인도한다고 하는 점이 명백히 언급되어야 한다.
길 예비는 모든 방법과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이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이해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길 예비는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궁극 이전의 것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지, 자기의 힘, 자기의 사랑으로 오며, 또 그는 아무리 큰 장애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기를 원하며 , 그는 자기의 길을 예비하는 분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리고 실제로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시는 분에 의해서 그의 길을 만들도록 해야하며, 또 그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직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길을 예비한다.
a.급진적 해결
급진적 해결(radikale Lösung)은 단지 궁극적인 것만을 고려함으로 거기서는 궁극 이전의 것과 완전한 단절이 있을 뿐이다.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은 상호 배타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궁극 이전의 것의 파괴자요 원수가 되며, 궁극 이전의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적한다. 그리스도는 세계가 성숙하여 불태워 지도록 넘겨지는 것의 표징이다. 여기에는 어떤 구별도 없다. 모든 것은 심판대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두 가지 구별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편이냐,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의 편이 아닌 자는 나를 배반하는 자이다.”(마12:30) 모든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궁극 이전의 것은 모두 죄이며 부정이다. 다가오는 종말에 직면하여 기독교인에게는 단지 궁극의 말씀과 궁극의 행동이 존재할 뿐이다. 이 세계에서 생긴 것은 이미 그 중요성을 잃고 기독교인은 거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 세계는 멸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서는 세계의 모든 질서는 붕괴 될 것이다. 여기서는 전부가 아니면 무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말씀도 여기서는 변하여 모든 저항을 경멸하고 분쇄하는 냉혹한 율법이 된다.
b.타협적 해결
다른 하나의 해결은 타협이다. 여기서는 궁극적인 말씀은 원칙적으로 궁극 이전의 말로 부터 분리된다. 궁극 이전의 것은 자기 안에 존재의 권리를 갖고 궁극적인 것에 의하여 위협당하거나 협박당하지 않는다. 세계는 여전히 존속하고 종말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궁극 이전의 것은 하나님이 만든 이 세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행해져야 한다. 더우기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평가 받아야 한다. 궁극적인 것은 일상적인 것 저편에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이미 존재한 것들에 대한 영원한 의인으로서, 또 이것은 기존하는 사물에 부담이 되는 고소로 부터 형이상학적인 성화(聖化)로서 존재한다. 자유로운 자비의 말씀은 지금은 그것을 부정하고 그 가치를 확증하는 모든 궁극 이전의 것을 지배하는 은총의 율법이 되었다.
c.예수 그리스도의 해결책
위에 제시한 이 두 개의 해결책은 똑같이 극단적이고 똑같이 진리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들은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상호배타적인 관계에서 고려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것이다.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똑같이 정당하고 필연적인 사상을 허용할 수 없는 추상화(Verabsolutierungen)이다. 급진적인 해결은 모든 것의 종말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타협적인 해결은 창조주와 보존자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창조와 구속, 시간과 영원은 풀 수 없는 투쟁 가운데서 서로 대립하고, 그 결과 하나님 자신의 통일성은 해체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붕괴된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삶은 급진주의적인 것도 타협주의 적인 것도 아니다. 이 두 개의 개념을 가지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요성 앞에서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그의 중요성이 이 두 개의 해결책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밝혀준다. 순수한 기독교 자체의 이념조차도 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 자체의 이념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하나님의 현실과 인간의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기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극단주의도 타협주의도 존재하지않고 하나님과 인간의 현실이 존재한다. 기독교 자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계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또 인간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배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이념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신인(神人, Gott-menschen)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재하고 그만이 현실적이고,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이 세계는 마지막 날을 위해 성숙할 때까지 보존될 것이다.
극단주의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 들일 수가 없다. 그는 창조된 세계와 불화하고, 대심문관의 이야기 가운데서 급진적인 예수상을 만들어 내는 이반 카라마조프적인 인물이다.
타협은 언제나 궁극적인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생긴다. 기독교적 타협정신은 오직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된다는 것에 대한 증오에서 새긴다. 궁극적인 것을 단념하고 전혀 보잘 것 없는 세계의 지혜에 순응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세상에 대한 열려진 태도이고 기독교인의 사랑이라는 사고 방식이 등장한다.
극단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실적인 것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는 똑같이 반그리스도적(christuswidrig)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대립에서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 그리스도에게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삶에 대한 문제는 극단주의에서도 타협주의에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결정되고 해답이 주어진다. 오직 그에게서만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 사이의 관계가 해결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한 하나님을 믿게 된다. 우리가 인간이 되는 곳에서 우리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되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육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되고,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분리시키는 것보다 더한 오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육신의신학, 십자가의 신학, 부활의 신학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수립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며,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 생활에 대한 사고방식에서도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신학에만 기초를 둔 기독교 윤리는 쉽게 타협접적 해결로 빠지며, 단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만 근거를 두고 수립된 윤리는 극단주의나 열광주의(Schwärmerei)로 빠진다. 오직 이 세 개의 통일에서 대립이 해소된다.
예수 그리스도, 인간 그 자체(der Menschen)는 하나님이 피조 세계의 현실 가운데 들어온 것을 뜻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것을 뜻한다.
십자가에 달린 분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타락한 피조계에 대한 최종적인 유죄판결을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극적인 것은 십자가에서 모든 궁극 이전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러나 궁극적인 것의 심판에 굴복하는 궁극 이전의 것을 위한 은총으로서 현실적인 것이다.
부활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사랑과 능력으로 죽음에 종말을 고하고 삶에 새로운 창조를 불어 넣고, 새 생명을 선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물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 했으나, 인간은 그의 죽음의 한계선에 이르기까지는 궁극 이전의 세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간 세계와 십자가가 서 있는 세계에 머문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전적으로 은총으로만 죄인이 의롭게 되는 메시지 가운데서 우리와 만난다. 기독교인의 삶은 성육신의 능력에 의하여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고 , 부활의 능력 가운데서 사는 삶을 뜻한다. 그것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이는 다른 것도 존재할 수 없다.
C.길 예비
1.말씀을 위한 길의 예비
말씀이 선포되기 위해 즉 궁극적인 것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위해 궁극 이전의 것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즉■다시 말하면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은 은총의 도래를 위하여 필요한 길 예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궁극 이전의 것이다.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는 것이 그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의인을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며, 빵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 안에 서 있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을 알고 궁극적인 것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자에게는 이 궁극 이전의 것이 궁극적인 것과 관계되어 있다. 그것이 궁극 이전의 것(ein Vor-Letztes)이다. 은총의 도래는 궁극적인 것이다.
궁극이전의 것을 부정하는 극단주의의 위험과, 궁극적인 것을 경시하는 타협주의의 함정,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얻지 못한 자들의 상황 즉 은총이 자기에게 미치기까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상황. 이러한 것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길 예비에 관하여, 그리고 궁극 이전의 것에 관하여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노예에게 자유를, 권리 상실자에게 권리를, 굶주린 자에게 빵이 주어져야 하고, 또 모든 가치가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명백한 오해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신약성서와 교회사의 증언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길을 예비 하는 것은 사회개혁과 같은 특정한 바람직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문제만은 아니며,오히려 모든 것은 길 예비라는 행위가 하나의 영적인 현실이라는 사실 위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조건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도래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의 은혜로운 도래는 오직 영적인 길 예비 뒤에 따라온다. 다가오는 궁극적인 것 때문에 궁극 이전의 것이 주목되고 힘을 얻게 되어야하는 것이 길 예비에 속하는 일이다. 길 예비란 참회를 뜻한다(마3;1 이하). 참회는 구체적인 전환을 말하며 행위를 필요로 한다. 길 예비가 목표로 하는 마음의 상태가 적극적으로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인간존재와 선한 존재(Menschsein und Gutsein)라는 두 개의 규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은 은총으로부터 의롭게 되어지기 위한 궁극 이전의 것이다.
2.주님의도래
오직 주님의 도래가 인간 존재와 선한존재의 완성을 가져 온다. 도래하는 주님 자신만이 길을 예비할 수 있고, 또 그가 인간을 전혀 새로운 인간 존재와 선한 존재로 인도하며, 그리스도를 위한 모든 길 예비의 목표는 바로 우리 자신이 결코 길을 예비할 수 없다는 인식에 도달하는데서 성립되며, 또 길 예비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우리를 회개에로 인도한다고 하는 점이 명백히 언급되어야 한다.
길 예비는 모든 방법과는 달리 그리스도 자신이 그 길을 가야한다는 것을 우리가 명백히 이해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길 예비는 궁극적인 것으로부터 궁극 이전의 것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의지, 자기의 힘, 자기의 사랑으로 오며, 또 그는 아무리 큰 장애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기를 원하며 , 그는 자기의 길을 예비하는 분이라는 사실, 그것이, 그리고 실제로 오직 그것만이, 우리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만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시는 분에 의해서 그의 길을 만들도록 해야하며, 또 그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를 기다리기 때문에 또 우리는 그가 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직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길을 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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