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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두손

복음과 상황, 그리고 경배와 찬양 5. 성경에서 드러나는 찬양

작성자ysong777|작성시간10.04.09|조회수30 목록 댓글 0

5. 성경에서 드러나는 찬양

우리는 여기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확증시켜줄 성경적 근거를 찾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던 중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서 시작한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 15:1-3)."

 

본문의 배경은 어떠한가. 모세에 이끌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군대가 쫓아오자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시는 여호와의 능력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2)라고 울부짖는다. 이 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라고 권면한 후 홍해의 기적을 일으킨다. 이 기적을 보고하는 찬양이 바로 본문의 노래이다.

 

상황, 하나님, 모세(중보자), 이스라엘(인간) 그리고 사건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찬양을 만들어 낸다. 이것 중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상황,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힘입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 15장의 노래를 이 당시의 이들보다 더욱 진실하게 할 수 있는 자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고 할 때 그들은 무엇을 느꼈는가? 말은 그저 그것이지만 그들에겐 구체적이며,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것이다. 그들은 공시적으로 찬양을 규정했는가? 그들은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을 노래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말탄 자를 던지신'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내 아비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그들이 되어 보아야 한다. 아니면 지금의 상황 속으로 투영이라도 해야 한다. 그저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라고 외쳐봐야 헛일인 것이다.

 

자, 이제 두번째 이야기를 해보자. 본문은 시편 137편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시 137:1-3)."

 

우리는 여기서 각박한 현실의 이스라엘을 본다.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원수들이 그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해보라고 빈정댄다. 이 때 이 시편 기자의 탄식은 가슴을 에우는 것 같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찌로다 (4-6)."

 

자신의 입에서 찬양을 멈추는 것, 그것이 최선의 찬양이 되는 현실! 차마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고향조차 잊겠다는 아픔! 그것을 보아야한다. 연이어 노래하기를,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7-9)."

 

저주의 말이 찬양이 되었다. 그들의 역사적 상황은 이러한 찬양을 만들어내었다. 누가 이들이 '사랑'이 없는 자라고 하였는가? 이들의 고백은 진실하며 '찬양'인 것이다. 단, 그 역사적 시점에서 그들에게 있어서 말이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이 때 그들이 하나님을 그저 찬양했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 된다. 하나님을 노리개화한 것이다.

 

이제 역사적 패러다임의 정당성은 충분히 설명되었다. 다음은 제도와 형식의 패러다임의 부당성과 진실성의 문제를 말하고자 한다. 이사야 1장을 보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 1:11-12)."

 

이 제사제도는 누가 마련하여 준 것인가? 누가 제물을 요구하였는가? 바로 하나님 당신이시다. 그런데 이 같은 말씀은 무엇인가? 진실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누가 형식의 문제로 전통의 문제로 정죄하는가? 그것은 부당한 것이다. 물론, 제도를 하나님이 주신 것에 주목하여야 한다. 즉, 그 내용을 담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그릇을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다. 때문에 아무 형식이나(파괴적 록큰롤 등) 괜찮다는 식의 논리는 그르다. 그러나 담길 내용이 역사적 진실을 담지 못하면 모두 헛것이다.

 

마지막으로 계시록에 나타난 천사의 찬양을 살펴보자. 우리는 계시록 5장의 장엄한 광경을 목도하려고 한다. 어떤 표현으로도 그 거룩함과 그 장엄함을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천상의 일이다. 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조야한 예언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진실을 말함이다.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가 오른손에 책을 들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곧 역사이다. 그런데 그 책의 일곱 인을 뗄 이가 없다. 여기에 어린 양되신 예수의 등장이 있다. 그분은 그 인을 떼시며 역사의 주인이 되신다. 그분은 찬양과 경배를 받으신다.

 

"책을 취하시매…이십사 장로들이…새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내가 또 보고 들으매…천사의 음성이…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내가 또 들으니…모든 만물이…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계 5장)."

 

무엇이 찬양드려지는가?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십자가이다. 언제 찬양이 시작되는가? 인을 떼실 때이다. 여기에는 어떤 형식도 어떤 공시적 사건도 없다. 역사의 진실, 그것의 주인이신 예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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