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 이상 서투룬 독수리타법으로 일일히 자판 두드려 정성을 다해 옮겨온 글 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정보와 글이 있지만 나에게 유익한 글은 많지 않습니다. 生死문제로 일평생 수도하는분들도 있습니다. 이 글은 원불교 성직자인 원불교 全二昌교무님의 죽음의 길을 어떻게 잘 다녀올까?글에서 옮겨온 글 입니다. 좋은 약은 입에 쓰듯이 좋은 글은 글은 딱딱하고 재미가 없습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평소에는 심신작용을 분명히 하고 일을 정확하게 처리 하여야하지만 사십이 넘으면 생사해결에 관계되지 않는 일이면 평소에 되도록 놓아 버리고 죽는 연습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놓아 두고 장차 이별할 육신은 저만큼 떼어 놓아 본다. 그런다고 떨어지는것은 아니다. 시해법(尸解法)이 트이지 않는 입장에서는 한갖 관념일뿐 실제로는 되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자꾸 갈라서는 연습을 하여서 육신에 대한 집착을 서서히 끊어가야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장차 어떻게 죽어가야할까 하는것을 염두에 궁글려서 죽음이 내 마음에서 예사로워지고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여 질수있어야 한다. 죽음이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기정 사실로 의식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기가 자기를 향하여 "열반 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문"을 가끔 읽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노르웨이에서는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게 죽음의 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꽃을 준비하여 묘지에 가서 그 꽃을 꽂아 놓고 사람이 죽으면 좋은곳으로 간다고 가르쳐서 죽음이 미지의 불안한 세계가 아니라 좋은 세계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고 한다. 유럽쪽에는 묘지가 우리들처럼 동네와 멀리 떨어져서 산 속에 있는것이 아니라 시내에 주택가에 있는것을 보았다. 죽음이 멀고 공포스러운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여 윤회를 모르는 입장이지만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도록 하는 좋은 방법인것 같다. 우울증 환자는 "어떻게 죽을꼬"하고 온 종일 자살할 궁리를 하기 때문에 사람이 항상 곁에서 지켜야 한다고 한다. 잠깐이라도 혼자 두면 일을 벌려서 죽는다고 한다. 여기서 어떻게 죽어 갈 것인가 하는것은 육신의 죽는 방법이나 장소를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곧 영혼이 어떻게 떠나가야 할 것인가를 연마하는 것이다. 누워서 몇 층 양옥을 설계할것이 아니라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어 버리고 빠져나가듯이 또 오랫동안 입어서 헐어빠진 다 낡은 헌옷을 벗어 던지듯이 이 육신을 벗어 버리고 영혼이 걸림 없이 빠져나갈수 있도록 연습 하고 준비하자는 것이다. 아침 저녁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의 시간을 가져서 죽음의 길을 잘 다녀 올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젊었을때는 천년이나 살 줄 알고 세월을 허송 하는데 ,절대 미룰 일이 아니라 공부는 젊어서 해 버려야 한다. 육조 스님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법통을 잇는 의발( 衣鉢)을 받았었다. 매일 같이 잠자리에 들때 "나는 죽는 시간이다"하고 세간사에 끌려가는 마음을 챙겨 청정일념,선정 일념으로 잠에 들어가야 한다. 내가 만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대로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걸릴것 없이 떠날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이 연습을 하루 이틀 한다고 되는것은 아나다. 계속해서 매일 같이 꾸준히 해야 언젠가 닥치는 실지 죽음에 다다라서 자연스럽게 떠날수 있게 되고 나의 삶 자체가 진실해지며 또한 수명이 더 보존될수도 잇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이 깊어가면 생사 없는 도리를 알아서 생멸 없는 열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죽음을 연습하라고 하여서 위기의식을 가지라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요사이 같으면 불의의 대형사고가 너무 자주 발생하니까 죽음에 대한 연습은 꼭 필요하기도 하다. 죽음을 연습한다고 하여 만에 하나 염세 주의자가 되거나 허무 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진실된 삶을 성실하게 살면서 생사없는 실상을 파악하여 생사를 해결하자는것이다. 생(生 )이나 사( 死)니 이야기 하면 큰 문제나 다루는것 같이 생각하고 생사 연마라 하면 보통 사람들은 못 하는 것으로 알기 쉽다.그러나 원래는 생사가 없는 것이다. 오는자가 가는자요,가는 자가 오는 자다 . 또한 죽는자가 곧 낳은 자요,낳는 자가 곧 죽는자다. 그러므로 생(生 )은 사(死 )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 생사가 하나요,생사가 없는것 이다. 심신(心身 )이 일여(一如) )해서 실상은 생하고 멸 함이 없는 것이요,참 나는 억만겁을 지내도 여여할뿐 죽음이란 없는것이다. 선인들은 죽고 나는것을 한 조각 구름이 떴다가 사라지는데에 비유 하였다.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생사거래 역여연 (生死去來亦如然)이라. 낳는것은 한 조각 뜬 구름이 일어나는것이요,죽는것은 한조각 뜬 구름이 사라진것이다. 뜬 구름 자체가 본래 실(實 )이 없는것 ,생사 거래도 또한 이와 같은 것 이라 했다. 한조각 구름은 떴다 사라졌다 하지만 허공 그 자체는 억만 겁이 지나도 여여한것 같이 이 육신이 낳았다 죽었다 하기를 수없이 거듭하지만 이 육신을 이끌어가는 참 나는 언제나 여여한 것이다. 원불교 대종사님께서는 생사가 눈을 떴다가 감았다 하는 것과 같고 ,숨 한번 내쉬었다 들이 쉬었다 하는것과 같다고 하셨다. 죽음이란 마치 해가 서산에 졌다가 이튿날 아침에 동쪽으로 뜨는 것 같고 저녁에 잠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는것과 같다. 저녁에 잠자는것은 죽는것이요,아침에 깨어나는 것은 낳는 것이다. 이렇게 일생 동안 몇 천번 죽고 낳지만 그렇다고 참 나가 영원히 죽어 없어 지는것은 아니다. 죽음이란 과거에 머물었던 고향으로 잠시 휴양하기 위해 돌아가는 것이요,새로운 삶의 여정에 오르는 것이다 .죽음의 길은 영원한 생명이 살아가는 한 과정이다. 나무가 아름드리로 크기로 하면 봄에 새 잎이 돋고 가을에 낙엽이 져서 한 연륜의 태를 이루고 또 그렇게 해서 나이테를 키워 아름드리 나무가 되듯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도 생로병사로 돌고 또 돌아서 불멸하는것이다. 새 싹을 준비하기 위하여 낙엽이 지는것처럼 죽음도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 떠나가는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못 당할일을 당한것처럼 불안하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죽음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여정이니 생사에 초연하고 생사가 없는 마음으로 생멸없는 진성에 들어 열반으로 가야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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