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틀에 박힌 성경해석 =
다음으로 필자가 종종 복음주의(근본주의)자들과 함께 만나게 될 때 경험
하는 것은 절대적 신앙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용납되어지는 반지성주의 혹
은 현대적 의미의 바리새주의적 경향이다. 성서는 그 자체로 신학적 문서
이다. 창세기만 하더라도 1장과 2장이 각기 다른 신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본문들이다. 이것을 문자영감설, 성서무오설-이러한 입장으니 종교개혁
이후 구정통주의라고 불리우는 개신교 전통속에서 생겨난 것이다.-에 의
지하여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 불행한 일이 되고 만다. 자료설을 인정한다
고 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자가 3년가까이 우성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확증한 사실
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시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성의 침묵을 강요당하
는 불쌍한 현대신앙인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인간의 생득적 능력을 - 이성 및 감성- 포기하는
것은 종교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예
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도상에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이셨다는 성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위의 본문은 제사장문서(P문서)에 속한 부분이다. P 문서는 하
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능력을 고백하
려는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실상 메추라기 사건은 계절
적 이동을 하는 도상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메추라기를 손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경우이며 또한 만나사건은 하늘에서 내린 이슬과 나무가지의 진
액이 함께 엉켜져서 먹거리로 만들어진 경우였다. 바로 P 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 사건을 다스리고 주재하신다는 자신의 신학적 고
백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더욱이 P 문서 기
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 사건을 다스리고 주재하신다는 자신의 신학
적 고백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더욱이 P 문
서는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맥략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창조와 진화를 양자택일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보수적 창
조과학적 신앙태도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진화
론이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성되었는가 하는 "어떻게" 의 물
음의 영역속에 있는 것이며 창조신앙이란 이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
어떤 것이고 무는 아닌가 하는 물음과 관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
로 "왜"의문제나 "어떻게"의 문제는 각자 물음의 영역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는 이유로 상호 배척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진화론은 이 세계의 "왜" 의 물음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반면에 '창조
론'은 그것이 이미 신학적(신앙고백적) 문서에 기초되어 있기에 "어떻
게"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러한 두 물음은 인간의 당면문제와 미래적 발전을 위해서 상호 보충되
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성서의 창조본문을 마치 과학 교과
서로 읽어 나가려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놀라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러한 반지성적인 신앙열정은 때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또는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 종종 연결되어 나타나기도 한다."예수=천당" "부다=지옥"
이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교리와 조금 다
르다고 하는 이유로-이것은 특별히 연옥설 및 조상숭배에 대해 관용적
이해를 갖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태도인데- 다른
교파를 이단시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심지어 보수 지향적인
어느 큰 교회에서는 다른 교파에서 세례받은것 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교회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은뒤 다시 세례를 베푼다고 하는 이
야기도 들리는 지경이고 보면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율법주의적인지 알
수 있다.
예수계서 심지어 하나님은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
리신다고 말씀하셨고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했으며 바리새
인들의 의로움보다 커야만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역설하셨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신앙을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너와 나를 나누
고 우리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종교의 사
회 통합적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리의 영역은 인식(율법)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인식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의 고백 신조적 갈등문제 때문에 비롯된 30년 전쟁(1618-1648) 의 종료
수 유럽대륙에서는 교리중심의 정통주의(근본주의)사조가 급격하게 퇴조
하고 머리의 종교가 아닌 마음의 종교로서의 경건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음
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필자가 종종 복음주의(근본주의)자들과 함께 만나게 될 때 경험
하는 것은 절대적 신앙이란 이름으로 스스로 용납되어지는 반지성주의 혹
은 현대적 의미의 바리새주의적 경향이다. 성서는 그 자체로 신학적 문서
이다. 창세기만 하더라도 1장과 2장이 각기 다른 신학자에 의해서 쓰여진
본문들이다. 이것을 문자영감설, 성서무오설-이러한 입장으니 종교개혁
이후 구정통주의라고 불리우는 개신교 전통속에서 생겨난 것이다.-에 의
지하여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 불행한 일이 되고 만다. 자료설을 인정한다
고 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자가 3년가까이 우성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확증한 사실
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시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성의 침묵을 강요당하
는 불쌍한 현대신앙인들을 올바르게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인간의 생득적 능력을 - 이성 및 감성- 포기하는
것은 종교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 예
를 들어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도상에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이셨다는 성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위의 본문은 제사장문서(P문서)에 속한 부분이다. P 문서는 하
나님께서 자연을 지배하시고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능력을 고백하
려는 신학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다. 실상 메추라기 사건은 계절
적 이동을 하는 도상에서 지쳐 쓰러져 있는 메추라기를 손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경우이며 또한 만나사건은 하늘에서 내린 이슬과 나무가지의 진
액이 함께 엉켜져서 먹거리로 만들어진 경우였다. 바로 P 문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 사건을 다스리고 주재하신다는 자신의 신학적 고
백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더욱이 P 문서 기
자는 하나님께서 이런 자연 사건을 다스리고 주재하신다는 자신의 신학
적 고백을 피력한 것이었다. 이것은 신앙고백의 문제이다. 더욱이 P 문
서는 지성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맥략에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창조와 진화를 양자택일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보수적 창
조과학적 신앙태도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진화
론이란 이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생성되었는가 하는 "어떻게" 의 물
음의 영역속에 있는 것이며 창조신앙이란 이 세계가 "왜" 존재하는가,
어떤 것이고 무는 아닌가 하는 물음과 관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
로 "왜"의문제나 "어떻게"의 문제는 각자 물음의 영역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하는 이유로 상호 배척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진화론은 이 세계의 "왜" 의 물음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반면에 '창조
론'은 그것이 이미 신학적(신앙고백적) 문서에 기초되어 있기에 "어떻
게"의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책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러한 두 물음은 인간의 당면문제와 미래적 발전을 위해서 상호 보충되
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성서의 창조본문을 마치 과학 교과
서로 읽어 나가려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놀라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이러한 반지성적인 신앙열정은 때로는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또는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다른 교파에 속한 사람들을 비판하는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 종종 연결되어 나타나기도 한다."예수=천당" "부다=지옥"
이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옛말이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교리와 조금 다
르다고 하는 이유로-이것은 특별히 연옥설 및 조상숭배에 대해 관용적
이해를 갖고 있는 천주교에 대한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태도인데- 다른
교파를 이단시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심지어 보수 지향적인
어느 큰 교회에서는 다른 교파에서 세례받은것 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며
자기 교회에서 일정기간 교육을 받은뒤 다시 세례를 베푼다고 하는 이
야기도 들리는 지경이고 보면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율법주의적인지 알
수 있다.
예수계서 심지어 하나님은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에게도 햇빛과 비를 내
리신다고 말씀하셨고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라고 했으며 바리새
인들의 의로움보다 커야만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역설하셨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신앙을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수록 너와 나를 나누
고 우리를 형성하지 못하는,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종교의 사
회 통합적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교리의 영역은 인식(율법)의 영역이다. 그러나 그 인식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
의 고백 신조적 갈등문제 때문에 비롯된 30년 전쟁(1618-1648) 의 종료
수 유럽대륙에서는 교리중심의 정통주의(근본주의)사조가 급격하게 퇴조
하고 머리의 종교가 아닌 마음의 종교로서의 경건주의 운동이 전개되었음
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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