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초고] 경주최부자댁이 말하는 '부의 상한선'과 '공유부'의 이치ㅡ 지구촌의 철학으로
이원영(국토미래연구소장).+ AI 구글제미나이3 + AI Claude Sonnet 4.6
2026-06-12
자전거는 페달을 멈추면 넘어진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이 꼭 그렇다. 내년에 올해보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고, 더 많이 증식하지 않으면 붕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달리는 길의 끝에 절벽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멈추어야 한다. 그러나 멈추면 넘어진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 문명이 처한 구조적 딜레마의 본질이다.
유한한 지구 위에 무한한 물질적 증식을 허용하는 경제 시스템이 이치에 맞는가. 자명한 질문이다. 그러나 주류 자본주의 체제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기술 혁신을 내세우거나, 효율 개선을 들먹이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며 질문 자체를 유예한다.
그 사이에 기후위기는 가속되고 생태계는 무너진다. 이 글은 자본주의라는 엄연한 현실을 무작정 부정하자는 이상주의적 주장이 아니다. 폭주하는 현실을 가장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인류가 생존을 위해 선택해야 할 미래 방향을 논하고자 하는 실천적 모색이다.
후손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자본주의
이 부조리한 무한 증식이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교묘한 '비용 전가(轉嫁)'에 있다. 자본주의의 회계 장부는 지구가 수억 년에 걸쳐 축적한 화석연료·광물·깨끗한 물과 공기를 공짜나 헐값으로 기입한다. 채굴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태계 파괴, 온실가스 배출, 공동체 붕괴라는 막대한 비용은 재무제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경제학이 '외부효과(Externality)'라 부르는 이 비용들은 지구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게 조용히 떠넘겨진다. 자본의 무한 증식은 이렇게 정당한 이치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기다.
공정하게 말하면, 비용 전가의 문제는 어느 한 에너지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태양광 패널의 희토류 채굴은 채굴지 생태계를 황폐화하고, 수명 다한 풍력 블레이드는 매립지에 쌓이며, 대규모 재생에너지 설비는 농지와 생물 서식지를 잠식한다. 모든 에너지원은 저마다의 외부효과를 지구에 전가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 원자력에너지는 비용 전가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규모와 시간 지평,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이익을 취하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가의 구조가 다른 에너지원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원전문제의 본질
사용후핵연료, 즉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은 수백 년 안에 독성이 크게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플루토늄 등 장수명 핵종은 수천 년에서 수만 년에 걸쳐 서서히 줄어든다. 핀란드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 처분장 온칼로(Onkalo)를 완공하는 데 수십 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비용의 크기를 웅변한다.
문제는 기술의 가능 여부가 아니라 회계의 정직성이다. 이 처분 비용이 전력 원가에 정직하게 반영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 후 도쿄전력의 천문학적 손실을 결국 일본 국민 전체가 세금으로 메운 것이 그 증거다. 단기적 이익은 사유화하고, 초장기적 위험 비용은 국가와 후세대에 전가한다. 이것이 원전 경제학의 구조적 본질이다.
원전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방사성 폐기물의 물리적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비용을 누가 부담하느냐는 정치경제적 구조의 문제다. 수조 원대의 초기 자본, 극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기술과 공급망, 국가 권력의 보증이 결합해야만 가동 가능한 원전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중앙집권적 통제의 전형이다. 건설과 운영의 이익은 특정 자본에 집중되고, 사고 위험과 폐기물 처리 비용은 사회 전체가 떠안는다.
반면 햇빛과 바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리쬐고 불어오는 공유부(Commons)다. 분산되어 있고, 민주적이며, 독점이 구조적으로 어렵다. 재생에너지도 대규모 송전망과 저장장치가 필요하고 새로운 비용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용의 귀속 구조는 원전과 다르다. 탄소 배출량이라는 하나의 잣대만으로 두 에너지원을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글로벌 기술 자본과 금융 세력이 앞다투어 소형 모듈 원전(SMR)과 원전 르네상스를 외치는 이유도 이 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를 돌리기 위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해지자, 자신들의 무한 성장을 멈추는 대신 새로운 집중형 에너지 독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기술 혁신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본질은 비용 전가 구조의 재건이다.
경주최부자댁이 보여주는 길
그렇다면 이 폭주를 어떻게 멈출 것인가. 이 글이 제안하는 것은 성장의 중단이 아니라 성장의 재설계다. 무한 증식을 향한 자본 독점 구조를 해체하자는 것이지, 기술 혁신의 동력을 꺼버리거나 개발도상국의 번영을 가로막자는 것이 아니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탈성장이 빈곤 고착화를 낳는다는 반론은 이 구분을 의도적으로 흐린다. 문제는 성장이냐 정체냐가 아니라, 성장의 과실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 비용이 누구에게 전가되느냐다.
서구 학계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철학자 잉그리드 로베인스(Ingrid Robeyns) 등이 '한계주의(Limitarianism)'라는 이름으로 극단적 부의 상한선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미 수백 년 동안 이 이치를 삶과 실천으로 증명해 온 위대한 선례가 있다. 바로 경주 최부자댁의 지혜다.
최부자댁이 대대손손 가문과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었던 핵심 비결은 소유의 상한선을 스스로 설정한 가훈에 있었다.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말라"는 선언은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명확한 부의 상한선 개념이다. 만 석이 넘게 들어오는 부는 과도한 탐욕이자 공동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독이 됨을 직관적으로 통찰했기에, 그 이상의 소유를 스스로 거부하고 사회로 흘려보낸 것이다. 이 상한선 설정은 곧바로 먹고사는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책으로 연결되었다.
"사방 백리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상한선 위로 넘쳐흐른 부가 어떻게 사회적 공유부로 작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이정표다. 내 이웃이 굶주리고 지역 경제가 붕괴하면 그 어떤 거대 자본도 홀로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최부자댁은 수백 년의 실천으로 증명했다.
인센티브가 파괴된다는 반론도 있다. 그러나 인류 문명을 진보시킨 위대한 혁신들의 진짜 동력을 들여다보면, 무한한 재산 증식이 유일한 인센티브였다고 보기 어렵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도 특허를 포기한 조너스 소크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것인가."
문제는 인센티브의 제거가 아니라 재설계다. 화폐 증식 대신 사회적 명예와 공동체 기여를 중심으로 인센티브를 재구성하는 시스템은 이론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가능하다. 최부자댁이 그것을 이미 살아냈다.
자본 도피 우려도 마찬가지다. 기후위기와 방사능 오염은 국경을 인식하지 않는다. 지구라는 단 하나의 수족관에서 일부 자본이 옆 칸으로 이동한다 해도, 수족관의 물 자체가 썩어들면 그 자본가들 역시 공멸을 피하지 못한다. 국가 단위의 규제를 넘어 지구 차원의 공유부 선언과 부의 상한에 관한 국제적 규범이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유부 문명을 열어가야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이미 우리 역사 안에 있다. 현대판 만 석의 선(線)을 법과 제도로 규정하여 대기업의 독점적 이윤과 초자산가들의 극단적 부의 축적에 사회적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한선을 초과하여 확보된 공유 자산은 주거·에너지·기초 먹거리 등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재를 공동체적으로 보장하는 재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헨리 조지가 토지가치세를 통해 공동의 것을 공동에게 돌려주자고 했던 논리는, 오늘날 에너지와 데이터 영역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토지와 에너지와 데이터의 독점이 현대 자본주의 무한 증식의 세 가지 축이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통제를 잃고 무한히 증식하며 주변의 건강한 조직을 파괴하는 현상을 우리는 암이라 부른다. 지구라는 유기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익의 사유화와 비용의 사회화를 반복하며 팽창하는 자본의 질주는 정확히 같은 성격이다. 암세포가 "내가 무한히 커져야 이 몸의 경제가 산다"고 강변한들, 그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만 석의 선을 긋고, 사방 백리를 살린 그 오래된 설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찾는 답이다. 지구에 한계선이 엄연히 존재하듯, 인간의 탐욕에도 멈춤선이 필요하다. 압력 앞에서 설계한 자가 문명이 되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압력의 이름은 지구의 한계다.
경주최부자댁 안채 전경 @이원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