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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안전

[칼럼초고] 원전은 엑스포가 아니다ㅡ보상금 공모제가 파괴하는 안전과 민주주의

작성자이원영|작성시간26.06.18|조회수75 목록 댓글 0

[칼럼초고] 원전은 엑스포가 아니다ㅡ보상금 공모제가 파괴하는 안전과 민주주의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AI 구글제미나이3 +AI Claude Sonnet 4.6


정부 정책에서 '공공성'과 '안전'이라는 가치가 자본의 논리에 밀려날 때, 공동체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을 입는다. 최근 한국수력원자력이 영덕군을 대형 핵발전소 2기 건설 후보지로, 기장군을 소형모듈원전(SMR) 건설 후보지로 선정한 과정은 대한민국 원자력 행정이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주민의 생명과 직결된 위험시설의 입지를 결정하면서, 정부는 마치 엑스포나 월드컵 유치 경쟁을 붙이듯 막대한 재정적 보상과 인센티브를 내걸고 지자체 간의 경쟁을 부추겼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검토해야 할 공공행정이 돈을 매개로 위험을 거래하는 '시장 행위자'로 전락한 현 상황은 학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규탄받아 마땅한 시대역행적 퇴행이다.

모욕적 행정

공공의 영역에 시장의 메커니즘이 침투했을 때 발생하는 도덕적 타락과 시민성의 붕괴는 이미 세계적인 석학들에 의해 엄중히 경고된 바 있다.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그의 저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 위험시설 입지 과정에 현금성 보상을 전면에 내거는 행정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샌델은 시장 논리가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시장 사회(Market Society)'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안전이나 환경정의 같은 공공적 가치가 자본과 거래되는 순간 그 가치의 본질이 오염되고 만다고 논증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그리고 사서는 안 되는 민주적 합의의 영역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매수'하려 할 때 사회적 신뢰는 뿌리째 흔들린다.

스위스의 경제학자 브루노 프라이(Bruno Frey)와 펠릭스 오버홀처-기(Felix Oberholzer-Gee)는 이러한 현상을 계량경제학적으로 증명하여 행정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두 연구자는 스위스 핵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을 둘러싼 주민 의식조사를 통해, 국가적 필요성을 '시민적 의무'와 '공동체적 책임'으로 설득했을 때 과반수 주민이 유치에 찬성했으나, 동일한 상황에서 현금 보상을 제안하자 찬성률이 절반 이하로 급락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The Cost of Price Incentives*, American Economic Review, 1997). 두 사람은 이를 '동기 위축 효과(Motivation Crowding-Out)'라고 명명했다. 안전과 공공성을 논해야 할 자리에 '돈'이 개입하는 순간, 주민들이 가졌던 시민적 책임감과 내적 동기는 순식간에 밀려나고 오직 이기적인 경제적 이해관계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돈을 걸고 벌이는 공모제는 주민을 '시민'이 아닌 '청부업자'로 취급하는 모욕적 행정이다.

대한민국의 원전 및 방폐장 부지 선정의 잔혹사는 바로 이 샌델과 프라이의 경고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되어 온 비극의 역사다. 2003년 부안 핵폐기장 사태를 돌아보라. 당시 정부는 막대한 현금 보상과 지역 개발 공약을 앞세워 자발적 유치 신청을 유도했으나, 결과는 온 동네가 찬반으로 갈라져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민란 수준의 유혈 사태였다. 공공성 유지를 위한 설득 대신 보상금이라는 우회로를 택한 대가는 참혹했다.

이후 정부가 고안해 낸 궁여지책이 바로 2005년 경주 중저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 당시 도입된 '주민투표와 현금 인센티브 공모제'였다. 3,000억 원이라는 유치지역 지원금과 한수원 본사 이전 카드를 내걸고 경주, 군산, 영덕, 삼척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넣었다. 겉으로는 주민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친 듯 보였으나, 실상은 절박한 지역 경제를 볼모로 잡은 '돈의 전쟁'이었다. 지자체들은 향응과 홍보에 혈안이 되었고, 주민 간의 불신과 반목은 극에 달했다.

그 결과로 선정된 경주 방폐장은 이후 수없는 안전성 논란과 활성단층 위험에 직면하며 사회적 비용을 수배로 치러야 했다. 보상금에 눈이 멀어 과학적 안전성과 지질학적 타당성을 뒷순위로 미룬 '절차적 정당성 상실'의 대표적 사례다. 이후 삼척과 영덕에서도 신규 원전 유치를 둘러싸고 행정이 돈으로 여론을 호도하려다 주민들의 강력한 주민투표 저항에 부딪혀 계획이 백지화되는 진통을 겪었다.

무책임한 발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수력원자력이 이번에 발표한 영덕과 기장의 신규 원전 및 SMR 후보지 선정 방식은 과거의 실패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두 입지의 성격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영덕의 대형 원전은 검증된 기술이지만 고준위 폐기물과 대규모 사고 위험을 동반하는 시설이고, 기장의 SMR은 아직 상용 실적이 없는 실험적 기술이다. 정부 스스로 2030년대 초반 건설허가를 전제로 2035년 국내 상용화를 목표로 내걸고 있으니,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술의 부지를 먼저 '공모'로 선점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책임하다. 위험의 크기와 성격이 다른 두 시설을 같은 방식으로 지역 간 경쟁에 부쳐서는 안 된다.

엑스포나 월드컵처럼 '우리 지역에 유치해 달라'고 경쟁해야 하는 국책사업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위험시설은 사업자인 한수원이 완벽한 안전성을 입증하고 주민을 겸허하게 설득해야 할 대상이지, 지자체들이 간택을 받기 위해 재롱을 떨며 경쟁해야 할 시혜성 사업이 아니다.

행정이 보상금을 미끼로 경쟁을 조장하는 사이,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주민들은 '돈이냐, 안전이냐'라는 부당하고 잔인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이 과정에서 생명과 환경정의라는 절대적 가치는 실종되고, 주민들은 찬반으로 갈라져 원수가 된다. 지역의 절박한 재정 현실을 이용해 위험을 전가하는 구조를 제도화한 것은 매우 비열한 행정 편의주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갈등과 위험의 강요가 과장된 수요 전망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하계 최대전력 수요가 2024년부터 2038년까지 연평균 2.4%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으며, 2038년 목표수요를 129.3GW로 설정했다. 발표 당시부터 전문가들 사이에서 과도한 전망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국회입법조사처 연구(2024)도 "2038년 목표수요 129.3GW가 과도한 전망이라는 지적이 있다"고 명시했다. 또한 계획은 장기(2033~2038년) 설비예비율을 22%로 설정했는데, 이는 10차 계획과 동일한 수준임에도 재생에너지 실효용량 과소평가 등이 맞물려 신규 원전 확대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AI와 원전은 무관하다

AI·반도체 수요 급증을 감안하더라도 에너지 효율 향상, 수요관리,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제대로 반영한 정상적인 예측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2035년 이후의 신규 대형 원전 건설이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SMR 전국 상용화 계획은 대폭 축소될 수 있다.

마침 기후부 전력국장도 최근 "반도체·AI 데이터센터발 전력 수요 폭증에는 태양광+ESS가 더 적합하다"고 공식 발언했다(MTN, 2026.6.16). AI시대 주력 에너지원을 둘러싼 논쟁의 향방이 이미 바뀌고 있다.
https://news.mtn.co.kr/news-detail/2026061613421198948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올리는 추가적인 원전탑이 아니다. 이미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도를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신규 원전을 짓겠다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핵폐기물과 사고 위험이라는 지울 수 없는 짐을 떠넘기는 무책임의 극치다. 기후위기 시대의 진정한 해법은 핵발전의 확대가 아니라,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재생에너지 중심의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에 있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에 촉구한다. 돈을 내걸고 지역을 이간질하는 부당한 부지 선정 방식을 즉각 중단하라.
영덕의 신규 원전 계획과 기장의 SMR 부지 선정을 전면 재검토하고, 왜곡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원점에서 다시 짜야 한다. 생명과 안전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될 수 없다.
자본의 유혹으로 시민의 눈을 가리고 지역을 파괴하는 반민주적 행정을 멈추지 않는다면, 정부는 국민의 거대한 저항과 역사적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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