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유럽신학은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덱거와 불트만으로부터 떠나서 지금은 신마르크스주의에 와 있다. 또는 접근하고 있다⌋고 우리는 대답을 해야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 진술한 바 내용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진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금의 유럽신학계에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보수신앙과 그것에 입각한 보수주의 신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지 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유럽에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이라고 하는 신학자들의 모두가 성경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를 찬동하고 있으며 특히 어떤 인사의 말과 같이 그들의 혈관 속에 칼 바르트(Karl Bart)가 주사바늘로 주입한 변증법적 사상 요소들이 계속 순환하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구원사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이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도 ⌈역사적 비평학⌋을 수용하고 있으며 마르틴 카렐(Martin Kahler)과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ke)등 서독 신학자들 중에서 경건주의 경향을 보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유럽에 아직도 ⌈보수신앙⌋이 존재하고 보수주의 신학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성서학교⌋(Bible missions school)운동을 통하여 유럽에 생겨난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 가운데서 미약하나마 보존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교들이 세워질 때 미국 교회의 세대주의 영향을 적지않게 받는 경우도 있고, 또 부흥사 빌리 그레함(Billy Geaham)의 대부흥집회의 결과로서 전도와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 유럽의 Biebelmissionsschule 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이 유럽교회를 위하여 열심있는 목회자를 양성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교육자와 해외로 갈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은 치하하여 마지 않을 일이지만 이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의 수준은 높은 편이 못되며, 따라서 현금의 유럽신학계에서 진행중인 신학적 토론과 논쟁 그리고 연구모임에서 전혀 소외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유럽신학, 특히 현금의 ⌈서독신학⌋은 폐쇄된 ⌈저명 인사들의 회합⌋ 같아서 매우 국제성을 상실한 “산골신학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은 오늘날의 ⌈서독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발언에 대하여 별로 흥미없는 일로 묵살해 버린다는 것과 똑 같은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일 경우에 신학적으로 ⌈無味하다⌋고 하여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것 등에서 나타나며 증명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외국신학자들이지만 라인흘드 니버나 폴 틸리히와 같은 독일 이름을 가진 신학자들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보인다고 하는 “재미있는 면”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신학이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신학적 폐쇄성⌋을 즐기며 저명인사들의 모임으로 유지되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의문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첫째로 유럽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이 되므로,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인기와 여론에 편승하여 조석으로 변하는 ⌈유럽신학⌋으로 화해가고 있다는 데 대한 좋은 원인 설명이 된다고 본다. 둘째로 유럽신학이 유럽인과 독일인 외의 신학자들에게 그들의 ⌈신학적 회합⌋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간적으로 너무 협소한 신학, 그러니까 정말로 국제성이 없는 “산골신학”을 운영하고 있다는 비평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계는 일찌기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와 관련하여 말한 바대로 과학의 발달과 교통방편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일일 생활권⌋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펼쳐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지상에서 서독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유럽이 세계의 전부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신학자들은 오늘날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빈번한 정보교환과 신학적 토론 및 공동적 학문 연구의 기회들을 마련하는 일을 힘씀으로써만 과거와 같이 ⌈유럽신학⌋의 우위성을 계속 세계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를 도외시함으로 기독교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상실하여 유럽신학이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면 유럽 외의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자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유럽신학은 ⌈공간적 연속성⌋을 상실하여 협소한 지역사회의 신학, “산골 신학”으로 떨어져 버릴 날도 멀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는 제임스 로버츠(James D.Roberts;1927-)와 제임콘(James H.Cone;1938-)과 같은 흑인신학자들이 나타나, ⌈흑인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이 한창이다. 『인간적 희망의 신학』을 써낸 브라질의 신학자 루벰 알베스(Rubem Alves; 1933-)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로 끊나는 신학”은 더이상 필요가 없고 “세계의 혁명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신학”을 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선을 아시아로 돌릴 경우에, 일본의 신학자 기다모리 가즈오가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영어로 번역되어(1951년) 널리 국제적으로 읽히기까지 하였고, 또한 몇년전에 선교 백주년을 경축하게 된 피선교국교회인 한국교회에서도 신학적 성숙도를 보여 윤성범 교수의 『한국적 신학』(1972년)이 한국 사상의 특징을 담고서 나왔으며 보수주의측에서는 한국교회의 경건한 신앙을 소재로하는 저자의 『새벽기도의 신학』(1974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타국, 타대륙의 신학자들과 신학의 동향에 대하여 현금의 유럽신학자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결론은 이것이다. 만일 ⌈유럽신학⌋이 1980년대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신학을 한다면, 그리고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속에서 공존하는 신학의 동료들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교육과 계몽적 지도의 대상인양 착각하는 공간적 연속성이 없는 ⌈산간벽지 신학⌋을 계속하여 한다면 그것은⌈유럽신학⌋ 자체를 위하여 매우 불행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유럽신학⌋은 협소한 공간에 존재하는 ⌈역사와 시간의 뿌리⌋가 없는 나무 같아서 곧 고갈하며 몰락할 위험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칼 헨리 박사의 말과 같이 차라리 성경을 읽으면서 본국에 머물러 있는 편이 수년동안 여비와 학비를 들여가면서 서독에 신학을 배우려고 유학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힘쓰는 ⌈경건주의 신앙⌋을 그 체질로 하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서독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신학인들이 “발 붙일 곳”이 그리많지 않다는 것도 한번쯤 고려할만하다.
⌈유럽신학은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덱거와 불트만으로부터 떠나서 지금은 신마르크스주의에 와 있다. 또는 접근하고 있다⌋고 우리는 대답을 해야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 진술한 바 내용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진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금의 유럽신학계에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보수신앙과 그것에 입각한 보수주의 신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지 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유럽에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주의적이라고 하는 신학자들의 모두가 성경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를 찬동하고 있으며 특히 어떤 인사의 말과 같이 그들의 혈관 속에 칼 바르트(Karl Bart)가 주사바늘로 주입한 변증법적 사상 요소들이 계속 순환하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구원사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이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도 ⌈역사적 비평학⌋을 수용하고 있으며 마르틴 카렐(Martin Kahler)과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ke)등 서독 신학자들 중에서 경건주의 경향을 보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유럽에 아직도 ⌈보수신앙⌋이 존재하고 보수주의 신학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성서학교⌋(Bible missions school)운동을 통하여 유럽에 생겨난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 가운데서 미약하나마 보존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교들이 세워질 때 미국 교회의 세대주의 영향을 적지않게 받는 경우도 있고, 또 부흥사 빌리 그레함(Billy Geaham)의 대부흥집회의 결과로서 전도와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이 유럽의 Biebelmissionsschule 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이 유럽교회를 위하여 열심있는 목회자를 양성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교육자와 해외로 갈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은 치하하여 마지 않을 일이지만 이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의 수준은 높은 편이 못되며, 따라서 현금의 유럽신학계에서 진행중인 신학적 토론과 논쟁 그리고 연구모임에서 전혀 소외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유럽신학, 특히 현금의 ⌈서독신학⌋은 폐쇄된 ⌈저명 인사들의 회합⌋ 같아서 매우 국제성을 상실한 “산골신학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은 오늘날의 ⌈서독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발언에 대하여 별로 흥미없는 일로 묵살해 버린다는 것과 똑 같은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신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일 경우에 신학적으로 ⌈無味하다⌋고 하여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것 등에서 나타나며 증명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외국신학자들이지만 라인흘드 니버나 폴 틸리히와 같은 독일 이름을 가진 신학자들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보인다고 하는 “재미있는 면”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신학이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신학적 폐쇄성⌋을 즐기며 저명인사들의 모임으로 유지되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의문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첫째로 유럽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이 되므로,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인기와 여론에 편승하여 조석으로 변하는 ⌈유럽신학⌋으로 화해가고 있다는 데 대한 좋은 원인 설명이 된다고 본다. 둘째로 유럽신학이 유럽인과 독일인 외의 신학자들에게 그들의 ⌈신학적 회합⌋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은 공간적으로 너무 협소한 신학, 그러니까 정말로 국제성이 없는 “산골신학”을 운영하고 있다는 비평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세계는 일찌기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와 관련하여 말한 바대로 과학의 발달과 교통방편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일일 생활권⌋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신학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펼쳐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지상에서 서독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유럽이 세계의 전부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신학자들은 오늘날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는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빈번한 정보교환과 신학적 토론 및 공동적 학문 연구의 기회들을 마련하는 일을 힘씀으로써만 과거와 같이 ⌈유럽신학⌋의 우위성을 계속 세계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를 도외시함으로 기독교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상실하여 유럽신학이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면 유럽 외의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자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유럽신학은 ⌈공간적 연속성⌋을 상실하여 협소한 지역사회의 신학, “산골 신학”으로 떨어져 버릴 날도 멀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는 제임스 로버츠(James D.Roberts;1927-)와 제임콘(James H.Cone;1938-)과 같은 흑인신학자들이 나타나, ⌈흑인 신학⌋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이 한창이다. 『인간적 희망의 신학』을 써낸 브라질의 신학자 루벰 알베스(Rubem Alves; 1933-)는 “세계를 해석하는 일로 끊나는 신학”은 더이상 필요가 없고 “세계의 혁명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는 신학”을 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선을 아시아로 돌릴 경우에, 일본의 신학자 기다모리 가즈오가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영어로 번역되어(1951년) 널리 국제적으로 읽히기까지 하였고, 또한 몇년전에 선교 백주년을 경축하게 된 피선교국교회인 한국교회에서도 신학적 성숙도를 보여 윤성범 교수의 『한국적 신학』(1972년)이 한국 사상의 특징을 담고서 나왔으며 보수주의측에서는 한국교회의 경건한 신앙을 소재로하는 저자의 『새벽기도의 신학』(1974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타국, 타대륙의 신학자들과 신학의 동향에 대하여 현금의 유럽신학자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결론은 이것이다. 만일 ⌈유럽신학⌋이 1980년대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신학을 한다면, 그리고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속에서 공존하는 신학의 동료들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교육과 계몽적 지도의 대상인양 착각하는 공간적 연속성이 없는 ⌈산간벽지 신학⌋을 계속하여 한다면 그것은⌈유럽신학⌋ 자체를 위하여 매우 불행스러운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유럽신학⌋은 협소한 공간에 존재하는 ⌈역사와 시간의 뿌리⌋가 없는 나무 같아서 곧 고갈하며 몰락할 위험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칼 헨리 박사의 말과 같이 차라리 성경을 읽으면서 본국에 머물러 있는 편이 수년동안 여비와 학비를 들여가면서 서독에 신학을 배우려고 유학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힘쓰는 ⌈경건주의 신앙⌋을 그 체질로 하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서독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신학인들이 “발 붙일 곳”이 그리많지 않다는 것도 한번쯤 고려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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