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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 모음

성경 안의 부르심과 응답 - 송봉모 신부

작성자김도현SJ|작성시간10.04.30|조회수935 목록 댓글 0

예수회 지원자들을 위한 강의

 

성경 안의 부르심과 응답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 (예수회,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성서신학 교수)



첫 제자들을 부르심(마르 1,16-20)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면서 부르심의 특징과 제자 됨의 규칙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리고 그분은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분이 선뜻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섰다”(마르 1,16-20).

 

대뜸 주어지는 제자직 부르심(소명)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 (마르 1,14-15)

 

 

마 르코 복음(또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이 대뜸 불림을 받았음을 본다.

이 들이 불림 받는 내용이 마르코 복음 1장 16절부터 나오는데 바로 그 전 15절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했음을 전한다.

그 러니 첫 제자들이 그전에 예수님을 한 번이라도 만났다던가 예수님의 설교를 한 번이라도 들었다던가 하는 언급이 없다.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 순간 제자로 불림 받고, 그 불림에 즉시 응답한다. 생면부지의 예수님이 자기들을 제자로 부르자 모든 재산을 다 내버려두고 대뜸 따라 나선 것이다.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만 일 제자들이 생면부지의 예수님을 처음 만나 따라갔다면 그들은 누구 말대로 또라이일 것이다. 도대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떻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낯선 사람을 따라간다는 말인가?

그 럼 마르코 마태오에서 독자들이 심리적 어려움을 갖게 될 것을 알면서도 대뜸 불려진 제자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의도에서인가?

 

한 가지 신학적 강조점을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제자직에 대한 부르심이 일방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제자직이란 주님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부르는 것이다.

그 리스도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제 삶에 끼어들기 시작했어요. 그분이 저를 부르셨답니다.”

 

창 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의 소명은 하느님이 다짜고짜 떠나라 하심으로서 시작한다. 아모스도 마찬가지다.

 

“나는 본시 예언자가 아니다. 예언자의 무리에 어울린 적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다. 나는 양떼를 몰고 다니다가 야훼께 잡힌 사람이다.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가서 말을 전하라고 하시는 야훼의 분부를 받고 왔을 뿐이다.”(아모 7,14-15)

 

아 모스의 이 진술은 부르심의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음을 드러낸다. 다음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내세운 것은, 여러분이 떠나가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남아 있도록 하려는 것이요..."(요한 15,16).

 

세 상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간이 주님의 절대적 권위 앞에서 불림을 받았다. 모세, 사무엘, 예레미야, 이사야, 에제키엘, 12 제자들, 성모 마리아, 자캐오, 바울로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가 다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도하신 부르심을 받았다.

 

 

부르심(소명)의 특징

 

소 명사건은 언제나 예수와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어는 인간을 보시고(마르 1,16.19;2,4;10,21; 루가 19,5) 부르는 데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보시니, 시몬과 시몬의 동기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 그분은 조금 더 가시다가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기 요한을 보셨는데 그들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예 수가 어느 인간을 바라다보실 때 그의 이름과 함께 보신다. "시몬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여기서 이름은 공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위격을 대신한다. 우리가 이름을 드높인다 또는 이름을 욕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름과 그 이름을 소유한 존재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예 수님의 우리의 이름을 보시고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조건을 보시고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의 좋은 점, 장점은 물론이요, 부족한 점, 단점, 한계, 성향, 어두운 과거를 다 포함시키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시는 김춘수님의 ‘꽃’이란 시이다. 이 시는 주님의 부르심이 우리 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잘 드러낸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전까지 우리는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2003년 7월 현재 세계 인구는 62억9천만 명에 달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62억 개의 동전더미 속에 동전하나를 떨어뜨려 놓고 그 동전을 찾으라 한다면 찾을 수 있는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기 전의 우리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무의미한 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의미보다는 생존을 위해 땀 흘리고 수고하며 살고 있었고, 목적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불러주시면서 우리의 생은 달라졌다. 의미와 보람으로 충만 된 소명의 생이 되었고, 갈 길이 분명한 순례자의 생이 되었다.

 

부름의 자리

 

부 름의 자리는 첫 제자들이 생존을 위해 일하던 삶의 자리였다.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거 룩하신 부르심(성소)이라 해서 꼭 거룩한 장소에서 그 부르심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부름의 자리는 종교적 장소, 전례 장소에서 아니라 일상적인 터에서 부르신다. 인간이 살아가는 구체적 삶의 시간, 삶의 자리에서 부르는 것이다. 모세-양을 치다가; 기드온-탈곡기를 돌리다가; 사무엘-성전지기를 하다가; 엘리사-쟁기를 갈다가; 아모스-양을 치다가; 마태오-세금을 걷다가.

이 러한 삶의 자리들은 바로 좌절과 고통과 외로움과 고독의 자리일 수가. 베드로는 한 마리 고기도 못 잡은 상태 허탈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고, 마태오는 배신자란 소리를 동족들로부터 들으면서 외로움이란 삶의 자리에서 사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바르톨로메오란 장님은 길바닥에 쓰러져 구걸하면서 살아가는 척박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고, 엠마오 제자들은 절망과 실망 속에서 엠마오를 향해서 걷다가 주님을 만나게 되고....

 

 

부르심의 내용

 

부 르심의 내용은 "내 뒤를 따르라"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두 가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뒤를 따르시오. 당신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소.’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1,17).

 

(1) "내 뒤를 따르시오"를 보자.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 됨을 알려주는 전문적 용어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나를 따르시오. 죽은 자들이 자기네 죽은 자들의 장사를 지내도록 내버려 두시오.”마태 8,22)

"당신이 완전해지려고 하면 가서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시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태 19,21).

 

예 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직접적 문자적 의미를 가질 경우도 있고, 간접적 은유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직 접적 문자적 의미란 베드로나 안드레아처럼 신체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경우이다. 한편 간접적 은유적 의미란 몸은 직접적으로 예수 뒤를 따르지 않지만 마음은 그렇게 하는 경우이다. 예로서 베타니의 마리아, 마르따, 나자로가 그랬고 산헤드린 곧 유대 최고법정의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태아 요셉이 그랬다. 이들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이들이다.

베 드로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교회 용어로 표현하면 신부 수도자가 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마리아, 마르따, 나자로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평신도가 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불 교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면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은 출가제자들을 가리키고 마리아, 마르따, 나자로와 같은 사람들은 재가제자들을 가리킨다.

 

◎ "내 뒤를 따르시오."의 의미

 

① 베드로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든 마리아, 마르따, 나자로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란 구체적 인격체를 따르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제자직 수행이 어떤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적 존재와의 일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 수는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다르다.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하였지 자기를 따르라고 말한 적은 없다. 부처님의 경우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이란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셨다. 이는 제자들이 그들 자신을 등불로 삼고 그들 자신을 의지해서 진리의 등불을 밝히라는 것이다. 제자들도 스승처럼 수행정진하여 붇다 곧 깨달은 자가 되라는 것이다.

 

한 편 예수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한 신앙과 투신을 요구하였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어떤 가치나 이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고, 이는 당신에게 인격적으로 투신하란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출가신자로 예수님을 따르든 재가신자로 예수님을 따르든,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이 있는 자리여야 한다. 우리의 신원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이기에 그분이 계신 자리에 우리 또한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점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주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인가?

 

② 예수님이 우리보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을 때 구체적으로 당신 뒤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철저한 신뢰와 의탁을 요구한다.

 

누 구의 뒤를 따른다 함은 앞서 가는 사람을 철저히 신뢰하고 그가 가는 데로 따라가겠다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내어 맡기기’라는 게임을 해보았을 것이다. 예로서 눈을 수건으로 가리고 뒤에 있는 사람이 지시하는 대로 길을 가는 것이다. 뒤의 사람이 ‘오른쪽’하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하면 왼쪽으로 가는 것이다. 또 다른 ‘내어 맡기기’ 게임은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나를 바쳐 줄 것을 믿고 내가 뒤로 벌렁 넘어지는 것이다. 어떤 식의 내어 맡기기 게임이든 상대를 신뢰하지 않는 한 우리는 주저하게 된다. 내어 맡기기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관계에서 신뢰와 의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게 된다.

부 르심에 응답하는 삶은 어떤 특별한 깨달음이나 경험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서 나의 모든 안위와 미래 그리고 생사까지 모두 다 그분께 맡기고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에서 그분에 대한 신뢰와 의탁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빌 리 그래함 목사를 도와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맹인 여류 성악가 킴 윅스는 한국 여성이다. 그녀는 6.25 동란 시 두 눈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라던 중 어느 미국인의 양녀가 된 사람이다. 그녀는 나중에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해서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선교 팀에 합류하였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씀으로 주님의 뒤를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는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준다:

 

“나 를 도와주기 위하여 나의 손을 붙들고 인도해 주시는 분은 나에게 멀리 100미터 전방에 무엇이 있다고 일러주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저 내 발 앞에 계단이 있다고만 알려줍니다. 그러면 나는 계단에 오르기 위하여 나의 발을 높이 들기만 하면 됩니다. 믿을만한 안내자에게 나의 발걸음을 맡기고서 한 걸음 한 걸음 따라 가다 보면 내가 가야 할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리는 10년 20년 후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또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진실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발걸음을 맡기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따라가다 보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저 영원한 하늘 나라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삶은 안정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는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불안하고 변화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확실한 분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그분 때문에 생의 곤란과 불안정 속에서도 막연하게 예측되는 미래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생 자체를 귀하게 대할 힘을 갖는다.

 

우 리가 주님에게 인격적 투신을 하고, 신뢰와 의탁 속에서 주님을 따라가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내적 평화와 안도감이다.

 

(2)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은 베드로의 직업이 고기잡이였기에 그의 직업과 연결해서 했던 표현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직업이 어부이므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베드로가 지금까지는 어부로서 고기를 낚았다면 이제부터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참조 루가 5,10).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씀은 섭리적 부르심이 무엇인가를 암시해준다. 섭리적 부르심이란 부르심을 받기까지 우리가 받아온 양육과 교육 배경, 경험세계와 전문지식들이 다 부르심의 수행과정에 쓰여지기 위해서 섭리되었다는 것이다.

 

가 장 대표적인 예가 바울로에게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로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데, 그것은 바울로가 갖고 있던 배경 때문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자요, 헬라 사상과 율법에 정통한 이중 언어 구사자였기에, 만방에 복음을 전달할 적격자였다는 점이다.

 

또 다른 예로서 마태오를 들 수 있다. 마태오는 가파르나움의 세리장이었다. 당시 세리장은 세무 업무를 총괄할만한 세무 능력을 갖고 있어야 했다. 곧 여러 언어의 구사력과 수집력과 분석력, 수치 감각과 계산력 등이다. 마태오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나서 같은 능력을 갖고서 복음서를 기록한다. 12 제자 중 대다수가 문필 능력이 없는 어부 출신들이었기에 마태오의 복음서 작성은 너무나 귀하다.

주님의 부르심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자기 은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은사를 스스로가 알아야 어떤 자리에서 주님이 부르시는지 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6 년도에 한국에서 아시안 게임이 있었다. 그때 파키스탄의 아봇이란 선수가 역도에서 금메달을 두 개나 땄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시안 게임에 참석하기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훈련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건설공사장의 인부였다. 그가 공사장에서 일하던 어느 날 갑자기 공사장의 빔이 무너지면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덮치려 하였다. 이때 아봇이 본능적으로 달려가 쓰러지는 빔을 잡았다. 그리고는 무너지던 빔 밑에 있던 사람들을 어서 피신하게 하였다. 아봇 자신도 이때까지는 자기 힘이 이 정도로 센지를 몰랐다. 아봇의 대단한 힘을 목격한 사람들이 그에게 역도를 해보라고 권하여 역기를 들었더니 아주 무거운 것도 척척 들어 결국은 세계 신기록까지 낸 것이었다. 그래서 파키스탄 국가가 그를 아시안 게임 시작하기 불과 두 달 전에 대표선수로 뽑았던 것이다.

 

섭리적 부르심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포함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은 달란트에 매달린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예로서 사제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신학교 가겠다고 애를 쓴다면, 본인도 고생하고 인생을 낭비하게 되지만, 신학교 공동체도 많은 고생을 겪게 된다.

 

수 도회의 경우 각 수도회마다 카리스마가 다른데 그 카리스마와 자신의 달란트를 헤아리지 못하고 입회한 경우 세월을 허비하게 된다. 너무나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서 우울할 정도로까지 보이는 사람이 노인들을 돌보는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하자. 과연 그 사람이 노인들을 제대로 모실 수 있을지? 반대로 주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봉쇄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자. 과연 그가 미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지?

 

트라피스트 같은 봉쇄수도원은 말하는 시간보다 침묵하는 시간이 더 많다. 함께 하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한다면, 또 구체적인 현장에서 땀을 흘리며 그 누군가를 직접 돕기를 좋아한다면, 이 사람은 봉쇄수도원에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마이클 노바크(Michael Novak)는 <소명으로서의 사업(Business as a Calling)>이란 책에서 진정한 소명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 선 개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은 제각기 다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다 신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모두가 다 직장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예 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베드로나 안드레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한 제자들도 있었고 베타니의 마리아와 마르타 그리고 유대 최고법정의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같이 세상 안에서 주님과 함께 하며 살아간 제자들도 있었다.

 

둘째, 진정한 소명에는 능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단지 원한다고해서 오페라 가수나 프로 운동선수, 또는 대기업의 총수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소명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른 바 달란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 떤 사람이 소명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달란트가 주어지지도 않았는데 그 소명에 매달린다면 그보다 더 큰 불행은 없을 것이다. 예로서 사제가 되기에는 여러 가지에서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 기를 쓰고 신학교나 수도회에 가겠다고 애를 쓴다면, 본인도 고생하고 인생을 낭비하게 되지만, 그가 속했던 공동체도 많은 고생을 겪게 될 것이다.

 

수 도회의 경우 각 수도회마다 카리스마가 다른데 그 카리스마와 자신의 달란트를 헤아리지 못하고 입회할 경우 세월을 허비할 확률이 크다. 너무나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서 우울할 정도로까지 보이는 사람이 노인들을 돌보는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하자. 과연 그 사람이 노인들을 제대로 모실 수 있을지? 반대로 주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엄청나게 많아서 그 욕구를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봉쇄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하자. 과연 그가 미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지? 진정한 소명에는 그 소명을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

 

셋째, 진정한 소명에는 사랑이 요구된다. 그 소명을 수행하는데 맛보게 되는 어떤 어려움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사랑이 요구된다. 계속 반복되는 과정과 좌절, 드러나지 않는 성과, 그 밖의 어려움들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마 음 안에 타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사명이다. 마더 데레사가 거리에 쓰러져 죽어가는 걸인들을 보면서 마음이 탔는데 그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어 떤 사람은 장애인만 보면 눈물이 쏟아진다. 장애인을 향한 사명을 주님이 주셨기 때문이다.

어 떤 사람은 중국 얘기만 나오면 가슴이 뛴다. 중국 선교가 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를 향한 타는 마음을 바오로의 언어를 써서 표현하면, ‘빚진 자’의 심정이다. 바오로는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로마 1,14)

 

세 상살이에서 실제로 빚을 진 사람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너무나 부담스럽지 않겠는가? 그 빚을 갚지 않으면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가 없다. 바오로는 구원의 복음 앞에서 이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 대하여 늘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런 빚진 자의 심정 곧 타는 마음이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 환경이 좋든 안 좋든 생명의 복음을 전하였고, 선교사명을 마무리 할 때에는 다음같이 말할 수 있었다.

 

“그 러므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피에 대해서 결백하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모든 뜻을 숨기지 않고 알렸기 때문입니다.”(사도 20,26-27)

 

넷째 진정한 소명은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열여덟 살에 인도에 선교사로 가서 당신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영적 지도신부에게 “제가 어떻게 그 부르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도신부는 “수녀님의 기쁨을 통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자기 안에 내적 기쁨이 있는 것을 본 테레사 수녀님께서는 인도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하느님의 진정한 부르심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계 속해서 수녀님이 인도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앞서 네 번째 방법에서 언급했듯이 수업이 없는 날 시간이 날 때면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 돌보곤 하였다. 그런데 그 일을 하는 것이 그렇게 기뻤고, 가난한 이들이 그녀의 수고에 감사를 표시하거나 미소를 보여줄 때면 너무 기뻐서 가슴이 뛰었다. 이 기쁨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짜 사명은 인도 여학생들을 떠나 인도의 가장 불쌍한 이들을 돌보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렇다. 진정한 소명에는 기쁨이 함께 한다. 그런데 신자들 중에는 간혹 ‘순교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지레 짐작으로 하느님이 자기를 훈련시키기 위해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자기가 도시 문화생활을 좋아하면 하느님은 반대로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보낼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좋아하면 반대로 오직 책상과 마주 앉아 있는 메마른 사무직 봉사를 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물 론 하느님이 그(그녀)가 기대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은 어떤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느님은 당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과 달란트에 맞추어서 사명을 맡기신다. 당신이 인간에게 준 각자의 성격과 재능 그리고 은사를 고려해서 사명을 맡기신다.

 

하 느님은 심술꾸러기가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서까지 엄청난 일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준비도 되지 않은 사람, 가기를 원하지도 않는 사람을 부르지는 않는다. 두려움 속에서 억지로 떠나갈 사람을 강제로 부르지는 않는다.

 

어 떤 사람은 죽어라 가기 싫어하는 아프리카지만, 실제 그곳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아닌 다른 곳에는 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프리카 영혼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의 부르심이라 믿기에, 몇 년 만에 휴가 차 고국에 왔다가도 어서 아프리카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겉으로만 그런 척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은 내적 기쁨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부름에 대한 응답 자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거래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고, 주님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우리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거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기본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 ‘즉시,’ ㉡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고 ㉢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자 즉시 그들은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마르 1,18)

“그분이 선뜻 그들을 부르시니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남겨 두고 그분의 뒤를 따라 나섰다.”(1,20)

 

 

(1) 즉시(마르 1,18; 1,20; 2,14).

주 님의 부르심은 초대이지 소집이나 징집이 아니다. 초대는 불려진 사람이 자유로이 응답하는 것이다. 한편 소집이나 징집은 강제적인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은 강제성이 없기에 우리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응답이 더 없이 필요하다. 네 명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였다. 그들의 즉각적인 응답은 그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르심이 성립되려면 인간 편에서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부자청년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라비아 말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다. 모하멧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종자의 말을 구하기로 마음먹고는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는 정말로 종자가 좋은 말 100마리를 사서는 풀만 있고 물은 없는 목장에 가둬 두고 길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목장 조금 떨어진 곳에는 개울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말들에게는 물의 향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하였다. 모하멧은 말들이 그가 부는 뿔피리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도록 계속해서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말들이 목이 말라서 미칠 지경까지 가자 목장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말들은 미친 듯이 개울을 향해 달려갔다. 말들이 거의 개울가에 다다랐을 때 모하멧은 뿔피리를 세게 불었다. 그러자 100마리 말 중 단 4마리 말이 뿔피리 소리를 듣고 발굽으로 땅을 디디고 서서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마호멧은 이 4마리 말을 갖고서 세계에서 제일가는 아라비아 종마를 개발했다는 것이다.10

 

말 들이 본능을 뛰어넘어서 뿔피리 소리에 순종하다니. 요즘 세대는 인간 본능을 거스르거나 억제하는 것을 비인간적이라 평한다. 배고프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배를 채워야 한다. 남녀관계도 서로가 좋으면 본능에 따라서 함께 살아간다.

 

그 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본능을 뛰어넘는 삶을 요구하고 있다. 주님의 이러한 요구는 우리의 인간적 본능을 억제하고 비인간적인 사람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능을 정화된 차원의 삶으로 이끌어주시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당신이 부르실 때, 아무리 본능을 거스른다고 해도 그 부르심 앞에서 즉시 멈추고 그분을 바라다보라고 부르신 것이다.

 

한 평범한 사람이 하느님의 뿔피리 소리를 듣고서 멈추어 서서 뛰어난 하느님의 사람이 된 경우는 이 세상에서 허다하다. 우선 예수님의 첫 제자였던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 야고보가 있고, 바울로, 베네딕도, 프란치스코, 마더 데레사 등 수많은 사람이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있다.

 

 

(2) 모든 것을 버리고

 

가 족과 재물과 생계를 위한 모든 수단을 내던지고.

이 들 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과 작별한 첫 번째 인물들은 아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어린 아들을 서원에 따라서 성전으로 보내야 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세상을 위해 내어놓아야 했다. 성서는 하느님 나라 때문에 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을 살며시 보여줄 뿐이다.

 

오 늘날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파견되는 이들이 가족들을 떠나야 한다. 푸른 눈과 높은 코를 지닌 서양인이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한국인 선교사들이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모든 사람에게 재물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시는가? 가진 소유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는가?

 

아 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으면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응답할 수는 없다. 모두가 다 성 안토니오처럼 자기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사막에 들어가서 은수자가 된다던가 성프란치스코처럼 아버지와 재산을 다 내버리고 가난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아 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 그리고 바르나바, 프리스킬라, 아퀼라, 리디아 같은 제자들은 모두 다 부자였다. 그러나 주를 위해 헌신한 깨끗한 부자였다.

 

주 님이 부름 받은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세상 재물과 명예에 대한 탈착의 마음이다. 주어진 재물과 명예의 소유주가 아니라 위탁자가 되어서 행동하는 것이다.

 

(3) 주님의 뒤를 따라감

 

이 부분은 앞서 부르심의 내용을 공부할 때에 <내 뒤를 따르시오> 부분에서 공부하였다.

 

제자직의 대가들.

어 떤 사람이 예수에게 말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습니다.”(루가 9,58).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 됨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계속적인 불확실성과 불안한 삶을 영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족의 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요구되는 대표적인 대가는 인륜의 덕을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가 14,26).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

화를 베풀러 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된 사람이 제 아버지를 거스르고 딸이 제 어머니를 거스르고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스르도록 갈라놓으러 왔습니다. 각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 식구들일 것입니다."(마태 10,34-36)

 

왜 예수는 당신 제자들이 가족의 끈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요구하는가?

 

주 님과 함께 하늘나라 건설을 위해서 수고하려고 할 때 훼방꾼이 제일 먼저 가족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들을 오해하고 어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예 수 자신도 가족으로부터 오해와 박해의 체험을 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가 미쳤다 해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다녔다. 그들은 병자를 낫게 하는 예수님을 신적 능력을 소지한 존재로 보기보다 악령에 사로잡힌 자로 보았다. 또 예수가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세리들, 창녀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면서 그가 집안 망신을 시킨다고 생각하였다. 거기다가 예수가 무력을 동원해서 로마에 항거할 것을 주장한 열성당원 출신까지 제자로 부르는 것을 보면서 예수로 인해서 온 집안이 몰락하게 될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런 저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적대시하였다.

 

예 수가 제자들에게 가족들의 끈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은 요구한 것은 오늘날 정신 병리학적,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정 신병원에 가서 환자들과 얘기해 보면, 대다수의 환자들이 가족과의 사이에서 어떤 문제를 갖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적 평화를 깬 사람이 이웃 사람, 고용주, 친구인 경우는 드물다. 거의 대부분이 가족들이 문제였다.

 

심 리학자 웨인 다이어는 한 번 그의 강의에 참석한 800명의 청중들에게 평소가 자기를 누구로부터 희생을 당하는지 써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83%가 가족으로부터 희생당하고 있다고 썼다. 서로 사랑한다는 가족이 나의 원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가족 구성원이 저마다 상대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나와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 나를 소유하고 나의 인생을 결정하는데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가족 사이에서는 기대하는 바가 많기에 그만큼 상처도 깊이 받는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베풀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평화를 베풀러 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던지러 왔습니다. 사실 나는, 자식된 사람이 제 아버지를 거스르고 딸이 제 어머니를 거스르고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스르도록 갈라놓으러 왔습니다. 각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 식구들일 것입니다."(마태 10,34-36)라고 말했던 것은 가정의 혼란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족들로 인해서 그 소명의 삶을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 아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모의 영향을 비교적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이었다. 예수 자신이 30살가량 되었으니 그의 제자들 대다수는 그보다 젊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 젊은이들은 나이가 18세 이상이 되면 결혼을 하도록 되었기에 제자들 중 다수가 가족이 딸려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가 내게로 오면서, 제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를 ...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루가 14,26)고 말한 것이다.

 

가족을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선순위 안에서 그들을 대하라는 것이다.

 

예 수님에 대한 사랑이 진실할 때 가족을 향한 사랑도 진실 될 것이다.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가족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우선이 되어야 한다. 만일 예수님보다 사람을 더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미움으로 바뀔 수 있다.

 

그 리스도인 문학가로 서구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C. S. 루이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있다 할 때,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가능하려면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상에서 내게 가장 귀한 사람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배웠을 때, 비로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지금보다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사랑이 감해지거나, 하느님 대신에 가장 귀한 사람을 사랑하려 할 때에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것이 첫 번째 위치에 놓였을 때에 두 번째 것은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증가하는 것을.”9

 

하 느님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사랑도 더 완성되어지고 깊어진다. 그런데 주의할 점이 있다. 가끔 보면, 하느님 사랑에 너무나 우선적인 나머지 그러니까 봉사자 활동이다, 이웃사랑이다 하면서 정작 자기 가족을 소홀히 여기는 이들이 있다. 자기 가족을 소홀히 한다면 그 사람을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한 사랑은 함께 깊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주위사람들을 향한 관계도 보다 더 향기롭고 진실하게 된다.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집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도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마르 8,34).

 

오 늘날처럼 예수님을 따르는데 자기 부인이 필요한 시대도 없다. 오늘날은 자기 PR 시대를 넘어서서 공주병 왕자병 왕비병에 걸려 있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우선적으로 중요시하고 자신을 우상시하고 있다.

 

<공주병 우스개 소리>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두 자로 줄이면?

또 나

그럼 세 자로 줄이면?

역시 나

이번에는 네 자로 줄이면?

그래도 나

그럼 다섯 자로 줄이면?

다시 봐도 나

 

공주병의 합병증

 

공주 히스테리: '나보다 예쁜 애는 없다니까 왜들 그래!!'

공주 강박관념: '누가 뭐래도 내가 제일 예쁜 건 사실이야'

공주 알레르기: '난 사과나무만 봐도 두드러기가 나는 거 있지'

공주 자폐증: '내가 너무 예쁘니까 다들 날 싫어해'

공주병 말기: '나 죽으면 경복궁 뒤뜰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세요.'

 

요 즘에는 공주병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다고 한다. 필통병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펜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펜들을 필통병에 담아두듯이.

많은 이들이 자신을 우선적으로 중요시하고 자신을 우상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인정하여야 한다.

 

●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는 자기 부정

 

여 태까지는 자기를 버린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옛 인간’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합니다.”(에페 4,22-24 필자 직역)

 

‘옛 인간’을 벗어버리는 이유는 순전히 ‘새 인간’을 입기 위해서이다. 새 인간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형성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행동양식을 본받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우 리는 애초 하느님의 모상 안에서 창조되었고, 죄로 인해 타락하였지만, 주 예수님의 모상 안에서 다시 새롭게 창조된 존재이다.

우 리가 자신을 부인하기를 거부하면, 결국 부인되지 않는 자아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부인할 때에는 가장 완전한 인격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옷 입게 될 것이다. 탐욕이 아니라 절제가, 이기심이 아니라 관대함이, 비열함이 아니라 고결함이, 잔인함이 아니라 온유함이 우리 안에 들어차게 될 것이다.

 

사 도 바오로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 라고 말했을 때, 여기서 ‘나’는 바로 옛 인간을 가리킨다.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 죄와 약함, 그리고 주님의 뜻에 일치되지 못하고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는 자아를 가리킨다. 바오로는 이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할 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주의할 점. 자기 부정은 자기 멸시와 다르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과 자신을 멸시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보는 것은 크게 다르다.

자 신을 못난 존재,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겸손한 사람들이 아니라 교만한 사람들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자들이 된다. 달란트의 비유를 기억해 보라(마태 25,14-30).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달란트를 부여하신다. 첫 번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두 번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세 번째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들은 하느님이 부여해준 달란트를 갖고서 최선을 다하였다. 하지만 세 번째 사람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여겼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한 달란트밖에 없다.”하면서 그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 썩혔다. 결국 하느님을 모욕한 것이다.

 

다 시 말하지만 자기 부정이 건강한 자아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이라 말했는가? “내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지 않았던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려면, 내 몸에 대한 즉 자신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실 자기 사랑이 타인 사랑보다 우선되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소방관이 불을 끄러 갈 때에는 먼저 불길에서 자기 몸을 보호해줄 방화복을 입어야 한다. 그래야 불을 끄고 다른 이의 인명을 보호할 수 있다.

 

우 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서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은 소방관이 장비를 잘 갖추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은 지금 욕망과 혼돈이라는 불길에 휩싸여 있다. 건강한 자기 사랑이라는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그 불길 속에 뛰어든다면 영혼들을 돕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우리 자신마저 불길에 휩싸일 것이다.”

 

두 번째 주의할 점. 진정한 자기 부정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위한 부정이 아니다. 옛날 옛적 마을 가까운 숲에 성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숲 속을 산책하던 중 방울뱀과 마주치게 되었다.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면서 뱀은 성자를 물려 하였다. 하지만 성자가 미소를 짓자, 방울뱀은 물기를 그만두었다. 성자는 뱀에게 이것저것 좋은 말씀을 들려주면서 마을 사람들을 해치지 말라고 하였다. 성자의 말에 감복한 뱀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일주일 후 성자가 산책을 하다가 그 뱀을 다시 만났는데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뱀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성자에게 원망을 털어놓았다. “당신이 가르친 대로 했다가 내가 당하게 된 이 꼴을 보세요. 내가 착한 뱀이 되어 아무도 물지 않았더니 모두가 다투어 나를 죽이려 들지 않겠어요. 지금 내 꼴을 보세요.” 성자가 뱀을 답답하다는 듯이 바라다보며 말하였다. “이 보게, 방울뱀. 내가 언제 쉬익쉬익 소리까지 내지 말라고 했나. 그냥 물지 말라고 했지.”

 

십자가를 지고.

 

예 수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것을 요구하면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한다.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마르 8,34-35).

 

예 수님의 이 가르침은 세상의 가르침과 너무나 다르다. 세상은 “가장 현명한 노선을 따라가 성공하라.”고 가르치는데, 예수는 당신을 따라서 죽으라고 가르치신다. 세상은 “자기 목숨을 자기가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데, 예수는 자기 목숨을 챙기려는 사람은 누구나 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 기서 "제 십자가를 지고"는 일차적으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란 말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이 이 점을 명백히 한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마르 8,35).

 

모욕과 박해 받음 그리고 순교 등 고난이 제자직의 필수적 표지라는 것은 복음서에 자주 나온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거든 여러분에 앞서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알아두시오. ...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을 상기하시오. 종이 제 주인보다 더 높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여러분 또한 박해할 것이요, 그들이 내 말을 지켰으면 여러분의 말 또한 지킬 것입니다.”(요한 15,18.20)

 

또 주님은 팔복선언 마지막 축복에서

 

“그대들은 복되도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그대들을 반대하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그대들은 기뻐하고 신명내시오.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는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대들에 앞서 간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했습니다.”(마태 5,11-12).

 

마 지막 말 “사실 그들은 그대들에 앞서 간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했습니다.”는 제자들이 겪을 고난에 대해서 의미를 제공한다. 구약의 파견된 자들, 즉 예언자들이 이스라엘로부터 거부당하였고 배척된 것처럼, 새로운 계약의 봉사자들인 제자들도 고난을 받을 때 참 제자의 모습을 갖는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순교한다는 것이다. 순교에는 적색순교와 백색순교 두 종류가 있다. 적색순교란 피를 흘리며 순교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피의 색깔이 붉은 색이기에 적색순교라 하는 것이다. 백색순교란 실제로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순교하는 것을 가리킨다. 적색순교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백색순교는 신앙의 자유가 있든지 없든지 살아가는 동안 매일매일의 삶에서 이루어진다. 적색순교는 위 성경본문 곧 마르 8,34-35에서 언급하고 있다. 한편 백색순교는 루카 9,23에서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 선 적색순교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본다.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들 모두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처음부터 복음을 위해서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각오를 하라는 요구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신앙범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여기서 신앙범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그 신앙을 갖는 사람은 신앙범 곧 신앙적 범죄자로 간주된다.

 

이 제부터는 백색순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대다수는 아무리 피 흘리며 순교 당하려고 해도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한다.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의 나라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박해가 있다. 백색순교다.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백색 순교는 붉은 피를 흘리고 죽는 적색 순교에 대비해서 나온 표현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 수님은 ‘날마다’란 단어를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 앞에 넣고 있다.이는 우리가 한평생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을 ‘나를 부르셨던 그분’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그분’으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우리를 부르시어 날마다 십자가를 지도록 요구하신다.

 

오 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겪게 되는 백색 순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인내하고 극기하는 삶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 영혼들과의 관계, 자신과의 관계에서 하늘나라 건설에 도움이 된다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인내하며 극기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본다. 기도하는 생활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기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꾸준히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지? 이럴 때 극기 인내하는 것이 백색순교다.

 

또 하루 24시간 매일같이 주님의 제자로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는 것,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들을 충실히 해내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잊힌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이럴 때 하늘나라를 위하여 극기 인내하는 것이 또한 백색순교다.

 

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백색순교다. 공허한 결혼생활을 회복하고자, 또 더 이

상 교감도 없고 희생만이 요구되는 자식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자기 온 마음을 담아 다시 한 번 결심하고 실행하는 것이 백색 순교다. 상대의 입장이 돼서, 또 내 그릇을 조금 더 넓혀서, 상대를 비난하고 미워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받아주려고 노력하면서 상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는 것이 백색 순교다.

 

또 인간적 교만이나 우월감을 멀리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시기, 질투, 경쟁, 습관적인 거짓말, 무절제, 사치 등등의 자신의 악습을 매일같이 성찰하고 그 악습을 이기려고 애쓰는 것이 백색 순교다.

 

또 정규적으로 운동하는 것도 하나의 백색 순교다. 우리의 몸은 주님의 성전이기에 그 몸을 잘 돌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정규적으로 운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인내를 요구하는지?

 

예 수님께서 매일 같이 십자가를 지시고 당신을 따르라 하셨으니, 예수님의 이 요구를 어떻게 채워드릴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내가 오늘 지고 가야 할 백색 순교가 무엇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우 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매일같이 백색순교의 삶을 기꺼이 살고자 애쓸 때 우리에게는 주님으로부터 큰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비록 외적인 환경은 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마음 속에 채워지는 지속적인 평화와 사랑,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를 보게 되는 성장하는 믿음, 점점 더 뚜렷해지는 목적의식과 삶의 의미, 단단하게 서있을 수 있는 희망 등이 주어진다. 반대로 백색 순교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계속되는 불안과 분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지 못하고 불신과 무력감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꺼이 지고 가야 할 매일의 십자가를 지지 않음으로써 그 괴로움을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그 괴로움을 강화시킬 것이요, 끝내는 참아 견딜 수 없는 불행을 맛보게 될 것이다.

 

목 에 칼날이 들어와 단 번에 죽임을 당하는 치명보다는 바늘로 끊임없이 찔림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치명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한 번에 고통을 겪는 적색 순교보다는 계속해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백색 순교가 더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미 국에서 남북전쟁이 벌어지던 당시 건장한 젊은 장교가 링컨 대통령의 비서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총을 잡고 싸우지 않고 사무실에서 펜대를 잡고 있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불평을 터트렸다. “내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려고 군인이 되었지 사무실에서 이런 일하려고 군인이 되었는가.” 어느 날도 그 장교가 불평을 터트리고 있었는데, 링컨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말하였다. “여보게. 자네가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리라는 걸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조국을 위해 살려는 흔연한 자세는 없지 않는가?”

 

오 스왈드 쳄버스(Oswald Chambers)의 말이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듯이 충동적 용기와 함께 물 위를 걷는 것이 마른 땅을 묵묵히 걷는 것보다 차라리 쉬울 수 있다.”

 

제자직 대가에 대한 종합정리.

 

어 느 사람이 <믿음: FAITH>이라는 단어의 영어 스펠링을 가지고

다 음같이 풀이하였다.

F...Forsaking(버리다, 포기하다)

A...All(전부)

I...I(나)

T...Take(취하다, 갖다)

H...Him(그분을)

 

즉 'FAITH is Forsaking All, I Take Him.'이라는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믿음이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오직 그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믿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취하는 것이다.

 

오 늘을 사는 나는 어떠한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세상 것을 버리지 않고 간직하지는 않고 있는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삶을 좇기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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