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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이야기

최근 역사적 예레미야 연구 동향 - 히브리 예언서 연구 2.예레미야의 초기 예언Ⅲ. 스키티안(Scythian) 문제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09.10.16|조회수63 목록 댓글 0

Ⅲ. 스키티안(Scythian) 문제

   예레미야가 소명을 받았을 때, 북쪽에서 위협이 몰아쳐오고 있었다. 그가 소명받을 때 보았던 두 번째 환상인 끓는 가마의 환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북으로부터 재앙이 이땅의 거민에게 몰아쳐 올 것이다." 이 견해가 18세기에 처음으로 심화된 이래로, 이것은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약간 언급한 스키티안(Scythian)의 서아시아 침략을 언급하는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이 가정은 아직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지난 반세기 이래로 F. Willke의 도전을 따르는 많은 학자들의 증가로 금세기 초부터 거부되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티안이 어떻게 아시아를 침략했고 메데를 정복했으며 그리고나서 아시아에 퍼져나갔는가-그들은 아시아를 28년동안 지배했다-를 관계시키고 있다. 스키티안이 이집트를 침략하기 위해 팔레스틴(Palestine)을 통과해 행군했으나 삼메티구스(Psammetichus)가 그들을 매수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들은 북쪽으로 돌아가다가 아스켈론(Ashkelon)에 멈춰서 한 성전을 약탈했다. 스키티안이 앗시리아(Assyrian)에 끼친 영향에 한해서는 쐐기문자자료로부터 그들의 활동을 알수 있지만, 그들의 팔레스틴을 통과한 침략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의 이야기에만 기록되어있다. 때로는 스키티안 무리들이 니느웨를 멸망시킨 공격에 참가했다고도 하나 오히려 니느웨를 공격하는데 참가한 우만만다(Umman-Manda)가 더 이른 침략자들의 무리였을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의 서스테페(southern Steppes)에서 와서 메디아(Media)로 들어갔으며 지금까지 메데(Medes)인으로 섞여살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이야기 중에는 과장과 있을법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스키티안이 몇 년 동안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다니는 곳마다 공포를 뿌리고 다녔다면 몰라도 그들이 28년 동안 아시아를 지배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대로 삼메티쿠스가 그들을 매수해서 쫓아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기록이 이집트 자료에도 없고 반대의 증거도 없다. 헤로도투스의 이야기가 순전히 작가의 고안물인지는 알수 없다. 아스켈론에서 스키티안 행동에 대해서는 역사가의 작업인 특별한 조사에 기초해서 정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헤로도투스의 관심이 아스켈론의 여신을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동일시 하는데 있었다는 것과 그가 당시의 아스켈론에 유행하던 전설을 받아들였다는 논의에 근거해서 그의 견해를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스켈론의 제의 전설이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통과한 약탈의 이야기와 이집트의 스키티안 매수 이야기를 창작했다는 것은 거의 가정할 수 없다.

   벳샨이 그리스시대에 와서 스키토폴리스로 알려진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플리니(Pliny)와 신셀루스(Syncellus)의 말처럼 스키티안이 한때 거기 살았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이 이름이 헬레니즘 시대에만 알려져 있고 벳샨 발굴에서 스키티안과 동일시할 아무것도 발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다시 반론하기를 스키토폴리스가 헬레니즘 시대의 이름이기 때문에 그 전시기에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요,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스키티안이 팔레스틴을 약탈하며 행군해왔다가 돌아갔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그들이 지나간 곳에 그들이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발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시리아에서 최근에 스키티안이 얼마동안 머물렀다는 증거를 고고학자들이 발견했다. 더욱이 벳샨에 스키토폴리스라는 이름이 처음 주어진 것이 언제건, 전승에서  스키티안과 전혀 관계없는 이름을 그도시에 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 전승은 헤로도투스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헤로도투스는 스키티안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도시를 언급하고 있지도 않다. 그것이 헤로도투스가 적고 있는 시기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러면 언제였느냐고 물을 권리가 있다.  스키티안의 또 다른 팔레스틴 침입에 대한 기록이 없고, 당시에 스키티안이 앗시리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이 앗시리아의 문서에 확실히 나와 있다. 기록되어 있는 침략을 그 이름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더 그럴듯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은 확신있는 것 같지 않다.

   더욱이 헤로도투스의 말이 당시에 외부적인 침략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팔레스틴의 주변 정세에 있어서 예레미야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헤로도투스는 그 침략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고, 삼메티쿠스통치 때에 니느웨가 키악사레스(Cyaxares)에 의해 멸망되기 전 어느때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이집트가 주전 616년에 앗시리아의 원조를 위해 행군했으니, 이 사건 전 어느 때였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요시야의 개혁 전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예레미야서에 있는 요시야의 소명 시기로  우리를 근접시킨다. 학자들마다 정확한 시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를 근거없는 것으로, 스키토폴리스의 이름을 무관한 것으로 배제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예레미야서에 주어진 예레미야의 소명시기를 배제하는 것은 논박이라기 보다는 증거의 기각이라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이다.

   스바냐는 요시야 통치기에 예언하였고 그의 재앙에 대한 예언의 배경은 스키티안의 위협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요시야의 마지막까지 다른 역사적인 위험은 마음속에 없었을 것이다. 주전 612년 니느웨 멸망 전에는 누구도 바빌론(Babylon)을 서쪽으로 위협이된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심지어 니느웨의 멸망 후에도 그 자방에서 팔레스틴으로의 즉각적인 위험은 거의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집트는 시리아와 팔레스틴을 관통하여 유프라테스 서쪽을 점령하였고, 반면에 요시야는 이집트를 저지하려는 헛된 시도에 목숨을 잃었다. 스바냐가 이집트를 그가 예언한 약탈의 도구로 생각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다. 스바냐도 예레미야도 그 파괴자들에 대한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뿌리없이 유랑하는 스키티안 무리와 잘 들어 맞는다. 예레미야가 스키타안을 그의 신탁 원본에서 그 원래의 이름으로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것은 근거없는 생각이고 스바냐의 신탁에 그들의 이름이 없음도 근거를 주지 못한다.

   몇몇 사람들은 예레미야가 그 마음속에 특별한 적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래서 그의 초기 예언들은 모호한 종말론적 예언들이라고 주장해 왔다. 스바냐는 훨씬 더 일반적인 종말론적인 예언에 가깝다. 그러나 두 예언자 누구도 하나님이 곧 세계에 가져올 재난의 도구로 어떤 인간 권력을 생각하지 않고 말했을 것이다. Welch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열방의 파괴자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발생시킨 개념의 첫 번째 모호한 힌트"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적이었던 반면, 예레미야가 예언한 파괴하는 그 적은 그의 백성을 훈련하는 도구이고, 스바냐와 관련해서는 그것은 주의 날이고 적그리스도의 날이 아니다.

   몇 명의 최근 저작자들은 아직도 스키타안 가설이 주류가되기 전에 우세했던, 예레미야에게 소명이 임한 주전 626년에 이미 처음부터 그 적이 갈대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당시에 갈대아인들은 앗시리아에 대한 반역을 시작했을 뿐이었고, 독립을위해 싸우고 있었으며, 앗시리아에 위협도 되지 못했고 서쪽에(유프라테스 서쪽) 있는 나라들은 방치해 두고 있었다. 한세기 일찍 이사야는 갈대아인들이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더 이전의 시도에 갈대아와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하여 히스기야에게 경고했는데, 이때에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마음속에 그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주전 626년에 예레미야가 그 이름을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소명환상의 두 번째에서 그에게 임한 메시지가 "내가 북방 왕국의 모든 족속들을 부를 것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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