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미래 시론] 정의선과 젠슨 황의 새만금 — '제2의 화성', RE100 인큐베이터를 상상한다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 여러 AI들
2026-06-15
들어가며 — 같은 땅, 두 개의 장면
2020년 11월, 새만금 산업단지 5공구의 빈 들판에 SK그룹이 2조 1천억 원을 묻겠다고 약속했다. 200메가와트(MW) 수상태양광 사업권을 인센티브로 받아, 그 재생에너지로 RE100을 달성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데이터센터'를 짓겠다는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 그 자리에는 첫 삽도 뜨지 못한 빈 땅과, 기다리다 떠나간 기업들의 흔적만 남았다.
2026년 6월, 같은 새만금을 두고 또 하나의 장면이 펼쳐졌다. 현대차 정의선 회장과 엔비디아 젠슨 황이 양재 사옥에서 마주 앉아, 9조 원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로봇 제조·에너지 인프라 구상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젠슨 황은 새만금을 한국의 'AI 밸리'라 불렀다. 엔비디아의 최종 참여는 아직 조율 중이지만, 이 구상의 파문은 투자 금액의 크기를 훨씬 넘어선다.
언론의 시선은 두 거두의 제스처에 모여 있다. 그러나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같은 땅에서, 한쪽은 6년을 멈춰 섰는데 다른 한쪽은 무엇을 다르게 풀려 하는가. 그 차이를 읽지 못하면, 이번 구상도 또 한 장의 협약식 사진으로 끝날 것이다.
SK는 왜 6년을 멈춰 섰는가 — 송전 병목이라는 현실
국내 전력망은 '지역 편중'과 '인프라 부족'이라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서남해안의 신재생 잠재력은 풍부한 수준이지만, 정작 전력이 절실한 수도권으로 이를 실어 나를 장거리 송전망이 턱없이 부족하다. 밀양 송전탑 사태가 보여 주었듯, 선로 하나 새로 까는 데 드는 갈등과 시간의 벽은 이제 행정력만으로 단기간에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SK의 좌초가 바로 그 벽의 증거다. 부지도 사업권도 명분도 갖췄으나, 발전 전력을 보내고 받을 계통연계가 끝내 풀리지 않으면서 사업은 표류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SK의 실패는 '재생에너지 옆에 짓겠다'는 발상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발상은 옳았다. 무너진 것은 그 발상을 떠받칠 '계통'과 '전력의 출렁임을 다스릴 수단'이었다. 100~150MW를 한순간도 끊김 없이 요구하는 5만 장급 GPU 데이터센터를 포화 상태의 수도권에 밀어 넣는 일이 모순인 이상, 발전원 곁으로 가는 방향 자체는 누구에게나 필연이다.
'에너지 지산지소(地産地消)' — 관건은 '양'이 아니라 '시간'이다
새만금 내측에는 기본계획상 약 3.0기가와트(GW)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단지가 추진되고 있다. 다만 그 내막을 정확히 보아야 한다. 이 3GW의 대부분은 수상태양광(약 2.8GW)이고, 흔히 함께 거론되는 해상풍력 4GW는 인근 서남권(고창·부안·군산) 해역의 별도 사업이다. 즉 새만금 내측의 전력은 압도적으로 '낮에 몰리는 태양광'이다. 이 사실이 '지산지소'의 논리를 완성하는 동시에, 그 진짜 난점을 드러낸다.
먼저 완성하는 쪽이다. 이곳의 무공해 전력을 수도권으로 압송하면 천문학적 선로 건설비와 송전 손실(통상 4~5%)을 떠안아야 한다. 반면 발전원에서 수 킬로미터 이내의 배후부지에 데이터센터를 앉히고 직접전력구매계약(PPA)으로 직결하면, 그 비용과 손실은 대부분 사라진다. 생산지와 소비지를 한 공간에 포개는 '에너지 지산지소' 구조다.
주목할 것은 이 논리가 외부 학자의 해석이 아니라 사업 주체가 스스로 내건 생존의 언어라는 점이다. 현대차는 잉여 전력으로 수소를 만드는 수전해 플랜트와 '지산지소형 에너지 순환'을 명시했고, 새만금개발청도 이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 제대로 살펴볼 사안들이 있다. 3GW는 '설비용량'이지 실제 발전량이 아니다. 태양광 이용률을 15% 안팎으로 잡으면 평균 실출력은 설비용량의 한 토막에 불과하고, 그나마 해가 떠 있는 낮에 쏠린다. 반면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것은 24시간 365일, 단 1초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상시 일정한 기저부하'다. 따라서 핵심 질문은 "전력이 충분한가"가 아니다. 총량은 넉넉하다. 진짜 질문은 "출렁이는 전력을 끊김 없는 전력으로 어떻게 바꾸어 낼 것인가" — 곧 간헐성을 길들이는 '퍼밍(firming)'의 문제다. 양은 이미 답이 나와 있고, 승부는 시간에서 갈린다.
현대차는 무엇이 다른가 — 출렁임을 스스로 삼키는 자
이 대목이 SK와 현대차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SK는 '재생에너지 옆'이라는 입지의 논리는 가졌으되, 그 전력의 출렁임을 스스로 삼킬 '저장·역송의 역량'은 외부에 의존해야 했다.
반면 현대차는 그 역량을 사업 구조 안에 내장하고 있다. 배터리, 수소, 그리고 수만 대의 모빌리티 함대 — 이것이 SK에는 없던 무기다. 간헐성 해법은 따로 떨어진 기술 항목이 아니라, '왜 하필 현대차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 그 자체다.
그 무기는 세 갈래로 맞물린다.
첫째, V2G(Vehicle-to-Grid)의 활용이다. 낮에 남아도는 태양광을 새만금에 집적될 전기차(EV)와 목적기반모빌리티(PBV) 함대의 배터리에 채워 두었다가, 야간이나 피크 시간에 전력망으로 되돌린다.
V2G는 보통 보조적 유연성 자원으로 취급되지만, 대규모 모빌리티 플랫폼이 한 공간에 결합하는 특구에서는 송배전 투자를 일부 대체하는 '가상발전소(VPP)'로 예외적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둘째, 그린수소 연계다. 낮의 잉여 전력으로 수전해 플랜트를 돌려 수소를 만들어 저장했다가, 부족한 시간대에 연료전지로 되돌리는 경로다. 전력→수소→전력의 왕복에서 60~70%가 손실되어 효율이 30~40%에 그친다는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수소는 장기 저장과 비상 기저부하를 떠받칠 보루이기도 하다.
셋째, 한전 계통과의 제한적·보완적 연계다. 여기서 앞의 '송전 병목'과 모순처럼 보이는 지점을 정직하게 풀어야 한다. 새만금에서 불가능한 것은 '생산 전력을 수도권으로 빼내는 신규 장거리 송출망'이지, '단지 안의 자가소비와 제한적 양방향 연계'가 아니다. RE100은 매 순간 물리적으로 재생에너지만 쓰라는 뜻이 아니라 녹색프리미엄·PPA·인증서(REC)를 결합한 '회계적·제도적 기준'이다. 일부 계통 전력을 섞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재생에너지 총량을 새만금 안에서 확보·상쇄하면 RE100 달성에는 무리가 없다.
결국 어느 하나의 단독 플레이가 아니라, 태양광·V2G·수소·계통백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하이브리드 제어 시스템과, 이를 떠받칠 전력시장 제도·인센티브 설계가 동시에 요구된다. 에너지공유부의 설계에 대한 기대도 키워갈 수 있는 곳이다.
'제2의 화성' — 제조 인큐베이터의 부활과 RE100 해방구
중요한 본론은 이제부터다.
AI 데이터센터(두뇌)와 모빌리티 플랜트(심장)가 안착하는 순간, 산업 생태계의 네트워크적 속성상 이를 떠받칠 제조 생산 체인과 부품 공급망이 자석처럼 끌려온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경기도 화성의 경험과 모순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서울 영등포·구로에 밀집했던 금형·주조·정밀가공 등 뿌리산업이 지가 상승과 규제를 피해 화성 팔탄 일대로 대거 옮겨 갔다. 시제품을 빠르게 깎고 맞추고 고쳐 주는 이 집적이 있었기에, 현대차 남양연구소와 기아 화성공장, 삼성전자 반도체라는 전방산업의 거인들이 세계를 무대로 뛸 수 있었다. 화성은 대한민국 최고의 제조업 인큐베이터였다.
그러나 그 번영에는 그늘이 있었다. 계획 없는 규제 완화 아래 개별 필지 중심으로 들어선 '나홀로 공장'의 난개발은 산하를 헤집었고, 도로·용수·폐수 처리 같은 공공 인프라의 마비와 환경 파괴, 관리비용 폭등이라는 '마이너스 외부효과'를 낳았다.
더욱이 2026년 오늘, 화성을 비롯한 수도권 남부 제조 기지는 새로운 아킬레스건에 직면해 있다. 취약한 RE100 역량이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글로벌 바이어의 압박은 이제 대기업을 넘어, 부품과 금형을 납품하는 중소 협력업체에까지 탄소 배출 증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지가가 폭등하고 부지가 고갈된 수도권 공장 지대에서 중소 금형업체가 자체적으로 재생에너지를 조달할 길은 사실상 없다. 가만히 앉아 글로벌 공급망에서 밀려날 위기에 놓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새만금은 화성의 어려움을 넘어설 해방구가 된다. 화성이 가졌던 인큐베이터의 DNA를 광활한 배후부지에 이식하되, 난개발을 되풀이하지 않고 처음부터 국가가 집단화·계획화한 '스마트 제조 클러스터'로 수용하는 전략이다. 새만금의 RE100 인프라 안에서 탄소 배출 없는 제조 공정을 실증하고 시제품을 찍어낼 거점을 제공한다면, 생존을 좇는 수도권의 위기 기업들은 스스로 이곳으로 향할 것이다.
다만 이 추세는 시장의 신뢰를 획득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릇만으로는 안된다.
두뇌(데이터센터)와 심장(모빌리티) 곁에 이를 실시간으로 떠받칠 신체(첨단 금형·제조 인큐베이터)가 결합하는 순간, 하청계열까지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가 두터워진다. 새만금의 광활한 부지가 바로 그 그릇이다. 디지털과 피지컬이 융합된 미래 산업의 메가 클러스터가 서해안에 들어서는 것이다.
군산 익산의 뛰어난 접근성과 상수원
대기업의 지방 이전을 논할 때마다 정책가들이 부딪히는 유령이 있다. "공장은 지어도, 수도권의 고급 엔지니어와 숙련공이 과연 내려오겠는가"라는 인력 정주의 벽이다. 허허벌판에 아파트와 학교부터 짓느라 수십 년을 끌어 온 기존 혁신도시 모델은 이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새만금에는 군산이라는 인접도시뿐 아니라 '익산'이라는 성숙한 배후도시와 'KTX 고속철도망'이라는 열쇠가 있다.
익산은 교육·의료·주거·상업·문화 인프라가 두루 갖춰진 호남의 거점이며, 호남선·전라선 KTX·SRT가 교차하는 철도 허브다. 용산이나 수서에서 익산까지 1시간 10~20분. 화성 남부 난개발 지대에서 강남이나 분당 본사로 출퇴근하는 시간과 견주어도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쾌적한 거리다.
군산만 하더라도 장항선이 있고 천안아산과 연계된 철도접근성이 뛰어나다.
게다가 작년11월에 정부는 '익산–새만금'을 잇는 철도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실시간 일일생활권'이 완성될 것이다.
게다가 백두대간의 수자원이기도 한 용담댐의 넉넉한 광역상수원 계획도 확보되어 있다.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한 정밀산업의 수요에도 대응력이 갖춰졌다.
흥미로운 것은 이 40~50km가 약점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새만금에서 낮의 태양전기를 채운 통근용 전기차가 저녁에 익산으로 돌아가 밤의 도시전력 일부를 되돌린다면, 차량은 그 자체로 '에너지를 실어 나르는 저장장치'가 된다. 단지 firm화를 맡을 상주 함대와는 별개로, 익산에 더해지는 분산 저장 자원인 셈이다.
새 인구를 담을 익산 서부 신시가지의 아파트단지를 처음부터 이러한 에너지융합단지로 설계한다면, 통근의 거리는 부담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력망이 된다.
결론 — 입지의 논리는 찾았다, 이제부터다.
국토 균형발전과 에너지 전환은 역대 정부가 천문학적 재정과 촘촘한 규제를 동원하고도 늘 제자리걸음이던 난제였다. 정부가 당위와 명분만 앞세워 기업을 지방으로 떠밀 때, 시장은 차갑게 냉소했다.
이번 구상이 주목받는 까닭은, 강요가 아니라 민간 기업이 사활을 건 '생존 전략'으로 스스로 그 구조적 해법을 찾아 대안 공간으로 발을 옮기고 있다는 점에 있다.
수도권의 에너지문제와 RE100 부재라는 위기 속에서 기업이 찾아낸 정답이, 바로 새만금의 지산지소와 firm화 역량, 그리고 익산이라는 배후 정주 여건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같은 땅에서 SK가 6년을 멈춰 선 비극과 견주면, 그 가치는 더욱 선명하게 대조된다.
그러나 민간이 찾아낸 것은 '입지의 논리'이지 '설계' 그 자체가 아니다. 데이터센터를 어디에 앉힐지, 출렁임을 어떻게 삼킬지는 기업이 답할 수 있다.
그러나 난개발 없는 계획적 클러스터화, 전력시장 제도 정비, 광역 교통 연계, 송·변전 용량의 사전 확정, 중소 협력업체의 질서 있는 수용 — 이 모두는 시장이 아니라 '설계의 역량'이 떠맡아야 할 몫이다.
민간이 좌표를 찍어 주었으니, 이제 그 좌표를 '설계'로 옮길 컨트롤타워와 시장의 관심과 그것을 떠받칠 공적 의지가 있느냐 — 거기에 진짜 성패가 달려 있다.
그러니 우리가 새만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한 대기업의 초대형 투자에 기계적으로 박수를 보내기 위함이 아니다.
빈 땅 위에 6년간 서 있던 협약식 사진을, 이번에는 '설계된 국토'로 바꾸어 낼 수 있느냐 — 에너지 공유부를 포함한 그 시험대가 막 열렸기 때문이다. 좌표는 이제 상상되고 있다. 남은 것은, 그 위에 누가 어떻게 채색을 하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