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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초고] 고인돌은 소금창고였는가?ㅡ한반도 거석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가설

작성자이원영|작성시간26.06.13|조회수139 목록 댓글 0


[칼럼초고] 고인돌은 소금창고였는가?ㅡ한반도 거석문화의 수수께끼를 푸는 가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AI 구글제미나이3 + AI Claude
2026-06-13

요즘 유튜브에서 즐겨 보는 동물의 왕국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백두산 호랑이, 곧 시베리아 호랑이 이야기다. 무대는 한반도와 가까운 시호테알린 산맥의 광대한 숲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산맥이 바다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호랑이가 새끼를 기를 때는 안정적인 먹이가 필요하다. 그 먹이인 초식동물들은 풀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것을 찾아 움직인다. 바로 소금, 곧 미네랄이다. 사슴이든 멧돼지든 짠 기운이 도는 물가와 노두(露頭)를 주기적으로 찾는다. 포식자는 그 길목을 안다. 호랑이가 바다 가까운 '범의 언덕'에 자주 출몰하며 숲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숲의 권력자는 소금이 모이는 길목에 자리를 잡는다.

생태계의 이 단순한 이치가 나를 오래된 질문으로 이끌었다. 인간 사회의 권력자는 어디에 자리를 잡았을까. 그리고 왜 한반도에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몰려 있는가.

무덤론이 답하지 못하는 질문

한반도와 인접 지역에는 세계 고인돌의 절반에 가까운 4만여 기가 밀집해 있다.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이것을 청동기시대 지배자의 무덤으로 배워 왔다. 그러나 이 설명은 정작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비껴간다.

왜 하필 그 자리에, 그 구조로 지었는가?

고창 죽림리 고인돌 군락을 보라. 440여 기가 해발 15~65m의 등고선을 따라 야산 기슭에 줄지어 서 있다. 무덤이라면 마을과 가까운 평지가 자연스럽다. 그런데 고인돌은 한결같이 주변보다 약간 높은 구릉 사면을, 그것도 농경지와 산림이 만나는 경계선을 고집한다. 시신을 안치하는 데 덮개돌이 사방으로 크게 튀어나올 까닭도 없다. 수십 톤짜리 돌을 수백 명을 동원해 운반한 이유가 단순한 위세 과시라면, 왜 내부는 그토록 정밀한 밀폐 구조인가.

무덤론은 고인돌의 '의미'는 설명하지만, 고인돌의 '형상'과 '입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여기서 나는 학계에 하나의 가설을 던지고자 한다.

"고인돌은 무덤이기 이전에, 공동체의 가장 귀한 자산을 지키는 보고(寶庫)이기도 했던 것은 아닌가."

는 가설. 그 자산의 가장 유력한 후보가 소금이다.

네 가지 물리적 단서

고인돌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네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온다.

첫째, 덮개돌이 사방으로 벽석보다 크게 튀어나와 있다. 현대 건축의 처마와 같은 원리로, 위에서 내리치는 빗물을 막아 낸다.

둘째, 그 덮개돌의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한다. 소수의 침입자가 밤중에 결코 들어 올릴 수 없는 구조다.

셋째, 전체가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식별할 수 있는 표식이다.

넷째, 자리를 보면 어김없이 야산 기슭 등고선을 따른다. 집중호우가 쏟아져도 물이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입지다.

무덤 설계라면 이 넷 가운데 어느 하나도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그러나 무언가 썩거나 녹으면 안 되는 것, 빗물과 도둑으로부터 함께 지켜야 하는 것을 보관하는 설계라면, 넷 모두가 의미를 얻는다.

강화도의 어느 고인돌. 상판이 넉넉할 정도로 넓다. 이 곳은 바닥에도 돌이 깔려있는 것이 관찰된다. @ 위키백과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 하나가 남는다. 고대인들은 왜 그 무거운 상판을 그토록 힘겹게 들어 올렸을까. 수십 톤의 덮개돌을 수백 명이 달라붙어 들어 올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국가적 토목 사업이었다. 시신을 덮는 데라면 흙을 쌓으면 그만이다. 굳이 저 무게를 공중으로 띄워야 할 까닭이, 무덤론에는 선명하지 않다.

상판을 높이 들어 올려야만 생기는 기능이 있다. 바로 처마다. 덮개돌이 공중에 떠 있어야 사방으로 튀어나온 처마가 만들어지고, 그 처마 아래 공간이 빗물로부터 보호된다. 무게를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처마를 만들기 위해 그 무게를 감당한 것이라고 본다면 어떨까.

나는 고고학계에 이 질문을 던진다.

"수십 톤의 덮개돌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합리적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방수(防水)라면, 고인돌은 무엇을 비로부터 지키려 했는가."

소금이라는 절대 가치

고대 사회에서 소금은 신진대사의 필수재이자 음식 보존의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소금 없이는 겨울을 나기 어려웠다. 썩지 않는 가치로서 훗날의 화폐에 가까운 위상을 지녔다. 소금을 쥔 자가 공동체의 생사를 일정 부분 쥐었다. 권력의 위임은 그런 자리에서 싹튼다.

한반도 서해안은 소금 생산의 지리적 조건을 빼어나게 갖추고 있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곳은 9m 안팎에 이르고,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갯벌과 리아스식 해안의 복잡한 만(灣)이 펼쳐진다. 바닷물을 졸여 자염(煮鹽)을 만드는 데 이만한 환경은 동아시아에서도 드물었다.

그리고 최근, 이 서해안 소금 경제의 뿌리가 생각보다 훨씬 깊다는 사실이 북녘에서 드러났다.

5천 년 전의 소금 공장

2026년 4월,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남포시 온천군 원읍노동자구 일대에서 5,000~5,500년 전의 소금 생산·저장 시설을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바닷물을 모아 졸이던 자염 시설과, 함수(鹹水)를 담아 두던 반구형 저장 시설이 함께 나왔다.

흥미로운 것은 그 보관 공학이다. 아래쪽 문화층에서는 바닷물이 지하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닥에 나무재(목탄재)를 두껍게 깔고 그 위에 진흙을 이겨 바른 방수·차수층이 확인되었고, 위쪽 문화층에서는 오랜 세월 소금물에 절여져 굳어 버린 진흙 퇴적층이 드러났다. 발굴팀은 흙의 염도를 주변 토양과 비교해 이곳이 실제 소금을 다루던 자리였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다만 신중하게 말해 두자. 이 유적은 '소금 생산'의 증거이지, 그 자체로 '고인돌이 소금창고였다'는 증거는 아니다. 두 유적을 직접 잇는 물증은 아직 없다. 게다가 시기로 보면 이 소금 시설(5천 년 전 안팎)은 한반도 고인돌이 본격적으로 세워진 시기(대략 기원전 1500~300년)보다 오히려 앞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의미심장하다. 고인돌이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이 땅에는 이미 소금을 굽고 정교하게 보관하던 기술 전통이 가동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금 경제가 먼저 있었고, 그 위에 거석 문화가 얹혔다. 권력의 토대가 먼저였고, 그 권력의 기념물이 나중이었다고 본다면, 순서가 어긋나기는커녕 자연스럽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충북 청주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으로 1만3천~1만5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오른다. 중국 양쯔강 유역의 벼보다 이르다고 한국 학계는 본다. 다만 이것이 사람이 길들인 '재배벼'인지 야생벼인지는 국제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며, 발굴을 이끈 연구자조차 단정을 피해 '기원벼'로 불렀다는 점은 정직하게 적어 둔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잉여 곡물이 생긴 곳에서는 그것을 절이고 보존할 소금의 수요도 함께 자란다. 이 땅의 소금에 대한 갈망은 결코 얕지 않았다.

거석을 보는 또 하나의 눈 — 영역의 표지

거석을 무덤이나 종교 시설로만 보지 않은 시각은 이미 고전적 권위를 갖고 있다. 영국의 고고학자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 1937~2024)는 일찍이 유럽의 거석을 농경 공동체가 자신들의 영역과 토지 소유권을 시각적으로 선포한 '영역의 표지(territorial marker)'로 해석했다. 거석을 짓는 일은 사회적 조직을 요구하고, 그 조직은 우두머리를 낳는다고 그는 보았다.

렌프루의 무대는 유럽이었고, 그가 소금이나 한반도를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거석을 '죽음의 기념물'에서 '땅과 권력의 선언'으로 옮겨 읽은 그의 통찰은, 한반도 고인돌을 다시 보게 한다. 야산 기슭 등고선 위에 줄지어 서서 농경지와 강줄기를 내려다보는 고인돌 군락 — 그것이 누군가의 영역과, 그 영역이 통제하는 무언가를 선포하는 표지였다면, 그 '무언가'의 자리에 소금을 놓아 보는 것이 이 가설이다.

보고(寶庫)이자 무덤 — 이분법을 넘어

고인돌은 창고인가, 무덤인가. 필자는 이분법을 의심한다. 고인돌은 처음부터 보고(寶庫)이면서 무덤이었을 수 있다. 공동체의 귀한 자산과, 그 자산을 관리하던 주인이 같은 돌 아래 봉인된 공간. 생전에는 자원을 통제하는 거점으로, 사후에는 그 권력의 정통성을 수호하는 신성한 자리로 이어진 것.

이 보고론은 무덤론의 반론들을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초기부터 인골이 발견된다"는 지적에는 이렇게 답한다. 보고는 처음부터 그 소유자와 함께였다. 살아서는 관리자로, 죽어서는 수호자로.

"내부 공간이 협소하다"는 지적에는 이렇게 답한다. 보고는 곳간이 아니라 금고다. 대량 보관이 아니라, 화폐처럼 쓰이던 가장 귀한 것만 들어가는 공간이다.

"지상 노출이 약탈 위험을 높인다"는 지적에는 이렇게 답한다. 보고는 숨기지 않는다. 권력자의 자산임을 천명한다. 수십 톤 덮개돌이 곧 그 선언이며, 소수의 도적이 밤중에 열 수 없는 구조 자체가 가장 강한 방호다.

물론 이 모두는 아직 증명이 아니라 해석이다. 그러나 무덤론이 비껴간 자리에 또 하나의 합리적 설명을 세워 볼 가치는 있다.

강을 따라 흐른 소금, 산을 따라 선 돌

동아시아 내륙에도 소금이 없지는 않았다. 중국 산시의 윈청 염호(運城 鹽池)나 쓰촨의 자염정(自貢)처럼 이름난 내륙 소금 산지가 있었다. 그러나 광대한 인구를 먹이기에 내륙 소금만으로는 늘 모자랐을 가능성이 크고 운반도 쉽지 않다. 소금배로 실어나를 수 있는 해안의 자염은 동아시아 소금 공급의 또 하나의 큰 동맥이었으리라. 갯벌의 축복 속에서 자염을 장악하고, 이를 안정적으로 보관할 수 있었던 세력이라면, 그 위에서 압축적이고 강인한 문명의 에너지를 길러 낼 만하다.

역사교과서에 수록된 한민족의 강역

한반도 고인돌의 밀집 지역을 지도 위에 표시하면 서해안과 대동강·한강·금강·영산강 유역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해안의 소금을 강줄기를 타고 내륙으로 실어 나르는 물류의 동맥과 겹친다. 해안에서 구운 소금을, 강을 따라 옮기고, 야산 기슭의 돌 아래 봉인하며, 교역을 통제하는 — 고인돌 군락이 그런 네트워크의 흔적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검증을 청하는 나의 지리경제학적 가설이다.

범의 언덕에서 소금 길목을 지키는 호랑이처럼, 야산 기슭 등고선 위에서 강줄기를 내려다보는 고인돌 군락. 숲의 권력자와 인간 사회의 권력자는 같은 자리에 섰는지도 모른다.

학계에 던지는 질문

이 글은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다.

고인돌의 물리적 구조와 입지는 무언가를 '지키는' 조건을 동시에 충족한다. 세계 고인돌의 절반이 한반도에 집중된 것은 문화적 우연인가, 지리경제학적 필연인가. 고인돌 군락지와 고대 제염 유적의 공간 분포는 한 번이라도 체계적으로 겹쳐 분석된 적이 있는가. 고인돌 내부의 미세 잔류물에서 염분이나 해양 유기물의 흔적을 찾는 시도는 가능한가.

고고학자들에게 묻는다. 무덤론은 고인돌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러나 고인돌이 왜 하필 야산 기슭 등고선을 따라, 왜 하필 그 무거운 상판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구조로 지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아직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인류 최초의 권력은 어쩌면 그것은 갯벌에서 구워졌다고.

*이 글은 학술적으로 검증된 결론이 아니라, 고고학계에 검토를 요청하는 지리경제학적 가설임을 밝힌다. 본문에 인용된 북한 남포 제염 유적(2026년 4월 조선중앙통신 보도)과 소로리 볍씨, 고창 죽림리 고인돌의 분포 수치는 보도·공개 자료에 근거하며, 콜린 렌프루의 견해는 그의 '영역 표지론'에 한정해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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