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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이야기

몰트만의 성령이해 - Ⅲ. 성령의 사역 2.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경험케 하는 영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09.03.17|조회수44 목록 댓글 0
2.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경험케 하는 영

1) 폭력과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자 하나님 경험 : 엑소두스와 부활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가지는 첫 경험은 삶에의 측량할 수 없는 해방의 경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그의 해방으로 경험하며 그의 자유를 경험하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한다. 하나님 경험과 자유의 경험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자유를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유를 사랑한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가진 하나님 경험은 그의 백성의 고통을 보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그들을 노예생활과 불안의 땅으로부터 이끌어 내어 우유와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의 자유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었다. 인간이 경험하는 그의 현존은 노예화된 백성에게 자유로운 삶으로의 해방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그는 주라 불리운다. 하나님은 주이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해방자이다. 신약성서의 증언들에 있어서도 인간이 예수의 가까우심과 사귐속에서 가지는 하나님 경험들은 자유의 경험들이다. 곧 병과 사탄에 사로잡힘으로부터의 해방, 사회적 억압과 모욕으로부터의 해방, 이 세계의 무신적 세력들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경험들이며, 사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하는 바와 같이 죄의 굴레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의 경험들이다. 하나님은 폭력으로부터의 해방자이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자이다. 하나님 경험은 엑소두스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고, 후자에서는 부활의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

2) ‘하나님이냐 아니면 자유냐’는 양자택일의 오해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많은 자유에 대하여 불안을 느낀다. 너무 많은 자유는 국가의 권위를 깨뜨리며, 가정의 결속을 해체하며, 윤리를 파괴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근대의 무신론자들은 자유로부터 하나님을 추방하고자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있으면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며 인간이 자유롭거나 자유롭게 되어야 할 경우 하나님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해방운동들의 무신론적 구호가 크면 클수록, 제도화된 교회는 보수적 입장을 더욱 더 강하게 주장하였다. 기독교의 역사의 매듭은 권위를 주장하는 하나님 신앙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유로 나누어져야 하는가? 이러한 대립 속에서 하나님 신앙도 사멸하지만 인간의 자유도 사멸한다. 하나님의 권위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하신 해방자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기 보다. 지상에 있는 주권자와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신적 권위의 이 표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로부터 비치는 광채로부터 오는 것이라기보다, 기독교를 국가종교로 가진 비잔틴 제국의 황제들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성서의 전승들이 제시하는 하나님 신앙과 자유의 의지를 결합하고자 하는 최초의 설득력 있는 시도이다. 형이상학적 신학, 초월주의적 신학, 인격주의적 신학에 반하여 해방신학은 역사와 함께,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서의 역사와 함께 시작한다. 정의의 실천없는 역사적 하나님 인식은 존재할 수 없다. 민중의 해방, 가난한 자들에게 권리를 회복하여 주는 정의, 눌림 받는 자들을 일으켜 세움,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 안에서, 경험들과 함께, 경험들 가운데서 인간은 하나님을 경험한다.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해방을 지향하기 때문에, 엑소두스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모든 회상은 과거의 이상향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희망의 구체적 회상이라고 보여진다.
해방신학은 처음부터 역사적 하나님 개념을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개념과 결합시켰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나라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 나라의 앞당겨 일어남이요, 하나님 나라는 역사적 하나님 경험의 완성이다. 착취와 억압과 소외로부터 인간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해방들은 죄의 용서와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과 같이 구원의 사역에 속한다. 고난과 착취의 상황에 대항하여 투쟁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세우는 사람은 아직까지 구원에의 도상에 있는 구원의 운동에 참여한다.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삶으로의 종말론적 구원은 죽음의 세력들로부터의 역사적 해방과 자신의 삶으로의 부활 속에서 경험된다. 엑소두스의 이야기는 해방하는 하나님의 함께 유리하는 현존을 말한다. 해방하는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 속에, 밤에는 불기둥 속에 현존한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은 노예상태로부터 해방할 뿐만 아니라, 자유의 근거로서 백성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

3) 삶으로 자유와 해방을 가져오는 성령 : 믿음, 사랑, 희망

해방하는 믿음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사로 잡는 믿음이다. 나를 자유하게 하는 진리는 전통이나 습관이 나를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이 이해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동의하는 진리이다. 자유는 개인이나 민족의 자기 결정의 권리로 파악되며, 여기서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주권을 뜻한다. 엑소두스와 부활의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이 해방시키고 부활시키는 능력을 경험하며 이 능력에 참여한다. 믿음이란 주어져 있으며 과거를 통하여 결정되어 있는 현실의 한계들을 넘어서는 것을 뜻하며 아직 완결되지 않은 삶에 대한 가능성들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 속에 있는 자유는 관계의 개념이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뜻한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그의 관계 속에 자기를 의롭게 하며, 용납하며, 해방하는 하나님으로 계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관계 속에서 죄인들은 의롭게 되며, 타락한 자들이 용납되며, 종된 자들이 자유롭게 된다.
정치사로부터 우리가 아는 최초의 규정은 자유를 주권으로 정의한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힘을 위한 지속적 투쟁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투쟁에 있어서 이기는 자만이 “자유롭다”고 불리운다. 지는 자는 예속되며 그러므로 “부자유하다”고 불리운다. 언어의 역사를 고찰할 때, “자유”라는 말은 노예 사회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노예사회에 있어서는 주인들만이 자유롭고, 그들이 지배하는 노예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은 부자유하다. 자유를 주권으로 다른 사람들을 희생으로 해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억압을 뜻하며, 그의 부는 다른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며, 그의 힘은 약한 사람들을 억압한다. 사회의 역사로부터 우리가 아는 다른 규정은 ‘자유를 사귐’으로 정의한다. 주체적 자유의 진리는 상호간의 사랑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존경되고 인정될 때, 그리고 나는 내 편에서 다른 사람들을 존경하고 그들을 인정할 때, 나는 자유롭고 자유롭다고 느낀다. 내가 나의 삶을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개방하고 그들과 함께 나의 삶을 나눌 때,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그들의 삶을 개방하고 그것을 나와 함께 나눌 때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 인간으로부터 인간의 소외, 자연으로부터 인간 사회의 분리, 영혼과 육체의 분열, 결국 종교적 불안이 지양된다. 그리고 우리가 자연과 하나님과 다시 함께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해방을 경험한다. 자유로운 사람은 친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지며, 개방되어 있으며, 유쾌하며 사랑한다. 그는 낯선 사람들과 사귐을 나눌 수 있다. 그는 그들을 자기의 삶에 참여하게 하며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영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현존을 나타낸다. 주는 모든 육 위에 부어질 영이시다. 영 가운데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로 경험한다. 살게 하는 영은 부활하신 그 분의 실존 방식이요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다. 인간을 사로잡는 하나님 편에서 주권이라 불리 우는 것은 사로잡힌 인간의 편에 있어서 자유를 뜻하며, 이 자유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노예상태와 아무 관계도 없다. 자유는 주권일 뿐 아니라 교통이요, 삶이 거기서부터 생성하며 그 속에서 생동케 되는 상호 교통적 관계들 안에 있는 삶이다. 자유의 이 세 가지 차원들은 믿음을 통하여, 사랑을 통하여, 희망을 통하여 열려진다. 이 차원들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상황 속에서 해방하며, 사귐을 나누며, 장차 오실 하나님에게 상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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