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테네를 계승할 한국 민치제—강렬한 주인의식을 구슬로 꿸 때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옛날 어르신들은 구슬을 잔뜩 쏟아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한국 민중은 지금 그 상황에 놓여 있다. 민주주의의 구슬을 누구보다 많이, 누구보다 피 흘려 모아왔다.
4·19, 5·18, 6월항쟁, 두 번의 촛불혁명, 그리고 내란 대통령의 탄핵까지. 그런데 그 구슬들이 아직 실에 꿰이지 않았다. 광장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다시 낡은 함지박 속으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왜 그럴까.
답을 찾으러 잠시 동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보자.
천자를 찾는 중국, 손님으로 사는 일본
중국의 역사는 놀랍도록 일관된 문법으로 반복된다. 민중이 봉기한다. 하늘이 혼란해진다. 그리고 민중은 새로운 천자를 찾는다. 맹자가 정식화한 역성혁명의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의 명(天命)을 잃은 군주는 갈아치우되, 반드시 새로운 천자를 세워야 한다. 거지 출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고, 농민 출신 유방이 한나라를 열었다. 봉기는 체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체제를 재가동한 것이었다. 오늘의 시진핑 체제 역시 그 문법의 연장선에 있다. 황제라는 이름만 지웠을 뿐, 단일 결정자의 신성화 구조는 그대로다.
일본은 더 철저하다. 기미가요(君が代)를 들어보라. "임금의 치세여, 천 년 만 년, 작은 돌이 큰 바위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주어는 오직 천황이다. 민중은 노래 속에 존재조차 없다. 손님이다. 천황의 치세라는 집에 세 들어 사는 존재들. 그러니 봉기의 문법 자체가 구조적으로 억제된다. 신의 혈통에 저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대만은 흥미로운 변형이다. 손문의 삼민주의는 이념의 틀을 제공했지만, 국민당은 그 이념을 내걸고 38년간 계엄통치를 했다. 민주주의는 위에서 열어준 것처럼 보인다. 장징궈가 야당 설립을 허용했고, 리덩후이가 총통 직선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위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했던 것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이미 임계점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2·28 학살의 기억을 가슴에 품은 본성인(本省人)들의 "우리 땅을 우리가 다스리겠다"는 열망이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결과였다.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 오드리 탕의 실험도 그 토양 위에서 꽃피운 것이다.
단군이 남긴 것, 그리고 '우리'라는 언어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이 다른가. 뿌리부터 다르다.
중국의 천자는 하늘의 명을 독점한다. 일본의 천황은 신의 혈통 자체다. 권력의 정당성이 철저히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그런데 한국의 건국 이야기는 구조가 다르다. 단군은 나라를 세우고 홍익인간의 이념을 남겼다. 그리고 물러났다. 창시자가 영속적 지배 혈통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 이것은 군주의 덕목이 아니라 공동체의 목적이다.
권력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이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언어에도 그 감각이 새겨져 있다. 한국어에서 '우리'는 이상한 단어다. "우리 엄마", "우리 집", "우리 남편" — 영어로 직역하면 말이 안 된다. 엄마는 나 혼자의 엄마인데 왜 '우리'인가. 이것은 소유의 언어가 아니라 공속(共屬)의 언어다. 개인이 공동체 안에 녹아 있는 존재론적 감각이 언어에 수천 년 동안 축적된 것이다. '우리나라' — 일본의 '와가쿠니(我が國)', 중국의 '조국(祖國)'과 견주어 보라. '나의 나라', '조상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소유하는 나라'다. 공동 주인의식이 언어 자체에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봉기는 새로운 천자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자는 자격이 없다"는 심판이다. 홍익인간의 이념을 배반한 자를 끌어내리는 것이지, 더 강한 권력자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테네 이래 민주주의를 이룰 역사적 역량으로 치면, 한국 민중만큼 강한 나라를 찾기 어렵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항의 역량과 설계의 역량 사이
그러나 솔직히 말해야 한다.
민주주의 역량에는 두 층위가 있다. 저항의 역량과 설계의 역량이 그것이다.
저항의 역량 — 잘못된 권력을 끌어내리는 능력. 여기서 한국은 세계 최강 수준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봉기 이후 민중은 어김없이 설계권을 대리인에게 넘겨왔다. 광장의 에너지는 선거장으로 향했고, 당선된 자에게 다시 일임했다. 한국 민중이 권력의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알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은 단일화되어야 효율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집합적 혼란보다 대리인에게 맡기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인가. 노회찬이 외쳤듯이, 20년 동안 고기는 수없이 바뀌었는데 불판은 여전히 그대로다.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고, 촛불혁명을 두 번 일으켰으며, 내란 대통령까지 탄핵했다. 그런데 셀프 입법 특권은 여전하고, 공천 파동은 4년마다 반드시 되풀이된다. 문제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반복해서 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설계의 시도가 너무 적었다. 저항은 눈부셨지만, 새로운 집을 짓는 과정에서 민중은 늘 빠져나갔다. 민중은 문을 열었지만 새 집의 설계는 엘리트와 관료에게 넘어갔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반복된 비극이다.
아테네가 위대했던 진짜 이유
아테네 민주주의가 위대했던 것은 저항 때문이 아니었다. 설계 때문이었다. 시민들이 민회에서 직접 법을 만들었다. 공직은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맡았다. 선거는 탁월한 자를 뽑는 귀족주의적 원리지만, 추첨은 모든 시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적 원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갈파했다. "선거는 귀족주의의 원칙이다."
세계는 이미 이 실험을 다시 시작했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무작위 추첨으로 뽑힌 160명의 시민에게 선거제 개혁을 맡겼다. 11개월의 숙의 끝에 나온 결론에 찬성률 91%가 나왔다. 아일랜드는 수십 년간 정치인들이 건드리지 못한 낙태권과 동성결혼 문제를 시민의회에 넘겼고, 9개월 만에 결론을 냈다. 사회는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정치인이 대신 결정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 스스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시민의회를 일회성이 아닌 상설 기구로 제도화했다.
반도의 지정학이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대륙의 강인함과 해양의 유연함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반도는, 외부의 기술과 제도를 흡수하는 데 유리하면서도 스스로를 지켜낼 조건을 동시에 갖는다. 압력 앞에서 설계한 자가 문명이 되었다. 그리스가 그랬고, 로마가 그랬다. 이제 한국이 그 선택 앞에 서 있다.
파일럿 시민의회, 구슬을 꿰는 첫 실
지금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국민 발안의 실현노력과 함께 파일럿 시민의회를 준비하고 있다. 1천명이 1인당 10만 원을 모아 파일럿 시민의회의 운영 준비를 하고 있다. 추첨으로 뽑힌 150명의 시민이 실제로 선거제 개혁안과 의원 특권 폐지 방안을 만드는 실험이다.
왜 10만 원인가. 서명은 공짜라서 헌신이 없다. 100만 원은 부담이 커서 망설인다. 10만 원은 진심을 가진 사람을 걸러내는 필터다. 10만 원을 낸 사람은 이해당사자가 된다. 성공을 바라는 능동적 지지자가 된다. 이 모금 행위 자체가 이미 새로운 위임의 형식이다. 분노의 에너지를 숙의의 테이블로 옮겨오는 것, 광장의 에너지를 설계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 이것이 지금 한국이 시작하려는 일이다.
기득권은 설득되어서 권한을 내준 적이 없다. 언제나 버틸 수 없을 만큼의 압력이 왔을 때, 혹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날 것 같을 때 비로소 움직였다. 파일럿 시민의회가 성공적으로 작동하는 장면이 공개될 때, 두 가지가 동시에 증명된다. 추첨으로 뽑힌 평범한 시민 150명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선거제도 개혁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사안을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두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지를.
한국 민중에게 묻는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2,500년 전 지중해의 작은 도시국가에서 꽃피웠다. 그것이 위대했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현명해서가 아니었다. 소멸의 압력 앞에서 그들이 기다리는 대신 설계했고, 대리하는 대신 직접 참여했기 때문이다.
한국 민중은 지금 그 동일한 선택 앞에 서 있다. 4강의 각축장 한가운데, 핵지뢰를 걸어내고 방패를 나누고 시민이 직접 핸들을 잡는 민치제(民治制)를 열고 분단의 접경에 인류의 거점을 세우는 것. 이 설계가 하나로 작동할 때 한국은 비로소 새 문명을 여는 주축이 될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한국 민중은 구슬을 모아왔다. 이제 실을 꿸 차례다. 파일럿 시민의회는 그 첫 번째 실이다. 아테네가 지중해에서 문명을 열었듯, 한국이 반도에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장을 여는 날이 오고 있다.
한국민중의 역량은 탁월하다. 이제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 사진은 2025년1월 광화문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