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9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기고원고
누가 결정하는가 — 핵을 움직이는 힘의 정체
연재 ① 핵발전소 문제의 본질
이원영 (국토미래연구소장, 전 수원대 교수)
결정의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
해마다 8월 6일이면 경남 합천에서 위령제가 열린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리는 자리다. 피폭된 조선인은 7만 명 안팎으로 추정되고 그 가운데 4만 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다. 대부분은 강제로 끌려갔거나 살길을 찾아 건너간 식민지의 사람들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의 고통은 2세와 3세에게로 이어져 81년이 지난 오늘까지 끝나지 않았다. 그 결정 어디에도 조선인은 고려의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이 핵이라는 물건이 인류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낸 방식이다. 결정하는 사람과 감당하는 사람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아직 살아 있다. 지난해 상반기, 우리 정부는 영덕과 기장을 신규 원전 부지로 정했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는 대형 원자로 두 기와 소형모듈원전 한 기가 못 박혀 있다. 묻고 싶다. 그 결정의 자리에는 누가 앉아 있었는가.
이 연재는 네 번에 걸쳐 그 물음을 따라간다. 오늘은 첫 번째 물음이다. 핵을 움직이는 힘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하나는 무기로, 하나는 에너지로
핵무기와 핵발전은 남남이 아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하나의 사업에서 폭탄이 나왔고, 같은 기술의 다른 얼굴로 발전소가 나왔다. 우라늄을 농축하는 설비와 플루토늄이 만들어지는 원자로는 그 자체로 무기의 문턱이다.
그래서 세계 최강의 핵보유국이 벌이고 있는 일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 손으로는 핵확산금지조약을 들어 다른 나라의 핵무장을 막고, 다른 손으로는 그 재료를 만들어내는 발전소를 팔라고 독려한다.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면서 우산 아래 나라에 플루토늄 생산 설비를 세우는 셈이다. 80년 넘게 이어져 온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 자신의 자리다. 한국은 이미 원전 수출국이다. 2009년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 수주는 국가적 경사로 보도되었다. 그러나 그 계약의 뒷면에는 한국수출입은행이 제공한 100억 달러에 가까운 정책금융이 있었다. 국민의 신용을 담보로 내주고 민간 금융자본에 안정된 수익을 보장해 준 구조다.
그리고 지난해 초, 한국수력원자력은 미국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식재산권 분쟁을 끝내면서 원전 한 기를 수출할 때마다 1조 원이 넘는 대가를 지급하고 북미와 유럽에서는 수주에 나서지 않기로 합의했다. 국산화를 자랑해 온 한국형 원전이 여전히 미국의 수출통제 아래 있음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핵을 움직이는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문서도 드물다. 우리는 이 모순의 바깥에 있지 않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
핵산업의 경제 구조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잘될 때의 이익은 사기업이 가져가고, 잘못될 때의 손실은 국민이 떠안는다.
도쿄전력이 그 교과서다. 사고 이전까지 이 회사는 수도권 전력을 독점 공급하는 지위를 누렸다. 요금은 높고 위험 비용은 장부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니, 대주주였던 금융기관들에게는 더없이 안정된 투자처였다. 그러다 2011년 3월이 왔다.
이듬해 6월 주주총회에서 도쿄전력은 사실상 국유화되었다. 1조 엔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면서 정부가 최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그 뒤로도 배상금과 제염 비용, 폐로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 대부분은 다시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갔다. 일본 정부가 2024년에 추산한 사고 대응비용만 26조 엔이 넘는다. 파산했어야 할 기업이 세금으로 살아나는 동안, 손실을 함께 져야 할 대주주들은 조용히 빠져나갔다.
문제는 이것이 일본만의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 정부는 1979년 스리마일 사고 이후 신규 원전을 사실상 짓지 않다가, 근래 들어 건설에 참여하는 금융기관에 정부 보증을 서겠다는 신호를 거듭 보내왔다. 위험까지 계산에 넣어 이윤을 보장해 주겠다는 말이다. 시장의 판단으로는 도저히 성립하지 않는 사업을 각국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부는 더 노골적이다. 2021년 국회는 원자력손해배상법을 고쳐 사업자의 배상책임한도를 세 배로 올렸다. 그런데 사고가 났을 때 실제로 지급할 수 있도록 미리 쌓아두게 한 배상조치액은, 법이 바뀐 지 다섯 해가 지난 지금도 시행령에서 예전 수준 그대로다. 법의 숫자만 세 배가 되고 피해자를 위한 안전망은 자리를 지킨 셈이다.
더 놀라운 것이 있다. 시행령은 한 부지에 있는 원자로를 최대 여섯 기까지 묶어 하나의 배상 단위로 삼는다. 후쿠시마가 바로 여러 호기가 한꺼번에 무너진 사고였는데도 그렇다. 지진이나 해일은 원자로를 한 기씩 골라서 덮치지 않는다. 그런데 위험은 여러 기가 함께 지고, 준비된 돈은 여섯 기를 합쳐 한 몫이다.
그 한도를 넘는 피해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가. 법은 정부가 원조할 수 있다고 정해 두었다. 결국 우리가 감당한다는 뜻이다. 사고가 나지 않으면 사업자의 실적이 되고, 사고가 나면 국민의 재난이 된다. 이런 계산법을 우리는 어디서 본 적이 있다. 81년 전 히로시마에서, 결정하는 사람과 감당하는 사람이 갈라져 있던 바로 그 방식이다.
그렇다면 누가 감시하는가
이쯤에서 자연스러운 물음이 나온다. 국제사회에는 이를 감시할 기구가 있지 않은가. 국제원자력기구(IAEA) 말이다.
그러나 IAEA 헌장을 펼쳐보면 이 기구의 임무가 두 가지임을 알게 된다. 하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촉진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전을 감시하는 일이다. 진흥하는 손과 규제하는 손이 한 몸에 붙어 있다. 게다가 IAEA는 유엔의 지휘를 받는 산하기구가 아니다. 총회에 보고할 뿐 통제받지 않는다. 1959년에는 세계보건기구(WHO)와 협정을 맺어 방사선의 건강 영향을 다룰 때 서로 협의하도록 했는데, 그 뒤로 WHO가 이 분야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졌다는 비판이 국제사회에서 끊이지 않았다.
이 기구가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 방출을 사실상 용인해 준 과정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원자력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 존립 근거인 조직에게 원자력의 위험을 판정하게 하는 일은,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이치와 같다.
국내 사정은 이보다 더 답답하다. 나라의 에너지 골격을 정하는 계획 앞에서 국민이 뽑은 대표기관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이 연재의 마지막 회에서 따로 살피겠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앞에서
1982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자연헌장은 제11조에서 이렇게 밝혔다.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활동은 피해야 한다." 이 정신은 2000년의 지구헌장 제6조로 이어졌다. 특히 눈여겨볼 대목은 그 '나'항이다. "어떤 행위가 치명적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쪽에게 그 입증의 의무를 지운다."
간단하고 상식적인 원칙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을 벌이려는 사람이 안전을 증명해야지, 걱정하는 사람이 위험을 증명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정확히 거꾸로다. 원전을 늘리자는 쪽은 증명하지 않고, 우려하는 시민이 위험을 입증하지 못하면 논의에서 밀려난다.
증명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원자력계는 노심이 녹는 사고가 십만 년에 한 번쯤 일어날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계산법을 세운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조차 자신들의 보고서에, 사람의 실수와 예상하지 못한 외부사건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으므로 지나치게 낮게 나온 값은 신중히 해석해야 한다고 적어두었다. 애초에 생각하지 못한 사고는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후쿠시마의 쓰나미가 그러했다. 안전을 증명해야 할 쪽이 내미는 숫자를, 그들 스스로 예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핵폐기물의 관리 기간은 수만 년이다. 그 시간 앞에서 5년 임기의 정부가 무엇을 대신 결정할 자격이 있는가. 원전의 가동 여부는 기술의 문제이기 전에 윤리의 문제다. 우리 세대가 누리겠다는 편의가 후손의 희생보다 앞설 수 있는가를 묻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합천의 위령제에서 영덕과 기장의 부지 결정까지, 81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이 있다. 결정하는 자리에 앉지 못한 사람들이 그 결과를 감당해 왔다는 것이다. 그 선을 끊는 일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이원영 leewysu@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