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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탈원전이야기

[이병진 코너] 독일 원전기술자였던 클라우스 트라우베 Klaus Traube

작성자상생21|작성시간20.12.19|조회수202 목록 댓글 0

2011년 3월 21일 독일 일간지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에 실렸던 기사의 주요내용을

이병진선생이 소개합니다.

 

최초의 원자력 탈퇴자 클라우스 트라우베 (2011.3.21.faz 기사)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전에 이미 트라우베는 원자력 관리자에서 원자력 반대자가 되었다. 일찍이 <<초대형 원전 방사능 유출 사고 후>나 <<플루토늄 경제>> 등과 같은 책들을 썼던 트라우베의 원전 반대 운동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 매우 극적으로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나기 오래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위대한 기술이 지금까지 한번도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는 인간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것이며 사람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여기는 가상 시나리오에서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전부 예측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나라인 미국의 스리마일 섬에서 1979년 핵이 일부 녹아내리는 원전 사고가 일어났고 독일에서도 여러번 초대형 방사능 누출 사고가 일어날 뻔 했던 것이다.

사울이 바울이 되었듯이 원자력 관리자에서 원자력 비판자로 돌아선 트라우베의 행적은 정치적으로 매우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근거를 내세운 기술자였다. “나는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이었다.”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여 1972년 사민당에 입당, 사회민주주의자로 활동했던 트라우베는 원자력 반대 시위를 벌였던 68세대에게 초기 원자력 반대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1970년대에 원자력 반대운동이 시작될 때만 해도 트라우베는 당시 독일 사람들이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그랬듯이 아직 원자력 옹호자였다. 민간의 목적을 위해 핵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은 생산력의 해방으로, 미래의 과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브라운슈바이크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뮌헨 대학에서 열역학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클라우스 트라우베는 1959년 원자력 산업체에 고용되었다.

당시 원자로에 큰 매력을 느끼던 재능 있는 젊은이 중의 하나였던 트라우베는 AEG/무선전신의 원자력 부서에 들어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경력을 쌓았고 그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샌디에고의 General Dynamics에서 일했다.

 

1970년 트라우베는 지멘스의 자회사인 인터아톰(Interatom)사 사장으로 부임했는데 이 회사에서 1972년에 개발하여 칼카르에 설치한 ‘증식형 고속 원자로’는 저렴한 비용으로 핵연료 순환을 가능하게 할 영구 설비의 모델로 큰 기대를 모았다. 1976년 트라우베는 적군파의 테러리스트들에게 핵물질을 공급했다는 혐의로 해고되고 독일연방헌법수호청으로부터 도청을 당하는 사건에 휘말렸으나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 후 트라우베는 원자력 관련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는데 그를 원자력 반대자로 돌아서게 만든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는 1972년 핵에너지와 서양의 발전 낙관론에 대한 의문을 던지면서 생태주의 운동의 씨앗을 뿌렸던 <로마 클럽>의 보고를 접하게 되었고 또 그는 원자력 매니저로 활동할 때 핵에너지에 드는 비용이 막대하다는 사실과 또 그 위험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브레멘에서 환경단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트라우베는 문명비판가가 되어 <<성장이냐 금욕이냐>>라는 책을 썼고 1981년에는 <<산업주의의 위기>>라는 책을 공동 집필하기도 했다.

트라우베는 자신이 기술 반대론자가 아니며 인구밀도가 높은 독일은 기술을 필요로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비판가의 입장에서 기술을 비판하는 그는 종이컵에 커피를 마시는 것을 문화 타락이라고 말한다.

트라우베는 여느 원자력 반대자들처럼 녹색당에 가입하는 대신 사민당에서 활동하면서 1970년대말 바뎀뷔르텐베르크주의 사민당이 탈원자력 결의문을 작성하는 데 기여했고 이후 2000년 적록 연정 정부에서 탈원자력 결의를 할 때까지 그 분야에서 권위적인 전문가로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 산업계와 일부 정치가들로부터 변절자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던 트라우베는 2009년 <환경‧자연 보호 연맹>에서 주는 연방공로십자훈장을 받았는데 그는 AEG 매니저로 일했던 사람의 딸이 자신의 아버지 눈에는 그가 계속 배신자로 남아있다고 한 말을 종종 즐겨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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