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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이야기

[성공회(聖公會)의 형성과 주요 교리] - 제 3 장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형성기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09.05.14|조회수29 목록 댓글 0
제 3 장 영국 성공회(聖公會)의 형성기
화이트비 회의부터 1066년의 윌리암 정복 왕이 등장할 때까지의 400년 동안은 색슨 교회가 발전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영국 성공회 형성기라고 한다.

1. 캔터베리의 데오도르 대주교
화이트바 공회 이후 4년째가 되는 해, 타수스(Tarsus)의 데오도르(The
odore)가 로마로부터 캔터베리 대주교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는 개인주의적 켈트형 수도생활을 베네딕트식 수도원에서 행하는 완고한 공동생활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데오도르의 위업 중에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다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직자의 훈육(訓育)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앵글로 색슨에게 도입시켰습니다.
둘째, 교회 생활을 성직, 교회 지도자들의 정기적 의회제도의 기초를 마련한 것도 역시 데오도르의 중요한 위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타수스의 데오드르의 정책은 누구보다 더 색슨 그리스도교에 국가 교회로서의 토대를 확고히 다져 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경건과 지식의 자각이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캔터베리에서는 데오도르가 세웠고, 요오그(York)에서는 에그버어트(Egdert), 몸스베리(Mal
mesdury)에서는 오드햄(Aldhelm)이 세운 수도원이나 대성당 부속학교가 유명하게 되었고 크나큰 영향을 주게 된 것도 이때였습니다. 칼 황제의 서부 신 제국에 들어온 학술 부흥은, 요오크의 알퀸( Alcuin)과 같은 색슨인 학자 교사의 활동에 의한 것이다.
색슨의 문화 부흥의 대주역은 쟈로(Jarrow)수도원의 수도자였던 베다(Bede)였다. 베다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자신의 수도원이나, 위어마우스(Wearmouth)지원에서 지냈다. 그의 최고 위대한 업적은<영국 교회사 THE ECCLESIASIC ALHISTORY OF THE ENGLISH PEOPLE>이다. 켈트 인이나 색슨 시대의 영국 그리스도교에 관한 지식은 오로지 이 책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작품의 가치야말로 세계적인 역사서 중의 하나입니다.

2. 색슨 인의 선교 활동
만약 켈트인의 학식이 어느 정도 인의 지적 문예부흥을 자극했던 말할 수 있다면 켈트 교회의 선교와 전도 정신을 이어받은 것도 마찬가지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색슨 교회의 세번째 주역은, 크레디톤(Credtion)의 윙후리즈(Winfrith)였다. 그는 오늘날 성 보니파스(Boniface)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교 전도 사상 뛰어난 인물입니다. 서부 색슨인 왕국의 일부였던 디본셔(Devonshire)에서 출생하고 엑스터(Exster)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다른 많은 앵글로 색슨인의 선교사가 한 것처럼 눈을 이교의 대륙으로 돌렸던 것입니다.

3. 덴마아크인과 노르만인의 침략
알프레드(Alfred) 대왕은 덴마아크 침입을 격퇴하고 영국 교회를 보존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는 교회 개혁과 학문의 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라틴어 서적을 번역하여 보급하였고 수도원과 많은 교회를 세웠다. 알프레드의 노력은 50년 후에야 열매를 맺게 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클라이스튼베리의 성 둔스탄(Dunstan) 지도하에 10세기 중엽의 색슨 교회에서 재차 학술과 경험으로 진지하게 부흥되었다.
영국 지배권을 목표로 했던 덴마아크인, 노르만인, 색슨인의 삼자 대립에 의해 색슨 영국은 그들의 시야로부터 멀리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마침내 1066년 침입해 온 맹장 노르만디의 윌리암즈 군대에 돌아가게 되었다. 윌리암즈의 승리는 영국 역사를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서구와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켜 놓은 결과가 되었다.

4. 대륙의 영향
노르만 족의 침입 결과는 색슨 영국의 사회 경제기구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 생활 그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암흑기가 지난 유럽의 새 질서는 봉건제도였습니다.
당시의 표준에서 본다면, 윌리암즈 1세는 우수한 크리스챤 통치자였습니다. 자기 신하의 정신 수양에 중대 관심을 가졌던 그는 토지의 소유권을 교회에 부여하는 선심을 썼으며, 이로써 교회는 대재산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현명한 주교와 수도원장의 인사 임명은 영국 교회에 강력하고 열심있는 지도능력을 발휘하도록 해 놓았습니다. 윌리암즈 왕의 신뢰가 두터웠던 노르만 교회인 베구의 란프랜스(Lanfrance)였습니다.
1070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된 그는 교육가로서, 정치가로서, 노르만디 신학자로서 이미 두각을 나타낸 분이었습니다. 이 외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은 란프랜시스의 후계자이며 베구에서 한때 학생이었던 성 안셀름 입니다. 이 수도사의 경건성과 학식은, 중세기, 초의 위대한 성도로서도 또 신학자로서도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위인과 그 동지들은 전력을 다해 색슨식 고립주의로부터 영국 종교생활을 떼어놓는 데 노력했습니다. 오늘날의 노르만 건축이 라고 부르는 특징 있는 건축 양식이 나타났습니다. 12세기의 대성당이나 수도원은 하나님의 집이라고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군사적 보루로서도 충분한 방비 역할도 해냈습니다.

5. 봉건제도와 영국 교회
봉건주의는 노르만인의 영국 주교를 완전히 영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주교는 신앙의 지도자라기보다는 성직의 선임 상급자였고, 목자라기 보다는 통치자에 가까왔습니다. 중세기가 진행됨에 따라 주교는 점차 귀족이 되어갔고, 자기 교구의 관료적인 교권 조직을 통해 주교가 일반인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장소는 저 무서운 종교 재판소였습니다. 이러한 중세 주교직의 불행한 상태를 개선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봉건제도는 특권과 통치권이 서로 결합된 조직을 기본으로 하여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봉사에 의하여 유지되었습니다. 황제 때부터 천한 농노에 이르기까지 유럽 사회는 아래에서 바쳐서 위로 상납하는 신성한 충절의 복종에 의해 유지되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법률과 교회법의 발달은 주교 직무에 변화를 초래케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회와의 본질적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했습니다. 12세기는 그리스도교 사회를 통일한 교회법의 발달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교회법은 봉건국가의 세속적인 권위에 의해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교회적인 수련이 실시되어야 할 인간 생활의 영역에 대해서는 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이 세계적인 교회에게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은 교회의 권한이 신앙인의 내적인 생활을 규정하는 것에 국한되지만 그러나 중세에는 유대인과 이교도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세계적 교회의 회원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법은 종교에 관한 법령뿐만 아니라 점장이나 이단 신앙상의 범죄 그리고 남녀의 일상생활의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참견을 하였습니다.

6. 토마스 베켓트와 헨리 2세
베켓트와 헨리 2세 와의 싸움은 교회법에 관해 일어났다. 둘의 싸움은 종교 재판권과 국왕의 법정은 어느 곳을 경계선으로 정하는 가가 문제였다. 양자 모두 각각 관할 지역이 있었지만 쌍방이 관계하는 그 중간에 법적인 무인지대가 있었다. 윌리암즈 정복 왕과 같이 강한 성격 소유자의 국왕 시대에는 국왕의 법률은 안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기에 교회는 국왕의 특권을 억압하고 범위를 넓혔던 것이다.
118년에 걸친 내란 후 1154년, 헨리 2세는 자기 선조가 일찍이 구축해 놓았던 왕권을 회복하려고 큰 결심을 갖고 즉위하였다. 각 영주의 독립은 비교적 용이하게 억제하였지만, 고대 영국의 습관에로 돌아가려고 교회의 권위를 공격했을 때 헨리는 완고한 교회의 적개심을 눈치챘습니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베켓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같은 죄에 대하여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이나 벌을 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 성직 파면은 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12세기에는 사후 세상에서 회개하여도 용서받지 못할 영원한 형벌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시대였다. 국왕의 법제 개혁에 대한 대주교의 강직한 반대는 실은 국제적 교회의 독립적 주권을 위태롭게 할 것까지 미리 두려워한 것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7. 영국과 교황권
토마스 베켓트의 순교 후 100년 동안 영국에서는 교황의 세력이 번영을 누린 때였다. 교황 권력을 즐기던 인노센트 3세는 존(John)왕을 맞이하여 교회의 행사와 재산에 대한 간섭을 중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불행한 국왕으로부터 영국 왕위도 교황의 뜻대로 라는 승낙을 얻었다. 교황 지배권을 제시한 교황 부과세가 수대에 걸쳐 영국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지만, 로마의 인노센트의 후계자는 그들에게 전승한 이 특권을 빈틈없이 이용하였다. 영국 교회의 부에 대한 교황세는 13세기, 14세기에는 막대한 것이 되었고, 동시에 영국에서의 교회 인사. 행정상의 교황 임면권(任免權) 행사의 실정은 영국인에게 교황권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황세 징수로 인하여 운영되는 군대는 도처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영국에서 교황청에 납부하는 막대한 금액은 교회의 수입을 감소시켰으며 교회의 재산도 국부(富)의 일부인데, 교황의 정치적 교섭에 지출되는 그 돈이 왕왕 대륙에 대한 영국의 국익을 방해하는 때가 많다.
14세기 교황권에 대한 불만은 교황권이 비종교적인 것까지도 지배하려 한다. 그것은 교황권을 약화시키려는 것을 목표로 한 수많은 의회 결의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최초의 결의를 에드워드(Edward) 1세 치하에서 의회를 통과시켰다는 것에 특기할 만 가치가 있다. 때마침 교황 보니파스(Boniface) 8세는 프랑스 왕에 의해 여지없이 굴복을 당했고, 이 사실은 새로 탄생한 유럽의 여러 국가가 세계 지배를 꾀하는 교황의 야망에 경계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8. 정세의 변화 : 국가주의의 성장
종교개혁이 있기 전 200년 동안 유럽에 정치 정세는 국가주의의 세력이 점차 성숙되어 가는 시기였다. 14세기, 15세기에는 영국의 정치형태와 마찬가지로 혁명적인 경제 및 사회의 변화를 가져 왔다.
영국 사회에서 중류계급의 발흥은 아마도 종교개혁 직전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회 변화였을 것이다. 이러한 신흥계급은 종래의 교회 조직이 곧 다가울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 진전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개혁을 바라는 목표가 되었던 많은 폐해는 종교적이라기보다 교회 내의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도리어 과중하게 밀어붙이는 과도한 교황세(稅)와 첩첩이 중첩되는 로마로부터의 간섭은 국가 교회의 관심사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이 있기 전 100년 동안 널리 퍼진 반성직주의(反聖職主義)는 사회에 새로운 그룹(Club)이 생기게 하였다.

9. 종교개혁 직전의 영국 교회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미신 타파에 역점을 두었다. 교회는 보통 인간이 종교적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면 미신마저도 좋게 받아들이는 상태에 있었다. 전에는 보다 깊은 신앙심으로 인도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경건과 의식 행사나 습관은 이제 그 그림자조차 볼 수 없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연옥(煉獄)의 형벌을 면하게 해준다고 특사 면죄를 파는 금전 매매가 일반화 되었으며, 더욱이 죽은 성도의 유물을 가지고 기적이라고 칭하는 부적, 뼈, 장신구들을 팔기도 했습니다.
중세 종교 생활에서 신앙상의 최대 위기는 일반 대중이 교회 예배의 중심인 성찬식(흑은 미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미사 예문이 알지도 못하는 라틴어로 드려진다는 데 있다. 크리스챤의 공동 예배인 성찬식이 단 한 사람의 사제에 의해 읽어가는 식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을 때, 성도들은 때때로 아베 마리아라든가 주님의 가르친 기도를 소리내어 합창할 뿐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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