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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원리 연재

권력의 원리ㅡ명제 23.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작성자이원영|작성시간26.06.22|조회수20 목록 댓글 0

[제5부 군자론 혹은 참모론]

명제 23 —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문어는 뇌의 60%가 팔 안에 분산되어 있다. 중앙에서 명령하지 않는다. 각 팔이 스스로 판단한다. 그러면서도 전체는 하나로 움직인다. 문어는 어떤 환경에도 적응한다. 바위처럼 보이거나 모래처럼 보이거나 산호처럼 보인다. 어떤 형태도 취할 수 있다. 고정된 형태가 없다. 고정된 역할이 없다. 그것이 문어를 가장 유연한 생존자로 만든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문어는 비유를 보여준다.

까마귀는 도구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사회적 관계를 관리한다. 탁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능력이 아니다. 여러 능력을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특정 역할에 고정되지 않는다. 그것이 까마귀를 조류 중 가장 높은 지능을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1. 뜻풀이

공자는 말했다.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그릇은 정해진 용도가 있다. 밥그릇은 밥을 담는다. 그릇은 특정 용도로만 쓰인다.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진 자다. 고정된 역할에 갇히지 않는 자다.

이것이 왜 권력의 원리에서 중요한가. 권력을 사용하는 자는 끊임없이 변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전쟁이 오면 장수가 되어야 하고 평화가 오면 경영자가 되어야 하고 위기가 오면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하나의 그릇에 갇힌 자는 그 상황이 끝나면 쓸모없어진다.

군자불기는 깊은 뿌리에서 나오는 유연성이다. 인(仁)이라는 뿌리. 사람을 향한 마음이라는 뿌리. 그 뿌리로부터 어떤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는 것이 군자불기다. 뿌리는 고정되어 있다. 가지는 유연하다.


2. 관중과 마키아벨리의 생각, 그리고 다른 주요 인사들

관중은 군자불기의 가장 완전한 실천자였다. 군사 전략가로서 새로운 군사 편제를 설계했다. 경제 전략가로서 소금과 철의 국가 관리를 구축했다. 외교 전략가로서 존왕양이의 명분으로 제후들을 모았다. 행정 설계자로서 마을·향·수·국의 구조를 만들었다. 어느 하나의 그릇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뿌리는 하나였다. 백성의 배를 채우는 것.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갖춰야 할 유연성을 사자와 여우의 비유로 설명했다. 사자는 힘이 있지만 함정에 빠진다. 여우는 영리하지만 늑대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군주는 사자이면서 여우여야 한다. 이것이 군자불기의 마키아벨리적 표현이다.

플레처가 말한 고유지능의 네 가지 — 직관, 상상력, 감정, 상식 — 가 함께 작동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전체를 볼 수 있다.
▷ 앵거스 플레처 Angus Fletcher. 미국 스토리텔링 연구자. 직관·상상력·감정·상식의 네 가지로 구성된 '고유지능'이 공황·분노·혼란의 함정을 극복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이 네 가지가 군자불기의 현대적 토대다.


3. 역사적 사례

제갈량 — 군자불기의 동양적 완성

군사 전략가로서 적벽대전을 설계했다. 경영자로서 촉한의 내정을 정비했다. 외교가로서 오나라와의 동맹을 유지했다. 발명가로서 목우유마를 만들었다. 법가로서 엄정한 법 적용으로 신뢰를 구축했다. 뿌리는 하나였다. 한실부흥(漢室復興)이 백성을 구한다는 것. 그 하나의 원칙으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세종 — 군자불기의 왕

왕이라는 그릇에 갇히지 않았다. 학자로서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설계했다. 과학자로서 장영실을 등용했다. 음악가로서 아악을 정리했다. 의학자로서 향약집성방을 편찬했다. 왕이라는 하나의 그릇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다는 하나의 뿌리로부터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포키온 — 군자불기였지만 비극의 주인공

아테네의 포키온은 군자불기를 가장 철저하게 살다 간 인물이다. 어떤 역할에서도 인(仁)과 의(義)로 움직였다. 민회에서 항상 소수 의견이었다. 아첨하지 않았다. 70세가 넘도록 아테네 시민들은 포키온을 따랐다. 하지만 억울한 반역죄로 독배를 마셨다.

공자의 14년 유랑. 정도전의 죽음. 포키온의 독배. 군자불기를 살다 간 자들의 공통된 운명이 비극이었다. 이것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은 긴장이다. 군자론만으로는 권력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 그러나 군자론 없이는 권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비극에는 역설적인 위안이 있다. 브라이언 클라스는 500명이 넘는 권력자를 인터뷰한 끝에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권력은 그것을 갈망하는 자들을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 갈망이 강할수록, 권력을 쥔 뒤의 부패도 커진다. 반대로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 자들 — 다른 가치를 위해 권력을 도구로만 쓰는 자들 — 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부패의 인력에 덜 끌린다.
▷ 브라이언 클라스 Brian Klaas, 1986~. 미국 정치학자. 런던대(UCL) 글로벌정치학 교수. 저서 《Corruptible》(2021)에서 500명 이상의 권력자를 인터뷰해 권력이 사람을 부패시키는 동시에 애초에 부패하기 쉬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는 이중 메커니즘을 밝혔다. 처방으로 추첨제와 시스템 설계의 개혁을 제시했다.

군자불기가 비극으로 끝나는 이유는 바로 그 반대편에 있다. 권력을 갈망하지 않는 자는 권력의 게임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아첨하지 않고, 줄을 서지 않고, 권력 자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라스의 발견은 이것을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로 돌려놓는다. 군자가 매번 패배하는 것은 군자가 약해서가 아니다. 권력을 갈망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설계된 구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법은 군자에게 더 강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갈망하지 않는 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4. 종합정리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관중은 군사·경제·외교·행정을 동시에 설계했다. 마키아벨리는 사자와 여우가 동시에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제갈량은 군사·경영·외교·발명·법을 동시에 했다. 세종은 학자·과학자·음악가·의학자·군사가였다. 모두 군자불기였다.

군자불기는 깊은 뿌리에서 나오는 유연성이다. 인(仁)이라는 뿌리가 있어야 어떤 방향으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뿌리가 깊다고 저절로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클라스가 보여줬듯, 권력의 구조 자체가 갈망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 있다면, 아무리 깊은 뿌리도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군자불기는 한 사람의 인격에서 끝나지 않는다. 군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것까지가 군자불기의 완성이다.

명제 23. 군자는 한정된 그릇이 아니다. 문어가 어떤 형태도 취할 수 있듯, 군자는 어떤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릇이 아닌 자는 권력의 게임에서 구조적으로 불리하다. 갈망하지 않는 자가 살아남으려면, 갈망하는 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그 구조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삼국지의 중요인물 제갈량. 군자불기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진은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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