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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에 묻힌 이명박사건을 재조명하며

작성자주몽왕자|작성시간07.03.29|조회수15 목록 댓글 0
무엇이 문제인가? 그리고 왜 파렴치한 것인가?

96년 15대 총선 서울 종로에서 재선에 성공한 이명박은 선관위에 선거비용을 보고할 때에 약 7,100여만원을 신고하였다. 그런데 이는 꼴찌를 기록한 '장군의 딸' 김을동(송일국의 어머니, 탤런트)의 9,300여만원 보다 훨씬 적고, 3등에 그친 노무현의 7,300여만원 보다도 적은 것이었다. 이를 두고 당시 노무현 후보는 "말도 안되는 정치적 코미디"라고 일갈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 당시 이명박 캠프의 인원과 활동상황이 일반인들이 피부로 느끼기에도 장난이 아니었다는 데에 있었다. 특히, 선거를 위해 동원한 아르바이트인력 일당을 2만원으로 신고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경쟁후보 측에서는 통상적인 일당이 3만원이고, 선거의 경우 4~5만원이 관행인데 2만원인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캠프 인력이 타 후보와 비교도 안되는 60여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것도 쟁점이 되었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명박 선거운동에 대한 전면 실사를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자금담당 참모였던 김유찬이 폭로 기자회견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김유찬의 기자회견에 있어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김유찬은 "선거를 승리로 이끈 만큼 당시 6급이었던 내 직급을 당연히 5급으로 올려줄 것으로 생각했고, 이 문제를 이야기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 그래서, 같은 당 이재창 의원 비서관으로 옮겨갔는데 이명박이 이재창을 따로 만나 나에 대해 네거티브 발언으로 일관했다고 훗날 들었다. 그래서 인간적인 모멸감과 배신감을 느꼈다"고 증언했다.

김유찬이 9월 10일 기자회견을 하자 이명박 측은 비상사태에 직면했다. 그는 이광철 등 비서진들을 총동원하여 김유찬 검거령을 내렸고, 김유찬을 잡아온 이명박은 회유와 협박을 일삼다가 김유찬으로부터 끝내 '해외로 도피하겠다'는 결단을 얻어냈음. 마음이 바뀔까봐 두려웠던 이명박은 이광철 차량 트렁크에 현금 2,000만원을 싣고 김유찬 일가족 4명에 대한 홍콩행 비행기표 4장을 구매토록 했고, 미화 1만 8천달러를 '도피자금'으로 건네주었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혹시라도 김유찬이 딴 짓을 할까봐 두려웠는지 이광철에게도 오사카행 비행기 표를 끊어주고 그로 하여금 공항 출국심사대를 통과하여 김유찬이 최종 게이트로 탑승하는 것을 확인토록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광철이 치밀하지 못하여 출국절차를 밟은 후 재입국 절차 없이 그냥 공항 내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광철의 경우 출국 기록은 있는데 입국 기록이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이것이 검찰에 꼬리를 잡혀 이광철은 순순히 자백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인해 이명박의 파렴치한 범죄는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출국시키면서 김유찬으로부터 강제로 받아낸 편지 한장을 들고 그 다음날 유유히 기자회견을 하면서 김유찬의 기자회견이 국민회의 측의 '정치공작'이라며 공세의 고삐를 당겼다는 것이다.

결국, 97년 9월 1심법원의 유죄판결이 내려짐으로써 이명박의 '뒤집어 씌우기' 정치공작은 그 막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새로운 사실이 또 하나 제기되었다. 그것은 이명박이 김유찬에 대해 위증의 대가로 1억 2,500만원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명박 측은 위증을 했다면 유죄 판결을 받았겠냐며 '흑색선전' 운운하고 있는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위증의 목적은 '무죄'를 선고받기 위한 것 뿐만이 아니다. '중죄'를 면하기 위해 위증하는 것도 매우 일반적인 형태이다. 만일 김유찬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액면 그대로의 진실을 밝혔다면 이명박이 징역 등 사법처리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여간 사태를 조작하고 호도하는 능력 만큼은 이명박이 분명 프로급이다.

(2) 왜 이것이 여론에 묻혀버릴 수 있었을까?

지금 많은 사람들은 궁긍해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사법부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김유찬에 대한 ´범죄인 도피 및 위증 교사´ 내용을 어떻게 99%에 달하는 국민들이 감쪽같이 몰랐을 수 있느냐는 부분 말이다. 과연 그것을 언론들이 보도를 안한 것일까? 아니면 이명박 측이 주장하듯이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일까?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김유찬의 이명박 불법선거자금 폭로 기자회견이 있었던 것은 1996년 9월 10일이다. 그리고, 이명박이 김유찬을 해외도피 시킨 것이 9월 13일, 그리고, 이명박이 김유찬의 거짓편지를 근거로 ´국민회의 측의 정치공작´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진 것이 9월 15일이다. 당시 언론들은 사건의 열쇠를 쥔 김유찬이 해외로 도피한 상황에서 신한국당-국민회의간 정치공방 이라는 측면에서 이 사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만큼 이명박에 대한 불리한 보도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후 범죄인 도피에 관여했던 이명박의 측근들이 구속되고 난 후 수사가 진전되기 시작하였으며, 97년 6월 김유찬의 자진 귀국으로 수사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1심의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게 바로 97년 9월 11일이었다. 이로 인해 신한국당 측은 ´정치공작´이라고 한 것에 대해 국민회의 측에 공식 사과했으며, 당의 명예를 실추시킨 이명박에 대한 출당 논의가 거세게 일었다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 후 흐지부지되었다. (정인봉은 이명박이 YS 비자금을 폭로하겠다며 강삼재에게 협박했다고 증언함.)

결국, 언론들은 몇일 이 건을 보도하다가 10월부터 IMF 위기 보도로 인해 이명박에 대한 보도 자체가 중단되었다. 그야말로 IMF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면서 언론들과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이명박의 파렴치한 범죄는 잊혀져갔다. 결정적인 순간의 모멘텀을 놓치다 보니 그 다음부터는 이 문제가 아예 이슈화 자체가 되지 못했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가 다시 이 문제를 이슈화했지만 이명박은 ´네거티브´라며 도리어 공세를 폈고, 당시 ´YS 시계´ 사건으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함에 따라 김민석의 지지율도 곤드박질쳤고, 그와같은 상황에서 ´청계천´을 들고나온 이명박이 승기를 잡았고, 김민석의 ´후보검증´ 목소리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친 위기를 IMF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와 ´노무현 추락´이라는 행운을 통해 이명박은 ´검증 공방´에서 벗어났다. 그것을 가지고 이미 검증이 끝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P.S.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1996~97년 당시의 이명박이 정치적으로 ´거물급´의 반열에 들어서지 못했다는 점이다.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무려 5년 후인 2002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97년부터 2002년까지의 5년은 ´1차 망각´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고, 2007년까지의 10년은 ´완전 망각´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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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어묵
큰일이다...!
03-28
 한번만
파렴치한 범법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느나라든 쪽팔일 일이지. 유엔대사는 유엔 회의에 어떤 얼굴로 나가냐.
03-28
 You-지니
이명박씨를 지지하는 사람들..일당받구 지지하나바요? 비리정치인들이 우리나라에 더이상 뽑히지 말아야합니다..ㅡㅡ;
03-28
 gkgkgk
병신아 이명박은 차기대통령감이야 한심한놈아.
03-28
 LA교포
맹박이가 지금 들어가야 할 곳은 청와대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그런 인간이 청와대에 들어가면 대한민국 망합니다!!
03-28
 삼춘이다
그런데도 지지율이 일등이니...쩝쩝 울나라가 그리 꼴통이 많은겨?
03-29
 성동짱
이명박이 대통령되면 밑에 있는 공무원들은 대놓고 해먹겠네 대통령이 많이 해먹었는데 및에 있는 공무원들에게 말빨이먹힐까 울나라 제2의 i.m.f가 얼마 안남았네 그나미 노무현이 튼실하게 해놓은나라르 아주 박살나게 되어 버렸네요 기가막힙니다.
03-29
 성동짱
노무현은 남들 터트려 놓은걸 막느라 쌔가 빠져 버렸는데 미꾸라지 한마리가 또 나라 망하게 생겼네요 여기에 반박하려면 근거를 갖고 쓸것 난 근거가 있으니까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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