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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서울라면

작성자섬김나무|작성시간11.02.10|조회수195 목록 댓글 0

 

서울 라면             김일연목사

 

 

경북 영천, 산촌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은 늘 서울을 동경하며 살았다. 친구들과 만나면 이야기의 첫머리는 ‘서울’이다.

“너, 서울 가봤나?”

“아니, 못 가봤어.”

“그럼, 너는 가봤나?”

“나도 못 가봤다.”

 

 

또 하나의 화두가 있는데 그것은 ‘라면’이다.

“너, 라면 먹어봤나?”

“못 먹어봤다.”

“그럼, 너는 먹어봤나?”

“나도 못 먹어봤다.”

 

한 달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늘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 한을 풀기위해 초등학교 수학여행을 서울로 가기로 했지만 행사를 추진하시던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교직을 떠나면서 그 꿈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0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라면이지만 마을사람들 중엔 아무도 먹어본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마을 어르신들이 라면 맛을 보기로 결단하고 회관 앞 마당으로 모여 들었다.

 

마을사람 중에서 가장 문명과 세상이치에 밝은 분이 솔선하여 마당 가운데 있는 석유곤로에 불을 켜고, 드므에서 바가지로 물을 떠서 냄비에 부었다. 생전 처음 보는 라면봉지를 뜯어 꼬불고불한 면이 신기한 듯 빤히 들여다보다가 포장지의 설명서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는 드디어 획기적인 라면요리에 돌입했다.

 

비록 곤로불이 화력이 약하지만 심지를 돋우고 스프도 넣고, 라면도 넣고 최선을 다해 팔팔 끓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기대했던 라면 맛이 말이 아니었다. 곤로를 빙 둘러선 어르신들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 몇 가닥씩 건져 드시고는 싱거워서 못먹겠다고 하며 소금 가져오라고 호통을 친다. 아이들은 왔다갔다하는 냄비만 쳐다보며 침만 꼴깍꼴깍 삼킬 뿐, 그토록 싱거운 라면이지만 한 가닥도 맛 볼 수 없었다.

 

라면이 왜 그렇게 맛이 없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며칠 후에야 라면을 끓인 사람이 원인을 찾았는데 스프를 찢지도 않고 통째로 넣어 푹 고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덕분에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기념으로 50 원으로 인상된 라면을 사서 친구집 가마솥에 장작을 지펴 제대로 끓여 먹었던 그 날의 라면맛과 꿈을 이룬 그날의 감동은 아직도 생생하다.

 

세월은 흘러 까까머리는 장발이 되고, 산골소년은 청년이 되어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서울특별시에서 학교도 다니고, 사업하는 형님을 도와 일을 하며 살게 되었다.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 말이 생각이 났고 역시, 서울이 참 좋았다. 서울사람은 언어부터 품위있게 세련되고, 화장한 솜씨나 옷맵시도 달랐다. 무엇보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서울의 문화생활이었다.

영천장날 약장수공연 구경이 문화생활의 전부였는데,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관람하고, KBS2 TV 생방송 가요Top 10을 방청하기도 하고, 우리들의 천국 녹화현장을 구경하기도 했다.

 

주민등록증에 서울시로 시작하는 주소만 봐도 위로가 되고, 서울시민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마냥 좋았다.

여의도광장, 국회의사당, 창경궁, 덕수궁 돌담길을 걷기도하고, 종로에서 영화도 보고, 명동거리를 몇 시간씩 누비며 다니기도 했다.

남산타워, 서울역, 서울시청, 청와대 등 뉴스에서 영상으로 보던 것을 직접 찾아가서 보는 것이 참 재미가 있고 흥미로웠다.

주말엔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도 즐기고, 88년 서울올림픽 때는 88체육관에서 농구경기를 관전하기도 했다.

 

인구 천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

버스를 타도 교통체증, 지하철을 타도 혼잡하고, 오토바이, 승용차 그 무엇을 타 봐도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달리는 것이 없다. 서울은 밤 12시가 지나도 질주하는 자동차 소음은 멈출 줄 모르고, 밤하늘의 별조차 빌딩 숲에 가려 볼 수 없는 삭막함은 열대야보다 더한 갑갑함으로 다가왔다.

 

 

93년, 추석명절에는 승용차를 타고 고향집으로 내려가다가 하룻밤을 고속도로에서 뜬눈으로 보냈다. 25시간이나 걸려서 고향에 도착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정겹게 이야기도 못 나누고 잠만 쿨쿨 자다가 다시 귀경길에 올라야만 했다.

서울은 어느새 더 이상 흥미롭지도 않고, 서울에서 산다는 것이 위안은 커녕 도리어 피로를 주고 있었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람을 지을 때 나이 40 무렵에 위엣 것, 참 가치를 찾도록 우리를 창조했다. 내가 좋다고, 내 기분에 취해 서울에서 사는 것 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거룩한 명분이 내 마음을 이끌었다.

거창고등학교의 직업선택 십계처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기로 결단하고 나를 원하는 곳,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대구, 대구에서 청송, 부산, 진해를 거쳐 목회사역 20년 만에 함안으로 들어와 농촌에 개척교회를 세웠다. 함안에는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마음의 상처를 안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한부모자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좋은 이웃, 좋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상처입은 가슴 가슴마다 푸른 꿈과 소망을 심는 사역, 그 하나의 명분에 내 인생을 걸었다.

 

내 작고 작은 사랑을 통해 그들의 눈물과 상처가 치유되고, 내 작은 섬김을 통해 그들의 가슴에 위대한 꿈이 자라나고, 싱그러운 미소로 활짝 웃는 그 날, 그 곳이 바로 내가 그토록 소망했던 진정한 서울이며 유년의 향수 머금은 가장 맛있는 라면이다.

이게 바로 내 인생을 통해  꼭 맛 보아야할 ‘서울 라면’이다.

 

해와달 쪽지 2010년 12월호에 실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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